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20일 (수) 17:24  [유시(酉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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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7책
창사(昌史) 제31권  目錄

갑신년(2004) 11월 기사본말(甲申年 十一月 紀事本末)


◎ 창국공신(昌國功臣) 개정 논의


○ 10월 11일에 규장각제학 겸비변사 유사당상 이동진(李東珍)이 차자(箚子)를 올려 창국공신 개정 논의를 차분하고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있도록 빈청(賓廳) 논의를 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윤허한다. 아울러, 빈청 3실을 비변사(備邊司) 관할로 한다." 하였다. ■#

○ 10월 14일부터 11월 1일까지 빈청에서 창국공신 개정 논의를 하였는데 논의 참가자 대다수가 공신 개정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1월 16일에 비변사 유사당상 이동진이 논의 결과에 대하여 계본(啓本)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빈청 논의에 참여한 자가 십여 명에 불과하니 어떠한 용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적절한 시기에 다시 빈청을 열어, 공신 개정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 진사 이덕무(李德武)의 창국공신개정연명소(昌國功臣改定聯名疏)에서 드러난 그의 논지(論旨)는 지나친 완벽주의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공신 책봉이란 완벽(完璧)을 추구하여도 완벽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공신 책봉을 상고(上古)하건대 과연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예가 있었는가. 선조조(宣祖朝) 선무공신(宣武功臣)과 호성공신(扈聖功臣)을 비교해봐도 조종조(祖宗朝)의 공신 책봉이 공정하지 못하고 흠결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호성일등공신 이항복(李恒福)과 정곤수(鄭崑壽)의 공로가 선무일등공신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공로에 비할 수 있을까. 같은 반열의 일등 공신일지라도 공신의 성격에 따라 달리 평가되는 것이다. 또한, 조선의 공신들은 대다수가 당쟁(黨爭)이나 역모(逆謀) 진압 등 권력 다툼의 결과로 태어난 자들이었는데 창국공신의 공로가 그들에 비해 작다고 할 수 있을까. 창국공신의 공로가 한말(韓末)의 충의지사(忠義志士)나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獨立鬪士)들에 비해 미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가장 고결한 호국선열(護國先烈)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창국공신은 창국(昌國)이라는 훈호(勳號) 그 자체에 의미가 있고 무게가 남다른 것이니, 애초에 공신을 책봉할 때 반론이 제기되지 않았는데, 다 결정이 난 이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하다.


◎ 제22차 소과, 훈련원시 권성유(權性有) 등 4인 입격

○ 제22차 소과는 11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갑신년(2004) 12월 기사본말(甲申年 十二月 紀事本末)


◎ 비변사 폐청, 대대적인 인사 단행
■#

○ 12월 16일에 조정 인사와 함께 전교하기를,
"명일에 비변사(備邊司)와 성균관(成均館)을 일시 폐하고, 시호도감(諡號都監)을 복설한다. 명일에 다음과 같이 인사를 단행한다.
- 형조판서 이휘(李輝)를 시호도감제조로 체직한다.
- 규장각제학 겸 비변사 유사당상 이동진(李東珍)을 예조참판으로 체직한다.
- 공조참의 양지원(梁志元)을 겸규장각직제학으로 삼는다.
- 행병조정랑 서양갑(徐羊甲)을 절충장군으로 가자(加資)하고, 병조참의로 삼는다.
- 행성균관직강 박상진(朴商鎭)을 홍문관부응교지제교로 체직한다.
- 행성균관직강 조운(曺雲)을 행병조정랑으로 체직한다.
- 행예조정랑 조병옥(趙炳玉)을 행형조정랑으로 체직한다.
- 행사헌부감찰 성혼(成渾)을 예조정랑으로 체직한다.
- 행형조 좌랑 장운익(張雲翼)을 사헌부지평으로 체직한다.
- 행훈련원참군 박신신(朴新信)을 수사간원정언으로 체직한다.
- 행교서관박사 박지하(朴志昰)를 홍문관부수찬지제교로 체직한다.
- 전경기검률 이충(李忠)을 승정원주서로 삼는다.
- 행전옥서참봉 정언신(鄭彦信)을 군기시직장으로 체직한다.
- 전조(銓曹)는 명일에 천입성(天立星), 조광윤(趙匡胤), 박한(朴桓), 김대현(金垈炫), 이율곡(李律谷) 등을 지방관으로 체직하라." 하였다.


