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20일 (수) 17:00  [유시(酉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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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4책
창사(昌史) 제16권  目錄

임오년(2002) 8월 기사본말(壬午年 八月 紀事本末)


◎ 녹훈(錄勳) 대상자에 대한 본격적인 논공(論功) 시작

○ 7월 26일에 녹훈도감 정사 이휘가 그간 각 아문과 팔도에서 각 분야의 공로자에 대한 명단을 정리하여 세권의 계본으로 묶어 상께 올리었다. ■# ■# ■#
이에 따라 상께서 전교하시기를,
"도감에서 정리한 명단과 약력을 기초로 창국(昌國) 초기부터 지금까지 각 관청과 법령, 제도의 기틀을 세우고 그것을 정비하고 시행하는 데 크게 노력한 자와 지속적인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인사, 자력, 교육 등의 분야에서 분명한 행적을 남긴 자,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있는 행동을 보였거나 그것을 드러내는 데 일조한 자, 그렇지 못한 악한 일이나 사건을 논죄하고 처벌하는 데 최선을 다한 자, 팔도 각 지역 활성화에 기여한 자 등에 관해 여러 차례에 걸쳐 두루 논의하여 최종 명단을 정하도록 한다."
하시니,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본격적인 논공(論功)에 들어갔다고 평할 수 있다. 《녹훈도감의궤》 ■#

○ 8월 9일에 녹훈도감 정사 이휘가 정공신 대상자와 원종 1, 2등 대상자를 각각의 약력과 공적을 더불어 아뢰니, 이로써 녹훈 대상자의 대강(大綱)이 세워졌다. 녹훈도감에서 아뢴 명단을 보면 정공신 대상자에 통정대부 이완을 비롯한 19인, 원종1등에 봉직랑 윤희승(尹熙勝)을 비롯한 15인, 원종2등에 경상도 백성 유병호(兪炳豪)를 비롯한 18인이었다. 이에 대해 상께서는 몇몇 후보자들의 이름을 거론(擧論)하시며 이들이 과연 공신으로서 합당한 공적이 있는가에 대해 다시금 재론토록 하교하시었다. 이후 조정 각 아문에서는 아문내의 논의를 거쳐 공신 대상자들의 명단과 공적을 계하였다. 《녹훈도감의궤》 ■#


◎ 창국 제2주년 기념교서(紀念敎書) 반포 ■#

○ 본조가 창국(昌國)하게 된 지 2주년이 되는 8월 15일에 국왕 전하의 창국 2주년 교서가 중외(中外:조정과 민간)에 반포되었다.
15일 오전에 내려진 교서의 주요 내용은 '창국 이래 조정의 성장과 발전 표명', '2년간 신하와 백성들의 노고 치하', '앞으로의 국정 수행 다짐', '2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혜택 시행'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은전(恩典:특별한 혜택)의 시행 내용은,
1) 종3품 이하 유품자 가운에 평정으로 승품된 경력이 있는 자 1계 가계
2) 현재 성균관 유생 가운데 품계가 없는 자로 원점 3점 이상인 자와 소과 입격자로 각도 관청에 관속으로 있는 자는 희망자에 한해 우선 종9품을 주고, 후에 평정하여 결과가 승품점에 이르면 품계를 몰수하지 않음
3) 남은 하옥 기간이 1년 이하인 자는 집행을 유예하여 조기 방면하고, 1년 이상인 자는 역시 집행을 유예하여 하옥 기간을 절반으로 감형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이외에도 창국 2주년을 기념한 별시(別試) 시행이 교서에서 언급되었다. 《관보 제28호》


◎ 장종(章宗), 존호(尊號) 받기를 거부 ■#

○ 의정부에서 창국 2주년에 즈음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고자 '효공정강혜정렬제(孝恭靖剛惠定烈齊)'로 글자를 정한 후, 조정 관원들의 연명을 받아 창국 기념일에 옥책문(玉冊文)과 함께 계본을 올렸다. 예조에서는 따로 창국경하(昌國慶賀)와 왕의 만년성수(萬年聖壽)를 기원하는 시문(詩文)을 올렸다. 비답하시기를, "과인이 무슨 염치가 있어 존호 여덟 자(字)를 받겠는가. 옛날의 임금들은 스스로 공덕(功德)이 적지 않아 존호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과인은 어제 교서한 바와 같이 실덕(失德)이 도를 지나쳤으니 감히 생전에 신하들로부터 존호를 받을 수 없다. 과인의 생각이 이처럼 단호하니, 거듭 존호를 올리지 말 것이다." 하시면서 받지 않으셨고, 동년 9월 10일에 예조에서 다시 청하자 "천하에 큰 덕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존호를 올려 그 덕을 칭송해야 하겠지만, 어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허송세월하는 과인에게까지 존호를 올린다고 하는 것인가. 진실로 자격이 없어 그런 것이지, 세 번 사양하는 허례(虛禮)를 갖추고자 이러한 비답을 내리는 것이 아님에 유념하라. 앞으로 이 일을 다시 거론하는 자가 있다면 응당 마땅한 처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셨으니, 왕께서 스스로 삼가고 겸허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장종대왕문서》


