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20일 (수) 16:24  [신시(申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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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1책
창사 기사본말
昌史 紀事本末

창사(昌史) 서(序)  目錄

백암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역사에 대해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사라질 수 있으나 역사는 사라질 수 없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나라라는 형체에 정신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역사를 기록하려는 이유는 본조의 국혼(國魂)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독일의 역사학자인 랑케(Ranke)가 역사에 대해 말하기를,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숨기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하며, 이때 오직 역사적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여야 한다."
라고 하였다. 또한,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쓰면서 이르기를,
"감히 내 의견을 붙여 논평하지는 않아 삼가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뜻을 따랐다"
라고 하였다. 나 역시 이 책을 쓰면서 가능한 한 논평을 하지는 않으려고 하였으나, 사료(史料)가 넉넉하지 않아 논평을 부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논평은 하되 최대한 해설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면 랑케의 사관(史觀)에 따라 자신을 숨기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말하려고 노력하였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E. H. Carr)가 역사에 대해 말하기를,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라고 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부득히하게 부연한 논평들은 사실(史實)에 대한 상호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일은 독자의 몫이며,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역사 편찬 체재는 사건별로 제목을 앞세우고 관계된 기사를 한데 모아 서술하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이며, 시간 흐름에 따라 사건을 기록하는 편년체(編年體)의 형식도 갖추었다. 또한, 역사적 주요 인물들에 대해 인물약전(人物略傳)을 인용하여 인물에 대한 열전(列傳)을 수록하는 기전체(紀傳體)의 방식도 일부 채택하였다. 기존의 장종대왕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방대한 편년체 형식의 역사 기록 체제를 벗어나 기사본말체를 택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사건을 이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기호 '◎'로 묶은 것은 사건 제목, '○'로 묶은 것은 사료(史料) 또는 직접 작성한 사실(史實), '◑'로 묶은 것은 인물약전, '■'로 묶은 것은 금석문(金石文), '●'로 묶은 것은 사건에 대한 논평 또는 해설이다. '○' 항목에서 참고한 사료로는 《장종대왕문서》, 《장종대왕실록》, 《녹훈도감의궤》, 《시호도감의궤》, 《관보》, 《해종대왕문서》, 《인물약전》, 《승정원일기》 등이 있으며, 인용한 사료는 말미에 출저를 밝혀 적었다.

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을 '창사(昌史)'라고 이름 짓는다. 경진년(2000) 8월 15일부터 시작된 우리 조선(朝鮮)의 파란만장한 창국(昌國)의 역사를 담는다는 의미이다.


목차

 
창사 기사본말 상권(昌史 紀事本末 上卷)

창사(昌史) 제1권

- 장종(章宗)
- 금상(今上)
- 본조 창국공신(昌國功臣)

창사(昌史) 제2권

- 경진년(2000) 8월 기사본말(庚辰年 八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3권

- 경진년(2000) 9월 기사본말(庚辰年 九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4권

- 경진년(2000) 10월 기사본말(庚辰年 十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5권

- 경진년(2000) 11월 기사본말(庚辰年 十一月 紀事本末)
- 경진년(2000) 12월 기사본말(庚辰年 十二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6권

- 신사년(2001) 1월 기사본말(辛巳年 一月 紀事本末)
- 신사년(2001) 2월 기사본말(辛巳年 二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7권

- 신사년(2001) 3월 기사본말(辛巳年 三月 紀事本末)
- 신사년(2001) 4월 기사본말(辛巳年 四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8권

- 신사년(2001) 5월 기사본말(辛巳年 五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9권

- 신사년(2001) 6월 기사본말(辛巳年 六月 紀事本末)
- 신사년(2001) 7월 기사본말(辛巳年 七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0권

- 신사년(2001) 8월 기사본말(辛巳年 八月 紀事本末)
- 신사년(2001) 9월 기사본말(辛巳年 九月 紀事本末)
- 신사년(2001) 10월 기사본말(辛巳年 十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1권

- 신사년(2001) 11월 기사본말(辛巳年 十一月 紀事本末)
- 신사년(2001) 12월 기사본말(辛巳年 十二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2권

- 임오년(2002) 1월 기사본말(壬午年 一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3권

- 임오년(2002) 2월 기사본말(壬午年 二月 紀事本末)
- 임오년(2002) 3월 기사본말(壬午年 三月 紀事本末)
- 임오년(2002) 4월 기사본말(壬午年 四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4권

- 임오년(2002) 5월 기사본말(壬午年 五月 紀事本末)
- 임오년(2002) 6월 기사본말(壬午年 五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5권

- 임오년(2002) 7월 기사본말(壬午年 七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6권

- 임오년(2002) 8월 기사본말(壬午年 八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7권

- 임오년(2002) 9월 기사본말(壬午年 九月 紀事本末)
- 임오년(2002) 10월 기사본말(壬午年 十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8권

- 임오년(2002) 11월 기사본말(壬午年 十一月 紀事本末)
- 임오년(2002) 12월 기사본말(壬午年 十二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19권

- 계미년(2003) 1월 기사본말(癸未年 一月 紀事本末)
- 계미년(2003) 2월 기사본말(癸未年 二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0권

- 계미년(2003) 3월 기사본말(癸未年 三月 紀事本末)
- 계미년(2003) 4월 기사본말(癸未年 四月 紀事本末)
- 계미년(2003) 5월 기사본말(癸未年 四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1권

- 계미년(2003) 6월 기사본말(癸未年 六月 紀事本末)
- 계미년(2003) 7월 기사본말(癸未年 七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2권

- 계미년(2003) 8월 기사본말(癸未年 八月 紀事本末)
- 계미년(2003) 9월 기사본말(癸未年 九月 紀事本末)
- 계미년(2003) 10월 기사본말(癸未年 十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3권

