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조선왕조

ㆍ작성자	정병욱
ㆍ작성일	개국630(2021)년 11월 29일 (월) 22:52 [해시(亥時):이경(二更)]
ㆍ문서분류	문학
ㆍ설명	덕의공주 & 태평성대
ㆍ저작	국민일간사

ㆍ추천: 0 ㆍ열람: 761

보덕소설집(寶德小說輯) 권5

「차례」

덕의공주德義公主

태평성대太平聖代

덕의공주德義公主

운왕이 삼십일 년의 재위를 마치고 승하하니, 시호는 운종雲宗이었다. 운종의 왕비 장씨張氏는 상주로써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신하들이 선왕을 애도하니 생전에 불교를 믿었기에 불교식으로 상을 치렀다. 운종의 뒤를 이어 태자가 보위에 올랐다. 장성왕후章聖王后로 봉하여 태후로 삼았다. 왕후를 새로 뽑아야 하는데 마땅한 규수가 없는 것을 근심하던 태후가 서둘러 간택령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단자單子를 준비하는 관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태후전에 단자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관이 직접 단자를 받아들고 안에 들어가 상궁에게 전달하면 태후의 손에 들어와 삼간택三揀擇에 올라갈 후보들을 간추리는 데 쓰인다. 태후는 단자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살피고 또 살핀다. 그리고 이들 단자들 가운데 세 개의 단자를 선택해 서안書案 오른편에다 놓는다. 나머지 단자들은 모두 불에 태워 태후 자리 왼편에 있는 화로에 놓는다.

임 상궁 들게.

상궁이 태후의 부르심을 받들어 안으로 들어오니 태후의 명이 떨어진다.

관청에 오라버니가 계시거든 속히 들라 이르시게.

태후의 명령에 네 하며 대답한 뒤 물러난다. 뒤이어 명을 받들어 채비를 차리고 가는 기척이 역력히 들려왔다. 장씨는 아버지 장보공의 나이 듦이 역력함을 느꼈다. 세월은 말없이 물같이 흐르건만 태후의 곁에는 조정에 출사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승후관承候官으로 임명한다면 모르지만 왕의 생전에 단 한 번도 오라버니를 천거하여보지 못하였다. 외척의 발호跋扈를 우려한 까닭이다.

(오라버니가 조정에 아니 계시면 장차 이 나라의 일은 어떻게 알아볼까나.)

그나마 관청의 허드렛일을 맡은 것만큼은 큰 성과라면 성과였다. 왕의 생전에는 불교가 번성하였고 전국적으로 사찰寺刹을 짓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궁씨 일가붙이들이 하나같이 반대하고 나섰을지도 몰랐다. 궁씨들은 모두 무당巫堂 출신으로 자신들이 섬기던 신 이상으로 믿으려 하지 않았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궁씨들도 역대 임금들의 정책들에 의해 차츰 그들의 요구에 길들여지게 되었고 불교를 숭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중앙의 관직을 궁씨가 진출한 건 여전했다. 그렇지만 태후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오직 자신의 피붙이들이 조정에 출사하기를 고대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한밤중에 어두컴컴한 태후전의 적막한 내실은 고요한 산속에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다만 태후 눈앞에 촛불이 밝히어 그 그림자를 만들며 움직일 뿐. 얕은 바람에 흔들거리며 타오른다. 태후는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소인은 좌의정에 몸담은 몸이오나 단 한 번도 마마가 왕실의 안주인이 되어 권세를 탐한 적이 없나이다. 그래서 이 아비가 한사코 조정에 발을 들여 행여 권세를 움켜쥘까 보아 매우 걱정이 되옵니다.)

아버지의 우국憂國을 모를 리 없는 왕후는

그럴 리가요. 아버님의 근심은 매우 깊으십니다. 부디 염려는 거두십시오.

라고 하지만 만에 하나 왕실의 안주인이 왕궁 안팎의 소식을 듣게 되고 하다못해 국정에 관여하게 된다면 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망하고 말 것이라는 게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 생각에 한없이 잠기고 있는 그때.

마마 장 대감이 들었습니다.

장 대감은 바로 오라버니였다. 장 대감은 그냥 통상적으로 불리는 칭호일 뿐. 아무런 벼슬을 맡지 못하는 신세지만 태후의 오라버니이기에 높이 부르는 수단일 뿐이다.

뫼시어라.

태후의 말에 밖에선

네.

대답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허름한 옷맵시를 한 가지런한 수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태후는 미소하며

그동안에 오라버니를 바로 만나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내가 알다시피 왕실의 안팎에 일이 많았기에 그리한 겁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셔요.

오라버니에게 말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아니옵니다. 마마. 상심이 꽤 크시겠사옵니다.

말을 잇지 못하고 태후는 눈물을 흘린다. 오라버니에게 공명功名의 기회를 주지 않는 지아비에 대한 야속함도 덩달아 치밀어 올랐다. 눈물은 강물을 이루듯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덩달아 흐느끼기까지 한다.

선왕의 생전에는 살생殺生을 금하는 일로 소일을 하였기에 파멸이라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폐왕廢王이나 다름없다던 궁왕(궁정승)과 그를 실정한 것을 구실삼아 찬탈簒奪해 왕위를 쟁취한 덕종은 파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선왕에 못지않게 아버지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주의平和主義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이에 아버지는 그예 선왕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일이 있었다.

(선왕께선 진정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기 힘든 이 세상에 저를 불러내어 결코 세상에 버릴 수 없는 인재를 만들어놓고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여러 임금들을 섬겼다. 수많은 인명을 죽이는 사건들이 있어왔고 박해를 막아내기 위한 필사의 노력들도 지켜보았다. 그 안에서 아버지는 살생을 피하고자 하는 필사의 노력을 다해왔다.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어루만지고자 전국을 떠돌아다녔고 왕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기존의 구세력과의 싸움 한복판에 나서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투쟁도 아끼지 않았다. 한 나라의 법전을 편찬하는데, 한 나라의 실록을 편찬을 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혁혁한 행적을 태후는 늘 자랑스러워했다. 한 나라 안에서 반란도 일으키지도 않고 오직 조정에 봉사한다는 아름다운 마음 하나로 일함에 선왕과 태후 당신은 아셨던 거다. 그랬기에 태후에게 왕이나 그 누구에게 오라버니한테 벼슬을 주지 말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마마. 이건 무엇이옵니까?

태후는 오라버니의 말에 서안 위를 바라보았다.

이건 왕비를 간택하고자 미리 모아놓은 단자입니다.

태후는 단자 하나를 꺼내 보이며

장차 황상의 배필이 될 사람을 뽑는 거지요.

단 세 개의 단자. 이 단자들 안에 어떤 얘기가 들어있을지 매우 궁금한 거다. 해서 세상 밖의 일을 알 법한 오라버니를 불러들인 것이다. 태후의 그런 의중을 굳이 내색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태후는 먼저 단자를 열어보았다. 그것에는 궁보조의 딸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궁씨 성을 본 그는 불안감에 멈칫하였다. 근심이 어린 얼굴이었다.

마마, 무슨 근심이시옵니까?

오라버니의 물음을 태후는 듣지 못했다.

무엇을 보셨기에 이리 근심해하시옵니까.

태후는 곧바로 오라버니를 바라보고 단자를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단자를 읽어보던 오라버니는

마마, 이건 궁보조의 딸에 대한 단자가 아니옵니까? 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물어본다.

다 좋긴 한데 궁씨라는 게 마음이 걸립니다.

그러자 오라버니는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음에 걸리시다니요.

태후가

웃을 일이 아닙니다. 내 일전에 이름 있는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도사의 말이 궁씨의 핏줄이 섞인 사람이 온 나라를 온 나라를 다스리다못해.

하며 말문을 잇지 못한다. 영문도 모르는 소리에 오라버니가

다스리다 못해 어쩐다는 것인지.

하며 기색을 살폈으나 태후는 말이 없었다. 태후의 뇌리에 그 도사의 말이 귓전을 맴도는 것 같다.

(온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고도 성에 차지 것입니다.)

태후의 근심은 더욱 깊어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도사의 말이 그리 맞지는 않으리라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 아닐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져본다. 이에 오라버니도 한몫을 담당했다. 궁보조의 딸은 성품이 온화하고 어질어 비렁뱅이들을 손수 거두어 양식을 주기도 했다는 것이 태후의 의심에 찌들어 있는 마음을 씻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단자들은 모두 하잘 것 없는 집안이었다.

이윽고 세 개의 단자를 두루 살핀 태후는 오라버니와 상의하여 궁보조의 딸을 포함한 세 개의 단자를 그대로 받아들여 삼간택을 진행하여 본 끝에 궁보조의 딸이 왕후로 점지하였다. 태후는 왕후로 뽑힌 규수를 불러다 보았다. 태후가 예감한 대로 참하고 어질어 보였다.

왕의 나이는 스무 살. 그녀의 나이는 열여덟. 꽃같이 예쁜 며느리를 얻었다며 태후의 아버지도 매우 흡족해했다.

태후 마마. 경하 드리옵니다.

아버지 장보공의 인사에 태후는 눈물이 앞섰다.

우리 왕실에 큰 근심이 없을 것이옵니다.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오랜 세월동안 끊이지 않던 왕실의 우환은 선왕 대에 이르러서야 그치고 백성들은 모두 태평성대를 부르니 일러 말해 무엇 하리.

선왕의 장례를 모두 치른 뒤 왕은 업무를 시작했다. 영의정 이하 모든 대신들이 모인 회의에서 왕은 궁보조의 딸을 보화왕후寶化王后라 봉하여 왕비로 맞이하였다.

재위 2년 왕은 강원도 아래에 웅거雄據한 재등齋藤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는 왕인 춘추春秋의 아들을 볼모로 삼았다. 그는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은밀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가 사병私兵을 거느릴 정도의 실력가로 성장해 있었다. 하여 마음만 먹으면 나라를 하나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하늘 높은 줄 모를 실력이라니 왕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일개 태수가 어떻게 감히 남의 나라처럼 행세를 한단 말인가.

하기는 명색이 일개 태수太守가 한 지역의 토호土豪 하다못해, 한 나라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정도의 막강한 실력이 되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잠시 고개를 수그릴 뿐. 언제 어떻게 반란을 일으킬지 장담을 못한다.

왕은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을 대비해 각처에 사람을 보내 이름 있는 화사師들을 모두 불러들이니 왕의 의중을 모르던 신하들은 일제히 의아해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뜻이 있었으니, 왕의 뜻은 다음날에 이르러서야 밝혀졌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모습을 그린 어진御眞을 보여주니 신하들은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어진은 모두 아홉 장이나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잘 그린 그림을 골라 그림이 놓인 자리 앞에 서보게 하여 선택하도록 하니 왕은 그 중 가장 많이 서 있는 자리의 그림을 가지고 인편으로 재등국을 찾아가 전하도록 하니 재등국의 왕이 그림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어냈다.

이튿날. 재등국의 왕자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왕은 통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어 놓고 말하길,

이를 어이하면 좋단 말인가. 재등국의 왕자가 사라지다니. 왕자가 왜 사라졌는고.

재등국의 국왕은 왕자가 탈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계기로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윽고 반란이 일어나니 강원도는 물론, 도성에 이르기까지 반란군의 세력이 위세를 떨쳤다. 왕과 왕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은 급한 김에 자애궁으로 피신을 하였다. 자애궁은 전에 살던 대궐과는 다르게 민가와도 외진 곳에 있고 사방이 숲으로 우거져 있기에 요새나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왕경王京의 대궐을 포위한 재등국의 군사들은 대궐 안에 사람이 없음을 모르고 왕에게 나오라며 윽박질렀다. 결국 내관들에게 왕과 왕비로 분장한 뒤 바깥으로 나오도록 거짓으로 항복을 선언하자 재등국의 장군은 왕인 줄로 알고 두 사람을 죽이기에 이르러 두 사람의 수급首級을 베어 가져가 재등국의 진영으로 갔다. 그런데 재등국의 왕 춘추가 이를 보더니 두 사람이 남자임이 드러나 이를 가져온 장군을 불문곡직하여 죽이고 춘추는 대궐을 점령하였다. 점령한 왕은 대궐을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자애궁에 피신하던 왕이 이 소식을 들으니 비분강개하며 통곡하고 말았다. 이에 왕은 자애궁과 빗대어 전에 살았던 대궐을 창인궁昌仁宮이라 칭하니 한밤중에 왕은 어둠 속에서도 불타는 대궐의 모습을 왕은 눈물로 지켜보았다.

재위 3년 여름까지 도성과 왕궁(창인궁)을 포위하고 있는 재등국의 진영으로 중중정 온의를 사신으로 삼아 보내도록 하였다. 온의는 온일흥의 아들이었다. 온의는 외교술에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다. 온의는 재등국의 왕 춘추에게 이렇게 물었다.

문흥을 일으키고자 노력하는 황제폐하를 어찌 욕하려든단 말이냐?

춘추가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지금의 국왕이 선사국의 태조 궁정승의 자손인가?

온의도 덩달아 기가 막혀 실소하며 말하길,

재등국의 왕인 그대가 가한可汗으로 있을 제 궁 정승의 무용담을 모른단 말이냐. 그 무용담을 지나가는 개가 웃는 소리라고 하면서 문전박대하고 우리 궁 정승 전하를 욕되게한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자가 아니던가. 근데 그대도 그 자손이시건만 어찌하여 우리 전하의 무공을 헤아리지 못한단 말이던가. 그러니 같은 궁 정승의 자손끼리 모를 까닭이 없지 않던가.

춘추는 온의의 비꼬는 태도를 꼬투리 삼아 꾸짖기 시작한다.

그러면 네놈의 국왕이었던 궁정승은 어째서 전조의 왕자를 태자로 삼은 연유가 무엇인가?

온의는 기가 찼으나 덤덤하게 대답한다.

우리 왕조는 본시 하나의 성씨가 세습하는 것이 아니었네만 돌아가면서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한 것이니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럼 왜 궁정승의 왕후를 폐하였는가?

춘추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온의는 침착하게 말한다.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왕위를 찬탈했다는 반역을 저지른 대가를 치를 것을 염두에 둔 까닭이지. 허허허허, 일개 재등국도 그런 수모는 당했잖은가.

웃음을 터뜨리며 재등국의 약점을 말한 온의를 두고 춘추는 두려움을 느끼고야 말았다. 한때 온의와 같은 나라의 신하로 있었던 자신이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었다. 항상 평정심을 가지고 유지하며 사리분별에 어긋남이 없었다. 재등국은 영토가 지금의 경상도 전역과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 대마도에 이르렀다. 수십 년 동안 궁 정승에게 충성을 하다가 덕종이 보위에 오름과 동시에 온 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 나라를 새로 세워 다스리던 재등국은 온의라는 복병을 만나면서부터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온의로부터 재등국 왕의 말문을 막히게 했음을 듣고 왕은 매우 기뻐하여 재등국이 전의를 상실함을 깨닫고 친히 나서서 재등국으로부터 짓밟힌 창인궁과 도성, 그리고 강원도를 수복收復하였다. 이에 놀란 재등국의 국왕과 왕자는 재등국의 영토로 달아나고 말았다.

재위 4년 보왕의 전례에 의해, 한성 동부 지역에 중한성부中漢城府를 설치하여 부사를 파견해 다스리도록 했다. 그리고 왕은 오위의 군사들을 거느리어 출정出征하니 재등국의 수도인 서라벌徐羅伐을 정벌하여 재등국의 왕 춘추의 수급을 베어 죽이고, 그 왕자를 재등태수로 삼았다. 이는 재등국의 멸망을 두고 혼란해하는 그 나라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재등국의 수도에 감영監營을 세워 그것을 다스리도록 명하니 시일을 두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재위 5년 동한성부와 중한성부의 인근 지역을 덕양이라 부르도록 하고 그곳 중심지를 덕양군으로 삼았다.

재위 6년 왕후가 딸을 낳았다. 이 아이가 훗날 덕의공주로 불리는 아기씨니, 이 아기씨가 이 나라를 여자의 몸으로 경영하였으나 수많은 인명을 다치게 할 폭군으로 기록이 될 줄 누군가 알았으랴. 아마도 도사가 이를 두고 염려하여 예언한 까닭이 있으리라.

재위 7년 정초에 새로이 치른 과거에서 온의 이하 열두 명의 인재들을 등용하였으니 이미 부모가 벼슬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왕은 친히 이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어 훗날 나라의 동량이 될 것임을 기뻐하니 온 신하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같은 해 8월 왕이 공주를 낳았다. 이름을 의소義昭라 하였다.

재위 9년 왕은 공주를 낳았으며, 이름을 월소月昭라 하였다.