◎ 지역별 특색화 제도 시행

○ 창국을 기념하여 제9차 별시를 특설(特設)하고 이날부터 지역별 특색화 제도를 시행하셨다. 특색화 제도는 당시 침체해 있던 전국을 활성화하기 위해 나온 방편 가운데 하나로서, 조정에서의 논의을 거쳐 한성부는 자유 교류 지역, 경기도는 체육, 충청도는 교육과 외국어, 경상도는 정치와 경제, 전라도는 역사, 황해도는 전산(電算)과 오락, 강원도는 군사와 안보, 평안도는 문화와 예술, 함경도는 과학과 기술로 지역별 중심 주제를 확정 시행하였다. 이 특색화 제도는 이듬해 12월 15일에 공식 폐지되기까지 1년 4개월간 유지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지난 5월 25일에 전홍문관정자 전일권(全一權)의 상소에 의해 의정부 주관으로 지역 활성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의정부에서 각급 관청과 지방 감영의 협조를 얻어 논의한 결과, 지역별로 특정한 주제를 정해 시행하자는 의견이 도출되어 6월 18일에 어전 보고를 통해 추진 내용이 확정되었다. 이어 전교에 따라 다시 세부적인 시행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의정부에서 각급 관청과 협조하였으며, 협조된 내용을 바탕으로 의정부 내부 논의를 거친 후, 7월 9일에 계본을 올려 1차로 한성부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특색화 주제를 잠정 결정하였다. 남은 지역에 대한 결정이 끝나면, 곧 지역별 주제에 따라 문서를 등록하게 되는, 본격적인 지역별 특색화가 시행될 전망이다. 《관보 제27호》

개국611년 7월 10일 현재, 특색화 주제가 결정된 지역 (8월 10일 갱신)

한성부 자유/교류 경기도 체육/레포츠 충청도 교육/외국어
경상도 정치/경제 전라도 역사/지리 황해도 컴퓨터/게임
강원도 안보/군사 평안도 문화/예술 함경도 과학/기술

○ 조정에서 지난 6월부터 준비한 '지역별 특색화 제도'가 오늘 8월 15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 지역별로 고유의 주제를 정해, 그것을 바탕으로 백성들 사이에 문서를 등록하고 활동을 하게 되는 주제 차별화 제도가 의정부의 7월 31일자 계본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지역별로 소재하고 있는 교육기관과 각종 모임의 재편 및 각종 정보지, 신문, 모임 등의 개설, 창간 등과 관련한 후속 조치가 잇따를 전망이다. 전국 8도의 지역별 특색화 주제는 관보 제027호에서 공표된 바와 같다. 《관보 제28호》

● 지역 특색화 제도는 활동이 부진했던 팔도 각 지역의 균형적인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고안한 제도이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제9차 별시, 문과 박융(朴融), 무과 강세황(姜世晃) 등 10인 급제

○ 창국 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 과거인 '제9차 별시 과거'가 8월 15일부터 21일까지 만 7일간 실시되었다.


창사(昌史) 제17권  

임오년(2002) 9월 기사본말(壬午年 九月 紀事本末)


◎ 한성부 중부(中部)에 재산사회환원자칭송비(財産社會還元者稱頌碑) 건립

○ 9월 초 3일에 한성부 중부(中部)에 재산사회환원자칭송비(財産社會還元者稱頌碑)를 설치할 것을 명하시어 어려운 이웃에게 재산을 기부하거나 사회에 환원시킨 모든 백성에게 사례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1일에 수예조좌랑 겸실록청기사관 정재안이 기념비 설치 및 읍내서당 건에 대하여 계본을 올려 아뢰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단, 기념한다는 것은 조정에서 치하하는 의미에 크게 합당하지 않은 듯하니, 비명(碑名)에 '기념' 두 글자 대신, '칭송' 두 글자를 새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재산을 어려운 이웃에게 아낌없이 기부하거나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곳에 스스로 환원시킨 모든 백성들의 행실을 칭송함. 《재산사회환원자칭송비》


◎ 행의정부사인 겸녹훈도감정사 이휘(李輝)의 아경(亞卿) 등극

○ 16일에 행병조좌랑 겸선전관청기사관 신대웅이 절충장군 가자(加資)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삼사의 계본과 대체로 같다. 명일(明日:내일), 사인의 품계를 한 자급 올려 가선(嘉善)으로 한다. 이후 제신(諸臣:모든 신하)들은 공식 문서에 사인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말 것이며, 오직 관직과 작위만으로 지칭하도록 하라. 이는 지위가 아경(亞卿:종2품)급에 이른 신하를 대우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약 100년 만에 품계가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신하가 나왔다. 행의정부사인 겸녹훈도감정사 이휘(李輝)가 그 주인공으로, 개국610년 5월 초 5일에 제4차 대과 과거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출사한 이후 1년 4개월 만에 최초 종8품 품계에서 20계가 상승한 아경(亞卿:종2품)급의 지위에까지 오른 것이다. 경상감영, 형조 등의 관직을 역임한 후, 장기간 병조에서 무관들의 인사권을 담당하다 지난 3월 25일 자로 의정부 수장이 되어, 그로부터 6개월째 조정 관원들을 이끌고 있다. 《관보 제29호》


◎ 어모장군 신용호(辛庸浩) 병사

◑ 신용호(辛庸浩) 1978년생(男) 609.09.30-611.09.24
무신(武臣). 호 진인(盡人), 시호 경성(景成), 본관 영산(靈山), 본적 경상도(慶尙道). 개국609년 10월 제3차 무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행군기시직장을 초직(初職)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개국610년 2월 중시(重試)에서 부정을 저질러 파직되고 하옥되었으나, 방면된 후 행평안도검률, 수병조좌랑, 행전라도찰방, 행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고 개국611년 4월에 병조정랑이 되었다. 7월에 사직하고 9월에 병사했는데, 가문이 크게 몰락한 것이 병원(病原)이었다. 문필에도 재능이 있어 무예관(武藝館)을 설립해 한량들을 가르치는 한편,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한때 과거에 부정 응시한 허물이 있었으나, 크게 근신한 후 맡은 바 일에 더욱 열성을 다하였으므로 종국에는 이를 두고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품계는 정3품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개국612년에 창국이등공신(贈昌國二等功臣) 영산군(靈山君)에 추봉되고 정2품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창원(昌原)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인물약전》

