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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사무엘 제14화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아 옥좌에 오른 사울은 자신의 본거지 기브아를 수도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십 년이 지나는 동안 사울의 치세는 태평성대를 구가(謳歌)하였다. 사울의 아들들 또한 덩달아 자라났다. 사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맏이 요나탄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요나탄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았는데 의협심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의 이민족들을 모두 토벌할 정도로 용맹하기도 해 온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은 처지였다. 그리고 그는 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기도 하였던 만큼 아버지인 사울 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또한 아버지 사울이 그랬듯이 하느님을 굳게 믿었으며 사무엘에게도 세례를 받을 정도로 신심이 매우 돈독했다. 이스라엘의 정세가 이렇듯 차츰 안정되어 가자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고별사를 남겼다. 성경에 따르면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남겼다고 전한다. “나는 여러분이 나에게 청한 대로 여러분의 말을 다 들어 주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을 세웠소. 이제부터는 이 임금이 여러분을 이끌 것이오. 나는 늙어 백발이 되었고 내 아들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소. 나는 젊어서부터 이날까지 여러분을 이끌어 왔소. 여기 내가 있으니 나를 고발할 일이 있거든, 주님 앞에서 그리고 기름부음받은이 앞에서 하시오.” (사무엘기 상권 12,1ㄴ-3) 사무엘은 이제 자신의 모든 권세를 내려놓고 평범한 백성들 사이로 다가갔다. 그럼에도 사울과 그 아들 요나탄은 이스라엘의 원로로서 그를 깍듯이 대했으며 나라를 다스릴 때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는 했다. 한번은 사무엘이 아말렉족과 싸움을 앞둔 사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이에 대한 광경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길,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곧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올라오는 길을 막았던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을 벌하겠다. 그러니 너는 이제 가서 사정없이 아말렉을 치고, 그들에게 딸린 것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를 다 죽여야 한다.’” 사울이 군사들을 소집하여 틀라임에서 사열해 보니, 보병이 이십만이었고 유다에서도 장정 일만이 가담하였다. (사무엘기 상권 15,1-3) 이윽고 사울은 사무엘의 예언을 듣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아말렉을 치러 원정에 나섰다. 이때 카인족과 군사협정을 맺었다. 카인족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한 조치였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아말렉족의 영토를 정벌할 수 있었다. 이 아말렉족은 본래 이스라엘 민족과 오랫동안 견원지간으로 지내는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이스라엘의 국경에 자주 침범하여 그곳 주민들을 살해하거나, 그곳 주민들의 생필품들을 약탈하기도 하여 마치 도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국경 수비의 명목을 가지고 아말렉족을 토벌할 수밖에 없었다. 사울이 앞장서서 아말렉 국경에 다다라 뒤돌아보며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나의 제군들이여, 들어라! 저 아말렉은 우리 동포들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모독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저 간악한 아말렉을 쳐 없애야만 한다! 하느님이 이들을 응징하라고 응답하셨다. 저 아말렉의 씨를 없애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말한다. 제군들이여, 아말렉이 이 땅의 자취를 감출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싸우자!” 이에 호응하여 사울의 온 군사들은 사울의 진두지휘 아래 아말렉의 온 영토에 이르러 토벌에 나섰다. 갑작스러운 이스라엘 군대의 등장에 아말렉의 온 백성들은 혼비백산하여 피신하는데 정신이 없고, 이스라엘의 재산을 착취한 것을 가지고 흥청망청 사치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아말렉의 왕 아각은 자신의 궁전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다. 이때 다급하게 왕궁에 군사 한 명이 나타나서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이곳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어서 피하시지요!” 하며 소리치는데 아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럴 리가 있느냐. 이스라엘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잠꼬대 같은 소리로 치부했다. 그러나 재차 그 군사는 다급한 어조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뒤이어 아각의 신하 한 명이 급히 뛰어와 전령(傳令)을 아뢰자 비로소 아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하여 궁인들을 거느리어 피신하고자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스라엘의 군대와 맞닥뜨린 뒤 아각은 생포되고 신하들과 궁인들, 그리고 아각의 온 백성들은 모두 이스라엘 군대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스라엘 군대의 칼날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며 아각은 치욕을 느껴야만 했다. 