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20일 (수) 17:14  [유시(酉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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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5책
창사(昌史) 제21권  目錄

계미년(2003) 6월 기사본말(癸未年 六月 紀事本末)


◎ 제10차 대과, 문과 박융(朴融), 무과 이의방(李義方) 등 10인 급제

○ 개국612년에 두 번째로 실시된 대과(大科) 과거에서 총 10인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문과에서 6인, 무과에서 1인의 초입사(初入仕:관직에 처음 오름)자가 있었다. 문과에는 현직 관리 3인을 비롯해 10인이 응시하여 9인이 급제하였으며, 무과에는 장재 1인이 단독 응시하여 급제하여 전체적으로 9할이 넘는 급제율을 보였다. 전체 최우수 급제자는 평점 7.25를 받은 행홍문관박사 박융(朴融)이었다. 지난 대과들과 비교해 볼 때 전현직 관리의 급제가 줄어들고 초입사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증가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분석되고 있다. 《관보 제32호》


◎ 공신 훈호(勳號) 확정

○ 6월 24일에 공신 훈호(勳號)를 '수충승지광운준책창국공신(守忠承志廣運俊策昌國功臣)'으로 정한 후, 이등공신과 삼등공신은 여기에서 각 두 글자를 감(減)하였다. 《장종대왕문서》

○ 녹훈도감에서 공신 훈호(勳號)를 삼망(三望)하여 어전에 아뢰었다. 공신 훈호를 수충승지건기좌정창국공신(守忠承志建基佐政昌國功臣), 승종현충준책태민창국공신(承宗炫忠俊策泰民昌國功臣), 건사소명광운천성창국공신(建事昭明廣運天成昌國功臣)으로 아뢰니, 상께서 계본을 살펴보시고 삼망된 훈호 중에서 일부씩 취하여 1등을 수충승지광운준책창국공신(守忠承志廣運俊策昌國功臣), 2등을 수충승지광운창국공신, 3등을 수충승지창국공신으로 하교하시었다. 《녹훈도감의궤》



계미년(2003) 7월 기사본말(癸未年 七月 紀事本末)


◎ 제13차 소과, 진사시 조병옥(趙炳玉) 등 8인 입격

○ 제13차 소과는 6월 23일부터 6월 29일까지 만 7일간 시행되었다.


◎ 삼대추증제도 시행

○ 종2품 이상 관리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에 대한 추증(追贈:죽은 후에 관직을 줌)이 7월 24일 자 어명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다. 의정부우참찬 이휘(李輝)와 이조참판 조조(趙造)가 그 주인공으로, 각각의 조상 3대에 참판, 이조참의, 정부인, 숙부인 등의 품계와 관직이 추증되었다. 《관보 제33호》


◎ 민원 및 행정처리 기한 책정

○ 7월 27일에 이조참판 조조가 민원 및 행정처리 기한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자 비답하시기를, "책임자가 전결(專決)하거나 곧바로 다른 관청에 이첩하는 일은 5일을 기한으로 하고, 관청에서 논의를 거쳐 이첩하거나 시행하는 일은 10일을 기한으로 한다. 양사의 서경(署經)을 거친다든가, 이름을 고친다든가 하는 사무는 대체로 5일을 기한으로 그 전까지 이문(移文)하고 계(啓)하면 될 것이다. 이 경우, 회신 공문이 있거나 전교가 있고 난 뒤에 다시 5일간의 기한을 둔다." 하셨다. 각 관청에서 민원과 행정을 처결하는 업무가 지나치게 지체되지 않도록 내리신 전교이셨다. 《장종대왕문서》

○ 개국612년 07월 30일 자 전교(어전)
<전교> '책임자가 전결(專決)하거나 곧바로 다른 관청에 이첩하는 일은 5일을 기한(해당 사안에 대한 처리 기한)으로 하고, 관청에서 논의를 거쳐 이첩하거나 시행하는 일은 10일을 기한으로 한다. 양사의 서경을 거친다든가, 이름을 고친다든가 하는 사무는 대체로 5일을 기한으로 그 전까지 이문(移文:다른 관청에 공분을 보냄)하고 계(啓:보고)하면 될 것이다. 이 경우, 회신 공문이 있거나 전교가 있은 후에 다시 5일간의 기한을 둔다.' 《수교등록 권1》


◎ 창국공신(昌國功臣) 책봉(冊封)

○ 7월 28일에 우참찬 이휘(李輝), 前참의 이완(李浣), 참판 조조(趙造), 前참의 최영(崔瑩), 故지평 유치의(柳治義), 故정랑 노사신(盧思愼), 前직제학 양지원(梁志元), 前서윤 이방원(李芳遠), 故정랑 신용호(辛庸浩), 故서윤 강다소(姜多笑), 故전적 허준(許浚) 등을 정공신으로, 前직강 김병호(金炳昊), 故정랑 조성민(曺成旼), 故기주관 박수현(朴秀泫), 故부교리 조동선(趙東瑄), 前정랑 이동진(李東珍), 行정랑 정재안(鄭宰安), 前감찰 이백(李伯), 故정랑 강자아(姜子牙), 故사성 박심문(朴審問), 故좌랑 백우현(白宇鉉), 故별제 김도민(金道民), 故명률 안향(安珦), 급제 김서울(金庶蔚), 박혁거세(朴赫居世), 안정복(安鼎福) 등을 원종공신으로 책봉하셨다. 이날의 공신 책록(冊錄)은 만백성의 경사와 다름없었다. 책봉 별교서(別敎書)에 이르시기를, "조종조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된 것은 그동안 맡은 바 위치에서 직임을 다한 신하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평온한 치세(治世)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과인이 3년 전에 종묘에 나아가 맹세한 바를 일부나마 지킬 수 있는 된 것을 누구의 공이라 하겠는가." 하시고, "공을 가려 녹훈함에 정공신과 원종공신의 구분이 있고, 또 그에 따른 등급과 특전(特典)에 서로 차등이 있으나, 과인이 조정 신하들의 국궁진력(鞠躬盡力)한 노고를 잊지 않는 마음에는 따로 경중(輕重)을 두고 있지 않으니, 이를 잘 알도록 하라." 하셨으니, 공신 책봉에 임하시는 왕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고굉지신(股肱之臣)에 대한 배려와 그 결실이 맺어진 것인지라 여러 공신의 이름이 청사(靑史)에 남게 되었으니, 나라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장종대왕문서》