○ 25일에 예조좌랑 정재안이 어모장군 신용호가 병사하였음 아뢰자 비답하기를,
"정3품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사망한 날로 한 자급을 더하고 병조에서는 참상관 이상 1인을 보내 조문하도록 하라. 사망과 관련하여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경우, 품계를 기준으로 정5품 이하 참상관 이상이 사망할 때는 문무관 구별에 따라 예조 또는 병조에서 참하관 1인을 보내 공식 조문하고, 정3품 당하 이하 종4품 이상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역시 예조 또는 병조에서 정5품 이하 참상관 1인을 보내 조문하며, 종2품 이하 당상관이 졸(卒:사망)하였을 때에는 예조 또는 병조에서 정3품 이하 종4품 이상관 1인을 보내 조문하도록 한다. 정2품 이상인 경우에는 당상관 1인을 보내 조문하는 것을 규례(規例:규정)로 삼는다. 해당 조에 적합한 관원이 없으면 문관 또는 무관 가운데 1인을 보내도록 한다. 자급을 올려주는 것은 종3품부터 종4품 사이에 한정하여 경우에 따라 적용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오년(2002) 10월 기사본말(壬午年 十月 紀事本末)


◎ 제8차 소과, 진사시 박융(朴融) 등 9인 입격

○ 지난 9월 14일부터 22일까지 제8차 소과(小科) 과거가 시행되어 총 9인의 입격자를 배출하였다. 병조에서 올린 계본에 대한 전교에 의거하여 추석 기간에 걸쳐 시행된 이번 과거는 도중에 진사시 과거 답안의 채점을 담당한 시관(試官)들을 교체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당초 9월 30일에서 5일 연기된 10월 초 4일이 되어서야 결과 발표 방문(榜文)이 붙을 수 있었다. 입격자 가운데 수석 입격은 진사시 제1인으로 입격한 현직 관리인 성균관학정 박융(朴融)이었으며, 이외에 생원시에서 1인, 진사시에서 3인, 원시에서 4인의 입격자가 나왔다. 《관보 제29호》


◎ 광해군의 정처(正妻)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호를 혜장(惠章)으로 결정
◎ 광해군의 시호를 경렬성평민무헌문(景烈成平愍武獻文)으로 결정
◎ 광해군의 묘호(廟號)를 혜종(惠宗), 능호(陵號)를 열릉(烈陵)으로 결정


○ 9월 16일에 광해군의 왕비 대행왕후 유씨의 시호를 혜장(惠章)으로 정하였다.

○ 10월 7일에 광해군의 시호를 경렬성평민무헌문(景烈成平愍武獻文)으로 정하였다.

○ 10월 25일에 광해군의 묘호(廟號)를 혜종(惠宗), 능호(陵號)를 열릉(烈陵)으로 정하였다.


◎ 실록청(實錄廳) 폐청

○ 22일에 실록청총재관 이완이 실록청 재편에 대한 계본을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근 1년에 가까운 운영으로 실록청의 역량이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감찰 강자아는 곧 외관에 명해야 하니, 남은 2인으로 무슨 관청을 유지하겠는가. 일시 폐(閉:닫음)한 후에 다음을 기약해야 하겠다. 금일 자(28일)로 도감을 폐지한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실록청은 신사년(2001) 11월 10일에 개청하여 임오년(2002) 10월 28일에 폐청하였다. 장종대왕실록 8권부터 20권까지가 이때 편찬되었는데 경진년(2000) 11월 1일부터 신사년(2001) 3월 10일까지의 기록이다. 1년 동안 사관(史官)들이 최선을 다해 실록을 편찬했지만, 기록한 분량은 4개월 10일 치였다. 흐르는 시간보다 기록한 시간이 턱없이 짧았으니 이는 '실록 찬수 지침'(■#)에 따라 실록을 편찬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는 방증(傍證)이다.


◎ 제8차 대과, 문과 한희창(韓熙昌), 무과 서양갑(徐羊甲) 등 6인 급제

○ 10월 중순에 제8차 대과(大科)가 시행되었다.


창사(昌史) 제18권  

임오년(2002) 11월 기사본말(壬午年 十一月 紀事本末)


◎ 광해군을 혜종대왕(惠宗大王)으로, 혜종비(惠宗妃)를 혜장왕후(惠章王后)로 복위
◎ 혜종대왕과 혜장왕후의 신위(神位)를 종묘 영녕전(永寧殿) 제12실에 승부(陞祔) 봉안(奉安)


○ 제15대 임금인 광해군(光海君)을 '혜종대왕(惠宗大王)'으로 복위하고, 종묘 영녕전(永寧殿) 제11실에 신위(神位)를 봉안하였다. 개국609년(2000년) 8월에 처음으로 광해군을 왕으로 복위하자는 상소가 제기된 후, 약 2년여 기간에 조야(朝野:조정과 민간)의 뜻을 모아 '군(君)'에서 '왕(王)'으로 추숭(追崇)하는 큰 사업을 완료하게 된 것이다. 상소문과 빈청 등에서의 논의 결과에 따라 복위하기로 결정한 것은 6월 초 1일이었으며, 예조에서 길일(吉日)을 정해 실제 복위한 날은 11월 15일이었고, 신위를 영녕전에 모신 날은 12월 초 2일이었다. 신위를 봉안하는 날 복위와 관련한 전교를 내리셨으며, 복위시 찬술된 행장과 시책문이 같은 날 서고(書庫)에 등록되었다. 《관보 제30호》

