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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사무엘 제09화
사무엘은 삼십 년 넘게 온 이스라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다. 틈틈이 주님께 기도를 드리며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영육을 희생해 왔다. 그 열정에 힘입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필리스티아를 비롯한 주변의 오랑캐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온 땅에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무엘에게도 세월은 결코 비껴가지 못하였다. 왕년(往年)의 삼손 또한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한낱 동네의 하찮은 늙은이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늙어가는 사무엘을 결코 당신 손으로 놓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끊임없이 지혜를 가져오셨다. 하지만 정작 오랫동안 판관 노릇을 하면서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힘에 부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마누라의 성화도 있고 하여 두 아들에게 자신의 판관 임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그랬는데 이 사무엘의 두 아들이 공연한 말썽을 피우더란 소문이 퍼져갔다. 보다 못한 마누라가 나서서 두 아들에게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였건만, 성전에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게으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겪는 재산분배 문제라든가, 하다못해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이르는 업무들을 사무엘보다 일을 잘 못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대놓고 “저 양반 노망(老妄)이 나셨나? 마치 자기가 무슨 임금 행세라도 하는 양 제 두 아들을 앞세우고 잇속을 챙기려는 게 아닌가?” “어디 망령(妄靈)이 났다 뿐인가? 성전에 예배드릴 때 모아들인 헌금(獻金)을 갖다가 제 뱃속으로 처넣는다는 소문도 못 들었나?”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두 아들 모두 버젓이 처자가 있는데, 몰래 첩을 들여서 음탕한 짓을 한다더구먼.” “엊그제만 해도 사무엘이 판관으로 있을 때는 한동안 평안했는데, 그이가 나이를 먹어가니까 지혜의 눈도 차츰 흐려진 탓도 있겠지.” 저마다 한마디씩을 늘이는 것이다. 하다못해 젊은 층에서는 사무엘을 두고 하루빨리 판관의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마누라가 사무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행동들을 보고 저마다 노망이 났다느니 하면서 흉을 보는데 그저 가만히 계시기라고 하시려우?” 늙은 사무엘의 얼굴에서는 엷은 미소가 띠어질 뿐.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웃지만 마시구 속 시원하게 말해봐요, 글쎄.” 답답해하는 마누라는 안중에 두지 않고 사무엘은 자신의 노욕(老慾)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아들들은 모두 장성하여 자신의 뒤를 이어 판관을 보고 있음에 큰 만족을 느끼는 터였다. 비록 사제의 부류에 속하지는 않지만 제 딴에는 그저 묵묵히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을 숙명으로 생각해 온 그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생각했던 것보다 일은 갈수록 꼬여갔다. 그래서 사무엘은 날이면 날마다 설치는 마누라의 강권에 못 이겨 두 아들에게 판관의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물러나면서 큰아들에게는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있는 예배당의 관리 권한과 함께 백인대장, 천인대장 등을 통솔하는 군사권을, 작은아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행정권과 경제권을 통솔하도록 일을 분배했다. 그런데 아들들이 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르게 부정을 일삼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사롭게 무리한 세금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살림집을 화려하게 꾸몄으며 심지어는 히타이트족이나 필리스티아족이 섬기던 우상을 공공연하게 숭배하고 나섰다. 그뿐인가. 아버지에게 부여받은 업무를 소홀히 하여 오로지 여색에만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이렇게까지 요구하였다. “어르신, 어르신의 두 아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게 생겼습니다. 판관들이 마치 임금처럼 행세하며 우리들을 부려먹을 속셈만 늘어나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제야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 ‘주님, 제가 공연히 노욕을 부렸나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어도 듣지 않는 척한 것인지요. 그렇다면 제게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신의 수십 년 동안 판관으로서 일궈온 성과들이 빛을 잃고 녹슬어가고 있었다. 이를 상량(商量)할 때 사무엘은 무기력한 자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당신이 직접 왕 노릇을 하시구려.” 하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사무엘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들이며 하느님의 사제들까지 사무엘을 찾아가 결단을 요구하였다. 결단이란 사무엘의 아들들을 하루빨리 판관의 직임에서 해임 시킬 것과, 기존의 신정(神政) 체제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결속력을 위해 왕정(王政)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사무엘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임금을 세우다니. 대관절 이 무슨 해괴(駭怪)한 일이란 말이오. 지난날 이집트 파라오의 박해를 받아온 역사를 생각해 보지 않소? 그걸 생각한다면 임금을 세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이오? 이집트 파라오의 박해를 받으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치고 피를 흘리고 죽어갔소. 