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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時代) 05 제11화
원자. 원자의 잔병치레로 명망 있는 대신들의 집에 피접(避接) 떠난 뒤부터 중궁의 투기는 절정에 달하였다. 중궁은 시시때때로 제 어머니한테 악을 써대며 정귀인 그것이 대비전에 제집 인양 드나들 듯하더니 고자질을 일삼더이다. 그러더니 원자가 잔병치레한다는 핑계를 대고 대비께서 피접 보낸답시고 원자를 냅다 빼앗습니다. 친정어머니 신씨는 행여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벌벌 떨어대며 빼앗기다니요. 마마, 잠시 원자께서 피접 가신 것뿐입니다. 안타까워하며 중궁을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내인 삼월이에게 정귀인의 밥상에 독약을 넣으라며 비상(砒霜)을 꺼내면서 윽박지른다. 정귀인과 엄소용이 저주를 퍼부어댄다고 발악하다가 이내 실신했다. 대비전의 소행이라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고 소리치니 중궁의 체통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인수대비는 ‘그럴 만도 하지. 생떼 같은 원자를 빼앗겼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야밤에 다른 후궁의 처소에 상감이 납시었다고 상궁 하나가 아뢰자, 중궁이 악쓰며 대전의 내관과 상궁들에게 손찌검하였다. 이내 대전을 벗어나 후궁의 처소에 다다르고서는 상감을 내놓으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때 인수대비가 이 소식을 듣고는 화를 참아야 했다. 상감의 흠집이 될까? 싶기도 했지만, 왕실의 체통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한 며느리를 얻었거니, 마음속에 접어두자 했더니 천것이 아니라 악귀가 아니냐. 업보를 씻기는커녕 또 하나의 업보를 세우려는 악귀를 며느리로 맞았구먼.’ 왕대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다음날 왕대비는 수강궁(壽康宮) 옆에 빈터가 있는데 그곳에다가 대궐을 지어놓고 그곳에 살 수 있도록 청하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여 대궐 전각을 지어내니 이곳의 이름을 창경궁(昌慶宮)이라고 하였다. 왕대비의 체면을 더 살려준 셈이었다. 중궁은 중궁대로 후궁을 독살하려고 모의하였다. 익명서를 써서 감찰상궁의 집에 투서를 던지고 비상을 가져다 후궁의 밥상에 올리기까지 하니 중궁은 체통을 내팽개치고도 남았다. 중궁의 체통이 이 지경에 다다르자, 금상과 인수대비가 얼굴을 붉혔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 나가자, 조정의 대신들이 왕대비전의 의지(懿旨)를 기다렸다. 드디어 의지가 내려졌으니 중궁을 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긍익(李肯翊)의 저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이때의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유년(丁酉年)에 어떤 사람이 감찰상궁의 집안이라고 일컬으며 권숙의의 집에 투서하였다. 숙의가 그 투서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엄소용과 정소용이 장차 왕비와 원자를 해치려고 한다.’고 쓰였다. 임금은 왕비의 방에서 작은 상자 속에 간수된 방술(方術)하는 서책을 보았다. 임금이 왕비에게 물으니, 삼월이란 여종이 친잠할 때에 올린 것이라 했으나, 후에 삼월이 제가 쓴 것이 아니라고 공초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윤필상에게 그 진위를 밝히라고 명하도록 상당군 한명회가 간언하였는데 이를 두고 인수대비는 노발대발하였다. 잘못하면 자신에게 불똥이 튀어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치형이 인수대비의 측근으로서, 조정 대신들과 인수대비 사이의 역할을 맡아왔다. 치형의 머릿속에는 중궁을 빈(嬪)으로 강등하고 원자를 지키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니 치형은 중궁을 빈으로 봉하도록 했다. 이에 인수왕대비는 치형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때의 일을 적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영의정 정창손은 강력하게 간할 수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빈으로 강등하여 책봉하고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승지 이극돈과 임사홍이 힘써 간하다가 중지하였다. 삼월이란 여종은 목을 매어 죽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곤장을 치고 귀양보냈다. 대간은 부부인 신씨도 중궁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다는 이유로써 부부인의 직을 삭탈하고자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은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을 시켜 금지시켰다.” 중궁의 폐출 소식이 대궐을 감싸게 되자 당사자인 중궁은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었다. ‘소원대로 되셨습니까, 대비마마. 눈 안에 가시 같은 며느리의 흠집을 잡으셨으니 얼마나 시원하시겠습니까.’ 중궁의 자리에 있던 윤씨는 자수궁에 옮겨지고 덕빈(德嬪)으로 강등되었다. 이는 중궁을 살리기 위한 절충안(折衷案)이었다. 그 여파는 윤씨의 친정까지 번졌다.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 윤구 형제와 신씨의 몸종이 이때 화를 당했다. 고립을 자초한 덕빈의 죄였다. 인수대비는 상감은 물론, 대왕대비전의 뜻을 빙자하여 정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판의금부사 윤필상의 공초(供招)에 의하면, 방양서는 전 곡성현감(谷城縣監) 이길분의 첩의 집에서 얻어 사비를 시켜 등사하게 하고, 언문으로 쓴 것은 윤구의 아내가 썼으며 작은 것은 사비가 썼습니다. 중궁에서 찾은 비상은 부부인께서 구해다 중궁에게 전해드렸다고 합니다. 우유부단한 조정의 생태에 인수왕대비는 매우 불쾌해했다. 인수대비가 상감을 불러놓고 말하길, <자치통감>에 이르길, 당나라 이필이 덕종에게 간하기를 ‘원컨대 폐하께서는 궁에 돌아가시어 이 말을 들추어내지 마시옵소서. 좌우에서 들으면 태자가 위태롭습니다. 옛날에 폐하지 않을 것을 폐하였다가 잘못된 일이 있고, 마땅히 폐해야 할 것을 폐하지 않음으로 하여 옳은 것도 있었는데 질투하는 것은 부인의 상정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왕비의 실덕(失德)함이 크고 죄가 무거워 그 위를 폐하려는데, 원자가 훗날에 그 어미의 일을 들추어내어 다시 바로 잡으려고 할 것이니 훗날의 보복이 두렵고, 그런데도 왕비를 폐하면 필경 보복당하고 싶지 않으니 원자를 해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 원자를 폐해야겠어요. 순간 임금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동안 왕비로부터 받았던 푸대접을 응분(應分)의 대가로서 되돌린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한 인수대비의 결단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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