◎ 시호도감 개청

○ 11월 16일에 비변사유사당상 이동진이 아뢰기를,
"대저 효(孝)는 만행(萬行)의 근본이라 하였사옵니다. 금상(今上)께서 대행대왕 전하의 높으신 공덕(功德)을 널리 기려 만세(萬世)에 드높이는 것은 효행(孝行)의 시작이라 할 것입니다. 하오나 황공하옵게도 대행대왕 전하께서 승하(昇遐)하신 지 열 삭이 넘어갔으나 여태껏 시호와 묘호는 물론이요 행장마저 찬술치 못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신과 같은 무능무책(無能無策)한 신료들이 조정에 남아 있기 때문이니, 그 죄를 어찌 필설(筆舌)로 형용(形容)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행대왕 전하의 행장을 찬술하고 시호를 마련하는 일은 이제 더는 미루어 둘 수가 없는 화급(火急)한 조정 대사이니, 하루속히 시호도감을 복설하시어 신 등의 불충(不忠)을 일 푼(一分)이나마 감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깊이 상량해 보겠다고 하였다. 《시호도감의궤》 ■#

○ 12월 6일에 형조판서 이휘(李輝)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재주가 미약하나 다시 한번 시호도감을 운영케 하여 주신다면 팔도의 인재와 문재를 고루 등용하여, 이른 시일 내에 대행대왕 전하의 업적에 걸맞은 시호를 지어 전하께 아룀으로 이미 저지른 불충의 죄를 만분지일이나마 씻고자 하옵니다. 신에게 시호도감의 복설과 도감 관원의 선발에 대한 권한을 주신다면, 신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분골쇄신하여 대행대왕께 시호를 올리는 사업을 마무리하고자 하오니, 삼가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비변사 유사당상이 아뢴 바도 있으니 일간 시호도감을 복설토록 하겠소." 하였다. 《시호도감의궤》 ■#

○ 12월 16일에 조정 인사와 함께 전교하기를,
"형조판서 이휘를 시호도감제조로 체직한다." 하였다. 《시호도감의궤》


◎ 해원군 최영(崔瑩)의 부고

○ 21일에 호조참의 이완(李浣)이 해원군 최영의 부고를 아뢰니 비답하기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조에서 규례(規例:규정)에 따라 조문토록 한다. 추증(追贈)과 추시(追諡)는 행장이 접수된 이후에 전례에 따라 조처하라." 하였다. ■#

◑ 최영(崔瑩) 1977년생(男) 609.09.22-613.12.21
문신(文臣). 호 송죽(松竹), 시호 정안(定安), 본관 해주(海州), 본적 강원도(江原道). 개국609년 9월에 제2차 대과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수전라도찰방, 행의정부사록, 국청 기관장 등을 지냈으나, 이듬해 2월 시행된 중시(重試) 과거에서 부정을 저질러 파직되고 5일간 하옥되었다. 이후 한성부, 예조, 의정부 등의 관청을 거친 후 개국611년 5월에 당상 품계에 올라 이조참의가 되었다. 11월에 홍문관부제학지제교가 되었는데, 그해 4월에 있었던 종3품 가계(加階) 착오를 인지하지 못하여 이듬해 개국612년 정월에 파직되었다. 호조참의를 잠시 지내고 7월에 창국이등공신(昌國二等功臣)으로 책봉 후 아경(亞卿)의 지위에 오르고, 8월에 해원군(海原君)으로 봉해졌다. 경기도관찰사,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시호도감제조 등을 지낸 후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鄕里)에서 정양하던 중 사망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總裁官)으로 실록 8권 찬술을 주관하고, 여러 관청의 수장을 두루 역임한 공로가 있다. 원만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사후 정2품 자헌대부 예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강릉(江陵)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 제23차 소과, 진사시 박한(朴桓) 등 6인 입격

○ 제23차 소과는 12월 중순에 시행되었다.


창사(昌史) 제32권  

을유년(2005) 1월 기사본말(乙酉年 一月 紀事本末)


◎ 사이트 현황 갱신 중단 조치
◎ 진사 권성유(權性有)의 유사(有司)에 대한 막말 사건


○ 유사(有司)는 어떤 사업에 관련된 일을 맡은 사람이다. 집사(執事). 본조 사이트 관리자(管理者)를 지칭하기도 한다. 《사조백과사전》

○ 갑신년(2004) 12월에 유사로부터 사이트 현황 갱신을 중단한다는 방침이 발표되었다.