○ 왕께서 폐위(廢位)되신 지 379년만인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에 복위되셨다. 복위 후인 12월 초2일에 신주(神主)를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모실 때 즈음하여 장묘(章廟) 전하께서 시책문(謚冊文)을 올려 시호(諡號)를 '경렬성평민무헌문(景烈成平愍武獻文)', 묘호(廟號)를 '혜종(惠宗)'이라 하였는데, 시호법(諡號法)에 생각이 깊고 뜻이 큰 것[耆意大圖]을 '경(景)', 강직하게 일을 결단하는 것[强以能斷]을 '렬(烈)',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정책을 세운 것[安民立政]을 '성(成)', 정치를 행함에 강직하고 기강이 있음[有剛治記]을 '평(平)', 나라에 있으면서 환란을 맞이하신 것[在國遭艱]을 '민(愍)', 화란을 장 평정하신 것[克定禍亂]을 '무(武)', 지혜롭고 질박하며 이치가 있는 것[智質有理]을 '헌(獻)',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읽기를 부지런한 것[勤學好文]을 '문(文)'이라 하였으므로 시호를 그리 정한 것이다. 묘호를 '혜(惠)'로 올린 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좋아하시어 그들과 함께 하셨기[愛民好與] 때문이다. 능호는 열릉(烈陵)인데, 백성을 평안하게 한 공[安民有功]을 '렬(烈)'이라 하였으므로 그리 정하였다. 《혜종대왕문서》

○ 왕비께서 폐비(廢妃)되신 지 379년만인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에 복위되셨다. 복위 후인 12월 초2일에 신주(神主)를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모실 때 즈음하여 장묘(章廟) 전하께서 시책문(謚冊文)을 올려 시호(諡號)를 '혜장(惠章)'이라 하였는데, 시호법(諡號法)에 부드럽고 질박하며 자혜롭고 어진 것[柔質慈仁]을 '혜(惠)', 따뜻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모양을 지닌 것[溫克令儀]을 '장(章)'이라 하였으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혜종대왕문서》



임오년(2002) 12월 기사본말(壬午年 十二月 紀事本末)


◎ 초천(超遷) 제도 시행

○ 11월 30일에는 의정부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재능을 보인 관원을 탁용(擢用)하고자 하신 뜻을 보이셨다. 창국 이래 처음으로 내린 비망기에서 발탁 등용을 말씀하신 것이니, 7품이나 8품에서 참상 6품으로 초천(超遷)하는 제도가 동년 12월에 처음 시행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초천(超遷)은 법전, 전례 등의 규정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것이다. 즉, 품계 또는 관직이 차례를 따르지 않고 초월하여 건너뛰는 것을 말한다. 품계 초천은 초자(超資), 관직 초천은 초직(超職)이라 한다. 《사조백과사전》

○ 탁용(擢用)은 여러 후보 중에서 특별히 발탁 임용하는 것이다. 특히, 서열(순위)에 구애되지 않고 차례를 뛰어 탁용하는 것을 불차탁용(不次擢用)이라고 한다. 초천(超遷).
본조에서는 이조, 병조 등의 추천에 따라 정7품 이하 참하관(參下官)을 종6품 이상 참상관(參上官)으로 특별 승품 및 승진시키는 것을 주로 말한다. 《사조백과사전》


◎ 중소기업가 승영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孫基禎)의 칭송비 설치

○ 11일날 평안도 의주(義州)에 칭송비 2개가 세워졌다. 중국에 거주하는 중소기업가 승영일 씨와 얼마 전에 타계(他界:사망)한 손기정(孫基禎)옹이 그 주인공이다. 승영일 씨는 중국 교포 자녀 4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재중국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 선행으로, 손기정옹은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당시 마라톤 우승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해방 후에 여러 활동으로 체육계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칭송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관보 제30호》

■ 재중교포 자녀 40여 명에게 장학사업을 펼쳐,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중국 교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중국 소재 중소기업가의 선행(善行)을 칭송함. 《승영일 선행 칭송비》

■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경기대회 우승을 통해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해방 이후 체육계 발전에 끊임없이 노력한 공로(功勞)를 칭송함. 《손기정 공로 칭송비》


◎ 형조정랑 조조(趙造)의 처(妻) 이랑(李朗), 숙부인(淑夫人) 봉작

○ 12월 초5일에 통정대부 행형조정랑 조조(趙造)의 처(妻:아내) 이랑(李朗)이 외명부(外命婦) 정3품 작위인 '숙부인(淑夫人)'에 명해지는 교지(敎旨)를 받았다. 통훈대부 행형조정랑 조조가 초4일자 어명에 의해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로 가자(加資:승진)되자 숙인(淑人)에서 한단계 높은 숙부인으로 올려진 것이다. 실로 90여 년 만에 다시 외명부 '부인(夫人)'급 인사가 탄생한 것이다. 같은 날 행의정부사인 이휘(李輝)가 가선대부에서 가정대부로 함께 가자되었다. 《관보 제30호》


◎ 제9차 소과, 진사시 이동진(李東珍) 등 5인 입격

○ 제9차 소과는 11월 24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만 7일간 시행되었다.


◎ 정공신 훈급 논의 진척(進陟) ■#

○ 조정 각 아문에서 저마다 논의 끝에 올린 녹훈대상자들의 명단과 공적을 상람(上覽)하신 상께서 정공신 훈급에 대해 전교하시었다. 조정 아문들의 명단 중에 공통된 자들은 잠정 확정하고 논의가 분분한 자들에 대해서는 다시금 논의를 진행하라 하시었으니, 잠정 확정된 자들은 정공신 1등에 이휘, 이완, 정공신 2등에 최영, 조조, 정공신 3등에 이방원(李芳遠), 신용호, 허준(許浚), 양지원 등이다. 훈급에 논란이 있는 자들은 2등에 유치의(柳治義), 강다소(姜多笑), 노사신 등이며, 3등에 박심문, 김도민(金道民), 조성민(曺成旼), 박수현(朴秀泫), 조동선(趙東瑄) 등이다. 이후 각 아문에서 다시금 논란이 있는 자들의 훈급에 대해 아문의 의견을 어전에 계하였다. 《녹훈도감의궤》


창사(昌史) 제19권  

계미년(2003) 1월 기사본말(癸未年 一月 紀事本末)


◎ 제10차 소과, 생원시 조운(曺雲) 등 7인 입격


○ 제10차 소과는 임오년(2002) 12월 18일부터 12월 25일까지 만 7일간 시행되었다.