- 계미년(2003) 11월 기사본말(癸未年 十一月 紀事本末)
- 계미년(2003) 12월 기사본말(癸未年 十二月 紀事本末)
- 갑신년(2004) 1월 기사본말(甲申年 一月 紀事本末)
창사 기사본말 하권(昌史 紀事本末 下卷)

창사(昌史) 제24권

- 갑신년(2004) 1월 기사본말(甲申年 一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5권

- 갑신년(2004) 2월 기사본말(甲申年 二月 紀事本末)
- 갑신년(2004) 3월 기사본말(甲申年 三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6권

- 갑신년(2004) 4월 기사본말(甲申年 四月 紀事本末)
- 갑신년(2004) 5월 기사본말(甲申年 五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7권

- 갑신년(2004) 6월 기사본말(甲申年 六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8권

- 갑신년(2004) 7월 기사본말(甲申年 七月 紀事本末)
- 갑신년(2004) 8월 기사본말(甲申年 八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29권

- 갑신년(2004) 9월 기사본말(甲申年 九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30권

- 갑신년(2004) 9월 기사본말(甲申年 九月 紀事本末)
- 갑신년(2004) 10월 기사본말(甲申年 十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31권

- 갑신년(2004) 11월 기사본말(甲申年 十一月 紀事本末)
- 갑신년(2004) 12월 기사본말(甲申年 十二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32권

- 을유년(2005) 1월 기사본말(乙酉年 一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33권

- 을유년(2005) 2월 기사본말(乙酉年 二月 紀事本末)
- 을유년(2005) 3월 기사본말(乙酉年 三月 紀事本末)
- 을유년(2005) 4월 기사본말(乙酉年 四月 紀事本末)
- 을유년(2005) 5월 기사본말(乙酉年 五月 紀事本末)

창사(昌史) 제34권

- 을유년(2005) 6월 기사본말(乙酉年 六月 紀事本末)
- 을유년(2005) 7월 기사본말(乙酉年 七月 紀事本末)
- 을유년(2005) 8월 기사본말(乙酉年 八月 紀事本末)



개국626년 8월 26일
경기도 한량 정제두


창사(昌史) 제1권  

창사 기사본말 상권
昌史 紀事本末 上卷


장종(章宗)

장종 공경광렬경성정효 대왕(章宗恭敬廣烈景聖定孝大王)은,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자산(子珊), 호(號)는 소명(昭明)이다. 개국553년(1945) 음력 5월 10일에 사저에서 탄강(誕降)하였다. 경진년(2000) 8월에 즉위하여 갑신년(2004) 1월에 경복궁(景福宮)의 강녕전(康寧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왕위에 있은 지 3년 4개월이고, 수는 60세였다. 능은 희릉(熙陵)이다.

○ 경진년(2000) 8월 15일에 임금이 친히 종묘(宗廟)에 나가 열성조(列聖朝)에게 창국(昌國)을 고(告)하였다. ■#

○ 갑신년(2004) 1월 6일 자정에 강녕전에서 임금이 유교(遺敎)를 남기고 승하하였다. ■#

○ 무자년(2008) 8월에 장종의 행장(行狀) 정본(正本)을 완성하였다.

○ 무자년(2008) 9월에 묘호를 '장종(章宗)', 존호를 '공경광렬(恭敬廣烈)', 시호를 '경성정효(景聖定孝)', 능호를 '희릉(熙陵)'으로 정하였다.

○ 무자년(2008) 11월에 공정공(恭定公) 조조(趙造)를 장종의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정하였다.

○ 기축년(2009) 2월 14일에 금상(今上)이 친림하여 장종의 묘호, 시호, 존호, 배향공신에 대한 고묘(告廟)를 거행하였다.


금상(今上)

금상은, 휘는 모(某)이고 자(字)는 자경(子瓊), 호(號)는 심원(深遠)이다. 개국556년(1948) 음력 7월 7일에 사저에서 탄강(誕降)하였다. 갑신년(2004) 1월에 즉위하여 정유년(2017)인 현재까지 왕위에 있은 지 13년이다.

○ 금상은 장종의 동복아우이며 계미년(2003) 11월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다. ■#

○ 계미년(2003) 12월에 왕세제 대리청정(代理聽政)이 개시되었다. ■#

○ 갑신년(2004) 1월 6일 자정에 장종이 승하하자, 왕세제가 즉위하여 금상이 되었다. 동월 12일에 즉위 교서를 내렸다. ■#


본조 창국공신(昌國功臣)

계미년(2003) 7월 28일에 정공신 11인, 원종공신 15인이 창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들이 창국기념일인 경진년(2000) 8월 15일 이후, 나라의 번창에 기여한 공적을 특별히 치하한 것이다.


창국일등공신(昌國一等功臣) - 수충승지광운준책창국공신(守忠承志廣運俊策昌國功臣)

○ 하빈군(河濱君) 이휘(李輝)
신사년(2001) 5월 제4차 대과에 무과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좌참찬,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 덕수군(德水君) 이완(李浣)
신사년(2001) 2월 제5차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참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호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공안공(恭安公)이다.


창국이등공신(昌國二等功臣) - 수충승지광운창국공신(守忠承志廣運昌國功臣)

○ 한양군(漢陽君) 조조(趙造)
신사년(2001) 11월 제7차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우참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우찬성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공정공(恭定公)이다.

○ 해원군(海原君) 최영(崔瑩)
경진년(2000) 9월 제2차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예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안공(定安公)이다.

○ 영광군(靈光君) 유치의(柳治義)
초명(初名) 자광(子光), 경진년(2000) 12월 제4차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형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헌공(敬憲公)이다.

○ 교하군(交河君) 노사신(盧思愼)
경진년(2000) 12월에 천거로 등용되었으며, 벼슬이 호조정랑에 이르렀다. 호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혜정공(惠靖公)이다.