● 본래 관직표는 유사에 의해 주기적으로 작성되었으나 이 시점 이후로 현직 관리에 의해 갱신되고 관리되었다. 을유년(2005) 1월에 남원군(南原君)이 관직표 게시판에 올린 관직 현황이 현직 관리에 의해 작성된 첫 번째 관직표이다. ■#

○ 갑신년(2004) 11월에 민간 신문 천의신보(天意新報)로부터 진사 이덕무(李德武)가 유사와 동일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이후 유사에 대하여 존칭(尊稱)을 붙이지 않고 극렬한 비난을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진사 권성유(權性有)도 그런 무리들 중 한 명이었는데, 평소의 언행이 방정(方正)하지 못하여 자신보다 연배(年輩)가 높은 유사를 향해 막말을 퍼부었다. 을유년(2005) 1월 5일에 권성유가 말하기를,
"우리 사조... 관리자[有司] 양반 때문에 말이 아닙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주먹으로..."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유사를 향해 인신공격울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 주위 사람들이 언행의 지나침을 타박하자, 1월 11일에 권성유는 공개 사과를 하였다. ■#


◎ 권지봉상시참봉 권성유의 소장(疏章) 파문
◎ 병조좌랑 손오공(孫悟空)의 설문 조사 파문


○ 지난 1월 26일 예조 봉상시 권지참봉 권성유가 호조 관원들의 무능력을 탓하는 내용의 소장문을 올림으로써 조정은 물론 본조 전체에 파문이 일어났다. 본 소장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권성유 씨가 그동안의 모은 돈으로 초가집 가옥 한 채를 구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음에도 호조 관원들이 이를 발견치 못하고 보류처결을 하게 되어, 이에 격분한 권성유 씨가 전 호조 관원들의 책임을 묻게 되는 내용이다. 《천의신보 제7호》 ■#

○ 호조참판 이완이 권성유의 상소와 관련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와 관련된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권성유가 호조에 문의한 내용은 관리자와 협의할 필요성이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통보를 분명히 했음인데, 당일 호조 관원들의 과실을 지적하고 체모를 무너뜨리며 압존법 위배와 관련된 자가 근신치 아니하고 어전을 어지럽힌 죄 역시 가볍지 아니하다고 한 다음 끝으로 사직을 주청하였으나, 성상(聖上)께서 비답으로 말씀하시길 '해당 절목(節目)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참봉이나, 관련 규례(規例:규정)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한 호조 관리 모두에게 과실이 있다.' 언급하셨고, 별다른 책망(責望)을 하지 않으시면서 본 파문은 매듭을 짓는 듯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비지(批旨)에서 언급한 쌍방의 궐실(闕失)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들의 의견은 실직(實職)이 아닌 권지의 신분인 자가 지관(地官)의 좌랑과 참판의 위신(威信)을 떨어뜨렸는데 어떻게 동급으로 처리할 수 있으며, 호조참판 이완의 차자에서 언급한 대로 압존법 위배와 관련되어 간원(諫院)의 간언을 받은 자가 근신치 아니하고, 일신의 사익(私益)을 챙기기 급급했던 소장문이었는데 호조 관원들과 죄를 같이 물었다는 것은 정당한 이치(理致)가 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천의신보 제7호》 ■# ■#

○ 1월 28일에 병조좌랑 손오공이 함경도 설문투표 게시판에 권성유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르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겠다는 벽서(壁書)를 붙였다. ■#

○ 1월 28일에 유생 정현이 상소를 올려 병조좌랑 손오공이 사사로이 임금의 비답에 대하여 옳고 그름에 관하여 설문 조사를 한 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아뢰니 비답하기를,
"유생의 상소만으론 논죄(論罪) 여부를 결단하기가 어렵다. 상소한 내용과 그간 손오공(孫悟空)의 행적에 관한 의견을 두루 들은 후에 합당한 조처를 내리도록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전교를 내린다. 양사(兩司) 수장과 2품 이상 현직 관리는 소견(所見)을 아뢰도록 한다." 하였다. ■#

○ 상소가 올려온 직후 손오공 씨는 바로 피혐소(避嫌疏)를 올려 자신은 설문조사 내용은 오해이며 자신의 거친 언행의 사용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결코 주상전하에 대한 모독은 없었고 결백하다고 주장하였다. 《천의신보 제7호》 ■#