재위 11년 태자를 낳았다. 왕은 태자를 보자 화색이 만연했다. 그 연유를 신료 하나가 물어보니 왕은 잘못하다 태자를 낳지 못하면 공주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데 여자가 정사를 다스릴 수 없다는 여론이 있음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는 맏이 덕의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했다. 왕은 왕후의 후덕함을 큰 위안으로 삼아 편안한 마음으로 정사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재위 14년 2월에 왕이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중중정에 온의를, 중중정대신에 장병보, 중중정판서에 동방신기, 중중정판사에 동방신지, 왕내대신에 동방우주, 대사에 동방의시, 소중정에 동방아시, 소중정대신에 동방우조, 소중정판서에 동방운, 소중정판사에 동방우, 중정대대신에 동방종, 중정대판서에 동방진, 중정대판사에 동방위를 임명하였다.

같은 해 시월. 영의정을 지낸 백을이 병환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나이가 연로하였으므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이를 사양하니 하는 수없이 연임을 했으나 곧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누우니 왕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정사를 돌보지 못한 채 곡을 하였다.

이에 왕은 다시 인사를 개편했다. 영의정에 장보공을, 좌의정에 도국을, 우의정에 온하수를, 좌찬성에 봉용서, 우찬성에 온일흥, 좌참찬에 온연방, 우참찬에 궁호보를 명하였다. 그리고 강원도관찰사에 온의, 강원도도사에 장병보를 임명하고, 명예직名譽職으로 대부大夫를 세우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궁보조, 보국숭록대부에 영랑, 숭록대부에 길보, 숭정대부에 길석, 정헌대부에 황보국, 자헌대부에 남궁부를 임명하였다. 중중정과 중중정대신의 관제를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재위 18년 가정대부에 옥보를, 영중추부사에 동방신기, 판중추부사에 동방신지, 지중추부사에 동방우주, 동지중추부사에 동방의시, 첨지중추부사에 동방아시, 중추부도사에 김공달, 중추부경력에 설언호를 명했다. 그리고 강원도검률에 동방우조, 강원도심약에 동방운을 명하였다. 뒤이어 중중정판서와 중중정판사, 그리고 왕내대신과 대사, 소중정, 소중정대신, 소중정판서를 혁파하였다.

재위 19년 또 다시 인사개편을 하였다. 가선대부에 유월야, 통정대부에 양광웅, 통훈대부에 임희량, 중직대부中直大夫에 고태박,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조연, 의정부사인에 정말다, 의정부검상에 남궁병, 의정부사록에 옥상, 이조판서에 동방우, 이조참판에 동방종, 이조참의에 동방진, 이조정랑에 동방위를 임명하였다. 왕은 선대에까지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던 선진 세력과 후진 세력. 이들 세력의 싸움이 후진 세력의 승리로 기울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은 소중정판사와 중정대대신, 그리고 중정대판서와 중정대판사를 혁파하였다. 그러나 선진 세력의 와해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들 잔당殘黨은 크게 두 갈래로 다시 갈라졌다. 온건파穩健派와 과격파過激派로 갈라지고 말았다. 실권은 온건파가 움켜쥐고 있었으니 그 대표는 영의정인 장보공이 맡았다. 과격파의 대표는 우참찬 궁호보였다. 그러나 말이 좋아 그렇지 실상은 구색具色을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재위 20년 그동안에 각 관청에서 대리로 업무를 맡던 옛 인부의 관제를 이조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왕의 정무는 신속하고 정확하여 조정의 잡음은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왕실의 공기도 맑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선정으로 다스리고자 하였으며 역모가 일어나지 않은 만큼 고요한 산사山寺의 모습과 같았다. 왕실은 왕후의 후덕함에 의해 안정됨을 느낄 수 있었다. 태자는 이제 갓 열 살이 되었다. 한데 태자는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어머니의 무한한 보살핌과 누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사개편이 이루어질 무렵, 이제 막 봄이 움트기 시작한 계절이다. 산에는 진달래, 들에는 개나리,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농토에는 개구리가 울기 시작하고 지척에는 쑥과 냉이들로 나물이 들풀과 같이 풍성하게 자랐다. 백성들은 태평가를 부르며 하나둘 나서서 쑥과 냉이들을 캐기 시작하였다. 왕은 춘궁기春窮期를 이유로 왕실과 각 관청에서 곳간에 가득 찬 곡식들을 두루두루 풀어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하였다. 왕실은 그만큼 태평하였다. 그 속에서 왕실은 한층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정자에 나온 왕후는 아들딸들을 불러다 조그마하게 찻상을 차려놓고 봄에 무르익은 경치를 만끽한다. 모두들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다.

어마마마, 소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맏이 덕의가 왕후에게 무엇인가를 작심한 듯 제 의사를 표한다.

말하라.

왕후는 맏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본다.

장차 제가 시집을 갈 나이가 된다면 어머니 친정집에 시집을 가면 아니 될까요?

그 순간 왕후의 찻잔 든 손은 가늘게 떨린다.

외갓집에 시집을 간다니?

맏딸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저는 다른 집에 시집가기 싫습니다. 외갓집이 더 정감이 가고 편하기도 하와

그때 어미의 눈빛은 돌연 험악해진다.

거 당돌한 소릴 하는구나. 어째서 궁씨 집이 편안하다는 게냐. 역대 군주들께서 궁씨 집과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한데 그 말씀을 어기고 네가 당돌하게 어른들의 말씀을 거약하려드느냐!

어미가 소리치는 걸 다른 왕손들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게 왕후가 뜬금없이 날카롭게 맏이를 대하는 게 의혹을 사고도 남을 것을 짐짓 알아채기에 이르렀다. 차츰 자라면 자랄수록 비밀은 드러나게 마련인 걸 왕후는 모르는 게 아닐까.

그렇게 기분이 좋다가도 금방 덕의의 일로 인해 사그라지는 게 일상이었다. 왕후에게 도사가 인명을 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대신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다.

(마마, 마마께오서 살생을 금하고자 하신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마마의 친정인 궁씨 일가와는 연을 맺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그래야만 이 나라의 장래가 밝아질 겁니다.)

(그, 그렇다면.)

(하루 속히 궁씨와의 관계를 끊어야만 살아남사옵니다.)

그러나 왕후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철없을 적에만 해도. 하지만 아이들의 철이 서서히 들면 들수록 왕후의 마음은 좀체 눈엣가시로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고 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도사가 한 예언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특히 맏이인 덕의의 마음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 더욱 그렇다.

조정에서는 궁씨 일가가 벼슬에 나아가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접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도사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다.

왕후가 아랫것을 시켜 도사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묘연하다는 것 뿐. 다른 행적은 없었다.

재위 24년 정월에 중서한성부와 남북한성부를 설치하였다. 모두 도사를 두게 하였다. 그리고 덕양군을 혁파하였다. 왕은 대신 덕양군 일대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좌덕양도, 우덕양도라 하였고 이 두 곳에 도사를 두었다.

같은 해 팔월에 궁씨들이 다스리던 때 유지되어온 모든 관제들을 폐지하고 재등국의 수도인 서라벌을 경주慶州로 바꾸고 그곳에 관아를 세워 그 일대를 경상도慶尙道라 하였다. 경상도는 임시관청이 설치되어 그곳 수장을 도지사道知事로 삼았다.

재위 27년 연말에 접어들어 동한성부를 폐지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서남북중으로 나뉜 한성부를 모두 혁파하여 하나의 한성부로 다스리도록 관제를 개편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전임 부사들을 모두 파직하여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재위 28년 정월에 새로이 한성부 관아를 세워 관제를 개편하여 새로이 인사를 단행했다. 인사를 단행한 이들은 이러하다.

좌도수운판관左道水運判官에 동방섭, 우도수운판관右道水運判官에 동방존, 해운판관海運判官에 동방자, 낙하도승洛河渡丞에 궁보사, 노량도승鷺梁渡丞에 궁호(궁진), 벽란도승碧瀾渡丞에 백덕을, 삼전도승三田渡丞에 봉길조, 양화도승楊花渡丞에 초말, 임진도승臨津渡丞에 초반, 한강도승漢江渡丞에 황보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초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초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초재,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초마,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에 초하, 한성부주부漢城府主簿에 초조,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에 초방을 명하였다.

재위 29년 정월에 영돈령부사 이봉소가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노구老軀의 몸이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병환에 있었던 까닭에 조정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왕은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후임을 이운소에게 맡겼다. 뒤이어 이방소를 판돈령부사에, 도원을 지돈령부사에, 도위를 동지돈녕부사, 도봉을 돈령부도정, 도진을 돈령부정, 도우를 돈령부부정, 도석을 돈령부첨정, 고태수를 돈령부판관, 동방일을 돈녕부주부에, 동방속을 돈녕부직장, 동방봉우를 돈녕부봉사, 구영성에게 돈령부참봉에 명하였다. 상서원의 모든 관직은 오위장에 맡아보는 벼슬아치들에게 맡아보도록 명하였다.

같은 해 구월에 호판성을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신강을 봉렬대부奉列大夫, 권봉달을 조산대부朝散大夫에 봉하였다.

재위 30년 맏이 덕의공주를 시집보내자는 왕의 명이 떨어졌다. 제각기 신하들은 왕에게 단자를 내놓기도 하였으나 모두들 마땅한 혼처婚處가 없었다. 이에 근심하던 왕이 궁씨 집안에서만 내놓지 않음을 눈치 채고 왕후에게 찾아가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왕후는 도사의 말이 귀청에서 맴도는지라 갈피를 잡지 못하노라고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하여 왕은 도사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대수롭게 생각하지 말고 하늘에 제사나 드리면 되는 게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하여 왕후는 아버지인 궁보조를 불러다 이를 토로하니 궁보조가 웃으며 말한다.

마마, 그 하찮은 도사의 말을 가지고 어째서 마음을 쓰십니까. 소문에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사온데 굳이 도사의 말만을 믿고 공주마마의 앞길에 거슬러서야 되겠습니까. 하오니.

알겠습니다. 아버님.

……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소서.

대궐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드리기 어려우니 아버님께서 손수 집에서 제사를 지내드리게끔 해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궁보조는 웃으며 왕후의 말씀을 알아들었다고 고한다. 이윽고 이튿날이 되어 그는 사당에서 제사를 후히 지냈다. 그러자 사당 안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궁씨와 사돈을 맺어는 주마. 그러나 후에 책임은 덕의공주 마마께서 지셔야 함은 두말할 것이 없다네. 만약 덕의공주 마마가 감당하지 못하면 그 아드님이나 따님이, 그도 여의치 않으면 손주들께서 책임을 져야함이다. 그것은 차차 궁씨 집안엔 업보業報로 갈 것이요, 나라에는 후환後患으로 다가갈 것이니 이를 명념할지니라.

평소 순하다는 소문이 있는 궁보조의 성품은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여 궁보조는 순응하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궁보조가 왕궁에 직접 찾아가 중전을 알현하여 이를 고하니 중전이 흡족하게 받아들여 덕의공주를 혼인시키도록 명하였다. 덕의는 미색이 뛰어났고 요염하기 그지없었으나 지나치게 총명하므로 공사를 구별하는데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이 중전에게는 늘 근심거리로 다가온 것은 두말할 것 없다. 궁보조는 자신의 친정집에 혼처를 얻어낼 수 있었다. 궁보조의 조카이자 궁보사의 아들인 궁호를 부군으로 세웠다. 이에 왕후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였으니 혼사를 이루었다.

재위 34년 의소공주를 박천보와 혼사를 치르고, 그 직후에 월소공주를 온제와 혼사를 치르도록 하였다.

재위 35년 태자가 장성하여 강원도관찰사 온의의 딸과 혼사를 치르도록 했다. 같은 해 혼사를 성대히 치른 것을 기화奇貨로 병을 이유로 사직한 장보공을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한 것을 시작으로, 도국을 영의정에, 온하수를 좌의정, 봉용서를 우의정에, 온일흥을 좌찬성, 온연방을 우찬성, 궁호보를 좌참찬에, 온의를 우참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병보를 강원도관찰사로, 궁보조를 강원도도사로 보내도록 하였다.

재위 36년에 장보공이 세상을 하직하니, 시호를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이라 하였다.

재위 37년 왕은 병약해짐을 느낀 나머지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앉고자 하였다.

덕의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인 왕후의 말씀대로 항상 지아비에게 순종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여할 새도 없었다. 왕궁이 지척에 있었음에도 항상 출입하지 않고자 했으며 인사를 드릴 때는 아랫것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왕궁 안에서 왕후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였다. 행여 딸의 신상에 문제가 될까 매우 우려되지만 후환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조상의 말씀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참아야함을 느낀다.

그러나 덕의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부군인 궁호로 하여금 직언을 올리도록 하였다. 태상왕에 올라가는 것을 반대하도록 권하였다. 궁호가 필두로 나서서 태상왕으로 올라서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왕의 진노를 사 근신謹愼 처분을 내리도록 하였다. 재위 38년 정월에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와 태상왕으로 앉으니 태자가 직접 옥새玉璽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덕의가 놀라 혼비백산한 듯 통곡을 하는 게 아닌가.

남편이 근신하고 있음에 분개하던 그는 직접 대궐로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대궐에는 대비大妃로 앉은 어미가 있었다.

대비전大妃殿에 들어선 덕의를 대비가 직접 나서서 그 손을 마주 잡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덕의야, 이 어미는 너를 보고 싶어 얼마나 병이 들었는지 모른다.

울음 섞인 말로 반기는 어미를 덕의는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덩달아 목 놓아 울었다.

대비마마―

평시에 대비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맏딸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다. 이들 모녀는 서로 글을 읽고 쓸 줄 알아 서찰로서 주고받았다. 그리고 태자비를 맞이할 때 온의의 딸로 점지할 때 덕의공주의 도움을 받아 맞이하기도 했다. 예부터 여자가 정사政事를 돌보는 게 흉허물과 같은 처사로 여기는 터였지만 물정에 어두운 대비인지라 전적으로 덕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터에 간만에 태상왕의 어지御旨를 받아 큰딸을 불러보도록 하니 대비는 가뭄에 갈라진 땅에 단비를 만나듯 기쁨의 눈물이 그칠 길이 없는 것이다. 이제야 어머니를 만나게 한 태상왕이 더욱 야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대비는 눈물을 거두고 자신의 근심을 흉허물 없이 털기 시작한다.

왕위에 막상 올려놓았더니 노쇠하기 이르기 없는 대신들을 다루기가 매우 힘이 든 모양이네. 해서 내 자네를 불러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네. 해서 태상왕이 자네를 귀히 여기셨음을 알기에 직접 불러다 보시려는 모양이다.

그렇사옵니까.

덕의는 수줍음을 타며 웃는다.

그래, 아버지를 찾아뵙겠는가.

웃으며 왕대비가 덕의의 의중을 물었다.

네, 찾아뵙겠나이다.

공손히 인사하여 물러난 뒤 곧장 태상왕전을 찾았다. 태상왕을 찾은 덕의는 아버지를 인사한 뒤 아버지에게 의중을 물었다. 그러자

역시 내 딸이 역시 영특英特하기는 하구나. 하하하하.

파안대소하는 상왕을 덕의는 말없이 바라본다.

덕의는 상왕의 의중을 들을 수 있었다. 상왕은 영의정 자리에 다음 후임을 누구로 할 것이며 병약한 금상을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지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덕의는 온화한 성품을 가진 온하수를 영의정에 임명하도록 하고, 봉용서를 좌의정, 온일흥에게 우의정, 온연방을 좌찬성에, 궁호보를 우찬성에, 온의를 좌참찬에, 장병보를 우참찬에 임명하여 왕의 곁에 돕도록 하였다. 왕의 친위로서 지키도록 하였다. 같은 해 시월에 도국이 병으로 세상을 떴다. 왕은 장보공의 전례에 따라 시호를 내리도록 하였다.

같은 해 십이월에 궁보조를 강원도 관찰사에, 숭록대부 길보에게 강원도도사와 겸직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왕실의 일원인 영랑이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덕의는 바로 영랑에게 영의정으로 맡기도록 하는 술책術策을 만든 것이었다.

재위 2년 태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기쁨이 오면 슬픔도 오는 법. 영의정을 맡은 온하수가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천수를 누린 덕에 슬픔은 크지 않았다. 왕은 영의정으로 봉용서를 임명하였고, 좌의정에 온일흥을, 우의정에 온연방을, 궁호보를 좌찬성에, 우찬성에 온의를 임명하였다. 온씨 일가가 왕의 외척으로 군림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뒤이어 장병보를 좌참찬에, 왕족인 영랑을 우참찬에 임명하였다. 영돈녕부사 이운소를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임명하였다. 이방소는 영돈녕부사, 도원은 판돈녕부사, 도위는 지돈녕부사, 도봉은 동지돈녕부사, 도진은 돈녕부도정, 도우는 돈녕부정, 도석은 돈녕부부정, 고태수는 돈녕부첨정, 동방일은 돈녕부판관, 동방속은 돈녕부주부, 동방봉우는 돈녕부직장, 구영성은 돈녕부봉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겸직으로 호판성을 돈녕부참봉에, 신강을 보안도찰방保安道察訪에, 권봉달을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에, 유월야를 상운도역승祥雲道驛丞에, 양광웅을 평릉도역승平陵道驛丞에 임명하였다.