○ 공신도감에서 창국공신의 개별교서(個別敎書)와 공신녹권(功臣錄券)을 초안(草案)하여 어람(御覽)을 청하니 상께서 살펴보시고 이를 가납(嘉納)하시었다. 《녹훈도감의궤》

○ 상께서 친히 창국공신 책봉 별교서를 전교하시어 공신을 책봉하시니 이로써 공신녹훈과 관련한 논의가 모두 끝을 맺었다. 《녹훈도감의궤》

○ 지난 7월 28일에 내려진 어제(御製) 별교서(別敎書)에 따라 본조(本朝:조선왕조)를 다시 일으킨 창국(昌國:나라의 번창)의 공로를 치하하는 '창국공신' 책봉이 이루어졌다. 1등공신에 의정부우참찬 이휘, 등 2인, 2등공신에 이조참판 조조 등 4인, 3등공신에 전홍문관직제학지제교 양지원 등 5인이, 원종1등공신에 전성균관직강 김병호 등 4인, 형조참의 겸승문원부제조 이동진 등 9인이 책봉되었다. 책봉 교서와 녹권(錄券:명부)가 지급되었으며, 등급에 따라 차등있게 품계 승진등의 조처가 내려졌다. 이미 사망한 공신들에게는 시호, 추증(追贈), 추봉(追封) 등의 후속 조치가 녹훈도감을 통해 있을 예정이다. 《관보 제33호》

창국공신(昌國功臣) 책봉 명단

정공신 1등 이휘(李輝), 이완(李浣)
2등 조조(趙造), 최영(崔瑩), 유치의(柳治義), 노사신(盧思愼)
3등 양지원(梁志元), 이방원(李芳遠), 신용호(辛庸浩), 강다소(姜多笑),
허준(許浚)
원종공신 1등 김병호(金炳昊), 조성민(曺成旼), 박수현(朴秀泫), 조동선(趙東瑄)
2등 이동진(李東珍), 정재안(鄭宰安), 이백(李伯), 강자아(姜子牙),
박심문(朴審問), 백우현(白宇鉉), 김도민(金道民), 안향(安珦),
김서울(金庶蔚), 박혁거세(朴赫居世), 안정복(安鼎福)



창사(昌史) 제22권  

계미년(2003) 8월 기사본말(癸未年 八月 紀事本末)


◎ 제11차 대과, 문과 천입성(天立星) 등 2인 급제


○ 제11차 대과는 7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 창국공신 회맹(會盟)
◎ 한성부 중부(中部)에 창국공신책봉기념비(昌國功臣冊封記念碑) 건립
◎ 창국공신 추증 및 봉군(封君)


○ 회맹(會盟)은 제후(諸侯)들이 회합하여 맹약하는 것 또는 그 의식이다. 공신(功臣)들이 모여 충성을 맹세하는 것도 회맹이라고 한다. 《사조백과사전》

○ 18일에는 공신 회맹(會盟)을 거행하였으며, 한성부에 창국공신책봉기념비(昌國功臣冊封記念碑)를 세우셨다.
《장종대왕문서》

○ 8월 22일, 졸(卒)한 정공신 사헌부지평 유치의(柳治義) 등 4인이 각각 자헌대부로 추증(追贈)되고, 읍호에 따라 추봉(追封)되었으며, 졸한 원종공신 공조정랑 조성민(曺成旼) 등 7인은 한 자급씩 올려 추증되었다. 생존한 2품 이상 공신 이휘(李輝) 등 3인은 봉군(封君)되었다. 《녹훈도감의궤》


◎ 제10차 별시, 문과 신대치(申大治), 무과 김현유(金賢柳) 등 4인 급제

○ 창국 공신 책봉을 기념하여 8월 하순에 제10차 별시가 시행되었다.



계미년(2003) 9월 기사본말(癸未年 九月 紀事本末)


◎ 최익현(崔益鉉), 정헌대부 예조판서 증직(贈職), 충경(忠敬) 추시


○ 개국612년 9월에는 꿋꿋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다 하여 순절(殉節)한 유현(儒賢) 최익현(崔益鉉:1833-1906)에게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충경(忠敬)이라 하셨다. 시호법에서 자기 몸이 위태로움에도 임금을 받들었음[危身奉上]을 충(忠)이라 하고 의(義)를 지켜 굽히지 아니함[守義不屈]을 경(敬)이라 하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이처럼 충절(忠節)을 높이 추존(追尊)하는 것은 그들의 충의와 절개를 위안(慰安)하여 길이 현창(顯彰)하는 것이니, 모두가 불의(不義)를 멀리하고 정의(正義)를 가깝게 하여 대의(大義)를 보다 바르게 하고자 하셨던, 왕의 지극하고 결의에 찬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장종대왕문서》

○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에 대한 추증과 추시가 지난 9월 24일에 이루어졌다. 관직은 논의 끝에 정2품 정헌대부 예조판서로, 시호는 '충경(忠敬)'으로 추시되었는데, 이는 선생께서 생전에 예의에 정밀하였고, 시법(諡法)에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정의를 지켜 굴복하지 않는 것을 '경(敬)'이라 정의한 때문이다. 선생의 행적은 예조에서 간행해 충의공 윤봉길(尹奉吉:1908-1932) 선생의 행장과 함께 편찬한 충경공 행장록에 잘 나타나 있다. 《관보 제34호》


◎ 경기도 금천현에 역무원 김행균(金幸均) 선행 칭송비 건립
◎ 전라도 순천도호부에 학생 심규화 정문 건립

○ 9월 12일에 역무원 김행균의 칭송비와 학생 심규화의 정문 건립을 윤허하였다.

■ 개국612년 7월 25일, 서울발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의 영등포역 정차시 선로 상에서 위험에 처한 10세가량의 어린이를 구하고 중상을 입은 역무원 김행균(42) 씨의 선행을 칭송함. 《김행균 선행 칭송비》

■ 개국612년 7월 24일, 경남 하동군 섬진강에서 물에 빠진 9살의 아동을 구조한 후 기력이 다해 의사(義死)한 순천제일대학 학생. 향년 20세. 《심규화 정문》



계미년(2003) 10월 기사본말(癸未年 十月 紀事本末)


◎ 제14차 소과, 생원시 김지수(金志洙) 등 6인 입격

○ 9월 하순에 제14차 소과가 시행되었다.


