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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사무엘 제10화
다시 판관의 자리를 돌려받은 사무엘이건만, 사무엘의 가슴 속에는 하느님에 대한 서운함과 함께 원망 또한 같이 들었다. 한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예언을 콧등으로 뀌며 설마하니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하였던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다시 돌려받은 판관의 자리는 어느새 한낱 골칫거리로, 허울뿐인 자리로 되돌이키신 하느님에 대한 원망으로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그 분심(分心)! 사무엘을 한낱 사람의 무기력함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진위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은 늙어가는 사무엘을 더욱 괴로움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하느님 참으로 야속하십니다. 저를 구렁텅이로 내팽개치시고 나 몰라라 하시다니.’ 사무엘은 당장에라도 죽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고 넘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권위가 실추된 것을 빌미로 삼아 새로운 움직임을 이끌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고 보면 덤덤할 수 있을 법이지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힘마저 다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 때 무기력함은 더해갈 뿐이었다. 한번은 사무엘이 직접 성전에서 하느님의 궤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어떤 지파에 속한 남정네 두 명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한 남정네는 곱슬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해 나이가 많아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핼쑥하고 나이가 매우 어려 보였다. 두 남정네 모두 명색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수장으로서 지키고 있는 사무엘이니만큼 그를 극진히 대하는 모습을 취했다. “사무엘 어르신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어르신의 꾸지람을 무릅쓰고 직접 찾아뵌 것입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하찮은 저희의 말을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정네가 사무엘의 의중을 떠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묵묵히 계약 궤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 사무엘은 한낱 무능한 늙은이라오. 그러니 나를 더욱 찾을 필요가 없는데 무엇하러 나를 찾아오셨소?” 사무엘의 무기력한 대답만 그저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두 남정네는 어찌 된 영문인지 쉽사리 물러날 생각을 않는 것이다. 이때 두 남정네 중 얼굴이 핼쑥한 사람이 발 벗고 나서며 사무엘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사무엘 어르신, 어르신께 말씀드릴 게 있어 찾아온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우리 주 하느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아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위(安危)를 그 누구보다 걱정하시고 근심하시며 마치 가족들처럼 도우셨음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러나 어르신의 넓으신 마음을 본받을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된 세태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야말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들과 같습니다.” 사무엘도 한낱 사람인지라 “나보고 어찌하라고 자네들이 나서는 건가? 나는 보다시피 힘이 없는 한낱 꼬부랑 늙은이일세. 이런 내게 요구할 양이면 썩 나가시게!” 하며 격앙을 띠는 것이다. 아니 그의 목소리 속에는 울분이 가득차 있었다. 여기에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나 두 남정네는 어찌된 영문인지 한사코 물러날 생각을 않는다. “당신께서 이미 성령을 받으셨으니, 당신의 깊으신 지혜로 어르신을 대체할 새로운 지도자를 찾아보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수염 많은 남정네가 불쑥 뱉은 말이 사무엘의 귀에 들어왔을 때, 무언지 모르지만 그럴 법한 말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우문현답(愚問賢答) 그 자체였다. 이렇듯 자신을 찾은 두 남정네가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딴은 그러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판관으로서 통치하는 동안 하느님의 성총(聖寵)은 더욱 깊어졌고 덩달아 과분하지만, 자신의 식솔들이 배 불리 먹고 살도록 도와주신 하느님이 아니셨던가. 그 생각이 스칠 때 수염 많은 남정네가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생각하십시오. 저희 조상인 모세 또한 어르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을 때 그분의 장인인 이트로라는 노인이 몸소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공동체의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라고 직언을 아끼지 않았잖습니까? 그래서 장인의 말을 받아들여 모세가 직접 백인 대장이니, 천인 대장이니 하는 직분을 나누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를 상량(商量)하신다면 어르신이야말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염 많은 남정네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리기는 했다. 삶의 연륜이 나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사무엘의 귀로 듣기에도 결코 틀린 소리를 한 것 같지 않았다. 두 남정네가 진심으로 하느님의 진실한 어린 양처럼 느꼈다. 두 남정네의 말을 듣고 기특하게 생각한 사무엘은 제 품에 있는 동전 몇 닢씩을 손수 쥐여주어 보냈다. 이후 성전에 되돌아온 사무엘이 계약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순간 불쑥 ‘내가 모세 어르신처럼 너무 옹졸한 것이 아니었나. 오로지 나한테만 책임이 따른다는 것으로 잘 못 이해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짐을 떠넘긴 것이 아니었던가. 딴은 그랬지. 내 자식들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솔하게 한 것이 오히려 옹졸한 생각이었다. 그것이 내 딴에는 최선으로 생각한 것이 내 실책이었다.’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엘의 이런 심경의 변화를 아신 모양인지 어린 시절처럼 메아리와 같이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러자 사무엘은 ‘예, 여기 있습니다.’ 하며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졌다. ‘어제 두 사람의 말을 내가 묵묵히 들어보았다. 네가 생각한 것처럼 나 또한 사무엘 너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리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고 본다.’ 그러자 사무엘이 하느님께 물어본다. ‘당신께서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셨다. ‘네가 오랫동안 젊음을 바치면서 내 성막을 지키는 정성을 다했으니 그 정도로 충분하다. 그래서 한 가지 당부해보고자 한다.’ 하시며 당신께서 손수 사무엘에게 지혜의 영을 보내셨다. ‘사무엘아, 성전 안에 네가 내 이름을 걸고 성별(聖別)한 기름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곧 사무엘이 사제로서 직접 성별 해 둔 올리브기름을 두고 한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들은 사무엘의 눈은 어느 순간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네, 기억납니다.’ ‘그렇다면 우선 임금으로서의 자질이 될 만한 자를 수소문해서 찾아라. 그렇게 하다가 내가 지목한 자를 선택한다면 그를 불러다 네가 성별 해 둔 기름을 그의 머리 위에다 부어주어라.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우두머리로 삼는 표징(標徵)이 될 것이며,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서 기름 부음 받은 이라 기억될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의 별칭(別稱)으로 불리게 된다. 나이가 들어 몸이 노쇠함에도 하나를 깨우치면 열을 아는 사무엘이었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 ‘단, 조건이 있다. 너는 이스라엘 온 땅을 찾아 헤매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네가 가는 길마다 나는 항상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사무엘아, 그저 안심하고 기름 부음 받은 이에 적합한 자를 찾는 데에 온 전념(專念)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임무다.’ 사무엘은 그제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옹졸한 생각이 하느님의 가슴을 아프게 했음을 생각할 때 가시에 찔린 아픔보다 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사무엘 자신의 조상인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항상 주님께서 관대하게 대하셨다. ‘사무엘아, 왜 그러느냐? 사람은 겪어봐야 안단다. 내가 항상 너를 더욱 사랑한단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다정한 말씀으로 사무엘을 다독여주시는 하느님이셨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사무엘은 노구(老軀)의 몸을 이끌고 시종들 몇 사람과 함께 짐을 꾸려 하느님의 말씀 따라 머나먼 여정(旅程)의 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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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