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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문학회지] 제122호
유덕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옥수수 술을 천천히 나눠 마신다. 짙은 눈썹과 깊이 팬 미간이 간간이 꿈틀댄다. 그 옆에 앉은 하늘하늘 부서질 것 같은 가는 허리의 목멱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다. 불을 다스리는 이 여인의 속을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절도 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네 무사는 곧 전쟁에 나설 것처럼 날이 섰다. “서각에 다녀오겠네.” 옆 탁자의 관리복색 남자가 동료들에게 뒷간을 서각으로 바꿔 농담을 던지며 일어섰다. 백성들에게는 흔한 비유였다. 냄새나고 더러운 측간. 그곳이 새 왕조 조선의 태조가 머물렀던 서각이란 뜻이다. 하지만 방보라는 이름의 이 사내는 두 가지 잘못을 했다. 우선 그는 말단일망정 조선의 관리였다. 두 번째가 결정적인데, 옆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은 인물들이 누군지 몰랐다는 것이다. 쉭. 바람처럼 검을 뽑은 것은 네 명의 무사 중 신극례였다. 슷. 신극례의 검은 먼저 방보의 상투를 잘랐다. 삭. 둘째로 도포 깃과 매듭을 자르고 도포를 칼끝에 꽂아 몸에서 벗겨냈다. 쉿. 이어서 저고리의 깃과 매듭도 끊어 바닥으로 떨쳐냈다. 슥. 마지막으로 바지 매듭을 잘라 칼 등으로 끌어내려 고쟁이가 드러나게 했다. 한순간 방보는 고쟁이 차림으로 벌거벗겨졌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 사지를 벌벌 떨며 멍한 눈동자로 신극례를 쳐다봤다. “극례야. 두어라.” 유덕이 달랬다. 그 말에 칼을 거두는 신극례의 모습 또한 절도 있었다. [조선 세종 4년, 섣달, 열나흘 날, 술시(戌時)] _1422년, 12월 14일, 오후 7시~9시 신극례은 일행 중 가장 늦도록 객점에 머물다 일어섰다. 주군을 모시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여섯 무사가 주군 유덕을 가까이 모셨다.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빈, 심귀령이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건 그들을 사람들은 귀심정안자(歸心靖安者)라 불렀다. 신극례는 객점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내부를 훑어봤다. 취한 자들 중에서 특히 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강릉향교의 교수와 그 수하들이었다. 특히 교수가 양쪽에 끼고 앉은 두 기생의 교태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주군과 함께 새 나라를 반석에 올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저런 무리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었다. 객점을 나오자 눈발이 얼굴에 들러붙었다. 신극례는 동쪽 객사로 돌아가기 전에, 무술 연습을 할 장소를 찾았다. 매일의 꾸준한 연습만이 육체와 정신을 녹슬지 않게 했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헤매느니, 차라리 원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성 싶었다. 대령원 입구를 향해 걷던 신극례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삼보 앞에 서서 자신을 보고 굳어버린 여인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손에 쥔 제등이 흔들렸다. 그녀는 바로 5년 전 다시 돌아가겠다는 허언을 남기고 떠나온 아내 내은가이였다. 실은 버리고 왔다. 그날부터 신극례는 따뜻함이나 다정함과 멀어졌다. 이유가 확실했다. 처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의 충신이었다. 그리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산골로 숨어들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새 왕조에 충성을 바친 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반역 행위였다. 신극례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떨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부부라는 이름은 남자의 일에 비하면 반딧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신극례는 아내와 세 살배기 딸을 버림으로써 처가와 다른 길로 들어섰다. 그는 아내와 딸을 사랑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주군이 보여준 세상을 믿었다. 또한 모든 걸 해결하는 시간의 힘을 믿었다. “어째서 이곳에….” 툭. 신극례의 단단한 소나무 가지 같은 손에서 제등이 눈밭에 떨어졌다. 신극례은 비로소 자신이 아내가 있는 집 울타리에서 몇 발짝 벗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의지가 부족해서일까? 아직 흘려보낸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일까? 최근 들어 차라리 더 깊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품안, 한 치 길이의 목각인형 두 개가 이를 증명했다. 저도 모르게 아내와 딸을 생각하며 장도로 깎아 만든 투박한 목각인형이었다. “더 이상 나라의 녹을 받지 않고, 집안의 재산은 거덜이 났으니, 입에 풀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둥근 얼굴에 가는 눈과 작은 입을 가진 내은가이가 나무 열매처럼 정직하게 말했다. “살림살이가 힘들었다면 내게 연락을….” 신극례는 말을 맺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고 스스로를 나무랐다. “허면, 당신은 이런 날, 이곳에 무슨 일인가요?” “비밀이오.” 신극례의 말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내은가이는 눈꺼풀을 길게 닫았다 떴다. “안부를 물었답니다.” “미안하오.” “하지만, 비밀이라 해도 당신이 아닌 누군가는 알고 있겠네요. 최소한 상대가 있어야 비밀이 있는 거니까.” “이 임무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오.” 신극례는 그답지 않게 두 번 사과했다. “늘 그랬죠. 비밀과 임무. 그것이 당신이 매달린 세상이죠.” 