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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 제118차 소과 생원시 응시
: 1919년 10월 20일, 의친왕(義親王)이 상하이로 망명하려다가 일제에 발각된 일이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의친왕이 상하이로 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면 일제의 패망 이후 한반도에 왕정이 복고하였겠는가, 아니면 지금처럼 공화정이 세워졌겠는가. 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응시자 본인의 의견을 기술하라. (300자 이상으로 답안 작성) ---------------------------------------------------------------------------------- 응시 과목 : 생원시 답안 내용 : 시제를 읽고서 예상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에 있어 황실과 황족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부터 시작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어찌하여 정부 수립 이념에 있어 민주 공화정을 채택하였을까?' 까지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주제에 이리 진득하게 빠져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요! 한데 그렇게 오랜 시간 스스로에게 주장, 반박하기를 거듭한 끝에 제가 느낀 감정은 의외 그 자체였습니다. '의친왕이 정말 존경스럽다'가 결론이었거든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왕정복고 유무에 관한 논제에서 그 결론이 한 개인의 인물평이라니요. 위에서 짧게 언급했듯 저 또한 이에 대해 많이 놀랐고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깊은 사색에 잠겨보았습니다. 그리곤 깨달아버렸습니다. 그 찾고자 했던 이유와 그로서 말미암아진 이 엉뚱한 결론이 본 시제를 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중한 가치라는 것을요. 사실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송받아 마땅한 위업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반 독립운동의 양상입니다. 요즈음 들어 사람들이 많이들 간과하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구한말부터 시작된 초기 독립운동, ‘의병(義兵)’의 근본은 ‘근왕(勤王)’이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대수라는 거지? 조선 시대인데 당연히 그랬겠지’라고 대충 넘겨버릴 수도 있으시겠지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실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아닐 수 없는데요, 맞습니다. 조선이란 나라는 태초부터 유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왕정으로서 무려 500년을 이어져 내려온 나라였고 여러 사회 문화적 제도들이 국가 전반에 뿌리내려져 있었습니다. 한데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그 유학이란 문명은 중원의 천하가 열리고 그 땅에 인간이 농경사회를 이룩하면서부터 발전해 내려온 동아시아의 오랜 ‘세계’라는 것인데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심화 된 동양과 서양의 충돌은 단지 국가 대 국가나 문화 대 문화의 수준 차이가 아닌 오랜 농경사회와 급부상한 산업사회의 충돌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 ‘입증된 구(舊)세계’와 ‘불안한 신(新)세계’의 충돌이었습니다. 구한말의 조선이 마주했던 ‘개화(開化)’란 단순히 문호를 개방하고 항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였던 것이죠. 그것도 지금까지의 우리와는 모든 것이 극적으로 반해있고, 결코 선(善)하지 않지만, 이제는 중화를 넘어서까지 막강한. 그러한 미지의 세계를 말입니다. 소수의 인사들은 각기 다른 배경으로 개화했다지만 대다수의 민초들은 여태 10대조의 선조들과 함께 구(舊)세계에 살고 있었고 구(舊)세계의 조선인들이 사고한 구(舊)세계에서의 ‘독립운동’이란 바로 ‘근왕(勤王)’, 그 자체였지요. 단순한 식민사관처럼 조선과 조선인들의 풍속이 미개해서, 비문명적이라 현대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그들로서는 그들이 몇백 년간 발붙이며 살아온 땅의 세계와 뿌리내려진 문화 바탕 안에서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또 웃긴 것이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대한제국 황실은 이들을 무책임하게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황제인 고종을 필두로 해서 경술국치 전후를 가리지 않고 은연중에 동분서주하며 의병들을 독려하고 지원했었는데 방방곡곡 밀지와 군자금을 내려 후에 봉기했던 의병 진영중 고종의 입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지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는데요, ‘구한말에서부터 시작된 초기 독립운동의 주축은 충심을 져버리지 않는 임금을 위해 싸우던 의병들이었고 대다수의 조선인은 여태 왕조사회에 익숙했다’로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해 일제의 패망 이후 한반도엔 왕정의 복고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데 왜 전 의친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이 시제의 답안으로 도출해 냈을까요? 게다가 그 답안이 본 시제를 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중한 가치라고요? 이해하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시제에는 ‘의친왕’이라는 인물이기에, 그 사람이기에 미래의 결론이 확 뒤엎어집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앞서 설명해 드렸던 역사적 바탕에서 황제였던 고종이 생전 국외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면(보안법 위반 사건 같은 사건이 성공했다면) 일제의 패망 이후에 왕정이 복고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고종이라는 인물이니까요. 