◎ 창국공신 증시(贈諡)

○ 10월 초6일에 전교하여 초9일에 증형판(贈刑判) 유치의를 경헌(敬憲), 증호판 노사신를 혜정(惠靖), 증병판 신용호를 경성(景成), 증판윤 강다소를 장익(莊翼), 증예판 허준을 정헌(定獻)으로 증시(贈諡)하셨으니, 이는 창국공신으로서 정2품으로 증직된 신하들이기 때문이다. 《장종대왕문서》

○ 창국공신(昌國功臣)에 대한 봉군(封君:군으로 책봉함)과 추증(追贈:죽은 후에 관직을 올림), 추시(追諡:시호를 내려줌)가 8월 22일과 10월 9일에 이루어졌다. 공신 책봉 전에 사망한 정공신 5인이 정2품 관직으로 추증되고 군호와 시호를 받았으며, 생존한 정공신 6인은 각 등위에 맞게 품계가 더해지고 봉군되었다. 원종공신 15인에 대해서도 추증과 품계 가계가 적용되었는데, 이번 책봉으로 당상관 3인이 새로 정해졌다. 그 자세한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관보 제034호》

창국공신 정공신 봉군 및 추증, 추시 현황 (개국616년 1월 1일 현재)

등위 이름 시호 추증 또는 최종 관직 군호
1등 이휘(李輝)
이완(李浣)
생존
생존
생존
생존
하빈군(河濱君)
덕수군(德水君)
2등 조조(趙造)
최영(崔瑩)
유치의(柳治義)
노사신(盧思愼)
공정(恭定)
정안(定安)
경헌(敬憲)
혜정(惠靖)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최종)
자헌대부 예조판서 (추증)
자헌대부 형조판서 (추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추증)
한양군(漢陽君)
해원군(海原君)
영광군(靈光君)
교하군(交河君)
3등 양지원(梁志元)
이방원(李芳遠)
신용호(辛庸浩)
강다소(姜多笑)
허준(許浚)
생존
익평(翼平)
경성(景成)
장익(莊翼)
정헌(定獻)
생존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추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추증)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추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추증)
남원군(南原君)
전원군(全原君)
영산군(靈山君)
경원군(慶原君)
양천군(陽川君)


◎ 전서윤 이방원(李芳遠) 병사

○ 10월 27일에 전서윤 이방원이 병사하였다.

◑ 이방원(李芳遠) 1972년생(男) 609.10.05-612.10.27
문신(文臣). 호 사암(俟菴), 시호 익평(翼平), 본관 전주(全州), 본적 전라도(全羅道). 개국609년 10월에 제3차 대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선공감부봉사, 행함경도검률, 홍문관정자, 행전라 및 행경기도검률, 형조정랑, 수사간원정언, 행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공조와 형조에 일시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삼사(三司)와 외관직에 주로 있었으므로 조정 일에 두루 능통하지 못했다. 사헌부에 재직하던 중 의정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평소 행실이 참작되어 파직을 면했다. 개국612년 4월부터 7월까지 행한성부서윤으로 근무했으며, 동월 28일에 창국삼등공신(昌國三等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이해 10월에 지병(持病)으로 사망했는데, 공무(公務) 이외에 친근한 사람이 많지 않아 빈소(殯所)가 적적했다. 품계는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이르렀다. 사후 전원군(全原君)에 추봉되고 정2품 자헌대부 한성부판윤으로 추증되었다. 《인물약전》


◎ 제12차 대과, 문과 한백겸(韓百謙) 등 3인 급제

10월 23일부터 동월 28일까지 만6일간 시행된 제12차 대과 과거의 급제자 발표가 11월 5일에 있었다. 응시율이 매우 저조하여 무과 응시자가 없이 단 3인만이 문과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전현직 관리들인 관계로 초입 출사자는 없었다. 《관보 제034호》


창사(昌史) 제23권  

계미년(2003) 11월 기사본말(癸未年 十一月 紀事本末)


◎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시행


○ 18일에 육조직계제 시행에 대하여 전교하였다.
"서사제를 유지할 필요성이 사라진 조정 현실, 이를테면 제신(諸臣:여러 신하)들이 말한 것과 같은, 의정부 수장으로 마땅한 자가 없다든가, 그간 의정부의 역할에 한계가 적지 않았다든가, 서사제가 시행될 당시의 상황과 다르다든가 하는 점 등을 받아들여, 조정 공론에 따라 의정부서사제를 폐(廢:폐지)하고 조정 체계를 육조직계제로 환원한다.
직계제를 시행한다고 하여 의정부를 닫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지금 마땅한 후임관을 정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므로 당분간 의정부를 폐(閉:닫음)한다. 우참찬의 사직을 윤허하고 지중추를 제수하며, 녹훈도감 정사직은 신임 예조참의 이동진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한다. 차후 구성되는 의정부는 조정 공론을 결집하는 자문기관 내지는 특정 사무를 총괄하는 사업 기관화 하도록 하겠다.
의정부가 담당하던 사무 가운데 포상 및 징계는 삼사(三司: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합계의 의거할 것이며, 겸임 지방관 임면은 이조 또는 병조에서, 호조 공석시 해당 업무는 이조에서, 공조 공석시 해당 업무는 예조에서 수행하게 한다. 군주의 7일 이상 장기 부재시 임무는 의정부 또는 중추부의 선임자가 대행하되, 양 관청에 시임(時任:현임)이 없다면 4품 이상 원임(原任:전임)들이 합의하여 그 가운데 1인을 추천, 그로 하여금 직무를 대행하게 한다. 원임을 쓴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크게 심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조정에서 한 번 결단하여 시행하는 정책에는 일관성과 지속성, 계속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모두 '믿고 의지하는 것'과 연관된 말이다. 의정부서사제 도입이 다시 제기되는 일이 없도록 조정 관원 모두가 노력할 것이다." 하였다. ■#

○ 11월 12일부터 조정의 공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한 후, 동월 18일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여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 육조(六曹) 각 관청에서 소관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육조직계제로 환원하셨다. 이는 왕께서 정사를 손수 챙기실 것을 내외에 천명하신 결단이요, 서사제도 직계제도 아닌 당시의 정치제도에 대한 개혁의 한 부분이었다. 《장종대왕문서》


◎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한양군 조조(趙造) 졸(卒)

