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20일 (수) 16:38  [신시(申時)]
문서분류 동백서원
ㆍ추천: 0  ㆍ열람: 108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2책
창사(昌史) 제6권  目錄

신사년(2001) 1월 기사본말(辛巳年 一月 紀事本末)


◎ 성균관(成均館) 개청

○ 예조좌랑 허준(許浚)이 성균관(成均館) 설치에 대해 논의한 결과를 아뢰자, 왕께서 크게 관심을 보이시고 세세한 부분까지 친히 언급하신 후 이를 윤허(允許)하시니, 이듬해 정월 초 3일 성균관이 복설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성균관이 본격 가동에 앞서 12월 13일부터 18일까지 6일동안 유생들을 모집하는 입학원서 접수를 하고 있다. 호적신고를 마친 백성이면 누구나 입학 가능하나, 이미 품계를 받은 백성은 청강하는 수준에서만 강의에 참여할 수 있다. 성균관 유생으로 대과에 급제하는 자는 품계를 1계 올려받게 된다. 《관보 제12호》


◎ 과거 제도 정비

○ 대과와 별도로 소과(小科)를 시행하자는 의견이 줄곧 제기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정 논의에 따라 소과 시행 과목, 응시 자격, 주무 관청, 시행 절차 등에 대한 규정을 마련되었는데, 매년 1월, 4월, 7월, 10월에 대과를 시행하고 대과가 열리지 않는 달에는 소과를 시행하는 제도가 정월 15일에 잠정 결정되었으며, 2월 16일에 생원시, 진사시에 대비하여 훈련원시(訓練院試)를 두고 입격자(入格者) 호칭을 '장재(將才)'로 하는 전교가 내려졌다. 《장종대왕문서》

● 소과(小科)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던 초급 과거 시험이다. 향시(鄕試)인 초시(初試)와 회시(會試)인 복시(覆試)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명경과(明經科)인 생원시와 제술과(製述科)인 진사시에서 생원과 진사 각 100인을 선발하였다. 감시(監試), 생진시(生進試),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사마시(司馬試). 본조에서는 훈련원(訓練院)에서 주관하는 무과 초급 시험인 훈련원시(訓練院試)를 소과에 추가하였다.  《사조백과사전》

● 대과(大科)는 조정 관원을 선발하는 과거 시험이다.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소과(小科)와 대비하여 문과(文科) 시험을 대과라고 하였다. 동당시(東堂試). 본조에서는 문과와 무과(武科)를 모두 지칭한다.


본래 조선의 과거제도는 소과와 대과 체제로 나뉘어 있었고, 본조에서도 이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소과의 응시과목은 본래 생원시와 진사시만 있었지만, 본조에서는 훈련원시를 추가하였고, 대과는 본래 문과 시험이었지만 본조에서는 문과와 무과를 모두 지칭하여 대과라 하였다. 문무의 형평을 맞추기 위해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본조의 여건에 맞게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던 것이다.


◎ 신사년(辛巳年) 연두교서(年頭敎書) 반포 ■#

○ 동월 24일에 연두교서를 내리셨다. 어제신사연두교서(御製辛巳年頭敎書)에서 이르시기를, "나라의 명예를 드높이거나 부모에게 효행(孝行)이 지극한 것은 조정에서 권장하여야 할 덕목이다. 각도 지방관들은 담당 고을에서 그러한 자격을 갖춘 자가 있다면 조정에 아뢰어 그 아름다운 덕행(德行)이 만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고, 인재 양성, 법령 준수, 백성 사이의 화합, 어진 정치의 달성 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장종대왕문서》



신사년(2001) 2월 기사본말(辛巳年 二月 紀事本末)


◎ 제5차 별시, 문과 유병호(兪炳豪), 무과 김희종(金熙鍾) 등 10인 급제
◎ 제1차 중시(重試), 문과 김도민(金道民), 무과 이호랑(李虎郞) 등 5인 급제


○ 별시를 시행하여 문과 갑과 급제자 유병호(兪炳豪) 등 10인을, 중시를 시행하여 문과 을과 급제자 김도민(金道民), 양지원(梁志元) 등 5인을 뽑았다. 《장종대왕실록 권17》

○ 지난달 22일부터 28일까지 실시되었던 별시(別試) 과거에서 총 10인의 인재가 급제하였다. 별시 문과에는 갑과에 황해도 유생 유병호(兪炳豪), 을과에 함경도 유생 이징옥(李澄玉), 경상도 유생 김병호(金炳昊), 경기도 유생 이종익(李宗益), 병과에 한성부 유생 최덕호(崔德浩), 경상도 유생 이완(李浣), 평안도 유생 정지상(鄭知常), 한성부 유생 김민경(金玟炅) 등 8인이 급제하였으며, 별시 무과에는 을과에 경상도 한량 김희종(金熙鍾), 병과에 황해도 한량 강유(姜維) 등 2인이 급제하였다. 같은 기간에 실시된 현직 관리들을 위한 중시(重試) 과거에서는 총 5인이 급제하였다. 김도민(金道民), 양지원(梁志元), 박희웅(朴熙雄), 노사신(盧思愼) 등이 중시 문과에, 이호랑(李虎郞)이 중시 무과에 각각 등과하였다. 《관보 제14호》


◎ 신용호, 임승민, 하위지, 최영, 이순신, 조아라의 과거 부정(不正) 사건 ■#


○ 정월 22일부터 28일까지 제5차 별시와 개국610년 전반기 중시(重試)를 병행하였는데, 과거 부정이 크게 일어나 나라 안팎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2월 초 5일에 왕께서 홀연히 개탄하시고 해당 관원과 연루자들을 엄벌할 것을 명하시며 전교하시기를, "과거에 급제하여 품계를 받거나 품계가 올라 조정 관직에서 일할 자들이 그 시작에서부터 속임수를 쓰게 된다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앞날을 기약할 수가 없다." 하시고, "시관은 물론이고 예조와 병조의 관리들은 과거가 이미 끝났다고 하더라도 시권(試券)을 부지런히 살펴 부정한 사실을 밝혀내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경계하셨다. 그럼에도 일문(一門)의 친분 있는 자들이 서로 상소하여 구원하고 두둔하기에 바빴으며, 그 탓에 부정 응시자에 대한 논죄가 지체되고 형량이 느슨해질 기미가 보였다. 전교하시기를, "시험에서 간사한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벽촌(僻村)의 어린아이들도 모두 아는 사실인데, 그것이 법조문에 없다고 하여 논죄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애초에 적발되지 않았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간사한 행위가 만천하에 알려졌는데도 이를 논죄하고 징계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모두 법령을 희롱하게 될 것이며, 부정을 하여 적발된 자와 운 좋게 적발되지 않은 자 모두가 스스로 방자해질 것이니, 징계하는 바가 없으면 곧 나라의 기강이 함께 무너지게 될 것이다. 과거 부정은 분명한 죄(罪)이니, 그 죗값을 치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신 후, "사적(私的)으로 인연을 맺은 자들이 그들을 잘 인도하지 못한 것을 두고 이번의 과거 부정이 초래된 원인의 하나라 하나, 인연이 있는 자들이 함께 나서서 죄를 사하거나 가볍게 해 줄 것을 청원하는 것 또한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폐단(弊端)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시며 엄벌을 촉구하셨으니, 이것은 무릇 사악함과 부정함을 경계하고 선한 것을 가까이 여기시는 왕의 결연한 의지와 뛰어난 결단력을 보여주시는 것이셨다. 왕의 이러한 의지는 뭇 선비들은 물론 만백성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장종대왕문서》

