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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한
작성일 2010/08/17 (화) 09:03  [사시(巳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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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동이전 철륵(舊唐書 東夷傳 鐵勒)

철륵(鐵勒)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1
⊙<鐵勒>, 本<匈奴>別種. 自<突厥>强盛, <鐵勒>諸部分散, 衆漸寡弱. 至<武德>初, 有<薛延陀>·<契苾>·< 紇>·<都播>·<骨利幹>·<多覽葛>·<僕骨>·<拔野古>·<同羅>·<渾部>·<思結>·<斛薛>·<奚結>·<阿跌>·<白 >等, 散在 北. <薛延陀>者, 自云本姓<薛氏>, 其先擊滅<延陀>而有其衆, 因號爲<薛延陀>部. 其官方兵器及風俗, 大抵與<突厥>同.

철륵은 본디 흉노의 별종이다. 돌궐이 강성하고부터 철륵의 모든 부락이 분산되어 무리들이 점차 적어지고 약해졌다.
무덕(武德618~626)초에 이르러 설연타 게필 회홀 도파 골리간 다람갈 복골 발야고 동라 혼부 사결 곡설 해결 아질 백습 등이 있어 모래 사막의 북쪽에 흩어져 있었다.
설연타가 스스로 이르기를 본래 성씨는 설씨인데 그들의 선조가 연타를 쳐서 멸망시키고 나서 그 무리가 있게 되었기에 설연타부라고 호칭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관직과 병기 및 풍속은 대개 돌궐과 같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2
⊙初, <大業>中, <西突厥><處羅可汗>始强大, <鐵勒>諸部皆臣之, 而<處羅>徵稅無度, <薛延陀>等諸部皆怨, <處羅>大怒, 誅其酋帥百餘人. <鐵勒>相率而叛, 共推<契苾哥楞>爲<易勿眞莫賀可汗>, 居<貪汗山>北, 又以<薛延陀><乙失鉢>爲<也 小可汗>, 居<燕末山>北. <西突厥><射 可汗>强盛, <延陀>·<契苾>二部 去可汗之號以臣之. < 紇>等六部在<鬱督軍山>者, 東屬于<始畢>, <乙失鉢>所部在<金山>者, 西臣于<葉護>.

지난 대업(大業605~617)연간에 서돌궐의 처라가한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자 철륵의 여러부락이 모두 그에게 신하로서 붙좇았는데 처라가 세금을 징수하며 정도가 지나치자 설연타 등 여러 부락이 모두 원망하니 처라가 크게 노하여 그들의 우두머리 1백여 명을 주살하였다. 철륵이 함께 어울려 반란하고 같이 계필가릉을 추대하여 역물진막하가한으로 삼고 참한산의 북쪽에 거쳐하였으며 또 설연타의 을실발을 야질소가한으로 삼고 연말산의 북쪽에 거처하였다.
서돌궐의 사궤가한이 강성해지자 연타와 계필의 두 부락이 모두 가한의 칭호를 없애고 그에게 신하로서 붙좇았다. 울독군산에 있던 회홀 등 여섯 부락은 동쪽으로 시필에 복속하였으며 금산에 있던 을실발의 부락은 서쪽으로 엽호에 신하로 붙좇았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3
⊙<貞觀>二年, <葉護可汗>死, 其國大亂. <乙失鉢>之孫曰<夷男>, 率其部落七萬餘家附于<突厥>. 遇< 利>之政衰, <夷男>率其徒屬反攻< 利>, 大破之. 於是< 利>部諸姓多叛< 利>, 歸于<夷男>, 共推爲主, <夷男>不敢當. 時<太宗>方圖< 利>, 遣遊擊將軍<喬師望>從間道齎冊書拜<夷男>爲<眞珠毗伽可汗>, 賜以鼓纛. <夷男>大喜, 遣使貢方物, 復建牙於大漠之北<鬱督軍山>下, 在京師西北六千里. 東至<靺鞨>, 西至<葉護>, 南接沙 , 北至<俱倫水>/$[水]字各本原作[山], 據《通典》卷一九九·《 宇記》卷一九八改.$/, < 紇>·<拔野古>·<阿跌>·<同羅>·<僕骨>·< >諸大部落皆屬焉.