이후 아각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양손을 포승(捕繩)에 묶인 채 이스라엘 영토에 끌고 갔다. 이에 더해 양 떼를 비롯해 진귀한 금은보화를 모두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이것이 사단이 될 줄 정녕 몰랐다. 이것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매우 부정한 것임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부정한 것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다. 이것이 사단이 되어 사무엘에게 주님의 천사가 찾아와 말했다. “사무엘아, 네가 손수 성별한 왕 사울이 군사들과 함께 부정한 것을 거두어들여 이곳으로 가져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노기를 띠셨다. 그러니 네가 직접, 사울 왕에게 찾아가 이를 간언(諫言)하도록 해라.” 사무엘은 이 말을 듣고 사울 왕이 도성에 도착한 대로 직접 찾아가 알현하였다. 사울은 어김없이 사무엘을 정중히 모셨다. “그래, 경께서는 어쩐 일로 나를 찾으셨소?” 하자 사무엘이 부복하여 이렇게 물어보았다. “제 귀에는 양 떼의 울음소리와 소 떼의 울음소리가 같이 들리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사울이 이에 대해 “아말렉족에게서 끌고 온 것들입니다. 군사들이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아껴 둔 것이지요. 그 밖의 것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때 사울 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간언하는 사무엘의 얼굴에서는 당혹함이 역력했다. 사울 왕은 이에 대해 대답했다.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소. 주님께서 내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앴소.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뿐이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하지만 이런 사울 왕의 변명을 듣고 사무엘의 어조가 단호해졌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것과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사무엘의 돌변에 사울 왕이 몹시 놀랐다. 권위에 앉은 것이 이토록 달콤했던 것일까. 사무엘의 냉정함을 보고 권좌를 벗어 던지고 사무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죄를 지었소. 주님의 분부와 어르신의 말씀을 어겨 군사들을 통솔하지 못하였소. 그러니 부디 내 죄를 용서하시오.” 애원하며 비는 사울 왕의 모습을 보고도 사무엘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사울 왕을 향해 간언을 멈추지는 않았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임금님에게서 찢어 내시어, 임금님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분은 거짓말을 하거나 뜻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완강한 어조를 띤 사무엘의 간언을 듣고 사울은 “내가 죄를 지었지만 내 백성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체면을 세워주셨으면 하오. 나와 함께 주 어르신의 하느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시오.” 하며 체통을 내팽개치며 손을 싹싹 빌었다. 사무엘은 한낱 사람인지라 “좋습니다. 대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말렉에게서 거두어들인 양과 소 가운데 저절로 죽은 것을 빼고, 새김질하는 모든 짐승을 정결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누어 먹이시고, 저절로 죽은 것은 이방인에게 나누어 먹이시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아말렉에게서 취한 모든 금은보화는 그 본래의 주인에게 돌리십시오. 이는 주님 당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하며 관용을 베풀자, 사울 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했다. “또 한 가지 청이 더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사울 왕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 알겠소! 내 무엇이든 다 하리다.” 어느새, 사울 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사무엘은 어느새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 손으로 끌고 온 아각의 목을 당신 손으로 베십시오.” 사무엘의 목소리는 사울 왕의 정전(正殿)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사울 왕의 권세도 사무엘의 우렁찬 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사울 왕은 사무엘의 야단치는 소리를 묵묵히 듣는데 어느새 굵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군대로 하여금 군율을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늙은이의 청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정 뵙고 싶으시거든 그 더러운 때를 벗어던지는 마음으로 정결히 하시어 하느님을 찾아가시어 용서를 비십시오.” 사무엘의 직언을 묵묵히 들은 사울 왕은 바로 다음 날 신하들을 모두 불러들여 아말렉의 전왕(前王) 아각의 처형을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무엘은 몸소 예배당을 찾아가 하느님 앞에 나아와 울분을 터뜨렸다. 사울 왕에게 단호한 어조로 간언한 사무엘이 아니었던가. 사무엘의 울음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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