◑ 조조(趙造) 1972년생(男) 610.09.27-612.11.23
문신(文臣). 자 정직(貞直), 호 백룡(白龍), 시호 공정(恭定), 본관 한양(漢陽), 본적 한성부(韓城府). 개국610년 11월 대과 문과에 을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저작, 삼도암행어사, 문신겸선전관 등을 지냈다. 개국611년 정월에 규수 이랑(李朗)과 혼인 후, 사헌부, 의정부, 홍문관, 예조, 한성부, 형조 등의 관직을 거쳐 개국612년 2월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해 7월 28일에 창국이등공신(昌國二等功臣)에 책훈되고 8월에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졌다. 봉군(封君)과 함께 의정부우참찬이 제수되고 녹훈도감정사를 겸하였는데, 11월에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시행되자 신병 치료를 위해 일선에서 물러나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병세(病勢)가 급격히 악화되어 동월 23일에 졸(卒)하자, 조회(朝會)를 2일간 중지하고 녹훈(錄勳) 관련 공로에 의거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하였다. 네 차례 과거에 급제하고 다섯 인재를 천거하였으며, 장기간 이조 수장으로 근속한 공로가 적지 않았다. 또 혜종(惠宗) 및 혜장왕후(惠章王后) 추숭, 충경공(忠毅公) 증직, 을사오적신죄책비(乙巳五賦臣罪責碑) 건립 등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백룡대(白龍臺), 신조선재단(新朝鮮財團), 충의민본당(忠義民本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지역 활성화에 이바지하였다. 읍내서당 훈장 활동으로도 칭송이 있었다. 개국617년 10월 28일에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으로 증직되고, 이듬해 2월 14일에 장종(章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어제(御製)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인물약전》

○ 11월 23일에 예조참의 이동진이 한양군 조조의 부고를 고하니 비답하기를,
"26일과 27일 양일간 상소를 제외한 조정 사무를 폐(閉:닫음)한다. 조문하는 것은 예조에서 알아서 시행하도록 하라. 추증은 품계와 관직이 이미 정2품이니 해당이 없고, 시호를 정하는 것은 전서윤 이방원의 경우에 준해 집행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

○ 동월 23일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한양군(漢陽君) 조조가 졸(卒)하자 2일간 철조하시어 중신(重臣)을 예우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이보다 앞서 10월 27일에 前서윤 이방원이 명을 달리하였는데, 공신이기 때문에 이조에서 증직과 증시를 계청하였다. 왕께서 11월 12일에 전교하시기를, "시호를 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행장(行狀)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시고 동월 17일에 "사망자의 행장은 일가(一家), 동문(同門), 문인(門人) 등이 지어 예조에 제출토록 한다. 생전 행실에 덕(德)이 있다면 다소 시일이 지체될 수는 있겠으나 끝내 행장을 찬술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호 논의는 행장이 있는 이후에 비로소 진행한다." 하셨으므로, 망자(亡者)의 행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볍게 시호를 논의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에 예조참판 이동진이 한양군의 행장을 찬술하자, 곧 시호 논의를 허락하시어 개국613년 정월 초3일에 시호를 확정하였다. 이때 이조참의 정재안이 계본을 올려 시호를 삼망(三望)하면서 수망(首望)으로 문헌(文獻)을 올리자 비답하시기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추증이나 추시(追諡)를 제외하고는 문(文)이나 무(武), 충(忠), 정(正) 등의 시호를 받을 인물은 없다." 하시고, "진실로 '박학호문(博學好文)의 문(文)'이라 한다면, 지식이 산(山)과 같고 학문이 정밀하면서도 또한 광대해야 할 것인데, 실제 한양군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본조에서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다고 말하는 것과 조종조 이래 시호를 정할 때 어떤 인물의 문장과 학문이 그렇다고 하는 것에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무(武), 충(忠), 정(正) 등의 글자 또한 같다." 하시면서 한양군의 시호를 공정(恭定)으로 결정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왕세제(王世弟) 책봉교서(冊封敎書) 반포 ■#

○ 11월 29일에 왕세제 책봉교서를 내렸다.
"금일, 세제를 책봉하여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한다. 예조에서는 세자시강원의 규모에 맞춰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을 구성하여 세제를 이끌도록 하라. 나라의 존망이 함께하는 사안이므로 교육에 내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병조에서는 세자익위사의 전례에 근거해 세제익위사(世弟翊衛司)를 설치하여 세제를 호종토록 하라. 이들 관직은 실직 또는 겸직으로 사령하되, 시강원은 학식과 덕행이 출중한 3인, 익위사는 경력과 근면을 갖춘 2인으로 한정한다. 승정원 청사를 동궁 처소로 하여, 그곳에서 시강원을 통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라. 익위사는 세제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하였다.

○ 드디어 왕께서 개국612년 11월 25일에 그동안 잠저(潛邸)에 거(居)하시던 왕제(王弟) 모(某)를 왕세제(王世第)로 삼으셨다. 책봉 교서를 내려 조정 문무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평소 덕이 없고 품성과 행실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체력과 정신 또한 예전과 같지 않아 더욱 쇠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조정의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마땅히 후사를 세워 종사를 굳건하게 해야 할 때이다. 만일 불행한 사태가 가까이에서 촉발된다면 무엇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 "종묘사직이 단절되느냐, 이어지느냐가 하는 문제가 곧 세제 책봉이 성사되느냐 하는 여부와 직결되어 있으니, 세제는 물론이고 만조백관(滿朝百官) 모두가 만류하는 글을 올려 세제 책봉이 조금도 늦어지게 하지 말라." 하시며, 동궁(東宮) 책봉을 신속하게 단행하시고 그 조치를 번복하실 의사가 없음을 분명하게 하셨다. 대통(大通)을 명확히 함으로써 후세에 영원토록 종사를 보존하고자 내리신, 왕의 나라를 위한 결단이셨다. 《장종대왕문서》


◎ 창국녹훈도감의궤(昌國錄勳都監儀軌) 간행 ■#
◎ 녹훈도감 폐청


○ 24일에 녹훈도감 정사 이동진(李東珍)이 어람(御覽)할 녹훈도감의궤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의궤 내용에 미진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책으로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감하여 보완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하빈군은 품계가 정헌이니 가자할 수 없지만, 한양군과 해원군은 그렇지 않으므로 한양군은 소급하여 사망한 날에 정헌으로 가자한 것으로 하고 해원군은 가정으로 가자한다. 하빈군은 근무일수 50일, 덕수군과 예조참의, 병조정랑 등은 근무일수 30일을 더하여 포상의 근거로 남긴다. 도감은 오는 30일에 폐(閉:닫음)한다." 하였다.