◎ 황부천(黃富千) 소과 부정 응시 사건

◑ 황부천(黃富千) 1983년생(男) 609.10.08-616.07.11(除籍)
유학(幼學). 본관 덕산(德山), 본적 경상도(慶尙道). 개국609년 12월부터 줄기차게 경상감영 이방(吏房) 자리를 지원하였으나 행실에 문제가 있어 계속 반려되었다. 이후 감영에서 주관한 관립서당 명칭 선정 투표의 조작 사건 주모자로 의심을 받았으며, 글을 쓸 때 항상 '붙여쓰기'를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남모를 지병(持病) 혹은 장애가 있거나 자판의 간격개(間格介)가 고장 났을 것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었다.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응시하였는데 대부분 부정 응시였고, 결국 제10차 소과 입격이 취소된 후 개국612년 2월에 감영 옥사(獄舍)에 갇혔다. 횡설수설한 언행으로 많은 백성의 웃음을 샀으며, 그로 인해 어전(御前)에서 이름이 언급되어 상소문 금령(禁令)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몇몇 사람들이 황자(黃子) 또는 폭소공(爆笑公)이라 조소하였다. 《인물약전》

○ 유생 황부천이 제10차 소과에 부정응시하였기에, 예조에서 처벌을 논의하였다. 2월 12일에 예조의 계본에 비답하기를,
"과거 부정과 관련한 지난 처분들에 비해 갑자기 형량이 가중되는 듯하니, 지난 처분에 배가하는 것으로 그쳐 형옥 40일에 정거 3회에 처하도록 한다. 금일 이후로 적발되는 과거 부정행위에 대하여는 더욱 무겁게 처분할 뜻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였다. ■#


◎ 각 세법(細法)을 절목(節目)으로 명칭 개정

○ 1월 10일에 각 세법을 절목으로 개칭(改稱)하였다.

○ 절목(節目)은 어떤 사업이나 일에 대한 시행 규칙을 의미한다. 사목(事目).
본조에서는 [창국대전(昌國大典)]의 하위 법령을 절목이라 한다. 개국612(2003)년 1월 10일 이전에는 세법(細法)이라 하였다. 《사조백과사전》


◎ 제9차 대과, 문과 이동진(李東珍), 무과 이우성(李于聖) 등 8인 급제

○ 제9차 대과는 1월 5일부터 1월 11일까지 만 7일간 시행되었다.


◎ 이조의 승품 사령 착오 사건

○ 개국611년 4월에 이조에서 품계 사령을 잘못하여 1계(階)를 올려야 할 사령장이 2계 초자(超資)로 발급되었던 사실이 개국612년(계미:2003) 정월에 밝혀졌다. 인사 과실은 중차대한 문제였으므로 이에 당시 정랑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관원을 면직(免職)하고 가계 사령의 당사자를 파직하였다. 이 전교가 있자 의정부, 이조, 예조 등에서 차자하고 상소하여 면직과 파직 처분의 회수를 주청하였다. 왕께서 전교하시어, 조정에서 포상하는 것 가운데 품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시고 사건을 확실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명시하셨다. "단지 근무 일수 얼마를 감산하여 상쇄하는 것으로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는 일이 이러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이렇게 처단하는 것입니까.'라고 한다면, 과인이나 제신 모두가 달리 변통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시며, 훗날 이어질 폐단을 막고자 하신 의중을 분명히 드러내셨고, "원리원칙과 공명정대한 처분과 집행을 소리 높여 말하다가도, 문득 자신과 직접 관계되거나 자신과 가까운 일과 연관되게 되면, 관대하게 처분하라고 하거나 유약하게 처리할 것을 주청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하시면서 당시 신하들의 처신을 경계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27일에 이조참의 이완(李浣)이 홍문관부제학 최영(崔瑩) 의 승품 사령에 착오가 있었음을 아뢰었다. 4월 6일에 있었던 당시 정4품 봉열대부 최영의 승품 사령에서 1계를 올려 중훈대부로 사령해야 할 것은 2계를 올려 중직대부로 사령하였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당시 종3품 중직으로 가계(加階:승급)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부제학이 반드시 당상의 반열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러 변수가 있었을 것이니, 그리 확신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참의의 의견과 같이 근무일수 30일 정도를 감산하는 것으로 매듭지을 일이 아니다.
이조에서 과실을 범해 그리 행정 처리를 하였다 하더라도, 종3품이면 작은 지위가 아닌데 어찌 부제학 본인이 그것을 몰랐을 수 있겠는가. 역시 중대한 과실이다. 과실이 있다면 응당 처벌해야 하니, 참의를 면직시키고 부제학을 파직한다. 또 근무일수 감산 30일을 추가하여, 과실과 관련한 기록으로 명시한다. 면직과 파직으로 그치는 것은 당상이라는 지위를 고려한 때문이다. 최영은 품계는 다시 내려 강등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후 가자 여부에 반드시 반영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 2월 3일에 재차 전교하였다.
"금번 일은 이조의 계본에서 전교한 바와 같이 '지위가 당상'이므로 대우하여 파직하고 면직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최영의 경우는 본직만을 파직하였을 뿐, 녹훈도감의 직임은 그대로 두었으며,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으므로 부적절하게 오른 품계 또한 그대로 인정하여 두게 하였다. 문외출송(門外黜送)이나 유배를 더한 것도 아니고, 영원히 쓰지 않겠다고 전교한 것도 아니다. 공훈 녹훈에도 비중을 두어 훈급 책정에 반영할 뜻이 없다." ■#

● 이조의 품계 사령 실수로 1계 더 높게 사령되었던 홍문관부제학 최영과 과실을 범한 이조참의 이완에 대한 징계는 각각 파직과 면직이었다. 최영에 대한 파직은 품계가 종3품에 이르렀음에도 본인의 품계 사령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처분이었고, 이완의 면직은 과실에 대한 징계였다.