창국삼등공신(昌國三等功臣) - 수충승지창국공신(守忠承志昌國功臣)

○ 남원군(南原君) 양지원(梁志元)
경진년(2000) 8월 제1차 대과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 전원군(全原君) 이방원(李芳遠)
경진년(2000) 10월 제3차 대과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한성부서윤에 이르렀다. 한성부판윤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평공(翼平公)이다.

○ 영산군(靈山君) 신용호(辛庸浩)
경진년(2000) 10월 제3차 대과 무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병조정랑에 이르렀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성공(景成公)이다.

○ 경원군(慶原君) 강다소(姜多笑)
초명 유(維), 신사년(2001) 2월 제5차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한성부서윤에 이르렀다. 한성부판윤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익공(莊翼公)이다.

○ 양천군(陽川君) 허준(許浚)
경진년(2000) 8월 제1차 대과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성균관전적에 이르렀다. 예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헌공(定獻公)이다.


창국원종일등공신(昌國原從一等功臣)

○ 전성균관직강 김병호(金炳昊)
○ 증선공감부정 조성민(曺成旼)
○ 증사옹원첨정 박수현(朴秀泫)
○ 증예조정랑 조동선(趙東瑄)


창국원종이등공신(昌國原從二等功臣)

○ 전예조참판 이동진(李東珍)
○ 전이조참판 정재안(鄭宰安)
○ 전사헌부감찰 이백(李伯)
○ 증예조참의 강자아(姜子牙)
○ 증예조참의 박심문(朴審問)
○ 증군기시판관 백우현(白宇鉉)
○ 증승문원교리 김도민(金道民)
○ 증형조좌랑 안향(安珦)
○ 급제 김서울(金庶蔚)
○ 급제 박혁거세(朴赫居世)
○ 급제 안정복(安鼎福)


창사(昌史) 제2권  

경진년(2000) 8월 기사본말(庚辰年 八月 紀事本末)


국왕(國王), 종묘(宗廟)에 나가 열성조(列聖朝)에 창국(昌國)을 고(告)함 ■#

○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왕업(王業)을 이루신 지 519년째 되던 융희 4년(경술:1910)에 이르러 흉악한 왜적(倭敵)들이 그간의 은혜를 저버리고 국통(國統)을 침해하니, 아름다운 조선(朝鮮)의 기업(基業)이 끊어지는 비극(悲劇)을 맞이하였고,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져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후 국난(國難)이 해소되어 민국 정부(民國政府)가 수립되었지만, 조선의 국운(國運)이 끊어진 지 어언 90여 년이라. 여전히 천하는 어지러운 가운데 우리 왕께서 불현듯 나서시어 다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반석(磐石) 위에 올려놓으실 것을 결심하셨는데, 이때가 개국609년(경진:2000) 8월 15일이었다. 왕께서 친히 종묘에 나아가 열성조(列聖朝)께 고유(告諭)하시기를, "나라의 기강과 법령을 바로 세우고, 예(禮)에 따라 일을 처결하여 한 치도 그릇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몸소 근검절약(勤儉節約)하고, 상벌(賞罰)은 공평하게 시행할 것이며, 언로(言路)를 자유롭게 열어 언제나 백성의 소리를 듣겠습니다. 이를 종묘에 고하오니, 조종(祖宗)의 영령께서는 노력하는 바가 성취되어 나라가 흥성(興盛)할 수 있도록 복(福)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왕께서는 종사(宗社)를 공경히 받드신 후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연호(年號)로 정하시어 우리의 독자적인 연호 표기법을 확보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전하께서 거둥(擧動)하시어 종묘에 나가 열성조(列聖朝:여러 선왕)에 고하는 의식을 단행하셨다. 청명한 날씨는 이날의 거둥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며, 경복궁에서 종묘로 이어지는 종로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 전하의 은덕을 칭송하였다. 전하께서는 선왕께 고하는 의식을 거행하시는 도중에 눈물을 보이시어 문무백관들의 중흥에 대한 결의를 한층 강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국가지대사(國家之大事)의 기틀이 마련된 셈이다. 《관보 제1호》

경진년(2000) 8월 15일은 본조의 창국기념일이다. 이날 장종(章宗)이 불현듯 나타나 즉위하니, 사람들이 이를 창국(昌國)이라 하였다. 태조가 임신년(1392)에 세우고 경술년(1910)에 기업이 끊긴 조선왕조를 다시 일으켜 번창하게 하려는 의지를 담은 말이었다. 또한, 이때 임신년(1392)을 원년으로 하는 개국기년을 본조의 공식 연호로 정하였다.


제1차 대과(大科), 문과 박혁거세(朴赫居世) 등 6인 급제(及第) ■#

○ 왕께서는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종묘에 고유하신 직후 대과(大科)를 시행하여 유학(幼學) 박혁거세(朴赫居世) 등 6인을 등용(登用)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15일에 예조(禮曹)에 전교(傳敎)하기를[傳曰], "과거(科擧)를 시행하여 인재를 시취(試取)하라."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1》

○ 21일에 문과(文科)에서 박혁거세(朴赫居世) 등 6인을 뽑았다. 급제(及第)한 6인에게 홍패(紅牌)를 내렸다. 《장종대왕실록 권1》

○ 지난 21일에 정기 문과에서 한성부 유생 박혁거세(朴赫居世) 등 6인이 급제되어 품계와 관직을 받고 정무에 임하고 있다. 의정부와 홍문관, 이조, 예조, 병조, 한성부 등지의 각 관직에 임명되어 아조의 중흥을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관보 제2호》

● 고묘(告廟) 직후 치러진 제1차 대과에서 본조 최초로 관리가 선발되었다. 장원으로 급제한 한성부 유생 박혁거세를 포함하여 6인이 급제하였고 합격증인 홍패(紅牌)가 발급되었다. 그런데 홍패의 개국기년이 608년으로 잘못 기재되었고, 박혁거세는 '씨박', 선화는 '수호천사'라는 이명(異名)으로 응시하여 홍패에 본명으로 기재되지 못하였다. 훗날의 남원군 양지원도 이때 갑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承政院), 관보(官報) 발행 재개 ■#