재위 3년 삼월. 이른 봄이 찾아왔다. 이때 왕족 영랑의 집에서는 한동안 주연이 베풀어졌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같이 온씨의 세도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에는 덕의공주의 시아버지 궁보사도 여기에 있었다.

온 백성들이 온씨가 세도를 얻었다고 원성이 자자합디다. 어떻게 된 것인고 보니 백성들의 구휼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관청의 곳간을 곳곳에 뒤지듯 열어 들여다보고서 마치 제 것인 마냥 아랫것들한테 입단속을 시키고서 훔치더라는 겁니다.

궁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상감께 고하였습니까?

보다 못해 돈녕부도정 도진이 물어보았다.

고하려고 하였으나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을 안 하더이다.

허허, 그거 참.

답답하게 느낀 궁보사는 입을 다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며 생긋 웃는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영랑이다. 왕실은 고씨高氏성을 가진 까닭에 왕실은 물론, 왕족들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부 세도가들, 궁씨는 물론 온씨와 같은 세도가들이 하나같이 고씨가 나라 일에 참견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왕족이 정사에 관여하게 된다면 왕위 계승에 대한 갈등이 야기될 뿐만 아니라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 나라의 기강이 무너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참고로 고영랑은 궁 정승이 반란하기 직전, 그러니까 마지막 왕 이전에 보위에 오른 임금의 맏아들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때의 젊음을 이유로 방탕한 행실을 보여 왕인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태자 자리에서 내려와 아래동생이 보위를 이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내막이다. 하지만 그걸 모를 리 없는 영랑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가뜩이나 민심의 흉흉해짐을 우려하는 두 대신들의 고견高見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던 셈이다.

영랑은 이에 힘입어 처음 입을 열었다.

개가 먹을 것을 더 주면 아예 좋다고 꼬리를 흔들더니만 딱 그 짝이네 그려.

이때 기회를 엿보던 궁보사는

대감, 대감께서 내일 어전회의 때 공론으로 세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랑에게 당부하는 것이다.

이윽고 궁보사의 말마따나 다음날, 어전회의에 대신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때 영랑이 직접 나섰다. 온씨의 전횡을 만천하에 드러내자 왕이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왕실의 일원이라고 해도 나라의 녹봉을 먹고 있는 대신들의 처신이 말이 아님을 한탄해하던 임금은 온씨 성을 가진 대신들을 불러다 문책하여 당분간 조정 일에 나서지 말고 근신만 하도록 명하였다. 이후에 인사를 단행했다. 초항을 이조좌랑에, 초발을 조봉대부朝奉大夫, 초포다를 통덕랑通德郞, 박천보를 통선랑通善郞, 안백호를 봉직랑奉職, 구령을 봉훈랑奉訓郞에 임명했다.

재위 3년 오월 초하룻날. 영의정 봉용서가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이 세상을 떠나자 후임을 온일흥에게 넘겨주고자 했으나 가뜩이나 중외中外에서 온씨에 대한 원성이 자자함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자 왕이 대노하여 온씨 성을 가진 대신 세 명을 불러들여 질책叱責하기에 이르니 좌의정, 우의정, 우찬성 직책을 거두었다. 온일흥을 승의랑承議에, 온연방을 승훈랑承訓, 온의를 선교랑宣敎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궁호보에게 겸임에 우찬성으로 삼고, 영랑에게 영의정을 삼고서 좌우의정에 겸임토록 명하였다. 그러면서 왕이 말하길,

봉용서만큼 강직하고 어진 이가 드물었다. 하나 아래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뒤이어 인사를 단행했다. 겸임 중심으로 단행했다.

동방신기에게 선무랑宣務을, 동방신지에게 무공랑務功, 동방우주에게 계공랑功, 동방의시에게 통사랑通仕, 동방아시에게 승사랑承仕郞, 김공달에게 종사랑從仕, 설언호에게 장사랑將仕에 봉하였다.

재위 4년 태후가 하세하였다. 이에 대비가 태후에 봉해졌으니 왕은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재위 10년 태상왕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위종衛宗이라 하였다.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재위 40년 태후가 하세하고 시호를 영화태후永和太后라 봉하였다. 상감은 나이가 들만큼 들었다.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던가. 승의랑 온일흥이 세상을 떠났다. 온일흥은 오랫동안 천수를 누렸다. 왕의 근신하라는 명이 때로는 야속할 법도 하건만 나라로부터 죽음을 당하지 않고자 한 왕의 배려였다. 금상은 큰누이를 두려워하였다. 온일흥이 죽으면서 큰누이를 일컬어 피를 보고도 모자라, 피에 목말라 할 사람이라고 하며 경계하라고 직언했기 때문이다. 왕이 온일흥에게 덕수德壽라는 시호를 내렸다. 온일흥의 자손들은 왕으로부터 사면을 명받았다.

같은 해 겨울, 온연방에게 좌의정을, 궁호보에게 영의정, 온의를 우의정에 봉하였다. 그리고 왕족 출신인 고영랑에게 승의랑에 봉하였다. 덕의는 이 소식을 듣고 약간 실망해하는 기색이었다. 궁보조가 공주의 모양에

마마, 왜 그러시나이까. 영랑의 권세가 마마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사옵니까. 그 덕에 태평을 누릴 만큼 누렸나이다.

아랑곳없이 병을 주고 약을 주듯 한다.

나이가 들을 만큼 들었을 덕의. 그러나 그녀의 권력욕權力慾은 상상을 넘고도 남음이 있었다. 금상이 태자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혼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음을 근심하였다. 이에 왕이 혼처를 마련해보았으나 마땅한 규수閨秀가 없었다. 하여 보다 못해 이를 가지고 어전회의에 마련을 모색하니

승의랑 신 고영랑, 상감께 아뢰오. 태자마마의 혼처를 마련하지 못하심을 근심하오는 심정을 헤아리어 아뢰는 바 덕의공주 마마의 장남인 궁양동의 딸이 있사온데 성정이 할머니와는 달리 온순溫順하고 참한데다 사서삼경에 능통하거니와 몸가짐이 발라 어질기도 하니 삼가 헤아리시어 태자비로 봉하심이 어떻겠나이까?

물론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으나 덕의의 덕분에 일인지하一人之下에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오른 그였기에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마음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한 가지 흠이 있사옵니다.

왕이 물었다.

흠이라고 하셨소?

그러하옵니다.

흠이라면?

그에게 마땅한 벼슬이 없었나이다.

왕은 희미하게 근심하는 눈치다. 그러더니

태자비에 봉하기는 하겠으나 장차 태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으니 부원군에 봉하는 것부터 서두르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영돈녕부사 이방소가 반대하고 나섰다.

부원군에 봉하심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에게 벼슬을 주지 않으신 채로 부원군에 봉한 전례는 없을 뿐만 아니라 흔치 않사옵니다.

그때 보다 못한 영랑이 덕의의 비위에 거슬린 그를 책망하며

부원군도 벼슬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조정 일에 나설 수 있지 않겠소. 물론 벼슬을 제수除授받아놓은 터에 부원군이 된 일이 흔한 것은 압니다. 허나 궁 정승 때도 굳이 여식을 왕후로 책봉된 것만 가지고 부원군에만 봉해진 일이 없으니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소이다.

왕실의 어른으로 있는 영랑의 말에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신하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이에 힘입은 듯 왕은

덕의의 아들 궁양동을 덕충부원군德忠府院君에 봉한다.

고 명했다. 이때 덕의공주의 집안에서는 한바탕 잔치가 베풀어졌다. 덕의를 며느리로 맞이한 궁씨 집안에서는 웃어른이든 아랫것이든 상관없이 모두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상전으로든 아랫것으로든 집안일을 거들어도 존대를 받는 것이다. 그녀는 영화태후의 생전에 맏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했었지만 살림을 하는데 헤픈 구석 하나 없었고 음식솜씨와 집 안팎의 살림을 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살림에 능숙하여 주위 아랫것들에게 존경을 받고 웃어른에게는 무한한 신임을 받았다.

덕의는 안채에 살고 있었다. 안채로 들어선 맏아들 양동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러 들어오자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는 자신이 앉은 보료에서 일어나 아들에게

이 어미가 인사를 드리겠나이다.

하며 어미인 자신의 자리에 앉도록 권하는 게 아닌가.

아니, 어머니,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아들의 뜻은 나 몰라라 하고 권하는지라 양동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그러더니

이 어미 때문에 태후께서는 생전에 근심을 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을 죽이고 못살게 구는 팔자라고 하더이다. 그래서 이 어미가 궁씨의 핏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까닭에 이 집에 시집을 보내는 것을 극구 마다 하셨어요. 그런데 시집을 보내고 나니 마음에 진 빚을 지셨다고 자책하시는 모양입니다. 해서 이 어미가 시집을 온 지 오래 되어서야 상봉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기에 태후마마의 비호를 받아 가끔 가다가 조정의 일을 도와 달라 신신당부하였고 얼마 전에 승의랑께서 몸소 나섰습니다. 그 양반도 어미에게 진 빚이 있으신 모양입디다. 하하하하.

만감이 교차함을 감추지 못하며 울먹이듯 하면서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언사言辭에는 어떨 때는 자기합리화에 젖은 듯하고 어떻게 보면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들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탓도 있었다. 이를 모를 것이 없는 양동은 그냥 그저 경청할 따름이다.

이튿날 아침에 왕은 몸소 나서서 왕실의 웃어른인 고영랑의 의지에 따라 궁양동의 딸을 황태자비로 봉하였다. 그에 맞추어 왕은 선보궁주라 봉하였다.

재위 42년 왕족 출신인 영랑이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천수를 누렸으니 편안한 생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이 이를 애도하며 명룡대군이라 봉하였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다. 그 후임으로 덕충부원군 궁양동을 제수하였다.

재위 43년 왕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시호를 개종開宗이라 하여 태자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새로 왕위에 오른 금상이 태후에게 경화왕후라 존호를 올리니 만조백관이 이를 기뻐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태자를 보았다. 그것도 잠시. 좌의정 온연방이 세상을 떠난 것을 시작으로 이틀 뒤에는 영의정 궁호보가, 그 다음날 우의정 온의가 세상을 등졌다.

이듬해 왕은 새로운 인사를 개편하였다.

장병보를 영의정에, 궁보조로 하여금 좌의정과 겸임인 우의정을, 길보에게 강원도 관찰사에, 숭정대부 길석을 강원도도사에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헌대부 황보국에게 좌찬성을 겸임하도록 하고, 자헌대부 남궁부에게 겸임으로 우찬성을, 가정대부 옥보에게 겸임으로 우참찬을 맡게 하였다. 삼일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이운소를 삼고초려로 설득하여 좌참찬에 겸임하도록 하였다.

재위 2년 왕이 직접 나라에 인재가 부족함을 한탄해하며 말하길,

옛 고금古今의 일들을 상고하니, 작금昨今에 이르러서도 특정 가문의 전횡에 따라 대대손손代代孫孫으로 벼슬을 얻으니 그 폐단이 적지 않은 데다, 이로 말미암아 왕실에 큰 폐를 끼치어 조정과 왕실에 큰 위협을 야기하니 내가 직접 과거를 열어 나라의 새로운 동량지재棟梁之材로서 쓰고자 함이니라.

하여 왕은 먼저 과거를 통해 열 한명의 인재를 손수 뽑아 써서 왕의 친위 세력으로서 새로이 쓰고자 하였다. 이후 왕은 인재들을 뽑아놓고 이틀 뒤에 교서관校書館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하루빨리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여 나라에 이바지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를 두고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왕이 사사로이 기구를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가뜩이나 국가의 재정이 궁핍하고 국토가 협소하여 백성들이 편히 경작할 땅조차 마련하지 못하므로 책을 읽을 여유조차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토가 오늘날 서울, 경기도, 그리고 강원도와 경상도로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은 신료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웃음으로 넘겼다. 하여 왕이 말하길

경들은 일전에 과전을 얻어 땅들을 나누어주었는데 그 땅 말고도 드문드문 자투리땅까지 남아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 않소.

왕의 말에 신하들은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이들은 모두 사사로이 백성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재산을 축적한 까닭이다. 이것이 결국 오랫동안 1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갈등을 빚은 선진과 후진의 싸움으로 번져갔다. 이들의 싸움은 점차로 가서 선진 세력 안에서의 싸움으로까지 번져갔다. 과격파의 수장격인 길보가 나서며 오늘날 나라가 지탱되는데 한몫을 한 대신들을 모른 체 하느냐며 왕에게 다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교서관 설치를 강행했다. 하여 새로이 교서관에 대한 인사들을 등용했다.

우선 교서관제조校書館提調에 제인諸仁. 교서관판교校書館判校에 홍가洪可,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에 염건식廉宣植, 교서관별좌校書館別坐에 현사玄沙, 교서관별제校書館別提에 여범呂範, 교서관박사校書館博士에 최민崔敏,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에 서상범徐相範,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송찬수宋燦洙,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백무현白武賢, 교서관사준校書館司准에 대현大絃, 교서관사감校書館司勘에 하정河亭을 임명하였다.

왕은 선진 세력에 속한 대신들의 우려와는 달리, 교서관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생활의 질을 향상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국력을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왕의 혜안慧眼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재위 8년 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정무를 중단하였다. 왕의 병환으로 인해 신하들의 근심이 더 컸으니 나라의 인심도 그에 따라 흉흉하였다.

이때 경상도에서 도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왕이 대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으나 삼년 동안 경상도 각처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으니 왕의 근심이 더해만 갔다. 반란이 강원도로까지 확산되어 갈 조짐이 보였다. 이에 왕이 병든 몸을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서 경상도 도사의 목을 쳐 반란을 진압하였으니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후 왕은 새로 경상도 도사를 임명하여 그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왕은 새롭게 정치를 개편하고자 하였으나 선진 세력의 비호를 받은 덕의공주에 의해 폐위될 위기에 처하였다. 한술 더 떠 궁씨 세력의 힘을 입게 된 셈이다. 왕은 고모인 덕의의 눈치에 시달려야 했고 조정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에 왕이 발칙한 일을 저질렀다. 왕비를 등한시한 왕은 왕비로 하여금 내시와 사통하도록 권하였다. 이 소식은 자연스레 덕의의 귀에까지 들려왔으니 덕의가 발악한 것은 당연하다.

왕이라는 자가 어느 안전이라고 왕비에게 내관과 사통을 시킨단 말이냐!

덕의는 보다 못해 종묘에 나아가 석고대죄를 하였으나, 왕이 덕의가 자신의 치부를 표면에 올린 것에 대노하여 보문궁寶文宮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왕은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자연스레 주색에 빠지고 말았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였다.

이윽고 금상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되었다. 왕이 즉위하여 태자가 장성함을 보지 못한 채 병을 얻었다. 세간에서는 단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뒤이어 장병보와 궁보조가 세상을 떠나고 길보를 영의정으로(숭정대부 겸임) 삼아 인사가 단행되었다. 좌의정에 길석, 우의정에 동방신기, 통훈대부에 동방신지, 중직대부에 동방우주, 중훈대부에 동방아시, 선무랑에 임희량, 고태박을 지중추부사에(동지중추부사 겸임), 조연을 첨지중추부사에, 궁소동을 강원도관찰사로 명했다. 궁소동은 덕의의 차남이다. 뒤이어 장윤을 강원도도사, 고남노를 영중추부사(판중추부사 겸임), 온제를 통사랑, 도영을 승사랑, 이만덕을 중추부도사(중추부경력 겸임), 이영덕을 종사랑에 명했다. 만덕과 영덕은 모두 이봉소의 아들이다. 옥상을 장사랑에 명하니 그는 옥보의 아들이다.

그런데 왕이 고모인 덕의에게 태자가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로 섭정攝政해주기를 청했다. 그러자 여자가 정사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며 동방의시와 김공달, 설언호가 나서자 덕의가 진노하여 이 세 사람을 중죄로 다스리도록 명하였으나 동방의시가 처형당하고 김과 설을 변방에 유배 보냈다. 비로소 덕의의 본심이 드러나자 영의정은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같은 해 겨울. 덕의는 반란을 일으켜 궁궐에 침입하니 이를 두려워한 왕이 경화왕후의 침전으로 피신하였다. 그때 덕의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띤다.

공주께서 이 무슨 무엄한 짓을 하시오!

이에 태후가 역정을 내었으나 덕의는 즉시 왕이 있음을 알고 태후를 앞세워 대보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왕은 옥새를 내놓았고 덕의는 그것을 가로챈 뒤 군사로 하여금 금상을 폐하여 상왕으로 봉하고 왕비와 태자를 함께 궁궐에 유폐시켰다. 이 기막힌 광경을 목격한 태후가 자결하고자 했으나 덕의의 명에 따라 죽을 수 없어 태후궁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태자를 덕명대군德明大君에 봉했다. 왕후는 폐서인이 되어 궁주로 불려졌다.

