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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시대(時代)_02 시대(時代)_03 천추千秋
시대(時代)_02
―이 이야기는 허구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나 장차에 가서는 진실한 역사로 밝혀질 것이니 이 점을 깊이 유념하여 언젠가 언제 어디선가 한 나라의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드러내는 날이 있거든 기꺼이 밝혀다오. 이 몸은 죽고 없더라도 기록은 남을 것이니 꼭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을 기약하여 고이고이 지켜야 한다. 이 아비의 원(願)을 풀어다오. 아버지의 유품을 받은 덕호는 앞이 캄캄해짐을 느낀다. 아버지의 유언도 유언이지만, 어쩌다가 아버지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역사 기록들을 손수 간직하시다니. 강자가 승자가 되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이렇듯 고이고이 간직하라는 유언을 남기시는 걸 보면 아버지에게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걸 모를 리 없는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일각에서는 ‘선사국’이라는 왕국이 있어 천하를 호령할 만한 국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언제 어디서 흥망을 했는지 알 길이 없고 한다는데……. 덕호가 움켜쥔 이 책이 바로 그 ‘선사국’이라는 나라의 이야기라고 한다. 굳이 믿어보려고 해도 의심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짙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해서 고명(高明)한 학자를 알아내어, 보름이 지나서야 학자가 있다는 사무실로 곧장 찾아갔다. 사무실로 찾아가보니 다소 누추한 곳이기도 했다. 허름한 건물에 눅눅하고 어둔 분위기였다. 수납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수납장에 보관되어 있는 고서적과 고문서들이 즐비해 있어 학자의 연구실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제대로 잘 찾아왔구나. 하며. 학자가 그런 덕호를 반기다 못해 안심해하면서 어떤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덕호가 아버지의 유품을 얻기는 했으나, 왜 굳이 밝히지 못한 역사를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찾아왔다니까 알아들었다는 듯 끄덕이는 동시에 학자는 알아들었다며 그 책을 내놓으라고 해서 순순히 주었다. 책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더니, “아니 이것이.” 하며 책을 읽던 학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이건 선사국에 관련된 내용이긴 합니다만 전혀 새로운 내용이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는지라 덕호는 당혹함을 금치 못하였다.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 건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으나 일각에서 선사국의 건국을 두고 다툼의 여지가 있는지라.” 다툼의 여지란, 한 나라의 정승의 반열에 오른 궁(宮)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簒奪)하여 스스로 보위에 올라 나라를 ‘선사국’이라고 칭했다는 것과 그가 죽을 즈음에 다시 전 왕조의 왕손을 새로이 후계자로 점지하여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수십 년 전에 발견했다는 고서 ‘선사국기’라는 책에서만큼은 그리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상으로부터 엉겁결에 물려받은 책에서만큼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반전을 보이는 터였다. 학자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덕호는 학자의 시선을 떨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기를 수 시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제게 주실 수 없을까요?” 학자가 입을 떼었다. “네?” “이 책은 기존의 ‘선사국기’라는 자료를 뒤집어 엎을만한 자료가 담겨있어서 좋은 연구 자료로 쓰일 거 같아서요.” 갑작스런 학자의 물음에 얼떨떨해하고서는 허락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그때였다. “아버지의 귀중한 유품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제 손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료는 선사국기의 발행연도보다 더욱 앞서서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군요. 더욱이 이렇게 표지 제목도 언급이 안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출판이 되기도 전이구요. 게다가 이렇듯 활자본(活字本)으로 되어 있어 더욱 신뢰도는 높기는 합니다만.” 학자는 자신감 있게 덕호에게 책을 내보이며 자신의 뜻을 밝혀냈다. 덕호는 단 한번도 책을 읽어보거나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훑어 읽어본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덕호는 이 노회(老獪)한 학자의 말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아버지가 저렇듯 보잘 것 없는 책에 대해 비밀로 붙이라고 했던 걸까. 어째서.’ 놀라움과 함께 덕호의 눈에서는 의혹의 그림자가 차츰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덕호는 마치 어린 아이를 내 맡긴 뒤에 아쉬운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는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다지만 학자의 확신에 찬 눈빛에 이끌려 그를 믿어보기로 하고, 아버지의 유품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차츰 흐르고 흘러 넉 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마침 춘계 학술대회(春季 學術大會)가 개최되는 시점이었다. 학자는 발표할 자료를 손수 귀한 보물 다루듯 들고 와서는 선사국기에 대한 재인식을 주제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학계에서는 물론, 주요 언론 일간지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선사국기는 저자가 분명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저자 스스로가 손수 필체로 적은 자료이며 신빙성이 떨어짐을 주장하였고 심지어는 이 책은 앞뒤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기록한 탓에 망상에 가깝지 않을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 사건이 텔레비전에 전파를 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결국 학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덕호는 아버지의 유언을 거슬려야 했음을 느끼기 시작하여 후회로 밀려드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야 했다. 텔레비전에 비춘 학자의 눈에서는 광채(光彩)가 서려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는 듯하다.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의 실정(失政)에 의해 정변을 일으켰다는 궁씨의 실질적 존재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이번에 발견한 자료에는 그 이름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국(國)’이며 선사국의 정승으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학자의 말에 신빙성이 있을까. 덕호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은 걷잡을 수 없이 사실로서 굳혀지고 있었다. 덕호는 공연히 자신이 일을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이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시류를 잘못 탔는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삼 개월 후에 노학자에게 넘긴 책이 이름 있는 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사실은 덕호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죄책감에 쉬이 이기지 못한 채, 가족을 이끌고 미국 땅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이와 같은 문구로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천범(天範)이라는 황제가 있었다. 여기서 ‘천범’은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법통을 의미하는 것이니 보통들 생각하는 태조(太祖)라는 묘호와 맞먹는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천범이라는 황제에 대한 이전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왕위에 올랐을 무렵에 이미 자식을 두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 걸 보면 부인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즉위한 지 1년 뒤에 왕후를 맞아들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슬하에 있는 자식은 모두 전처의 소생임이 드러나는 셈인 것이다. 어쨌든 전처에 대한 행적조차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니 석연치 않지만 왕은 왕자 다섯에 공주 하나를 두었다. 그 중 왕자로 백경(白鏡), 윤기(胤基), 금운(錦雲), 명소(明昭), 원모(元模)를 두었으며, 공주로 유일하게 강운(江雲)만을 두었을 뿐이다. 특히 맏이인 왕자 백경이 총명하여 주위의 신하들로부터 무한히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때문에 금상의 덕망은 하늘을 감동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즉위한 지 십 년이 되었을 즈음. 천범 황제에게 근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늘그막에 왕실을 탄탄하게 다져놓지 않으면 후계 문제로 인해 나라가 어수선해질 소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료들을 불러다 의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전회의(御前會議)에 모여 의논하기로 마음먹은 금상은 내관으로 하여금 서둘러 신료들을 불러다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후 노소를 막론하고 신료들이 어전에 들어섰다. 신료들이 모두 도착하자 왕은 자신의 후사를 어떻게 정할 것이며 이들의 자질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지 등도 함께 의논하고자 한 것이다. 우선 나이 들어 노쇠하지만 총명한 신하 하나가 나선다. “신(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길응(吉應)이 아뢰나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뿐만 아니라, 조정 안팎에 신망(信望)이 두터운 왕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하옵나이다. 이를 헤아려보건대 상감마마의 장자이신 백경 왕자마마가 적당하리라 보옵니다.” “신 또한 그리 생각하옵니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길돌(吉突)이 이에 화답하였다. 그는 길응의 아우였다. “신들 또한 그러하옵니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같이 화답했다. 이날 어전회의에 참석한 신료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이러하다. 숭록대부(崇祿大夫) 장자성(張資星), 숭정대부(崇政大夫) 온희구(溫喜求), 정헌대부(正憲大夫) 이보고(李補顧), 자헌대부(資憲大夫) 허안(許顔), 가정대부(嘉靖大夫) 부억(夫抑), 가선대부(嘉善大夫) 고영랑(高英郞), 그리고 현 조정의 재상인 궁국(宮國)이 있다. 특히 궁국은 앞서 보았다시피 덕호가 손수 기증한 ‘책’을 연구한 노학자가 주장한 바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때 영의정(領議政)이라는 벼슬을 맡고 있었는데 이는 왕에 버금가는 실력가(實力家)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왕의 부재 시 잠시 동안이나마 왕의 정사를 대신 도맡는, 왕의 직권(職權)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대광보국숭록대부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왕이 잘못하다가는 폐위당하다 못해 왕실이 전복(顚覆)될 소지를 남기는 꼴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나 ‘책’으로나 그 정도의 전례가 보통의 역사서에서처럼 멸망 시기에 발견된 것 말고는 없기에 왕실의 안정은 당연시하게 보장된 것이다. 그밖에 궁국의 아들인 통정대부(通政大夫) 궁운봉(宮雲鳳)이 있다. 신료들의 지지에 힘입은 바에 의해 맏이 백경이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태자 책봉 소식에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비로 책봉된 바가 없어 지금의 왕후로 앉지도 못하고 별세한 부인 가씨(價氏)라는 여인의 소생이라는 것이 문제였고, 주변의 왕자와 공주들의 수가 많으며 모두 다 장성했기 때문이다. “대체 형님이 태자의 자격이 없다니. 누군가가 형님을 시샘하고 덤비려는 수작인가 보오.” 백경의 처소에서 육남매가 한 자리에 앉았다. 그중 윤기가 말문을 연 것이다. “이는 필시 인비(仁妃)의 소행인가 보오.” 셋째인 금운이 찬동하며 충동질을 부추겼다. 그러나 백경은 성정이 소탈해서 그저 허풍떠는 수작이려니 하며 웃어넘겼다. “형님, 웃을 일 아닙니다.” 두 오빠의 부추기는 말을 듣고서 강운 공주가 한소리 해대었다. “두 오빠는 성미도 어지간히 하시려구요.”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며 진정을 시켰다. 강운도 맏이와 같은 성품이고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나라가 세워진 지 어언 삼십여 년 되고 나라가 안정되었으나 왕비를 따로 책봉하지 않고 후실을 세 명이나 두었을 뿐이었다. 궁에서 일하는 내인 셋을 승은으로써 맞아들인 뒤 후사를 많이 보았다. 그 중 인비는 팔남매를 의비(義妃)는 구남매, 예비(禮妃)는 삼남매를 두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도 소년티에서 벗어나 경쟁자로서 백경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노릇을 어찌한다.” 아우들의 한숨소리를 듣던 백경의 눈동자에서는 서서히 알 수 없는 섬광(閃光)이 비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후궁들에게 총애하시며 비 자리를 주시는데 어머니에게는 왜 그리하지 못하셨는가? 그것이 백경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뿐인가. 이들 소생을 사랑하면서 왜 태자자리를 동생(배다른)에게 주지 않던가. 재위 삼십 삼년이 접어들어 왕은 몸져 자리에 누웠다. 쌍쌍이로 후궁들이 모여들어 울부짖고 했을 때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백경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고 하니 마지못해 모두들 물러났다. 황제가 백경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태자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 가까이에 입을 대니, “네가 이 아비가 죽을 때까지 정사를 전담해야 한다. 내가 내치(內治)에 힘쓰다보니 네 어미의 추숭(追崇)도 못했단다. 그러니 내치와 외치(外治)에 힘쓰되, 네 어미의 추숭도 힘써서 행하도록 하라.” 다음날 조회에 왕 대신 백경 태자가 정사를 담당하였다. 어미 가씨를 여느 빈궁처럼 ‘비’로 추숭하여 수비(修妃)로 봉하였다. 신료들의 반발은 없었다. 이윽고 한 해 동안은 순풍에 돛단 듯 백경의 정치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태자가 차츰 정세를 안정시키고 할 때, 백경을 후사로 삼은 것이 안심이 된 천범은 그제야 안심하시라고 조언한 어의(御醫)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황제의 병세는 극도로 악화되어 삼십사 년 정월에 천범 황제는 편안히 눈 감은 채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를 모시던 후궁들은 머리를 풀어 헤치며 청승스런 곡소리를 해대었다. 상은 열다섯 날 동안 이어졌고 선왕 때 모시던 조정 대신들은 같은 자리를 연임하도록 하였다. 황제가 새로 섰다. 백경은 황제로서 첫 권한을 행사했다. 신료들에게 선왕대의 후비들은 어느 누구라도 태후에 앉을 수 없으며 그 슬하의 왕손들의 역모혐의가 있을 시에 즉시로 처형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신료들도 이에 합세한다면 그 즉시로 처형하되, 일족을 멸문하여 그 이상의 죄를 묻지 않겠노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신료들을 장악한 것이다. 그 뒤 인사도 단행되었다. 좌의정(左議政)에 황자 윤기, 우의정(右議政)에 황자 금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황자 명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황자 원모를 임명하였다. 생모 수비 가씨를 천화왕후(天花王后)로 추숭하였다.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고 숙원(宿願)이기도 했다. 황제는 두 눈을 뿌리고야 말았다. 