○ 동월 19일에 승정원에 관보(官報) 발행을 전교(傳敎)하시고... 《장종대왕문서》

○ 19일에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관보(官報) 발행을 재개하여 정기적으로 각급 관청에 반포하라. 아울러 백성들이 서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장종대왕실록 권1》

○ 관보(官報) 또는 조보(朝報)라고 칭해지는 승정원 발행의 국가 신문이 90여 년 만에 발행 재개되었다. 관보는 이전 관보와는 달리 국정 소식 외에도 한성부와 8도 지방의 동향, 백성들의 소리 등을 담을 예정으로 있다. 《관보 제1호》


◎ 공문서(公文書) 양식 및 문서제목세법(文書題目細法) 제정 ■#

○ 23일에 공문서 양식[公文書式]을 제정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23일에 '공문서 양식[公文式]'을 제정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문서제목세법(文書題目細法)'과 공문서 양식의 제정에 관한 명을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제반 작업이 완결되었으므로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1》

○ 8월 23일에 어명으로 각급 게시판에 사용될 문서의 제목 양식이 결정 발표되었다. 관직이 있는 관리들은 '[관부/관직] 제목'으로, 그 이외의 일반 백성들은 '[고을/직업]으로 표기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이번 문서 양식은 여러 관리들의 의견이 수렴되어 확정된 것이다. 이미 예조 게시판에서는 이러한 양식을 적용하고 있으며, 한성부에서도 민간에 이를 적극 전파하고 있다. 《관보 제2호》

● 이때 정해진 [관부/관직], [고을/직업]으로 공문서의 제목을 적는 방식이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다.


◎ 성별과 출생지, 학력에 대한 차별을 철폐
◎ 유학(儒學)을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되, 서학(西學)을 널리 수용할 뜻을 천명(闡明)함

○ 25일에 한성부(韓城府) 유생(儒生) 이허생(李許生)이 지방관을 파견하는 문제와 구습(舊習) 타파에 대하여 상소(上疏)하니, 비답하기를,
"국체(國體)와 관련된 여러 사항에 대해서는 차후 논의의 터전이 마련되면 그때 확정하는 것이 좋겠다. 과인은 유학이나 성리학(性理學)만을 유일(唯一)의 사상으로 하여 그것에 치중하지 않을 것이다. 아조 600여 년. 시대가 변하였으니 마땅히 그에 따라 여러 제도도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선은 성별과 출생지, 학력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1》

○ 25일에 전라도 유생 정약용(丁若鏞)이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서교(西敎) 전파에 관한 사안은 추후 묘당(廟堂)에 논의토록 하여 개선 여부를 결정하겠다. 과인의 생각으로는, 본조가 비록 숭유(崇儒)를 근본으로 하고 있으나 천주학을 비롯한 여타 종교의 활동을 막을 수는 없겠다. 단, 정도가 지나치다면 처벌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1》

● 조선을 조선답게 하되, 시대가 바뀐 점을 참작하여 여러 가지 차별을 철폐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조처였다.


◎ 면학교서(勉學敎書) 반포 ■#

○ 동월 26일에 면학(勉學)을 장려(奬勵)하는 교서를 내리셨는데... 《장종대왕문서》

○ 26일에 교서(敎書)를 내렸다. 교서에 이르기를[敎曰],
"각급 관아(官衙)의 관리들은 면학(勉學)의 기풍을 조성하라. 배움에 시기를 놓치지 않고 힘쓰는 선비들의 기상은 나라의 기틀이다. 문선왕(文宣王)께서 '내가 일찍이 종일토록 밥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생각해 보았으나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배움의 중요성을 나타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움에 충실한 연후에야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과 밝은 이치를 깨달음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후에야 비로소 덕(德)과 지조 있게 실천하는 행동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찬 기개(氣槪)를 가진 문무관(文武官)이야말로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할 수 있다. 고을마다 서당을 설치하고 도서를 간행하여 면학의 기풍을 조성토록 하라. 과인은 이를 지켜볼 것이다." 하였다. 어제(御製). 《장종대왕실록 권1》


◎ 제1차 별시(別試), 문과 이허생(李許生) 등 5인 급제
◎ 제1차 문신정시(文臣庭試), 문과 양지원(梁志元) 등 3인 급제

○ 28일에 별시(別試) 문과에서 이허생(李許生) 등 5인을,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양지원(梁志元) 등 3인을 뽑았다. 《장종대왕실록 권1》

○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특별과거인 별시와 기존 관리들을 위한 문신정시가 시행된다. 예조 주관으로 시행되는 이번 과거에서는 별시 5명, 문신정시 3명 등 총 8명을 급제 또는 합격시킬 예정으로 있다. 과거 응시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의정부 게시판에 공고되어 있으며, 26일 16시 현재 별시에 2명, 문신정시 3명이 답안을 제출한 상태이다. 《관보 제2호》


◎ 한성부(韓城府) 청암서원(淸巖書院) 창건(創建) 사액(賜額)

○ 동월 28일에 주부 박혁거세가 차자(箚子)하여 한성부에 서당이 개설되었음을 아뢰면서, 아직 서당에 이름이 없다는 사실과 과거 조정에서 서원(書院)에 편액(扁額)을 하사한 전례(前例)를 들어 그 고사(古事)에 따라 사액(賜額)을 청하니, 이에 한성부의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키신 후 '바위도 맑게 하는 것처럼 선비의 기상을 다지라.'라는 뜻에서 '청암서원(淸巖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편액을 내리셨다. 서원의 사주(祀主)를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1905)으로 정하셨으니, 이는 충절을 높이 기리자는 의미라고 하교(下敎)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28일에 한성부주부(韓城府主簿)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차자하여 관내 서당에 편액(篇額)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나라에서 일개 서당에 편액을 내릴 수 있겠는가. 서원(書院)을 세움이 마땅하다. 당초 서원은 교육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중종(中宗) 연간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짓고 고려(高麗)의 학자 안향(安珦)을 제사 지낸 이후로 그 기능에 명현(名賢)의 제사가 포함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각지에 많은 서원이 세워지면서 학업은 멀리하고 붕당(朋黨)에 치중하는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그 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되어, 고종조(高宗朝)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 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두를 훼철(毁撤)한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였음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이제 다시 편액을 하사하고 서원을 허가하니, 이러한 전례(前例)를 거울로 삼아 운영에 내실을 기하도록 하라. 서원의 이름은 '청암(淸巖)'이니 이는 바위도 맑게 하는 것처럼 선비의 기상을 다지라는 뜻이며, 사주(祀主)는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이니 이는 충절을 기리자는 의미에서이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1》