정관(貞觀627~649)2년에 엽호가한이 죽자 그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을실발의 손자 이남이 그의 부락 7만여 가구를 거느리고 돌궐에 복속하였다. 힐리의 정치가 쇠퇴하게 되자 이남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거꾸로 힐리를 공격하여 그를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자 힐리부의 여러 성씨들이 많이 힐리를 배반하여 이남을 따르며 함께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으나 이남이 감히 처신하지 못하였다.
이때 태종이 바야흐로 힐리를 다스리고자 하여 유격장군 교사망을 파견하여 사잇길로 책서를 휴대하고 가서 이남을 임명하여 진주비가가한으로 삼고 북과 깃발을 하사하여싿. 이남이 크게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다시 큰 사막의 북쪽 울독군산 아래에 깃발을 세우니 경사에서 서북쪽으로 6천리에 있는 곳이다. 동쪽으로 말갈에 이르고 서쪽은 엽호에 이르며 남쪽은 사막에 접하고 북으로는 구륜수에 이르니 회홀 발야고 아질 동라 복골 습 등의 큰 부락이 모두 복속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4
⊙三年, <夷男>遣其弟<統特勒>來朝, <太宗>厚加撫接, 賜以寶刀及寶鞭, 謂曰: [汝所部有大罪者斬之, 小罪者鞭之/$[斬之小罪者]五字各本原無, 據《通鑑》卷一九三補.《唐會要》卷九六作[大罪斬之, 小罪鞭之].$/.] <夷男>甚喜. 四年, 平<突厥>< 利>之後, 朔塞空虛, <夷男>率其部東返故國, 建庭於<都尉 山>北, <獨邏河>之南, 在京師北三千三百里, 東至<室韋>, 西至<金山>, 南至<突厥>, 北臨<瀚海>, 卽古<匈奴>之故地, 勝兵二十萬, 立其二子爲南北部. <太宗>亦以其强盛, 恐爲後患. 十二年, 遣使備禮冊命, 拜其二子皆爲小可汗, 外示優崇, 實欲分其勢也. 會朝廷立<李思摩>爲可汗, 處其部衆於漠南之地, <夷男>心惡<思摩>, 甚不悅.

3년에 이남이 그의 아우 통특륵을 보내와서 예방하니 태종이 후하게 위무하여 대접하고 보물 칼과 보문 채찍을 하사하며 이르기를
[네가 다스리는 부락에 큰 죄가 있는 자는 머리를 베고 작은 죄가 있는 자는 채찍을 가하라]
하므로 이남이 매우 기뻐하여싿.
4년에 돌궐의 힐리 가 평정된 후에 북쪽의 변방이 공허하자 이남이 그의 부락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옛 나라에 돌아가서 도위건산의 북쪽 독라하의 남쪽에 나라를 세우니 경사에서 북쪽으로 3천 3백리이며 동쪽으로 실위에 이르고 서쪽으로 금산에 이르며 남쪽으로 돌궐에 이르고 북으로 한해에 임하는 등 곧 흉노의 옛 땅으로서 날랜 병사가 20만이며 그의 두 아들을 남쪽과 북쪽의 부락에 세웠다. 태종이 또한 r들의 강성함이 후환이 될 것이라 두려워하였다.
12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예를 갖추어 책봉하고 그 두 아들을 임명하여 모두 소가한으로 삼으니 겉으로는 우대하여 높여 줌을 나타내 보이면서 실제로는 그 세력을 나누고자 했다. 마침 조정에서 이사마를 세워 가한으로 삼고는 그 부락의 무리를 사막의 남쪽 땅에 자리하게 하니 이남이 마음으로 사마를 미워하여 매우 불쾌해 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5
⊙十五年, <太宗>幸<洛陽>, 將有事於<太山>, <夷男>謀於其國曰: [天子封<太山>, 萬國必會, 士馬皆集, 邊境空虛, 我於此時取<思摩>如拉朽耳.] 因命其子<大度設>勒兵二十萬, 屯<白道川>, 據<善陽嶺>以擊<思摩>之部. <思摩>遣使請救, 詔<英國公><李勣>·<蒲州>刺史<薛萬徹>率步騎數萬赴之. 踰<白道川>至<靑山>, 與<大度設>相及, 追之累月, 至<諾眞水>, <大度設>知不脫, 乃 十里而陳兵. 先是, <延陀>擊<沙鉢羅>及<阿史那社爾>等, 以步戰而勝. 及其將來寇也, 先講武於國中, 敎習步戰, 每五人, 以一人經習戰陣者使執馬, 而四人前戰, 克勝卽授馬以追奔, 失應接罪至於死, 沒其家口, 以賞戰人, 至是遂行其法. <突厥>兵先合輒退, <延陀>乘勝而逐之. <勣>兵拒擊, 而<延陀>萬矢俱發, 傷我戰馬. 乃令去馬步陣, 率長 數百爲隊, 齊奮以衝之, 其衆潰散. 副總管<薛萬徹>率數千騎收其執馬者, 其衆失馬, 莫知所從, 因大縱, 斬首三千餘級, 獲馬萬五千匹, 甲仗輜重不可勝計. <大度設>跳身而遁, <萬徹>將數百騎追之, 弗及. 其餘衆大奔走, 相騰踐而死者甚衆, 伏屍被野, <夷男>因乞與<突厥>和, 幷遣使謝罪.