○ 3월 27일에 의정부사록 겸공신도감정사 이완과 형조별제 겸승문원저작 김도민(金道民)이 과거부정사건에 관해 계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적순부위 신용호와 승사랑 임승민, 백성 하위지를 형옥 10일에 처하고, 봉훈랑 최영과 여절교위 이순신, 승사랑 조아라를 형옥 5일에 처한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2》

○ 4월 4일에 의정부에서 과거 부정 응시자 응시 자격 제한에 관하여 예조 및 병조의 의견을 수렴하여 계목을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 과거 부정에 대한 논죄는 당분간 전례에 따라 처결할 것이로되, 대전(大典)에 해당 조문을 첨부한 연후에는 차후 2회간 과거 응시 자격을 제한토록 하겠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3》

● 사신은 말한다. 별시에 부정 응시한 자들 다수가 오상세가(五常世家) 일문(一門)이며 이를 비호(庇護)한 자들 또한 오상세가 일족(一族)이었다. 아, 인간의 기본 덕목이 염치(廉恥)인데, 이 염치가 땅에 떨어진 것과 같았다. 부정을 저지른 자를 같은 일족이라 하여 비호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부정을 저지르고도 이를 비호하려는 자들이 조정에 나가 국사를 돌본다면, 과연 그들을 올바른 위정자(爲政者)라 할 수 있겠는가. 깨끗해야 할 과거를 더럽히고 일족을 구제(救濟)하기 위해 연이어 구제소(救濟疏)를 올려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으니, 그로 인해 얻은 오명(汚名)은 장차 씻기 어려울 것이다. 《장종대왕실록 권17》

적순부위 신용호, 승사랑 임승민, 백성 하위지, 봉훈랑 최영, 여절교위 이순신, 승사랑 조아라 6인은 다른 사람이 쓴 글의 일부를 도용하여 자신이 쓴 글인 것처럼 위장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므로 이를 과거 부정의 죄로 다스렸다. 과거 부정은 엄하게 다스려야 할 중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감싸는 상소가 적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과거 부정 응시자 다수가 오상세가 일문이었고 그들을 두둔한 자들 또한 오상세가 일족이었기에 실록의 사론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이었다.


◎ 창국대전(昌國大典) 반포 ■#

○ 동월 22일에 법전 《창국대전(昌國大典)》을 반포하셨다. 이 대전(大典)의 완성은 본조의 체계가 확실히 잡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전을 천하에 반포하시며 내리신 전교에 "육전(六典)이 완결되었으므로 이제 조정과 민간에 널리 반포한다. 과인이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내리니, 삼가 조정의 모든 신료들은 마음가짐을 바로 하여, 지켜 행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시고, 친히 지어 내리신 어제서(御製序)에서도, "서(書)에 이르기를, '형벌(形罰)은 형벌이 없기를 기(期)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형법(刑法)으로 형법을 그치게 한다.'하였으니, 이것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논죄하라는 뜻이다. 형전(刑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법령을 정해 시행하는 바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과인이 듣기를 '선(善)한 것을 선하게 여길 뿐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선을 안다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악(惡)한 것을 미워만 할 뿐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악한 것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법령을 어긴 죄를 알고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지 못할 때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이른 말이다. 대저(大抵) 육전(六典)을 적용함이 이와 같아야 한다." 하셨으니, 법과 질서를 엄정하게 바로 세워 정치에 반영함으로써 나라와 백성에 대해 지극한 정사를 다하고자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2월 22자 전교에 의해 중앙법전인 창국대전(昌國大典) 육전(六典이 조정과 민간에 반포되었다. 어제서문과 전문, 이전(吏典) 20절목, 호전(戶典) 1절목, 예전(禮典) 11절목, 병전(兵典) 5절목, 형전(刑典) 7절목, 공전(工典) 2절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포와 동시에 각종 세법과 함께 적용에 들어갔다. 《관보 제15호》

○ 22일에 상이 근정전에서《창국대전(昌國大典)》을 반포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19》


창사(昌史) 제7권  

신사년(2001) 3월 기사본말(辛巳年 三月 紀事本末)


◎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에 의사자(義死者) 故이수현(李秀賢) 정문(旌門) 건립

○ 5일에 예조에서 이수현(李秀賢)의 정문 설치에 대하여 계(啓)하니 전교하기를,
"예로부터 의인(義人)이 적지 않았으나, 민국에서는 유독 역사에 널리 이름이 오르내리는 자만을 의인이 하니, 이것이 어찌 평범한 사람으로 의인이라 부를 만한 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사람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을 바로 의인이라 하니, 예조에서 아뢴 의사자(義死者) 이수현의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고귀한 뜻을 추모하여 자택이 있는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에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한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0》

○ 연초 1월 26일에 일본국 동경지하철 신오쿠보역에서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다가오는 전동차에 치여 의롭게 생을 마감한 故이수현(李秀賢:향년26세)씨의 정문(旌門)이 3월 6일자 전교에 의해 고인의 생가가 있는 경상도 동래현(부산광역시 연제구)에 세워졌다. 《관보 제15호》

■ 개국610년 1월 26일, 일본국 도쿄지하철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일본인 취객 사카모토 세이코(37)씨를 구하려다 전동차에 치여 의사(義死)함. 향년 26세. 《이수현 정문》


◎ 제1차 소과, 진사시 안정복(安鼎福) 등 18인 입격(入格)

○ 소과(小科)를 시행하여 생원 윤진상(尹珍相), 진사 안정복(安鼎福), 장재 박항(朴恒) 등 18인을 뽑았다. 《장종대왕실록 권20》

○ 2월 26일부터 3월 초 3일까지 제1차 소과가 생원시와 진사시, 원시(院試) 등으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다. 생원시에는 총8인이 응시하여 전원이, 진사시에는 13인이 응시하여 8인이, 원시에는 5인이 응시하여 2인이 입격하는, 70%에 달하는 입격률을 보인 이번 소과의 수석 입격자는 평점 8.67을 얻은 황해도 유생 안정복(安鼎福)이었다. 입격자들에게는 합격증인 백패(白牌) 교지가 내려졌으며, 각각 생원(生員), 진사(進士), 장재(將才) 등의 호칭과 함께 대과 과거 응시 자격이 함께 부여되었다. 《관보 제15호》


◎ 천거제도 확립

○ 2월 27일에 상이 전교하기를,
"천거제를 분명히 하여 전교한다. 각 관청에서 천거가 들어오면 예조에서는 천거된 자를 심사하여 그 가부만을 정할 수 있을 뿐이니, 품계나 관아를 정하는 등의 문제는 이조 또는 병조와 두루 협의하여 처리한다. 천거 시 접수된 자료를 토대로 예조에서 품계나 관직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 이조나 병조에서는 이러한 의견과 관제상의 이해를 비교한 후에 품계와 관직을 확정하여 예조에 통보하되, 이러한 과정들은 과인에게 계본이 올라오기 전에 모두 매듭되어야 한다. 양사의 서경이란 천거된 자의 신원과 경력 등을 살펴 위장호적신고나 이중활동인지 등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므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계본이 올라오기 전에 마무리되어야 한다. 그러한 가운데 피천거자의 의중을 파악하여 맡고 싶은 소임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는 절차도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종대왕실록 권19》

