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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時代) 05 제09화
성종 재위 7년 팔월 이십이일. 왕이 직접 승정원에 전교하길 후비의 친잠하는 예를 예문관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바로 그 이전에 중궁전에서는 선정전으로 나아가 내외명부와 함께 회례연(會禮宴)을 베푸니 중궁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더욱이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몸이고 보면 중궁의 자리는 더욱 확고해진 셈이었다. 그런데 인수대비가 한명회와의 제휴를 도모하면서 상감이 자신에게 불효하고 있음을 근심하였다. 한명회 나름으로 처음에는 악처(惡妻)라도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는 논리를 폈으나 중궁의 당찬 성품 때문에 젊은 관리들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나서니 보다못해 직접 상감과 면대하여 효도하라고 직언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도 개선의 여지가 없게 되자, 인수대비에게 찾아와서 중궁을 폐위하는 것을 얘기하자 새삼스럽게 그 말씀은 어째서 꺼내십니까? 하며 인수대비가 얼굴을 붉혔다. 신이 집에 돌아가 옛일을 꼼꼼히 따져보고 상고해보니 임금을 여러 차례 폐했는데 중궁을 폐한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명회의 말에 그렇습니까? 나는 그저 한번 물어본 것 뿐입니다. 외면하는 인수대비. 마마, 마마께서 서운해하시는 심정을 신은 헤아리고도 남습니다. 참으십시오, 젊으신 중전께서 기고만장해하시는 형상을 마마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아옵니다. 다만 중궁의 일로 마마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명회의 말을 듣고 보다 못해 상당군께서는 나를 조롱하러 오셨습니까. 참고 말고가 뭐가 있습니까. 며느리 덕분에 원자를 봤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입니다. 오해입니다. 나는 며느리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인수가 질색한다. 마마,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히려 세상은 까맣게 멀어지는 법이옵니다. 산을 오를 때에는 힘이 들고 험준(險峻)하나 막상 산 위에 오르고 나면 내려갈 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옵니까? 명회는 자신의 옛일을 회고하듯 자신의 권세가 덧없음을 토하듯 아뢴다. 그러나 오르기도 전에 내려갈 일을 염려합니까? 주나라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근심하여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들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어 이를 두고 기우(杞憂)라고 한다더니 상당군께서 그리 소심하실 줄 몰랐습니다. 인생이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것입니다. 뒤돌아보고 후회한다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 돌아온답니까? 나는 왔던 길을 바로 뒤돌아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애써 인수대비는 외면하였다. 명회가 물러가자,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한편 중궁은 정치에 관여하는 맛에 들린 나머지 임사홍을 수족으로 삼아 임금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 먹이에 굶주린 유자광이 상당군과 손을 잡은 인수대비를 만만히 보지말라고 신신당부하였으나 사홍이 호언장담하며 껄껄 웃어댔다. 그런데 중궁이 모르는 사이에 상당군이 현석규와 은밀히 밀담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래서인지 상감이 신진 관리들의 인수대비에 대한 탄핵을 거두었다. ‘상당군 덕분에 망신을 면했구먼. 내 아드님께서 비수를 들이대기를 기다렸거늘. 어미가 피를 철철 흘려야 내 아드님께서 정신이 번쩍 나지 않으시겠는가. 탄핵상소라.’ 인수대비는 그 여장부다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상감은 상감대로 면목이 없었던지 대비전에 몸소 찾았다. 인수대비는 어미가 부덕하여 하마터면 주상의 체통에 먹칠을 하는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습니다. 어미를 용서하세요, 주상. 상감의 옥수(玉手)를 잡은 인수대비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인수의 머리에는 백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감의 눈시울 또한 붉혀졌다. 전보다 많이 쇠약해진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하다. 한때나마 효손으로 불린 상감이지만 정무에 찌들어 있어 내심 소홀히 한 탓이 있었다. ―모자간의 정을 나누는 사이, 다음해에 접어 들자 중궁이 친잠례를 행하니 성종 8년 삼월의 일이다. 임사홍의 처 이씨와 죽은 권람의 처도 함께 친잠례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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