왜 이토록 어머니를 그렇게 대접해야 할 수밖에 없었는가. 천경의 분노는 여기에서 시작돼 걷잡을 수 없는 피바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정월이 지나 사월에 접어드니 산천초목에 새로이 기지개를 켜듯 초록색 물결과 내음을 맘껏 뿜어 싱그러움을 자아내고 개나리, 진달래, 왕벚나무의 꽃이 한껏 제 아름다움을 뽐내듯 피어나니 왕이 친히 신료들에게 이르니, “내 나이는 이제 서른이나 아직도 왕비를 두지 못하였다. 나는 이에 경들에게 이르노니 경들 가운데 혼기가 가득 차거나 이미 시집을 갔다 온 여식이 있다하면 불러다 놓고 왕비의 자질을 시험하고자 하니 누가 나서서 추천하시오.” 그러나 그 누구 하나 적극 나서는 대신이 없었다. 허나 왕 앞에 늙은 대신 하나가 무릎을 꿇으며 금상에게 고하기를, “폐하의 눈에 들지 못하겠으나, 아직 시집을 가지 못한 여식 하나 있사옵니다. 하오나 나이가 스물이 채 아니 된데다 몸집이 아담하여 왕손을 잉태하지 않을까 심히 저어되옵니다.” 대신 장자성이었다. “좋소! 내 경의 뜻을 흔쾌히 받아주겠소. 그 여식을 내게 데려다주시오!” 왕이 허락하니 장자성이 다음날에 딸을 왕 앞에 데려오니 미색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이 마치 고운 비단결과 같이 보이니 왕의 승은을 입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하여 왕은 그녀를 궐에 살게 한 뒤 이튿날로 왕후로 책봉하였다. 이이가 바로 덕공왕후(德恭王后)다. 덕공왕후가 보위에 인사한 뒤 옆자리에 앉자 왕이 말하길, “내 자네 생전에 만큼은 후궁 하나를 두지 않을 걸세. 그러니 내 자네를 푸대접을 않겠네.” 맹세한다. 왕비는 그예 기쁨의 눈물이 솟았다. 황제의 맹세에 왕후는 기쁜 마음으로 정중히 큰절을 올렸다. 훗날 왕비에 대해 사가는 평가한다. ―왕비는 황상에게 지고지순하고 만백성에게는 희로애락을 나누실 정도로 정이 많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재위 2년 4월 초닷샛날에 역모가 발생했다. 인비의 시중을 들던 나인 중 하나가 조정에서 일하던 오라버니와 금상을 폐하여 새로 왕위에 오르도록 인비 소생의 황자를 부추기는 일을 저질렀다. 이것이 왕의 귀에 들어가니, 지난날 형제가 이야기한 것을 가슴에 새겼기에 그 분노는 매우 컸다. “저런 고얀 것들이 있나.” 상의 분노가 온 정전을 울리고 그 즉시로 궐 안에 기거하던 선왕의 후궁인 인비, 의비, 예비가 있으면 모두 끌어다 폐하도록 하여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이틀 뒤에 유배 명령을 내리고 후궁의 소생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집안 곳곳에서는 비명소리가 그득하니 나라 안이 어수선하였다. 이윽고 황자들이 잡혀가니 이들을 들면 이렇다. 인비의 소생으로 윤형(胤亨), 해원(海瑗), 기창(基昌), 서길(瑞吉)이 있고, 의비의 소생으로 송정(松亭), 승안(承安), 시경(時經), 우운(雨雲)이, 예비의 소생인 백림(白林), 석윤(錫潤)이 있었다. 이들은 즉시로 군기시 앞에서 죽임을 당하니 오직 살아남은 이라고는 문범(文範) 황자가 유일하다. 유배 간 선왕의 세 후궁의 공주들은 모두 옹주로 격하하여 이들을 유배가 있는 후궁들의 앞뒤 살림을 도맡아 하도록 하였다. 옹주로 격하된 이들은 이러하다. 인비의 공주인 정인(正仁), 문용(文用), 육철(六徹), 의비의 소생 공주로 공보(恭寶), 고람(孤藍), 윤진(胤珍), 명혜(明慧), 현율(賢律)이, 예비의 소생 공주인 우옹(牛翁)이 있다. 같은 달 말에 문범 황자를 대군으로 책봉하여 대행왕비 가씨의 양자로 입적했다. 이에 왕족들이 반발하였으나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유월에 충훈부(忠勳府)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여 그 동안의 앙금을 풀어내었다. 정헌대부 이보고에게 군기시(軍器寺) 도제조(都提調)로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새로이 내각을 다지고자 함이었다. 군기시는 병기(군사무기)를 만드는 기구로서 왕실의 우환을 외부에 표출하고자 함이 역력했으니 왕의 의중을 깨우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이후 천화왕후의 조카인 가재서(價載瑞)가 정헌대부에 봉해졌다. 이보고가 군기시에 업무를 맡으므로 국가의 대소사에 대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 함이었다. 2년 12월에 중궁이 회임하였다. 어의들이 친히 진맥하여 아뢰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중궁에게 치하를 내리니 중궁이 화답하여 기뻐해마지 않았다. 윤기황자가 대군으로 책봉되었다. 지난날 문범황자를 대군으로 책봉한 전례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를 왕후로 추숭한 후에 가뜩이나 마음의 짐을 덜어야 했던 왕의 의지가 반영된 사례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병조판서에 임명토록 하며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병조가 국가의 병권을 중요시 하는 부서이니만큼 왕족들로 하여금 병권을 움켜쥐도록 독려하였다. 그 방편으로 금운황자를 비롯해 원모, 명소황자에게 대군으로 책봉한 뒤 각각 참판, 참의, 참지에 임명하여 병권을 확고히 하였다. 3년 정월 초엿샛날에 금상의 잠저에서 강운공주와 가재서가 혼례를 치렀다. 추운 날씨였고 날이 궂었음에도 사람들이 모여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왕의 우애가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비의 죽음이 전해졌다. 병환이 있어 배소에서 죽었던 까닭에 왕은 상을 조용히 치르도록 명했다. 이후 천화왕후의 묘소를 능으로 격상하여 ‘천화릉’이라 부르도록 했다. 인비의 상을 마친 뒤 문범대군과 장자성의 차녀가 혼례를 치렀다. 대궐 정전 앞뜰에서 치러진 결혼식이니만큼 왕도 친히 참석하니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정인옹주와 문용, 육철옹주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하여 사가에 살도록 명하였다. 3년 4월에 정인옹주에게 장자성의 아들 장국(張國)에게 혼사하도록 했다. 장자성의 집에서 치른 혼사였다. 그 뒤 나라 안의 혼란함을 들어 중국사신인 호 모가 아들 호판성(好板成)을 거느리고 귀화하고자 하니 이에 승낙했다.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호 모가 여독(餘毒)을 이기지 못해 병사함으로 호판성을 사복시(司僕寺) 제조(提調)로 명하였다. 과거가 시행되었다. 이번 과거에서 봉운무의 아들 봉용서(奉用瑞)가 과거에 급제하자 왕이 크게 치하해 마지않으니 그에게 사복시정(司僕寺正)에 명하여 문용옹주에게 배필로 주었다. 3년 유월에 병사한 육철옹주의 소식을 듣고 왕이 크게 오열하였다. 3년 가을에 세자가 태어났다. 훗날 후궁을 두지 않고 세자를 슬하에 두니 우환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인비 소생의 공주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가 하세하셨나이다.” 내관의 말에 상감은 근심에 젖었다. 갑작스레 전해진 변고가 전해져 후임을 물색하였다. 이에 물망에 오른 이가 온희구였다. 상감이 말하길, “전임 대부가 갑작스레 찾아온 병환인데다 노구의 몸으로서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하고자 했으니 어이 말로 형언하리오.”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지 않고자 노력했음을 시사한 대목이었다. 그리하여 후임을 온희구로 정하고 보국숭록대부에 장자성을, 군기시 제조에 도국,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온희구의 장남 온하수, 전설사제조(典設司提調)에 온희구의 차남 온일흥이 임명되었다. 선임 대광보국숭록대부 길응의 아우이자 길돌의 아들인 길보에게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밖에 궁국의 장남 궁호보에게 훈련원 지사(知事)로, 훈련원 도정으로 궁국의 차남인 궁보조에게 맡겼다. 의흥위(義興衛)에 감무(甘武)를, 용양위(龍衛)에 어송(魚松)을, 호분위에 도위를, 충좌위에 동방의시, 충무위에 옥보를 임명하였다. 훗날 금상의 유일한 혈육을 지키는 굳건한 세력으로 미리 키운 셈이다. 재위 5년 봄에 황자의 뒤를 이어 공주를 낳았다. 공주의 탄생으로 왕실에는 우환이 되어버린 자손에 대한 염려가 가셔지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가재서가 일가붙이인 장사랑(將仕) 가운(賈運)을 양자로 입적하도록 허락을 구하니 황제가 흔쾌히 승낙하였다. 재위 7년 황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갑작스레 전해진 비보에 원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왕비가 자진하고자 했지만 궁녀들이 한사코 말리고자 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 하며 왕비의 아픔도 같이 나누었다. 재위 9년에 공주도 세상을 떠났다. 왕자에 이어 공주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왕실의 근심이 더해갔다. 의비와 예비 소생의 옹주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왕권이 강화되어 정적에 대한 위협에서 자유로웠으리라고 본다. ―이후의 기록을 더듬던 학자들은 일부 기록이 판독하기 어려운데다가 기록이 누락되는 부분이 있어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판독이 쉬운 시점이 재위 22년의 일이다. 이때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잇따라 왕자와 공주를 여읜 채 상실감에 젖어 있던 왕과 왕후는 문범대군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듣게 된다. “소인에게 자식들이 많은데 제 자식들 중에 하나를 태자로 책봉하심이 어떠하신지요.” 대군의 슬하에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까지 장성하고 그 아래로 나이가 어리지만 부인 장씨와의 금슬이 좋아 자식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실의에 젖은 왕의 상심을 털어내고자 했다. “태자로 책봉하다니요?” 짐짓 모르는 체 하는 왕의 처지를 모를 리 없던 문범대군이 앞으로 나라의 후사를 든든하게 해야 함을 피력한 뒤 하루 속히 태자 책봉을 서두를 것을 주청했다. 왕이 심사숙고하여 재위 24년 문범대군의 장남 석윤군(釋允君)을 양자로 맞아 태자로 책봉되었다. 오랫동안 정사를 다스린 끝에 얻은 태평성세인 만큼 왕은 편안히 후사를 이을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이조차 없었다면 후궁을 따로 둘 수밖에 없었다. 재위 25년 태자의 배필로 가재서의 여식으로 맞이한 뒤 왕은 보위에서 물러나 상왕에 봉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신하들이 반대하니 이를 거두었다. 그러나 재위 27년에 왕의 병이 위중함을 내세워 의원으로 하여금 자신이 보위에 물러나게 하도록 천명하였다. 왕이 아픈 것을 눈으로 보던 신료들은 보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에 올랐다. 이에 보위에 오른 석윤군은(아니 석윤태자는) 자신의 왕호를 영효라 하였으며, 이미 문제가(즉위 초반에 일어난 문제) 있었던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조참의(吏曹參議) 세 사람을 유배 보내고 자신의 동생들인 윤성군(倫成君), 표선군(表善君), 구민군(丘民君)에게 이조판서, 이조참판, 이조참의에 제수하였다. 재위 2년 상왕의 동의를 얻어 문범대군의 소생들을 각각 왕자와 공주로 봉하고 문범대군을 대원군(大院君)에 봉했다. 그 부인의 지위를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높였다. 같은 해 상왕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자리보전한 끝에 세상을 떠나니 태후가 통곡하기에 이르렀다. 재위 3년 문범대원군에게 콩 1만 석과 쌀 4만 석을 하사하였다. 재위 5년 문범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간청이 있기에 왕은 마지못해 모든 관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순순히 승낙하니 생모의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재위 6년 생부가 되는 문범대원군이 병이 들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에 왕은 같은 형제의 뒷바라지를 맡을 것을 천명하여 이를 실행하였다. 재위 7년 윤기대군이 하세하니 슬하에 자식이 없기에 천표공주(天表公主), 인주공주(仁州公主), 그리고 구민군에게 양자로 입적토록 하였다. 뒤이어 명소대군과 원모대군이 연이어 하세한 이후 왕은 명소에게 금지군(金枝君), 홍운공주(紅雲公主), 인태군(仁泰君)을, 원모에게 창은공주(昌恩公主), 오현군(五絃君), 천영군(天英君)을 양자로 입적하도록 하였다. 재위 9년 중궁에게 후사가 없자 왕이 근심하였는데 신료들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기생들을 불러다 춤을 선보이도록 했다. 이때 자색이 뛰어난 기녀 하나에게 반하여 귀히 여기니 불러다 빈(嬪)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왕후가 근심하여 오라비에게 매달리니, “오라버니, 일전에 귀히 여기던 기녀 계월향(桂月香)이란 아이가 있소이다. 한데 그 아이를 대궐에 불러내어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내가 왕자를 잉태하지 못한 까닭이 있었기에 그리 된 줄을 알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라버니 가운이 망설임 없이, “이는 투기이옵니다. 임금이 후궁을 두는 것이 이 나라의,” 직언했으나, “오라버니,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내게 상의할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후궁을 불러들이다니요. 그것도 일개 기생을요. 생각사록 치가 떨립니다.” “그래도,” “예, 압니다. 알아요. 하나 더는 참기 어렵습니다.” 왕후의 안중에도 아랑곳없이 왕은 후궁을 불러들였다. 왕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계월향은 누구일까. 그는 일개 향리(鄕吏) 찰방(察訪)의 여식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열하나에 부모를 모두 여의어 천애고아가 된 뒤 스스로 기방에 들어가 기생이 된 사람이었다. 본시 자색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능했으며 세상의 이치 또한 통달하니 왕의 신임이 더욱 돈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중궁은 그녀에 비해 다소 뒤쳐진 면이 없지 않았으나 도성 장안에 이름을 날린 기생이었던 만큼 중궁의 근심은 나날이 깊어가고 만에 하나 후사를 얻게 되는 날이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것이다. 중궁을 뵙고 난 가운은 궐에서 나와 제 아랫것에게 은밀히 불러다 계월화의 뒷조사를 하도록 했다. 뒤에 계월화에 대한 정보가 밝혀지는데 본래 성이 ‘계(桂)’라는 성씨였고 ‘월화’는 기명이었으니 찰방 벼슬을 한 부친을 여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가운이 중궁에 고하니 한 고비는 넘겼다며 왕후는 안심하였다. 재위 10년 윤사월에 왕은 빈으로 책봉하여 혜빈(惠嬪)으로 봉하였다. 같은 해 시월에 아들을 낳으니 왕비는 낙담하여 바깥출입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왕비는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사사건건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혜빈 계씨가 아들을 생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중궁전(中宮殿)의 자리에 앉았다고는 하지만 태자를 생산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에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영락없이 폐위될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혜빈이 상감의 승은을 한 몸에 받을 것은 보지 않아도 환한 일이었다. 자신의 방 안에서 가운은 고뇌를 안 할 수 없었다. ‘대감,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부인 또한 걱정이 태산 같았기 때문이다. 왕비도 왕비지만 그 외척이 되는 자신도 못지않게 위협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깊은 밤 어두운 방 안에서 가운의 심사는 어지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결단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기력함을 보이면 상대방이 약점을 틀어쥐어 위협하기 때문이다. 양아버지인 가재서는 이 얘기를 듣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아버지를 대하노라면 가슴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망할지 모르는 것이 권력이다. 그걸 알기에 가운의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막(暗幕)으로 드리워진다. 재위 12년 가운을 내수사전화(內需司典貨)에 임명하고, 그 아비인 가재서를 좌참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가재서에게 좌참찬보다 높은 영의정을 맡도록 특별히 명하니 가재서가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왕이 말하길 “전임 영의정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후임을 찾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 가재서에게 맡긴 것이다.” 이후 왕이 한술 더 떠 왕비의 아버지라는 미명 아래에 부국부원군(富國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왕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혜빈이 낳은 태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왕이 곡하여 슬퍼하며 그 진상을 알아오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범인이 나타났으니 그 범인이 복면(覆面)을 쓰고 있어 벗겼다. 