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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차 소과 훈련원시 과거시험 시행 기간 : 2019.08.24-201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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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 제72차 소과 훈련원시 응시
무과 시제 (시험 문제)
: 병볍서 [손자병법] 허실편(虛實篇)에서 손자가 이르길, '무릇 싸움터에 먼저 나아가 기다리는 자는 편하고, 뒤늦게 싸움터에 달려가는 자는 수고롭다(凡先處戰地而待敵者佚, 後處戰地而趨戰者勞).'라고 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또 이러한 전략이 효과적으로 활용된 사례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응시자 본인의 의견과 사례를 기술하라. (200자 이상으로 답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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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 내용 :

시제에 나와 있는 손자병법의 구절은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아군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유리한 위치’란 단순히 전투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의 주도권까지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술적,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며, 적을 제압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 곧 ‘싸움터에 먼저 나아가 기다리는’것이라 할 수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준비를 더 철저히 한 쪽이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싸움을 벌일 때와 장소를 스스로 정하고, 적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할 때 공격하게 하는 쪽이 확실한 승세(勝勢)를 잡을 수 있다. 이는 손자병법 군형편(軍形篇)에 나와 있는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겨 놓고 싸우기를 구하며, 패하는 군대는 먼저 싸운 후에 승리를 구한다.(勝兵先勝而後求戰, 敗兵先戰而後求勝)’는 구절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충무공(忠武公)의 빛나는 백전백승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후세에 널리 알려졌고 비교적 오래전에 일어난 전투보다는 본격적인 현대전이 대두한 시기에 일어났고, 그 전과가 중요한 가치를 지닌 두 전투의 사례를 들어 시제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첫 번째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독일 사이에 벌어졌던 쿠르스크 전투를 들 수 있다. 전투가 벌어졌던 1943년 동부전선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때까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소련군은 1942년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서의 처절한 승리이후 본격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남부 러시아의 중심지였던 하리코프(Kharkov)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의 반격도 거세어 소련군으로부터 하리코프를 다시 탈환하는 등 동부전선의 승부는 쉽사리 결론짓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군이 하리코프를 다시 장악하면서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쿠르스크(Kursk) 일대에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독일군의 위협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 당시의 정세(情勢)를 살펴보자면 독일의 전쟁지속능력은 점차 쇠퇴하고 있었고, 반대로 연합군의 전력은 크게 성장하여 독일 수뇌부는 서유럽에 독일 본토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제2전선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게 되었다. 만약 독일이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2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적들과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자국의 파멸을 의미했고, 이에 독일 수뇌부는 가능한 한 소련군의 위협을 차단하고 동부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한 선제공격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작전을 입안했다. 그러나 '성채(Zitadelle)'라 명명된 이 작전은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처한 상황이 독일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한편 소련군은 독일군이 쿠르스크에 대규모 공격을 가할 것이라 일찍부터 예상했고, 이에 대한 대비를 진행했다. 쿠르스크에서 소련군의 계획은 철저하게 방어중심이었으나, 장래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적이 약해졌을 때에 대대적인 역습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소련군 지휘부는 쿠르스크 일대에 당시 총 전력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군사 170만 명과, 전차 및 자주포 3,600대, 화포 19,000문, 항공기 3,100여대의 대병력을 집결시켰고, 30만 여명의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6겹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맞붙은 수차례의 전투에서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은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훨씬 풍부했고, 전투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한 소련군이었다. 또한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소련군은 승세를 몰아 하리코프를 비롯해 독일이 점령한 땅을 다시 수복했으며, 나아가 동부전선의 주도권이 소련군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한 가장 큰 원인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독일은 전선의 배후에 또 다른 위협이 가해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선공을 개시하여 대(對) 소련 전선을 안정시킨 후에 새로운 위협에 대처한다는 무리한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실제로 독일의 명장(名將)이라 불리는 폰 만슈타인(von Manstein)은 소련에 먼저 공격을 가하기보다는, 소련의 공세를 방어한 뒤에 반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전황상 독일군에게는 시간이 촉박했으며, 이에 만슈타인은 만약 수뇌부의 결정에 따라 작전이 시작되더라도 소련군의 전력이 단단해지기 전인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번에는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가 아군 전력의 우위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작전 개시를 7월 초로 연기했는데, 이것은 소련군에게도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더 주게 된 꼴이었으며, 나중에는 동맹국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됐던 병력을 이탈리아에 파견하게 됨으로써 전투에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쿠르스크 전투는 시간적 여유와 전력의 우위를 잘 활용한 소련군이 이기게 된 것이다. 또한 소련은 독일과의 첩보전에서도 승리하여 독일군의 공격개시 시간까지 알아낼 정도였으니, 싸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고, 이 노력은 헛되지 않아 전체 전쟁의 성패까지 바꿔 놓았으니 그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전투는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용문산 전투이다. 앞서 벌어졌던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에 대패하여 퇴각한 한국군 6사단은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6사단장이었던 장도영은 방어전술의 상식을 깨고 1개 연대(제2연대)를 사단 주방어선보다 훨씬 전방인 북한강 하류에 배치하여 전초방어를 담당하게 했다. 5월 18일, 중공군은 6사단에 공세를 개시했고 2연대는 북한강을 도하하는 중공군에게 대응공격한 후 강화된 방어진지가 위치한 427고지로 퇴각했다. 이후 2연대는 막강한 화력지원아래 중공군을 상대로 필사의 방어전을 펼쳤고, 이 때문에 중공군 지휘부는 427고지가 6사단의 주방어선인 것으로 오판하여 3개 사단을 한번에 427고지로 투입시켰다. 2연대가 3개 사단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치는 동안, 실제 주방어선인 용문산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6사단 예하의 나머지 2개 연대가 중공군의 배후로 반격을 가했고, 이를 한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오판한 중공군은 급속히 와해되어 퇴각했다. 승세를 잡은 한국군은 퇴각하는 중공군을 계속 추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결국 화천 파로호에서 적군을 궤멸시켰다.

용문산 전투에서 한국군 6사단은 17,0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고 2,000여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이는 한국전쟁동안 벌어진 단일 전투로서는 최대의 전과인 만큼, 오늘날까지도 한국군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문산 전투에서 6사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초방어선인 427고지에 미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2연대가 중공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후퇴를 실행하여 427고지에서 방어전을 펼칠 수 있게 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예비대를 투입하여 반격을 개시한 사단장 장도영의 뛰어난 전술적 안목과 휘하 장병들의 굳건한 감투정신 덕분이었다. 아군이 유리한 위치에서 적을 끌어들이고, 적이 방심했을 때가 아군에게 가장 유리한 때임을 알아 전세를 뒤집었으니, 용문산 전투야말로 시제가 묻는 사례에 가장 알맞은 전투가 아니겠는가.

끝으로 병법에는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손자병법의 ‘군사를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날쌔게 하고,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있고, 적을 치고 빼앗을 때는 불이 번지듯이 맹렬하게 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이 말은 상황에 따라 군사를 적절하게 움직여야 함을 의미한다. 필자는 '풍림화산' 네 글자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마지막 열쇠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군에 유리한 때와 장소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군사를 움직이는 장수가 무능하다면 아군의 이점은 다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결코 시제에 나온 구절대로 이룰 수 없을 것이며, 아군이 유리하다 방심하여 섣불리 행동한다면 그 결과는 재앙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무릇 대업(大業)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데, 이는 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풍림화산(風林火山)과 같이 군사를 움직일 줄 아는 장수를 우리는 명장(名將)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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