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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차 소과 훈련원시 과거시험 시행 기간 : 2019.08.24-2019.09.01
문서분류 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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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 제71차 소과 훈련원시 응시
훈련원시 시제
 :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 항쟁 전술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 삼별초가 끝내 패전하여 소멸된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응시자 본인의 의견을 기술하라. (200자 이상으로 답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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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 내용 :

삼별초는 고종 17년경, 무인 집정자 최우에 의해 치안유지를 비롯한 국가의 공권력 강화를 도모한다는 허명 아래 실제로는 무인정권의 보호를 담당하기 위해 세워진 '야별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야별초가 확장되어 후에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게 되었고 여기에 고종 말년,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도망쳐 나왔거나 몽골군에 의해 부모 친지가 피살된 이들이 모여 만든 신의군이 추가되어 삼별초가 되었습니다.

이 삼별초는 몽고의 요구에 따른 개경 환도를 반대하고 끝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는데, 이를 두고 혹자는 대몽항쟁이라 하고, 혹자는 그저 난이라 일축합니다.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민중항쟁이라 하면 대몽항쟁이라 하고, 무신정권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투쟁이라 하면 난이라 할 것입니다.

그들의 투쟁은 진도, 남해, 제주도에 이르러 삼 년이나 지속하였으나 종국에는 패전하여 소멸하였습니다.
삼별초의 첫 투쟁은 진도에서의 본토 공략이었습니다. 나주에서부터 전주까지 공격하여 여몽 연합군의 식량을 빼앗거나 치고 빠지는 등의 변칙 전투를 시행하였고, 이후에는 경상도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남해를 거점으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하였습니다. 이는 남해, 합포 등과 같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 지역을 공략함으로 여몽 연합군에 의해 고립되는 것을 막아내는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부산의 동래성 등을 공격해 남해안 영역 전체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군사적 작전 이외에도 온을 자신들의 황제로 추대하고 그를 위시해 왕궁을 짓고 조정을 세움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지닌 정통성을 강조하는 한편, 고려 조정이 만들어 보낸 조정 문서를 불태움으로 백성의 민심을 확보하였습니다. 특히나 이 조정 문서에는 노비 문서 등이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분제 철폐를 시행함으로 더욱 많은 수의 백성의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후에 이들의 항쟁이 민중항쟁이 아닌 민의항쟁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자가 전쟁에서 군사가 적은 것을 경계한 것은 마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진을 친 용장산성의 방어선은 그 길이가 길어, 관군에 비해 수가 적었던 삼별초에게는 큰 약점이 되었고 그뿐 아니라 연합군의 전략으로 격전지가 여러 곳으로 나뉘게 되어 전투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갑작스러운 전략 변경은 군사들의 혼란을 야기한 것뿐 아니라 사기 저하의 결과 또한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실제적인 패전 원인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그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그 대신 적군은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아군과 적군을 제대로 파악하고 세운 전략과 전술로 전쟁에 임했더라면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나 삼별초는 그렇지 못했음으로 그 시작부터 패색이 짙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들은 고려군의 중심이었고, 그들 중 특별히 신의군은 이미 몽고와의 전투 경험이 있었으므로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한 것의 이유가 없다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것으로 말미암은 패배가 너무 컸습니다. 이들은 또한 몽고군이 수군 능력이 없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는 뼈아픈 실책이었고, 이러한 자만심과 방심으로 삽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적군이 스스로의 책략에 말려들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책략에 열중한 나머지 적의 책략은 보지 못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타격을 맞게 되니, 그것을 패전이라 부릅니다.

이 외에도 몽고는 끈질긴 회유책으로 이들을 대했으니, 이것이 이들 삼별초의 패전 원인 두 번째입니다. 연합군은 삼별초를 향하여 지금 항복한다면 살려줄 것이니 그만 버티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등의 회유책을 계속하여 마음으로부터 무너뜨렸으니, 이것이 가장 큰 전술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최상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 하였고,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보다 싸우기 전에 지혜로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 하였으니 이들의 이러한 회유책은 실로 놀랍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들 삼별초는 처음부터 어려운 투쟁을 시작하였으니 손자병법의 패전계를 사용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여몽 연합군은 두 국가의 연합군이었으므로 제35계 연환계가 쓸모 있었을 것입니다. 모략을 사용해 이 둘을 서로 견제하게 하여 적의 전투력을 감소시키고 제22계 관문착적을 따라 그나마 약체였던 고려를 먼저 포위하여 섬멸하였더라면 그나마 후의 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약하여, 이들은 진도에 터를 잡고 변칙전투를 시행함으로 본토를 공략하였고,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조하는 왕조와 조정을 세움으로 백성의 민심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내부적으로는 자만심과 방심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틈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연합군의 끈질긴 회유책은 이들의 마음부터 무너지게 하였으니 이들이 역사상 갖는 의의가 어떠한들 삼 년의 투쟁은 그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고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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