재위 2년 여왕이 왕위에 올라 군사를 강화하여 국방을 탄탄하게 해야 함을 피력하고 군사지휘권을 움켜쥐었다. 사람들은 그 태도에 대해 평하길 당대에 여걸이 났다고 한다. 마치 궁 정승이 환생하였다고 수군대기도 했다. 궁씨의 핏줄이 한몫을 했으니 일러 말해 무엇 하리. 같은 해 영의정 길보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남궁부에게 영의정을 맡기고 숭정대부에 겸직토록 했다. 좌의정에 도원, 좌찬성에 이운소, 정헌대부에 이방소, 우찬성에 도위, 자헌대부에 도봉, 강원도검률에 황보국, 승의랑에 도진, 강원도심약에 고태수,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도석, 좌참찬에 도우, 영돈녕부사에 길석, 판돈녕부사에 동방우조, 지돈녕부사에 동방운, 동지돈녕부사에 동방일, 돈녕부도정에 동방속, 돈녕부정에 동방봉우, 돈녕부부정에 구영성, 돈녕부판관에 천어라는 호로도 불리는 민봉부閔奉夫를 임명했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신하들에게 겸임하도록 명하니 돈녕부첨정에는 선무랑 임희량을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돈녕부주부에 조봉대부 초발에게 겸임하도록 하고 통덕랑 초포다로 하여금 돈녕부직장에, 통선랑 박천보를 돈녕부봉사에 겸임하도록 했다. 덕의는 덕충부원군 양동을 신임하였는데 그를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내비쳐 행하였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 움큼 움켜쥔 셈이다. 결국 궁양동의 손아귀에 의해 권세는 좌지우지되었고, 만백성의 원성이 자자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궁양동의 소유로 된 땅이 자그마치 800결이나 된다고 하니 나라의 재정이 궁핍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한때 왕후로 있다가 할머니의 권세에 의해 하찮은 지위로 내려앉은 자신의 죄의식으로 선보궁주는 폐위된 지 이틀 후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 그러나 궁녀가 발견하여 살아났으니 이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식을 아랫것으로부터 전해들은 덕의공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가 손녀딸을 잘못 키웠나봅니다. 어째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한단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방자한 짓이랍니까? 아둔하기 그지없다는 자신이 왜 그토록 극도의 죽음을 택했을까. 그것이 의문입니다.

선보궁주는 폐위되면서도 할머니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례였을 뿐. 할머니에 대한 궁주의 분노는 침묵으로서 일관했다. 세간에서는 그녀를 두고 벙어리가 된 거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으니만큼 덕의공주로 하여금 여간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덕의는 아둔하게 쳐다본 것은 당연했다.

여왕은 해서 궐내闕內에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벌이니 신하들의 반발이 높았음은 당연하다.

재위 5년 길석이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 남궁부가 그 후임으로 물망物望에 올랐으나, 좌의정 도원을 삼을 것을 권했다. 이에 여왕은 없었던 일로 하였다.

재위 7년 영돈령부사에 통훈대부 동방신지로 하여금 겸임하도록 명했다. 같은 해 상호군 강찬姜燦, 향길向吉, 천무千武, 노조성盧助成, 주현우朱絃禹로 하여금 한성부의 경비를 삼엄히 하자고 명했다. 그리고 좌도수운판관 동방섭과 삼전도승 봉길조에게 명하여 경상도 도사를 포박하게 하여 왕 앞에 보이니 왕이 엄히 죄를 물어 군기시에서 참수하고 나라의 본을 보였다.

재위 8년 겸임 인사를 임명했다.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동방우주, 慶尙道檢律 동방아시, 慶尙道審藥 이방소, 金泉道察訪 도봉,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도진,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 도석, 沙斤道驛丞 온제, 召村道驛丞 도영, 松羅道驛丞 이영덕, 自如道驛丞 옥상, 강원도검률 안백호, 가정대부 동방섭이 이들이다. 그리고 김공달과 설언호를 사면하여 각각 黃山道驛丞과 우참찬에 명했다.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황보국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에 구령을, 昌樂道驛丞에 옥보를 임명했다.

이때 공달과 언호가 여왕의 은덕에 감사해 하며 눈물로 고마움을 표했다.

재위 10년 덕의가 무당을 불러다 굿판을 벌여 왕실의 돈이 궁해지자 보다 못해 일부 대신들이 말하길,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중지할 것을 이유로 들며 직언하자 여왕이 대노하여 일곱 대신을 죽였다.

황보국, 남궁부, 옥보, 동방신기, 동방신지, 동방우주, 동방아시가 이때 희생되었다.

덕의 재위 12년 내관 은충恩忠이의 말을 믿고, 덕의는 역모를 꾸몄다는 구실을 앞세워 김공달, 설언호, 동방우조, 동방운, 이운소 이방소 형제, 도원, 도위, 도봉, 도진, 도우, 도석을 참수하였다.

그들의 수급을 베어 발로 걷어차게 하였다. 재위 14년 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피비린내 나는 시국에서 근심으로 지켜보다 병을 얻은 것이다. 백성들은 이를 두고 화병에 결렸다고 수군대곤 하였다. 같은 해 역모와 관련된 사람들을 상하지위 막론하여 잡아다 죄를 뒤집어 써 죽임을 당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도사의 예언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부군인 궁호는 이에 불만을 품고 고태수의 집에 찾아가 덕의공주를 폐위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윽고 재위 20년에 이르기까지 덕의의 손에 희생된 이들이 칠십만 명이나 되었다. 보다 못한 고태수가 선보궁주의 집에―별궁에― 찾아갔다. 고태수는 선보궁주에게 복위를 청하였으나 거절하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살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재위 20년 정월 상왕이 대군의 배필을 맞이하도록 청하니 여왕이 박천보의 딸로 하여금 가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내관 은충과 사통하여 낳은 서녀 궁화를 측실側室로 맞이하도록 종용했다. 이에 대군은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 궁화는 궁호의 양녀이기도 했다. 재위 20년 삼월, 궁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궁호라는 이름만으로 쓰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하는 부군의 의견에 여왕이 받아들였다.

재위 20년 사월, 부군 궁호가 다시 고태수의 집에 찾아갔다. 어두운 밤이었다. 이때 고태수는 어김없이

나는 역모를 도모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의사를 밝혔다. 어질기로는 나라에 으뜸이라는 그를 덕의는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조정에 일함을 막지 못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하는 필연적 역사를 거스를 수 없다는 순리에 따라 덕의는 충신이든 역신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는 우를 범하였다. 피에 굶주리는 이리와 같다고나 할까.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직 내관인 은충의 의견에만 치중하여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역모가 아니라 반정反正입니다. 반정해야 합니다.

그때 고태수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는 초를 밝혀 책을 읽고 있었다.

대국大國에서 구하여 읽고 있습니다.

고태수는 책을 읽으며 말하는 것이다.

(저이는 왜 그런 얘기를 할까.)

궁호는 태수의 의도를 간파하기 어려웠다.

나는 강원도에서 심약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오랫동안 봉공奉公한 사람이올시다. 그런 내가 직접 아랫것들 몰래 대국으로 여행을 가면서 책을 얻기도 하거니와, 일이 바쁠 때면 내 몸종과 아랫것들을 시켜서 대국에 보내서 책을 구해다 가져오게 해서 구한답니다. 대감께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마음을 갈고 닦으실 동안 나는 이렇게 책을 읽곤 한답니다.

……

그때였다.

여주女主가 정사를 알음하여 나라를 망치려 드니 내가 직접 나서달라고 청하시는 의중이 아니십니까.

태수는 책 읽는 걸 잠시 멈추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읽고 읽는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궁호는 놀라는 눈치다. 태수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는 책이올시다.

……

궁호는 마른 침을 삼킨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보이더이다. 한데 그들을 보면 볼수록에 어찌하여 영웅호걸이 되어 있으면서도 죽어서는 역적이 되어야 했는지.

알 듯 모를 듯 하는 태수의 언행을 궁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대감!

악을 썼다.

태수는 그러나 엷은 미소를 띠며 평정을 유지했다.

덕의는 그래서 정사에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때나마 영웅으로 대접을 받으면 무얼 한답니까. 그 찰나의 꾀에 놀아나다가 죽어갈 때 되면 될수록 후세의 손가락질과 죄과罪科에 짓눌려, 흔적조차 사라짐을 왜 모르신다고 합니까.

……

나는 대감의 뜻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보다시피 이 통감通鑑을 다 읽어보지 않고서는 반역을 도모할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그리 아십시오. 만약 통감을 다 읽게 된다면 그때 가서 따로 아랫것을 보내어 대감에게 의중을 전할 터이니 심려 거두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감언이설甘言利說로 속아날까 저어하던 궁호는 고태수의 천성을 더는 거스를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재위 20년 오월, 대군의 측실 궁화가 딸을 낳았다. 상왕에게는 기쁨으로 생각했으나 궁화의 딸이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죽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궁화가 직접 독살하여 즉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덕의는 그 소문을 듣고 주모자를 샅샅이 찾아 수색하도록 하였으나, 그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 대군의 부인 박씨가 아들을 낳았다. 덕의는 이를 치하했으나 장차 왕위를 위협할 것을 염려하여 두려워하였다. 하여 그는 어김없이 무당을 불러다 굿을 벌이니 주위 궁인들과 내관들(은충을 제외하고는)은 미쳤다고 수군대는 것이다.

대군이 아들을 보았다는 소식은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다. 강원도 심약으로 있던 고태수도 이를 듣고 궁호에게 글월로써 서찰을 띠워 사람을 보내니 한밤중에서야 궁호가 이를 받아보았다. 글을 읽는 궁호의 손이 덜덜 떨리었다.

내용은 반정을 도모해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거사일은 유월 초하루였다.

하여 유월 초 하룻밤. 의기양양하게 덕의의 부군인 궁호가 반정을 도모하였다. 그는 군사들을 몸소 거느리어 덕의의 궁으로 달려가 궁궐의 군사와 내관 궁녀들을 모조리 죽이니 이에 총신寵臣 은충이 피살被殺되었다. 뒤이어 궁호가 덕의의 침전에도 범하니, 덕의가 붉은 색 잠옷을 입고서 분단장粉丹粧하고 있었다. 부군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해하였다.

아니 대감, 대감께서 어찌 이곳에.

그러자 궁호는 이내 화를 참았다.

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덕의는 다가와서 유혹하듯 요염을 피우는 것이었다.

이 무슨 추태醜態냐며 밀칠 법하건만 순순히 받아준다. 그리고 이에 아랑곳없이 자신에게 밀착하여 유혹하는 덕의를 칼로 푹 찔렀다. 더 푹 찔렀다. 그러자 아! 약간의 신음을 내며 덕의가 쓰러졌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쓰러진 덕의는 갑작스러운 일 때문에 그랬는지 눈을 뜬 채 죽고 말았다.

덕의는 죽은 채 대궐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백성들이 그녀를 두고 돌팔매질을 해대었다. 보다 못한 태후가 대노하여 폐위를 선언하고 덕명대군을 왕위에 옹립擁立했다. 그리고 왕비를 의열왕후義烈王后로 봉하였다. 후궁으로 책봉되기 전에 측실 궁화는 덕의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자진하였다. 세상이 뒤집혀 바뀌자마자 왕은 오랜 근심을 거둔 듯 상왕이 세상을 떠났다. 상왕을 숙종이라 추숭하였고 선보궁주를 태후로 맞이하여 선보왕후로 봉하여 그리 불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왕이 옹립됨에 따라, 새로운 인사들을 단행했다.

왕은 은거하다시피 한 고태수를 불러다 수반首班으로 와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왕은 태수에게 무릎을 꿇으며

삼고초려 하여서라도 그대를 영상領相으로 삼아야겠소. 그러니 이 못난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구려.

왕이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애원하자, 태수가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영의정에 고태수를 삼고, 좌의정 동방일, 우의정 동방속, 좌찬성 동방봉우, 우찬성 구영성, 좌참찬 호판성, 우참찬 신강, 의정부사인 권봉달, 의정부검상 유월야, 의정부사록 양광웅, 영중추부사 임희량, 판중추부사 고태박, 지중추부사 조연, 동지중추부사 정말다, 첨지중추부사 남궁병, 중추부경력겸도사에 옥상을 명하였다.

그리고 왕이 남궁병의 부친 남궁부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음을 통탄해하며 시호諡號를 내릴 것을 청하자 왕이 덕수공이라 하였다. 뒤이어 과거를 실시하여, 덕의의 손에 죽은 설언호와 김공달의 아들인 설정과 김동탁을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왕이 직접 자신의 내관으로 삼았다. 덕의의 전례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내관들을 단속하고자 함이었으니 훗날 내관들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명분을 세운 셈이다.

왕은 재위를 20년 동안 있으며 덕정(德政)을 베풀었으니 이때도 태평성대를 불렀다.

태평성대太平聖代

대야왕 재위 12년 이월에 조선왕 모사라가 하세하자 태자인 거련이 옥좌(玉座)에 올랐다. 영의정 이하의 신하들이 일제히 조문을 하러 갔다. 조문하고 돌아올 즈음, 양주 땅에서 갑자기 영의정 옥송호의 병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도성에 돌아올 때 병은 매우 깊었다. 왕이 어의를 보내 친히 진맥을 맡아보았으나 이미 그는 세상을 하직하여 소생하기 어려웠다.

이에 향길을 영의정으로 삼고, 천무를 좌의정에, 우의정에 오세안을, 좌찬성에 안일을, 우찬성에 주현우를, 좌참찬에 도상진을, 우참찬에 제인을, 의정부사인에 신구를, 의정부검상에 박영을, 의정부사록에 신봉을 임명했다.

왕이 장성한 것을 이유로 태황태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지도 어언 이 년. 그 동안의 치세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옥송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는.

그러나 왕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십년 동안 왕손을 보지 못한 것이 왕실로서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어의들에게 진맥을 매겨보게 하고 하였으나 왕과 왕후에게는 별다른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는데 때마침 왕후에게 회임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태황태후 이하 왕실의 어른들은 큰 기쁨을 안고 금상 내외를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아홉 달이 지나서 왕후가 낳아보니 딸이다. 이에 왕은 왕후가 낳은 공주에게 장주(莊周)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재위 13년 오월에 노량부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직접 조문하였다. 인승군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후사를 낳지 못하였다. 이에 근심하여 직접 양자로 받아들이도록 하였으나 인승군이 이를 거절하니 나라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월에 왕은 내관들을 대신하여 왕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기 위해 관청을 세우니 이를 승정원(承政院)이라 하였다.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주서 가주서를 두었다. 작년에 급제한 이들을 중심으로 인사를 단행하였다. 도승지에 제갈을(諸葛乙), 좌승지에 채형(蔡亨), 우승지에 차용(車容), 좌부승지에 변성(卞成), 우부승지에 독고설(獨孤設), 동부승지에 라욱(羅旭), 주서에 윤온(尹溫)과 엄운(嚴運), 가주서에 송진(宋珍)과 서가교(徐家敎)를 임명했다.

이에 신하들이 왕의 인사 단행에 대해 파격적인 인사라 하여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했다.

칠월에 왕은 친히 도성의 백성들을 순라(巡邏)하였다. 왕의 친림(親臨)에 백성들이 일제히 환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이에 왕은 깊이 공감하며 토닥거리는데 그치지 않았다. 영의정 이하 신하들에게 서정(庶政)을 펼칠 것을 다그쳤다.

팔월에 이조의 인사를 단행했다. 이조판서에 권선, 이조참판에 편구대군, 이조참의에 황선교, 이조정랑에 정안성, 이조좌랑에 천위사, 상서원정에 노주앙, 상서원판관에 궁운, 상서원직장에 궁오마, 상서원부직장에 궁길을 명했다. 이후 왕은 이조와 상서원의 직제를 분리하여 제수하겠다고 하였다.

구월에 전라감영이 들어섰다. 관찰사에 봉길조, 도사에 궁소지, 검률에 인승군, 심약에 편구대군을 명했다. 시월에 중추부 인사가 단행되었다. 영중추부사에 염건식, 판중추부사에 서상범, 지중추부사에 김동탁, 동지중추부사에 최민, 첨지중추부사에 홍가, 중추부경력에 전언대군, 중추부도사에 신성대군을 임명했다.

지금까지 단행한 인사는 모두 왕의 뜻대로 행하겠다는 표시였다. 종친들에게 제수한 것은 인상적이다. 십일월에 조선왕 거련이 사신을 보내자 왕이 이를 알현하였다.

재위 14년 정월에 전라도검률인 인승군이 세상을 떠나자 노주앙을 후임으로 삼고, 상서원정에 궁운을, 상서원판관에 궁오마를, 상서원직장에 궁길을, 상서원부직장에 배국을 명했다. 그 중 배국은 오랫동안 재야(在野)에 몸을 담아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을 쓰고 있었다. 이에 배국은 황은에 망극함을 표하며 제수함을 받아들였다.