○ 천거 제도가 3월 10일자로 비로소 확립을 보게 되었다. 2월 27일자 전교에 이어 금번 전에 천거시 한계 품계가 정7품으로 결정되는 전교가 내려짐에 따라 그간 혼선을 불러일으켰던 천거 행정이 안정을 보일 전망이다. 《관보 제15호》


◎ 충청도 공주목(公州牧)에 소방공덕비(消防功德碑) 건립

○ 11일에 행사역원직장 조동선(趙東瑄)이 소방대원 정문 설립 문제에 대하여 재차 계본(啓本:정식 보고)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금번에 순직한 소방대원 7인만을 위한다면 정문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간 순직한 모든 소방대원들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공덕비를 세우는 것이 더욱 합당한 처사가 아닌가 한다. 위 7인의 이름을 따로 비문에 새긴다면 정문을 세워 그 뜻을 기리는 것에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조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심사숙고한 후에 다시 아뢰도록 하라. 소방대원은 민국의 국가공무원인지라 품계와 관직을 추증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이번 경우에는 직장 조동선의 의견에 따라 논의에 부치지 않겠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1》

○ 지난달 21일자 전교에 의해 민국(民國:대한민국) 국립현충원 소재지인 충청도 회덕현에 '소방공덕비(消防功德碑)'가 설치되었다. 동월 4일, 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화재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공무원 6인과 사흘 후인 3월 7일, 민국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화재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공무원 1인의 참사를 기화로 명예 등록에 관한 여러 요구가 제기되어 예조 및 빈청에서의 여러 논의를 거쳐 공덕비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연이은 명예 등록과 관련한 칭송이나 분향, 헌화 등의 여건 마련을 위해 같은 달 22일자로 '명예방명록'이 개설되었다. 《관보 제16호》

■ 화재진압과 방재, 구급, 구조, 교육훈련간 순직하거나 부상당한 모든 소방대원의 노고(勞苦)와 공덕(功德)을 기리고 추모함. 《소방공덕비》

개국610(2001)년 3월 4일, 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화재 현장 순직소방공무원
소방장 박동규(朴東奎/46)
소방교 김기석(金紀石/42), 김철홍(金喆洪/35), 박상옥(朴相玉/32)
소방사 장석찬(張錫贊/34), 박준우(朴埈佑/31)

개국610(2001)년 3월 7일, 민국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화재 현장 순직소방공무원
소방장 김영명(金榮明/41). 이상 추서 전 계급.


◎ 가례도감 폐청(閉廳)

○ 22일에 의정부와 홍문관에서 가례도감 폐지에 대하여 합계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합계한 바에 따라 가례도감을 폐(廢)하도록 하겠다. 도감을 처음 세운 것이 작년 10월 31일인데, 그 이후로 140여 일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끝내 목적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도감을 설치하였을 때의 의미가 퇴색하고 무색해지는 것이 이를 데가 없다. 오늘날 조정 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여러 논의와 정책들의 실상이 단적으로 나타난 사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2》



신사년(2001) 4월 기사본말(辛巳年 四月 紀事本末)


◎ 홍문관부교리 박희웅(朴熙雄)의 승지 고발 사건

○ 3월 26일에 홍문관부교리 박희웅이 승정원의 승지를 형조에 고발한 일로 승지와 박희웅이 서로 언성을 높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

○ 3월 29일에 홍문관부교리 박희웅, 행홍문관정자 이황(李滉)이 어명 이행에 관하여 간언을 하면서 승정원이 임금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홍문관에서 과인을 죄인(罪人)이라 하니, 조정의 관리들은 옥중 죄인을 군주(君主)로 받들고 있는 형상이라 하겠다. 형조에 이문(移文:이첩)하여 과인을 용상에서 끌어내려 옥에 가둠이 어떠하겠는가." 하며 분노하였다. ■#

○ 4월 초 7일에 조정 현실과 관련하여 '덕이 없음[不德]'을 자책(自責)하는 윤음을 내리셨다. 조정 현실에 크게 상심(傷心)하시어 10여 일 동안 왕께서 정무를 돌보지 않으셨는데, 조정에서 이에 대해 간언하는 소리가 없고, 어명을 내린 것에 대해서 분명한 조치가 없어 전교가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재가 없이 관원들끼리 협의하여 멋대로 어명을 고쳐 시행하는 상황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답답하게 여기신 끝에 나온 윤음이다. 《장종대왕문서》 ■#

○ 4월 8일에 행홍문관부교리 박희웅 등이 경자일(7일)에 대한 윤음에 대하여 아뢰어 다시 임금과 대립하였다. ■#

○ 4월 8일에 형조별제 겸승문원저작 김도민(金道民)이 행홍문관부교리 박희웅과 승정원승지와의 언쟁에 관하여 아뢰니, 임금이 "지금 과인과 승정원이 일체(一體)인가 이체(二體)인가. 과인의 행실과 승정원의 과실이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

○ 행홍문관부교리 박희웅이 승정원 문제로 재차 간언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심에서 나온 말이니, 지적한 것이 모두 그르다 할 수 없겠다. 모두가 과인의 과실이라 할만 하다.
과인이 승정원을 동렬(同列)로 보아 일체(一體)라고 하였던 것이겠는가. 그 의지와 실천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이외에 아뢴 바는 충분히 그 뜻을 알겠으니, 이만 어전에서 물러나 쉬도록 하라. 과인은 정전(正殿)에서 자숙(自肅)하겠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3》 ■#

● 사신은 말한다(史臣曰). 대전(大殿)의 문이 늘 닫혀있는 상태에서 임금이 정사에 나서지 않으니 신하들은 그 연유를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에서 올린 간언에 이르기를 임금이 상심이 커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 하니, 당시 군신(君臣)간의 유대(紐帶)가 이와 같았다. 군신간에 서로 마음을 트지 못하는 병폐(病弊)는 사직(社稷)에 큰 위험을 초래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장종대왕실록 권23》

● 창국 초기에는 승정원에 호패를 발급받은 백성을 뽑아 관리로 두지 않았고, 신원 미상의 모(某)가 승지를 맡아서 각 관청에 어명을 하달하였다. 임금이 표현하기를 "
승정원과 임금이 동렬(同列)은 아니지만, 의지와 실천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눌 수가 없다" 하였으니 사실상 일체(一體)인 체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은 어명을 내려도 조치가 없다고 지적하고 신하들은 명을 전달하는 승정원의 업무 처리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니, 이로써 군신(君臣) 간의 갈등이 유발된 것이었다.


◎ 제2차 소과, 진사시 박항(朴恒) 등 14인 입격

○ 소과(小科)를 시행하여 생원 안정복(安鼎福), 진사 박항(朴恒), 장재 이휘(李輝) 등 14인을 뽑았다.