○ 한성부 주부 박혁거세의 상소에 의해 한성부 관내 소재 서당에 대해 청암서원(淸岩書院)이라는 주상 전하의 친필 편액(간판)이 하사되었다. 전하의 면학교서에 의해 전국에 세워진 여러 서당 가운데 최초로 편액을 받고 서원으로 승격된 청암서원에서 많은 인재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관보 제3호》

● 이때 창건된 청암서원은 현재까지도 본조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창사(昌史) 제3권  

경진년(2000) 9월 기사본말(庚辰年 九月 紀事本末)


◎ 호패(號牌) 제도 시행 ■#

○ 9월 초 3일에 호조로 하여금 호패(號牌)를 발급하도록 명하시어, 동년 10월부터는 호적신고 후 호패를 가진 백성만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정하셨는데, 이로써 오늘날까지 무릇 본조의 백성이라면 모두 호패를 가지고 있어 신원(身元)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다. 호패에 관한 규정에 미숙하여 간혹 실수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제도를 간결하게 하여 뭇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장종대왕문서》

○ 3일에 처음으로 근정전에서 조회(朝會)가 있었다. 호조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호패(號牌)를 발급하도록 하여, 10월부터는 호패를 가진 백성만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정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2》

● 창국 초부터 활동명을 정할 때 본명이나 가명 또는 역사적 인물의 이름 중에서 택일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본명을 쓰는 백성, 가명을 쓰는 백성, 그리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쓰는 백성이 각각 존재하게 되었다.


◎ 한성(漢城)를 한성(韓城)으로, 한강(漢江)을 한강(韓江)으로 개칭

○ 동월 초 6일에 차대(次對)에서 전교하여 '한성부(漢城府)'를 '한성부(韓城府)'로, '한강(漢江)'을 '한강(韓江)'으로 개칭(改稱)하셨으니, 한성부를 도읍지로 정한 지 약 600년만의 변화였다. 민국에서 서울의 중국어(中國語) 표기를 '한청[漢城]'에서 '서우얼[首爾]'로 확정한 것이 개국614년(을유:2005) 정월이므로, 이보다 4년 3개월 앞선 선명(先明)의 조치였다. 《장종대왕문서》

○ 6일에 차대(次對)에서 신하들에게 물었다.
"과인은 평소 '한성(漢城)'의 이름을 '한성(韓城)'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漢)이란 저 중국(中國)의 한족(漢族)을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에 뜻 자체가 중국의 도시로 인식될 수 있다. 하여 과인은 '한성부(漢城府)'를 '한성부(韓城府)'으로 개칭(改稱)하고자 한다.
'한(韓)'이란 대대로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멀리 고조선(古朝鮮) 시대 대동강(大同江) 이남의 한족에서부터 가깝게는 광무황제(光武皇帝)께서 정하신 국호(國號) '대한(大韓)'에 이르기까지, 예로부터 조선과 더불어 이 나라와 민족을 아우르는 단어로 사용되어 왔다. 과인의 생각은 이러한데, 조관(朝官)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장종대왕실록 권2》


◎ 단종대왕(端宗大王) 장릉(莊陵)과 정순왕후(定順王后) 사릉(思陵) 합장 ■#

○ 동월 12일에 유학 허균(許筠)이 상소(上疏)하여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장릉(莊陵)과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사릉(思陵) 합장(合葬)을 청하자 조정 논의를 거친 후, 다음 달 초 7일에 장릉을 이장(移葬)하여 사릉에 합장한 후 사릉을 장릉으로 개칭할 것을 명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단종대왕의 장릉(莊陵)과 그 비(妃) 정순왕후 송씨의 사릉(思陵)이 10월 6일 합장되었다. 영월에서 유배 도중에 승하하신 후 그곳에 모셔졌던 단종대왕과, 멀리 따로 떨어져 계시다 남양주에 묻히신 정순왕후는 그간 위패만 합사되어 있었으나, 이제야 비로소 백성들의 소망에 따라 합묘되게 된 것이다. 장릉을 이장하여 사릉에 합장하였으며, 사릉의 이름을 장릉으로 바꾸고 비문을 새로 새겼다. 《관보 제7호》


◎ 제2차 대과, 문과 조식(曹植), 무과 김알지(金閼智) 등 26인 급제

○ 15일에 문과(文科)에서 조식(曺植) 등 21인을, 무과(武科)에서 김알지(金閼智) 등 5인을 뽑았다. 급제한 26인에게 홍패(紅牌)를 내렸다. 《장종대왕실록 권3》

○ 9월 5일부터 10일까지 실시되었던 제2차 정기 문/무과 과거 결과가 15일에 의정부를 통해 발표되었다. 문과 장원은 경상도 유생 조식(曹植)이 차지하였으며, 이외에도 문과에서 20인, 무과에서 5인의 인재가 선발되었다. 이들은 현재 관직을 받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관보 제5호》

● 제2차 대과의 결과로 본조 최초로 무관이 선발되었다. 김알지(金閼智)는 제1차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문관이었는데 이때 무과에 응시하여 갑과로 급제하였다. 사판(仕版)에서 연번이 가장 빠른 무관은 이순신(李舜臣)이다.