○ 2월 14일에 임금이 여러 신하의 의견을 수렴하여 병조좌랑 손오공의 처분에 대하여 전교하였다.
"모든 의견을 수렴하였기에 결단하여 전교를 내린다. 현직 관리가 시정(市井)에서 공개적으로 군주의 정사에 관해 시비(是非)를 가리는 표결을 행한 것은 군주의 권위를 훼손하는 부적절한 행위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가 잘못 곡해되어 와전될 경우, 왕권(王權)에 도전하는 불순한 행위로 세인들에게 비쳐 공연한 옥사(獄事)를 초래할 수가 있다. 과인이 아직은 손오공(孫悟空)의 충정을 믿기에, 금번 일은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니 좌랑은 이후로 행신(行身)을 신중히 하라." ■#

● 출사 전부터 본조 여러 사건의 장본인이었던지라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심하였던 권성유 씨가 출사 후 본 파문에 또다시 휘말리면서 일각(一角)에서 권성유 씨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달갑지는 않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연치(年齒)가 어리고, 지난 대과 문과 수석을 차지한 만큼의 문필쌍전(文筆雙全)을 갖추었으니 시간을 두고 그의 활동을 지켜보는 것이 옳음을 알리면서 본 기사를 맺는다. 《천의신보 제7호》

● 일찍이 권성유의 유사를 향한 막말 파문 때, 손오공이 혀를 차면서 말하기를,
"자신의 삼촌뻘 되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 유교(儒敎)와 공자(孔子)를 운운하는데,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을 모르는 것 같다"라고 하며 권성유의 언행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얼마 뒤 권성유가 호조를 비난한 소장 파문을 일으키니, 손오공은 임금의 비답을 두고 사사로이 설문조사를 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권성유를 향한 손오공의 곱지 않은 시선이 작용했음이 유력하다.



◎ 이조참판 정재안의 부고

◑ 정재안(鄭宰安) 1978년생(男) 611.01.17-614.01.06
문신(文臣). 본관 진주(晋州), 본적 전라도(全羅道). 개국611년 4월에 성균관 졸업 직후, 의정부 천거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홍문관정자, 행전라도검률, 예조정랑, 행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실록 찬수에도 공헌한 바가 있어 개국612년 7월에 창국원종이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당상계(堂上階)에 올랐다. 이후 이조참의, 형조참의, 상의원부제조 등을 거쳐 10월에 이조참판이 되었는데, 이듬해 정월에 사망하였다. 재임 중에 죽었으나 규례와 공로를 감안하여 정3품 당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강등되는 것에 그쳤고, 개국617년 7월 28일에 특명으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직첩이 환급되었다. 중시(重試), 대과, 소과 3시에 합격하였으며, 업무 수행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근무일수 포상을 받았다. 전라감영 관속과 고산서당(孤山書堂) 훈장의 소임을 감당하고, 충의민본당(忠義民本黨), 삼국지학회(三國志學會) 등에도 관여한 바가 있다. 지중추 조조(趙造), 참의 서양갑(徐羊甲), 행부교리 박융(朴融) 등과 가까웠다.

○ 1월 6일에 이조참판 정재안이 갑자기 졸하니 호조참판 이완(李浣)이 부고를 아뢰었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민국(民國: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사고가 야기된 경우가 아닌 이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규례(規例:규정)에 따라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다만, 아경공신(亞卿功臣)이라는 신분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에 처분을 잠시 미루고 조문을 시행토록 윤허하겠다. 예조는 규례에 따라 조문하고, 결과를 아뢰도록 한다." 하였다. ■#

○ 홍문관부응교 박상진(朴商鎭)이 정재안의 조문을 위해 빈소에 파견되었고, 10일에 예조참판 이동진(李東珍)이 조문 결과를 아뢰니 비답하기를,
"규례(規例:규정)를 어기고 사망한 전이조참판 정재안(鄭宰安)은 마땅히 관작(官爵)을 삭탈해야 하나, 지위와 사정을 감안하여 당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강등하는 것으로 그친다." 하였다. ■#