◎ 지방관 임기 2개월로 환원

○ 4월 22일에 지방관 임기를 6주에서 2개월로 환원하였다. 《장종대왕문서》

○ 20일에 수이조좌랑 조성민(曹成旼)이 관찰사 대행의 임기와 근무일수의 가감(加減)에 관한 계하니 비답하기를,
"판윤 및 관찰사 이하 경외 지방관들의 임기를 만2개월로 연장한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4》

● 지방관의 임기는 처음에 2개월로 정하였다가 경진년(2000) 10월 29일에 1개월로 단축하였다. 동년 12월 18일에 다시 6주로 개정하고, 신사년(2001) 4월 22일에 2개월로 환원하였다.


창사(昌史) 제8권  

신사년(2001) 5월 기사본말(辛巳年 五月 紀事本末)


◎ 경기도 파주목(坡州牧)에 삼광중고교(三光中高校) 칭송비 건립

○ 4월 28일에 행승문원저작 김도민(金道民)이 삼광중고교의 칭송비 설치와 관련하여 계목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기도 파주에 삼광중고교에서의 아름다운 일을 기리는 칭송비(稱頌碑)를 세울 것을 명한다. 어찌 선(善)한 행실이 천하의 백성들에게 널리 미치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5》

○ 5월 2일 자로 경기도 파주목(坡州牧)에 칭송비(稱頌碑)가 세워졌다. 중증 장애를 가진 학우가 삼광중학교에 입학하자 하상동(河商東/57) 교장 이하 교직원들이 결심하여 각종 시설물의 개보수하고 학급 편성도 장애 학우를 중심으로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광중고등학교의 선행(善行)이 예조의 보고를 거쳐 칭송비 설치 전교로 이어진 것이다. 《관보 제17호》

■ 개국610년 3월, 진행성근육병 장애 학우 1인의 입학과 관련하여 교내 시설을 개수하는 등 제반 여건을 완비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2리 삼광중학교의 선행(善行)을 칭송함. 《삼광중고교 칭송비》


◎ 제4차 대과, 문과 유병호(兪炳豪), 무과 이휘(李輝) 등 17인 급제

○ 4월 21일부터 동월 29일까지 만9일간 시행되었던 제4차 대과의 결과 방문(榜文)이 5월 5일에 게시되었다. 사상 최초로 전현직 당하관과 소과 입격자, 성균관 유생들만을 응시 자격으로 하여 시행된 금번 과거에서는 모두 17인의 급제자가 나왔는데, 문과에 13인이 응시하여 11인이 급제하였으며, 무과에 6인이 응시하여 응시자 모두가 급제하는 영광을 안았다. 최우수 급제자는 평점 6.67로 무과 을과 제1인을 차지한 한성부 장재(將才) 이휘(李輝)였다. 《관보 제17호》


◎ 조정(朝廷) 인재난(人材難) 현상의 발단과 그 배경

○ 윤음(綸音:임금의 말씀)을 내렸다.
"과인이 신하들과 논의하여 과거제나 천거제를 통해 팔도의 유능한 인재들을 관리로 선발토록 하는 여러 방도를 정해 시행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한낱 겉치레에 그칠 뿐이였고 실효를 거둔 바는 극히 적었다. 이를 어찌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과를 시행하여도 초입사를 한 자가 단 6인에 그치니, 작년 12월 이후로 조정에 관리들에 대한 기근이 이처럼 심한 때가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가운데 관리들을 선발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할 것인데, 현재 조정의 상황이 이러한 중대사를 충족하고 있지 못함은 무슨 연유 때문인가. 민심이 이반됨은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법이 아니라 하는데, 지금이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인가." 《장종대왕실록 권26》

○ 사신은 말한다(史臣曰).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90년 만에 조선의 기업을 이어 본조(本朝)가 창설되었기에,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많은 인재를 등용함에 어려움이 많았다. 천거제가 활성화되지 아니하였기에, 과거는 인재 등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으나 적지 않은 병폐(病弊)가 있어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의 수에 비해 유품 관리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니,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과거가 유품자들의 승품 잔치로 전락하게 되어 그 의미를 퇴색시킬 수밖에 없었고, 재야에서 최고의 문재(文材)로 추앙받던 이들이 대과(大科)에서 겨우 병과(丙科)로 급제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시관들의 자질 또한 의심받게 되었다. 또한 과거에 급제하고 품계를 받고서도 조정에 출사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자가 드물었으니, 조정은 점점 인재난에 빠지게 되었다. 만약 조정에 인재가 많아 관리의 인사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의정부와 공신도감의 운영이 중지되었겠는가. 이런 어려움 속에 군신(君臣) 간의 불화 또한 있어 어전 분위기가 어수선하였으니, 조야(朝野)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장종대왕실록 권26》

● 지난달 7일의 '덕이 없음[不德]'을 자책(自責)'하는 윤음에서 임금이 말하기를,
"초야에 은거하고자 하는 신하들이 늘어나 조정 여러 관아에 관리들을 채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수차례 독려에도 불구하고 참상관 및 각도 관찰사들이 천거(薦擧)를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별시(別試)는 그 이름이 별시라 하며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고들 하니, 장차 조정의 상황이 어찌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분기마다 시행하는 대과 급제자들만으로 관리를 원활하게 충원하고 수급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라면 대과가 끝난 후에 호패를 발급받았다고 가정할 경우에, 3개월이나 되는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 우려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다.

●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체제로 과거 제도를 정비한 것은 옛 제도를 따라 조선을 조선답게 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그리 하였던 것이지만 호패를 발급받은 백성이 과거를 통해 출사하려면 길게는 3~4개월씩을 기다려야 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따라서 '인재 수급의 수단'으로서 과거의 기능이 저하되었고 이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현재까지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 인재난이 점점 심해진 것이다.


◎ 의정부 혁파,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시행

○ 5월 7일자 전교에 의해 의정부(議政府)가 임시적으로 혁파되었다. 제3대 의정부 수장이던 사록 이완(李浣)은 사헌부 감찰로 체직되었으며, 같은 아문의 사록 김우(金宇)와 윤석남(尹錫男) 등은 각각 면직되었다. 의정부가 혁파된 7일 이후의 조정 체계는, 이전보다 한층 강화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개편되게 되었다. 《관보 제17호》

● 본래 조선 태종·세종·세조 시기에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를 오가며 체제를 바꾼 것은 임금의 의지가 반영된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 그러나 본조에서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를 오간 것은 의정부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점점 제도가 정비되어 갈수록 의정부가 할 일과 육조가 할 일이 겹쳐 의정부는 유명무실해지고 업무의 효율은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인재난 현상이 가중되면서 조정이 의정부을 운영할 여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후에 의정부의 복설과 혁파가 반복된 것이다.