◎ 광해군(光海君) 복위 논의 개시

○ 동월 16일에 유학 최영(崔瑩)이 광해군(光海君)의 복위(復位)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왕께서 만백성을 상대로 의견을 모으라고 명하셨다. 다음날 조회(朝會)에서 제신(諸臣)에게 이르시기를, "광해군 복위 여부와 관련된 문제는 찬반(贊反) 다수결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명분(名分)의 있고 없음에 따라 결론을 낼 것이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글을 올려 논의를 진행하기 바란다." 하시고, "매우 신중한 사안이므로, 지금 과인의 뜻을 밝히지 않을뿐더러 논의 기간을 명확히 설정하지도 않겠다. 과인은 많은 신하와 백성이 참여할 것을 바란다. 그리하여야 공의(公議)가 수렴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이로부터 장장 2년에 걸쳐 조정과 민간에서 상소와 차자 60여 건, 빈청(賓廳) 논의 110여 건 등의 의견 수렴과 논의를 거듭한 끝에 조야(朝野)의 공론을 하나로 결집하여, 마침내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 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있던 광해군을 당당한 왕으로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혜종(惠宗)', 시호(諡號)를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이라 하고 정비(正妃) 유씨(柳氏)를 '혜장왕후(惠章王后)'로 함께 높였다. 동년 12월 초 2일에 왕께서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친히 납시어 혜종대왕의 신위(神位)를 공손히 봉안(奉安)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창국 초부터 광해군의 복위를 원하는 공론(公論)이 있었으므로
경진년(2000) 9월에 광해군 복위 논의가 개시되었다.


◎ 민국의 야구 국가대표단 도박 사건 논죄(論罪)

○ 28일에 행전옥서봉사 권율(權慄)이 야구선수단에 대하여 계사하였다.
"구대성은 아예 새벽까지 도박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하니 주범(主犯)이라 할 수 있고 김기태는 주장(主將)된 자로 선수들을 만류하지 못한 죄가 크며, 이승엽은 도박 여부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하나 높은 인기와 비례하여 그만큼 높은 백성들의 기대를 크게 저버렸으니, 이들을 모두 1개월간 하옥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감독 김응룡은 책임자로 선수 관리를 소홀히 하였으며, 임창용, 정수근, 박재홍 등은 상대적으로 죄질이 경미하였습니다. 누구의 죄가 중하고 경미하고를 떠나 사건이 크게 알려 졌다는 것만으로도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니, 이름이 알려진 모두가 하옥 대상입니다."
상이 전교하기를,
"이승엽, 구대성, 김기태를 1개월간 하옥하며, 김응룡, 정수근, 박재홍, 임창용 등을 보름간 하옥하라."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4》

○ 동월 28일에는 형조에서 민국의 야구 국가대표단이 도박한 것을 논죄(論罪)한 후 계사(啓辭)를 올리자 이를 재가(裁可)하여 하옥형(下獄刑)에 처하셨으니, 이들이 창국(昌國) 이후에 처음으로 형정(刑政)을 받게 된 죄인들이었다. 이후 형조, 한성부, 사헌부, 감영 등에서 왕의 치세 기간에 논죄하여 처분한 것이 60여 건으로, 연평균 약 20건의 유죄(有罪) 판결이 진행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시드니올림픽에서 도박 행위로 지탄을 받았던 야구선수단 감독 이하 단원 6인이 죄과에 따라 각각 1개월에서 보름 사이의 하옥형을 받고 전옥서에 역시 하옥되었다. 《관보 제6호》

● 경진년(2000) 시드니올림픽 때 야구 국가대표 선수 일부가 예선 기간에 도박장을 찾은 것으로 알려져 큰 파문이 일었고, 본조에서는 연루된 선수와 관리를 소홀히 한 감독을 치죄(治罪)하였다. 민국(民國)은 본조에서 대한민국을 부르는 약칭이다. 본조는 실세계인 민국에서의 일이라도 좋은 일은 칭송하여 포상하고 나쁜 일은 논죄하여 처벌한다는 원칙을 세움으로써 조정으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 제2차 별시, 문과 최영(崔瑩), 관경(關炅), 무과 성삼문(成三問) 등 13인 급제

○ 29일에 별시 문무과(文武科)에서 최영(崔瑩), 관경(關炅), 성삼문(成三問) 등 13인을 뽑았다. 《장종대왕실록 권4》

○ 22일부터 25일까지 실시되었던 9월 별시 문/무과에서 급제자 13인이 나왔다. 문과에서는 한성부 유생 최영(崔瑩)과 관경(關炅)이 갑과에 급제하였으며, 무과에서는 성삼문(成三問)이 단독으로 응시하여 역시 갑과에 급제하였다. 이외에도 문과 을과에 연개소문(淵蓋蘇文) 등 4인, 병과에 조성민(曹成旼) 등 6인이 급제하였다. 과거를 통해 품계를 받은 자가 40인을 넘어서게 되었으므로, 관리가 부족한 관아에도 인재를 충원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급제자 명단과 합격증인 홍패는 의정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보 제6호》


창사(昌史) 제4권   

경진년(2000) 10월 기사본말(庚辰年 十月 紀事本末)


◎ 암행어사(暗行御史) 파견

○ 10월 초 3일에 오도암행어사(五道暗行御史) 박희웅(朴熙雄)이 복명(復命)하였다. 전월 28일에 창국 이후 처음으로 차송(差送)하신 암행어사로서, 어사에 의해 충청검률 황담사(黃澹沙)가 봉고파직(封庫罷職)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3일에 오도암행어사 박희웅(朴熙雄)이 복명(復命)하니, 상이 인견(引見)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5》


◎ 한글날, 국가경축일로 승격

○ 동월 4일에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하는 전교를 내리셨는데, 이는 전월 29일 자 급제(及第) 묘청(妙淸)의 상소에 따라 예조의 의견을 물어 결단하신 것이다. 《장종대왕문서》