한데 이번 시제에서의 의친왕은 또 의친왕이라서 왕정이 복고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둘 다 왕정국가의 황족이지 않냐고요?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이번 시제에서 제시한 배경과 인물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1919년, 고종황제가 붕어합니다. 이에 전국적인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게 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죠. 한데 이때의 임시정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일찍이 개화하여 서구의 문물을 배운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것이 바로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인데요, 이들은 자신들이 배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입각한 공화정을 추구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당대의 조선인들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적 문제를 건너뛰고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라는 개념을 내세우던 독립운동 단체로서 전무후무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당대에 여러 ‘임시정부’가 있었다는 소립니다. 대표적으로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가 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대인들의 인식처럼 처음부터 한민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쳐 이룩한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크고 작은 임시정부들과 독립군 세력들을 통합하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아 현대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존의 제국이든 앞으로의 민국이든 대한이라는 나라를 계승했다는 ‘정부’로서의 정통성이 없어요. 역사 속에서 이 문제는 시간이 흐르고 임시정부가 독보적인 위업을 지니게 되며 자연스레 해결되지만 우리가 논하고 있는 1919년에선 ‘공화정으로서의 조선독립을 목표로 하는 신생 독립운동 단체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때까지의 임시정부는 별다른 권위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당대에 황족이었던 의친왕 입장에선 자신이 국외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와 반대되는 개념의 왕정 복고적 임시정부를 수립해도 충분한 승산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임금이 될 수도, 아니더라도 황족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익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요. 한데 의친왕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한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족(皇族)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나의 이와 같은 결심은 하나인즉 자가(自家)의 복수를 위함이요, 또 하나인즉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1919년 11월 20일 자 《독립신문》에 실린 의친왕의 성명입니다. 이후 시제에선 언급되지 않지만, 당시 상하이에 소재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향해 도주하다 만주 국경지대에서 체포당하는데 드디어 여기서 진가가 드러나지요. 왕정 복고적 임시정부를 세운다고 하여 무조건 질타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조선인들의 사고로는 더 빠른 호응을 이끌어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또한 의친왕은 이미 일전 왕정 복고적 성향을 띄고 있는 보안법 위반 사건에도 휘말린 바 있습니다. 의친왕의 정의가 꼭 민주라는 것도 아닌 셈이지요. 의친왕은 당시 정국에 임시정부가 세를 규합하고 있으니 자신의 사익과 생각을 강요하기보단 민족과 조국의 광복 및 평화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임시정부에 협력하기로 한 것입니다.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조국의 광복도, 부귀영화도 얻을 수 있었겠지만 3월 1일 이래로 전 국민이 빈손으로 독립을 절규하며 외치니 국민을 지켜주지 못했던 황족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더 빠른 단합과 조금이라도 더 빠른 조국광복, 민족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셨던 게지요. 정말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시관분들이 이 답안을 어떻게 바라보실지 감히 예상해 보자면 아마도 황당하시지 않겠나 생각 듭니다. 하나 단순히 답이 주어져 있는, 실없는 역사 공상을 하는 것보단 잊혀진 독립투사 한분을 재조명하는 것이 과거 시험지로서, 제 이름을 내거는 영예를 부끄럽지 않게 해주리라 믿어 이리 완성해 봅니다. 부귀영화를 노리고 소과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먼 훗날 아조의 인정받는 관료로서의 자신을 입증하는 데에 제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 고로 이제 제가 만끽할 것은 제 성장이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겠습니다. 미련한 졸자는 이만 물러가 낭보(朗報)를 기다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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