◎ 신용호(辛庸浩)의 불서용(不敍用) 처분과 해제

○ 4월 2일에 의정부사록 이완(李浣)이 병조의 업무 정상화 대책에 대한 차자(箚子)를 올리니 상(上)이 전교하기를,
"의정부와 병조에서는 병절교위 이순신과 김알지(金閼智), 신용호 등에게 통첩하여 병조 수장직을 수행할 의지가 있는지를 조회토록 하라. 의지가 있다면 관직을 신청할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다면 의정부에서 마땅한 자를 택해 아뢰도록 한다. 과인이 직접 교지(敎旨:어명)를 내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3》 ■#

○ 4월 11일에 전행군기시직장 신용호(辛庸浩)가 조정의 실태에 대하여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분순부위 신용호의 고견(高見)은 마음속에 간직할 만하다. 다만, 그 애절한 마음만을 항상 내세울 뿐, 실천하지 못함이 문제라 하겠다. 조명간에 교지(敎旨)를 내려 상소한 바를 직접 실천할 수 있도록 관직을 제수토록 하겠으니, 사양치 말 것이다. 초야에 칩거하고 있는 인재 중의 제1인이 분순부위 신용호라 할 것이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4》 ■#

○ 4월 14일에 전행군기시직장 신용호가 본인의 출사(出仕)에 대하여 상소하였는데, 대강 이러하다.
"소신이 전하를 능멸하는 대역죄를 짓고도 살아남아 있음이 망극할 따름이온데, 전하께옵서 소신에게 교지를 내려 관직을 제수토록 하겠다 하시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하오나 소신은 관직에 나갈 만한 여력이 없으며 능력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소신은 한낱 문장을 꾸며 고하는 잡기로 관직에 올랐사와 병조의 수장과 경상도 검률이라는 중임을 맡아 업무를 처리함에 소홀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바 다시금 관직에 나가 주상을 모실 자신이 없사옵니다.
소신이 주상께 소를 올린 연유는 현직관리들을 잘 추슬러 제대로 된 정사를 돌보시길 바라는 뜻이었으며, 국정이 제자리를 잡으면 수많은 인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것이니 일의 우선순위를 잘 살펴 행하시길 바라나이다."
하니, 비답하기를,
"만일 상소한 바를 바로 듣지 아니하고 과인이 관직만을 제수할 뜻을 비친 것이겠는가. 조정에 관리가 없어 그리 비답 하였던 것이다. 지금 병조를 비롯한 조정 내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는가. 상소한 바가 상달되지 않음만을 한탄하고 조정에서 필요할 때 관직을 받지 않으려 하니, 나중에 분순부위 신용호가 필요함을 구할 때가 되더라도 그 여건을 허락하지 않겠다. 금일 이후로 별명(別命)이 있을 때까지 관속을 포함한 모든 공직을 제한한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4》 ■#

● 사신은 말한다(史臣曰). 며칠 전 신용호가 조정 실태를 꼬집는 상소를 올렸을 때 상이 이르기를, 그 애절한 마음을 항상 내세울 뿐, 실천하지 못함이 문제라 한 바 있었다. 상은 신용호가 스스로 출사(出仕)하여 마음에 품은 바를 실천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신용호는 일전의 과오로 인하여 자신의 처지가 고립되었고,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판단하여 출사를 고사하였다. 이에 상이 조정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죄를 물어 불서용(不敍用)을 내렸다. 신하가 자신의 지난 과오로 인해 선뜻 출사하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상이 그에게 불서용을 내린 것은 지나침이 없지 않았다. 하나 조정 실태를 비판하며 폐단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상소를 올리면서도 그 스스로는 나서서 해결하려 들지 않았으니 결국 불서용은 신용호가 임금의 높은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얻은 결과였다. 그는 조정의 개탄(慨歎)한 현실을 간과하고 일신(一身)을 추스르기에 급급하였으니, 어찌 이를 두고 현신(賢臣)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종대왕실록 권24》

○ 경상도 적순부위 신용호(辛庸浩)가 상소를 올렸으니 그 내용이 대강 이러하다.
"조정의 신료들이 하나둘 주상전하의 곁을 떠나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를 타 초야에 칩거하고 있는 재야의 인재들이 전하를 보필하기를 꺼리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조정의 현실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진 이유는 모두 주상전하의 부덕으로 생긴 일이라 소생은 감히 직언하옵나이다. 주상께서는 만조백관 및 백성들을 엄히 다스리시므로 작은 허물로 조정업무에 부담감을 느껴 사직을 청하는 것이 보편적이라 의정부나 삼사의 관리로 가면 파직되거나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질 지경이니 소신이 전하께서 교지를 내려 관직을 제수토록 하겠다는 것을 감히 거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라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주상전하의 굳은 마음을 푸시고 좀 더 넓고 포근한 마음으로 만백성 및 대소신료들을 대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성군이 되시기 위해서는 좀 더 도량을 넓히시고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아량을 키우셔야 함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길,
"상소한 바를 잘 알겠다. 과인이 달리 무슨 비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하나, 과인이 생각하건대 무엇이 덕치(德治)인지 무엇이 법치(法治)인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조야(朝野:조정과 민간)의 인식이 그러하다면야. 금일 자로 적순부위 신용호의 불서용을 폐(廢)한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7》 ■#

● 사신은 말한다(史臣曰). 본조 창업부터 조정에선 고질적인 인재수급의 어려움이 만성화가 될 것을 우려하는 바가 컸다. 이는 새로운 인재가 충원되어도 삭직되고 낙향하는 인재가 크게 많았기 때문인데, 크게 곧고 바른 것을 따르기가 추상같은 주상이었으므로 신료들이 작은 허물에도 다투어 사직을 청하는 폐해가 크기도 컸거니와 이른바 주상이 요직의 신하들을 불신하여 군신 간의 유대가 좋지 못하여 분란이 적지 않았던 연유도 없지 않았다. 수 일전부터 신용호의 소와 같은 '태산은 작은 흙도 기꺼이 받아들여 크게 되었다(泰山不辭土壤)'는 요지의 소가 빗발치듯 올라왔으며 뜻하는 바가 크게 무례하여 감히 군왕을 책하는 일색이었으니 군신 간에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장종대왕실록 권27》

● 실록의 사론(史論)은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하였는지를 대변한다. 신용호는 불서용이 해제된 다음 날인 병술일(23일)에 행평안도검률로 부임하였다.


◎ 공신도감정사 이완과 공신도감부사 박희웅의 사직
◎ 이휘 박항 최치원 최영 강조 조동선 등의 상소

○ 5일에 공신도감 정사 이완이 전일 상께서 내리신 비답에 대하여 다시금 차자를 올리기를,
"소신이 작일 드린 차자를 살펴보자면 이미 과거 부정 건에 관한 과실(過失)을 도감에서 미리 감(減)해 어전(御前)에 계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렸사온데, 이미 도감에서 감한 사항을 주상전하께옵서 굳이 추가로 더 감하겠다고 하시니 소신은 그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하며, 과거 부정 연루자들의 훈급을 도감의 차자대로 책봉하여 주시기를 다시금 주청드렸다. 또 일신의 무능을 탄식하며 공신도감 정사(正使)의 직을 사임할 뜻을 상주하였다. 이에 대해 상께서 비답하시길,
"사직 차자를 받아들여 금일자로 사록 이완을 감찰로 체직(遞職)하고, 의정부를 혁파(革罷)한다. 감찰 이완을 도감 정사 직에서 물러나게 하므로, 추후 정사를 임명할 때까지 도감의 운영을 중지토록 하겠다."
하시었다. 이로서 공신도감의 운영이 일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녹훈도감의궤》