● 무자년(2008) 7월 28일에 창국공신 책봉 5주년 기념 전교에 의해 故정재안의 품계가 가선대부로 환급되었다. ■#


◎ 제17차 대과, 문과 권성유(權性有), 무과 박한(朴桓) 등 9인 급제

○ 제17차 대과는 1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창사(昌史) 제33권  

을유년(2005) 2월 기사본말(乙酉年 二月 紀事本末)


◎ 실록청(實錄廳) 복설

○ 1월 28일에 병조참의 서양갑(徐羊甲)이 차자(箚子)를 올려 실록청의 복설을 청하면서 직접 총재관을 맡겠다고 아뢰니 비답하기를,
"익월 초 1일에 실록청(實錄廳)을 복설하고 병조참의 서양갑(徐羊甲)을 겸총재관으로 삼는다. 아울러, 실록청 관원 구성에 관한 사안은 총재관에게 일임한다." 하였다. ■#

○ 2월 11일에 병조참의 겸실록청총재관 서양갑이 계본(啓本)을 올려 실록청 관원의 인선(人選)을 아뢰었다. 추천된 인물은 예조정랑 겸시호도감낭청 성혼(成渾), 훈련원주부 박한(朴桓), 홍문관부수찬지제교 박지하(朴志昰)였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계본을 윤허한다. 다만, 시호도감 낭청을 겸하고 있는 성혼(成渾)은 명부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 장종대왕실록 제1권부터 제7권까지는 승지 모(某)에 의해 운영되던 초창기 승정원에서 단독으로 찬수하였다. 경진년(2000) 8월 15일부터 동년 10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그 후로는 실록청에 의해 찬수되었다. 실록청의 운영은 1기와 2기로 나뉜다. 실록청 1기는 신사년(2001) 11월부터 임오년(2002) 9월까지 실록 편찬에 착수하여 장종대왕실록 제8권부터 제20권까지 총 13권을 찬수하였다. 경진년 11월 1일부터 신사년 3월 10일까지의 기록이다. 실록청 2기는 을유년(2005) 2월부터 동년 8월까지 실록 편찬에 착수하여 장종대왕실록 제21권부터 제29권까지 총 9권을 찬수하였다. 신사년 3월 11일부터 6월 10일까지의 기록이다.



을유년(2005) 3월 기사본말(乙酉年 三月 紀事本末)


◎ 제24차 소과, 훈련원시 손오공(孫悟空) 등 11인 입격


○ 제24차 소과는 2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을유년(2005) 4월 기사본말(乙酉年 四月 紀事本末)


◎ 제25차 소과, 생원시 맹사성(盟思成) 등 4인 입격


○ 제25차 소과는 3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 제18차 대과, 문과 박세채(朴世採), 무과 강감찬(姜邯贊) 등 3인 급제

○ 제18차 대과는 4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을유년(2005) 5월 기사본말(乙酉年 五月 紀事本末)


◎ 대행대왕 행장(大行大王行狀) 정서(淨書) 찬술


○ 1월 20일에 제조 이휘(李輝)가 낭청 장운익과 성혼이 지은 행장 초안을 계(啓)하니 비답하기를,
"도감에서 수고한 바가 참으로 크오. 사업이 모두 마무리된 연후에 경(卿)과 관원들의 노고를 위로하도록 하겠소. 예조참판은 행장을 감수한 후, 정서(淨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시호도감의궤》 ■#

○ 3월 29일에 제조 이휘가 행장에 대하여 다시 계하기를,
"지난 1월 20일, 시호도감에서는 대행대왕의 행장을 찬술하여 어전에 아뢴 바가 있사옵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당시 예조참판 이동진에게 정서하여 다시 아뢰라 명하시었으나, 이동진이 민국 사정으로 업무를 돌보지 못하다가 오늘에 이르렀사옵니다. 이미 초안을 찬술하여 아뢴 것이 두 달 전이었사오니, 더는 나라의 막중 대업을 미루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신이 다시금 행장 초안을 정리하고, 정서하여 별첨으로 아뢰오니, 전하께서는 살펴주시고, 후속 절차에 속히 들어갈 수 있도록 하교를 내려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노고가 참으로 크오. 다만, 원임규장각 제학 이동진의 약조를 믿고 좀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소. 경이 찬술한 행장은 이동진이 선왕(先王)의 행장을 마무리 짓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믿소." 하였다. 《시호도감의궤》 ■#