그 박해를 피하고자 맛없는 만나를 먹어가며 이집트 땅을 벗어나 이곳으로 이른 것을 겪고 모른단 말이오?” 보다 못한 일부 젊은이들 쪽에서, “어르신, 어르신이 생각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어르신께서 다스리신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르신이 생각하시는 그런 시대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하고 반발하고 나섰다. 이렇게 사무엘과 젊은 세대와의 사이에서 논쟁이 오고 갔다.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말없이 먼 산 바라보듯 했다. 젊은이들의 입장에 서야 하는지, 사무엘의 편에 합류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갈림길 한가운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이들. 이를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들. 서로의 다른 가치가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사무엘은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중도(中道)의 선(線)으로 지킬 줄 아는 것도 아니다. 사무엘은 참담함을 주체 못한 채 당신의 성전으로 달려갔다. 비록 늙은 몸이라도 근력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부리나케 달려가 성전으로 들어선 사무엘은 바로 엎어지며 울부짖는다. ‘야훼시여, 이 미욱한 사람을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까. 제 열정으로, 당신께 향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런 제게 은공(恩功)을 베풀지 못할망정 원수 취급을 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그저 배가 부르는 소리를 하는 모양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의 늙은 육신은 어쩔 도리가 없나보다. 노인의 정신은 몸과는 다르게 고집이 더욱 두드러졌다. 사무엘의 흐느낌을 들으신 모양인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무엘아 듣거라.’ 사무엘은 당신 말씀을 그저 묵묵히 듣는다. ‘사무엘아, 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는구나. 네가 하는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네 아들들의 행태가 볼썽사나워 등돌리는 것뿐이다. 네가 잘못한 건 그뿐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 많더라도 네 아들들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왜 모르느냐? 모세를 보아라. 모세에게도 형제들과 자식들이 있을 터인데도 다른 핏줄이나 진배없는 여호수아를 택하였지 않았느냐. 지난날 성전 관리를 소홀히 한 엘리를 보고도 모르느냐. 한낱 성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도 질책을 받는데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르고 다스리는 것쯤에 비견하겠느냐. 사무엘아, 네가 힘든 것은 백성들의 원망 탓이 아니라 네 아들들에게 있음을 왜 모르느냐. 네 열정과 마음가짐만으로 해결될 일이겠느냐. 네 식구들 건사를 못한 탓이 더욱 크다는 걸 왜 모르느냐. 이를 잘 헤아려 네 아들들을 잘 길들여서 판관의 모든 직임을 그만두게 하고 사무엘 네가 다시 맡아라. 그리하면 네게 새로운 임무를 주겠노라.’ 사무엘은 주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다시 당신께 물어본다. ‘그렇다면 당신의 지혜를 제게 주십시오. 저는 갈피를 잡기 힘드나이다.’ 사무엘은 매우 무기력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흐느낌도 그보다 더하였다. 주님께서는 이를 상량(商量)하고 계셨다. ‘사무엘아 들어라. 네 세 아들들을 불러들여 행실이 방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이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다. 그러니 하루속히 판관의 모든 직임에서 물러나 자숙하라고 당부하라.’ 주님의 당부에 따라 사무엘은 집에 들어가서 세 아들들을 불러들였다. “내 너희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으니 들어라. 근자에 듣자니 너희들이 이 아비의 명성에 먹칠하고 판관의 직임을 소홀히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 않고 탐욕을 더욱 부채질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간질하고, 축첩(蓄妾)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성전의 재산들을 모두 제 것 인양 거두어들였다고 들었다.” 듣기만 하던 아들들 중에 하나가, “우리 식구들이 매우 많잖습니까. 아버님도 아시잖아요. 우리들도 입에 풀칠해야 하는데 어찌하라고요.” 하며 대드는데 “네 이놈! 손이 없기를 하느냐, 발이 없기를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외면한 것이 너희들의 죄다!” 사무엘이 역정을 낸다. “이 아비의 뜻을 헤아리기는커녕 오히려 제 잇속에만 집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란을 일으켰으니, 하느님을 뵙기가 매우 민망하구나.” 이렇게 말을 마치고 사무엘은 “이 아비가 잘못 생각한 탓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체면을 구겼다. 이 어리석은 아비의 탓이구나. 너희들에게 골고루 판관의 직임을 맡긴 것이 잘못이다. 이 모두가 내 탓이다. 너희들은 이 아비의 말을 들어라. 너희들이 맡은 판관의 모든 직임을 내려놓고 자숙하고 있거라.”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자 아들들이 일제히 반발하는데, 사무엘의 마음은 바위같이 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으라는 속말이 있다. 이 아비가 집안 단속을 잘못한 죄가 매우 크니 하느님을 뵐 면목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말대로 판관으로서의 모든 직임을 버리고 이 아비에게 그 직임을 넘기거라. 내 더 두말하지 않겠다. 판관의 모든 직임을 이 아비에게 내놓거라.” 사무엘의 결단력(決斷力) 앞에서 세 아들 모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세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판관의 직임을 모두 내려놓았고, 사무엘은 다시 판관의 직위를 되찾았다. 주님의 말씀에 순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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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