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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봉당] 시대(時代) 05 제23화
금상은 무오년의 옥사를 통해 권세를 얻었다. 욱일승천하는 그 기세대로 왕권을 확립하기는 했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헛헛함이 남았다. 이때 만난 것이 장녹수였다. 장녹수는 뻔질나게 임사홍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더니 이제는 제안대군의 눈에까지 들어 제안대군 사저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제안대군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된 장녹수의 춤 실력은 마치 날개를 활짝 펼치며 춤추는 학(鶴)과 같은 모습이었다. 왕의 헛헛함은 급기야 우울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쪽짜리 권세였다. (할마마마는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이다.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지. 그래, 내 어머니를 죽이라고 대신들에게 충동질시키신 분이 아니시던가. 나는 내 속을 드러내지 않고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당신 시아버님의 억울함은 중하고, 내 어머니의 억울함은 그저 하찮은 것이라고 보시는 건가.) 여기에 보태듯 중전 신씨(愼氏)도 임금의 정사에 간섭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정사를 다스리는 임금의 체통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현재 임금의 지근에는 두 명의 노신이 우뚝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인수대왕대비의 사촌오빠 한치형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임금의 장인 신승선이 바로 그들이었다. 한치형은 세조 때부터 인수대왕대비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도 동시에 폐비 사건에 미온적인 대처를 한 사람이었고, 신승선은 명색이 임금의 장인이었지 실권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죽반승(粥飯僧)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임금의 말이라면 그저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충신 노릇을 하면 장땡이라는 단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존재가 있었기에 금상과 대왕대비와의 사이가 팽팽한 실처럼 견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안대군의 부탁도 있고 해 임금이 야행을 틈타 대군의 집에 거둥하였다. 인혜대왕대비가 하세한 뒤 대궐 출입을 종내 안 하는지라 임금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친히 나섰다. 제안대군은 울적해하는 임금을 위해 자그마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기생을 네댓 명을 불러들여 춤과 노래를 임금에게 선사했는데 이때 본의 아니게 장녹수가 이 대열에 껴들었다. 녹수에 대한 첫인상을 실록 등과 같은 기록에서는 평범한 얼굴로 묘사하고 있지만, 금상이 보기에 매우 쓸모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저 아이가 누구요? 당숙에게 물어보는 임금의 시선이 녹수에게 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녹수는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쁘기도 했다. 녹수를 바라보는 임금은 황홀경(惚境)에 빠져 있었다. 녹수의 눈매를 보니 아미(蛾眉)와 같고, 입술은 마치 앵두 빛처럼 영롱한 것이 임금의 마음을 능히 사로잡고도 남았다. 녹수를 바라보는 임금의 눈빛은 예전 같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폐비로 삼아 대궐 밖에 내쫓겨 비명횡사하다시피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희미하게나마 기억 저편에 잠재해 있었다. 그런 임금의 폐부가 녹수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오, 저 아이요? 역시 눈치 빠른 제안대군이 임금의 눈길을 따라 녹수를 바라본다. 임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저 아이 이름이 녹수라는 아인데,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하다못해 가야금은 기본이요, 북도 장구도 못 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능통한 아이지요. 보기보다 명석하고 제법 영리합니다. 저 아이는 본래 풍천위 대감의 집에 있던 종이었는데, 풍천위 대감이 별안간 내게 저 아이를 거두어줬으면 하고, 신신당부하였지요. 아 그래서 부득이 제가 곁에 두고 있었던 겁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제안 당숙의 말에 임금은 자못 솔깃했다. 제안 당숙의 눈썰미는 제법입니다그려. 어느 누가 감히 당숙의 눈썰미를 따라가려고 하겠습니까? 기왕 말이 나와서 말이지. 활치옹을 불러다 놓고 잔치를 실컷 했으면 좋겠구려. 