○ 5월 4일에 동지중추부사 이동진(李東珍)이 대행대왕 행장을 정서하여 계하니, 비답하기를,
"수고한 바는 적지 않으나 정서에 다소 아쉬움이 있다. 동중추(同中樞)보다 학문이 깊지 않은 과인이 동중추의 정서를 고쳐 다시 쓴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니, 동중추의 정서를 선왕의 행장(行狀)으로 우선 확정 짓고 훗날 적임자가 있을 때 다시 고쳐 쓰게 하겠다. 중추부의 당상관은 졸(卒)한 경우, 범죄 사실이 확인된 경우, 양사(兩司)가 탄핵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시호도감에 별도로 전교한다. 도감은 빈청에 선대왕들의 시호, 묘호, 능호, 대행대왕 행장, 시호법, 시호를 정하는 방법 등을 배치하고 빈청을 열어 조야(朝野)와 함께 선왕의 시호, 묘호, 능호 등을 신중히 의논한 후 각각 삼망토록 하라. 논의 참여자의 명단도 계한다." 하였다. ■#


◎ 교육기관개설절목(敎育機關開設節目) 개정

○ 전 예조 이동진 정랑 재직 시절부터 꾸준히 논의된 교육기관개설절목 개정안은,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그간 본조의 교육 진흥책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이번 개정안을 통해 나태 교육기관에 철퇴를 가하여 교육기관의 내실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부칙으로 예조의 교육기관 파악과 심사를 두고, 강의가 일정 간 이상 중단되거나 장기간 훈장이 부재한 교육기관에 한차례 계고조치 후 예조가 직권으로 폐쇄하거나 해당 지방관에게 폐쇄 조치를 권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전국 10개 민립서당 중 강의 중단으로 파악된 8개 민립서당에 대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생각되어 교육기관의 숫자가 급감할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은 이달 15일 계본이 주달(奏達)되었고 20일에 상께서 가납하심에 따라 26일부터 규례(規例)에 따라 개정 절차가 진행된다. 《천의신보 제8호》 ■#


◎ 제26차 소과 시행

○ 지난 26차 소과에서 과거 시행 공고가 개시일인 5월 18일을 넘겨 20일에야 공지되는 등 과거 행정에 파행(跛行)을 불러와 결국 소과 마감일을 25일로 연장하는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관보 제43호》

○ 제26차 소과는 5월 하순에 시행되었는데, 생진원시(生進院試)에 단 한 명의 응시자도 없었다.


창사(昌史) 제34권  目錄

을유년(2005) 6월 기사본말(乙酉年 六月 紀事本末)


◎ 제12차 별시, 문과 맹사성(盟思成) 1인 급제


○ 개국614년(2005년) 6월 20일부터 동월 26일까지 7일간 제12차 별시가 시행되어 문과(文科)에서 유생(儒生) 맹사성(盟思成) 1인의 급제자를 배출하는 것으로 그 일정을 모두 종료하였다. 이번 별시는 지난 5월에 시행되었던 제26차 소과(小科)에서 생진원시를 통틀어 단 1인의 입격자도 배출하지 못한 초유(初有)의 사태를 맞이해 전하의 어명(御命)으로 특별 시행된 과거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유효 응시자가 문과에서 5인, 무과에서 단 1인에 그치는 등, 문무 양과(兩科)를 합쳐 급제자 1인을 배출하는 초라한 결과만을 낳았다. 앞으로 시제 난이도 조정, 과거 시행의 적극적 홍보 등의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관보 제43호》



을유년(2005) 7월 기사본말(乙酉年 七月 紀事本末)


◎ 대행대왕(大行大王) 시호, 묘호, 능호 논의


○ 5월 9일부터 7월 31일까지 빈청에서 대행대왕의 시호, 묘호, 능호를 정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두 달에 걸친 논의에 참여자가 10명에 불과했다.