○ 공신의 책봉이 완료됨에 따라 성상께서 도감에 명하시어 그간의 논공(論功) 과정과 녹훈의 절차를 의궤(儀軌)로 편찬(編纂)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셨는데, 이는 훗날에 있을 녹훈에서 참고할 의절(儀節)로 삼고자 하심에서였다. 녹훈도감의 의궤는 감훈(勘勳), 좌목(座目), 소차질(疏箚秩), 도청사목(都廳事目), 이문(移文) 및 감결(甘結), 의주(儀註) 등 총 6편(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국612년 9월 30일에 편찬을 개시하여 동년 11월 16일에 완료하였다. 《녹훈도감의궤》

○ 12월 06일에 창국녹훈도감의궤가 간행되었다.



계미년(2003) 12월 기사본말(癸未年 十二月 紀事本末)


◎ 제15차 소과, 생원시 조광윤(趙匡胤) 등 5인 입격

○ 11월 중순에 제15차 소과가 시행되었다.


◎ 지역별 특색화 제도 폐지
승정원 운영 체제 개편

○ 개국611년(2002년) 8월 15일부터 시행된 지역별 특색화 제도가 존폐 기로에 섰다. 무공랑 조병옥(趙炳玉)의 상소에 의해 빈청3실에서 지역별 특색화 제도의 폐지 여부를 묻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 여하에 따라 특색화 제도의 중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관보 제34호》

○ 전국 팔도 9개 지역별로 정치, 역사 등의 고유한 주제를 할당했던 '지역별 특색화 제도'가 개국612년 12월 15일 자로 공식 폐지되었다. 조정 공론에 따라 개국611년 8월 15일자로 시행된 제도가 지방관들의 인식 부족과 백성들의 참여 부족으로 인해, 1년 4개월 만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막을 내린 것이다. 호적신고를 하는 백성들이 한성, 경기, 경상 등의 특정 지역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별로 분산된 것이 작은 성과라면 성과였다. 《관보 제35호》

○ 12월 14일에 왕세제 대리청정을 선포하는 교서에서 아울러 전교하기를,
"청정을 실시하는 16일을 기해 현행 승정원을 개편하여 실직(實職) 관리로 하여금 승정원 해당 사무를 담당하게 한다. 승정원에서는 어전에 올려지는 계본, 계목, 차자, 장계, 상소 가운데 세제가 재결(裁決)해야 할 것들을 모두 동궁으로 돌리도록 하라. 이조와 병조에서는 승정원에 명할 관리를 의망하도록 할 것이다. 우선 승정원에 관리가 충원되기 전까지 세제익위사에서 해당 임무를 잠정 대행하게 하며, 세제에게 올리는 상소(上疏) 역시 규례에 따라 상서(上書)로 호칭한다.
아울러 명일 15일 자로 지역별 특색화제도를 공식 폐지하도록 하겠으니, 관계된 관청에서는 관련 법령을 제도에 맞게 개수할 것이다." 하였다.

○ 대행대왕 전하께서 집정하실 때의 승정원 운영 체제가 지역별 특색화 제도 폐지와 함께 지난해 12월 16일을 기해 혁파되었다. 교지(敎旨) 발급은 이조와 병조에서, 과거 시행 안내 및 채점 진행은 사이트 차원에서 담당하는 형태로 체계가 변경되었다. 관보(官報) 발행은 승정원에 관리가 임명되기 전까지 무기한 연기될 예정으로 있다. 《관보 제35호》


◎ 왕세제 대리청정(代理聽政) 개시 ■#

○ 12월 14일에 왕세제 대리청정을 선포하는 교서를 내렸다.
"대리청정하는 날짜는 본래 길일(吉日)을 정해야 할 것이나, 종묘사직의 안정을 위해서는 그 일자를 크게 지체하기 어렵다. 오는 16일부터 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거행하게 한다. 세종조와 숙종조 등의 전례에 따라 용인(用人:인사), 형인(刑人:논죄), 용병(用兵:군사)은 과인이 직접 결단하고, 이외 국정은 세제의 결단에 의거 시행하게 한다. 다만, 용인 가운데 전조 수장에 대한 평정 및 참하관 이하에 대한 임면, 그리고 형인 가운데 형옥 2년 이하에 해당하는 논죄는 세제에게 일임한다. 관련된 계본, 계목, 차자, 장계, 상소는 모두 동궁을 경유하도록 하고, 그 가운데 중대한 사무와 관계되어 세제가 직접 결단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사항은 어전에 품처(稟處:상주하여 처리)하도록 한다." 하였다.

○ 12월 초8일에 왕세제가 문후를 드리자 초10일에 전교를 내리시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할 뜻을 밝히셨다. 이에 세제가 편전(便殿) 앞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하고 조정 신하들이 힘껏 만류하여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이에 대해 엄히 전교하시기를, "임금이 여러 사유로 정무를 더는 담당할 수 없게 되면 세자(世子)로 하여금 청정(聽政)을 하도록 하는 것이 국조 이래 전례였다. 오늘 이 전교는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과인의 깊은 뜻을 잘 알고 문무백관이 서로 협력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시고, "만약 전교를 따를 수 없다면, 마땅히 전위(傳位)하는 교서를 내리도록 하겠다. 과인의 의지가 이처럼 굳건하니, 세제는 청정을 명을 받들어 그대로 시행할 것이다." 하시며, 16일부터 즉시 청정을 시행하게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갑신년(2004) 1월 기사본말(甲申年 一月 紀事本末)


◎ 4품 이상 관원의 평정 기간을 1개월에서 2개월로 연장

○ 갑신년(2004) 정월 초2일에 전교하였다.
"금일 이후로 4품 이상관의 평정기간을 2개월, 즉 60일로 연장한다. 근무일수 가감산 역시 기존과 같이 인사평정상의 근무일수 요건에 의거하여 60일이 차면 집행한다. 세제가 건의한, 필요 근무일수 확대를 참상관 이상까지 넓히는 문제는 추후 시행 여부를 고려하기로 한다. 과거 응시 자격과 급제시 혜택 등은 대전(大典:창국대전)에 정해진 내용이 있으므로 가능하면 그대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연1회 급제에 한해 가계 혜택을 시행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나머지 급제에 대하여는 장원은 근무일수 40일, 갑과는 30일, 을과는 20일, 병과는 10일을 가산하는 것으로 대치한다. 제도를 더욱 엄격하게 하여, 출사 이후 일생 1회로 제한할지 등의 여부 역시 추후 고려하기로 한다." 하였다.