계미년(2003) 2월 기사본말(癸未年 二月 紀事本末)


◎ 계미년(癸未年) 연두교서 반포 ■#

○ 개국612년 2월 초1일에 계미년(癸未年) 연두교서를 내리셨다. 문무백관에게 이르시기를,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인재를 쓰느냐 하는 것에 달렸다." 하시고, "인재는 다른 시대의 인재를 빌려 올 수 없으니, 당대의 사람 가운데 등용하여 쓸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모든 부분에 출중하고 재행을 함께 겸비한 인재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재주나 특기라도 있는 자라면 불러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시며 인재 등용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하셨다. 또 사법 제도를 정비하여 형벌 집행에 형평을 기할 것과 지역별 특색화 제도에 내실화를 기할 것을 주요 국정 지표로 제시하셨다. 교육을 진흥시키고 선행을 장려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도 누차 언급하셨으니, 이는 왕께서 팔도의 활성화를 위하여 몸소 정책을 수립하고 진행하셨음에도 조정 여건 미숙하여 진도가 미진하므로 거듭 신하들을 독려하신 것이다. 《장종대왕문서》


◎ 명예백성제도절목(名譽百姓制度節目) 제정

○ 임오년(2002) 10월 11일에는 의정부에 유지를 내리시어 "특별히 공로가 있는 백성에 대하여 조정 차원의 명예 칭호 수여와 지역별 공로자 선정 등을 시행하고자 하니, 의정부에서는 적절한 제도를 마련하여 계하도록 하라." 명하셨다. 이에 따라 '명예백성제도절목(名譽百姓制度節目)'이 마련되어 이듬해 2월 11일에 반포되었다. 열심히 노력한 백성을 포상하는 지침의 실마리를 마련하신 것이다. 《장종대왕문서》

○ 11일에 행의정부사인 겸녹훈도감정사 이휘가 명예백성제도절목 시행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중외(中外: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 시행하라. 실효가 없다면 당초 제도를 마련한 뜻이 거처할 곳이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정공신(正功臣) 11인 명단 확정 ■#

○ 2월 13일에 오랜 기간 조정 신료들의 의견을 두루 수렴하신 상께서 정공신의 명단을 잠정 확정하시었다. 정공신 대상자를 살펴보면 1등에 이휘, 이완이며 2등에는 최영, 조조, 유치의, 노사신 등이며 3등에는 양지원, 이방원, 신용호, 허준, 강다소 등이다. 실로 창국 이후 조정의 고굉지신(股肱之臣)들이 망라(網羅)되었다 할 만하였다. 상께서는 덧붙여 원종공신의 훈급과 대상자에 대해서 논의를 계속할 것을 하교하시었다. 《녹훈도감의궤》

○ 본조 창국(昌國:기틀 확립 및 번영)에 기여한 공신을 책봉하기 위한 창국공신(昌國功臣)을 선정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월 13일 자 전교에 의해 정공신(定功臣) 11인의 명단이 예비로 확정되었다.
공신은 크게 정공신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나뉘는데, 정공신은 다시 1등공신, 2등공신, 3등공신 등으로, 원종공신은 다시 원종1등공신, 원종2등공신 등으로 구분되며, 각 훈급에 따라 공신 칭호와 혜택에 차별이 있게 된다. 현재는 원종공신을 정하기 위한 조정 논의가 진행중에 있다. 《관보 제31호》


◎ 소과 입격자 권지(權知) 등용 제도 시행

○ 12일에 전교를 내려 소과 입격자 등용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셨다. 동년 3월에 제11차 소과 입격자 생원 이찬형(李燦炯), 진사 한백겸(韓百謙)이 등용되어 권지(權知)로 임명되었으니, 인재가 부족한 조정 여건을 타개하고자 하셨던 이날의 전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종대왕문서》

○ 개국612년 2월 1일에 내려진 계미년 연두교서에 따라 각 관청에서 개진한 의견 수렴의 결과, 소과(小科) 입격자에게 관직 진출의 기회가 주어지고 천거제 활용이 더욱 확대되는 등의 제도 개편안이 확정되었다. 현재 관직에 임명되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1차 관문인 소과 입격한 후 2차 관문인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이어지는 정규 경로를 밟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히 시행되는 별시(別時) 과거를 통하는 길이며, 나머지 하나는 현직 관리들의 천거를 통하는 길이다. 이처럼 기존 제도상으로는 소과 입격자에게 곧바로 품계와 관직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개편된 제도에 따르면 제11차 소과(2월 17일-2월 23일 시행)부터는 입격자가 나오면, 관계된 관청에서 추천자 명단을 어전에 올려 일부 인원에게 관직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또 천거제를 더욱 활성화 하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속에게는 반드시 토관직을 주도록 하는 등의 안건도 채택되었다. 《관보 제31호》

○ 대과나 별시(別時:특별 과거), 천거 등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 정식 관리를 등용되는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지난 3월에 열린 제11차 소과 과거의 입격자인 생원 이찬형(李燦炯), 진사 한백겸(韓百謙) 등 2인이 동월 21일에 임시직인 권지(權知)가 된 후, 1개월간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하여 5월 21일 자로 실직(實職:정식 관직)인 종8품 봉상시봉사에 임명된 것이다. 현재 품계는 정8품이다. 《관보 제32호》


창사(昌史) 제20권  目錄

계미년(2003) 3월 기사본말(癸未年 三月 紀事本末)


◎ 제11차 소과, 생원시 곽용호(郭勇鎬) 등 9인 입격

○ 제11차 소과는 2월 17일부터 2월 23일까지 만 7일간 시행되었다.



