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16편
수양대군의 부르심을 받은 명회는 단정히 목욕재개를 한 뒤, 민씨더러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내일 아침 일찍 애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계시게나.” 민씨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되받아친다. 그러면서 “설사 친정에 가 있다해도 친정식구들이라고 화를 피할 수 있수?” 대수롭게 생각 않는다. 그러나 명회는 벽을 보며 확신에 찬 눈빛을 띠고 있었다. 민씨는 그런 지아비를 보며 대관절 왜 저러나? 하고 얼떨떨했다. “일이 잘못 될까봐 그런 게 아닐세.” 명회 목소리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 양반이 한밤 중에 어린 것들을 왜 들여다보셨수? 집 걱정일랑 하지 마시구 영감 앞일이나 잘 추스르기나 하셔요.” 부인의 입은 쌀쌀한 말 뿐이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지아비를 하늘처럼 모시는 민씨는 서방님의 말을 대수롭게 보지 않았는데, 일말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과연 영감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딴은 그랬다. 근래 들어 홍달손이, 양정이, 홍윤성이, 유수가 제 집에 문지방이 닳게 드나드는 것하며, 안평대군의 역모 이야기가 오고 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명회는 안평대군이 시월 보름에 역모를 꾸민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수양대군의 집에 들어가 행랑채에서 기거하고 처자식들을 친정에 맡겼다. 그러고서 오랜 벗 권람에게 찾아갔다. 권람의 집으로 찾아갔다. 권람의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다. 친구가 사랑에 들지 않는 것을 보고 권람이 앞마당에 있는 명회를 보는데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자네, 왜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나?” “가을 하늘이 맑기도 하네.” 명회의 말에 권람이 “싱거운 사람.” 하며 살며시 웃어댔다. “사람이 죽을 날이 가까이 오면 삼라만상(參羅萬像)이 새롭게 보인다 하이.” 이에 권람이 놀라며 “가까이 왔는가?” 묻자 명회는 안평대군의 거사 계획을 밝힌다. 다만 수양대군에게는 집안에 고칠 공사가 있어 친정에 처자식을 맡기고, 자신이 잠시 행랑채에 있다고 한 것 뿐이다. 두 사람은 수양대군의 사랑방에 찾아갔다. 수양대군에게 권람이 “평안감사(平安監司) 정이한이 휘하에 군사를 양분해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고, 민신을 따르는 오위도총(五衛都摠)의 군사들은 대궐을 점령한다고 합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안평대군이 좌상과 대군을 제거한다는 것이올시다. 이는 전하를 내치고.” “그만하시게.” 수양대군은 노기 띤 목소리로 말을 가로 막았다. “대군 대감, 대응책(對應策)을 강구해야 합니다.” 권람의 말을 받아 명회가 말한다. “대군께서 사은사로 가실 때 무책(無策)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서로 대립하였기에 그리된 것입니다.” 수양대군이 수긍하자, “허나, 이번은 사정이 다릅니다.” 명회의 말을 듣고 “안평과 김종서가 손을 잡겠는가?” 수양이 묻자, “대군을 죽인 다음, 결국 서로 갈라져 싸우겠으나 그건 대군에게 득이 되지 못할 겁니다. 안평대군을 과소평가한 게 문제였습니다. 우유부단하기 그지 없던 안평대군이 이렇듯 쉽게 결단을 내리다니.” 명회로서는 당혹스럽다. 권람이 “이미 엎지른 물일세. 후회만 하고 있으면 뭐하나. 생각을 짜보시게.” 다독인다. 이에 명회가, “대군 마님, 안평을 움직인 것은 이현로입니다. 이현로의 간사(奸詐)한 혓바닥만 없애면 안평대군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수양대군에게 간하자 권람도 수긍한다. “어떻게든 이현로를 없애야 하는데, 그 방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명회는 고개를 저었다. 그 시각 이현로는 피혐(避嫌) 중인 영상의 집에 당도해 사랑방에 있었다.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다. “등청(登廳)을 하다니.” 황보인이 물으니 “전하께서 이미 사직상소(辭職上疏)를 돌려주셨잖습니까? 영상께서 등청만 하시면 일이 성사될 것입니다.” 이현로가 대답했다. 황보인이 “일이라니?” “점쟁이가 오는 시월 보름께에 수양대군의 제삿날이라고 정하더이다.” 묻다가, 이현로의 말에 화들짝 놀란다. “뭣이?” “대궐 안팎에 일이 벌어지면 영상께서 사태를 장악하실 것이 아니옵니까?” 이현로에게 섬뜩한 말을 듣고 황보인이 손사래를 친다. 한사코 양손으로 내젓는다. “안평대군의 손에 쓰인 공신록(功臣錄) 첫 장에 영상 대감의 이름을 올리셨습니다.” “아, 글쎄. 이 사람아. 일이 그렇게 되면…….” “……” “일이 그렇게 되면 내게 미리 알려줬어야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현로에게 황보인은 한마디한다. “미리 아신대도 상서(祥瑞)로운 굿판이야 소인이 먼저 벌이면 되는 것이옵니다. 안 그렇소, 영상대감.” 그제야 황보인의 입은 말문이 막혔다. 이현로는 능글거리게 웃는다. 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직언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상을 배알(拜謁)하시어, 이현로를 지방으로 내려보내셔야 합니다.” 수양대군이 고개를 저으며 “주상을 뵈올 길이 없으니.” 말하자, 권람도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저들에게 방법이 서 있다면은 이현로가 없이도 거사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우려한다. 