◎ 한성부 남부에 의인(義人) 박남이(朴南二) 칭송비 건립

○ 예조참의 이동진이 지하철 선로에서 사람을 구조한 박남이의 칭송비 건립에 대한 신본(申本)을 동궁전에 올리니, 왕세제가 비답하기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타 백성의 생명을 구한 효자(孝子) 박남이의 선행은 마땅히 비를 세워 칭송할 만하오. 예조에서는 평안도의 '재중교포 칭송비'에 준하여 칭송비를 한성부에 세우도록 조처하시오." 하였다. ■#

■ 개국612년 11월 8일, 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에서 실족하여 역내 선로에 떨어진 문영주(71) 씨를 구조한 시민 박남이(31)의 선행을 칭송함. 《박남이 선행 칭송비》


◎ 국왕 승하, 유교 반포 ■#

○ 정월 초6일에 왕의 병이 위급해지자 마침내 유교(遺敎)를 내려 세제에게 국사를 당부하시기에 이르렀다. 전교하시기를,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므로 유교를 내려 장차 일에 대비하고자 한다." 하시면서 옥체가 경각(頃刻)에 달렸음을 말씀하시고, "과인이 비록 덕(德)이 없고 공업(功業) 또한 없지만, 보위에 있으면서 지켜 고수하고자 한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두교서를 비롯해 그간 내린 교서와 전교를 살펴 헤아린다면 과인이 뜻한 바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며 세제에게 간곡한 말씀으로 당부하셨다. 나라를 나라답게 하려는 뜻이 간절하셨음을 말씀하시고 조정 관원에 대한 인사에서 주의할 점을 말씀하셨으며, "좋은 일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매우 아름다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잘못된 일을 문책하고 징계하는 것 역시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상벌이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을 전교하셨다. 또 임금의 명령이 공정하고 한결같아야 한다는 점과 매사 성실하게 정무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으니, 이날의 유교를 받든 대소신료 가운데 종사를 생각하시는 왕의 성심과 왕의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유교 말미에서는 국장(國葬)을 간소하게 치를 것을 상세하게 전교하시어 혹여 국장 탓에 국사에 지장이 생기고 백성에게 불편함이 초래될까 걱정하셨다. "시호는 4자를 넘지 말도록 하라. 이는 과인 스스로가 종묘사직에 죄가 크다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묘호는 반드시 종(宗)으로 할 것이다. 감히 조(祖)를 받을 수 없다." 하신 것이 왕의 마지막 말씀이셨다. 《장종대왕문서》

○ 1월 6일 자정 무렵에 선대왕 전하께서 병환으로 승하하셨다. 이어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유교(遺敎)가 반포되고, 병조판서 하빈군 이휘(李輝)를 중심으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이 설치되었다. 대행대왕의 시신은 입관(入棺:관에 넣음)을 거쳐 빈전에 안치된 후, 11일에 능(陵)에 매장되었다. 본래 예법으로는 승하하신 지 5개월이 지난 후에 매장하지만, 유교에 따라 기간을 간소화 하여 5일만에 장례 절차를 마무리한 까닭이다. 국상(國喪) 기간은 대행대왕께서 승하하신 지 27일째가 되는 오는 2월 초2일까지로,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백성들이 상복을 입어야 한다. 대행대왕의 시신을 능에 안치한 11일의 이튿날인 1월 12일에 세제 저하께서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셨다. 즉위교서(卽位敎書)를 내리시고, 이어 편전에 드시어 정무를 살피셨다. 세제 저하께서는 작년 11월 29일에 세제 책봉을 받으시고, 12월 16일부터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수행하신 바 있다. 국장도감에서는 대행대왕의 행장과 시책문, 비문을 편찬하고 시호와 묘호, 능호 등을 정하는 일을 맡고 있다. 국장도감에서 국상이 종료되기 전까지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적절한 때에 따로 시호도감이나 묘호시호도감 등이 설치될 것으로 보인다. 《관보 제35호》


창사(昌史) 제24권  

창사 기사본말 하권
昌史 紀事本末 下卷


갑신년(2004) 1월 기사본말(甲申年 一月 紀事本末)


◎ 국장도감(國葬都監) 개청

○ 7일에 병조판서 이휘(李輝)가 동궁전에 국장도감 개청에 대하여 신본(申本)을 올리니, 왕세제가 비답하기를,
"세제는 감당할 수 없는 비통함에 정신마저 혼미(昏迷)하나 정신을 수습하여 상주(喪主)의 소임을 다해야 하니, 병판(兵判)은 유교에 따라 정무를 대리토록 하시오. 다만, 사안이 중한 것은 세제의 재결을 받도록 하시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가급적 고례(古例)에 따라 총호사(摠護使)인 도제조(都提調:정1품)를 제외하고 제조(提調:종1품-종2품). 도청(都廳:정3품-정4품). 낭청(郞廳:종4품-종9품) 등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겠소. 청사(廳舍)는 녹훈도감이 있던 자리로 하겠소. 경(卿)을 국장도감 제조에, 예조참의 이동진을 도청에 명하니 국장(國葬)에 따른 제반 절차를 유교와 고례에 따라 소홀함이 없도록 진행하시오." 하였다. ■#

○ 1월 6일 자정 무렵에 선대왕 전하께서 병환으로 승하하셨다. 이어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유교(遺敎)가 반포되고, 병조판서 하빈군 이휘(李輝)를 중심으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이 설치되었다. 《관보 제25호》


◎ 대행대왕(大行大王) 재궁(梓宮) 빈전(殯殿) 안치
◎ 대행대왕 국장(國葬), 경기도 고양군(高陽君)의 대행대왕릉(大行大王陵)에 안장
◎ 대행대왕 우주(虞主) 숭경전 봉안


○ 재궁(梓宮)은 임금의 관(棺)이다. 《사조백과사전》

○ 9일에 병조판서 겸국장도감제조 이휘가 대행대왕의 입관 및 빈전 안치에 대하여 신목(申目)을 올리기를,
"대행대왕 전하의 시신을 전례에 따라 재궁에 입관하고, 빈전에 안치하는 절차가 무사히 마쳤음을 저하께 고하옵니다. 빈전 옆에는 저하께서 호곡하실 여막도 지어, 절차상 문제가 없게 처리하였음을 더불어 아뢰옵니다." 하니, 왕세제가 비답하기를,
"아뢴 바를 잘 알았소." 하였다. ■#

○ 11일에 병조판서 겸국장도감제조 이휘가 신본을 올려 대행대왕의 국장 및 신주 봉안을 완료하였음을 아뢰니 왕세제가 비답하기를,
"도감과 경기감영이 수고한 바를 잘 알았소. 이는 추후에 치하토록 하겠소." 하였다. ■#