15년에 태종이 낙양에 행차하여 장차 태산에서 의식을 치르려 하자 이남이 그의 나라에서 모의하여 이르기를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의 예를 치르면 온 나라가 반드시 모이고 사졸과 군마가 모두 집결하여 변경이 공허할 것이니 내가 이때 사마를 쳐서 잡는 것은 마치 썩는 나무를 미는 것과 같을 뿐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 아들 대도설에게 명하여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백도천에 진을 치고 선양령을 점거하여 사마의 부락을 공격하였다. 사마가 사신을 보내 구조를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 영국공 이적과 포주자사 설만철로 보병과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향하게 하였다. 백도천을 넘어 청산에 이르러 대도설과 서로 맞닥뜨려 그를 추격하기를 몇 개월 만에 낙진수에 이르자 대도설이 벗어나지 못함을 알고는 10리에 걸쳐 병사를 벌여 놓았다.
이보다 앞서 연타가 사발라 및 아사나사이등을 칠 때 보병전으로 승리하였다. 그 장수들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기에 이르러 먼저 나라 안아에서 무예를 연습할 때 보병전을 가르쳐 익히니 매양 다섯 사람 가운데 전투의 진영을 익혀 본 한 사람에게 말을 잡게 하고 네 사람은 앞으로 나가 싸우다가 이기면 곧 말을 내보내어 패주하는 군사를 추격하게 하는데 호응의 시기를 놓치면 그 죄가 죽음에 이르고 그의 집안은 몰수를 당하여 다른 전사에게 상으로 주어지니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그 법이 시행되었다.
돌궐의 군사가 먼저 싸워 번번이 물러나자 연타가 승세를 타고 그를 추격하였다. 이적의 군사가 막아서 공격하자 연타는 많은 화살을 동시에 날려 우리의 전투마를 부상시켰다. 이에 영을 내려 마을 치우고 보병으로 진을 치고는 긴 창 수백 개로 대오를 편성하여 거느리고 가지런히 분발하여 그들과 부딪치니 그 무리들이 무너져 흩어졌다. 부총관 설만철이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말을 부리던 자들을 거두어 들이니 그 무리들이 말을 잃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기에 크게 군사를 놓아

3천여 급의 머리를 베고 1만 5천 필의 말을 노획하였으며 갑옷과 병장기 등의 군수품을 수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대도설이 몸을 빼서 달아나자 만철이 수백 기를 거느리고 그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 나머지 무리들이 크게 달아나 도망하여 서로 밟고 넘어가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아 주검이 들녘을 뒤덮었으며 이남은 돌궐과 화해를 구걸하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6
⊙十六年, 遣其叔父<沙鉢羅><泥熟俟斤>來請婚/$各本原作[泥敦策斤], 據《冊府》卷九七八·《通鑑》卷一九六改.$/, 獻馬三千匹. <太宗>謂侍臣曰: [北狄世爲寇亂, 今<延陀> 强, 須早爲之所. 朕熟思之, 唯有二策: 選徒十萬, 擊而虜之, 滅除凶醜, 百年無事, 此一策也; 若遂其來請, 結以婚姻, 緩 羈 , 亦足三十年安靜, 此亦一策也. 未知何者爲先?] 司空<房玄齡>對曰: [今大亂之後, 瘡痍未復, 且兵凶戰危, 聖人所愼. 和親之策, 實天下幸甚.] 太宗曰: [朕爲蒼生父母, 苟可以利之, 豈惜一女?] 遂許以<新興公主>妻之. 因徵<夷男>備親迎之禮, 仍發詔將幸<靈州>與之會. <夷男>大悅, 謂其國中曰: [我本<鐵勒>之小帥也, 天子立我爲可汗, 今復嫁我公主, 車駕親至<靈州>, 斯亦足矣.] 於是稅諸部羊馬以爲聘財, 或說<夷男>曰: [我<薛延陀>可汗與<大唐>天子俱一國主, 何有自往朝謁? 如或拘留, 悔之無及.] <夷男>曰: [吾聞<大唐>天子聖德遠被, 日月所照, 皆來賓服. 我歸心委質, 冀得覩天顔, 死無所恨. 然 北之地, 必當有主, 捨我別求, 固非大國之計. 我志決矣, 勿復多言.] 於是言者遂止. <太宗>乃發使受其羊馬, 然<夷男>先無府藏, 調斂其國, 往返且萬里, 旣涉沙 , 無水草, 羊馬多死, 遂後期. <太宗>於是停幸<靈州>. 旣而其聘羊馬來至, 所耗將半. 議者以爲夷狄不可禮義畜, 若聘財未備而與之婚, 或輕中國, 當須要其備禮, 於是下詔絶其婚, 旣而<李思摩>數遣兵侵掠之, <延陀>復遣<突利失>擊<思摩>, 至<定襄>, 抄掠而去. <太宗>遣<英國公><李勣>援之, 見虜已出塞而還. <太宗>以其數與<思摩>交兵, 璽書責讓之.