○ 4일에 예조에서 한글날의 국경일 재승격에 관해 계(啓)하자, 상이 전교를 내려 한글날을 국가경축일로 정하고, 이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5》

○ 9일 자로 554돌을 맞이하였던 한글날을 국경일(국가경축일)로 재승격하였다. 한글날은 민국정부(대한민국)에 의해 기념일 격하되어 공휴일에서도 제외되었으나, 형조명률 묘청(妙淸)의 상소에 의해 조정의 논의를 거친 후 예조에서 올린 계문(보고서)을 상께서 윤허하시면서 4일 자로 국경일 승격화가 이루어졌다. 한강의 이름을 개칭한 것과 더불어 민국정부 각 기관과 언론사에 통보할 예정이다. 《관보 제7호》


◎ 전사록 서태후의 정형(正刑) ■#

◑ 서태후(徐太后) 1985년생(男) 609.08.21-609.10.06
문관(文官). 본관 이천(利川), 본적 경상도(慶尙道). 개국609년 8월의 제1차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했다. 수의정부사록 겸훈련원봉사에 초임되었으며, 동월 28일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고 법전 편찬을 시도하는 등의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평소 거친 언행을 서슴지 않았으므로 동년 9월 초 3일 조회(朝會)에서 종8품으로 2계(階) 강등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이후로도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하고 백성을 선동하는 그릇된 행실을 계속하여 파직되었고, 자명상소(自明上疏)를 올린 후에도 행동을 바로잡지 않았으므로 결국 동월 23일에 삭탈(削奪)되었다. 하옥되어서도 계속 망언을 일삼은 결과, 10월 초 6일에 신하들의 청에 의해 정형(正刑)에 처해졌다. 남을 헐뜯기 좋아하였으며, 거친 언행과 기이한 행동으로 팔도 백성의 지탄을 한 몸에 받았다. 《인물약전》


○ 동월 6일에 서태후를 정형(正刑)에 처하셨다. 서태후는 창국 초년부터 어전(御前) 문란, 어명(御命) 불이행, 무고(誣告) 등을 일삼아 수차례 징계를 받았으나, 반성의 기미가 없어 치죄(治罪)를 청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왕께서는 사악함과 부정함을 경계하고 멀리하시어 서태후를 과감히 버리셨다. 《장종대왕문서》

○ 6일에 사형죄인[死罪人] 서태후(徐太后)를 정형(正刑)에 처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5》

○ 전의정부사록겸훈련원봉사 서태후(徐太后)에 대한 사형이 6일 자정에 집행되었다. 올바르지 못한 행실로 정국을 소란하게 하고 어전에서 행패를 부린 후에 관직에서 파해진 후, 근신하는 과정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전옥서에 하옥되었던 서태후가 재차 타인을 무고하고 역모성 발언을 하다가 형조의 계사(논죄보고서)에 의해 10월 6일에 사형에 처해졌다. 《관보 제7호》

● 서태후는 본조 내 인물로서 사형을 당한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다.


◎ 제3차 대과, 문과 박희웅(朴熙雄), 무과 신용호(辛庸浩) 등 35인 급제

○ 15일에 문과(文科)에서 박희웅(朴熙雄) 등 28인을, 무과(武科)에서 신용호(辛庸浩) 등 7인을 뽑았다. 급제한 35인에게 홍패(紅牌)를 내렸다. 《장종대왕실록 권6》

○ 6일부터 10일까지 시행되었던 10월 정기 제3차 문무 대과가 15일에 종료되어 급제자 35인을 배출하였다. 문과 장원으로 급제한 자는 현사헌부감찰 박희웅(朴熙雄)이며, 이외에도 경기도찰방 이이(李珥), 사간원헌납 이허생(李許生) 등 28인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무과 급제자는 갑과 출신자 경상도한량 신용호(辛庸浩) 등 7인이었으며, 대과 전반적으로 현직 관리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관보 제8호》


◎ 가례도감(嘉禮都監) 개청(開廳)

○ 창국 초년부터 국모(國母) 책봉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기 때문에 31일에 가례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여 예조좌랑 이이(李珥)를 수장으로 삼았다. 《장종대왕문서》

○ 29일에 근정전에서 조회(朝會)가 있었다. 조회 후에 전교하기를, "가례도감은 10월 31일에 설치 후 가동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국모 간택을 위한 가례도감의 수장은 예조좌랑 이이(李珥)이며, 소속 관원은 행사록 최영(崔瑩), 헌납 이허생(李許生), 전적 허준(許浚), 내수사전곡 고정우(高淨瑀)이다. 이외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관리로 홍문관박사 김도민(金道民)과 수감찰 박희웅(朴熙雄)을 둔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7》

○ 국모 간택을 위한 가례도감이 지난 10월 30일에 개청되었으며, 공신도감 또한 현재 삼사에서 논의를 거쳐 곧 개청할 예정으로 있다. 《관보 제9호》

○ 국모 책봉을 위한 금혼령(禁婚令)이 12월 15일 전국 팔도에 일제히 공포되었다. 예조에서 한성부 이하 각도 감영에 하달한 금혼령에 의해 15일부터 29일까지 일체의 혼인신고가 금지되었으며, 가례도감에서는 이 기간 동안에 일정 자격을 갖춘 규수를 대상으로 간택단자를 접수하게 되었다. 《관보 제12호》


◈ 창사(昌史) 제5권  目錄

경진년(2000) 11월 기사본말(庚辰年 十一月 紀事本末)


◎ 공신도감(功臣都監) 개청

○ 창국에 이바지한 신하들을 포상하여 공신(功臣)으로 책봉하자는 여론도 창국 초년부터 있었다. 이에 삼사(三司)의 논의를 거쳐 동월 초 5일에 공신도감(功臣都監)를 설치한 후, 사록 최영을 도감 정사(正使)로 삼으셨다. 개국611년 6월에 녹훈도감(錄勳都監)으로 개칭되는 등의 변화를 거치면서 공신 책봉에 관한 의견 수렴과 훈공(勳功) 평가, 녹훈(錄勳) 논의를 계속하였다. 《장종대왕문서》