계미년(2003) 4월 기사본말(癸未年 四月 紀事本末)


◎ 전성균관직장 윤희승의 부고


◑ 윤희승(尹熙勝) 1981년생(男) 609.10.26-612.04.21
문신(文臣). 호 정룡(正龍), 본관 파평(坡平), 본적 한성부(韓城府). 개국609년 11월이 실시된 제3차 대과 문과에 갑과 급제하였다. 성균관박사를 초직으로, 수예조좌랑, 행한성부참군, 성균관전적, 수예조정랑, 행성균관직강 등 주로 예조와 성균관 계통에서 근속하였다. 개국610년 5월에 암행어사로 충청과 전라도 일대를 암행하기도 하였고, 세 차례 성균관 수장으로 봉직하며 문과와 무과에 걸쳐 많은 유생들을 교육하였다. 사상철학회(思想哲學會)와 황실추진위(皇室推進委)에도 관계하였는데, 다양한 활동 경력을 감안할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지는 못하였다. 품계는 정4품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이르렀다. 《인물약전》

○ 28일에 홍문관전한 정재안이 전성균관직장 윤희승의 사망을 아뢰자 비답하기를,
"조문하는 제도는 일전에 전교한 바에 의거하면 될 것이다. 품계를 올려주는 것은, 성균관 운영과 관련하여 수고한 바가 적지 않았지만, 여러 부분에서 초래한 과실 또한 적지 않았으니, 고려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이에 관하여는 의정부, 양사 등의 의견을 듣고 전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당상 가자 문제에 대한 전교

○ 14일에 전한 정재안이 차자하여 당상관의 가자 문제에 대하여 아뢰었는데, 왕께서 비답을 내리시기를, "당상 가자(加資)는 공적과 과실을 살펴 집행해야지, 정3품 당하에 이른 지 오래되었다고 그 기간을 살펴 무리하게 올려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충의공 윤봉길 같은 이가 불과 정2품 좌참찬으로 추증되는 것에 그쳤으니, 오늘날 신하들이 수고하는 것이 예전에 일제 치하에서 노력하던 일과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생각해 본다면 정2품 이상에 명하기가 실로 쉽지 않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추증이나 증직도 본조에서 행하는 것이고, 가자나 책봉도 본조에서 행하는 것이므로 그 무게 정도가 같기 때문이다." 하셨다. 왕께서는 이후에도 충경공의 증직을 전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충의공과 같은 인물이 자헌대부 좌참찬으로 추증되었고, 이제 또 충경공 같은 인사가 정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게 되었으니, 의리와 염치에 있어 앞으로 조정에서 정2품을 넘어 품계와 관직이 제수될 신하가 없겠다." 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정2품 관직으로 추증하는데 그친 조정에서 그 이상의 품계를 받는 신하가 나온다면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장종대왕문서》

● 충의공(忠毅公) 윤봉길(尹奉吉)은 임오년(2002) 6월에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으로 추증되었다. 계미년(2003) 4월에 가정대부 행의정부사인 이휘(李輝)를 자헌대부로 가자(加資) 시키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충의공을 자헌대부로 추증한 사례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의공의 추증은 독립운동가를 추증한 첫 사례였는데 신중을 기하지 않아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 선례가 기준이 되어 훗날 충경공(忠敬公) 최익현(崔益鉉), 충경공(忠景公) 이준(李儁), 신태호(申泰浩:신돌석)의 증직 또한 윤봉길의 사례를 참작하지 않을 수 없어 마찬가지로 박하게 증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추증뿐만 아니라 본조 당상관의 가자 문제에 대해서도 충의공 추증의 선례가 족쇄처럼 작용하게 되었다. 다만, 충의공 추증 논의 당시 윤봉길을 정2품으로 추증하자는 것이 공론(公論)이긴 하였으나 재가한 사람은 임금이니,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겨우 정2품 관직으로 추증하는 데 그쳤다는 평가에서 군신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



계미년(2003) 5월 기사본말(癸未年 四月 紀事本末)


◎ 계미지변(癸未之變)
◎ 전헌납 서양갑(徐羊甲)과 유생 김형준의 청양위소(請讓位疏)

○ 임금이 4월 13일부터 10여 일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으니, 신사지변(辛巳之變)와 임오지변(壬午之變) 두 차례의 장기 철조 사태를 겪은 신하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하였고 임금에게 정무를 돌보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 보공장군 서양갑(徐羊甲)이 정무를 돌보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외(內外)로 많은 말이 있었지만, 전헌납 서양갑과 같은 인재는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상소한 뜻은 잘 알겠으니, 근심을 거두고 물러가 기다리라. 과인이 지금 할 수 있는 비답은 그것 뿐이다.”하였다. ■#

○ 행의정부사인 이휘(李輝)가 임금에게 편전에 나와 정무를 돌보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작년 3월 이후로 근 1년여 만에 다시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었으니, 이것으로 한 가지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과인은 보통 사람의 자질조차 타고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노력하는 바 또한 범인(凡人:평범한 사람)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말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사람이 군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찌 백성들의 행복이겠으며, 종묘사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겠는가.
비록 10여 일 동안 정무를 멀리한 것으로 사태가 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몸과 정신도 예전과 같지 않다. 이제 과인의 거처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니, 멀지 않아 천명(天命)에 따라 의(義)로써 결단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

○ 임금이 4월 30일부터 5월 7일까지 다시 10일에 가깝도록 편전에 나오지 않았다.

