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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13편
수양대군이 몸소 고명사은사를 자청하여 간 지 보름이 된 날. 한확은 무거운 마음을 가진 채 안사돈을 위로하고자 명례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잖아도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을 시댁에 살게 한 착잡한 심정이 일기도 했다. 여느 딸자식과는 다르게 유독 영리한 까닭이 있어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인자하게 키웠다고 자부한 사람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부족한 점이 없지 않기에 명례궁에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안사돈 낙랑부부인을 찾아간 그는 사위 도원군 이장(李暲)을 덩달아 만날 수 있었다. 찻상이 들어오기에 찻잔을 들던 한확이 “대군께서 자주 소식을 전하시던가?” 안부 삼아 사위에게 물어보니 “의주에 당도하신 뒤에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며 사위가 대답했다. 한확은,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연경에 따로 사람을 보내 대군께서 불편하지 않도록 돌보라고 했습니다. 황실에 큰 누이가 돌아가셨으나 연경 관리들이 제 부탁에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사돈에게 정중히 위로해주었다. 전조인 고려에서 시작된 공녀(貢女) 제도는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가 득세하며 사그러진 듯 했지만 명나라의 영락제가 조선 여인을 유난히 눈독들여 다시 공녀로 뽑았는데, 한확이 자신의 첫째 누이와 둘째 누이를 각각 영락제와 선덕제의 후궁으로 보냈다. 그렇게 누이의 목숨값을 담보로 집안을 일으켰다. 그 대가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겹사돈으로서 세도를 누리고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누이인 원나라 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어 전횡을 일삼던 기철(奇轍)과는 다르게 한확은 공평한 사람으로서 사람됨이 항상 조심스럽고도 느긋하였다. 지금은 첫째 누이가 영락제의 하세로 말미암아 순장된 채 세상을 뜨고, 작은 누이는 황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있는 처지라지만 행여 바깥사돈의 신변에 문제가 될까 우려해 둘째 누이로 하여금 수양대군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도록 당부한 것이다. 안심이 된 한확의 얼굴에는 만족한 빛이 보였다. 사위의 말에 내심 한시름을 덜은 셈이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부부인은 바깥 사돈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제가 앞으로는 영상과 우상을 만날 겁니다.” 그러면서 세 사람이 서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바로 이 시각. 영상 황보인이 자하문(紫霞門) 밖 안평대군의 별저(別邸)에 찾아갔다. 이때 이현로가 마중나와 있었다. “아이구, 영상 대감. 행여나 영상 대감께서 못오실까봐 우리 대군께서 안절부절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이 좋은 자릴 어찌 못올까.” 영상이 너털웃음을 짓자, 현로가 고맙다는 뜻을 전한다. “산 좋고 물 좋고 와 보니 과연 명당일세그려.” 안평대군의 별저인 무계정사(武溪精舍)로 알려진 이 터는 임금이 나고도 남는 자리라고 세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안평대군을 두고 금상을 조력하는 세력의 하나로서 승승장구한 것이다. 영상이 가보니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때마침 일부 종친과 조정 신료들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술자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금성대군과 임영대군(臨瀛大君), 그리고 이조판서(吏曹判書) 민신이 보였다. 황보인이 상석에 앉으니 모두들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유독 김종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상 대감께서는?” “우상께 참석하라고 사람을 보냈는데, 몸이 불편해서 못온다고 하십니다.” 안평이 황보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임영대군이 세종의 넷째아들이요, 금성대군이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니 모두 모후인 소헌왕후에게서 난 왕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수양대군의 동생들이면서도 모두가 혈기왕성(血氣旺盛)했다. 