이에 형조의 인사가 단행되었다. 형조판서에 호포, 형조참판에 현태, 형조참의에 황슬군, 형조정랑에 국윤군, 형조좌랑에 송성군, 율학교수에 편람군, 형조별제에 천아군, 형조명률에 위정군, 형조심률에 구렬군, 율학훈도에 보성대군, 형조검률에 허정대군을 명했다.

삼월에 향길이 세상을 떠나 천무가 영의정을 맡았다. 오랫동안 천수를 누린 까닭이다. 좌의정 오세안, 우의정 안일, 좌찬성 주현우, 우찬성 도상진, 좌참찬 제인, 우참찬 신구, 의정부사인 박영, 의정부검상 신봉, 의정부사록 동방봉우를 명했다. 천무가 한 달이 되어 세상을 떠나 오세안이 영의정을 맡게 되었으나 사임하자 안일을 영의정에 좌의정과 우의정을 각각 독수대군과 도상진을 맡았다. 오세안을 영돈령부사에 명하였다. 이에 더해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하였다.

오월에 좌찬성 주현우는 병을 앓고 있는 까닭인지 사임하자 제인을 좌찬성에, 신구를 우찬성에 명했다. 좌참찬에 박영, 우참찬에 신봉, 의정부사인에 동방봉우, 의정부검상에 봉길조, 의정부사록에 황선교를 명했다. 주현우의 병환이 완쾌되자 왕은 판돈령부사에 명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봉했다. 상서원정 궁운에게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상서원판관 궁오마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상서원직장 궁길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상서원부직장 배국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에 봉하였다.

유월에 태황태후가 병석에 누웠다. 어의들이 이를 진맥해보았으나 병명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황태후의 청에 의해 왕후 이하 후궁들이 직접 절을 짓도록 왕에게 청하자 왕이 흔쾌히 받아들여 한성부 근처 송파에다 절을 짓도록 하여 이름을 장흥사(長興寺)라 하였다. 왕명(王命)으로 장흥사를 세우니 백성들이 왕의 성은에 감격하여 꾸준히 불사(佛事)를 행하였다. 그러자 태황태후가 병석에서 털고 일어났다.

칠월에 조선에 사신을 파견했다. 영의정 이하 대신들이 모두 조선의 사신으로 갔다. 이에 화답하듯 조선왕은 인부대신(仁部大臣) 석준화안(釋俊和安)과 총리참의(總理參議) 석준예연(釋俊豫然)으로 하여금 사신으로 보내었다. 그러나 태황태후가 다시 병석에 누웠으므로 사신단을 맞이할 새도 없었다. 태황태후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신은 태황태후를 직접 알현하였다. 태황태후는 웃는 얼굴로 이들을 맞이하였으나 병세가 더욱 악화된 듯 초췌(憔悴)한 모습이었다. 이후 왕 내외를 맞이한 사신은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팔월에 사신들이 돌아온 이후 태황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왕은 한 달 동안 상을 치르고 애도하도록 명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이 의논하여 황태후는 삼십일, 왕과 왕비는 십오일을 마치도록 청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구월에 태황태후 상을 마친 뒤 안일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영의정에 독수대군을 임명하였다. 좌의정에 도상진을, 우의정에 제인을 명했다. 좌찬성에 신구, 우찬성에 박영, 좌참찬에 신봉, 우참찬에 동방봉우, 의정부사인에 봉길조, 의정부검상에 황선교, 의정부사록에 정안성을 명했다.

시월에 돈령부 인사를 단행하였는데 지돈령부사에 궁운을, 동지돈령부사에 궁오마를, 돈령부도정에 궁길, 돈령부정에 배국을 명하였다.

십일월에 도선궁주(보비)가 세상을 떠났다. 궁운의 누이동생이니 왕은 지돈령부사에게 깊은 위로를 표하고 장사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십이월에 초도연을 돈령부부정에 명하고, 온시후를 돈령부첨정에, 궁영규를 돈령부판관에, 궁상규를 돈령부주부에 명했다.

재위 15년 정월에 열린 과거에서 도상진의 아들 도창(陶昌)과 문길구의 장남인 문봉(文峰)이 급제하였다. 이에 도창을 충청도관찰사에, 문봉을 의흥위장에 임명했다. 심유대군이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조에 인사도 단행했다. 길돈을 이조판서에, 현태를 이조참판에, 궁숭을 이조정랑에, 이조좌랑에 신공신을, 이조좌랑에 남궁의의 아들인 남궁현후(南宮顯厚)를 임명했다. 중궁의 장녀인 장주공주(莊周公主)를 왕가의 전례에 따라 민가에 시집을 보내었다.

이월에 옥창의 아들 옥신(玉信)을 의흥위상호군에 임명하고 호포를 돈령부직장에 명하였다. 이에 일부 신하들이 왕의 인사가 너무 지나치다고 간언(諫言)하였으나 왕이 진노하여 근신하도록 하였다. 하마터면 죄를 물을 뻔했다. 종사랑 유동민에게 돈령부봉사를, 제길에게 돈령부참봉에 명했다.

삼월에 편구대군이 장녀 어음공주가 송진에게 출가했다. 민가에 보내는 보통 왕실의 예를 넘어선 일이다. 당시 왕은 일부 원로대신들의 세도가 강한 것을 의식하고, 원로대신들의 전횡을 미리 막기 위하여 왕실의 두호 아래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신진관료와 혼인하는 정책을 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사월에 역시 편구대군의 차녀 정경공주가 서가교에게 출가했다. 뒤이어 천연귀비가 왕자를 낳았다. 이에 왕이 태우군(泰佑君)으로 봉하였다.

유월에 중궁의 몸에서 명임공주(明任公主)가 태어나고 칠월에는 신호원비의 몸에서 여채공주(麗採公主)가 태어났다.

재위 16년 중궁에게서 여집공주(麗輯公主)가, 천연귀비의 몸에서 쌍둥이가 태어나 각각 국기공주(國基公主)와 원사공주(元沙公主)라 불렀으나, 국기공주의 이름이 상서롭지 못함을 들며 왕이 영아공주(迎阿公主)로 바꾸어 불렀다.

재위 17년 신호원비에게 장슬공주(長瑟公主)가 태어났으나, 왕은 부르기 어렵다며 민아공주(敏阿公主)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중궁에게서 문옹공주(文翁公主)가 생겼다.

재위 18년 중궁에게서 쌍둥이가 태어났다. 두 아이가 태어날 때 큰 애 뒤에 그 발을 부여잡고 같이 나와 왕실에서 상서롭지 못하였다고 장탄식(長歎息)을 놓았다. 그러나 건강히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왕이 각각 영유대군(永有大君)과 방을대군(芳乙大君)으로 봉하였다.

재위 19년 천연귀비에게 주일공주(主一公主)가 태어났다.

재위 20년 신호원비에게 문겸공주(文兼公主)가 태어났다.

재위 21년 천연귀비에게 인중군(仁衆君)이 태어났다.

재위 22년 정월에 독수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왕은 영의정에 도상진, 좌의정에 제인, 우의정에 신구, 좌찬성에 박영, 우찬성에 신봉, 좌참찬에 동방봉우, 우참찬에 봉길조, 의정부사인에 황선교, 의정부검상에 장안성, 의정부사록에 궁영규를 임명했다.

사월에 천연귀비가 천서공주(天瑞公主)를 낳았다.

오월에 원창공주(元昌公主)가 신호원비의 몸에서 태어났다.

재위 23년 정월에 독수대군 부인 초씨가 세상을 떠났다. 독수대군은 증손을 보았다. 구학군의 장남 국석군이 민가의 여자와의 사이에 연흥군을 두었다. 이 연흥군이 동방봉우의 손녀이자 동방소의 장녀인 동방영희(東方英姬)를 배필로 삼았다. 모두 열두 살 어린 나이였고, 곧바로 군부인(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이 연흥군부인이 장남을 생산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보통 왕가의 소생이 2대와 3대에 걸쳐서 부모의 뒤를 따라 대군에, 또는 공주에 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일부 신진 관료들이 호칭을 바로 하지 않으면 왕가의 정통성이 흔들린다는 이유를 들며 우려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이하의 원로대신들이 반발하며 설전을 펼쳤으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이에 왕은 종친의 여자 소생을 옹주로, 남자 소생들도 그 뒤를 이어 각각 군 또는 옹주로 봉해 부를 것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구학군의 소생인 국석과 해강(海岡), 환연 세 남자 소생을 군으로 봉해 부르고, 해균과 영호(永好) 두 여자 소생을 옹주라 봉해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연흥군부인을 낙하군부인(洛河郡夫人)으로 봉하였다. 그밖에 역시 해강군도 민가의 여인에게서 인명(仁明)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이 역시도 옹주에 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종친들의 위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삼월에 의흥위의 인사가 단행되었다. 전 의흥부장 궁길이 과천현령(果川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왕이 현감에서 현령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 의흥부상호군 호포를 고양군 훈도에 임명했다. 상호군에 임영우, 대호군에 임경리, 호군에 허정대군, 부호군에 궁손, 사직에 강덕상, 부사직에 강창훈, 사과에 궁방, 부장에 궁희종, 부사과에 궁열, 사정에 장벽, 부사정에 장모, 사맹에 백공, 부사맹에 백덕, 사용에 이각, 부사용에 장국이 임명되었다.

오월에 영의정 도상진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했다.

유월에 승강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조판서 후임을 길돈에게 주고, 이조참판에 현태, 이조참의에 궁숭, 이조정랑에 신공신, 이조좌랑에 장문을 임명했다.

칠월에 궁소지를 양주군 훈도에 명하고 호분위장 후임을 금년 춘사월에 급제한 백공의 아들 백두봉(白頭峰)을 임명했다.

구월에 천연귀비가 왕선공주를 낳았다. 십일월에 신호원비에게서 금영공주를 낳았다.

재위 24년 정월 인선황태후가 하세했다. 이에 왕이 장례를 삼십일을 지내게 하고 이 기간에 조정에서 철조(輟朝)하도록 명했다.

이월에 경기도 내에서 도승(渡丞) 벼슬에 있는 관리들을 면직하고, 후임으로 어질고 명석한 백성들을 간추려서 임명할 것을 명했다.

삼월에 기광공주를 왕실의 전례에 따라 민가로 시집보냈다. 기광공주는 편구대군의 딸이다. 사월에 역시 편구대군의 딸인 민찬공주를 왕실의 전례에 따라 민가로 시집보냈다.

오월에 전언대군의 1녀 천호공주를 왕실의 전례에 따라 민가로 시집보냈다.

유월에 전언대군의 2녀 나적공주를 왕실의 전례에 따라 민가로 시집보냈다.

칠월에 전언대군의 3녀 방린공주를 왕실의 전례에 따라 민가로 시집보냈다.

팔월에 전언대군의 4녀 심찬공주를 왕실의 전례에 따라 민가로 시집보냈다.

구월에 전언대군의 5녀 송슬공주를 왕실의 전례에 따라 민가로 시집보냈다.

시월에 신호원비에게서 황나공주가 태어났다.

십이월 신호원비에게서 우찬공주가 태어났다. 한때 죽서왕을 폐위시킨 바가 있던 조선왕 모사라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태자 다의발이 왕위에 올랐다. 다의발은 왕위에 오른 즉시 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지금의 황해도 일대의 나머지 땅을 내놓겠다고 하였다. 하여 왕이 이를 받아들이니 그 땅에 황해도도사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재위 25년 정월에 신호원비에게서 염인공주가 태어났다. 유월에 조선왕이 스스로 황제(皇帝)라 칭하고, 왕에게 순강왕의 전례를 들며 선사군왕으로 봉하였다. 이에 신진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연장자 격인 전 중추부경력 홍가가 이를 반대하는 뜻을 표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의 반대의견은 없었다. 왕은 홍가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왕에게 선사군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뜻을 밝히자 거련이 진노하며 말하길,

“부왕(父王)이신 모사라 천황폐하(天皇陛下)께서 특별히 아끼고 각별히 대하셨거늘 은혜를 원수로 갚을 성싶더냐!”

이에 선사국왕의 칭호는 받아들였다. 이를 반대한 홍가를 근신한 뒤 곧바로 보안도찰방에 명했다.

재위 26년 2월 영의정 도상진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제인을 영의정에 두고, 좌의정에 신구, 우의정에 박영, 좌찬성에 신봉, 우찬성에 동방봉우, 좌참찬에 봉길조, 우참찬에 황선교, 의정부사인에 정안성, 의정부검상에 궁영규, 의정부사록에 궁상규를 명했다.

4월 신호원비에게서 염인공주가 태어났다. 개성부의 인사를 단행했다. 개성부유수에 방수호, 개성부경력에 오세안, 개성부도사에 고대인, 개성부교사에 위경대군을 임명했다. 왕족들은 모두 천수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은거(隱居)하고 있는 왕족들을 수소문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바로 위경대군인 것이다.

5월 옥은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옥은공주의 후손에게 성씨가 없음을 알고 애석하게 생각한 왕이 직접 그에게 동문(東門)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그 아들이 동문조(東門朝)인데 이는 옥은공주 집의 위치가 왕궁 동문에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여 왕이 동문조에게 좌도수운판관에 명하였다.

이에 임명하는 날 동문조는 어전에서 명을 받들고자 찾아왔다. 왕명을 받든 뒤 동문조가 왕의 성은(聖恩)에 감읍(感泣)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마마의 성은을 어이 갚아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하며 주저앉아 흐느끼니 왕이 직접 자리에서 내려와 어수로 동문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6월에 가선대부 계운관에게 우도수운판관에 명하고, 해운판관에 배국을 명했다. 계운관과 배국 또한 왕의 은혜에 감사함을 표했다. 이 세 사람을 통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중을 밝힌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거련이 분노를 표하여 침략할 뜻을 밝혔다.

7월에 왕이 선사군왕이라는 호칭을 바탕으로 국호를 선사(善士)라 하고, 친정(親征)에 나섰다. 의흥위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황해도 근방으로 출정하고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를 정벌하기 시작했다.

8월에 지금의 대동강(大同江) 유역 가까이 진출하였으나, 군사들의 굶주림과 더불어 조선의 군대가 대군을 이루어 쳐들어온 바람에 제풀에 지쳐 달아났다. 지난날 죽서왕, 아니 양종대왕의 사무친 원한을 복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후 제해권은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좌우수운판관과 해운판관을 통해서 무역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10월에 선사(善士)라는 국호를 유지하기로 선언하다. 영의정 이하 대신들에게 역대 제왕들의 실록을 편찬 또는 증보하도록 명하고, 그 중 ‘죽서왕’이란 호칭을 ‘양종대왕’으로 바꾸도록 고치되, 대행왕에 대한 기록을 나라의 정서에 걸맞게 고치도록 명하였다.

11월에 실록 편찬이 완료되었다. 왕이 이를 날이면 날마다 밤이 새도록 살펴보고 만족해하니 이를 부본(副本)으로도 만들어서, 백성들이 열람하도록 명하였다.

12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세 명의 대신들에게 조선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 이들을 통해 조선왕에게 사죄함을 밝혔다.

재위 26년 4월에 신호원비에게서 염인공주가 태어났다. 왕이 거처를 창인궁으로 옮겼다. 창인궁이 낡아 쓸 수 없음을 알고 이를 보수하도록 명하였다.

5월에 왕성(王城) 주변에 지진이 일어났다. 백성들이 놀라 혼비백산(魂飛魄散)해하니 왕은 조정대신들을 이끌고 역대 왕들의 위패가 모신 사당에 찾아가 통곡하며 나라의 평안함을 기원하였다.

6월에 치른 과거에서 두 사람이 급제하였으니 배충과 금운(琴韻)이 이들이다. 배충은 해운판관 배국의 아들이고, 금운은 평민 출신이다. 왕은 이들을 각각 보안도찰방과 은계도찰방에 보내었다.

7월에 도성에 지진이 일어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왕이, 도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구휼(救恤)하도록 명했다.

8월에 구화궁 단소전에 불이 일어나자, 구화궁의 궁인들이 급히 불을 껐으나, 단소전과 그 주변의 전각들이 전소(全燒)되어 중수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9월 내관 황의선이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역대 왕들의 지밀(至密)을 보필하였다. 이에 왕이 애석히 여겼다. 황의선이 죽음을 당하자, 황선교가 의선과 같은 일가붙이임을 밝히며, 자신의 아버지인 황국 또한 생전에 의선에게 부모의 예로 대하면서 자신에게 봉사(奉事)하도록 당부하며 문서로서 남겼음을 밝혔다. 왕이 그 문서를 들추어 보니 태생이 강원도이며, 황선교의 부친인 황국이 황의선에게 종숙(從叔)이 됨을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선교에게 봉사손(奉祀孫)으로서 장사를 후히 치르도록 명했다.

10월에 향길의 부인인 일화부인이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떠났다. 왕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장사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11월에 창경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창경공주의 자손에게 성씨가 없음을 알게 되자 왕은 서문(西門)이라는 성씨를 하사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서문홍(西門弘)인데, 그에게 상운도(祥雲道驛丞)에 명하였다.