16년에 그의 숙부 사발라 니숙사근을 보내와서 청혼하며 말 3천 필을 바쳤다. 태종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북쪽의 적인들이 대대로 도적질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더니 이제는 연타가 강성하여 우뚝 솟아 있기에 모름지기 일찍 그를 위해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짐이 이를 심사숙고함에 단지 두 가지 대책이 있을 뿐이니 10만의 무리를 가려 뽑아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멸해버려 1백년 동안 무사하도록 하는 것이 한 책략이요 만약에 그들이 와서 요청하는 것에 '따라 혼인을 맺음으로서 고삐와 굴레의 속박을 느슨히 하면 역시 30년은 족히 안정될 것인즉 이것이 하나의 대책이 될 것이다. 무엇이 우선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사공 방현령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지금은 크게 혼란한 뒤이기에 아직 전란의 상처가 회복됮 않았으며 더욱이 군사도 드물어 전세가 위태로울 것이니 이는 성인께서도 삼가 는 바입니다. 화친의 책략이 실로 천하에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짐은 창생의 부모가 되니 진실로 오 세상을 이롭게 한다면 어찌 여식 하나를 아끼겠는가?]
하고 마침내 허락하여 신흥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리하여 이남을 불러 친영의 예를 갖추게 하고 이에 조서를 내려 장차 영주로 행차하여 그와 더불어 만나고자 하였다.
이남이 크게 기뻐하고 그 나라 안에 이르기를
[나는 본디 철륵의 작은 우두머리였는데 천자께서 나를 세워 가한으로 삼더니 이제 다시 공주를 나에게 시집보내려고 천자의 수레가 친히 영주에 이르니 이 역시 만족할 일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부락의 양과 말을 거두어 빙례의 폐물로 삼고자 하니 어떤 이가 이남에게 이르기를
[우리 설연타의 가한과