○ 8일에 이완과 박희웅이 사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 행한성부주부 최영(崔瑩), 예조좌랑 조동선(趙東瑄), 승의부위 이휘(李輝) 등이 과거제와 인재 등용, 의정부 혁파, 공신도감 운영 중지 등에 대하여 아뢰니, 상이 함께 비답을 내리기를,
"과인이 여기서 다시 그간의 실정(失政)을 인지한들, 그것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또 얼마나 그 다짐이 오래갈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과인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거듭 노력하여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의식(意識)이고, 또한 애초에 불민(不敏:우둔)하였는데도 군왕의 도(道)에 걸맞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니, 부덕(不德)과 무지(無知)가 하늘에 닿아 있는 지경이라 하겠다. 부족한 능력으로는 나라의 정사를 능히 감당하기 어렵고, 미미한 노력으로는 다시 그것을 보완할 수 없으니, 이러한 처지를 과연 어찌해야 하겠는가. 다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정진할 뿐이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6》

● 공신도감의 공신 책봉 업무에 대한 임금과 신하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고, 7일에 의정부를 혁파한 것도 군신 간 갈등의 요인이었다. 4월에 있었던 '덕이 없음[不德]'을 자책(自責)하는 윤음, 박희웅(朴熙雄)의 승지 고발 사건, 임금의 정전(正殿)에서 자숙(自肅)하겠다는 비답, 신용호의 불서용 처분 등은 모두 같은 배경으로부터 비롯된 사건 들이다. 군신 간의 불화는 해소되지 않고 정국은 불안했다.


◎ 승의랑 김도민(金道民) 병사

○ 5월 31일에 승의랑 김도민이 병사하였다.

◑ 김도민(金道民) 1973년생(男) 609.09.23-610.05.31
문관(文官). 자 윤암(潤岩), 호 외솔(外率), 본관 충주(忠州), 본적 평안도(平安道). 개국609년 9월 29일 제2차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출사했다. 한성부참군, 홍문관부수찬,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으며, 형조별제 겸승문원저작을 마지막으로 관력(官歷)을 마쳤다. 참군으로 있을 때 헌부(憲府) 감찰에서 최우수 관청으로 평가될 정도의 치적이 있었으나, 사헌부에 재직하던 중 어명(御命)에 불복하여 관청을 비우고 낙향하였다가 파직되고 품계가 강등된 후 불서용(不敍用)에 처해졌다. 동월 26일에 불서용이 해제되자 익월 20일 복직하여 형조와 예조의 직을 맡았다. 소신에 따라 일을 추진하는 것에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기개가 높은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개국610년 5월 31일에 병사(病死)하였으며, 품계는 정6품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렀다. 창국원종이등공신으로 추봉되고 종5품 봉훈랑 승문원교리가 추증되었다. 《인물약전》


창사(昌史) 제9권  

신사년(2001) 6월 기사본말(辛巳年 六月 紀事本末)


◎ 제3차 소과, 진사시 홍범도(洪範圖) 등 9인 입격

○ 지난 5월 29일부터 금월 초 3일까지 제3차 소과(小科) 생원, 진사, 훈련원시가 시행되었다. 생원시에서는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의 '지도자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만사가 이루어지고, 지도자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비록 호령을 하여도 백성들이 따르지 아니한다.'라는 구절과 관련한 시제가 나왔으며, 진사시에서는 최근 일본국의 우경화에 대한 시사(時事)적인 시제를, 훈련원시에서는 손자병법 용간편(用間篇)의 간자(間者:간첩) 활용에 대한 시제가 출제되었다. 소과 시행 결과 생원시에서 2인, 진사시에서 3인, 훈련원시에서 4인 등 총 9인의 입격자가 나왔으며, 이중 진사시 제1인으로 입격한 경상도 유생 홍범도(洪範圖)가 수석입격의 영예를 안았다. 《관보 제18호》


◎ 팔도 전역 극심한 가뭄

○ 평년의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강수량 때문에 전국 팔도가 1910년 이래 최대 가뭄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논밭 지역에서 피해가 속출하여 현재까지도 모내기를 실시하지 못한 곳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미 36개 군현(郡縣)에서는 제한급수가 실시되고 상황이며, 이러한 가뭄은 금월 하순경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현재 호조에서 절수(節水) 캠페인을 마련 중. 《관보 제018호》

○ 6월 9일에 호조에서 절수 캠페인 공문(公文)을 보냈다.


◎ 이조좌랑 조성민(曺成旼)에 대한 논란

◑ 조성민(曺成旼) 1983년생(男) 609.09.21-612.01.31
문신(文臣). 호 양건(亮乾), 본관 창녕(昌寧), 본적 한성부(韓城府). 개국609년 9월 시행된 제2차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수사옹원봉사가 되었다. 이후 행평안도검률, 사옹원직장을 거쳐 형조명률을 겸하였는데, 얼마 후 업무 미숙으로 파직되었다. 개국610년 2월에 규수 서아미(徐兒美)와 혼인하고, 이어 이조좌랑, 행승정원주서, 행형조좌랑, 행황해도도사, 행공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제3차와 제5차 대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최종 품계가 정4품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이르렀으며, 관직 수행에 실수가 없지 않았으나 이조와 형조 분야에서 노력한 바가 인정되어 개국612년 7월에 창국원종일등공신으로 추봉되고 종3품 중훈대부 선공감부정이 추증되었다. 문중 결금명가(潔錦明家)에 소속하였으며, 본적지 한성부에 중앙방송사(中央放送社)를 세워 운영하기도 하였다. 《인물약전》

○ 5월 25일에 선무랑 이완(李浣)이 관직신청을 하였다. 지망하는 관부는 양사였다. ■# 그러나 5월 26일에 이조좌랑 조성민은 이완을 호조산학교수로 사령을 하였다. ■# 이완이 자신을 왜 지망하는 관부로 사령을 하지 않았냐고 항의하니, 이조좌랑 조성민이 답하기를, "이완님께서는 주상께서 친히 임명하신 사헌부를 싫다고 뿌리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신청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

● 5월 7일에 의정부가 혁파되면서 의정부 수장이던 사록 이완(李浣)은 사헌부 감찰로 체직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였다. 조성민은 이 점을 지적하며 이완이 지망했던 사헌부나 사간원으로 사령하지 않았던 것이다.

○ 6월 5일에 형조명률 겸한성부주부 김병호(金炳昊)가 이조를 방문하여 겸직인 형조명률을 6월 10일 자로 사직할 것과 6월 12일부터 동월 25일까지 14일간의 휴가를 신청하였다. 이조좌랑 조성민은 사직을 6월 5일 자로 처결해버리고 휴가 신청은 반려하였다. ■#

○ 6월 6일에 한성부주부 김병호가 다시 이조를 방문하여 사직 처결일을 10일로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5일 자로 처결한 것에 대해 이조에 항의를 하자, 이조좌랑 조성민은 사직서를 미리 제출하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이라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서 서로 언쟁이 오갔다. ■#

○ 6월 4일에 충청 전라 양도암행어사 윤희승(尹熙勝)의 계본에 임금이 비답하기를, "전라검률 김민경의 근무일수를 15일 가산한다." 하였다. 동월 8일에 이조좌랑 조성민이 전라검률 김민경은 근무일수 가산이라는 포상을 받을 만큼 성실히 근무하지 않았으며, 윤희승이 암행어사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아뢰었다. ■#

○ 5월 26일에 이조에서 호조정랑 양지원(梁志元)에 대한 평정 결과를 공고하였는데 승품 기준에 못 미친 이월(5.00)이었다. 양지원이 평정 사유를 공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조좌랑 조성민이 평정 사유를 공개하였는데, 민간 모임인 광편민보사에서의 활동이 부진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논란이 되었다. ■#

● 인사평정은 '직무상 성과'나 '성취 정도'를 평가하는 것이지, 직무 이외의 '팔도 게시판' 또는 '각종 모임', '교육 기관', '대화방' 등에서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조성민이 양지원의 평정 사유로 민간 모임인 광편민보사에서의 활동 부진을 포함한 것은 명백한 착오였다.