재위 27년 정월에 내금위장에 시성대군을 임명했다. 시성대군은 나이가 매우 많다는 이유로 조정 대신들이 내심 우려를 표했으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정(亭亭)할 뿐만 아니라 근력(筋力)이 좋다는 이유로 왕이 임명한 것이다.

이월에 전 영돈령부사 궁호를 겸사복장에 임명하였다.

삼월에 영의정 제인이 세상을 뜨고, 새 영의정에 신구가 임명되었다. 좌의정에 박영, 우의정에 신봉, 좌찬성에 동방봉우, 우찬성에 봉길조, 좌참찬에 황선교, 우참찬에 정안성, 의정부사인에 궁영규, 의정부검상에 궁상규, 의정부사록에 궁운이 임명되었다. 왕이 제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하며 한때 왕실의 인척(姻戚)으로 왕실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을 인정하여 시호를 내려 그 넋을 위로하니, 시호는 덕인공(德仁公)이다.

사월에 왕이 조선왕과 더불어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칭하고 자신을 짐(朕)으로, 황태후로부터는 황상(皇上),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폐하(陛下)로 부르게 했다.

오월에 왕후를 황후(皇后)로 부르도록 했다. 황태후로부터는 극존을 생략하여 그대로 ‘황후’로 부르도록 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황후 뒤에 ‘폐하’를 높여 부르도록 했다. 태자와 태자비에게는 전하(殿下)라고 부르게 했다.

유월에 구화궁의 전각이 너무 낡았으므로 그 전각을 헐어내도록 명하였다. 그 부지를 백성들이 민가로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팔월에 창인궁에 기거하면서 불편함을 크게 호소하자 신하들이 황봉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여 황봉궁으로 옮겼다.

구월에 조정대신들에게 창인궁의 중건을 명하자 조정의 대신들이 이를 받아들여 창인궁 중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창인궁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도성 백성들로부터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그런데 왕이 창인궁의 중건을 명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재위 28년 정월에 태우군과 방을대군, 영유대군 세 왕자를 불러 태자로 적합한 이들을 고르고자 했다. 이들 왕자를 유심히 살펴본 왕은 둘째 영유대군이 영민(英敏)한 것을 알고 다른 왕자들을 제치고 태자로 삼았다. 영유대군이 어머니 개녕왕후의 후덕(厚德)한 성미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품도 출중하고 심성이 수려(秀麗)하며 지식도 깊어 왕이 흡족할 만했다. 천연귀비의 소생들을 내심 기대했던 일부 관리들이 내심 불만을 표출했다. 그 아버지가 되는 문길구가 지인들에게 공히 이에 대한 불만으로 입방아를 찧어놓고 이를 듣고 하인들이 상전의 심부름을 받는 것을 구실로 해 입소문을 퍼뜨려 놓으니 이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왕의 귀에까지 들려오자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건 당연했다. 그래서 왕이 문길구에게 근신하도록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딸이 되는 천연귀비의 처소에 당도하지 않았다.

삼월에 강원도에 감영이 설치되고, 그 수장인 관찰사에 천연귀비의 부친인 문길구를 임명하고, 강원도도사에 황보진, 강원도검률에 설국의, 강원도심약에 송찬수를 임명했다.

사월에 대현을 원주목사(原州牧使)에 명하였다. 그리고 태완대군을 대사헌(大司憲)에, 인완대군을 경기도관찰사에 명하였다.

오월에 오랫동안 진행될 것 같았던 창인궁의 중건이 마무리되었다. 왕은 이에 기뻐하며 창인궁으로 서둘러 옮겨가니 왕이 각 전각의 이름을 손수 지었다. 정전을 태안전(泰安殿), 태자의 거처를 청풍루(淸風樓), 황후의 거처인 내전(內殿)을 영륭당(英隆堂)이라 지었다.

팔월에 황후의 탄신일을 맞아 영륭당 앞뜰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푸짐한 음식을 차려내어 백성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는 왕 내외의 의지에 의해서였다.

재위 29년 정월 태자 책봉을 받은 영유대군의 배필(配匹)을 정하고자, 상하 관리의 자제는 물론, 민가의 자제들까지 뽑았다. 이에 왕후와 의논했는데, 장문의 증손녀이자 장훈의 손녀이며 장모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비(太子妃)에 책봉하였다. 왕은 이날 이후부터 태자와 그 비의 호칭 앞에 ‘황(皇)’ 자를 붙여 부르도록 하였다.

이월에 황후가 송파의 장흥사에 거동하였다. 황후는 장흥사에다 쌀 이천 석과 비단 열두 필을 바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삼월에 왕이 갑자기 병이 들어가자 창인궁을 떠나 편구대군의 집에 정양하였다. 이후의 정무는 왕이 직접 편구대군의 집에서 맡았다. 일종의 별궁(別宮) 역할을 맡았다.

유월에 편구대군의 집에서 기거하던 왕의 병이 쾌차하자 창인궁으로 환궁했다.

칠월에 연담공주가 하세하였다. 연담공주의 자손이 빈한(貧寒)하게 사는 것을 알고, 왕이 쌀 십만 석을 하사(下賜)하고, 그 자손에게 성씨가 없음을 알고 곡(谷)이라는 성씨를 하사했다. 곡순(谷純)은 연담공주의 아들인데, 연담공주를 극진히 돌보아 효심을 보인 것을 고맙게 여겨 곡순에게 평릉도역승(平陵道驛丞)에 명하였다.

재위 30년 정월에 황선교의 손녀이자 황승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하니 태자는 두 황태자비를 둔 셈이다.

2월에 신구가 죽고 영의정 박영이 임명되었다. 좌의정에 신봉, 우의정에 동방봉우, 우의정에 봉길조, 좌찬성에 황선교, 우찬성에 정안성, 좌참찬에 궁영규, 우참찬에 궁상규, 의정부사인에 궁운, 의정부검상에 장문, 의정부사록에 온시후가 임명되었다.

5월에 금상 대야왕의 부친 천가군에게 대원왕(大院王)이라 칭하고자 했으나 조정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6월에 방을대군과 태우군을 궐 밖에 거처를 정해 보내었다. 이들은 각각 도선궁과 후덕궁으로 보내졌다. 인중군 또한 거처를 따로 정해 보내고자 했으나, 갑작스레 병을 얻어 구학군의 집에 보내 정양하도록 명했고, 궐내의 궁녀들도 각각 이들의 거처로 나누어 보냈다. 이는 궐내의 살림을 담당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7월에 인중군의 병세가 호전되자 도선궁으로 보내었다. 역시 도선궁과 후덕궁의 전례에 따라 궐내의 궁녀들을 보내어 도선궁의 살림을 맡게 했다.

8월에 후덕궁주 길씨가 하세했다. 이에 왕이 장사를 후히 치르도록 했다.

재위 31년 정월에 왕명으로 윤대(輪對)가 열렸다. 영의정 이하의 조정대신들이 있는 가운데 의흥위장 문봉이 호분위가 해이해짐을 제기하자, 왕이 대노하여 병조판서 궁길만에게 질책을 하였다.

“호분위는 일개 군대이기에 앞서 한 나라의 군대다. 한데 근래에 와서 보니 호분위를 마치 사병(私兵)처럼 쓴다는 소문이 도성(都城) 장안(長安)에 퍼지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에 병조판서가 말을 못하자 괘씸하게 여긴 왕이 특유의 결단력으로 궁길만을 병조판서에서 파직(罷職)하였다. 그리고 왕명으로 후임 호분위장에 환해대군으로 하여금 임명하여 통솔하도록 했으며 호분위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인사도 단행했다.

호분위상호군에 백덕의 장남 백비(白備), 호분위대호군에 백덕의 차남 백의송(白義松), 호분위호군에 초정술의 아들 초술(楚術), 호분위부호군에 온국의 아들 온인(溫仁), 호분위사직에 궁운의 아들 궁영만(宮英萬), 호분위부사직에 조보와 우가공주의 아들 조기(趙起), 호분위사과에 호포의 장남 호빈(好彬), 호분위부장에 호포의 장남 호성기(好成基), 호분위부사과에 길돈의 장남 길지(吉地), 호분위사정에 길돈의 차남 길송(吉松), 호분위부사정에 궁령의 아들이자 윤인공주의 배필인 궁술(宮述), 호분위사맹에 홍가의 아들 홍기성(洪基成), 호분위부사맹에 황선교의 아들이며 태자비 황씨의 아버지인 황승(黃承), 호분위사용에 정안성의 아들 정흥(鄭興), 호분위부사용에 구학군의 장남 국석군을 임명했다.

2월에 전언대군의 장녀 천호공주가 민가에 시집갔다.

3월에 전언대군의 차녀 나적공주가 민가에 시집갔다.

4월에 전언대군의 3녀 방린공주가 민가에 시집갔다.

5월에 전언대군의 4녀 심찬공주가 민가에 시집갔다.

6월에 전언대군의 5녀 송슬공주가 민가에 시집갔다.

9월에 치른 과거에서 민가 출신의 남송국(南頌國)과 맹달(孟達)이 급제했다. 이에 왕이 각각 선교랑(宣敎)과 선무랑(宣務)에 봉하고 신성대군의 장성한 두 딸인 보령공주(寶靈公主)와 보랑공주(寶郞公主)로 하여 각각 배필로 삼게 했다.

10월에 병조의 인사가 단행되니 안임을 병조판서, 민번주를 병조참판, 문봉을 병조참의에 병조참지에 고만술의 차남인 고소중(高疎中)이 임명되었다.

11월에 병조정랑에 천위사의 아들 천목한(天穆翰), 병조좌랑에 박영의 아들 박영의 아들 박구(朴究)가 임명되었다.

재위 31년 2월에 도선궁에 기거하던 인중군을 표경궁에 옮겨 살게 했다. 인중군 궐내의 궁녀들 가운데 인중군의 시중을 들던 궁녀들과 함께 표경궁의 살림을 책임지게 했다.

3월 대야왕이 몸져눕다.

4월 병세가 악화되다.

5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왕후와 태자 내외가 왕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6월 후계자를 태자로 삼아 대통을 이을 것을 유언하고 창인궁 태안전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승하하고 난 뒤 영의정 이하 조정 대신들이 왕의 국상을 놓고 의견을 주고 받았다. 왕의 장례를 평시대로 30일을 치를 것인가, 60일을 치를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다. 영의정 박영이 국상을 30일 치르도록 하는 반면, 채형과 같은 소장파 관리들이 엄연한 국왕이 운명하였으므로 60일을 치러야 한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이에 대행왕의 왕후를 불러다 두 가지 안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도록 할 것을 좌찬성이 제안했다. 그러자 도승지가 직접 왕후에게 물어보니, 왕후가 곧바로 소장파 대신들의 안에 따라 왕의 장례를 60일로 치르도록 했다.

7월에 대행왕의 시호를 생전에 ‘대야’라는 호와 함께 청렴한 생활을 평생토록 영위한 생애였던 것에서 ‘염종(廉宗)’이라는 존호를 합쳐, ‘염종대야광명대왕(廉宗大野廣明大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8월에 염종대왕의 왕릉을 경기도 과천현에 안장하였다.

9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영의정 이하 대신들이 서산대왕(瑞山大王)이라는 칭호를 올리고, 그 어머니에게 순덕황태후(淳德皇太后)라 불렀다. 뒤이어 왕이 곧바로 연호를 정하여 명하니, 연호를 원가(元嘉)라 하였다. 이후 황태후가 섭정을 행해야 함을 들어 영의정이 건의했으나 순덕황태후가 정중히 사양했다.

10월 왕이 형조의 인사를 단행했다. 형조판서에 성우지, 형조참판에 손철은, 형조참의에 권선, 형조정랑에 유구신, 형조좌랑에 양송평, 율학교수에 동방소의 장남 동방선, 별제에 유동민의 아들 유중성(柳重成), 명률에 이만원, 심률에 조보, 율학훈도에 문필구의 차남 문필(文弼), 검률에 황보진의 장남 황보중(皇甫中)이 임명됐다.

11월 양근군수(楊根郡守)에 옥창을 명했다.

12월 내관 손호성이 죽으니, 왕이 이를 애석히 여겨 장사지냈다. 손철은에게는 당숙뻘이 된다. 그 역시 역대 왕들을 보필하는 것으로 평생을 바치다 천수를 다해 죽었다.

원가 1년(이 시기부터 연호를 쓰므로 새로이 기준을 삼는다.) 정월 호구조사(戶口調査)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선왕이 재위를 30년 동안 다스려 태평성세를 누렸지만 왕실의 곳간이 차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한 이들이 적지 않아 왕이 이를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영의정 박영 이하의 대신들을 불러들여 이를 질책하니 영의정 박영은 경기도 적성현 이백 결(結), 제길이 경기도 양주군 오백 결을 바쳤다. 우의정 동방봉우와 좌찬성 봉길조는 경기도 고양군에 각각 이십 결을 바쳤다. 왕이 이를 듣고 대노하여 근신하도록 명했다.

2월에 영의정 박영이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에 신봉을 명했다.

3월에 신봉이 영의정을 맡은 지 1개월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에 동방봉우, 좌의정에 봉길조, 우의정에 황선교, 좌찬성에 정안성, 우찬성에 궁영규, 좌참찬에 궁상규, 우참찬에 궁운, 의정부사인에 장문, 의정부검상에 온시후, 의정부사록에 오세안을 명했다.

4월에 영의정이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 동방봉우는 양종대왕의 장인이 되니 왕실의 인척이기도 하다. 왕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그의 시호를 수경공(綏慶公)이라 내렸다.

5월에 영의정에 봉길조를 임명하고, 좌의정에 황선교, 우의정에 정안성, 좌찬성에 궁영규, 우찬성에 궁상규, 좌참찬에 궁운, 우참찬에 장문, 의정부사인에 온시후, 의정부검상에 오세안, 의정부사록에 주현우를 명했다.

6월에 조정의 대신들에게 땅을 모두 거두었는데, 총 오천오백이십 결이었다. 왕실의 창고는 차고 넘쳐 내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7월에 조선왕이 국호를 배달이라 하였다.

8월에 조선왕이 국호를 바꾸었으므로 이후에 ‘배달국왕’이라 칭하다.

9월에 봉길조가 세상을 떠나자 황선교가 우의정을 맡았다. 좌의정에 정안성, 우의정에 궁영규, 좌찬성에 궁상규, 우찬성에 궁운, 좌참찬에 장문, 우참찬에 온시후, 의정부사인에 오세안, 의정부검상에 주현우, 의정부사록에 궁오마를 명했다. 돈령부의 모든 인사들을 모두 민가 출신의 관리들이 맡을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반발하고 나섰으나,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취지가 드러났으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배달국왕이 왕에게 알현을 청하여 이를 받아들이다.

11월 배달국왕이 도성에 다다르자 왕이 직접 알현하여 맞이했다.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이 모두 맞이했다. 배달국왕은 전국 곳곳을 유람하며 각지의 특산물(特産物)을 선물 받았다. 대궐에 들어오면서 황태후 이하의 왕실 인사들을 접견하고 보름 동안 지내다 돌아갔다.

원가 2년 정월 배달국왕이 하세하자 태자 거련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선왕에게 문제되지 않은 사안이었기 때문에 외교적 마찰이 야기된 때문이다. 거련이 왕에게 물었다.

“대체 어찌하여 독자적으로 연호를 쓴단 말이냐.”

이에 왕이 직접 왕경에 알현하여 고하길,

“우리나라의 역사가 유구한 까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마음으로 정한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죽서왕이 조선국왕으로부터 폐출(廢黜)됨에 따라 온 나라로 하여금 큰 혼란이 일어났소. 그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죽서왕을 양종으로 존호를 올리고 그분의 제사를 지냈소. 그렇기에 제후국의 예우로서 극진히 대해왔소. 한데, 근자(近者)에 이르러보니 죽서왕, 순강왕 이후에 금상(今上)을 알현하기만 하였을 뿐. 왕호를 손수 내리지 않았습니까.”

배달국왕 거련이 놀라며

“그게 무슨 말이냐. 대대로 너희들은 제후(諸侯)로서 예우(禮遇)하였고, 선사국왕이라는 칭호로서 봉하지 않았느냐.”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왕은 본시 총명하고 어질기도 하였기에 배달국왕의 얼토당토 않은 상황에 멈칫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 이후에 대대로 내 뒤를 이어 자손들이 왕위에 오르면 대대손손으로 왕호(王號)를 손수 지어줄 수 있다면 큰 광영(光榮)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연호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길 바랄 따름이오.”

왕의 소견을 듣던 배달국왕은 왕의 의지를 살핀 다음 그에게 한성군왕(漢城郡王)이라 봉하고, 이후에 대통을 이을 때에도 같은 예식을 치를 것을 약속하였다.

2월, 배달국왕 거련이 대노하여 본국(本國)을 침략하고자 하자, 왕이 영의정 황선교로 하여금 배달국왕에게 국서(國書)를 지어 보내도록 했다.

