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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15편
수양대군이 명나라에서 돌아온다는 소문이 조선 팔도에 두루 퍼졌다. 일설에서는 양녕대군이 안평대군에게 역모를 꾸미기 전에 자신을 죽이라고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수양대군의 귀환 소식이 안평대군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안평대군은 그 야심한 밤에 술을 퍼마셨다. 술을 마시며 수양대군의 모습을 되씹듯 떠올렸다. ‘수양 형님, 이 아우의 힘을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사납게 노려보던 수양대군. 수양대군이 귀국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지면 퍼질수록 잠시 동안 떠오르던 오기가 일순간 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러잖아도 이현로를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정변을 꾸미어 보려고 했건만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다른 천적에게 빼앗긴 격인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는 것이다. 한명회는 저자에서부터 수양대군의 소식을 들어왔던 차에 기분이 좋은 듯 킬킬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튿날. 수양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에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제 서서히……’ 명회는 그제야 안평대군의 편에 서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천우신조(天佑神助)일세그려…….’ 이현로가 친분을 과시하며 기어코 안평대군의 수하로 들이기에 혈안되어 있었건만, 하마터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뻔함을 깨우치며 다행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수양대군을 만난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어쨌든 수양대군이 돌아왔다. 수양대군의 귀환을 누구보다 반긴 이는 안평도 김종서도 아닌 어린 상감뿐이었다. 대궐로 부사와 서장관 등을 거느린 채 수양대군이 돌아왔다. 노독(路毒)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눈빛은 시퍼런 칼날처럼 살아있었다. 왕은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 장(暲)에게 현록대부(顯祿大夫)에 봉한다는 전교가 떨어졌다. 이는 수양대군을 신뢰한다는 뜻의 표현이었다. 뒤이어 수양대군의 일행을 접견한 상감은 수양대군의 사촌 처남 윤사로(尹師路)에게 숭덕대부(崇德大夫)를 더하고, 김종서를 좌의정에 정분을 우의정에 명하는 인사를 명했다. 그 밖에 수양대군의 사돈 한확을 좌찬성에, 정인지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허후를 좌참찬, 이사철을 우참찬, 조극관(趙克寬)을 병조판서로 명했다. 어린 금상은 안평대군의 세력을 외면하였다. 이번 인사 사령을 알아낸 안평대군이 땅바닥을 치고 후회했다. ‘아, 내 눈앞에 둔 먹잇감을 놓치다니! 내가 금상을 우습게 보았구나.’ 어린 금상이 단독으로 행한 인사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대군과 더불어 김종서를 중용한다는 상감의 뜻을 두고 조정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김종서가 상감과 독대를 청해 가지고 행해진 인사안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김종서는 김종서대로 수양과 한배를 타지 말아야 할 것을. 한 배 탔다는 것에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린 금상이 장성함을 볼 때까지라도, 양녕과 수양 같은 종실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만기(萬機)를 친정(親政)하도록 해주고자 함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어느 순간 정치에서 손을 떼면 어린 금상을 누가 지켜줄 것인가. 내일 모래면 칠순을 바라보는 종서는 자신의 수명이 다해감을 느낀다. 마치 마지막 힘을 다해 타오르는 촛불의 남은 심지처럼 자신의 삶을 비교하는 것이다. 금상의 의식주를 물론하고 왕의 정무 등을 챙기고자 하는 김종서가 어느 순간 자신의 무기력함을 절실히 느낀다. ‘과연 내가 옳은 길을 택했는가. 수양대군은 왕실의 곁가지로서, 보위를 탐할 만큼의 야심을 감추고 스스로 몸을 낮추는데 본심인지 알 길이 없다. 혜빈은 명색이 상감의 조모라고는 하나 아녀자로서 경거망동(輕擧妄動)하게 왕실을 움켜쥐고 요리하고 있다. 안평은 어떤가. 빈 껍데기인 주제에 날파리 같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고만장하게 권세에 눈독을 들이니 한심한 일이 아닌가.’ 어두운 밤에 촛불을 켠 채 김종서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본다. 이튿날 안평대군은 평양(平壤) 연광정(練光亭)에서 때아닌 연회를 베풀었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정이한(鄭而漢) 등과 술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매서운 눈빛이 떠오른 나머지 안평은 술맛 떨어지듯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대행왕릉의 사토(死土)가 무너지고 말았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했다. ‘나를 죽이시게.’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양대군의 모습. 다른 한편으로 끓어오르는 혈기가 오히려 터져 올라 몸둘 바를 모른다. 그렇다. 피하기 어려운 숙명이다. 인복(人福)이 유난히 많은 것이 죄지. 하며 안평이 위안을 삼는다. 평양기생들을 불러들이고 풍악을 울리는데 여념이 없다. ‘이 좋은 걸 놔두고 도성에서 감옥살이를 했으니 한심하구먼. 인생이 일장춘몽이라고 했거늘.’ 기생들이 물러간 다음 정이한과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연광정에서 바라본 대동강(大同江) 물을 노을에 탐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대동강의 지는 노을이 아름답다. “내가 수양대군을 칠 것이네.” 정이한은 덤덤하다. “자네는 약속대로 그 안에 병장기(兵仗器)를 올려놔야 하네. 뱃길 따라 내려가, 마포(麻浦) 나루에 뿌리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네.” “여부가 있습니까? 대군 마님을 위해서라면 소인의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좋은 세상이 오면 내 후히 상을 줄 것이네.” “소인은 오직 대군 마님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안평은 그제야 만족했다. 그렇다. 이들은 정변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수양대군뿐인가. 김종서도 죽여야지. 허수아비 같은 황보인을 좌지우지만 한다면.’ 그러나 안평대군의 앞날에 구름이 끼어 버렸다. 승정원 승지 하나가 갑자기 죽은 것 때문에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집에 이어하도록 숙빈과 함께 직언한 김종서의 계략이 그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급한 마음으로, 야심한 밤길을 틈타 도성으로 안평대군은 향하고 있었다. 김종서와 손잡기 위해서다. ―이 시각, 수양대군은 명례궁으로 하인을 시켜 명회를 부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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