○ 현재 빈청에서는 시호도감의 주관으로 대행대왕전하의 시호와 능호, 묘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5월 4일에 당시 동지중추부사 이동진(李東珍)이 대행대왕전하의 행장을 정서(正書)하여 어전에 아뢰자, 이를 윤허하시며 내리신 전교에 따라 시작된 대행대왕전하의 시호등 논의가 2개월여 동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호도감에서 3차에 걸쳐 논의 참여를 독려하는 공문을 발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논의에 참여한 백성이 9인에 불과하고, 그나마 6월 23일이후로는 참여하는 자가 없어 뜻있는 선비들이 개탄하고 있는 실정이니, 내외의 적극적 참여가 촉구되고 있다. 《관보 제43호》

○ 8월 14일에 제조 이휘가 빈청 논의 결과를 계하기를,
"전하의 하교를 받잡고 지난 5월 9일 빈청에서 대행대왕 시호에 대한 논의를 개시하여 7월 말일부로 그 논의를 마친 바 있사옵니다. 참여한 관리나 백성은 10인이옵니다. 도감에서 세 차례에 걸쳐 논의를 독려하는 공문을 발송한 바 있으나, 참여가 극히 미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후 도감의 업무를 어찌해야 할지 여쭈옵니다. 빈청 논의를 또다시 한다고 하더라도 그 참여도가 극히 미미할 것으로 예상되니, 계속 업무를 진행하여 결과를 아뢸 것인지, 아니면 당분간 업무를 중단할 것인지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하였으나, 유사(有司)의 변(變)으로 철조(輟朝)가 단행되면서 비답이 내려지지 않았고 도감이 폐청되었다. 《시호도감의궤》 ■#


◎ 가수 김상혁(金相赫) 음주운전 사건

○ 7월 11일에 형조의 판결에 따라 음주운전을 한 가수 김상혁을 형옥 30일에 처하였다.

● 민국(民國)의 연예인에 대한 주요 처벌 사례는 다음과 같다. "실세계상의 인물이나 단체, 기관인 경우에는 본명 또는 단체명, 법인명을 그대로 기재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따라 작성된 재판기록이다.

하옥일 방면일 죄인 죄목 주관관청
609.11.30 609.12.30 안칠헌 연예인. 음주운전 및 접촉사고 한성부
611.01.06 611.02.05 이미언 연예인. 음주운전 한성부
611.01.27 611.05.27 황슈정 연예인. 필로폰 투약 형조
611.01.27 611.06.27 박제상 연예인. 대마초 흡연 형조
612.01.13 612.03.13 주벙진 연예인. 상습 및 해외 원정 도박 형조
612.04.11 612.05.11 이재롱 연예인. 음주운전 및 접촉사고 전라감영
613.02.03 613.03.03 노헌정 연예인. 음주운전 형조
613.05.17 613.06.17 이승언 영화 배우. 강제 동원되었던 종군위안부 영상 촬영 형조
613.09.19 613.10.19 류숭범, 송진야 연예인. 음주운전 한성부
613.10.17 614.03.17 송승북, 한제석,
장헉
연예인. 병역기피 형조
614.07.11 614.08.11 김상헉 연예인. 차량 사고 도주 형조
         



을유년(2005) 8월 기사본말(乙酉年 八月 紀事本末)


◎ 제19차 대과, 문과 권율(權律) 1인 급제

○ 제19차 대과는 7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 창국 5주년 기념 포상

○ 8월 14일에 전교하였다.
"나라에 기쁜 일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특별한 조처가 있어야 하므로, 창국(昌國) 5주년을 기념하여 은전을 베풀고자 한다.
一. 생존한 창국공신(昌國功臣)들에게는 훈급에 관계없이 본적지에 토지 3결(結)을 내린다.
一. 생존한 창국원종공신(昌國原從功臣)들에게는 훈급에 관계없이 본적지에 토지 2결을 내린다.
一. 공신(功臣)이 아닌 자로 품계가 있는 백성에게는 본적지에 가옥을 내린다. 당상관은 5칸(間), 참상관은 4칸, 참하관은 3칸으로 한다.
一. 공신이 아닌 자로 품계가 없는 백성에게는 금전 60냥(兩)을 내린다. 다만, 이달 31일까지 본적지 감영을 통해 호조로 '특별상금지급요청'을 신청하는 자로 제한을 둔다.
一. 품계가 있는 종3품 이하 백성 가운에 평정으로 승품된 경력이 있는 자는 한 자급을 더한다.
一. 남은 하옥 기간이 1년 이하인 자는 집행을 유예하여 조기 방면하고, 1년 이상인 자는 역시 집행을 유예하여 하옥 기간을 절반으로 낮춘다. 단, 완전한 사면이나 복권을 명(命)하는 것은 아니다." ■#

● 그러나 이 전교가 내린 다음 날 유사의 변(有司之變)에 의해 철조(輟朝)가 단행된다.