○ 대행대왕의 시신은 입관(入棺:관에 넣음)을 거쳐 빈전에 안치된 후, 11일에 능(陵)에 매장되었다. 본래 예법으로는 승하하신 지 5개월이 지난 후에 매장하지만, 유교에 따라 기간을 간소화하여 5일 만에 장례 절차를 마무리한 까닭이다. 국상(國喪) 기간은 대행대왕께서 승하하신 지 27일째가 되는 오는 2월 초 2일까지로, 이 기간에는 모든 백성들이 상복을 입어야 한다. 《관보 제35호》


◎ 제16차 소과, 진사시 한유찬(韓儒燦) 등 5인 입격

○ 제16차 소과는 계미년(2003) 12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 혼전(魂殿)의 전호(殿號)를 숭경전(崇敬殿)으로 결정

○ 혼전(魂殿)은 국장(國葬)을 치른 후에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우주(虞主), 즉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이다. 국장 기간에 왕의 시신이 놓인 관인 재궁(梓宮)을 안치한 곳은 빈전(殯殿)이다. 왕릉에 안장한 후에 혼전에 모신다. 연제(練祭) 후에 우주를 연주(練主)로 바꾸며, 삼년상이 끝나면 연주를 종묘(宗廟)로 옮기는 부묘제(祔廟祭)를 시행한다. 《사조백과사전》

○ 10일에 국장도감에서 혼전의 전호와 능지, 왕세제의 즉위 절차에 대하여 신본을 올리니 왕세제가 비답하기를,
"혼전(魂殿)의 전호(殿號)는 고례. 선대왕의 전호. 도감의 삼망(三望) 등을 두루 감안하여 공경하여 높이 받든다는 의미의 '숭경전(崇敬殿)'으로 하는 것이 좋겠소. 능지(陵地)는 지세(地勢)와 기후를 두루 감안하여 경기도 고양(高陽)이 적지인 듯하며, 사위(嗣位:즉위) 절차에 대한 것은 고례를 따라 모두 행하기가 어려우니 정무를 대리하는 경(卿)이 맡아서 간소하고 간략하게 준비하시오." 하였다. ■#


◎ 세제,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 후 즉위교서(卽位敎書) 반포 ■#

○ 12일에 왕세제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즉위교서에서 이르기를,
"본디 정치(政治)는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영하며 배우는 것이니, 이제 나는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섬김에 열(熱)과 성(誠)을 다할 것이다. 또한, 종묘에 나아가 열조를 모시고 그대들 신하들과 백성들을 경영함에 몸소 모든 힘을 다 쏟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제 내가 제모(帝謨:군왕의 계책)를 다하여 만물을 생성하여 기르고, 태화(太和:신라 진덕여왕 때)와 옹희(雍熙:고려 성종 때)의 치(治: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마땅히 나를 도와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항상 나에게 이치에 맞고 도리(道理)에 준하는 바르고 옳은 말로써 규간(規諫:간쟁)하여 허물을 고칠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잊지 말 것이다.
행신(行身:처신)의 기준은 오교(五敎:오륜)로 삼도록 하라. 스스로 몸과 마음에 바르지 못한 기운을 담지 말고 사기(士氣)를 이루어 도야(陶冶:심신 수양)에 정진하고 풍속과 문화를 아름답고 바르게 꾸미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변함없는 '지공무사(至公無私: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의 마음으로 위로는 군왕의 정사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타이르고 경계하는 것으로 나를 받들도록 하라.
아아, 옛말에 이르기를 무릇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創業易守成難)'고 하였거늘, 선왕께서 재창(再昌:다시 일으킴)의 어려움을 감당하셨으니 이제 마땅히 내가 수성의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바, 그대들이 나를 도와 힘을 써준다면 어찌 내가 후일에 천덕을 몸으로 행하지 못하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모두 힘써 받들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대행대왕의 시신을 능에 안치한 11일의 이튿날인 1월 12일에 세제 저하께서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셨다. 즉위교서(卽位敎書)를 내리시고, 이어 편전에 드시어 정무를 살피셨다. 세제 저하께서는 작년 11월 29일에 세제 책봉을 받으시고, 12월 16일부터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수행하신 바 있다. 《관보 제35호》


◎ 주요 당상관 인사 단행 ■#

○ 전평안도관찰사 덕수군 이완(李浣)을 이조참판 겸 군자감제조로 삼는다. 전경기도관찰사 해원군 최영(崔瑩)을 예조참판 겸 선공감제조로 삼는다. 이조참의 정재안(鄭宰安)을 형조참의 겸 국장도감도청으로 체직한다. 예조참의 이동진(李東珍)을 승정원우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체직한다.


◎ 대행대왕 연제(練祭), 우주 매안(埋安) 및 연주(練主) 봉안 ■#

○ 18일에 병조판서 겸국장도감제조 이휘가 대행대왕의 연제 시행 및 연주 봉안에 대하여 계본(啓本)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국상 2년째 되는 날에 지내는 상제는 생략할 것이니, 국상이 종료되는 익월 초 2일에 담제를 지낼 수 있도록 준비하시오. 이 날부터는 상복을 벗고 평상시의 의복으로 환복(換服)해도 좋소. 담제를 지낸 후에는 별도로 부묘도감을 설치하지 않을 것이니, 국장도감에서 부묘제(혼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는 의식)를 행할 길일을 정해 아뢰시오." 하였다.

○ 대행대왕의 시신이 능에 안치된 후, 역월법으로 계산하여 1년이 되는 1월 18일에 연제를 지내고, 우주(虞主)를 혼전(魂殿)인 숭경전(崇敬殿)에서 내어 종묘 뒤뜰에 파묻고, 밤나무로 연주(鍊主)를 만들어 숭경전에 봉안하는 절차를 완료하였다. 《관보 제26호》


◎ 갑신년(甲申年) 연두교서 반포 ■#

○ 22일에 연두교서를 반포하였다.
"조정 신하들은 나아가고 물러가는 '진퇴(進退)' 문제를 보다 신중히 하도록 하라. 대행대왕 시절에 여러 관리들이 진퇴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과인이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처하던 집)에 있을 적에 여러 번 보았다. 관리들의 이러한 풍토가 초야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니, 그 염려하는 바가 크고 무겁기만 하다. 사직지신(社稷之臣:나라를 지탱할 만한 신하)의 구분을 어찌 공적과 공로만으로 따지겠는가. 바로 처신이 어떠한지에 의거해야 한다. 과거에 창국공신으로 책봉된 신하들의 면모를 따져 보면, 그들이 공신이 된 것은 공적과 공로가 동해처럼 넓고 태산처럼 높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로지 종묘사직을 위해 모든 열정을 다하고, 매사 처신을 신중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공적이 더욱 빛났기 때문이니,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과 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평소 처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이는 한낱 촌부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창사(昌史) 제25권  目錄

갑신년(2004) 2월 기사본말(甲申年 二月 紀事本末)


◎ 대행대왕(大行大王) 담제(禫祭)
 ■#

○ 2일에 숭경전(崇敬殿)에서 대행대왕의 담제를 지내었고 만백성이 상복(喪服)에서 평상복으로 환복하였다.