○ 5월 7일에 유생 김형준이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조정을 이끌 능력이 없으면 양위하고 물러나라는 내용이었다. ■#

○ 보공장군 서양갑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지금이라도 임금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종사(宗社)를 이끌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양위하라는 내용이었다. ■#

○ 5월 12일에 신하로서 양위를 언급한 전헌납 서양갑과 유생 김형준의 처분에 대하여 전교하였다.
"금번 사태는, 나라의 기강과 언로 문제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어 사체(事體:사리와 체면)가 매우 중대하므로 어느 한 관청의 의견을 물어 결단할 수 있는 성격의 사안이 아니다. 의정부에서 사헌부, 예조, 형조 등과 협조하여 논죄 여부 내지는 조치 수위 등을 논의하여 보도록 하라." 하였다. ■#

○ 5월 20일에 행의정부사인 이휘가 원종공신 훈급에 대하여 아뢰면서 서양갑을 원종공신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

○ 5월 20일에 행의정부사인 이휘가 서양갑과 김형준의 논죄 결과를 아뢰니 비답하기를,
"과인이 정사를 소홀히 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직접 엄중한 경계의 뜻을 담은 교서를 내리기가 어렵다. 필요하다면 의정부, 예조 등에서 마땅한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이다. 전헌납 서양갑은 금번 일로 원종공신 녹훈에서 제외되었으니, 품계까지 강등하기가 실로 어렵다. 근무일수 15일을 감하는 것으로 그친다." 하였다. ■#

○ 왕의 노심초사는 옥체(玉體)에 병환을 가져왔고, 그 때문에 동년 4월 13일부터 10여 일 동안 어쩔 수 없이 정무(政務)를 폐하시게 되었다. 의정부 등에서 간언(諫言)을 올리자 이에 성답(聖答)하여 이르시기를, "과인은 보통 사람의 자질조차 타고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노력하는바 또한 범인(凡人)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하시며, "이와 같은 사람이 군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찌 백성의 행복이겠으며, 종묘사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겠는가." 하시고, "몸과 정신이 예전과 같지 않다. 이제 과인의 거처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니, 멀지 않아 천명(天命)에 따라 의(義)로써 결단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하셨다. 왕의 심신에 병환이 깊어져 이러한 비답이 있게 되었으니, 당상(堂上)과 당하(堂下)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신료가 군주를 보필함에 부족했던 바를 느끼며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왕의 병환이 깊어지기 시작하신 것이 대개 이때부터였다. 《장종대왕문서》

● 신사지변(辛巳之變), 임오지변(壬午之變), 계미지변(癸未之變) 으로 장종조(章宗朝)의 장기 철조 사태를 명명한 것은 장종의 계미년(2003) 5월 12일 자 비답에 근거를 둔 것이다. 비답에서 직접 임금이 임오지변(壬午之變)이라 언급한 바 있기에, 유사한 사건인 신사년, 계미년의 사건을 신사지변, 계미지변으로 명명한 것이다.


◎ 제12차 소과, 진사시 김지수(金志洙) 등 11인 입격

○ 제12차 소과는 5월 중순에 시행되었다.


◎ 공신 대상자 잠정 결정

○ 5월 20일에 행의정부사인 이휘가 원종공신 훈급에 대한 조정 아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어전에 아뢰니,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원종공신 1등에 김병호, 조성민, 박수현, 조동선 등 4인이고, 원종공신 2등에 이동진, 정재안, 이백, 강자아, 박심문, 백우현, 김도민, 안향, 김서울, 박혁거세, 안정복 등 11인이었다. 상께서 계본에 아뢴 명단으로 원종공신을 책봉하도록 윤허(允許)하시므로, 이로써 3년여를 이어온 창국공신 녹훈이 비로소 마감되었다. 《녹훈도감의궤》

○ 5월 22일자 전교에 의해 창국원종공신의 명단이 잠정 결정됨에 따라, 창국공신 정공신과 원종공신 26인의 명단이 예비 확정되었다.
정공신에는 의정부우참찬 이휘(李輝), 전행형조참의 이완(李浣) 등 11인, 원종공신에는 전성균관직강 김병호(金炳昊), 전행공조정랑 조성민(曺成旼) 등 15인이 포함되었으며, 이 명단에 기초해 녹훈도감(錄勳都監)에서 공신 훈호, 교서, 녹권 등을 마련 중에 있다. 《관보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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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4책 정제두 626/09/20-17:00 89
16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3책 정제두 626/09/20-16:45 149
15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2책 정제두 626/09/20-16:38 108
14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1책 정제두 626/09/20-16:24 78
13 동백 [원장] 동백서원 초대 원장 서긍 행장 정제두 626/09/19-22:43 83
12 동백 [함경감영] <방문> 부임인사 심기열 623/11/19-11:13 84
11 동백 [평안감영] <방문> 부임인사 천어 623/04/28-11:29 107
10 동백 [원이] 배향인 기일 손오공 620/01/25-14:10 127
9 동백 [원장] 배향인 자력 서양갑 619/02/10-13:23 209
8 동백 [원장] 동백서원 사우 수양사 배향록 <618.08.16> 서양갑 618/08/16-11:18 225
7 동백 [원장] 경헌공 유치의 행장 서양갑 618/07/27-14:39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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