○ 5일에 의정부사록 최영(崔瑩)이 계문을 올려 공신도감(功臣都鑑)의 인선(人選)에 대해 아뢰니, 정사에 사록 최영, 부사에 이조좌랑 양지원(梁志元) 등 4인, 첨사에 사록 임지숙(林智淑) 등 3인이었다. 상께서 이를 가납(加納)하시었으므로, 이때부터 비로소 공신도감이 설치되었다. 《녹훈도감의궤》

● 이때 개시된 공신 책봉 논의는 3년 뒤인 계미년(2003) 7월 28일에 마무리되어, 정공신 11인, 원종공신 15인이 창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


◎ 승품체직세법(陞品遞職細法) 및 인사평정세법(人事評定細法) 제정

○ 의정부의 계본에 따라 '승품체직절목(陞品遞職節目)'과 '인사평정절목(人事評定節目)'을 제정하여 동월 초 8일에 반포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문무관 인사 행정의 기틀이 마련되어 체계적인 직제(職制) 운영이 가능해졌다. 《장종대왕문서》


◎ 제3차 별시, 문과 윤희승(尹熙勝), 무과 이호랑(李虎郞) 등 6인 급제

○ 16일에 별시(別試)에서 윤희승(尹熙勝) 등 6인을 뽑았다. 《장종대왕실록 권9》

○ 11월 6일부터 12일까지 1주일 동안의 응시 기간을 가지고 시행되었던 별시 과거의 급제자 발표가 작일 16일에 있었다. 12인이 응시한 문과에서는 4인이, 3인이 응시한 무과에서는 2인이 급제하여 전체적인 급제율은 예정 30%보다 다소 높은 40%선에 이르렀다. 경기도 유생 윤희승(尹熙勝)이 문과 갑과에, 전라도 한량 이호랑(李虎郞)이 무과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외에 조동선(趙東瑄) 외 3인의 급제자가 있었다. 《관보 제10호》



경진년(2000) 12월 기사본말(庚辰年 十二月 紀事本末)


◎ 천거로 노사신(盧思愼) 등용

◑ 노사신(盧思愼) 1973년생(男) 609.11.16-611.03.24
문신(文臣). 호 벽암(碧巖), 독거(獨居), 시호 혜정(惠靖), 본관 교하(交河), 본적 함경도(咸鏡道). 개국609년 12월에 천거로 호조산학훈도의 직을 제수받아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이조, 호조, 예조 등의 관직에 주로 있었는데, 특히 호조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개국610년 2월 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행충청도검률, 행한성부참군 등을 거쳐 성균관, 형조, 이조 등에서 근무하였다. 문중 모임 오상세가(五常世家)의 가주(家主)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본래부터 품성이 곧고 진실하여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공무(公務) 받들기를 조심스럽게 하여 관청 일을 집안 일처럼 하였기 때문에 내외(內外)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다. 호조정랑에서 물러나 함경도 사저(私邸)에 내려가 사냥을 즐기던 도중 호환(虎患)으로 생을 달리하였다. 품계는 정5품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창국이등공신(昌國二等功臣) 교하군(交河君)으로 추봉되고 정2품 자헌대부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인물약전》

○ 11월 초 1일에 문무백관(文武百官)에게 전교하시어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셨다. 이에 한성참군 김도민(金道民)의 천거로 익월 초 5일에 본부병방(本府兵房) 노사신(盧思愼)이 등용되었으니, 음관(蔭官) 출사(出仕)의 시작이 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1일에 행예조좌랑 이이(李珥)가 천거(薦擧) 계하니 상(上)이 이르기를,
"유생 노사신을 정9품직에 삼고자 한다. 예조에서는 이조와 품의(稟議) 후에 마땅한 관직을 정해 아뢰도록 하라. 예조의 계(啓)가 올라오면 정식으로 품계와 관직을 제수하겠다." 하였다. 《장종대왕실록 권11》

● 본조 최초의 천거를 통한 출사였다.


◎ 화폐제(貨幣制) 도입 논의

○ 화폐제 도입에 대한 상소와 청원이 계속되자 12일에 의정부와 호조 주관으로 조야의 공론을 수렴하도록 하셨다. 논의 결과에 따라 당시에는 화폐 제도가 도입되지는 않았으나, 개국613년에 재산(財産) 제도가 마련되는 단서가 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무관 임용 관청 소폭 확대

○ 동월 5일에 홍천현감 이순신(李舜臣)이 무관 임용 관청 확대를 청하자 공론에 부쳐 16일에 의정부 당하관과 의금부로 무관 임명 범위를 확대하셨다. 그리하여 무관들이 원하던 바가 일부나마 해소되게 되었으며, 이듬해 8월 24일에 조정 여론을 다시 수렴하여 승정원 당하관과 사간원으로, 금상 전하 치세인 개국613년(갑신:2004) 6월 17일에 호조, 공조로 무관의 진출 범위가 추가 확대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경진년(2000) 12월 16일 이전의 무관 임용 관청은 의금부, 사헌부, 병조, 형조 그리고 지방관이었다.


◎ 제4차 별시, 문과 김우(金宇), 무과 서재필(徐載弼) 등 8인 급제

○ 12월 별시 과거의 급제자 발표가 지난 13일에 있었다. 이번 별시에는 문과에 13인, 무과에 5인 등 모두 18인이 응시하였으며, 이 가운데 문과에서는 을과 급제자인 황해도유생 김우(金宇)를 비롯하여 4인이, 무과에서도 을과 급제자인 평안도한량 서재필(徐載弼) 등 4인이 급제하는 결과를 보였다. 《관보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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