이렇듯 안평대군이 사람들을 모아 야합(野合)을 즐기니 역모(逆謀)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자연히 안평대군의 세력이 일어나 안평대군의 별저 자리에 왕기(王氣)가 흐른다고 소문을 공공연하게 나불대기 시작했다. 뿐인가. 또한, 별저에는 따로 공터에 연병장(練兵場)을 두고서 힘깨나 쓰는 장사패들을 불러다 놓아 먹고 마시고 무예를 연마하니 일러말해 무엇하랴. 안평대군은 술자리에서 대놓고 정계에 나설 뜻을 보였다. 그러자 술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는 빛을 띠었다. “내가 나서서 이 혼란한 국정을 바로 잡겠다 그 말씀입니다.” 안평대군은 기고만장한 듯 코웃음을 친다. “그러니 영상 대감께서도 도와주시고, 이판께서도 도와주시오.” 안평의 당부를 민신이 넙죽 받고는 “저는 죽는 순간까지 대군을 따르리다.” 동의했다. 이에 영상이 난색을 표하며 “저야 뭐, 만사가 편하잖습니까.”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였다. “수양대군께서 돌아오시면,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 것입니다.” 이현로가 와서는 영상에게 다짐받을 뜻을 내비쳤다. “수양대군께서 고명 사은사로 자청하신 듯이 무엇이겠습니까? 명 황실의 사돈인 한확을 뒷배로 삼았으니 두말할 나위 없지요.” “그러면?” 황보인의 물음에 이현로는 “주상전하의 나이 어림을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대답했다. “수양대군이 어떤 분이십니까? 한 번 마음에 들면 끝까지 버리지 않는 한, 눈밖에 한 번 나기만 하면 용서하지 않는 분입니다.” 황보인이 당황해한다. “죽이기야 할라구.” “다 죽습니다. 눈 밖에 난 사람을 살리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현로가 확신에 찬 채 말을 마쳤다. 주연이 파하여 밖을 나서는 영상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못해 흔들렸다. 아차! 하고 덫에 걸린 것이다. ‘이런 낭패(狼狽)가 있담. 이런 낭패가.’ 황보인의 등 뒤에선 식은 땀이 났다. 한확은 우상인 김종서에게 안부차 찾아갔다. 우연히 찾아갔던 한확은 김종서로부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다툼으로 금상의 안위가 우려된다는 말에 한확이 “수양대군께서는.” “안평대군에게 더 이상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너도나도 종실의 어른들이 전하의 안위를 이유로 나서면 어찌 되겠습니까.” 말을 가로막고 김종서가 말을 이었다. 한확이 끄덕였다. 김종서의 뜻을 알았다. “안평대군의 경거망동(輕擧妄動)은 내가 단속할 것입니다. 수양대군께서도 그리하셔야 합니다.” 김종서의 말인즉슨, 종실과 조정 대신들이 어린 금상에게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상께 찾아뵙길 잘했습니다.” 한확이 김종서의 진심을 헤아린 듯 안심해하며 기뻐하였다. 진정 충신의 모습이 보임에 내심 한시름을 덜었다.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발로(發露)인 것이다. 돌아가는 한확은 하염없이 김종서를 떠올리는 것이다. 김종서, 세종대왕의 태평성세를 있게 한 사람이다. 육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북방을 탄탄히 하여 군사개혁을 주도한 사람이다. 김종서의 딴에는 일관되게 세종대왕을 대하듯 금상을 보필하고 있다고 자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일전의 섭육십 사건에서 보듯이 수하들의 비리를 눈감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기고만장함을 힘써 막지 않은 채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행태에서 보듯,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정무를 감당할 정도인지 매우 의문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새로운 인재가 들어오는 것이 인지상정이겠건만 아무리 눈을 씻어보아도 마땅한 인재가 보이지 않는다. 울창(鬱蒼)한 숲처럼 집현전 학사들이 있다고 하지만, 집현전 학사들은 학사들대로 불만이 목구멍에까지 찼다. 집현전 학사를 대표하는 정인지가 학사들에게 정사에 개입하지 않도록 하는데 권람과 같은 젊은 학사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학문이 어디 있느냐며 반격하는 등 한동안 내홍이 계속되었다. 이런 작금의 현상을 한확은 생각하였다. ‘절재(節齋-김종서의 호) 대감을 보고 있노라니 안타깝구나. 저렇듯 고지식한 사람이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볼 것인가.’ 한의 깊은 한숨이 터지듯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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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