아, 까짓거야 좋지요. 임금으로부터 활치옹이라 놀림 받는 임사홍을 제안대군을 통해 불러들여 중용(重用)하자, 임사홍은 네 활개를 치듯 버젓이 임금의 수족 노릇을 자처했다. 금상은 이렇듯 임사홍을 무한히 신임하니, 자연 녹수를 보기 위해 임사홍의 집을 야음을 틈타 수시로 드나드는 빌미가 되었다. 이때 왕의 장인 신승선은 중전 신씨의 강권에 따라 영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인 것은, 중전의 큰오빠 신수근(愼守勤)이 도승지로 임금의 지근을 맡게 되었다는 점이고, 더 나아가 신수근의 딸이 금상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의 혼처 감으로 점지되었던지라 왕실과 겹사돈을 맺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게다가 진성대군은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아들이지만 그럼에도 임금은 친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자순대비는 성종대왕의 정비였지만, 임금을 친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따뜻한 성품으로 인자하게 대해왔다. 그러기에 형제간의 반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자순대비는 중전 신씨에게 입버릇처럼 며느리이기에 앞서 친딸 같은 정을 느낀다며 친근함을 드러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인수대왕대비의 몰락은 예견된 수순인지 모른다. 이런 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수대비는 정귀인과 엄귀인을 제 수족으로 삼아서 공연한 잔꾀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중전은 친정아버지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큰오빠를 은밀히 불러들여 진성대군에 대한 혼사를 진지하게 의논했다. 중전이 큰오빠의 의중을 묻자, 신수근은 대비전과 사돈을 맺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주상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걱정입니다. 신승선은 신승선대로 진성대군은 대왕대비께서 각별하게 아끼시지 않습니까. 주상께서 좋아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왕대비의 속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입맛을 다시든 신승선을 보고 나야 뭐 압니까. 아녀자의 몸으로써 알지 못하기는 합니다만, 한 가지 염려스러운 건 행여 진성대군이 주상의 박해를 받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부인이 되는 현주(縣主) 또한 난색을 표했다. 현주는 임영대군의 큰따님이었으며, 비록 왕실의 곁가지였지만 왕실의 속사정을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상께서 좋아하실 일이 아닙니다. 융통성 없는 신승선의 말을 막듯 중전은 결단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혼사를 진행 시키세요. 그러는 동안 대왕대비전과 대전의 관계가 부드러워집니다. 그에 맞춰 아버님께서 이때 모든 권력에서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래야 좌상인 한치형 대감 또한 제힘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실 겁니다. 좌상이야말로 대왕대비전의 유일한 수족이지요. 머지않아 대궐에 큰 변란이 일어날 겁니다. 주상께서는 임사홍을 중용하여 시시때때로 불러들이고 있어요. 임사홍이 누굽니까? 유일하게 폐비의 부당함을 간해 부르짖은 신하였지요. 선왕께서 한 번 폐비 전교를 철회한 일이 있었지요. 그것은 임사홍의 주청이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생각해 보세요. 임사홍에게 주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폐비지요. 중궁의 혜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신승선은 폐비 사사 당시 현직에 몸담은 관리였다. 행여 자신의 친정에 화가 뻗칠 것을 미연에 막고자 한 것이다. 신승선이 부복하여, 임금에게 사임하고 물러나자, 여기에 휩쓸려 한치형 또한 덩달아서 사임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놀라며 펄쩍 뛰는 이는 다름이 아닌 인수대왕대비였다. 인수대비는 마치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 낙심해 있었다. 더 나아가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진성대군이 신수근의 사위가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중전과 대왕대비전의 중간에 놓인 상감으로써는 매우 괘씸했다. 하지만 대왕대비전의 숨구멍은 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감은 심사숙고한 끝에 한치형을 영의정에 앉혔다. 상감은 (흥, 그까짓 거 허리를 한 번 더 굽혀주마. 그러나 기회는 이것뿐이다.) 이제 대왕대비의 가슴팍에 비수를 들이대리라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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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