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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21편
옥선과 희진이 부모 없이 부산에 나앉다가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갔다. 이들은 부산에 있는 다방을 마담에게 넘겨주고 미련도 후회도 없이 서울 살이가 시작했다. 서울에서 이들은 새로운 일을 모색해야만 했다. 희진이 손재주도 좋고 하니 양재점(洋裁店)을 하나 차릴까 궁리를 해보았으나 양재학원에 다녀야 할 정도로 실력이 좋지 않다며 극구 사양하는 것이었다. 희진은 언니처럼 전문학교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고 언니와 같이 다방을 운영할 수 있었던 거다. 홀연히 마치 남처럼 떠났던 서울에 돌아온 이들 자매는 옥수동(玉水洞)에다 살림을 차렸다. 이들은 마장동으로 이사를 간 경빈네 일가에서 쫓겨나오다시피 한 연심이네를 다시 불러들여 같이 살림을 꾸리자고 제안했고 연심이 때마침 상점에서 일하러 가지 못하게 되면서 서울에 올라갈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던 거다. 게다가 부산이라는 곳은 살림도 험할 뿐만 아니라, 여름이면 태풍에 신경이 곤두서서 가뜩이나 해안에 위치한 판자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는, 살기가 매우 척박한 곳이다. 그렇기에 연심이네도 덩달아 서울에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옥수동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하얀 색 양옥 한 채가 바로 옥선이네 집이다. 2층짜리 집이었고 마당도 아담하게 있었다.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여자들끼리 살림을 꾸린 덕분인지 깔끔하고 정갈했다. 부산에 살았을 때랑은 상황이 매우 다른 까닭이다. 희망에 부푼 이들은 날씨가 좋기도 하여 이부자리들을 꺼내어 발로 빨래를 빨고 마당에 설치된 빨랫줄에다 널어놓는다. “에고, 산뜻하다.” 마치 제 몸에 묵은 때를 벗긴 기분이 드는 것처럼 희진이 말했다. “그렇게 좋니?” 옥선은 발랄한 희진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말없이 희진이 상긋 웃어대는 것이다. ―단기 4288년 봄이 되었다. 서울의 하늘은 한없이 푸르기 한량없다. 창경원(昌慶苑) 뜰 앞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하여 꽃비를 내리고 동물원이나 식물원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놀이기구도 작동하기도 한다. 고휴철(高休徹)이 친구 하나를 대동하고 창경원 나들이를 나온 것이다. 둘은 하나같이 교모를 눌러쓰고 교복 차림으로 봄맞이를 나온 거다. 고휴철의 옷차림은 약간 구겨지고 있어 반듯한 차림새가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학생의 모양은 반듯하여 모범생이라 불릴 만한 모양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학자금으로 인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둘 뻔했던 웅규였다. 웅규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창경원 나들이를 나왔다. 학교 공부에 지쳐 분위기를 전환할 겸 나온 것이다. 웅규는 부산에서 은사금을 해결하여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로부터 서울에 가서 공부하여 학업을 이어갈 것을 권하여 서울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웅규를 먼저 서울로 올라가면서 친척 집에 잠시 동안 머물다가 얼마 전부터 중학교에 같이 입학한 휴철로부터 자신의 집에서 하숙하는 것을 권하여 같이 생활해오는 처지였다. 이들은 창경원에서의 벚꽃구경을 마친 뒤 밖으로 나와 보니 날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이들은 돈암동(敦岩洞) 방향으로 가는 전차에 올라탔다. 전차 안에는 창경원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인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두 학생의 얼굴에선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웅규야, 넌 벚꽃구경을 하면서도 별다른 감흥(感興)이 없었니?” 넌지시 물어보는 친구의 말에 웅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웅규나 휴철은 모두 지체가 높았다지만 휴철은 덜렁대다 못해 건달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웅규는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게다가 학교에서의 성적이 상위권에 머물러 있어 전교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기는 부산에서 찹쌀떡 장사를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 궁핍이 심한데다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를 내성적인 성격으로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휴철이 일행은 삼선동(三仙洞)에 다다른 전차로부터 내려섰다. 휴철의 집이 삼선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삼선동은 부산에 살 때와 마찬가지로 언덕이 가파른 까닭에 마치 계단식처럼 집들이 즐비하게 자리해 있어 무수히 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이들은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결코 힘든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묵묵히 걸어간다. 휴철이네 집은 중턱에 자리해 있었다. 자그맣고 아담한 집이었다. “엄마.” 그의 성격답게 거침없이 집에 들이닥치듯 들어가서 굵직한 목청으로 휴철이 기척을 내자 나이든 여자가 밖에서 나왔다. “느이들 잘 왔구나. 그러잖아도 너희들이 출출해할 것 같기에 수제비를 좀 끓이려던 참이었다.” 두 학생은 모두 작은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와 세수하기 시작했다. 휴철이 어머니 황숙(黃淑)은 삼선동에 자리 잡은 지 이 년이 되어간다. 그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복동(光復洞)에 살며 국제시장(國際市場)에서 행상으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품들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도 고등교육을 받은 바가 있었지만 시류를 따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을 이기지 못한 채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더욱이 남편 고 서방은 전쟁을 겪어 국군으로 징집되어 참전하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한쪽 팔을 잃은 채 상이군인(傷痍軍人)이 되어 돌아왔다. 이때 황숙이 낙심할 새 없이 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랬는데 어머니로부터 한 가닥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네 이모한테 부탁해서 휴철이 학비는 물론이고, 고 서방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힘써보겠다고 하더구나.” 어머니 나씨가 설레발로 딸에게 찾아오며 남긴 소식을 듣고, 황숙은 깊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고 서방이 전쟁 때 잃은 팔이 왼팔이었기에 의수(義手)를 써도 무방하였고 평소 오른팔을 위주로 썼으므로 글을 쓸 때도 용이했다. 해서 이모 구청에 서기보(書記補)로 일할 수 있게 된 거다. 게다가 휴철의 중학교 학비를 대주겠다고 하니 생계에 대한 막연한 걱정에서부터 벗어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황숙은 그 덕분에 밥 먹는 것 이외에는 걱정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저 이 생활이 유지되기만을 소망할 뿐이었다. 해서 그녀는 오늘 시장에서 나오다가 미국에서 보내준 밀가루 한 봉지와 애호박, 대파, 그밖에 말린 멸치를 사다가 수제비로 만들어 먹으려고 했다. 저녁이 되어 막 어두워질 즈음 남편 고 서방이 집안에 들어섰다. 고휴철과는 달리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묵직하게 과일을 담은 큰 봉지를 들고 들어섰고 뒤에 한 사람이 더 들어섰다. 그는 꽤 나이든 여자였는데 그녀 역시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채 들어섰다. “여보 나 왔소.” “에고, 엄마도 오셨구려.” 이때 휴철이 “할머니.” 하며 마중 나오자 할머니는 반가운 마음에 손자 얼굴을 어루만졌다. “우리 손주 잘 있었나?” 하며 큰 손주의 엉덩이를 두드린다. 이때 황숙은 어머니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저희 집에 찾아오시구,” 하며 어머니의 의중을 물었다. “응, 다름이 아니라 내 공 참봉 집에 다녀오는 길이다.” 황숙의 어머니 나씨는 공 참봉의 부인과 자매 지간이었다. 공 참봉 부인에게는 언니가 된 아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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