이에 왕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씨 집안에서 부리던 하인인 것이다. “소인은 왕후마마의 사주를 받아 태자를 독살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복(自服)하고 혀를 깨물어 죽으니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 소식을 들은 가재서는 왕의 진노에 놀라 어전 앞에서 죄를 시인하니 왕은 이를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한편 계씨는 “나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이냐.” 하며 참척의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슬픔은 깊고도 깊었다. 재위 13년 정월에 중궁이 회임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나흘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왕비가 분노하야 상궁은 물론,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니 왕이 분노하여 왕비를 찾아가 손찌검을 하였다. 그러면서 계씨가 독살한 것이 아니냐며 학을 떼었다. 왕비는 실성한 것이다. 가씨가 폐위되어야 마땅함을 비친 왕의 말을 듣고 신하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의 폐위는 안 된다며 극력 거부를 하였으나 왕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를 지키다 못한 가운이 나서기를, “폐하, 누이를 폐위하시옵소서.” 왕이 이를 듣고 눈물이 피어올랐다. “어째서요.” 왕비를 버리지 못하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가운이 왕의 의중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직언을 하니 말로 형언하기 힘든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제 누이가 어의들조차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으니 신의 마음을 일러 말해 무엇 하나이까. 차라리 폐위시키는 것이 폐하의 마음으로나 신들의 마음으로나 편할 것이옵니다.” “만에 하나 장인이 반대를 한다면 어찌하겠소.” 불안에 찬 왕의 눈을 보며 “신의 아비가 반대한다면 제 아비를 죽여서라도 집안과 왕실을 지킬 것이옵니다.” 왕은 그제야 끄덕이고 왕비의 폐위를 윤허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왕비의 폐위를 거두어달라며 연신 주청하였으나 왕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이틀 뒤에 가씨는 왕을 겁박하여 정사를 간여할 뿐만 아니라 후궁을 투기했음을 들어 폐출되어 쫓겨났다. 이를 듣고 가재서가 진노하여 아들을 불러다 호통을 치며 극력(極力)으로 막았으나 아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가출하여 새로 일가를 만드니 이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끊고야 말았다. 권력은 가재서와 가운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말았다. 기존에 조정에 몸 담근 사람들은 가재서의 편에 섰다. 이때 가운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이 없었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생각 끝에 혜빈 계씨를 찾아가 자신에게 힘을 보태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혜빈이 흔쾌히 응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계시지 않으나 자신의 아우가 있음을 들어 벼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가운은 자신의 집에서 계씨의 아우를 불러들이니 이름은 운관(雲觀)이었다. 계운관은 한미한 집안이었고 벼슬을 근처에 얼씬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 만에 하나 일이 성사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운에게 그나마 다행이 있다면 계운관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雲集)해있단 사실이다. 이들도 다 같이 운관처럼 조정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초반에 나라를 이끈 벼슬아치들은 모두 자신들의 인맥으로 조정의 모든 요직들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왕은 모두 이들의 손아귀에서 허수아비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형국이었다. 같은 해 삼월 중순. 야심한 밤에 계운관이 자신의 휘하에 거느리는 사병들을 이끌고 가운의 집에 행차하였다. 가운에게 찾아간 계운관이 직접 나서서 말하길, “나리, 나리의 명만 따르겠습니다. 제게는 사병이 많으니 과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운의 말 한마디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이때 가운은 끄덕이며 “그리하시게.” 대답했다. 이에 운관이 가운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고는 가운의 집 밖으로 나왔으니 사병들은 길을 가득 찰 정도로 매우 많아 수를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횃불은 온통 어두운 거리를 밝히다 못해 천지를 개벽할 정도였다. “역적 가재서와 그 일당들을 처단하라!” 운관이 외친 말에 따라 사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 안에 가운은 어두운 방 안에서 통회(痛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말이다. 이윽고 대궐에 들이닥친 사병들은 샅샅이 뒤져 왕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왕은 난데없이 들이닥친 반란군 때문에 몸서리를 치며 떨어야 했다. 궁녀들의 비명소리와 반란군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뒤죽박죽이 된 대궐은 온통 횃불이 비추고 있었다. 중궁전이 문을 닫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왕은 폐비의 안부가 궁금하였다. 이 와중에 폐비가 고생을 하고 있을까. 반란군에게 해를 입지나 않았을까. 그때였다. “폐하, 신 계운관. 폐하를 구하고자 이 자리에 왔나이다.” 왕에게 나와 알현을 청한 운관을 보고 두려워할 뿐이었다. “어, 어째서 처남이 이 자리에 왔나?” “신, 폐하를 해하려 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왕은 거품이 섞인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폐하를 뫼시고 전화 대감 댁에 피신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그때였다. 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운관은 군사를 시켜 왕을 업고는 서둘러 대궐을 빠져나갔다. 대궐에 빠져나오면서 계운관은 사병들을 두 패로 나누어 놓고 한 패에게 왕을 호위하여 가운의 집에까지 가도록 하고 다른 패들은 구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일하도록 명하였다. 운관이 이윽고 제 품에 무엇인가를 꺼내들었으니 바로 살생부였다. 살생부를 움켜쥔 운관은 인편으로 보내 모든 조정대신들에게 왕명을 구실삼아 대궐에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더니 조정대신들이 하나하나 들어올 때마다 모두 죽이기에 이르렀다. 어떤 이들은 호통을 치고, 어떤 이들은 살려달라며 애걸복걸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시체는 쌓일 대로 쌓이고 피는 강을 이루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가재서가 들어서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재서를 철퇴로 때려죽이니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구월에 이르러 폐비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어 사사(賜死)하였다. 십일월이 되었다. 가운이 자신의 집에 계운관을 불러 이르길, “혜빈도 폐출하여 사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운관이 반발하여 누이를 왜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혜빈이 죽은 폐비가 투기를 하도록 하는 빌미요, 또한 이에 대한 앙갚음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오.” 가운의 설득에 의해 계운관은 제 피붙이를 끊어야 한다는 압박에 못 이겨 왕에게 혜빈도 폐하기를 간하니 왕이 역시 한사코 반대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운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하자 왕이 이를 거스를 수 없어 혜빈도 폐비의 전례에 따라 내쫓아 사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슴 아프기는 계운관도 마찬가지였다. 가운과 계운관은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자리에 올랐고 가운을 영의정에, 계운관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왕족들도 죽고, 조정대신들도 죽었다. 대신 조정에 몸을 담근 당사자들만을 죽였을 뿐이다. 이에 왕은 후사를 염려하기도 했으나 실권을 움켜쥔 가운이 인태군의 차남을 양자로 입적하여 태자로 삼도록 하고 계운관의 여식을 태자비로 맞아들이도록 청하였다. 왕은 이제 힘없고 허수아비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도록 하니 훗날 장담황제(長潭皇帝)라고 불리는 이다.
―덕호 영감이 건네 준 책은 일부가 파손되어 읽기가 어렵다. 많은 학자들에게 수수께끼였다. 이는 보편적인 역사에 대한 도전이자 기존의 사관(史觀)을 뒤엎는 것이었으니 무모한 모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덕호 영감이 준 수수께끼 같은 역사책은 새로운 세계관을 터주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의를 남겨주지 못했다.
시대(時代)_03
서산군의 차남이 보위에 오르니 이름은 고성운(高成運). 대군의 아들로서 군(君)의 호칭조차 받아보지 못하였다. 태황태후와 황태후가 왕실의 어른으로 있어야할 법하지만 온 나라가 외침(外侵)에 시달려 두 명의 여왕이 희생된 비극으로 이어졌다. 주나라와 배달국의 중간에서 외줄타기를 일삼더니 배달국왕의 갑작스런 남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온 나라가 신음하였다. 갑작스럽게 보위를 물려받은 새 왕으로서는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실의 안정을 수습하기 위해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과 의견을 수렴하여 선왕인 예흥여왕의 시호를 혜종(惠宗)이라 하고 장례를 후하게 치렀다. 영의정 여범이 왕의 어머니를 왕후로 봉하고자 주청(奏請)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신공왕후(神功王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뒤이어 왕이 연호를 보원(寶元)이라 했다. 보원 원년 1월에 즈음해 연종대왕과 혜종대왕의 위패를 종묘에 배향하였다. 2월에 왕이 선왕의 장례를 마치고 나자마자 어머니 신공왕후에게 소덕황태후(昭德皇太后)에 봉했다. 3월에 배달국왕 양운의 태자 갈고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도(王都)를 장당경(藏唐京)에서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왕이 이에 매우 기뻐하며 장당경을 점령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4월에 주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배달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도록 명하고 배달국왕에게 화의(和議)를 청했다. 그러자 영의정 여범이 불문곡직하고 반대하였다. “물론 연종대왕의 처사가 온당(穩當)하지 않은 바 있사오나 배달국왕의 처사는 도에 지나침은 두말할 나위 없나이다. 하오니 화의는 부당하옵니다.” 그러자 윤온이 “화의는 지당하옵니다. 온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내치(內治)를 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옵니다.” 하며 화의에 찬성하니, 조정의 대신들이 당쟁(黨爭)하기에 이르렀다. 여범을 대표로 한 이들이 보수파를 형성하고, 윤온을 대표로 한 이들이 온건파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보수파가 영의정이 수장으로 있는 만큼 본격적으로 정국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또, 온건파에서는 여범을 ‘늙은이 괴수(魁首)’라 하여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5월에 강원도에 황태후의 존호를 따서 소덕사라는 절을 지었다. 이 절을 상운도(祥雲道) 깊은 산에다 지었는데 행궁(行宮)으로 정하여 왕실로부터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6월에 장남을 잃은 홍가가 자식을 잃은 비통함에 이기지 못하여 여범의 편에 서서 왕에게 배달국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글을 올리니, 왕이 분노하여 근신하도록 명했다. 7월에 치른 과거에서 여범의 아들 여규상(呂規商)이 급제하였다. 왕이 이에 중대성우상(中臺省右相)에 명했다. 9월에 영의정 여범이 하세하자, 왕이 길돈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좌의정에 문길구, 우의정에 천위사, 좌찬성에 설국의, 우찬성에 안미생, 좌참찬에 동방소, 우참찬에 송찬수, 의정부사인에 궁소지, 의정부검상에 홍가, 의정부사록에 궁영만을 임명하고 이조좌랑에 장고를 명했다. 10월에 죽은 전언대군의 아들 위정군을 왕위에 옹립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자 영의정이 이를 문제 삼아 역모로 다스릴 것을 명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위정군과 구렬군을 잡아 국문하고 이튿날에 처형하였다. 이로써 전언대군의 일가가 몰락했다. 살아남은 후손들은 산천초목(山川草木)에 숨어 지내게 되어 상민(常民)이 되었다. 11월에 역시 죽은 연흥군의 장남인 민송군을 옥좌에 오르게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여 영의정이 민송군을 비롯한 연흥군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기를 명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이튿날로 국문하여 즉시 처형하였다. 다만 유정옹주와 유민옹주만은 살아남아 각각 선산공주(善山公主)와 덕실공주(德實公主)로 봉하였다. 이후 두 공주를 배달국왕의 후실(後室)로 보내니 이후의 생사가 불명이다. 연흥군의 아들들이 낳은 자손들은 모두 산천초목에 숨어 살아 상민으로 살았다. 이로써 연흥군의 일가가 몰락하였다. 12월에 여규상을 중대성시중에 명했다. 이후 왕이 중대성의 인사를 단행했다. 중대성좌상에 설준, 중대성우상에 장고, 중대성좌상시에 권미생, 중대성우상시에 남송국, 중대성좌사정에 정흥, 중대성우사정에 박구, 중대성간의에 구덕수, 중대성내사에 장수, 중대성조고에 방수호, 중대성사인에 주만식을 명했다. 보원 1년 정월에 온국을 청정대부에 명하고, 초정술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황승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만원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명하였다. 이월에 황태후의 명에 따라 왕비를 맞이하도록 했다. 왕이 서상안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서씨(徐氏)에게 숙헌왕후(淑憲王后)라 봉하였다. 삼월에 한양군부인이 별세했다. 왕이 아들인 소인군에게 상을 치를 것을 부탁했으나 소인군 또한 병환에 시달리므로 점성군에게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했다. 사월에 한양군부인의 장녀인 왕일옹주를 도창의 배필로 보냈다. 오월에 영의정 길돈이 별세했다. 왕이 이에 온국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유월에 좌의정 문길구가 하세했다. 후임에 백두봉을 명했다. 영의정과 같이 어느 당파에 속하지 않은 중도적 인물이다. 칠월에 청정대부를 혁파했다. 이는 전조의 관제이기 때문이다. 구월에 중대성을 혁파할 것을 명하고 중대성의 인사들에게 면직을 명했다. 의흥위와 용양위의 관직을 백성들에게 두루 맡기게 할 것을 명했다. 이는 각 군대의 기강이 확립되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어 왕이 호분위(虎賁衛)의 인사를 단행했다. 호분위는 기존의 오위와 의흥위, 용양위의 관제에 따랐으나, 이때에 이르러 호분위부장(虎賁衛部將) 아래에 호분위부사과(虎賁衛副司果)를 두게 했다. 부사과에는 각 도의 백성들 가운데 용맹한 사람을 선발하여 배치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호분위장(虎賁衛將)에 여규상, 호분위상호군(虎賁衛上護軍)에 설준, 호분위대호군(虎賁衛大護軍)에 장고, 호분위호군(虎賁衛護軍)에 권미생, 호분위부호군(虎賁衛副護軍)에 남송국, 호분위사직(虎賁衛司直)에 정흥, 호분위부사직(虎賁衛副司直)에 박구, 호분위사과(虎賁衛司果)에 구덕수, 호분위사정(虎賁衛司正)에 장수, 호분위부사정(虎賁衛副司正)에 방수호, 호분위사맹(虎賁衛司猛)에 주만식, 호분위부사맹(虎賁衛副司猛)에 정헌대부 초정술, 호분위사용(虎賁衛司勇)에 자헌대부 황승, 호분위부사용(虎賁衛副司勇)에 숭록대부 이만원을 임명했다. 호분위의 기강이 문란해짐을 한탄해한 병조판서의 고견(高見)을 듣고 왕이 명했다. 십일월에 배달국왕의 간청에 따라 왕이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의 수장에 전례에 따라, 영의정이 나섰고 부사(副使)로 좌의정과 우의정, 그리고 병조판서가 따라나섰고 용양위의 군대의 호위를 받아 수도 아사달로 향했다. 때마침 추위가 엄습한 까닭에 보통 때보다 늦게 지체되어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이에 배달국왕이 직접 사신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아사달은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건너에 위치해 있으니 압록강의 이남은 선사국의 영토가 된 지 오래된 셈이다. 