○ 역월법으로 계산하여 3년째 되는 2월 2일에 혼전인 숭경전에서 담제를 드린 것을 마지막으로 삼년상의 모든 절차를 마치게 되었다. 이날 대행대왕의 삼년상이 종료됨에 따라 전례에 의거, 주상 전하를 비롯한 대소신료 및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상복(喪服)을 벗고 평상복을 입는 환복(還服)을 시행하였다. 《관보 제36호》


◎ 주요 경관직과 외관직에 대한 인사 단행 ■#

○ 5일에 전교하였다.
"2월 초 6일에 강원도사 한종훈(韓宗勳)을 행형조좌랑으로, 전호조산사 김지수(金志洙)를 사옹원주부로, 행홍문관저작 박영효(朴英孝)를 황해찰방으로, 행승문원정자 신대치(辛大治)를 행경기검률로, 행용양위사용 김현유(金賢柳)를 행강원검률로 삼는다.
2월 초 8일에 예정대로 행갑산도호부사 서양갑(徐羊甲)을 행사헌부집의로 삼는다. 2월 10일에 행형조율학훈도 박상진(朴商鎭)을 행한성부참군으로 삼는다. 2월 12일에 행전라찰방 이현(李炫)을 행병조좌랑으로 삼는다. 2월 13일에 행충청검률 이의방(李義方)을 형조명률로 삼는다. 2월 19일에 경상찰방 조병옥(趙炳玉)을 교서관별제로 삼는다.
아울러, 2월 초 8일까지 이조의 별다른 이견이 없다면 평안도급사 서상현(徐相賢)과 함경도급사 이순지(李純之)를 품계의 강등 없이 동반(東班:문관)으로 변경하여 행평안도검률과 행함경도검률로 삼고, 권지교서관저작 조광윤(趙匡胤)을 정직(正職)인 수홍문관박사로 삼는다."


◎ 제13차 대과, 문과 박상진(朴商鎭), 무과 서양갑(徐羊甲) 등 5인 급제

○ 2월 4일에 급제자가 발표된 제13차 정기 대과에서는 문과에서 4인, 무과에서는 1인의 급제자가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응시자가 문과 5인, 무과 1인에 지나지 않는 데다, 문무과 5인의 급제자 중 초입사한 관리는 1인에 불과하여 조정 관리들이 일부 우려를 표하였다. 《관보 제36호》



갑신년(2004) 3월 기사본말(甲申年 三月 紀事本末)


◎ 대행대왕 부묘제(祔廟祭), 대행대왕 신위를 종묘 정전(正殿) 제20실에 부묘(祔廟) 봉안
◎ 국장도감을 시호도감(諡號都監)으로 개청(改廳)

○ 19일에 병조판서 겸국장도감제조 이휘(李輝)가 대행대왕의 부묘제를 거행할 길일(吉日)에 대하여 아뢰니, 비답하기를,
"부묘제는 익월 초 1일에 거행하고, 선왕(先王)의 신위는 도감에서 아뢴대로 정전(正殿)을 늘려 20실에 봉안토록 하시오. 아울러, 부묘제 시행과 관련해 제반 절차를 모두 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대부분을 생략하여 시행 당일에 도감에서 '명예의 전당'에 관련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대신하겠소." 하였다. ■#

○ 국장도감에서 부묘제를 시행할 길일을 삼망하여 아뢰니 금상 전하께서 3월 1일을 택일하시어 혼전에 모셔져 있는 신주를 종묘로 옮기고 부묘제를 시행토록 하명하시니, 국장도감에서 명을 받들어 신위를 종묘 정전 20실에 봉안함으로 대행대왕 전하의 국장절차가 모두 마감되었다. 그러나 아직 대행대왕의 행장과 비문의 찬술, 시호, 묘호, 능호 등이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전하의 전교로 국장도감을 시호도감(諡號都監)으로 개칭하고 관원들은 유임토록 하여 대행대왕의 행장 등의 찬술에 진력토록 하였다. 시호도감에서는 제조 병조판서 하빈군 이휘(李輝)를 위시하여 전 관원이 협력하여 우선 대행대왕 전하의 행장찬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관보 제36호》

○ 3월 1일에 국장을 마치고 전교하기를,
"금일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시호도감(諡號都監)으로 개칭하고, 제조 이하 관원들을 유임하니 열(熱)과 성(誠)을 다하여 제반 사업을 완수토록 하라. 관원들의 수고는 모든 사업이 종료된 후에 치하토록 하겠다." 하였다. 《시호도감의궤》 ■#


◎ 제11차 별시, 문과 정종욱(鄭鍾昱), 무과 김봉수(金俸秀) 등 12인 급제

○ 제11차 별시에서는 문과에 20인, 무과에 4인이 응시하여 응시율이 크게 높아진데다 급제자 또한 문과 10인, 무과 2인으로 근래 시행된 과거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전하께서 시제 난도를 하향 조정하시어 유생들의 응시 의욕을 크게 고취하신 결과라 분석된다. 《관보 제36호》


◎ 호조, 예조, 승정원, 시호도감 등의 인사 단행 ■#

○ 12일에 전교하였다.
"이 달 15일에 예조참판 해원군 최영(崔瑩)을 호조참판으로, 승정원 우승지 이동진(李東珍)을 예조참의로 체직한다. 아울러, 이조참판 덕수군 이완(李浣)의 군자감제조 직과 형조참의 정재안(鄭宰安)의 시호도감도청 직은 거두고, 해원군 최영의 선공감제조 직은 유임한다.
승정원 인사와 관련하여 이조에 전교한다. 홍문관 박사 조광윤(趙匡胤)이 휴가에서 복귀하면 복귀 일자에 승정원주서로 사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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