3월, 보름날에 과거를 치렀다. 장원으로 평민 반태(潘泰)를 삼고, 그에게 도승지(都承旨)를 명하였다. 뒤이어 입격한 우엽(禹燁)에게 좌승지(左承旨), 하헌(河獻)에게 우승지(右承旨), 전영(全榮)에게 좌부승지(左副承旨), 서문찬(西門讚)에게 우부승지(右副承旨), 방서(方瑞)에게 주서(注書), 항송(項松)을 가주서(假注書)에 명했다.

4월 원주목사 대현의 딸을 내인(內人)으로 삼았다. 대현은 왕실과 관련된 부서인 돈령부의 부정에 몸을 담근 바가 있었다. 이에 왕은 대현의 딸이 참하고 어질며 싹싹하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맞이하니 과연 말 그대로였으며 황태후전의 내인으로 들여보냈다. 이것이 선사국 역사상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궁녀다. 이전의 황궁에서는 볼품이 없는 민가의 사람들이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왔었지만 지금은 대현의 딸을 내인으로 들임으로써 왕실의 품격을 더욱 높이려고 하는 왕의 의도가 묻어난 것이다.

5월, 사신으로 갔던 영의정으로부터 배달국왕 거련의 침략 의지가 흐지부지함을 듣게 되었다. 이에 왕은 화약(和約)을 맺고자 하였으나, 거련은 병환을 이유로 거부하다가 태정대신 구우(區宇)로 하여금 사신으로 보내어 화약을 맺게 하였다. 배달왕의 병이 깊어짐을 확연히 알게 된 왕이 그 병을 알고, 사신을 통해 직접 약재를 보내어 쾌유를 기원하였다.

6월, 배달왕 거련이 재차 침략을 할 것을 선전포고하자, 개성부유수로 하여금 지금의 황해도(黃海道) 전역을 정벌하고자 했다. 왕은 의흥위와 호분위의 군사들을 각각 거느리고 개성부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이튿날이 되어 황해도 전역을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산성(山城)을 축조(築造)할 것을 명하였다. 여기에 개성부 백성들이 부역에 나섰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탄해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이에 보다 못한 영의정 황선교가 백성들의 노역이 고달픔을 들어 각 도의 백성들을 파견하여 성을 축조하도록 독려할 것을 청하니 왕이 처음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삼의정(三議政) 이하 각 조(曹) 판서의 상소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각도의 백성들이 지금의 황해도 변방을 수비할 수 있는 산성을 쌓았으니, 배달왕은 침략을 거두었다.

7월 명화왕후에게서 윤형대군이 태어났다. 8월 영의정 황선교가 병환으로 몸져눕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조정에 몸을 담근 대신들 중 한 사람이었다. 왕은 평안공(平安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9월 영의정으로 정안성을 삼았다. 좌의정에 궁영규, 우의정에 궁상규, 좌찬성에 궁운, 우찬성에 장문, 좌참찬에 온시후, 우참찬에 오세안, 의정부사인에 주현우, 의정부검상에 궁오마, 의정부사록에 길용호를 명했다.

10월 민번주를 영돈령부사에 명하였다.

원가 3년 정월에 왕이 돈령부 인사를 명하였다. 장문을 판돈령부사, 궁안을 지돈령부사, 궁숭을 동지돈령부사, 궁만희를 돈령부도정, 현사를 돈령부정, 안임을 돈령부부정, 신약을 돈령부첨정, 민번주를 돈령부판관, 임고양을 돈령부주부, 유구신을 돈령부직장, 고만술을 돈령부봉사, 박영을 돈령부참봉에 명하였다.

이월에 경상도에 감영을 두었다. 도사를 폐지하고 인사를 명했다. 관찰사에 백공, 도사에 장훈, 검률에 봉학인, 심약에 초정술을 명하였다. 후임은 의정부에 명하여 모두 민가의 백성들 가운데 어질고 총명한 이들을 천거(薦擧)하도록 하였다.

삼월에 경기도 고양에 지진이 일어나 이백오십명의 사상자(死傷者)와 삼백오십 가구가 유실(遺失)되었다. 왕이 직접 나서서 그 현장에 찾아가서 위로하고 고양군수에게 명하여 이들을 위로하게 했다.

사월에 선왕의 후궁인 천연귀비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은 문길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였으나 출가외인(出嫁外人)임을 내세우며 슬퍼하지 않았다.

오월에 채형을 통덕랑으로 명하였다. 전임 도승지로서 왕의 측근에서 큰 성덕을 이끈 것을 공로로 삼은 까닭이다.

유월에 내인 대씨가 왕의 승은을 입었다.

칠월에 편구대군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이를 애석히 여겨 부인인 가평군부인에게 내관을 보내어 장사를 후히 치르도록 하였다.

구월에 명화왕후가 해원대군을 낳았다. 이에 왕이 매우 기뻐하였으나 보름 만에 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명화왕후는 황선교의 손녀이자 황승의 딸로 왕이 대군 시절에 배필로 맞았다. 황승은 폐주에 봉한 바 있는 양종대왕의 죄업으로 인해 대군과의 혼사가 알려지기를 극구 꺼려하여 은밀히 혼사를 치렀다. 하여 대군이 황태자에 봉하게 되자, 황태자에게 새로 간택(揀擇)할 것을 권하여 장씨를 태자비로 책립(冊立)했다. 이후 황태자가 보위에 오르자, 태자비를 사가(私家)에 기거하도록 하여 효비(孝妃)에 봉하였다. 뒤이어 왕이 왕후에 대한 정을 못 잊어 그녀를 다시 대궐로 불러들여 못 다한 사랑을 이루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왕후가 이렇듯 세상을 하직하니 왕은 죽은 왕후에게 명화인혜은수왕후(明火仁惠隱修王后)라는 시호를 남겼다. 상배(喪配)를 한 왕이 새로 태자비에 봉한 바 있는 효비 장씨를 왕후로 책립하여 백란왕후(白蘭王后)에 봉하였다. 왕은 왕후에게 어린 두 대군을 돌보도록 명하였다.

새로이 국모의 주인이 된 왕후는 고모인 양화군부인을 입궐하도록 명하였다. 양화군부인은 구학군의 부인이다. 그녀는 훗날 왕가의 맥을 다시 이어주도록 하는데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고모를 정중히 모시는 왕후의 몸가짐이 매우 단아했다.

“마마, 감축 드립니다.”

양화군부인의 인사를 받은 왕후가 자리에 앉기를 권하였다. 이에 양화군부인이 자리에 앉았다. 앉고 나서 왕후에게 고하길

“마마, 제가 듣자하니 역대 왕들께서 구제(舊制)를 폐하시고자 노력하였으나, 아직도 그 적폐(積弊)가 남아 있다고 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 영감이 생전에 궁태조가 만든 관제(官制)를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아하니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하더이다.”

“……”

새 왕후는 이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쇤네가 알아본 바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전국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아직 우리나라 형편상 전하의 치세가 완전히 떨치지 않고 있다 합니다. 지금은 역대 왕들의 노력에 의해 전국적으로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나, 이곳 한성과 경기도 전역에만 실효를 볼 뿐. 다른 지역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다 하더이다. 그래서 토호(土豪)와 호족(豪族)들이 이에 반발하여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더이다. 게다가 조선왕들은 우리의 구제를 답습(踏襲)하여 벼슬을 나누어준다고 하더이다. 태정대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인부대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우두머리 격인 태정대신도 그 예라 하더이다.”

“……”

“마마, 개혁도 좋기도 하지만 상감에게 고하시어 구제를 받아들여 더는 백성들의 혼란을 막으셔야 합니다.”

왕후는 임금에게 찾아가 이를 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게 무슨 소리요?”

하며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역대의 왕들이 거쳤다고 하나 개혁의 진척이 매우 뒤쳐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 왕이 전전긍긍하던 차에 왕후가 이를 고하게 되니 그 심각성은 말하지 않아도 환한 일이었다.

십일월에 경기도 양주 근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우두머리는 나각하라는 이였는데, 자신이 토호로서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궁씨네 왕조의 음덕을 받은 것을 공공연하게 내세우며 자신이 왕실을 전복할 뜻을 밝혀냈다. 이에 고양군수가 놀라 왕에게 이를 고하니 왕이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하여 호분위의 군사들을 파견했다. 호분위장의 보고를 받아보니, 나각하는 궁태조의 재위 시부터 벼슬을 맡은 사람으로서, 궁씨의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불만삼아 오랫동안 와신상담으로 일관하여 때를 기다려 반란을 도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반란을 통해 다시 궁씨의 왕통으로 이어갈 것을 천명했으며 기존의 제도를 혁파하고 구제도로 돌아가도록 할 것을 천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대신으로 있는 궁씨들을 불러들여 왕후의 뜻대로 구제를 부활할 것을 밝히자 처음에는 놀라더니 백성들의 가난함이 극에 달함을 들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하여 왕이 구제를 받아들이니 상대등(上大等)이 그 예다. 때마침 구제 아래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형인 방을대군을 상대등에 명하였다. 그리고 구제 중 하나인 충인의예지신(忠仁義禮智信) 대신의 직책을 모두 혁파하여 6조에서 6부의 업무를 대신 맡게 하였다.

십이월에 호분위의 군사들이 나각하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나각하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목을 고양군 관아 문 앞에 매달았다. 나각하의 일가친척을 찾아내어 죽이기도 하였으나, 나머지 후손들은 역대 왕의 전례에 따라 모두 대궐에 내관이나 궁녀로 삼았다. 내인 대씨가 나씨의 여식들을 모두 궁녀로 삼아 통솔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씨의 아들들은 모두 내관의 신분으로서 대궐의 살림을 도맡았는데 이 중 유명한 내관이 바로 나갑(羅甲)이다.

원가 4년 정월에 왕은 구제인 일도도사(一道道使)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임영우를 그 후임으로 맡게 했다. 이후 일도도사를 한성부와 경기도를 관할하게 하고, 한성부윤(漢城府尹),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통솔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기도관찰사와 한성부윤이 이에 대해 반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왕은 물론이고 왕후에게까지 전해져 진노를 사고 말았다. 이를 중재해줄 이는 황태후가 있다고는 하나 왕실의 일이 매우 버거운데 정사에 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의지를 밝혔기에 불가피하게 왕이 직접 중재에 나섰다. 왕후는 금천현감으로 나가 있는 장국을 일도도사에 명하고 임영우를 면직(免職)하여 후임 금천현감에 임명하였다. 장훈에게 이도도사(二道道使 또는 二道都事)를 임명하여 강원도와 경상도를 다스리게 하고, 장제를 삼도도사(三道都事 또는 三道道使)에 명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전역을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되자 각 도의 관찰사들이 일제히 반발하여 상소를 올렸다. 이렇게 되자 왕은 왕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곧 장씨네 세도를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영의정도 이를 보다 못해 구제를 복귀한 것에 대해 매우 우려를 표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개성부에서 다스리던 북변(北邊-황해도 일대) 지역을 사도도사(四道都事)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하여 장벽을 사도도사에 명하였다.

이월에 지금의 강원도 고성(高城) 지역에 오랑캐가 들이닥쳤다.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죽이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으니 왕은 의흥위 군사를 풀어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삼월에 내관인 나갑을 우가에 명하여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맞먹는 권세를 움켜쥐게 했다. 연이은 복고(復古)에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도성 안팎에 역모의 움직임이 움트기 시작했다.

사월에 주나라 강왕이 오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배달국의 사신이 이를 전하니 왕이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 열 명을 배편으로 보내어 주나라 왕을 위로하게 했다.

오월에 주나라의 태자가 소왕(昭王)으로 즉위했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제신왕의 폭정을 견디지 않은 은국(殷國)의 백성들을 위해 제신왕을 정복하여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이루었다. 이에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은 모두 이를 칭송하기에 이르니, 소왕이 이들에게 장차 선사국과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말을 남겼다.

유월에 백란왕후가 기창대군을 낳았다. 칠월에 배달국의 연이은 침탈에 참을 수 없어 왕이 배달국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좌우도수운판관에게 명하여 주나라와의 무역을 더욱 강화하였다. 더 나아가서 왕이 친정에 나섰다. 의흥위와 호분위 군사들을 거느리고 모두 고성 이북의 지역을 정벌하여 배달국의 호장(戶長) 용처(龍處)를 죽이고 이백 명의 포로를 잡아 내관으로 삼았다.

팔월에 내인 대씨가 상궁(尙宮)에 봉해지고 왕의 신임을 더욱 얻었다. 이후 대씨가 왕에게 나갑에게 종질(從姪)이 되는 여인을 내인으로 삼아주도록 청하니 왕이 나씨에게 내인에 명하였다. 그러자 백란왕후가 이를 질투하였다. 그러자 황태후가 이를 염려하여 중궁을 불러 근신하도록 명하였다. 팔월에 고성 이북의 지역을 평정한 지역을 오도(五道)로 삼아, 오도도사(五道都事)가 다스리게 했는데 장모를 오도도사에 명하였다.

구월에 용양위의 군사들을 거느려 사도의 이북 지역을 정벌하여 지금의 안주(安州), 개천(价川), 덕천(德川), 영원(寧遠) 지역까지 차지했다. 이에 배달국왕의 태자가 나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왕은 이 지역을 육도(六道)라 이름하고, 육도도사(六道都事)를 파견해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육도도사로 장훈의 손자이자 장벽의 아들인 장수(張守)를 삼았다.

시월에 호분위의 인사를 명했다. 상호군에 백의송, 대호군에 초술, 호군에 온인, 부호군에 궁영만, 사직에 조기, 부사직에 호빈, 사과에 호성기, 부장에 길지, 부사과에 길송, 사정에 궁술, 부사정에 홍기성, 사맹에 황승, 부사맹에 정흥, 사용에 국석군, 부사용에 백란왕후의 오라버니인 장고(張高)를 명하였다. 이 중 장고는 왕후가 간청하여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신하들이 외척을 등용한 처사라 하며 우려했다.

십일월, 최민의 막내딸이 내인에 명하였다. 최민에게 네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 중 세 명은 민가에 시집을 보냈고, 막내딸만 남은 상태였다. 이에 최민은 대현의 딸을 궁인으로 삼은 전례에 따라 왕에게 직접 찾아가 자신의 막내딸을 바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내인으로 맞아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후가 대노하여 최민의 딸을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인정사정없이 매질을 해대었다.

십이월에 상궁 대씨가 공주를 낳았다.

원가 5년 정월에 대씨가 낳은 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궁내(宮內)에서는 왕후 장씨가 독살을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상심이 매우 큰 것을 매우 우려했던 왕은 대씨에게 궐 밖에 살게 하고 그 근처에 사가를 마련하니 왕이 그녀에게 인현궁주(仁賢宮主)에 봉하였다.

이월에 영의정 정안성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천명(天明)을 다하여 죽었기에 호상(好喪)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영의정에 궁상규를 삼고, 좌의정에 궁운, 우의정에 장문, 좌찬성에 온시후, 우찬성에 오세안, 좌참찬에 주현우, 우참찬에 궁오마, 의정부사인에 길용호, 의정부검상에 안임, 의정부사록에 현사를 명하였다

양화군부인이 왕후를 직접 찾은 건 그로부터 보름 뒤의 일이다. 지난날 대씨(大氏)에게 손찌검을 했던 사건으로 인해 궁내의 분위기는 왕후로 하여금 냉랭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왕후는 사사로이 양화군부인을 자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양화군부인은 꽤나 난색을 표하게 되고, 백성들의 입에 행여나 오르내릴까 저어되어 조심스럽게 처신을 해대는 것이다. 왕후의 거처에 당도한 그녀는 왕후에게 항상 몸조심할 것을 당부하고는 했다.

“마마, 마마의 평판(評判)이 매우 좋지 않다 하더이다.”

“어째서요?”

양화군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한다.

“지난날 대씨의 일을 가지고 뭇 백성들이 입방아를 찧는 모양입니다. 세간에서는 투기(妬忌)한다는 소문이.”

그러자 장씨는 기가 차다는 듯 고모를 몰아세우는 것이다.

“투기라니요!”

“……”

지난날 황태자비 시절부터 엄연히 조강지처가 있음을 알고도 국혼을 맺은 자신이 막상 왕후의 자리에 오르고 보니 대행왕비(大行王妃)인 황씨보다 더한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던 거다. 이를 지키다 못한 그녀가 끊임없는 괴롭힘을 가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정당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뭇 사람들이 보기에 왕실의 어른으로서 체통을 내동댕이치는 왕후의 처사가 온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의정부의 실권이 이미 내관 나갑에게 있음을 알게 된 장씨는, 왕의 사랑이 떠나감을 알고 나서 야밤중에 불러다 밀회(密會)를 즐기기도 했다. 이를 알게 된 내인 하나가 왕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왕이 진노하여 나갑을 내관 자리에서 내쫓으려고 했으나, 왕후의 증조부가 되는 장문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있어 주저하는 것이다. 처가의 체면을 살리려는 의중이 문제였다. 영돈령부사 민번주에게 이를 근심하는 말을 했으나, 민번주 역시 여자의 심리를 잘 모르는 까닭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바깥일 밖에 할 줄 모르는 까닭에 더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삼월에 배달왕 거련과 화의(和議)를 맺었다.