보원 2년 정월에 사신들이 돌아왔다. 왕이 이들을 환영했다. 그런데 사신들이 돌아오는 길목에 배달국에서 농구(農具) 오백만 개와 죽간(竹簡) 오십만 개, 그리고 필묵(筆墨) 이십만 여개를 가지고 왔다. 왕이 직접 살펴보니 배달국의 농구는 이전 주나라의 농기구보다 성능이 월등했다. 하여 배달국왕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왕이 본국에서 재배한 황마(黃麻) 오십만 여포를 배달국에 보냈다. 이월에 황하여왕과 예흥여왕의 실록의 편찬을 마쳤다. 삼월에 영의정이 별세했다. 후임으로 천위사가 임명되었다. 오월에 좌의정이 별세했다. 후임으로 설국의를 명했다. 왕이 이후 의정부의 인사를 임명했다. 우의정에 안미생, 좌찬성에 동방소, 우찬성에 송찬수, 좌참찬에 궁소지, 우참찬에 홍가, 의정부사인에 궁영만, 의정부검상에 남궁의를 명했다. 유월에 왕후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왕이 아들의 이름을 승안(承安)이라 하고, 대군으로 삼았다. 구월에 태완대군이 천수를 누리게 되어 세상을 떠났다. 왕이 태완대군의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했다. 십일월에 황태후의 명으로 왕의 후궁을 간택하였다. 구덕수의 딸 상궁구씨가 먼저 승은을 입어 의비(義妃)에 봉하였고, 그 다음에 방수호의 딸 주변궁방씨를 예비(禮妃)에 봉했다. 그리고 대문의 딸을 맞이하여 지비(智妃)에, 편상우의 딸을 신비(信妃)에 봉하였다. 보원 3년 정월에 의비에게 회임(懷妊)의 증상을 보였다. 이에 왕후가 자신의 아이를 해할 것을 우려해 독살하려고 하자, 황태후가 대노하여 왕후를 정연궁에 유폐시켰다. 뒤이어 예비로 하여금 대군을 키우도록 명했다. 이월에 영의정 천위사가 사망하자 설국의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삼월에 좌의정에 안미생, 우의정에 동방소, 좌찬성에 송찬수, 우찬성에 궁소지, 좌참찬에 홍가, 우참찬에 궁영만, 의정부사인에 남궁의, 의정부검상에 권흥,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에 민구종을 명했다. 구월에 의비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이름을 시경(時經)이라 하고, 후궁의 소생임을 들어 군(君)이라 봉하였다. 이후 왕이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왕후의 소생을 대군으로, 후궁의 소생을 군에 봉하도록 하는 신법을 만들게 했다. 십일월에 황명(皇命)으로 새로이 법전을 만드니, 보원법전(寶元法典)이라 하였다. 십이월에 정연궁에 유폐된 왕후가 나왔다. 보원 4년 정월에 영의정 설국의가 죽었다. 이에 왕이 영의정에 안미생, 좌의정에 동방소, 우의정에 송찬수, 좌찬성에 궁소지, 우찬성에 홍가, 좌참찬에 궁영만, 우참찬에 남궁의, 의정부사인에 권흥, 의정부검상에 민구종, 의정부사록에 장수를 명했다. 이월에 왕후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황자의 이름을 우운(雨雲)이라 하고 대군에 봉하였다. 삼월에 이조의 인사를 단행했다. 이조판서에 장고를, 이조참판에 임영우, 이조참의에 옥창, 이조정랑에 유동민, 이조좌랑에 고만술을 명했다. 사월에 돈령부의 인사를 단행했다.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강찬,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만원, 지돈령부사에 황보진, 동지돈령부사에 신공신, 돈령부도정에 신원빈, 돈령부정에 성우지, 돈령부부정에 손철은, 돈령부첨정에 배국, 돈령부판관에 염건식, 돈령부주부에 서가교, 돈령부직장에 송찬수, 돈령부봉사에 박구, 돈령부참봉에 장고를 명했다. 오월에 치른 과거에서 여러 인재들이 급제했다. 장수의 아들 장대인(張大仁), 구덕수의 아들 구중(具中), 방수호의 아들 방서(方瑞), 주만식의 장남 주영덕(朱寧德), 백서의 아들 백선길(白善吉), 백의의 아들 백한설(白漢卨), 백의송의 장남 백자연(白紫燕), 현청의 아들 현맹길(玄孟吉), 안미생의 장남 안득(安得)이 급제하였고, 호분위호군에 있는 권식의 아들 권미생이 다시 시험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들을 모두 문무시관(文武試官)에 명하였는데 이는 전조의 관제다. 뒤이어 예비가 아들을 낳았다. 왕은 황자의 이름을 백림(白林)이라 하고 군에 봉하였다. 칠월에 지비가 아들을 낳았다. 왕은 황자의 이름을 석윤(石允)이라 하고 군에 봉하였다. 구월에 황태후의 명에 따라 배충의 딸과 홍흥선의 딸을 후궁으로 임명하니 각각 공비(恭妃)와 경비(敬妃)에 봉하였다. 이렇듯 황태후가 후궁들을 맞이한 것은 왕실의 안정이 중요한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십일월에 왕후에게서 딸이 태어났다. 왕은 이름을 정인(正仁)이라 하였다. 십이월에 인비에게서 딸이 태어나자 왕이 문용(文容)이라 하였다. 왕이 왕후의 딸을 공주(公主)로, 후궁의 딸을 옹주(翁主)라 부르게 하여 신법으로 삼을 것을 명했다. 보원 5년 정월에 삼도도사, 사도도사, 오도도사, 육도도사의 직제를 혁파했다. 이는 본조(本朝)의 북방이 안정됨에 따라 전조의 제도가 시류(時流)를 타면서 거스른 때문이다. 이월에 중중정의 직제를 혁파하였다. 대중정의 직제와 같으며 전조의 제도이므로 내린 결단이었다. 중중정의 업무를 의정부에서 일임하도록 명했다. 삼월에 소중정의 직제를 혁파하였다. 중중정의 직제와 같으며 전조의 제도이므로 내린 결단이었다. 소중정의 업무를 의정부에서 일임하도록 명했다. 사월에 서손상, 상장, 정토장군, 좌사정좌윤, 좌사정우윤, 대대로, 우사정좌윤, 우사정우윤, 태자대부를 혁파하였다. 이는 전조의 제도이므로 현 조정의 실상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연이어 직제들이 혁파하자 전조의 관리들이 들고 일어나,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왕이 대노하여 잡아들여 즉결로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국적으로 헤아리면 이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온 나라의 땅이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그뿐인가, 온 도성의 공기가 피 냄새로 진동하여 백성들이 코를 막고 지나갈 지경이었고 도성 바닥에는 온통 처형당한 사람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삼월에 왕후가 대군을 낳았으나 두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왕후가 이 때문에 상심이 컸기에 왕과 황태후가 직접 위로를 해주니 그제야 안심하였다. 칠월에 예비가 아들을 낳았다. 왕은 이에 문범(文範)이라는 이름을 지어 군으로 삼았다. 팔월에 지비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처음에 육철(六哲)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나 황태후가 이름이 좋지 않다며 거부하였다. 이에 왕이 공보(公寶)라는 이름을 바꾸어 짓게 했다. 구월에 인비가 딸을 낳았다. 이에 왕이 고람(高覽)이라는 이름을 지어 옹주로 삼았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 보원 6년에 왕후에게서 공주가 태어났다. 이에 왕이 윤진(倫進)이라고 이름 지었다. 보원 7년에 왕후에게서 공주가 태어났다. 이에 왕이 명혜(明惠)라고 이름 지었다. 보원 8년에 왕후에게서 공주가 태어났다. 이에 왕이 현율(賢栗)이라고 이름 지었다. 보원 9년 정월에 영의정 안미생이 죽자, 후임에 동방소를 임명했다. 2월에 왕후에게서 대군이 태어났다. 이에 왕이 이름을 우옹(雨邕)이라고 이름 지었다. 3월에 치른 과거에서 양민들이 급제하였다. 감무(甘武), 어송(魚松), 가운(賈運) 세 사람이 급제하였다. 왕이 이들에게 종사랑(從仕)에 봉하였다. 4월에 예비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왕이 윤성(倫成)이라는 이름을 지어 군으로 삼았다. 5월에 지비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왕이 표선(表善)이라는 이름을 지어 군으로 삼았다. 6월에 인비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왕이 구민(丘敏)이라는 이름을 지어 군으로 삼았다. 보원 10년 동방소가 죽고, 영의정에 송찬수를 명했다. 보원 11년 송찬수가 죽고, 영의정에 궁소지를 명했다. 보원 12년 궁소지가 죽고, 영의정에 홍가를 명했다. 보원 13년 홍가가 죽고, 영의정에 궁영만을 명했다. 보원 14년 궁영만이 죽고, 영의정에 남궁의를 명했다. 보원 15년 남궁의가 죽고, 영의정에 권흥을 명했다. 보원 16년 권흥이 죽고, 영의정에 민구종을 명했다. 보원 17년 정월에 민구종이 죽고, 영의정에 장수를 명했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왕의 치세가 길어질수록 백성들은 지난날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아픔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본업에 힘썼다. 한양부는 물론, 경기도의 현감(縣監) 현령(縣令) 목사(牧使) 등 모든 외직들을 식견이 높거나 명망이 두터운 양민들로 하여금 임명하도록 의정부에 명하였다. 보원 18년 정월에 왕이 영의정 이하의 의정부 인사들을 임명했다. 좌의정에 장고를, 우의정에 임영우를, 좌찬성에 옥창을, 우찬성에 유동민을, 좌참찬에 고만술, 우참찬에 강찬을 명했다. 돈령부의 인사가 명예직(名譽職)임을 들어 판돈령부사인 이만원이 돈령부의 수장으로 겸하게 했다. 이번 인사는 온건파라 불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이어졌으며, 이전의 인사들이 모두 강경파(講經派) 일색으로 이루어진 조정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징조였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 - 끝
천추千秋
재위 20년을 맞이하는 임금이 태자를 불러다 놓고 신료들에게 명했다. 『짐은 병이 들어 더 이상 정사를 감당하기 어렵노라. 이에 태자로 하여금 후계를 잇도록 할 것이로되, 경(卿)들은 이를 삼가 받들어 대보를 전달하라. 그리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왕은 태자가 장가를 가지 않아 늘 근심하였다. 이에 태자비를 초재의 딸로 세울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왕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가 혼례를 치르지 않은 채. 새로 왕위에 오른 뒤 태자는 대행왕(大行王)의 상을 어떻게 치를지에 대해 의논하도록 했다. 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한성부판윤 신 동방우, 아뢰나이다. 상을 치를 거면 삼일상을 치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보옵니다.』 『어째서요.』 『상을 오랫동안 치른다면 국가의 재정이 궁핍한 이때에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한성부좌윤 신 동방종, 같은 의견이로소이다.』 『한성부우윤 신 동방진, 같은 의견이옵니다.』 『한성부서윤 신 동방위, 공감하옵니다.』 그러나 반발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한성부판관 신 초항이 아뢰옵니다. 상가의 예법이 제후가 상을 치르면 삼년 이상은 치러야 한다고 하옵니다. 하니.』 그러자 한성부주부 초발이 반발하였다. 『나라의 재정은 어찌하구요.』 한성부참군 초포다와 영돈령부사 박천보가 같이 반발하였다. 그러자 판돈령부사 안백호가 『재산이 궁핍하다고 하면 조정대신들이 솔선수범하여 재산들을 왕실에 바친다면 왕실의 재정인들 걱정하리까.』 이에 지돈령부사 구령, 동지돈령부사 궁양동, 돈령부도정 궁소동, 돈령부정 장윤, 돈령부부정 고남노, 돈령부첨정 온제, 돈령부판관 도영, 돈령부주부 이만덕, 돈령부직장 이영덕, 돈령부봉사 옥상, 돈령부참봉 민봉부가 몸소 왕실에 자신들의 재산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다음날 아침에 왕 앞에 재산들을 모두 바쳤다. 이에 『대행왕에게 시호를 내려 충종이라 봉하여 종묘에 배향할 것이며, 전왕 덕의의 장례를 치르도록 한다.』 왕이 명하자 신하들은 의아해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덕의를 쳐낸 대신들은 전전긍긍, 불안에 휩싸이는 것이다. 덕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왕의 간곡한 설득에 의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으며 덕의의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르도록 하였다. 빈소는 흥국사(興國寺)에서 치르도록 명하였다. 생전의 덕의공주가 불가에 독실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녀가 다닌다는 절이란 절을 수소문해 찾아가 불공을 드리게 되어 일상화가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왕은 왕좌에서 폐위된 덕의공주의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하였으며 혜훈(惠勳)이라는 승려를 불러다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했다. 이에 일부 대신들이 반발하였다. 폐주에게 장례를 치르게 하는 것은 가당치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궐에서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덕의공주에게 장사를 치르기만 할 뿐이었다. 장례가 끝나자 혜준이 두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생전에 덕의공주 마마께서는 태어날 적부터 궁 정승의 혼에 덮인 것 같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덕의공주가 죽은 후 덕명대군 부처를 모셔와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바로 충종이다. 그의 왕비는 왕후로 봉해졌다. 왕은 충종 재위 시절부터 낙향했던 부군이자 전임 노량도승으로 지내온 궁호가 찾아와 왕에게 인사하였다. 그러나 왕은 아버지의 지난날에 가슴 아파하며 외면하였다. 외면하며 말하길, 『나는 객사에 유폐되면서 칼을 갈아오신 아버지를 보았소. 나는 아버지의 덕의의 파멸을 몸소 느끼려고 애를 썼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었소. 참 박복한 인생이셨잖소. 덕의공주는 초반에 선정을 베풀 듯 하시다가 악정을 베푸셨으니 그 죗값이 얼마나 혹독한지 아실게요. 난 젊어서 그 한많은 삶을 사셨던 아버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헛헛한 마음에서 해방되었을 지 모르오. 그러나 나는 그런 아버님을 지키기 못했소, 그런 아버님을 지키지 못했소!』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는 왕의 모습을 보는 궁호의 눈에서는 연민이 드리워진다. 그 연민은 왕의 번민에 허덕이는 마음씨를 헤아리는 것과 같았다. 그는 혜훈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그런 혜훈에게서 비밀로 해달라고 간청했는데 그건 바로 선왕이 밤이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이었다. 선왕은 오랫동안 강원도에 머물다가 한성부로 돌아와 자애궁으로 왕실의 거처를 정하였다. 그런데 밤만 되면 왕의 거처인 자애궁 매화당(昧化堂)에는 덕의공주의 혼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왕에게 나타나서는 왕에게 호령하다 못해 뺨을 마구 때리는 것이다. 그러다 못해 자신의 품에서 칼을 빼들고는 왕에게 위협을 하며 왕위를 내놓으라고 이르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왕은 건강이 악화일로로 좋지 않게 되고 보니 그곳을 무시로 관리하는 관리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해 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것을 두고 왕이 자책하는 것이다. 궁호가 왕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에 왕이 한밤중에 궁호를 데리고 나와 후원으로 거닐며 나와 그곳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서는 슬픔이 더하는지 달이 휘영청 뜨며 후원에 연못에 비친다. 그 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게 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분을 토한다. 「야속하고 야속하구나.」 왕의 야속함은 더욱 그를 폭군으로의 행적을 부추기에 충분했다. 재위 2년 경기도에 감영을 세우고 인사들을 임명하였다.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동방섭,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에 동방존, 경기도검률(京畿道檢律)에 동방자, 경기도심약(京畿道審藥)에 궁호를 임명하였다. 재위 3년 오위도총부라는 기구를 신설하였다. 오위의 군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우려한 왕이 이에 직접 명하여 세운 것이다. 이에 인사들을 임명하였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강찬을,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향길을, 오위도총부경력(五衛都摠府經歷)에 천무,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노조성을 명하였다. 그리고 왕의 친위군대인 내금위를 설치할 것을 명한 뒤 인사를 단행하니,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주현우를 명하였다. 그리고 국왕을 호위하는 군대를 새로 신설하고자 겸사복이라는 기구를 만드니 그 수장인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설정을 명하였다. 이에 임명된 이들은 모두 문무에 두루 능통한 수재로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하여 왕이 이를 신임하여 임명을 단행한 것이다. 그밖에 대광보국숭록대부에 김동탁이 임명되었다. 이때 야심한 밤이 찾아왔다. 궁호는 새로 관직을 얻고 나서 정무를 마칠 때면 늘상 절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거의 집처럼 드나들다시피 했다. 궁을 나선 궁호는 부인인 덕의공주의 넋을 기리는 것을 전제로 혜훈에게 수소문해 무당을 불러들이게 했다. 덕의의 넋을 입었다는 무당이 나타났다. 이윽고 무당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혜훈이 바로 무당에게 굿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덕의공주의 넋이 들어왔는지 자신의 살아온 이력과 자신의 억울함을 넋두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덕의공주의 혼은 무당과 일체되어 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진정 내 부군이더냐! 