대당의 천자는 모두 함께 한나라의 주인인데 어찌 스스로 가서 예방하고 배할 할수 있습니까? 만약에 혹시라도 구류된다면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니 이남이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 대당 천자의 성스러운 덕망을 멀리까지 미치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모두 와서 붙쫓는다 하였다. 내가 마음으로 붙좇고 몸을 바치는 것은 천자의 용안을 뵐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막 북쪽의 땅에도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하니 나를 버리고 따로 구한다면 진실로 대국의 계책이 아닐 것이다.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다시는 많은 말을 말라]
하므로 말하던 자가 마침내 그쳤다.
태종이 이에 사신을 보내 그들의 양과 말을 받고자 하였으나 이남이 먼저 곳간에 넣어둔 것이 없어 그 나라에서 거두어들이고 있었으니 갔다가 오는 길이 또한 1만리 길이요 모래와 자갈의 벌판을 건너고 물과 풀이 없기에 많은 양과 말이 죽어서 마침내 훗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태종이 그럴 즈음에 행차를 영주에서 멈추었다. 그러다 빙례품인 양과 말이 도착하였는데 감해진 것이 거의 절반이었다. 논의하기를 이적들은 예의로서 길들이지 못하니 만약 빙례의 재물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그들과 혼인한다면 혹시라도 중국을 경시할 것인 바 마땅히 그들이 예절을 갖추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며 조서를 내려 그 혼사를 끊었더니 이미 이사마가 수 차례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침략하여 노략질하고 연타가 다시 돌리실을 보내 사마를 공격하며 정양에 이르러 노략질하고 갔다. 태종이 영국공 이적을 파견하여 그를 원조하였는데 오랑캐들이 이미 변방을 나선 것을 보고 돌아왔다. 태종이 그들이 수 차례 사마와 싸움을 치르자 새서를 내려 이를 꾸짖었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7
⊙十九年/$各本原作[十七年], 據本書卷三《太宗紀》及卷一九九《高麗傳》·《通鑑》卷一九八改.$/, 謂其使人曰: [語爾可汗, 我父子 東征<高麗>, 汝若能寇邊者, 但當來也.] <夷男>遣使致謝, 復請發兵助軍, <太宗>答以優詔而止. 其冬, <太宗>拔<遼東>諸城, 破<駐 陣>, 而<高麗>莫離支潛令<靺鞨> 惑<夷男>,  以厚利, <夷男>氣 不敢動. 俄而<夷男>卒, <太宗>爲之擧哀. <夷男>少子<肆葉護拔灼>襲殺其兄<突利失可汗>而自立, 是爲< 利俱利薛沙多彌可汗>. <拔灼>性 急, 馭下無恩, 多所殺戮, 其下不附. 是時復以<太宗>尙在<遼東>, 遂發兵寇<夏州>, 將軍<執失思力>擊敗之, 虜其衆數萬, <拔灼>輕騎遁去, 尋爲< 紇>所殺, 宗族殆盡. 其餘衆尙五六萬, 竄於<西域>, 又諸姓俟斤遞相攻擊, 各遣使歸命.

19년에 그 사사에게 이르기를
[너희 가한으로 말하자면 우리 부자가 나란히 동쪽으로 고려를 정벌하고 있을 때 너희가 능히 변경을 노략질 할 수 있다고 여겨지면 그제야 들어올 것이다.]
하였다. 아님이 사자를 보내 사죄하고 다시 군사를 내어 군대를 도울 것을 청하였는데 태종이 부드러운 조서로서 답하고 그만두게 하였다. 그해 겨울에 태종이 요동의 여러 성들을 공략하여 배앗고 주필의 진영을 격파하자 고려의 막리지가 몰래 말갈로 하여금 이남을 속이고 유혹하여 후한 이익으로 꾀게 하였다. 이남은 마음으로 두려워하며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이남이 죽자 태종이 그를 위해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이남의 작은 아들 사엽호발작이 그의 형 돌리설가한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스스로 자리에 올라 힐리구리사다미가한이 되었다. 발작의 성격은 편협되고 급하며 아랫사람들 부리는데 있어 은혜를 베푸는 일이 없이 많이 살육하니 가의 아랫사람들이 붙좇지 않았다.
이때 다시 태종이 오래도록 요동에 있는다 하여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하주를 노략질 하니 장군 집실사력이 그를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그 무리 수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발작은 말을 가볍게 하여 달아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회홀에 의해 살해되니 그의 친족들은 거의 다 멸해졌다. 그 나머지 무리들이 아직은 5,6만 명이 되었는데 서역으로 달아나 숨었으며 또 모든 씨족의 사근들이 번갈아 서로를 공격하며 하자 사신을 보내 천자의 명에 귀순하였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8
⊙二十年, <太宗>遣使<江夏王><道宗>·左衛大將軍<阿史那社爾>爲<瀚海道>安撫大使; 右領軍大將軍<執失思力>領<突厥>兵, <代州>都督<薛萬徹>·<營州>都督<張儉>·右驍衛大將軍<契苾何力>各統所部兵分道 進; <太宗>親幸<靈州>, 爲諸軍聲援. 旣而<道宗>渡 , 遇<延陀>餘衆數萬來拒戰, <道宗>擊破之, 斬首千餘級.