명회는 이에 “두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꾀를 낸다. “대군께서 이현로를 파직(罷職)시키고 지방의 관아 관리로 내보내도록 애쓰신다면, 저들은 저들대로 대군께서 눈치채지 않았다면서 비웃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현로가 없으면, 대군께서 저들보다 일찍 거사할 수 없으니 반드시 이현로를 제거하셔서 대군께서 일을 꾸미셔야 할 겁니다.” “거사를 저들보다 먼저 꾸며야 한다는 말씀인가?” 권람의 말에, “그러하이.” 명회가 답했다. “이 사람아, 사람이 있어야 거사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않겠나.” 권람이 답답해하며 묻자, “사람이 없으니 가능하네.” 명회의 말에 힘이 실린다. 수양대군에게 시선을 옮긴 뒤 “대군 마님, 저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대군께서 저들의 계획을 미리 안다손 치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을 거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공연히 평안감영의 병기들을 도성으로 옮기고, 무계정사에서는 대낮부터 안평대군의 사병들이 무예를 닦고 있을 것이옵니다. 더욱이 전하의 거처를 영양위의 집으로 옮긴 마당에, 설사 역모가 있다한들 역모를 고변하리까.” 말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어도 수십 인의 동조자가 있어야 성사가 되지 않겠나.” 권람이 조심스러워 한다. 명회가 “대군께서 한 사람만 죽이신다면 성공하실 것입니다.” “김종서를 두고 한 말인가?” 묻자, 수양대군이 되물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해야지.” 무모한 계획이라고 하며 수양대군의 사랑방에서 갑론을박이 오고 갔지만, 모 아니면 도라고 하는가. 수양대군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자준(子濬).” 나직이 수양대군은 “어찌 죽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안평이 결국 주상을 죽여 보위를 찬탈(簒奪)하려 들지 않겠나. 내가 주상을 지키지 못하면 기꺼이 죽을 자리를 찾을 것이네.” 명회가 각오를 밝혔다. “면목 없습니다.” 명회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나운 살쾡이 같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수양대군이 파안대소했다. 다음날 수양대군 집에 영풍군(永豊君)이 찾아왔다. 영풍군은 혜빈의 소생이다. 수양대군의 행보에 못마땅하게 보는 혜빈이 아들 영풍군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의 동태를 살피려고 보낸 것이었다. “마마께선 어찌하고 계시는가?” 수양이 영풍군에게 안부를 묻자, “상심이 크십니다.” 영풍군이 한숨을 쉬며 답한다. “그러시겠지. 전하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다가, 하루 아침에 생이별을 당하셨으니.” 이때 영풍군이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역모를 꾸미고 있는지 묻는다. “역모라니?” 수양대군은 짐짓 모른 체 한다. “모르십니까?” “그럴 리가.” “안평대군이 평양과 해주(海州)의 감영에서 무기를 들이고 있습니다.” “그만하시게!” 수양대군이 버럭 화낸다. 벌떡 일어나서는 “더이상 나와 안평대군과의 사이를 이간질 시킬거면 당장 나가야 할 것이야!” 하며 경고하자 영풍군이 “어찌 없는 일을 꾸며 말씀드리리까? 실은 어머니께서 아시기에 제게 이렇듯 전하신 것이올시다.” 수양이 제자리에 앉으며 “허면 혜빈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 묻자, “이는 안평대군이 어머니와도 오래전부터 상의한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이 아니면 저희 모자를 죽이셔도 원망하지 않으리다.” 진실되게 답하는 영풍군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눈을 감는다. 진실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상께서도 아시는가?” “모르십니다.” “그러면 먼저 전하께 고하시지 그랬어!” “형님께서 안 나서시면 주상께서는 믿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를 뵈올 수가…….” “형님, 전하께서는 오늘 밤에 선왕의 빈전(殯殿)에 제사드리기 위해 환궁(還宮)하실 것입니다. 미리 대궐로 가 계시면서 전하를 배알하십시오.” “영풍군이 큰일을 했다. 이 신세는 반드시 갚겠네.” 수양대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양의 집을 나선 영풍군의 눈에선 만족의 빛이 띠었다. 이윽고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수양대군은 선왕의 빈소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금상이 들어섰다. “수양 숙부.” 금상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안평대군과 혜빈, 그리고 김종서가 아귀싸움으로 다투는 그 틈바구니에 갇혀 지칠 대로 지친 금상의 눈에 수양대군은 유일한 버팀목으로 보였다. 더욱이 명나라의 사신으로 자청해 다녀온 뒤부터 수양대군과 낙랑부부인 윤씨 내외를 신뢰하느니만큼 대궐로 불러들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 상감의 마음을 알기에 수양대군은 금상을 하루 빨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유난히도 공을 들이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
http://www.1392.org/bbs?history23:381  
|
| 
|
| 창작 역사소설 최근 댓글 | ||||||||||||||||||||||||||||||||
|
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