나를 배신하고 이 천하에 악독한 놈!」 그 말에 궁호는 『당신이 내 부인이었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온갖 권세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었소, 한데 옥좌에 빼앗다시피 올라가더니 피에 굶주린 호랑이마냥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소. 그뿐이오? 대궐에 무당들을 불러다 굿판을 벌여놓고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굶겨 죽이지 않았소.』 「네 이놈!」 『네, 내가 그렇게 욕을 먹고도 남소이다.』 「네놈은 내 그것을 모를 것이다. 이 궁씨 집안에 시집을 온 날부터 우환이 서려 있었다. 그 우환을 어찌 풀 수 있을꼬.」 궁호는 묵묵히 그녀의 넋두리를 듣기만 한다. 「덕의가 이리 억울하게 죽은 것은 내 조상들이 바로 궁씨 집안의 핍박하여 박해를 받은 것이다. 그에 더하여 핏줄을 물려받으니 그 죄업을 물려받아 원수의 집안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큰 족쇄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 집 사내와 정을 통했다. 난 그런 너를 말려 죽이려고 했다. 그런 사람을 죽이는 명분을 밝힌 것 뿐이다.」 그것은 자기합리화였다. 덕의공주의 모친이 근심한 것을 모른 채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덕의의 비참한 최후를 예언한 도사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덕의는 그런 부군의 야속한 심사를 저주하듯 악을 쓰며 울었다. 「나는 광야를 헤매고 있다.」 자신에 대한 회한을 남기고 덕의는 떠났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한 부인을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비통한 마음을 느낀 듯 증오라는 찌꺼기로 더럽혀진 몸을 흔들 듯 오열하였다.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며 덕의의 넋을 위로한 혜훈이 궁호로 하여금 집으로 가 머물 것을 권했다. 사흘 뒤 흥국사에 다시 찾아왔던 궁호는 불당에 이르러 혜훈을 불렀다. 『혜훈, 나일세.』 『대감, 어인 일이십니까.』 이에 궁호에게 절을 드린 뒤 안부를 묻는다. 그러나 궁호는 시종일관 무엇인가 단단히 벼르는 눈치였다. 『일개 부처님의 법력을 가르치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자네가 법력을 거슬러 현혹할 줄이야.』 이때 혜훈이 당황해한다.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일개 불도는 죄를 씻으라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왜 내 부인인 덕의공주의 죄를 덮으려 하는고. 그 죄를 씻어야 마땅히 사바세계에 다다른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혜훈이 자네가 진정 진리를 거스를 셈인가. 게다가 그 대가로 사통을 했다지.』 사통을 했다는 것은 덕의공주의 옛 몸종과의 관계를 말한다. 덕의공주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자 흥국사에 머물렀는데 매번 대행왕이 절에 자주 찾아와 덕의공주로부터 수모를 당한 것을 씻기 위해 불공을 드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몰래 절에서 수도하는 여자를 멀리 시골로 피신하게 하고 당분간 무당으로 변장하며 지내라고 일렀다. 그리고 대행왕이 세상을 떠나자 혜훈이 공공연하게 여자를 불러들였는데, 그와 살림을 차려 관계를 하며 궁호와 공모를 한 것이었다. 이를 모를 줄 알았던 혜훈의 얼굴에선 낭패를 봤음을 역력히 나태내고 있었다. 궁호는 덤덤히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눈치를 알아보았네. 바깥에 군사들을 배치해놓았으니 이제 순순히 죄를 자복하도록 하게. 그리한다면 면죄가 될 것이오, 아니면 죽음을 당할 걸세. 그리 알고 내 자네의 성심을 믿겠네.』 궁호의 말에 이윽고 혜훈이 순순히 군사들에게 끌려가 국문하였다. 덕수는 순순히 국문에 응했다. 자신의 진실을 밝혀 회개하고자 했다. 궁호의 주도로 이루어진 국문을 응한 과정에서 덕의공주에 대해 당황한 내색을 보였다. 신하들은 일제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덕의공주는 넋을 통해서나마 생전에 궁호에 말하듯이 남자를 말려죽이어 죽음을 이끄는 파멸의 힘을 지니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 파멸의 힘에 의해 혜훈은 갑작스레 남편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덕의공주의 넋을 지켜야 했음을 실토했다. 이에 분노한 왕은 혜훈의 입이 민심을 현혹하게 하고도 남는다며 즉시 처형을 명하였다. 군기시는 덕의가 왕이 되고 난 뒤부터 친히 죄인들을 문초하는 전각으로 쓰였다. 그런 곳에서 혜훈은 궁호의 배신을 한탄해 하며 울부짖었다. 이윽고 저잣거리 밖에서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추풍낙엽처럼 효수되었다. 이후 궁호는 왕의 신임을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그 뒤 백성들은 저마다 군기시 앞에 목덜미를 거꾸로 걸어놓은 혜훈의 효수당한 머리를 향해 돌로 힘껏 던지기 시작했다. 그 원성은 가히 대단했다. 재위 4년 오월, 왕이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좌도수운판관에 궁보사, 가정대부에 백덕을, 우도수운판관에 봉길조를, 해운판관에 초말, 노량도승에 초반, 낙하도승에 황보진, 벽란도승에 초자, 삼전도승에 초비, 양화도승에 초재, 임진도승에 초마, 한강도승에 초하, 한성부판윤에 초조, 한성부좌윤에 초방, 한성부우윤에 궁안, 한성부판관에 궁배를 명했다. 같은 해 칠월에 조선(고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사신 복달이 찾아왔다. 이들은 선사왕조와 국교를 원했다. 그러나 왕이 국력이 쇠하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이에 복달은 국교를 하지 않으면 선사왕조의 변방에 침입할 것을 선언하니 왕은 물론, 신하들이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면 나흘 뒤의 시간을 줄 것이라고 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조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조회를 통해서 의논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사신이 돌아간 다음 날, 조회를 열었다. 이때 여러 의논이 오고 갔다. 신하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조선과 화평할 것을 주장하는 부류와 조선을 정벌하는 부류였다. 화평을 주장하는 이들은 왕도 의식한 바와 같이 국력이 쇠함을 들어 병력을 확충하는데 어려움을 호소했고 조선을 정벌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들대로 강원도 변방에 침입을 많이 받아 백성들의 고초가 심하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군대의 병력이 부족한 점이 많아 생긴 결과였다. 왕이 영의정 고태수에게 명하여 백성들에게 군인으로 들어올 것을 독려하는 한편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들로 하여금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도록 조치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 조선은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곳을 다스리는 이가 환인이라 일컫는 안파견이었다. 안파견이 복달로 하여금 선사왕국에 국교를 요구한다면 무조건적인 조공을 요구하고자 하는 속셈도 지니고 있었다. 그 속셈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영의정 고태수는 왕에게 정중하게 거부하는 수순을 밟게 한 것이다. 이를 안 안파견은 대노하여 강원도 변방인 안협(安峽)과 이천(伊川) 두 지역을 수차례 침략하였다. 여기에 살던 백성들 중 대부분이 모두 약탈과 살인을 당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그리하여 왕이 벽란도승에게 백만 대군을 보내어 황해도 지역을 정벌하도록 명하니 벽란도 변방에 안파견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참패를 당해 지금의 평안도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윽고 왕이 직접 복달을 목 베어 죽인 뒤 그 머리를 안파견에게 넘기며 말하길 『무리하게 제 백성들을 충동질하여 우리 안협·이천의 양민들을 모두 살육하고자 했으니 그 악랄함에 치를 떨었다. 그 악랄함에 화를 참지 못하는데 어찌 너희 나라와 화친을 한단 말인가. 그대의 우둔함을 되돌아보아 참회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다시는 우리 백성들을 착취하지 말지어다.』 이에 환인 안파견이 왕의 성품에 감탄하여 다시는 강원도 지역을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한다는 친서를 보내왔다. 이에 왕은 차후 십 년 뒤에 국교에 관한 일을 의논하도록 약속하였다. 재위 5년 주나라 무왕의 군대가 침입하였다. 지금의 수원 지역에 침략하여 그곳 백성들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에 해운판관에게 명하여 주 무왕의 군대를 격퇴할 것을 명하였다. 군사를 일백으로 보내어 두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번번이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자 정말다가 주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를 마다하였으나 정말다는 직무가 한가함을 들어 사신으로 나설 것을 자청했다. 장사랑 겸 자여도역승에 임명된 옥상도 같이 동행해 갈 것을 명한 뒤 이튿날로 보냈다. 그러나 주나라에 보낸 사신들이 돌아와서 말하길 적반하장으로 자신이 금상보다 더 높은 천자이니 제후로서 예를 다해야 함을 꾸짖었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여 지금의 마고성에 점거하고 있는 주나라의 군대를 물리치도록 하여 군사들에게 공격하도록 명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었다. 이에 왕이 기뻐하였으나 나라의 국력을 다스릴 여력이 없음을 이유로 안파견에게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니 안파견이 이에 화답하여 자신의 신하 마고로 하여금 영주로 임명하여 다스리도록 하니 그 지역이 오늘날 마고성이라 했다. 그리고 안파견은 그곳에 선사국의 백성들이 살 수 있게 허용하였다. 이는 금상의 넓은 아량을 깊이 헤아린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나라의 남은 병사들은 본국으로 모두 송환하였다. 재위 6년 한성부주부에 부사직 출신인 방수호(方秀鎬)를 임명했다. 뒤이어 한성부참군에 역시 부사직 출신인 오세안(吳世安)을 새로 임명하니 기존의 신하들이 이에 반발하였으나 왕은 그 반발에 묵묵부답이었다. 일각에서는 신하들이 자신들이 다져놓은 기틀을 바꾸어 놓으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며 반발한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이윽고 신하들은 모두 석고대죄를 하며 이번 인사에 대해 반대하자 태황태후인 선보왕후가 거처했던 구화궁에 어가를 옮겼다. 태황태후가 이를 염려하는 말씀을 내리자 왕은 당분간 구화궁에 거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덕충부원군에 봉해진 궁양동이 왕과 신하들을 중재하는 입장으로서 나섰다. 반대파에 돌아선 고태수를 찾아가 사정을 묻기 시작하자, 고태수가 이렇게 말했다. 『근본도 모르는 상것들을 조정에 출사시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오.』 그러자 궁양동이 웃으며 『그들을 그러면 개뼈다귀로 보신단 말씀입니까.』 고태수에게 궁양동은 연장자다. 그렇기에 고태수의 고루함을 새삼 느낀다. 『그렇다면 상감께 대국에서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뽑았으니 사사롭게 벼슬을 제수하지 않는 것을 순리로 삼아야 함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에 고태수가 화답하였다. 그리하여 왕에게 영의정 고태수·덕충부원군 궁양동 이하 신하들이 모두 의견일치하여 과거제를 시행해야 함을 간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함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해에 실시하지 않고 이듬해에 실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큰 혼란을 미연에 막아보고자 하는 왕의 의지에 의해서였다. 왕이 왕후 이하 왕실의 가족들로 하여금 구화궁에서 살게 할 것을 명했다. 이듬해인 재위 7년 오월 구화궁 단소전(정전)에서 처음 치러진 과거에서 급제자가 150명을 배출했다. 이에 왕은 이들을 교서관에서 일하도록 명하였다. 구월에 왕이 창인궁을 중건할 것을 명했다. 재위 8년 충종이 생전에 태자비를 맞이할 것을 말한 바가 있음을 들어, 태황태후가 왕비로 새로 간택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에 황태후(의열왕후)가 동의하여 금상에게 명하니 금상이 이를 받아들여 충종대왕의 뜻에 따라 초재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재위 9년에 태자를 생산하였다. 온 왕실과 조정에서 큰 기쁨이 되었다. 재위 10년에 왕이 도성 안에 별궁을 따로 지을 것을 명하였다. 하여 박재궁·낙선궁·황봉궁 세 개의 별궁이 지어졌다. 별궁의 터를 잡는 것을 영돈령부사가 담당하고, 짓는 것을 판돈령부사에게 일임하였다. 재위 12년 세 개의 별궁이 다 지어져 왕이 직접 연회를 베풀었다. 재위 13년 사월 태황태후 선보왕후가 구화궁 내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태황태후가 하세하자 왕실은 물론 대신들과 백성들이 일제히 울음을 토하였다. 왕은 머리를 풀어 정전 앞에 서서 멍석을 깔아 선보왕후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다. 선보왕후의 유해는 도성 밖에 양화도 부근 야트막한 언덕에 장사를 지내어 묻히니 이곳을 송릉(松陵)이라 하였다. 왕은 훗날 자신이 죽거든 이 인근에 터를 잡아 묻힐 것을 천명하였다. 그만큼 그의 효성이 남달랐다. 재위 16년 영의정 맡은 고태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역대 왕들을 보필하여 조정에 오랫동안 존경과 신망을 받은 어른이었다. 왕이 눈물을 흘리며 고태수의 죽음을 애도하니 시호를 성소(誠昭)라 하였다. 왕은 고태수의 후임을 정하지 않은 채,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하여금 영의정이 하던 일을 대행하도록 명했다. 그만큼 고태수가 영상(領相)에 앉아 있는 동안은 나라가 태평하고 평안했다는 것이다. 재위 17년 좌의정 동방일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고태수의 죽음 때와 마찬가지로 애통해하며 신하의 죽음을 슬퍼했다. 재위 18년 우의정 동방속도 세상을 하직하니 왕은 동방일의 전례에 따라 매우 애통해하였다. 연달아 노신(老臣)들이 하세를 하는 일이 벌어지자 왕은 삼정승 직의 후임을 임명하지 않고 좌찬성과 우찬성이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재위 19년 칠월, 한성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왕이 놀라 왕실 일가들을 거느리어 경기도 고양 땅으로 피신하였다. 고양에 행궁을 삼고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였다. 팔월에 반란을 일으킨 범인을 잡아보니 평민인 표창(表昌)이었다. 그는 일부 가문에서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국정을 농단한다는 이유를 들며 조정에 돌아가는 일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여 바로 그를 처형하였다. 이후 반란이 진압되자 왕실은 다시 서울 구화궁으로 환궁하였다. 재위 20년 손창희(孫昌熹)가 염포(鹽浦)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좌찬성이 직접 반란을 진압하겠노라고 나섰으나 왕이 극구 거부하니, 한층 기승을 부렸다. 반란의 세(勢)는 진주(晉州), 함양(咸陽), 하동(河東) 일원으로 뻗치니 왕이 직접 친정(親征)에 나서겠노라고 하여 그 지역에 군사를 이끌고 찾아갔다. 손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목도하고도 고하지 못한 관속 한 명을 왕명에 의해 즉결 처형하고 경상도관찰사에게 책임을 질책했으며 그 이하의 관리들과 관속들은 왕의 깊으신 뜻에 따라 왕의 명에 따라 각 지역의 상황을 두루 살폈다. 그러자 반란군의 두목인 손창희의 요새가 발각되어 손창희의 반란군을 모두 소탕하여 진압한 뒤 손창희에게 자신의 조정에서 일하는 것이 어떠냐고 종용하였다. 그러나 손창희가 한사코 이를 거부하니 왕은 즉시 처형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손창희가 왕에게 유언하였다. “내 동생 호성(護盛)이 나보다 더 어진 사람이니 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동량이 되어줄 것이오, 그러니 내 동생 호성을 살리시오.” 손창희가 이 말을 남기고 죽으니 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뜻에 따라 초야에 묻혀 살던 손호성을 불러다 자신의 내관으로 명하여 곁에서 보좌하도록 했다. 왕이 다시 서울 구화궁으로 환궁하였다. 재위 21년 유월에 황부천(黃富泉)이 강원도 횡성(橫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강원도관찰사와 더불어 군사들을 대동하고 친히 정벌하고자 하니, 이는 손창희의 반란을 전력으로 삼아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산세가 워낙 험준하여 반란을 진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왕이 병졸들을 소집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황부천의 소지를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한 뒤에 제 신분을 숨겨 황부천의 병사로 위장하여, 황의 정보를 일거수일투족 파악할 것을 명하였다. 끄나풀이었다. 