<萬徹>又與< 紇>相遇, 二將各遣使諭以綏懷之意, 其酋帥見使者, 皆頓 歡呼, 請入朝. <太宗>至<靈州>, 其<鐵勒>諸部相繼至數千人, 仍請列爲州縣, 北荒悉平. 詔曰:
20년에 태종이 사신 강하왕 도족을 파견하여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를 한해도안무대사로 삼았으며 우령군 대장군 집실사력은 돌궐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대주도독 설만철과 영주도독 장검 및 우효대장군 계필하력 등은 각기 부락의 군사를 통솔하고 길을 나누어 일제히 나라가게 하였으며 태종은 친히 영주에 행차하여 모든 군대에 성원이 되어 주었다.
이미 도종이 사막을 건너서자 연타의 나머지 무리 수만명이 와서 저항하며 싸우므로 도종이 그들을 격파하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만철이 또 회홀과 더불어 서로 마주치자 두 장수가 각기 사자를 파견하여 믿고 따르면 받아들일 거시라는 뜻을 피력하니 그 우두머리들이 사자를 보고 모두 이마를 조아리고 환호하며 들어와 예방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영주에 이르자 철륵의 여러 부락들이 연이어 이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으며 거듭 주와 현의 대열에 들게 하여 줄 것을 청하니 이로서 북쪽의 벌판이 모두 평정되었다. 조서에 이르기를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09-(詔1/1)
⊙惟天爲大, 合其德者弗違; 謂地蓋厚, 體其仁者光被. 故能彌綸八極, 輿蓋二儀, 振絶代之英聲, 畢天下之能事. 彼<匈奴>者, 與開闢而俱生; 奄有龍庭, 共上皇而 列. 僭稱驕子, 分天街於紫宸; 仰應 頭, 抗大禮於皇極. 緬窺邃古, 能無力制. 自朕臨御天下, 二紀于 ,  以 身, 一匡 宇. 始勤勞於昧旦, 終致治於昇平.  者聊命偏師, 遂擒< 利>; 今 始弘廟略, 已滅<延陀>. 雖麾駕出征, 未踰郊甸; 前驅所 ,  掩塞垣. 長策風行, 已振<金微>之表/$[微]字各本原作[徽], 據本書卷一九四上《突厥傳》·《 宇記》卷一九六·《新書》卷四三下《地理志》·《冊府》卷一二改.$/, 揚威電發, 遠 沙場之外. <鐵勒>諸姓·< 紇>胡祿俟利發等/$[胡]字各本原作[月], 據《唐大詔令集》卷七九·《冊府》卷一二改.$/, 總百餘萬戶, 散處北溟, 遠遣使人, 委身內屬, 請同編列,  爲州郡. 收其<澣海>, 盡入提封; 解其 髮,  垂冠帶. 上變星昴, 歸於東井之 ; 下掩< 林>,  入<南山>之 . 混元已降, 殊未前聞; 無疆之業, 永貽來裔. 古人所不能致, 今旣呑之; 前王所不能屈, 今咸滅之. 斯實書契所未有, 古今之壯觀, 豈朕一人獨能宣力/$[宣力]二字各本原無, 據《唐大詔令集》卷七九·《冊府》卷一二補.$/. 蓋由上靈儲祉, 錫以太康; 宗廟威靈, 成 克定. 卽宜備禮, 告于淸廟, 仍頒示普天.

[생각건대 하늘은 행하는 바가 크니 그 덕스러움에 하나되는 자는 어그러짐이 없으며 땅은 덮고 있는 덕이 두터우니 그 인자함을 체득한 자는 그 빛이 멀리까지 미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능히 팔방을 두루 다스리고 하늘과 땅을 마주들어 존숭하는 것은 바로 절세의 빼어난 명예를 떨치는 것이요, 천하의 소용되는 일을 다하는 것이다. 저들 흉노는 개벽과 드불어 함께 생겨났으며 용정을 모두 점유하고 윗 황제들과 함께 나란히 늘어서있었다. 참칭한 교만한 아이의 법도 가운데 커다란 예절을 거스르더구나 먼 옛날을 생각하여 보면 능히 힘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짐이 천하에 임하여 다스리고부터 이 땅에 기강을 세우고 작은 몸으로 덕을 두텁게 하여 헌 번에 천하를 구제하였다. 어둑한 새벽녘에 시작하여 부지런히 힘쓰니 결국에는 다스림이 태평한 세상에 이르게 되었다. 지난번은 하늘의 명에 힘입어 오로지 군대로서 마침내 힐리를 사로잡았으나 이번에는 비로소 조정에서 의결한 계책을 널리 펴서 이미 연타를 멸하였다. 비록 깃발을 세우로 수레를 몰아 출정하였지만 도읍에서 가까운 시골을 넘지 않았으며 앞서 몰아 내보냈던 삐꺽이는 수레는 가까스로 변방의 담을 가렸을 뿐이었다. 원대한 계책이 바람같이 시행되니 이미 금미의 표로서 위세를 떨쳤으며 위엄을 드날리고 섬광같이 일어나니 멀리 사막의 바깥까지 두려움에 기가 꺾이었다. 철륵의 여러 성씨들과 회흘의 호록사리발 등 총 1백만여 호가 북쪽의 큰 바다에 흩어져 거처하여 멀리서부터 사자를 보내 내지로 복속하여 몸을 위타하며 같이 반열에 편성되기를 청하여 아울러 주와 군이 되고자 하였다. 그들의 한해를 거두어들이고 모두 피봉의 강역으로 맞아들여씅며 그들의 변발을 풀고 아울러 관과 띠를 드리우게 하였다. 위로는 묘수의 별자리가 변하여 동쪽 우물의 궤도로 붙쫓아 돌아왔으며 아래로는 대림을 가리고 남산의 동산을 소매 안으로 들였다. 천지는 이미 평온히 가라앉으니 이러한 일은 앞서 특별히 들어보지 못하였으며 무궁한 위업은 후세에 영원히 물려 줄 것이다. 옛 사람들이

