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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봉당] 시대(時代) 05 제24화
상감 당신의 할머니 간청대로 그분의 사촌 동생이 되는 한치형을 영의정에 앉힌 뒤부터 방약무인(傍若無人)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임사홍과 죽이 맞아 사사건건 대왕대비전의 권위를 훼손하려고 들었다. 임사홍은 승정원에 승지로 있는 동안 상감의 생모가 폐위되는 것을 극구 막으려고 한 고굉지신이었다. 그런 임사홍이 상감의 수족으로 자처하였다. 임사홍의 말 한마디면 상감은 기꺼이 들어주었다. 임사홍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제집이 대궐과 가까운 위치에 놓인지라 상감의 거처인 창경궁과 임사홍의 집 사이에 길을 터놓아 은밀히 한밤중에 드나들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술 더 떠 창경궁 북쪽 널따란 공터에다 경회루(慶會樓)에 맞먹는 규모로 연회를 베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도록 분부하니, 이를 서총대(瑞臺)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감은 당신이 총애하고 있는 녹수를 제안대군의 사저에서 나오게 하여 궁궐에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일약 숙원이라는 직첩을 내려 후궁으로 삼아버렸다. 인수대왕대비로서는 결코 용납하기 힘든 처사였다. 더 나아가 자신의 수족을 착실히 할 법한 작은며느리인 자순대비가 결국 자신의 뒤를 후려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진성대군이 결국 신수근의 사위가 되었으니, 인수대왕대비에게 몰락으로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걸 모른 채 영의정 한치형에게 충동질하여 상감을 폐위하라는 밀지(密旨)까지 내렸다. 그러나 조정대신 그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미 욱일승천하는 상감의 권세를 그 누가 꺾을 수 있었을까. 조정 공론에 붙이세요. 대왕대비의 말씀에 마마.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못하시겠다는 겁니까. 대왕대비전의 물음에 주상을 탄핵할 수 없습니다. 치형이 자포자기하였다. 어째서요? 따져 물을 기세다. 명분이 약합니다. 기막혀하는 쪽은 대왕대비 쪽이었다. 코웃음을 치며 대왕대비는 말을 이었다. 명분이 약하다니요? 주상께서는 큰어머니를 범하는 패륜을 저질렀고, 죄 없는 궁녀를 살육했으며 내 처소에까지 환도를 들고 쳐들어와 위협했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대궐 안에까지 기생들을 불러들여 연횔 베풀고 법도를 어겨 한낱 기생을 숙원으로 삼았으니 이는 열성조를 욕되고도 남거늘 어째서 명분이 없다는 말입니까. 조정의 중신들이 움직여 주지 않사옵니다. 오라버니, 내가 이미 밀지를 내리지 않았습니까. 왕실의 어른은 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망설인단 말입니까, 그 하많은 유생들은 무얼하고 있답니까. 예의와 법도를 제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무리들이 이럴 때는 왜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겁니까. 인수대비의 노성(怒聲)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손가락질하기에는 인수대비의 힘은 아직 남아있었다. 상감이 그간의 저지른 일을 보고도 눈감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치형은 좌불안석이 되어 있었다. 밀지를 내리고도 효험(效驗)이 없게 되자 인수대비는 발악(發惡)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릅니다. 나는 진성을 원합니다. 어젯밤 일을 오라버니께께서 보셨더라면 내 참담한 심정을 아실 겁니다. 광인입니다. 주상을 미쳤어요. 주상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도 않고 맨정신으로 내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오라버니, 명심하세요. 생사 간에 이번 일을 매듭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치형과 신승선을 모두 잃은 뒤부터 인수대비는 자리에 눕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금상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한편 금상은 임사홍에 이어 유순(柳洵)을 불러들였다. 유순은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하게 됨을 알고 상감에게 아첨(阿諂)하였는데 이때를 계기로 상감의 눈에 들었다. 제안 당숙을 불러들여 임금이 그에게 회포(懷抱)를 털어놓는 일 또한 매우 많아졌다. 서총대에 불러들여 제안 당숙에게 당숙께서는 내가 왕 다운 왕이라고 생각하시오? 여전히 난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시지요. 할마마마도요. 그러나 뒤돌아서서는 나를 몰아내려고 궁리하고 있습니다. 진성이 살아남는 한.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는 동안 형제와 형제가, 아버지와 아들이, 심지어 증조부이신 세조대왕께서도 그러셨죠. 자기 조카를 죽이셨지요. 당숙은 어떠시죠. 당신께서는 내 자리가 탐나지 않으십니까. 불안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제안은 너털웃음으로 탐나지요. 탐나는 자리고 말고요. 주상께서는 소신을 의심하십니까. 솔직하면서도 자신을 더욱 낮췄다. 권력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허망합니다그려. 하마터면 내가 대왕대비를 해칠뻔했어요. 불쑥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그려. 중전도 탐욕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어 꼴 보기 싫어지면서도 치를 떨었지만, 그러나 그 탐욕이 내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겉으로 몸을 낮추고 있지만 내 등 뒤에다 비수를 들이대는 것 같아 미치겠어요. 그것이 내 눈에 보입니다. 도대체 이 왕 노릇을 어떻게 맘 놓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숙, 답답합니다. 연산군은 대권을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심리적 불안이 시시때때로 몰려왔다. 그 불안감은 오히려 인수대왕대비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불쑥 풍겼다. ―갑자년(甲子年) 그날 밤. 인수대비전에 상감은 어김없이 환도를 쳐들고 찾아왔다. 임사홍의 간사함에 놀아나 죽은 폐비윤씨의 생모를 직접 불러들여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당신의 생모를 폐위시켜 죽이는 데 일조했던 정귀인과 엄귀인을 도륙하고 젓갈로 만든 일은 누구나 알 일이었다. 그 이면에 장녹수가 연루된 것 또한 말할 것도 없으리라. 인수대비는 그날의 패륜을 겪고 난 뒤 경춘전(景春殿)에서 편히 눈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네가 그러고도 임금이더냐!) 인수대비의 절규가 허공에다 부르짖듯.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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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