이때 자원하고 나선 이가 모두 열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보름 가까이를 황부천의 병사로서 제 신분을 숨긴 채 염탐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황부천은 천성이 포악하고 교활하며 횡성의 백성들을 함부로 대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여 황부천의 요새를 찾아내어 공격을 하니 황부천은 왕 앞에 잡힌 채 끌려 나와야 했다. 황부천은 말 그대로 천성이 포악하니 왕에게 있는 모욕 없는 모욕을 주는 말을 내던지니 왕은 즉결 처형하도록 명해 집행하니 주위의 부하들은 왕에게 자신의 목숨을 살리면 그 은덕을 갚겠노라며 너도나도 나섰다. 이때 목숨을 구하도록 요청한 이들은 이렇다. 황의 수석 부하 성혼(成渾), 황부천의 큰형 황의선(黃義善), 황부천의 동생 황도성(黃道成)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손창희의 전력에 따라 왕이 모두 내관으로 삼았다. 서울 구화궁에 다시 환궁하였다. 재위 22년 구월 초가을에 임승민(任承敏)이 충청도 괴산(槐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친정에 나서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여 할 수 없이 좌의정을 중심으로 그들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좌찬성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어 그 땅에 다다르니, 반란군의 수장인 임이 바지에 소피를 싸버릴 정도로 불안해했다고 하니 군사들이 일제히 파안대소를 하였다. 그 기세를 몰아 임승민과 그 이하 장수이며 동생들인 임채혁(任彩赫), 임인수(任仁秀), 임차돌(任次乭), 임원무(任元武), 임원준(任元濬)이 모두 나와 왕의 신하가 될 것을 간청하여 항복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거듭 간청하자 왕이 화를 누그러뜨리고 이들 모두를 자신의 내관으로 삼았다. 왕은 다시 서울 구화궁에 다시 환궁했다. 재위 23년이 되던 어느 날. 구중궁궐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붙은 불은 화마에 휘말리고 궁인들과 내시들은 가리지 않고 모두 비명소리만 들린다. 그러던 차에 어느 알 수 없는 군사들이 궁으로 쳐들어가 이들을 살육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명소리와 피비린내 나는 냄새가 진동하다 못해 불길한 징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던 왕가는 모두 구화궁을 빠져나와 한덕사(恨德寺)에 머물게 되었다. 한덕사에는 호위무사가 지키고 있었다. 때마침 좌찬성이 허겁지겁 달려 나와 왕실의 식구들을 맞이하니 왕이 “좌찬성이 무슨 일로 오셨소.” 묻는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어떤 무당이 말하길 저 궁궐이 흥하지 않되 쇠(衰)하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듣고 놀라는지라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기화로 해서 구화궁에 불을 지른 모양이옵니다.” “이런 해괴한 일이 있나, 어느 누가 대궐에 불을 지른단 말이오.” “그것은 알 길이 없사옵니다.” 왕은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허무맹랑한 소문에 놀아나 절간에서 살아야 하는 왕의 심사가 여간 편치는 않다. 화재 사건이 발생하고 나흘이 지난 뒤 범인은 잡혔다. 범인은 손호성과 성호였다. 모두 내관이었다. 이들은 사사로이 자신들의 사병들을 거느리어 궁궐에 잠입해 궁녀들과 내시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네놈들은 어찌하여 우리 왕실을 위협하는가.” 태후가 으름장을 놓자 “나는 금상의 목을 베어 왕실과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함이었을 따름이다.” “이런 고약한!” 태후의 분개하는 소리는 온 절간을 휩싸고도 남았다. “나는 주군의 충정을 위해 금상을 폐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 말을 듣던 태후는 기가 차서 말을 못하다 벌떡 일어나서는, “궁궐을 불사르고도 모자라 왕실을 위협한단 말이냐. 네놈은 온 나라의 강토를 더럽힌 중죄를 범했느니라. 그것이 진정 주군의 충정이란 말이냐. 네놈의 진정한 충정은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오직 나라를 위해 헌신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 으름장을 놓았다. 죄인들은 모두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했다. 이윽고 실성하고야 말았다. 자기합리였다. 이에 왕명으로 손호성과 성혼은 모두 효수되었다. 죽음을 맞이한 두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일제히 돌들을 던지고 말았다. 저잣거리에는 그들의 수급이 내걸려져 있었고 백성들은 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까지 하고야 말았다. 궁궐 대부분의 전각은 불타고 없으며 나머지 구석진 곳에 있는 전각들은 모두 보수하도록 하여 좌찬성과 우찬성에게 명하여 한덕사를 궁으로 승격하도록 하였다. 한덕사는 한성부 동부에 위치해 있었다. 대궐에 돌아온 왕은 내관들을 단속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내야 함을 신하들이 주청하였으나 왕은 신경이 예민함을 이유로 들어 차후에나마 다시 의논하도록 명했다. 재위 25년 정말다의 아들 정석을 유곡도찰방에 임명했다. 온갖 반란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 이를 안무(按撫)하기 위한 조처였다. 재위 26년 왕후의 명에 따라 궁소동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희로 그녀를 인비로 봉하였다. 재위 27년 인비가 아들을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왕후가 태자를 옹립한 것을 두고 후회하며 자칫 잘못하다 자신의 자리까지 위태로워질까 노심초사했다. 그녀는 인비를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고 악을 쓰며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매번 인비가 왕후에게 인사를 하고자 왕후전에 찾아들었건만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여워했으나, 왕후는 태후의 의중을 헤아리지 않고 화를 풀지 않았다. 재위 28년 유월에 향길의 딸들인 궁희, 임연, 보연을 모두 태자비로 맞이했다. 재위 30년에 태자비 보연이 황태손(皇太孫)을 낳았다. 태후는 기쁜 모습을 감추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몸을 치장하고 난 후 편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 태후는 신하들에게 명했다. “황태손 선(善)을 차후에 후계자로 옹립하고자 하니 경들도 그리 아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며 신하들이 “천추만세―!” 하며 황태손을 경배하였다. 재위 34년 태자비 궁희가 천표공주를 낳았다. 재위 35년 태자비 임연이 인주공주를 낳았다. 재위 36년 동방봉우를 영의정으로 삼고, 이후에 다른 인사들도 임명하였다. 좌의정에 구영성, 우의정에 호판성, 좌찬성에 신강, 우찬성에 권봉달, 좌참찬에 유월야, 우참찬에 양광웅, 의정부사인에 임희량, 의정부검상에 고태박, 의정부사록에 조연, 영중추부사에 정말다, 판중추부사에 남궁병, 지중추부사에 동방우, 동지중추부사에 동방종, 첨지중추부사에 동방진, 이조판서에 동방위, 이조참판에 초항, 조봉대부 겸 이조참의에 초발, 통덕랑 겸 이조정랑에 초포다, 통선랑 겸 이조좌랑에 박천보, 봉직랑 겸 돈녕부주부에 안백호, 봉훈랑 겸 돈녕부직장에 구령, 승의랑 겸 돈녕부봉사에 궁양동, 강원도검률에 고남노가 임명되었다. 재위 37년 태자가 장성함을 기뻐한 왕이 왕후에게 원미왕후(元美王后)라 봉하였다. 재위 38년 태자가 갑작스럽게 병을 얻었다. 어의를 불러다 진찰을 해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왕이 이에 근심하였다. 왕후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태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하면 심한 발작을 일으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차츰 안정이 되었다싶으면 어지러워하며 몸을 가누지도 못하니 의원들은 이 증상이 어떤 원인에서 기인하는지를 알지 못하는지라 왕실은 애가 탔다. 그리하여 태후의 권유에 따라 따로 별궁에서 살게 하도록 명함에 따라 황봉궁에 기거하도록 하여 치료를 하였지만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왕은 하는 수없이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그것은 태자에 대한 거취 문제였다. 태자에게 차도가 보이지 않은 것을 구실로 영의정이 새로이 태자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이 대노하여 태손이 버젓이 있는데 황태자를 다시 세우라는 것이 어떤 논거로 이루어진 것이냐며 다그쳤다. 신하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재위 39년 인비의 아들이 백경군에 봉함과 동시에 옥상의 딸과 혼인을 맺었다. 이름은 장화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주위 웃어른들을 잘 공경하였다. 하여 인비를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아갈 것을 명하여 박재궁에 가서 살도록 했다. 태자가 병이 든 것을 근심하기로는 왕실만이 아니었다. 향길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딸들을 모두 태자비로 보냈다. 세간에서는 그가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릴 욕심에 그리 보냈다고 수군대고는 했다. 하지만 왕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그리한 것이었다. 태자의 갑작스런 발병으로 말미암아 왕위에 오를 것에 대한 주위의 기대가 한풀 꺾였으니 예전에 붐비던 인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근심을 죽은 고태수의 막내딸이자 며느리인 일화부인(一花夫人)이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아버지를 위하여 직접 작설차(雀舌茶)를 우려내어 따랐다. “아버님, 아버님의 근심이 얼마나 깊으신 지요?” 며느리의 떠보듯 묻는 말에 향길은 얼떨떨해했다. 잔기침만 할 뿐이다. “태자마마가 병이 드셨다는 말에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 모르겠구나.” “아버님.” 일화부인의 따른 찻잔을 들고 마시던 향길이 며느리의 시선을 응시한다. “응. 왜 그러시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문에 의할 것 같으면 발작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다 덕의공주에 의한 내력이라고 하더이다.” 그러자 향길의 눈이 휘둥그렇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덕의공주마마 생전에 어떤 어의가 보건대 필시 궁씨의 핏줄 안에 어떤 병이 있었다는데 그 병이 핏줄을 타고 물려받은 것이니.” “그만두어라.” 향길은 며느리의 말에 정색하고 말았다. “아버님, 소인은 아시다시피 왕족의 핏줄을 물려받은 몸이옵니다.” “……” “그러니 왕실의 일은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는 법이지 않사옵니까.” “그래?” 일화부인이 빙그레 웃는다. 처음에 너무 똑똑하다고 하며 부인이 못마땅해 했다. 그러던 게 장차 와서는 며느리가 진실로 영민하다는 것을 알고부터 향길 부부의 사랑이 더욱 돈독해졌다. 그래서 며느리와 담소를 나누는 것을 매우 즐겨하던 터였다. “어째서 그것을 알고 있느냐?” “본래 덕의공주가 맏이로 태어난 까닭에 대가 세고 드셌다고 합니다. 그런 터에 왕의 신임을 안 받을 수 없었겠죠. 하나 장차에 와서는 보위에 오르고자 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거의 겁박하다시피 정사를 농단하며 스스로 보위에 올랐습니다. 그랬기에 그것이 마음과 육신에 병으로 변하여 스스로를 파멸시킨 겁니다. 그것이 태자마마에게 다시 병이 들었던 겁니다.” “병이 들다니.”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황후마마께오서 욕심을 저버리지 못하신 까닭에 그 기운이 태자에게 뻗친 것이지요.” 향길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진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이냐.” 안절부절못한다. “태자를 폐하시어야 합니다.” 들고 있던 잔이 떨어졌다. 향길은 며느리가 점차 무서워진다. 영민하기로 온 나라에서 열 손가락 헤아린다는 말이 있다지만 저렇듯 세상의 이치를 간파하기까지 할 줄 누가 알았으리. “그럼 태자 자리를 누구에게 주라는 말이냐.” 떨리듯 며느리에게 물었다. “인비 마마의 아드님이신 백경군이 적격이옵니다. 듣자하니 백경군은 인비 마마의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어짊을 타고났으며 학문의 깊이가 태자보다는 더하다고 하니 왕재(王才)로는 적당하다고 하더이다.” 그러자 향길은 끄덕이며 며느리의 말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밤에 향길은 왕에게 은밀히 면대를 청하여 마주하였다. 왕에게 전날 밤 며느리 일화부인의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그러자 왕이 “네 이놈! 네놈이 정녕 반역을 꾀하려 드는 것이냐!” 소리쳤다. 하지만 향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직언을 하였다. 그러나 향길이 한사코 태자를 새로 옹립해야함을 주청하자 왕의 마음은 그리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재위 40년 왕은 세간의 소문을 듣기 거북해하며 태자를 폐하니 왕후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에 의식하지 않고 태자를 덕양대군이라 봉하여 박재궁에 계속 기거하도록 명하였다. 왕후는 이것이 인비의 농간이라 생각하였으나 인비가 석고대죄를 하며 자신의 죄가 아님을 들며 향길이 이를 고하여 빚어진 일임을 실토하자 그것을 그대로 믿으며 자나 깨나 향길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재위 41년 의열왕후가 하세하였다. 의열왕후가 하세하자 신하들이 오열하였다. 왕실의 슬픔이 매우 컸다. 재위 42년 정월부터 갑자기 병이 들었던 왕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자 왕이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으나 어의들은 하나같이 독살이 아님이 밝히니 그제야 안심하고 서둘러 국상을 치렀다. 왕비 원미왕후가 있는 앞에서 신료들이 우종천범대왕이라 시호를 올리자 왕비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하들이 그녀에게 선수태후라 봉하고 마희에게 박재궁주라 부르게 하니 궁인들 이하 아랫사람이 모두 박재궁 마마라 불렀다. 그리고 태후가 그 아들 백경군을 빼앗다시피 대궐로 불러들여 왕위에 올렸다. 이가 바로 백경대왕이다. 그곳에 기거하던 덕양대군에게 태손이 있었으나 나이가 어리므로 왕위에 올릴 수 없었다. 하여 태손을 석윤군에 봉했다. 백경대왕이 즉위하면서도 나이가 어리기도 해서 원미왕후가 왕이 장성할 때까지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생모가 있었으나 직접 정사를 다루지 못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위 2년 궁배의 아들이자 상호군으로 있는 궁태화의 딸을 간택하여 후궁으로 삼고, 옥상의 딸을 비로 맞이했다. 처음에는 수덕궁비로 봉하여 왕후의 예로 다하도록 했다. 궁태화의 딸은 와비로 봉해졌다. 재위 3년에 수덕궁비를 인수왕후로 봉하였다. 같은 해에 왕자를 낳았으나 왕이 태자로 봉할 것을 청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거두었다. 하여 왕은 왕자에게 의준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재위 4년 조선의 왕인 안파견의 죽음을 전하며 새로 조선왕이 된 혁서가 사신을 파견하여 접견하니 왕이 후히 받아들여 낙선궁에 머물 것을 권하였다. 조선왕 혁서 일행은 보름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재위 6년 태후가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고 있었으나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초씨들이 세도를 부린다고 수군대는가 하면 초씨가 나라를 농락할까 저어된다는 소문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에 태후가 대노하여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한이 있어도 찾아내야 한다며 전국을 수소문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었다. 재위 8년 왕이 덕양대군 내외에게 박재궁에서 나와 조선왕이 머물었던 낙선궁에 가서 살도록 명했다. 덕양대군은 병세가 다소 호전이 되었으나 당분간 정양을 하도록 할 것을 청하는 태후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재위 10년 태후가 왕이 장성함을 들어 수렴청정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태후는 이를 받아들였다. 재위 12년 정월에 다시 태후가 수렴청정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이 역시 거두었다. 조선왕 혁서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은 고시리가 사신을 파견하였다. 왕은 별전을 따로 마련해 접견하니 왕의 성심을 간파하고는 고마움을 보답해 모피 삼백 피를 주었다. 모피 삼백 피를 왕이 태후전과 중궁전, 그리고 와비전과 박재궁에 두 필 씩 하사하였다. 그밖에 남은 것들은 신하들에게 필요한 만큼 두루 주었다. 태후가 이를 받고서 왕에게 말하길, “상감께 말하오. 왕실에서 이런 모피를 쓴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사치를 독려하는 것과 같으니 다시는 이를 받지 않길 바라오.” 하였다. 재위 14년 정월에 태후는 병이 듦을 이유로 수렴청정을 거두도록 청하니 왕이 이에 받아들여 친정을 행하였다. 