능히 닿지 못하였던 곳을 이제 이미 병탄하였으며 앞선 왕들이 능히 굴복시키지 못하였던 것을 이제 모두 소멸시켰다. 이는 실로 어떠한 글에도 있지 않은 바이며 또한 고금의 장관이니 어찌 짐 한 사람만이 홀로 힘을 펼친 것이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신령들께 복을 쌓음으로 말미암아 태평성세를 주시는 것이요 종묘 신령의 위광으로 말미암아 능히 더욱더 안정을 이루는 것일 터이다. 곧 마땅히 예를 갖추어 맑은 묘역에 아뢰고 이에 널리 천하에 반포하는 것이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10
⊙其後<延陀>西遁之衆, 共推<夷男>兄子< 摩支>爲<伊特勿失可汗>, 率部落七萬餘口, 西歸故地. 乃去可汗之號, 遣使奉表, 請居<鬱督軍山>北. 詔兵部尙書<崔敦禮>就加綏撫. 而諸部<鐵勒>素服<薛延陀>之衆, 及< 摩支>至, 九姓渠帥莫不危懼. 朝議恐爲 北之患, 復令<英國公><李勣>進加討擊. <勣>率九姓<鐵勒>二萬騎至于<天山>. < 摩支>見官軍奄至, 惶駭不知所爲, 且聞詔使<蕭嗣業>在< 紇>中, 因而請降. <嗣業>與之俱至京師, 詔授右武衛將軍, 賜以田宅. < 摩支>入國後, <鐵勒>酋帥潛知其部落, 仍持兩端. <李勣>因縱兵追擊, 前後斬五千餘級, 虜男女三萬計.

그 후에 서쪽에 숨어있던 연타의 무리들이 함께 이남의 형의 아들 돌마지를 추대하여 이특물실가한으로 삼고 부락 7만여 가구를 통솔하여 서쪽 옛 땅으로 돌아갔다. 이에 가한의 칭호를 없애고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며 올둑군산의 북쪽에 거처하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병부상서 최돈례가 가서 인끈을 더하여 주고 위무하였다. 그러나 철륵의 모든 부락들은 평소에 설연타의 무리에게 복종하였기 때문에 돌마지가 도착하자 아홉 성씨의 우두머리 가운데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사막 북쪽의 근심이 돌 것이라 두려워하고 다시 영국공 이적에게 명하여 나아가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적이 아홉 성씨의 철륵 2만 기병을 거느리고 천산에 이르렀다. 돌마지가 관군이 갑자기 이른 것을 보고 두렵고 놀라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에 조서를 지닌 사신인 소사업이 회홀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로 말미암아 항복을 청하였다. 사업이 그와 더불어 함께 경사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우무위장군에 제수하고 밭과 저택을 하사하였다. 돌마지가 입국한 후에 철륵의 우두머리가 그의 부락과 은밀히 사귀어 두 마음을 품었다. 이적이 이에 병사를 보내어 쫓아가 쳐서 연이어 5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으며 남녀 3만을 사로잡았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11
⊙二十一年/$各本原作[二十二年], 據《通典》卷一九八改.《突厥集史》:[二十二爲二十一訛. 下文云是歲大 ,《元龜》八 固在二十一年正月甲寅也.]$/, <契苾>·< 紇>等十餘部落以<薛延陀>亡散殆盡, 乃相繼歸國. <太宗>各因其地土, 擇其部落, 置爲州府: 以< 紇>部爲<瀚海都督府>, <僕骨>爲<金微都督府>, <多覽葛>爲<燕然都督府>, <拔野古>部爲<幽陵都督府>, <同羅>部爲<龜林都督府>, <思結>部爲<盧山都督府>, <渾>部爲<皐蘭州>, <斛薛>部爲<高闕州>, <奚結>部爲< 鹿州>, <阿跌>部爲< 田州>, <契苾>部爲<楡溪州>, <思結>別部爲< 林州>, <白 >部爲< 顔州>, 凡一十三州. 拜其酋長爲都督·刺史, 給玄金魚以爲符信, 又置<燕然>都護以統之. 是歲, <太宗>以<鐵勒>諸部 皆內屬, 詔賜京城百姓大 三日. <永徽>元年, <延陀>首領先逃逸者請歸國, <高宗>更置<溪彈州>以安恤之. 至<則天>時, <突厥>强盛, <鐵勒>諸部在漠北者漸爲所倂. < 紇>·<契苾>·<思結>·<渾部>徙于<甘>·< >二州之地.