○ 6월 10일에 교서관별제 이완이 이조좌랑 조성민이 암행어사 윤희승의 서계(書啓)에 이의를 지적하고 인사 행정 과정에서 빚어진 마찰 등을 이유로 조성민을 파직을 청하였다. ■# 이어서 형조율학훈도 임승민(林承珉), 군기시직장 강유(姜維), 경상도검률 이휘(李輝) 등이 조성민의 실책을 지적하며 징계하기를 청하였다.

○ 6월 15일에 임금이 전교를 내렸다. ■#
"전라검률 김민경에 대한 문제는 과인이 어사(御史)에게서 직접 보고를 받은 것이라 이조에서 나서서 무엇이라 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조좌랑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차자를 올린 것이라고는 하나, 사옹원봉사와 연명(連名)한 것이므로 사실상 이조 차원에서 계본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과인이 판단하기로 어사의 장계에 의구심이 들었다면 다시 관리를 파견하여 실상을 알아봤을 것이나, 암행어사였던 성균관박사 윤희승의 판단을 신뢰하므로 그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조에서 어사의 행실 자체를 문제로 삼음은 도리에 지나치니, 이는 명백한 이조좌랑의 과실이다. 하나, 인사상 형평에 관한 일은 이조나 병조에서 제기하지 않는다면 따로 지적할 곳이 없으므로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전한성주부 김병호의 인사와 관련한 일은 단순한 이조의 업무착오에서 기인한 것이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나, 사건 발생 이후 이조좌랑의 대응이 지나치게 오만했다는 비난만큼은 피할 수 없겠다. 이는 김병호의 대응에도 문제가 있어 그리 된 것이므로 양쪽 모두의 과실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조좌랑 조성민과 전한성주부 김병호는 각각 사과문을 올려 서로간 감정의 골을 메우도록 하라. 관직이 높은 것에 의지하여 그릇된 언행을 한 이조좌랑이 먼저 사과할 것이다.
이조좌랑 조성민이 이조 관아에 처음 등청한 것이 작년 10월 초 1일인데, 지난 8개월 보름간에 걸친 오랜 시간을 이조에 봉직했으면서도 완전하게 인사 체계와 평정 제도에 관한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인사 업무가 복잡하고 다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간 발생한 잡음들에 대해 완전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니, 금일자로 이조좌랑을 그 직에서 면직한다. 스스로는 공정했다 하나, 주위에서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또한 그런 것이다. 간언과 탄핵이 삼사(三司)가 아닌 곳에서 제기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폐단은 더욱 클 것이니 부득불 문책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창국 초의 인사 행정은 지금보다 복잡했으며 조정 관원의 수도 많았기 때문에 이조가 해야 일이 매우 많았다. 조성민은 의욕은 넘쳤으나 독단적인 일 처리 방식으로 일관하여 주변 관원과 마찰이 발생하였다. 조성민을 면직에 처하고 이완을 같이 면직한 것은 삼사가 아닌 곳에서 간언과 탄핵이 나오는 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의미였다.


◎ 함경도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에 전국무명용사추모비(傳國無名勇士追慕碑) 건립

○ 예조좌랑 조동선(趙東瑄)이 무명용사들을 위한 비(碑) 건립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금일자로 백두산이 위치한 함경도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에 전국무명용사추모비(傳國無名勇士追慕碑)를 세워 민족의 발원 이래 각지에서 순국한 모든 무명장졸의병들을 추모토록 하겠다." 하였다.

■ 한민족(韓民族) 발원 이래 각지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순국 또는 부상당한 군인, 경찰, 의병, 학병, 투사, 백성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추모함. 《전국무명용사추모비》


◎ 제6차 별시, 문과 손창희(孫昌熙), 무과 이동훈(李東勳) 등 16인 급제

○ 금월 초 8일자 어전 전교에 따라 이번 달 중으로 호적신고를 완료한 백성이면 누구나 응시 가능한 별시(別試) 과거가 시행될 예정으로 있다. 형조율학훈도 유자광(柳子光)과 예조좌랑 조동선(趙東瑄)의 차자에 의해 실시되는 이번 별시는 소과(小科) 시행 이후 처음으로 실시되는 임시 과거로, 유품자(有品者:품계를 가진 백성)는 응시에 제한을 받게 된다. 《관보 제18호》

○ 6월 19일부터 25일까지 시행되었던 제6차 별시의 결과 발표가 동월 30일에 있었다. 이번 별시에서는 문과에 손창희(孫昌熙), 박현호(朴賢豪) 등 14인이, 무과에 이동훈(李東勳) 등 2인이 급제하였다. 갑과 급제자는 문과에서만 2인이 나왔으며, 을과는 문과에서 4인, 무과에서 1인, 병과는 문과에서 8인, 무과에서 1인이 나왔다. 급제자들 중 7인은 초입사 신고를 마치고 현재 관직에 진출해 있는 상황. 《관보 제19호》



신사년(2001) 7월 기사본말(辛巳年 七月 紀事本末)


◎ 사헌부 사간원에 관원 충원, 삼사(三司) 가동

○ 3월 초 6일 이후 가동이 사실상 중지되었던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에 7월 2일과 금일자로 관원이 충원되어 본격적인 업무 재개에 들어갔다. 사헌부에는 전예조좌랑 조동선(趙東瑄)이 정6품직 감찰로, 사간원에는 전형조명률 김병호(金炳昊)가 역시 정6품직인 정언으로 임명되었으며, 금번 인사로 인해 대간(臺諫)과 언관(言官), 옥당(玉堂) 등의 단어로 대표되는 삼사(三司: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가 본래 기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양사가 구성됨에 따라 관직서경권이 사헌부와 사간원으로 환원되어 관직 임명과 관련된 행정에 한층 신중함이 기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간 양사가 구성되지 못해 임시 조치로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에서 양사의 서경 없이 관직 사령을 해 왔기 때문이다. 대전(大典)과 세법 제개정 업무도 곧 이루어질 전망으로 있다. 《관보 제19호》


창사(昌史) 제10권  目錄

신사년(2001) 8월 기사본말(辛巳年 八月 紀事本末)


◎ 신사 폐조 파동(辛巳閉朝波動)

○ 지난달 26일 이후로 간단한 계목(啓目)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금상(今上)께서 정사를 처결하지 않으시어 조정 정국이 장기간 경색되는 형국을 맞이하고 있다. 문무관 사이의 형평과 시비(是非), 공신도감 가동, 각종 세법과 직무지침의 결재 등이 처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삼사(三司: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와 육조(六曹) 상당수 업무가 연이어 지체되고 있다. 다음 주중으로 정상적인 업무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나, 그리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재의 조정 정세다. 《관보 제20호》

○ 8월 9일에 삼사에 전교하였다. ■#
"과인이 정전(正殿)에 나아가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이니, 그로 인하여 부덕(不德)함과 정사를 그르침(失政)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스스로 다짐한 바를 행하지 않은 것이 여러 차례이니, 지금 정사(政事)를 바로잡는다고 하여 조정 문무백관과 팔도 백성들을 이끌 명분(名分)이 생길 수 있겠는가. 상황이 이와 같으니, 조정을 폐(閉)함이 어떠하겠는가. 삼사(三司: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조야(朝野:조정과 민간)의 공의(公議:공론)을 정해 계(啓:보고)하도록 하라. 매사에 최선을 다하더라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이 군주(君主)의 자리(位)인데, 하물며 과인의 처지에서야."