◎ 철조(輟朝), 유사의 변(有司之變)


○ 유사지변(有司之變)은 개국614(2005)년 8월 16일 00시를 기해 전격 단행된 사이트 활동 제한 및 중단 조치를 의미한다. 즉, 관리자 개입에 의한 한시적 철조(輟朝)이다. 개국615(2006)년 10월 16일에 조정(朝廷) 기능이 재개되면서 종결되었다. 《사조백과사전》

● 8월 14일에 창국 5주년을 기념하는 포상 전교가 내려졌고, 창국 5주년 당일인 8월 15일에 차례로 사간원사간 박상진(朴商鎭), 예조정랑 장운익(張雲翼), 좌승지 이동진(李東珍), 전옥서주부 공주희(孔珠熙), 호조좌랑 권율(權律), 병조참의 서양갑(徐羊甲), 이조참판 양지원,(梁志元), 시호도감제조 이휘(李輝)가 조하(朝賀)를 올렸다. 이들 중 당일 자정에 유사의 개입에 의해 철조가 단행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8월 15일 해시(亥時)에 유사[管理者]가 '사이트 운영 중단 안내문'을 공고하였다. 유사의 개입에 의해 지역과 모임 게시판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시판이 강제 폐쇄당하게 되었다. ■#

○ 8월 18일 술시(戌時)에 남원군 양지원이 지역 게시판에 경관청 임시 청사 설치를 제안했지만, ■# 이에 대응하여 그날 해시에 유사[管理者]가 '사이트 운영 중단과 관련한 후속 조치'를 발표하였다. 유사는 지역 게시판의 관청 공간화, 직함 사용을 감행하여 게시판의 제목 양식과 용도를 준수하지 않는다면 추후 게시판 개방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선포하였다. ■#

○ 이듬해인 병술년(2006) 1월 2일에 유사[管理者]가 '사이트 운영 중단 최종 안내'를 공고하였다. 이 공고문에 의해 사이버 조선왕조 사이트의 항구적(恒久的)인 운영 중단이 선포되었다. ■#

○ 병술년(2006) 10월 16일에 조정 선유교서(朝廷宣諭敎書)가 반포되어 조정 기능이 재개되었다. 이때 임금이 이르기를,
"당시에 조정을 중지한 것은 개국(開國) 이래 처음 있던 일이었으니, 그 안팎의 사정을 신하들이 나서서 말하기가 지극히 어렵고, 말한다 하여도 과인이 차마 들을 수 없으며, 설령 듣는다 하여도 달리 처분할 수 없는 문제이다. 즉, '금령(禁令)'에 해당하니, 이를 언급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승정원에서는 이와 관련한 내용의 봉입(捧入)을 엄격하게 하라." 하였다. ■#

● 유사의 변은 임금의 명령이 아니라 유사의 개입에 의해 단행된 강제 철조 사태였다. 유사의 변은 역사가(歷史家)가 정리하기 힘든 성격의 사건이다. 사실(史實)로서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어떤 시점부터 유사는 사이트 자체의 구조적인 한계점에 불만을 가지지 시작했다는 것,
어떤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유사로 하여금 사이트 운영 의지를 상실하게 하였다는 것,
어떤 무리와 유사의 관계는 물과 기름처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시점, 어떤 사건, 어떤 무리'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가 없다. 역사가는 추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실(史實)만을 정리할 뿐이다.

● 유사의 변으로 철조가 단행된 을유년(2005) 8월 16일부터 병술년(2006) 10월 16일까지 유사가 언급한 사이트 자체의 구조적인 한계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진행되지 않았다. 로그인 제도 도입으로 사이트 자체의 편리성이 높아졌을 뿐이다. 철조 기간에 이루어진 사업 중 가치 있었던 일을 꼽는다면 대행대왕실록(大行大王實錄) 제1책(第一冊) 인행(印行) 한 것이다. 그러나 7개월에 불과한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기존에 쓰인 실록을 교정(校正)하고 주석(註釋)을 단 것에 불과하여 국가의 정사(正史)라기보다는 기념품에 가까운 것이었다. ■#

● 병술년(2006) 10월 16일의 조정 선유교서(朝廷宣諭敎書)는 본조 재창국(再昌國)의 선언이었으며, 장종(章宗)의 경진년(2000) 8월 15일 고묘(告廟)에 버금가는 본조의 기념비적인 전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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