21년에 게필과 회흘 등 열 개 남짓의 부락이 설연타가 패망하여 흩어지고 거의 다 멸망하게 되자 연이어 귀국하였다. 태종이 각각 종전대로 그들의 땅에 따라 부락을 택하게 하고 주와 부를 설치하였으니 회홀부를 한해도독부로 삼고 복골을 금미도독부로 삼고 다람갈을 연연도독부로 삼고 발야고부를 유릉도독부로 삼고 동라부를 귀림도독부로 삼고 사결부를 노산도독부로 삼고 혼부를 고란주로 삼고 곡설부를 고궐주로 삼고 해결부를 계록주로 삼고 아질부를 계전주로 삼고 계필부를 유계주로 삼고 사결별수를 대림주로 삼고 백습부를 치안주로 삼는 등 무릇 13주이다. 그들의 추장을 임명하여 도독과 자사를 삼고 현금어를 주어 이로 부절의 신표로 삼게 하였으며 또 연연도호를 설치하여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이해에 태종이 철륵의 여러 부락을 아울러 모두 내지로 복속시키고 조서를 내려 경성의 백가지 성씨를 하사하고 술과 음식을 크게 내려 주어 사흘 동안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영휘(永徽650~655) 원년에 연타의 수령 선도일이란 자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고종이 다시 계탄주를 설치하여 그를 구휼하였다. 측천 때 이르러 돌궐이 강성해지자 사막의 북쪽에 있던 철륵의 여러 부락들이 점차 병탄되었다. 회흘( 紇) 계필(契苾) 사결(辭訣) 혼부(渾部) 등이 감주와 양주의 땅으로 옮겼다.

舊唐書卷199下-列傳第149下-鐵勒-12/12
⊙其<骨利幹>北距大海, 去京師最遠, 自古未通中國. <貞觀>中遣使來朝貢, 遣雲麾將軍<康蘇密>往慰撫之, 仍列其地爲<玄闕州>. 俄又遣使隨<蘇密>使入朝, 獻良馬十匹. <太宗>奇其駿異, 爲之制名, 號爲十驥: 一曰<騰霜白>, 二曰<皎雪 >, 三曰<凝露 >, 四曰<懸光 >, 五曰<決波 >, 六曰<飛霞驃>, 七曰<發電赤>, 八曰<流金 >, 九曰< 麟紫>, 十曰<奔虹赤>. 又爲文以敍其事. 自<延陀>叛後, 朝貢遂絶.
그들 가운데 골리간은 북쪽으로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으니 경사로부터 가장 멀며 예로부터 중국과 왕래하지 않았다.
정관(貞觀627~649)연간에 사신을 보내와서 조공하니 운휘장군 강소밀을 파견하여 가서 그들을 위무하고 그 땅을 내지의 반열에 들게 하여 현궐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또 강소밀을 따라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고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태종이 그 말들이 훌륭하고 특이한 것을 신기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열마리 천리마라고 일컬었으니 첫 번째를 등상백이라 하고 두 번째를 교설총이라 하고 세 번째를 응로총이라 하고 네번째를 현광총이라 하고 다섯 번째를 결파유라 하고 여섯 번째를 비하표라 하고 일곱 번째를 반전적이라 하고 여덟 번째를 우금과라 하고 아홉 번째를 고린자라 하고 열 번째를 분홍적이라 하였다. 또 글을 지어 그 일을 서술하였다. 연타가 반역한 후로 조공이 마침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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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
619('10)-08-19 00:56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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