같은 때 동방봉우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교덕공(敎德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평생을 왕에게 태후와 함께 직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왕이 올바른 정치를 다스리도록 노력한 공로의 대가였다. 왕이 이에 힘입어 대대적인 인사들을 단행했다. 영의정에 구영성을 필두로, 좌의정에 호판성, 우의정에 신강, 좌찬성에 권봉달, 우찬성에 유월야, 좌참찬에 양광웅, 우참찬에 임희량, 의정부사인에 고태박, 의정부검상에 조연, 의정부사록에 박천보, 통선랑에 궁소동, 이조좌랑에 이만덕, 강원도관찰사에 이영덕, 중추부도사에 옥상, 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중추부경력에 김동탁, 종사랑에 제인, 송라도역승에 홍가, 장사랑에 염건식, 자여도역승에 현사, 교서관제조에 여범, 교서관판교에 최민, 교서관교리에 서상범, 교서관별좌에 송찬수, 교서관별제에 백무현, 교서관박사에 대현, 교서관저작에 하정을 명했다. 그리고 차후에 외척의 발호를 미리 막기 위해 다른 외척들을 중용했다. 부사맹이자 궁안의 장남인 궁상규(宮相奎)에게 교서관정자를, 사용이자 궁안의 차남인 궁영규(宮英奎)에게 교서관부정자를, 상호군 궁태화에게 교서관사준을, 교서관사감에는 향길의 아들이자 고일화의 남편이며 역시 궁태화와 함께 상호군으로 있던 향랑(向郞)을 임명했다. 같은 해 유월에 개성에 새로 부청(府廳)을 세웠다. 왕은 이곳을 개성부(開城府)라 칭한 뒤 개성 지역과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도록 명하여 관리들을 두루 임명했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궁보사,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에 가정대부 백덕을을 임명하여 겸직을 하도록 하고,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에 초말을 명했다. 왕은 좌도수운판관과 우도수운판관, 그리고 해운판관을 영의정에게 명하여 오위의 군사들 중 가장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을 간추려 내 선발하게 하여 직접 임명권을 일임했다. 왕의 성은에 영의정 구영성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눈물로 인사하니 왕의 어짊이 이와 같았다. 재위 15년 와비가 작년에 태기가 있어 배가 차 올라가자 왕후가 이를 가지고 왕자를 낳을까 심히 염려되었다. 게다가 왕이 왕자를 보고 난 뒤부터 왕후보다는 와비를 자주 찾아가는지라 근심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와비에게 태기가 있음을 알게 된 왕후가 공공연히 투기를 일삼으니 왕이 대노하여 왕후를 당분간 근신하도록 하고 태후로 하여금 왕후와 후궁들에게 단속을 명하도록 하니 태후가 이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그날 밤. 태후가 왕후에게 찾아가니 왕후가 갑작스레 태후의 방문에 놀란 눈치다. “왕후의 마음을 왜 모르겠소. 나도 한때는 투기를 많이 부렸다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차츰 지치고 잊혀지는 법이라오. 그러니 왕후도 이 늙은이처럼 더욱 몸가짐을 조심히 하셔야 할 겁니다.” 한때 왕후의 몸으로 투기를 일삼은 선수태후의 지난날을 듣고 있던 중궁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재위 16년 정월에 와비가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왕자를 낳은 기쁨도 잠시, 왕자를 낳은 지 삼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왕후는 지난 날 자신이 투기를 일삼았던 것을 후회하며 손수 왕자를 거두어 키우기 시작했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궁태화를 불러들여 왕후가 직접 위로의 뜻을 전했다. 재위 20년 구영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었던 동안 태평세월을 누렸던 백성들이 모두 통곡을 하였다. 왕은 그에게 서덕공(瑞德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재위 22년 좌의정 호판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호선(好宣)이 대호군에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림은 소박하였다. 이를 본 왕이 구영성의 전례에 따라 소수공(素修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재위 21년 왕후가 태자의 자리를 죽은 와비의 소생인 장담에게 줄 것을 당부하였다. 왕이 그 의중을 물으니 왕후가 말하길, “꿈속에 덕의공주 마마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덕의공주?” “네, 하여 말하길 온 나라가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거니와 장담왕자가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위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아랫사람을 시켜서 절에 보내어 불공을 드리기에 감복을 받으셨다 합니다.” “……” 왕이 말없이 듣는다. “하여 말하길 왕에게 부탁해달라고 하더이다.” “부탁이라니.” “덕의공주마마께서 말하길, 당신의 육신이 쉴 곳이 없다고 하시더이다. 그리하여 시신을 거두어 쉴 곳을 마련해준다면 더는 여한이 없다고 하시더이다.” 왕후의 말에 의심을 품은 왕이 태후에게 이를 아뢰니 태후가 말하길 “지금까지 덕의공주마마께서 천추(千秋)의 한을 품고 돌아가셨나봅니다.” 하며 왕이 중궁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 태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담왕자가 궁씨의 핏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흉허물 없이 성인군자(聖人君子)의 모습으로, 공부에 특출할 뿐만 아니라 문무에 두루 능통하여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받으니 태후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왕은 왕후의 뜻에 따라 장담왕자를 태자로 봉하도록 명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장담왕자를 태자로 삼고, 왕자 의준은 황봉궁에 기거하여 살도록 하며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재산과 살림에 능한 궁인들을 하사했다. 나이가 어리지만 영리한 장담태자는 자신의 능력이 나라를 능히 다스릴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몸가짐을 바로 했다. 재위 24년 신강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우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를 수락하여 물러나는 대신 영돈령부사에 임명하였다. 하여 삼의정(三議政)의 대임(代任)을 영돈령부사에게 일임하여 일하도록 명했다. 재위 25년 영돈령부사 신강은 덕의공주를 생전과 같이 여왕(女王)으로 봉하여 묘향(廟享)하도록 하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재위 27년 박재궁에 기거하던 인비가 세상을 떠났다. 재위 28년 덕의여왕을 종(宗)으로 봉하기보다 조(祖)로 봉하는 것이 어떠냐는 왕의 말에 신하들은 흔쾌히 받아들여 연조(戀祖)라 봉하도록 하니 왕이 받아들였다. 재위 29년 선수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선수태후의 죽음에 백성들은 물론 왕실과 조정에서는 이를 슬퍼하였다. 선수태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덕의공주의 시신을 찾아내어 하루속히 묏자리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신하들에게 덕의공주의 시신을 수소문하니 경기도 적성(積城) 땅에 있음을 알고 찾아가보니 여자의 시신이 있었다. 이에 나이든 노신들을 중심으로 찾아가보니 덕의공주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썩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다. 하여 신하들이 이를 보고 나서야 안도하였다. 왕은 이를 듣고 나서 그 주변 땅을 두루 살피도록 하니 이곳이 공교롭게도 길지(吉地)임이 밝혀져 그 자리에 능을 만들도록 하니 이곳을 연릉(戀陵)이라 하였다. 그동안에 천추의 한을 남기고 떠난 덕의공주, 아니 연조에 대한 제사를 후히 지내니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치니 비가 억수로 내렸다. 그동안의 한이 풀린 것이라며 백성들이 수군댔다. 왕은 이곳 적성을 현(縣)으로 정하여 관아를 세워 현감(縣監)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했다.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초반을 임명했다. 노량도승 직은 영돈령부사에게 명하여 오위의 군사들 중 한 명을 뽑아 다스리도록 명했다. 재위 30년 선수태후의 유해를 고양 땅에 묻어두니 이곳을 서릉(西陵)이라 하였다. 재위 34년 왕이 이를 위로받은 듯 승하하였다. 왕후는 이에 백경태자를 왕위에 옹립하니 이가 곧 백경대왕이었다. 백경대왕 즉위년 십일월 영돈령부사 신강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부사과에 있는 세 아들 신구, 신병, 신약에게 살림을 후히 하도록 쌀 육백 석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백경대왕이 왕후를 간택하지도 못한 채 재위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단명하였다. 인수태후가 이를 슬퍼하였는데 덕양대군의 아들인 석윤군이 살아있음을 궁녀를 통해 알게 되어 그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하여 후사를 잇도록 했다. 석윤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이가 바로 영효대왕이다. 왕이 매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태후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인사도 단행했다. 정말다의 아들이자 유곡도찰방에 있는 정석에게 경연사경과 겸임토록 하고, 권봉달에게 영돈령부사를, 유월야에게 판돈령부사, 양광웅에게 지돈령부사, 임희량에게 동지돈령부사에 임명했다. 뒤이어 충훈부(忠勳府)라는 관청을 설치해 의정부사인 고태박으로 하여금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하여 관청의 수장으로 겸임하도록 했다. 의정부검상 조연에게 덕소군(德昭君)에 봉하고, 영중추부사 정말다에게 경순군(敬淳君)에 봉하여 두 사람으로 하여금 고흥부원군의 옆에서 일하도록 명했다. 판중추부사 남궁병을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에 겸임하게 하고, 동방우에게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에 겸임하도록 했다. 동지중추부사 동방종에게 영경연사(領經筵事)에, 첨지중추부사 동방진에게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조판서 동방위에게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이조참판 초항에게 경연참진관, 조봉대부 겸 이조참의 초발에게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통덕랑 겸 이조정랑 초포다에게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의정부사록 박천보에게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에 겸임하도록 했다. 봉직랑 겸 돈령부주부 안백호에게 돈령부도정에, 봉훈랑 겸 돈령부직장에 구령을 돈령부정에, 승의랑 겸 돈령부봉사 궁양동에게 돈령부부정에 겸임했다. 통선랑 궁소동에게 돈령부첨정을, 강원도도사 장윤을 돈령부판관, 강원도검률 고남노를 돈령부주부, 통사랑 겸 사근도역승 온제를 돈령부직장, 승사랑 겸 소촌도역승 도영을 돈령부직장, 이조좌랑 이만덕을 돈령부봉사, 강원도관찰사 이영덕을 돈령부참봉에 명했다. 뒤이어 승정원(承政院)이라는 관청을 세웠다. 이에 속한 이들을 임명했다. 중추부도사 옥상을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돈령부판관 민봉부를 승정원승지, 경기도관찰사 동방섭을 승정원승지, 경기도도사 동방존을 승정원승지, 경기도검률 동방자를 승정원승지, 경기도심약 궁호를 승정원승지, 오위도총부도총관 강찬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오위도총부총관 향길에게 승정원주서를 겸임시켰다. 왕은 의금부(義禁府)라는 관청을 세웠다. 이에 속한 이들을 임명했다. 오위도총부경력 천무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사 노조성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내금위장 주현우에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임명했다. 그리고 장수도찰방 설정에게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에 겸임하도록 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중추부경력 김동탁에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했다. 종사랑 제인에게 경연설경을 명하고, 송라도역승 홍가에게 경연전경을 겸임하도록 했다. 뒤이어 교서관교리 염건식에게 장사랑 겸 대사헌(大司憲)에 명했다. 자여도역승 현사에게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교서관제조 여범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교서관판교 최민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교서관교리 서상범에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겸임하도록 했다. 왕은 사간원(司諫院)이라는 관청을 세웠다. 대사간(大司諫)에 교서관별좌 송찬수를 겸임하게 하고, 교서관별제 백무현에게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교서관박사 대현에게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교서관저작 하정에게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겸임하도록 했다. 왕이 의빈부(儀賓府)라는 관청을 세웠다. 교서관정자 궁상규에게 의빈부위를 겸임하도록 했다. 교서관부정자 궁영규에게 의빈부부위, 교서관사준 궁태화에게 의빈부첨위, 교서관사감 향랑에게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을 겸임하도록 했다. 봉직랑 안일을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를 겸임하도록 했다. 봉훈랑 도상진에게 내금위장을 삼았다. 한성부주부 방수호에게 겸사복장을, 한성부참군 오세안을 대광보국숭록대부를 겸임하게 했다. 낙하도승 황보진에게 소촌도역승을 겸임하게 하고, 벽란도승 초자에게 보국숭록대부, 삼전도승 초비에게 숭록대부, 양화도승 초재에게 숭정대부, 임진도승 초마에게 정헌대부, 한강도승 초하에게 자헌대부에 명하였다. 그밖에 초조를 가정대부, 초방을 가선대부, 궁안을 통정대부, 궁배를 통훈대부를 겸임하게 했다. 박천보의 아들 박영을 승의랑에, 궁배의 아들 궁만호에게 강원도도사, 옥상의 아들 옥사홍에게 강원도검률, 호선을 사근도역승에 명했다. 재위 2년 권봉달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돈령부사는 오위의 군사들 중 특출한 인재를 선발하여 조정에 일하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태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이 친정을 서둘렀다. 이윽고 태후의 명에 따라 왕후 두 명과 후궁 여섯 명을 두었다. 옥사홍의 큰딸을 문혜왕후(文惠王后)라 봉하고, 초비의 딸을 연덕왕후라 봉하고, 옥사홍의 작은딸을 의비라 봉하고, 동방우의 딸을 예비라 봉하고, 신약의 딸을 지비(智妃)라 봉하고, 도영의 딸을 신비(信妃)라 봉하였다. 그밖에 궁태화의 딸을 만비로, 안일의 딸을 보비로 봉했다. 재위 4년 유월야가 세상을 떠났다. 판돈령부사는 권봉달의 전례에 따랐다. 원흥공(元興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재위 7년 양광웅이 세상을 떠났다. 지돈령부사는 유월야의 전례에 따랐다. 덕흥공(德興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재위 8년 임희량이 세상을 떠났다. 동지돈령부사는 양광웅의 전례에 따랐다. 수덕공(綏德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이 구화궁의 중수(重修)하도록 명하였다. 재위 9년 고흥부원군 고태박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이 그에게 수흥공(壽興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덕양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황봉궁에 기거하는 덕양대군의 아들인 의준을 호덕대군(好德大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초포다의 딸에게 배필로 주었다. 재위 10년 덕소군 조연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도흥공(道興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년에 걸쳐 중수한 구화궁이 완공되었다. 재위 12년 경순군 정말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이 산홍공(山弘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비를 구화궁주라 봉하였다. 왕의 명에 따라 구화궁에 기거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재위 15년 남궁병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경송공(慶頌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임은 임희량의 전례를 따랐다. 재위 17년 동방우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석도공(晳道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임을 남궁병의 전례에 따랐다. 재위 20년 동방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표소공(表疏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임을 동방우의 전례에 따랐다. 