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병욱
[봉당] 시대(時代) 05 제18화
원자 융이 대왕대비전과 인혜대비전에 문안을 드리고 난 뒤 친할머니께 문안을 드리러 왔다. 원자는 할머니를 의식하여 가까이하지 못하고 낯가림을 심하게 했다. 할머니를 쳐다보는 눈은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어미의 얼굴을 기억할 리 없거늘. 폐비의 피가 섞여 있음이야!’ 인수대비는 손자의 문안을 받고 난 뒤 마음이 심란하였다. 권 숙의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인수대비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폐비의 사가에서는 새 중궁에게 원자를 양육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방 학을 떼고 있었다. “원자와 내 사이를 영영 떼어놓으려는 대비전의 농간이지요.” “언성을 낮추시지요. 마마.” 폐비의 어미 신씨는 행여 문밖에 새 나올까 좌불안석이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나를 버리실 모양입니다.” “마마,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새 나가겠습니다.” “들으라면 들으라지요. 나는 원자와 살 수 없다면 죽는 것이 낫습니다. 죽이세요. 그래야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겁니다. 두고 봐라, 이놈들, 내 아드님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내가 가만히 둘 것 같으냐! 대비전에 아부하여 폐비에 앞장선 놈들은 그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그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 폐비의 울음소리는 구곡간장을 애태우는 것 같았다. 인수대비는 폐비의 성정을 떠보는 것으로 즐기는 모양이었다. 내관이든 궁녀이든 폐비의 성정을 악독하다는 표현을 하도록 대비전에서 엄히 분부하는 것으로 재미를 붙인 것이다. 폐비가 상복을 입고 맞이하였다는 둥, 대궐로 돌아갈 희망이 없다 하고 스스로 자진을 하겠다는 둥 하여 상감의 눈과 귀를 멀게 하였다. “저런 고얀 鷄執이 있나! 주상 이게 웬 변괴입니까? 폐비가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되어 주상과 왕실을 저주하는 것이니 이러고도 원자의 어미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주상 더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조정 중신들을 모두 들라고 하세요. 내가 의지를 내려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할 것입니다!” 인수대비의 으름장 앞에서 상감은 폐비를 죽이라는 의지를 내렸다. 의지가 내려진 그날 밤. 유성이 떨어졌다. 윤씨가 그 밤하늘을 쳐다보니 무언지 상서롭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애써 태연하게 어미에게 “어머니 저것이 길조입니까? 흉조입니까?” 하고 물어본다. 애써 울음을 참으며 “길조입니다.” 어머니 신씨가 대답한다. “큰 인물이 죽으면 유성이 진다고 하지요?” “큰 인물이 태어나더라도 유성이 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마께서 환궁하실 날이 가까워오니 유성이 지는 것이 아닙니까?” “내 별은 아니겠지요, 어머니. 내 별이 지는 건 아니겠지요, 어머니?” 폐비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처연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승지가 관리들을 이끌고 폐비의 사가에 찾아왔다. 소복으로 차려입은 윤씨의 초라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였다. 윤씨는 거울을 바라보며 빗질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뇌성이 치고 울었으니 필경 반가운 소식이 있을 겁니다. 원자가 보고 싶습니다. 오늘따라 원자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윤씨는 낮은 한숨 소리를 내며 원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였다. 좌승지 이세좌가 왕대비전의 의지를 받들어 찾아온 것이다. 폐비를 사사한다는 어명이었다. “사사라니, 방금 사사라고 했습니까? 아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신씨가 이 말을 듣고 실신했다. 금부도사에게 윤씨가 “이보시게, 도사 양반. 내가 한때나마 전하를 모시는 중전이었네. 그러니 해라를 할 것이니 과히 섭섭히 여기지 마시게나. 전하께서 사약을 내리셨다니, 내가 어찌 이 일을 마다하겠나? 기쁘게 받을 것이다.” 말했다. 신씨가 울음을 토해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원자의 외할머니가 아니십니까? 이만한 일로 체신을 잃고 우시다니요. 좌승지한테 긴말하지 않겠네.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시게나.” 폐비가 이세좌에게 물었다. “내가 명색이 원자의 어미이니 사약을 마시고 죽는 모습이 아름답고 평온할 일이 있는가? 부탁이니 방 안에 들어가서 마시고 죽게 해 주게나.” 금부도사가 이를 다그치자 “예끼 이 사람. 저승사자라도 자네보다는 인정이 있을 것이야.” 한때나마 중전의 몸에 있었던 윤씨의 모습이 드러났다. 원자의 어미로써 온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던 윤씨였다. 윤씨는 방안에서 기꺼이 사약을 마시고 죽고 말았다. 죽고 나면서 친정어머니에게 자신의 한삼으로 당신의 목에서 나오는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어 그것을 원자가 보위에 오르면 전해달라고 하였다. 보고 싶은 마음은 사무치어 원자야 외마디를 남기고 죽고 말았다. 폐비가 사사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던 인수대비의 가슴은 허전하였다. 한낱 사람인지라 일말의 인정이 있었다. 원자를 찾아가서는 당신의 체통을 내버린 채 “가까이 오너라.” 나직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할미를 감싸 안아달라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할미를 안아달라고 하는 몸짓이었다. “할미니라. 내가 원자의 할미니라!” 왕실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일부러 엄히 단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던 인수대비가 아니었던가. “내가 할미니라.” 한때나마 며느리였던 원자의 생모를 슬퍼하는 마음과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는 자신의 처지가 인수대비로 하여금 외로움은 더해갔다. 원자를 애써서 다독이는 인수대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나왔다.
|
http://www.1392.org/bbs?history23:481  
|
| 
|
| 창작 역사소설 최근 댓글 | ||||||||||||||||||||||||||||||||
|
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