○ 8월 초 9일에는 철조(輟朝)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라는 망극한 유지(有旨)를 삼사에 내리시기까지 하셨다. 이 유지는 만조백관의 청원에 따라 동월 24일 전교로 수습되었다. 《장종대왕서문서》 ■#

● 8월 9일 축시(丑時)에 갑자기 임금이 유지를 내려 "조정을 폐(閉)함이 어떠하겠는가"라며 하문하였다. 이 전교는 백성들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을 주었다. 만조백관이 극렬하게 반대하여 철조의 뜻을 거두기를 청하니, 8월 24일에 마침내 임금이 마음을 다잡고 산적한 정무를 처리하면서 종사(宗社)를 보존할 수 있었다.


◎ 제5차 대과, 문과 유자광(柳子光), 무과 이휘(李輝) 등 15인 급제

○ 7월 24일부터 동월 29일 자정까지 만6일간 시행되었던 개국610년도 3/4분기 대과(大科) 과거가 총 15인의 급제자를 배출하며 금일 4일 자로 종료되었다. 문무과를 통틀어 최우수 급제자는 평점 7.25를 받은 행형조명률 유자광(柳子光)이었으며, 이어 무과 을과의 이휘(李輝), 문과 을과의 이존수(李存秀) 등이 6.25 이상의 높은 평점을 받았다. 문과에서는 유자광을 비롯해 11인이, 무과에서 이휘를 포함해 4인이 급제하였으나, 이중 초입사(初入仕:처음 벼슬길에 오름)를 한 자는 한성부 장재(將才) 한호(韓濩) 1인에 불과했는데, 이는 지난 6월에 별시(別試)가 시행되어 대과 응시 자격을 갖춘 유생이나 한량들이 이미 대부분 출사(出仕)한 상태라서 금번 대과가 주로 전현직 관리들이 응시하는 과거로 변질된 때문이었다. 《관보 제20호》


◎ 제4차 소과, 진사시 유성민(劉聖敏), 전하림(田河林), 훈련원시 유자광(柳子光) 등 19인 입격

○ 제4차 소과는 8월 13일부터 8월 19일까지 만 7일간 시행되었다.


◎ 교육기관개설세법(敎育機關開設細法) 및 성균관설치세법(成均館設置細法) 제정

○ 8월에 '교육기관개설절목(敎育機關開設節目)'과 '성균관설치절목(成均館設置節目)'을 반포하여 시행하시니, 마침내 관학(官學)이 부흥하여 학풍의 진작과 면학의 장려를 통해 인재를 키워 나라의 큰 재산으로 삼고자 하신 어의(御意)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장종대왕문》


◎ 유학생 조창배, 버스운전사 서기봉(徐基鳳)의 정문 설치

○ 전경상검률 이휘(李輝)와 전형조명률 강유(姜維)의 청원에 의해 8월 13일에 유학생 조창배와 버스운전사 서기봉(徐基鳳)의 정문이 설치되었다. ■#

■ 개국610년 7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유래카 인근 강가에서 급류에 휘말린 여학생 2명을 구하려다 의사(義死)한 험볼트주립대 유학생. 향년 20세. 《조창배 정문》

■ 개국610년 7월 19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만덕 제2터널에서 덤프트럭(졸음운전)과 추돌하자,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버스를 안전지역으로 유도한 후 의사(義死)한 버스운전사. 향년 47세. 《서기봉 정문》


신사년(2001) 9월 기사본말(辛巳年 九月 紀事本末)


◎ 조정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 개편을 단행 ■#

○ 7일에 인사 개편을 단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사헌부 수장은 감찰 강다소, 사간원 수장은 정언 김병호, 홍문관 수장은 수찬 유자광, 이조 수장은 좌랑 이완, 예조 수장은 정랑 양지원, 병조 수장은 좌랑 이휘, 형조 수장은 좌랑 조성민, 성균관 수장은 직강 이징옥이다. 참군 윤희승, 검률 강조, 이운성, 홍범도 등은 각각 판윤과 관찰사직을 대행한다." 하였다.



신사년(2001) 10월 기사본말(辛巳年 十月 紀事本末)


◎ 신사지변(
辛巳之變)

○ 9월 14일 이후로 임금이 편전에 들지 않았고, 다시 신하들에게 모습을 보인 것이 11월 초 1일이었다. 그 사이 저자에는 임금에게 유고(有故)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 11월 2일에 마침내 임금이 편전에 들어 이르기를,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의 신하 오자서(伍子胥)가 비록 그 지혜는 출중했으나, 오나라를 후세에 이르게까지 존속시키지 못한 것은 오자서의 간언을 이해하고 실행할 줄 아는 현명한 군주(君主)를 만나지 못한 때문이다. 과인이 바로 그러한 군주가 아니겠는가.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한 후에 자신의 직위를 삼등 강등한 것과 같이 처신할 수 없으니, 과인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시작은 누구든지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하였으니, 구차하게 말을 늘어놓기 보다는, 때를 보아 정무(政務)에 치중할 뿐이다." 하였다. ■#

● 8월의 폐조 파동에 이어 이번에는 임금이 무려 49일간 철조하였다. 임금이 49일 만에 나타나 탄식하며 하교하기를 "구차하게 말을 늘어놓기 보다는, 때를 보아 정무(政務)에 치중할 뿐이다." 하였다.
http://www.1392.org/bbs?wonwu:68 게시물 링크 (클릭) 게시물 주소 복사하기
답글 : 제한 (접속하십시오) 서찰(메일) 수정/삭제 : 제한 (접속하십시오)     윗글 목록 쓰기
  | 비공개 설정 사조 백과사전 맞춤법 문법 검사기 0
2000
저장(입력)
번호 분류  문서 제목  이름 작성일 열람
18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5책 정제두 626/09/20-17:14 84
17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4책 정제두 626/09/20-17:00 88
16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3책 정제두 626/09/20-16:45 149
15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2책 정제두 626/09/20-16:38 108
14 동백 [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1책 정제두 626/09/20-16:24 77
13 동백 [원장] 동백서원 초대 원장 서긍 행장 정제두 626/09/19-22:43 82
12 동백 [함경감영] <방문> 부임인사 심기열 623/11/19-11:13 84
11 동백 [평안감영] <방문> 부임인사 천어 623/04/28-11:29 105
10 동백 [원이] 배향인 기일 손오공 620/01/25-14:10 126
9 동백 [원장] 배향인 자력 서양갑 619/02/10-13:23 209
8 동백 [원장] 동백서원 사우 수양사 배향록 <618.08.16> 서양갑 618/08/16-11:18 224
7 동백 [원장] 경헌공 유치의 행장 서양갑 618/07/27-14:39 165
목록이전다음쓰기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