세은가이는 손에 든 등불을 들어 눈발이 바람에 날리는 밤하늘을 살폈다. “괜찮아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습니다.” “세은가이….” 신극례는 아내에 대한 정을 보이지 않을 때보다 더욱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미가 그 아이는 잘 있소? 올해가 지나면 아홉 살이겠구려.” “아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다 왔소.” 신극례는 급히 대꾸했다. “기약은 하지 마세요. 매번 그 말씀에 헛되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내 꼭 다시 돌아가겠소.” “그러시려면 그러세요.” 세은가이의 얼굴에는 희망의 기색이 없었다. “정말이오. 이번 일만 끝나면 꼭 달려가겠소.” 진심을 담아 신극례가 말했다. “어찌, 소주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먼 길을 돌아 만난 지아비에게 뭔들 아깝겠습니까? 팔지 않은 소곡주가 한 병 있습니다.” 신극례는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과 눈이 막아선 건물들 저 안쪽에 숙소가 있었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내은가이는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내은가이.” 신극례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대의 술을 받아야겠소. 다만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오.” “다시 이별주를 따르게 되었군요.” 끼에-. 두 사람의 마음을 달래듯, 어두운 하늘에서 매가 울었다. “주군. 아휘가 왔어-.” 벙글벙글 웃는 남자가 대령원 동쪽 객사의 대문을 열어젖히며 크게 외쳤다. 유달리 덩치가 크고 근골이 강한 자다. 동그랗고 작은 눈이 약간 사시였다. 그는 유덕의 여섯 무사 중 백년을 산 나무도 뽑아낸다는 심귀령이었다. 그의 팔목에 날카로운 부리의 매가 앉아있었다. 유덕과 이거이, 서익이 대청마루로 나왔다. 천장에서 내려온 잡을끈을 쥔 유덕이 눈짓을 하자, 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펼쳐 날았다. 매는 화살처럼 지붕 속으로 들어가 유덕의 오른 팔을 움켜쥐었다. “아휘, 잘 있었더냐?” 검은 수염에 감춰졌던 유덕의 붉은 입술이 미소와 함께 드러났다. 끼. 영민한 아휘가 울음으로 대답했다. 유덕은 아휘의 다리에 묶인 전서를 풀었다. ‘至.’ 이르렀다는 뜻이다. “조영무와 문빈이 반정에 도착했다.” 유덕은 그를 둘러싼 수하들을 둘러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반정은 대관령과 횡계역 사이의 장소로 주막이 있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주군.” 서익이 이어 말했다. “이 눈에 과연 날짜에 맞춰 반정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조영무는 너희들 중 가장 준비성이 좋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 반정의 주막에서 배를 채우게 한 후에 준비해둔 은신처에 잠시 머물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려의 잔당들은 틀림없이 거래가 끝나기 전 아이를 훔쳐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곳보다는 그곳이 안전합니다.” 문무를 겸비한 서익이 대답했다. 그는 생각이 깊고 일처리가 확실했다. “위험한 물건일수록 품안에 넣고 다녀야 사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군.” 얼굴과 목을 비롯한 전신이 길쭉하여 한 자루 창을 닮은 이거이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는 그의 검은 눈알은 마치 곤충처럼 기이했다. “귀령은 어떠한가?” “유덕, 뜻대로 해요!” 심귀령이 다짜고짜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그는 모든 결정을 주군과 동료들에게 맡겼다. 자신의 무식함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가 제일 지혜로운지도 몰랐다. “그럼, 두 사람의 의견을 다 따르도록 할까?” 유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차피 어두운 밤이니 지금 움직일 수야 없지 않은가? 또한 먼 길을 힘겹게 달려왔으니 휴식이 필요하겠지.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발하라고 해라.” “앗. 맞다! 역시 주군이야!” 심귀령이 육중한 몸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반면에 서익은 걱정한다. “주군. 반정은 이곳에서 멀지 않지만, 눈이 쌓여 길이 지워지고, 눈에 가려 길을 찾기 힘들며, 또한 이제 더는 말이 달릴 수 없어 시간을 잡기 어렵습니다.” “안다. 그러하니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할 것이다. 허면 아무리 늦는다 해도 사시 반각(巳時, 오전10시)에는 당도하지 않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아휘를 보내도록 전하라.” “네. 주군.” “저기, 유덕 주군. 심귀령은 이상해요.” 심귀령은 좁쌀눈을 연달아 끔벅였다. “뭐가 의심이 가느냐, 귀령아.” 유덕은 심귀령을 보며 다정하게 되물었다. 수족과 같은 여섯 명의 무사들 중에서 심귀령은 가장 힘이 세고, 가장 거칠 것이 없었고, 또한 가장 순수했다. 그래서 거짓 없는 말과 행동이 자주 문제의 핵심을 드러냈다. “우리가 납치한 소년이 공양왕의 자손이라고 믿을 수 있나요?” 심귀령의 질문에 다른 이들도 유덕에게 시선을 모았다. 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왕 씨들은 용의 후손이라 하여 몸에 용린(龍鱗, 용의 비늘)을 가지고 태어난다지 않습니까. 저는 공양왕의 몸에 비늘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서익이 말했다. “용의 후손이라니…. 하하하.” 유덕은 크게 웃더니 뚝 멈춘다. 그리고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속삭인다. “내 공양왕의 뒷목에 용린이 있는 걸 보았다는 말을 아버님께 들은 바 있다. 그리고 이번에 잡은 그 아이의 뒷목에도 있었다.” 유덕은 놀라는 수하들을 향해 큰소리를 치며 묻는다. “목멱과 극례는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느냐?” “목멱은 잠시 원 바깥을 살피겠다고 했습니다. 신극례는 이 시간이면 늘 수련을 합니다.” 잠자코 있던 이거이가 말했다. “하하, 극례는 이 날씨에도 대차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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