재위 22년 동방진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후소공(厚昭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임을 동방종의 전례에 따랐다. 재위 23년 동방위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처사공(處思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임을 동방진의 전례에 따랐다. 재위 24년 초항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왕이 처선공(處善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임을 동방위의 전례에 따랐다. 재위 25년 초발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왕은 고소공(高昭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임을 초항의 전례에 따랐다. 뒤이어 장담대왕을 도종(道宗)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담대왕이 정사를 얼마 다스리지 못하였으나 왕의 성품으로 인해 잠시나마 태평성세를 누리었음을 알고 있는 신하들이니만큼 왕은 그리하라고 하였다. 재위 28년 대궐에 왕의 옆을 보좌하는 내관들의 기강이 문란함을 한탄해하며 내시부(內侍府)를 세우도록 하였다. 재위 29년 영의정에 초포다를 삼고, 좌의정에 안백호, 우의정에 박천보를 삼았다. 그리고 원로대신들이 날로 늘어나자 왕은 모두 부원군(府院君)을 삼았다. 구령을 성락부원군(成樂府院君)에 봉하고 궁양동을 덕충부원군에서 덕승부원군(德承府院君), 궁소동을 덕유부원군(德裕府院君), 장윤을 수동부원군(修同府院君), 고남노를 횡성부원군(橫城府院君), 온제를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 도영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만덕을 수안부원군(壽安府院君), 이영덕을 안동부원군(安東府院君), 옥상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민봉부를 여주부원군(驪州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는 고흥부원군이란 봉작을 한 전례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는 국정의 전반적인 것을 모두 서리(署理)하도록 했다. 이들은 모두 왕의 신임을 입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는 데에 한몫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모두들 왕비를 배출하기도 한 이들이니만큼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재위 30년 왕은 사월에 황자 장우(長雨)로 하여금 장우대군(長雨大君)으로 봉하였다. 같은 달에 장우대군으로 하여금 죽은 도종대왕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유월, 황녀 연담공주(淵潭公主)를 민가에 시집을 보내어 서민(庶民)으로 살게 했다. 신하들이 왕에게 이를 물어보니 왕이 말하였다. “여자가 왕실에 있어서 좋을 것이 못된다. 경(卿)들도 보다시피 여자의 몸으로 정사에 관여하여 온 나라에 피비린내를 남기지 않았던가. 하여 그에 목숨을 잃은 연조대왕의 전례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신하들은 설왕설래했으나 왕의 말이 그름이 없이 옳은지라 이를 받아들였다. 재위 31년 정월에 왕은 황자 안인(安仁)으로 하여금 안인대군(安仁大君)에 봉하였다. 뒤이어 유월에는 황녀 금희공주(今熙公主)를 민가에 시집을 보내어 서민으로 삼았다. 연담공주의 전례를 따랐다. 재위 32년 정월에 왕은 황자 심유(審裕)로 하여금 심유대군(審裕大君)에 봉하였다. 칠월에 황녀 공명공주(空明公主)에게 민가에 시집을 보내게 하여 서민으로 삼았다. 금희공주의 전례를 따랐다. 구월에 황녀 위림공주(魏林公主)를 공명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내 서민으로 삼았다. 재위 33년 정월에 왕이 황자 인강(仁康)으로 하여금 인강대군(仁康大君)에 봉하였다. 왕이 공주들을 모두 양가(良家)에 시집보내자 문혜왕후가 주위의 후궁들을 신임한 것이라 생각하여 공공연히 투기를 일삼자 왕이 대노하여 왕실의 어른인 태황태후 원미왕후에게 말하자, 태황태후는 자신의 병이 듦을 이유로 하여 인수태후에게 엄히 다스리도록 명하니 인수태후가 노하여 문혜왕후를 책망하여 말하길, “색정(色情)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거늘 어찌 사사로이 투기를 일삼는단 말이냐. 내 네×을 대궐 밖으로 쫓아낼 것인즉 황봉궁에 유폐(幽閉)할 것이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옥사홍이 찾아가 중궁에게 빌 것을 청하였으나 중궁이 이를 거부하자 옥사홍이 태황태후전 앞에 석고대죄를 하였다. 그러나 왕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 파직(罷職)을 명하였으나 부원군들이 모두 막으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근신(謹身)하게 했다. 그리고 태후의 명에 따라 왕후 옥씨를 황봉궁에 유폐시켰다. 재위 34년 정월에 황자 태완(泰完)을 태완대군(泰完大君)에 봉하였다. 태완대군으로 하여금 왕이 장우대군의 전례에 따라 도종대왕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같은 해 삼월 황녀 승표공주(承表公主)를 위림공주의 전례에 따라 서민으로 삼은 뒤 민가에 시집을 보냈다. 재위 35년 이월, 황자 인완(仁完)을 인완대군(仁完大君)에 봉하였다. 삼월에 황녀 한나공주(漢那公主)를 승표공주의 전례에 따라 서민으로 삼은 뒤 민가에 시집을 보냈다. 오월에 황녀 연가공주(戀佳公主)를 한나공주의 전례에 따라 서민으로 삼아 민가로 시집보냈다. 유월에 황녀 편림공주(片林公主)를 연가공주의 전례에 따라 서민으로 삼은 뒤 민가로 시집보냈다. 칠월에 황녀 남라공주(南羅公主)를 편림공주의 전례에 따라 서민으로 삼아 민가로 시집보냈다. 특히 황녀 남라공주의 혼례 때 왕이 장마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라에 큰 홍수가 일어날까 걱정을 하였으나 덕유부원군의 말에 따라 사직단(社稷壇)에 제사를 지내자 비가 그치어 편안히 혼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재위 36년 정월에 황자 원찬(元贊)을 원찬대군(元贊大君)에 봉하였다. 삼월에 황녀 천석공주(天錫公主)를 남라공주의 전례에 따라 서민으로 삼아 민가에 시집을 보내었다. 오월에 황녀 승강공주(承康公主)를 천석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내었다. 유월에 황녀 천근공주(天根公主)를 승강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냈다. 여기까지가 문혜왕후의 소생들에 관한 얘기다. 재위 37년 십일월, 호덕대군 고의준의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니 왕의 근심이 더했다. 십이월에 원찬대군의 전례에 따라 의비 옥향의 소생인 황자 기선(基善)을 기선대군(基善大君)에 봉하였다. 그 뒤 상배(喪配)한 고의준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십이월에 영의정 초포다가 세상을 떠났다. 실상 영의정이라는 자리는 허수아비의 자리나 다름이 없었다. 실권이 이미 부원군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공덕공(恭德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자손은 재산들을 노비들에게 주고 면천(免賤)하여 초야에 묻혀 살았다. 재위 38년 정월 왕이 호덕대군의 재취(再娶)를 두게 하였는데, 그 재취는 송찬수의 딸이었다. 유월에 우의정 박천보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그에게 고령공(固寧公)이라 하였다. 재위 39년 정월 황녀 옥은공주(玉恩公主)를 천근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냈다. 삼월에 황녀 창경공주(昌慶公主)를 옥은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냈다. 사월에는 황녀 인철공주(仁哲公主)를 창경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냈다. 오월에는 황녀 민시공주(民時公主)를 인철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냈다. 유월에는 황자 나림(羅林)을 나림대군(羅林大君)에 봉하였다. 칠월칠석날을 기념하여 왕이 신하들과 온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푼 뒤 황자 길을(吉乙)을 길을대군(吉乙大君)에 봉하였다. 팔월에 황자 시성(時成)을 시성대군(時成大君)에 봉하였다. 구월에 흥환공주(興歡公主)를 민시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시월에 황자 운실(運室)을 운실대군(運室大君)에 봉하였다. 십일월에 황자 예한(禮漢)를 예한대군(禮漢大君)에 봉하였다. 십이월에 서운공주(瑞雲公主)를 흥환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재위 40년 정월에 문혜왕후의 소생인 안인대군을 황태자로 봉하였다. 안인대군이 황태자에 오르자 신하들이 황봉궁에 유폐된 왕후가 마음에 걸려 반대하였으나 강행했다. 하여 황봉궁에 유폐된 왕후의 죄를 사하여 그녀를 서온돌에 머물게 한 뒤 황태자의 모후(母后)이므로 각별히 예우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했다. 이월에 황자 금학(琴鶴)을 금학대군(琴鶴大君)에 봉하였다. 삼월에 황자 정일(定一)을 정일대군(定一大君)에 봉하였다. 사월에 황자 현담(玄潭)을 현담대군(玄潭大君)에 봉하였다. 오월에 황자 천동(天東)을 천동대군(天東大君)에 봉하였다. 유월에 황자 조명(祚命)을 조명대군(祚命大君)에 봉하였다. 칠월에 황자 나봉(那鳳)을 나봉대군(那鳳大君)에 봉하였다. 팔월에 천윤공주(天胤公主)를 서운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의비는 문혜왕후처럼 슬퍼하지 않고 오직 왕명에 따라 근신하니 왕실은 물론 신하들의 신망이 드높았다. 구월에 경기도 수원에 조선의 군사들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왕이 대노하여 조선왕 고시리에게 항의를 표하고 지금의 충청도 땅을 정벌하겠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태자와 함께 즉시 충청도 지방으로 친정(親征)하니 태수 수(洙)를 즉시 잡아들여 참수(斬首)하고 그 수급(首級)을 조선왕에게 보내어 항의의 뜻을 밝혔다. 이에 조선왕 고시리는 대노하여 정벌할 뜻을 밝혔지만 국가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으므로 정벌을 하지 않는 대신 지난날 사신에게 보낸 것을 고려하여 왕에게 사과한다는 친서를 보내며 선물로 충청도 지방의 땅을 모두 할양(割讓)할 뜻을 내비쳤다. 이에 왕은 충청도 지방의 땅 모두를 거두어 경기도관찰사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명했다. 십일월에 예비의 소생인 우온공주(宇溫公主)를 천윤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십이월에 황자 기인(基寅)을 기인대군(基寅大君)에 봉하였다. 재위 41년 정월에 전을공주(全乙公主)를 우온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이월에 금환공주(錦還公主)를 전을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삼월에 황자 위경(魏經)을 위경대군(魏經大君)에 봉하였다. 사월에 어다공주(於多公主)를 금환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예비 역시 의비처럼 근신하였으므로 우환이 없었다. 오월에 지비의 소생인 한연공주(翰蓮公主)를 어다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유월에 황자 백균(伯均)을 백균대군(白均大君)에 봉하였다. 칠월에 황자 환해(歡海)를 환해대군(歡海大君)에 봉하였다. 같은 때에 정훈공주(正勳公主)를 한연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구월에 마연공주(馬煙公主)를 정훈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지비는 두 비(妃)와는 다르게 왕이 공주들을 모두 시집보내자 발악을 하다 쓰러지고 병들어 몸져누웠다. 하여 왕이 대노하여 황봉궁에 유폐한 것을 들먹이며 이 전례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극구 만류한 탓에 제 처소에서 근신하도록 명하였다. 시월에 조선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다. 사신이 와서 하는 말이 왕 고시리가 친서를 내리는 곧장 전라도 땅 전부를 충청도 땅을 준 것과 같이 할양해줄 것을 명하였다. 왕이 화답하여 사과(沙果)를 십만 궤짝을 보내주었다. 선사국의 사과가 당도가 높고 맛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십일월에 신비의 소생인 여용공주(麗容公主)를 마연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십이월에 인명공주(仁明公主)를 여용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같은 때 황자 연홍(燕虹)을 연홍대군(燕虹大君)에 봉하였다. 재위 42년 정월에 공안공주(公安公主)를 인명공주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보냈다. 신비는 공주들이 시집가는 것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이후에 시집을 보낸 일은 없었다. 연덕왕후의 소생인 태라공주(泰羅公主), 여서공주(黎庶公主)를 비롯해 만비의 소생인 정연공주(井然公主), 윤주공주(潤州公主), 원선공주(元善公主), 보비의 소생인 황자 원세(元世)은 모두 나이가 어리므로 대군에 봉하거나 시집을 보내지 않았다. 왕의 자제들을 모두 살펴본 바와 같이 왕후의 소생이든 후궁의 소생이든 가릴 것 없이 대군과 공주를 봉한 것에 그치지 않고 공주를 모두 조정의 관리들에게 시집보내지 않고 오직 조정과 연이 닿지 않는 양가들에 시집을 보냄으로써 외척으로 성장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왕후는 물론 모든 후궁들이 알지 못했다. 유월에 태자가 장성하자 제인의 딸을 황태자비로 삼아 일가를 이루도록 했다. 재위 43년 정월에 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유월에는 태자가 비범함을 발견하고 왕재(王才)임을 확신하며 왕이 스스로 왕위를 태자에게 선위(禪位)하니 이이가 바로 안인대왕(安仁大王)이었다. 태후는 태황태후(太皇太后)에, 왕후는 황태후(皇太后)에, 후궁들은 모두 태비(太妃)에 봉하였다. 태비에 봉한 뒤 왕은 서둘러 의비를 구화궁주라는 봉호(封號)로 삼은 것을 전례삼아 예비에게 후덕궁주(厚德宮主), 지비에게 도선궁주(道宣宮主), 신비에게 표경궁주(表慶宮主), 만비에게 호산궁주(湖山宮主), 보비에게 경덕궁주(慶德宮主)라 봉하였다. 안인대왕이 왕위에 오른 재위 1년 좌의정 안백호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상왕은 시호를 공선공(恭善公)이라 하였다. 그의 자손은 노비들 가운데 솔가(率家)한 노비들만을 데리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재위 2년 덕승부원군 궁양동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생전 부원군에 봉하였을 때와 같이 덕충공(德忠公)이라 하였다. 재위 3년 덕유부원군 궁소동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유소공(裕素公)이라 하였다. 재위 4년 반성부원군 옥상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소민공(昭旻公)이라 하였다. 재위 5년 수동부원군 장윤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구민공(丘民公)이라 하였다. 재위 6년 성락부원군 구령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공안공(恭安公)이라 하였다. 재위 7년 횡성부원군 고남노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고덕공(高德公)이라 하였다. 그의 자손은 노비들을 면천하여 재산들을 나눠준 다음 초야에 묻혀 살았다. 재위 8년 경주부원군 온제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덕공공(德恭公)이라 하였다. 그의 자손은 노비들이 없으므로 스스로 초야에 묻혀 살 것을 천명한 뒤 경기도 인근의 야산에 묻혀 살았다. 재위 9년 성산부원군 도영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충의공(忠懿公)이라 하였다. 재위 10년 수안부원군 이만덕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남소공(南所公)이라 하였다. 그의 자손은 초야에 묻혀 살았다. 재위 11년 안동부원군 이영덕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북소공(北所公)이라 하였다. 그의 자손은 초야에 묻혀 살았다. 재위 12년 상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은 인종영효대왕(仁宗榮孝大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왕은 말하길, 『상왕께서 내게 유언하시길, 「궁씨의 핏줄이 흘러 내려 오늘날 왕실에 이르렀으니 사실상 궁씨들의 일가와 같지 아니한가. 그러하니 상감은 이를 받들어 궁씨들을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우리 고씨들의 보위를 탐하여 찬탈한 대가로 선정을 베풀다 전횡을 일삼은 궁 정승을 태조대왕(太祖大王)로 봉하여 종묘에 배향하도록 하라」고 이르셨소. 이에 정승 궁씨를 태조로 봉하여 종묘에 배향하고, 궁씨 성을 가진 대신들로 하여금 왕족과 같은 예우를 하도록 하오.』 하며 상왕의 뜻을 받들고자 했다. 그러나 궁씨들은 모두 사양하였으며 자신들의 선조인 궁 정승이 왕위를 찬탈하여 그 자리에 오른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다짐했다. 왕은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궁왕을 태조대왕에 봉하는 것으로 수습했다. 그 이후에 궁왕을 태조에 봉한 것을 계기로 그 이전의 고씨의 왕들과 그 행적들은 전대선사(前代先史)라 하였다. 궁씨의 핏줄을 물려받은 천추(千秋)의 한이 유종(有終)의 미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고씨 왕실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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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소설집(寶德小說輯) 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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