사월에 나갑을 내관 직을 내려놓게 하여 왕의 곁에서 보좌하지 않도록 했다. 주위의 빈축(嚬蹙)을 살 것을 우려한 영의정과 영돈령부사의 직언 때문이었다. 그러자 왕후 장씨는 마치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으로 놓친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오월에 내인 최씨가 승은을 입었다. 왕후의 투기가 다시 도져 주위 왕실 사람들에게 큰 근심을 안겨주었다.

팔월에 우가라는 직제를 혁파하고 의정부에서 업무를 일임하도록 명하였다. 전임 내관 나갑을 선무랑(宣務)으로 삼았다.

구월에 향랑의 장남 향부가 자신의 장성한 아들을 왕에게 바치니, 향부를 내관으로 임명하였다.

십일월에 내인 최씨를 상궁에 명하였다.

십이월에 상궁 최씨(崔氏)가 공주를 낳았으나, 보름 뒤에 단명(短命)하였다. 상궁 최씨가 이를 슬퍼하자 세간에서처럼 중궁에서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하여 상궁 최씨는 창인궁주(昌仁宮主)에 봉하였다.

원가 6년 정월에 우의정 장문이 왕의 알현을 청하였다. 왕이 장문을 맞이하자,

“신 장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고하고자 하였사옵니다.”

하며 왕에게 고하였는데 왕이 이를 놀라며

“수명이 얼마 없다니요?”

“제 몸을 제가 아옵니다. 오랫동안 여러 대왕들을 섬기며 살아온 까닭으로 제 힘이 다함을 느꼈나이다. 다만.”

“……”

왕은 장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쇤네의 증손녀가 한 나라의 국모로 있으나 제가 너무 대가 세게 키워 놓다보니 폐하의 말씀에 토를 달고 말을 듣지 않을까 매우 저어될 뿐이옵니다. 주나라에서는 자고로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 한다는 말이 있다하던데 그 말인즉슨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의 후비(后妃)로서 모범을 보여야함을 드러내는 것이니 폐하께서는 왕후보다 더한 힘을 키우시어 부디 왕실의 우환을 하루라도 빨리 수습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하옵니다. 이것은 신의 마지막 말이옵니다.”

장문은 증손녀를 걱정하였다. 한 나라의 국모로서 체통을 내동댕이친다는 소문을 듣기가 매우 언짢았다. 하여 이 말을 남긴 그 이튿날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떠났다. 왕후로 하여금 상가에 가서 상주 노릇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후임 우의정으로 조고형을 명하였다.

이월에 왕이 병환에 시달렸다. 하여 태후가 장흥사에 불공을 드리고자 했으나 이미 병세가 매우 악화되었다.

삼월에 왕후 장씨가 태후로 하여금 성정이 어질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왕족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태후는 생각한 끝에 신성대군의 아들인 보성대군으로 하여금 왕통을 이어가게 하였다. 그 뒤 태후의 명에 의해 왕은 태상왕(太上王)에 봉하고, 태후는 태황태후(太皇太后)에, 왕후를 황태후에 봉하였다. 새 왕의 배필로 봉열의 딸을 맞이하게 하여 백화왕후(白和王后)에 봉하였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새 왕이 연호인 원가를 그대로 사용할 것을 명하였다.

오월에 영의정 궁상규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궁운을 명하여 의정부의 인사를 명했다. 좌의정에 온시후, 우의정에 오세안, 좌찬성에 주현우, 우찬성에 궁오마, 좌참찬에 길용호, 우참찬에 안임, 의정부사인에 현사, 의정부검상에는 좌의정에 있던 조고형을 명하고, 의정부사록에 권선을 명하였다.

칠월에 태상왕이 병환을 이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왕은 태상왕의 대군들을 지켜줄 것을 약속하였다.

팔월에 죽은 태상왕의 대군들을 모두 궁궐 안에서 살게 하고, 장성한 뒤에 출가시킬 것을 명하였다.

구월에 왕이 몸이 좋지 않음을 들며 어의에게 진맥을 보게 했는데 자손을 가지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음을 밝혔다. 왕과 왕후 모두가 이를 슬퍼하였다.

십일월에 왕이 자신의 후계를 선왕(先王)의 장남인 윤형대군으로 삼아 황태자로 봉하게 했다. 이에 황태후가 감읍(感泣)하니 왕이 황태후에게 문안하며 위로하였다.

십이월에 선왕의 시호를 철종원가서산대왕(哲宗元嘉瑞山大王)이라 하였다.

원가 7년 정월, 태황태후 향씨에게 선화태황태후(宣和太皇太后)라 봉하였다. 황태후 장씨에게는 덕혜황태후(德慧皇太后)에 봉하였다.

2월, 태황태후가 선왕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심신이 쇠약해짐을 들어 송파(松坡)의 장흥사에서 여생을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이 장흥사의 중 선홍(宣弘)을 불러다 선왕의 넋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3월, 태황태후가 승려가 될 것을 청하자 왕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태황태후의 뜻이 매우 완강하니 영의정 이하의 신하들이 이를 만류하고 나섰다. 하지만 태황태후의 뜻이 확고함을 알고서 그 뜻을 받아들이게 했다. 태황태후는 이에 승려가 되었고 남은여생을 송파의 장흥사에서 지내게 되었다.

4월, 일도도사의 전횡(專橫)이 계속됨에 따라 경기도관찰사와 한성부윤이 상소하였다. 이에 왕은 황태후에게 찾아가 이를 전하자 황태후가 눈을 감아줄 것을 청하였다.

5월, 일도도사의 직을 폐지하고, 장국을 강원도 이천에 유배 보냈다.

6월, 백화왕후가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보름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를 두고 백성들이 모두 황태후 장씨가 저주를 퍼부은 탓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7월, 개성부유수 방수호를 경기도관찰사에 명하였다. 개성부유수의 후임으로 오세안에게 겸임을 맡도록 명하였다. 개성부경력에 고대인, 개성부도사에 위경대군, 개성부교사로 문봉을 명하였다.

8월, 의흥위의 관직에 있는 모든 이들을 면직시키고 민가의 백성들 가운데 명석하고 씩씩한 인재로 간추려 임명하도록 의정부에 명하였다.

9월, 승려가 된 태황태후의 청에 따라 송파 건너 광진(廣津)에 절을 창건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이 절을 광흥사(廣興寺)라 이름 지었다.

10월, 곡순의 평릉도역승 직을 거두도록 명하고, 그에게 청정대부(淸靖大夫)에 명하였다. 청정대부는 본래 궁씨가 나라를 잡았을 때 마련한 직제(職制)였으나 이후의 왕들이 개혁하지 않은 탓이 매우 컸기에 구체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11월, 정안성의 아들 정흥이 1000결의 토지 가운데 500결을 간추려 내어 왕실에 헌납하였다. 왕이 이에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하였다.

12월, 영의정 궁상규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장례를 후히 치르게 하고 영의정에 궁운, 좌의정에 조고형, 우의정에 온시후, 좌찬성에 오세안, 우찬성에 주현우, 좌참찬에 궁오마, 우참찬에 길용호, 의정부사임에 안임, 의정부검상에 현사, 의정부사록에 민번주를 명했다. 왕이 인사를 단행하고 난 뒤 한 밤 양화군부인을 불러 들였다. 왕의 부르심을 받든 군부인은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장씨가 세도를 부린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어요, 군부인께서는 부디 자중하시기 바라오.”

“그게 참이옵니까, 폐하?”

의아해하며 양화군부인이 물으니

“백성들이 한소리를 합디다. 장씨네가 다시 세도를 부린다고요.”

왕이 어리광 비슷하게 대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장씨 가문에서 중궁의 자리를 차지한 전례가 있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이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인 걸 모를 까닭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세간의 소문도 소문이지만 자칫하다 왕실의 체면이 깎이는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왕의 뇌리에서 스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일도도사의 직에 맡으면서 백성들의 재산을 사적으로 쓰고자 수탈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한성부와 경기도에 있는 농지들을 거두어들여 자신들의 재산으로 만든 다음, 그 농지의 주인들로 하여금 공공연히 강제노역(强制勞役)을 시키는 등 많은 학정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 양화군부인도 장씨의 일가붙이 인만큼 한몫을 챙기려는 움직임이 경기도관찰사의 상소에 드러났다. 이를 보고 노한 왕이 양화군부인으로 하여금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다. 그걸 까마득히 잊다가 왕의 으름장에 놀라고, 자신이 은밀히 축적한 재산이 탄로된 것에서도 놀랐다. 서슬이 퍼런 황태후의 성정을 모르지 않지만 왕의 권세도 못지않게 막강하다보니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고 보니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나올 따름이다.

“이 시간 이후에 황태후전에 들어갈 생각하지 말고 근신하도록 하시오. 만에 하나 다시 황태후전에 사사로이 드나들었다가는 장씨 일가의 피붙이를 모두 멸문지화(滅門之禍)시킬 것이니 그리 아시오.”

으름장을 놓아 양화군부인의 다짐을 받았다. 이것은 궁녀들 사이에 소문으로 퍼져 황태후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자 황태후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구나.’

하며 오히려 왕의 폐위를 생각해냈다. 태황태후 향씨가 절에 들어갔기에 왕실의 크고 작은 일에 관여할 일이 없는 것이 첫째고, 둘째는 왕실의 웃어른으로 군림하게 된 자신의 위치에서 유리한 고지(高地)를 차지할 수 있어 이득이 되는 것이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왕을 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에 그깟 왕위 쯤 손바닥으로 뒤집어엎을 정도로 새로 왕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 황태후로 하여금 황상의 명을 콧등으로 여기는 것이다.

원가 8년 정월, 경기도도사에 호선을 명하고, 전언대군을 경기도검률에, 허정대군을 경기도심약에 명했다. 이때 치른 과거(科擧)에서 맹달(孟達)이 수석(首席)으로 급제했다. 맹달은 신성대군의 딸인 보낭공주의 부군이다. 왕이 이에 기뻐하여 무공랑(務功)에 봉하였다.

2월, 의정부와 돈령부의 인사를 명했다. 영의정에 있던 궁운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후임 영의정으로 온시후를 명하고, 좌의정에 오세안, 우의정에 주현우, 좌찬성에 궁오마, 우찬성에 길용호, 좌참찬에 안임, 우참찬에 현사, 의정부사인에 조고형, 의정부검상에 권선, 의정부사록에 민번주를 명하였다. 이 인사안에 대해 황태후가 반발하였으나 왕이 황태후에게 명하길,

“장흥사에 기거하고 있는 태황태후의 본을 받으라.”

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이는 시시때때로 정사에 관여하려는 황태후에 대한 경고였다.

3월, 유배를 갔던 장국을 강원감영 앞에서 처형하였다. 처형 소식을 전해들은 황태후가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였으나, 종친들이 반발함에 따라 관철되지 않았다.

4월, 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송파의 장흥사에 거둥하여 장례를 후히 치렀다.

5월, 장훈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왕이 호분위의 군사들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장훈이 이에 놀라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멀리 배달국 변경(邊境)으로 도망쳤다.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에 다다른 장훈이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6월, 배달국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장훈의 투항을 권고하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답변이 없었다. 이에 영의정으로 하여금 직접 배달국왕에게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도록 했다.

7월, 배달국왕에게 장훈의 투항을 독려하겠다는 답서(答書)를 받았다. 이후 장훈은 배달국왕의 군사들에게 포위(包圍)된 채, 한성으로 끌려 나왔다. 왕이 즉시로 친국(親鞫)을 하여 죄를 물은 뒤 이튿날로 처형하였다.

8월, 황태후의 친인척이 되는 장제, 장벽, 장모를 즉결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그 자손이 되는 장수와 장고는 그 직첩을 거두도록 명하고 가택(家宅)에 연금하도록 명했다. 보름이 지난 뒤에 장수와 장고로부터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는 장문의 소(疏)를 올렸다.

“오직 폐하의 은덕만을 받다가 방약무인(傍若無人)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한 신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옵소서. 하옵고 태후마마에 대한 처분 또한 거두어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적반하장으로 덤벼든 장씨의 세도는 이로써 매듭이 지어졌다. 왕은 간청을 받아들였다.

9월, 황태후가 명을 거두었다. 태황태후의 넋이 꿈에 나타나 황상을 보필하도록 명을 받았다며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였다. 이에 왕이 흔쾌히 받아들여 황태후를 극진히 모실 것을 다짐하였다.

10월, 자신의 후계가 없음을 애석하게 걱정하자, 종친들이 나서서 철종서산대왕의 장자인 윤형대군을 황태자로 옹립(擁立)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이 받아들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뒤이어 덕혜황태후를 태황태후에 봉하였는데, 이는 왕실의 웃어른으로 공경한다는 왕의 굳은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11월, 배달국왕 거련이 왕경에 태묘(太廟)를 세웠다. 이곳에 열성조 일곱 분을 모시었는데, 태조 환인천제, 안파견, 혁서, 고시리, 주우양, 석제임, 구을리, 지위리가 이들이다. 선사국이 일찍부터 대묘(大廟)를 두어 왕들의 넋을 모셔왔으니, 여러 사신들이 이를 지켜본 까닭에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한 결과다.

원가 9년 정월 보름에 배달국왕 거련이 병으로 인해, 보위를 태자 안부련에게 물려주어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상왕으로 물러난 거련이 안부련에게 당부하였다.

“선사국과 미운 정도 들고 고운 정도 들었다. 그러니 선사국왕과 잘 지내도록 해라.”

이 말을 들은 안부련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사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이월에 정흥을 이천도호부사(利川都護府使)에 명했다. 뒤이어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 직을 경기도 백성들 가운데 어질고 학식이 깊은 이를 골라 임명하도록 경기감영(京畿監營)에 명하였다. 이는 기존에 의정부에 명한 관례를 깬 사건이었다. 그리고 황태후를 태황태후에 봉하였다.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대접하고자 함이다.

삼월에 이천도호부사 정흥을 영서부원군(迎曙府院君)에 봉하였다. 정흥의 딸이 대궐에 들어가게 되어 내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태황태후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흥의 딸은 왕의 승은을 입지는 않았다.

사월에 도창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700결 전부를 왕에게 헌납했다. 이에 왕이 그에게 후임 고양군수에 명하였다.

오월에 전임 경기도관찰사 인완대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했다. 장지(葬地)는 양종대왕의 왕릉 인근에 마련하여 그곳에 묻었다.

칠월에 태황태후가 파주 땅에다 절을 지어줄 것을 왕에게 청하니, 왕이 그 청에 따라 새로 절을 창건했다. 이곳을 보국사(寶國寺)라 이름 했다. 장씨는 생전의 향씨의 불심(佛心)에 버금가기로 소문이 나 있었으나, 속세에 찌든 채 불심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해 참회(懺悔)하는 마음을 다잡고자 절을 따로 지어줄 것을 왕에게 청한 것이다.

팔월에 태황태후를 보국태황태후(寶國太皇太后)에 봉하였다.

구월에 창인궁에 따로 전각을 지었는데, 이는 장차에 후궁이 거처할 곳을 짓고자 함이었다. 하여 왕은 이 전각을 짓는 데에 큰 공을 들였는데 왕이 이 전각을 공혜전(恭惠殿)이라 이름 했다.

십일월에 지금의 서울 안산(鞍山) 자락에 자그마한 궁궐을 지었는데, 이름을 자애궁(慈愛宮)이라 하였다. 뒤이어 이각을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에 명하였다.

십이월에 경기도의 찰방 직에 맡은 이들을 면직시키고, 그 후임으로 경기감영으로 하여금 경기도 백성들 가운데 어질고 학식이 깊은 이들을 간추려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궁소지를 양천현령(陽川縣令)에 명하고, 영화부원군(迎華府院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그의 딸을 내인으로 삼았다. 이는 태황태후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뒤이어 내인 정씨(鄭氏)로 하여금 상침(尙寢)에 명하였다. 이 또한 태황태후의 각별한 명에 따른 것이다. 태황태후는 상침으로 하여금 대궐의 내인들의 문란(紊亂)한 기강을 바로 잡도록 했다.

원가 10년 정월에 태황태후의 명으로 이각의 딸을 내인으로 삼았다. 뒤이어 내인 궁씨(宮氏)를 상의(尙儀)에 봉하게 하여 상침 정씨의 수발을 담당하도록 했다. 상의 궁씨는 상침 정씨와 마찬가지로 왕의 승은을 입지 않았다. 이후 태황태후가 궁궐의 여인네들을 통솔하는 데에 전념을 다하게 된다.

2월에 영의정 온시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후임으로 오세안을 임명하였다. 이때 과거가 실시되었는데 그의 아들인 오성만(吳盛滿)이 장원급제했다. 왕이 그에게 충좌위장(忠佐衛將)에 임명하였다. 좌의정에 주현우, 우의정에 궁오마, 좌찬성에 길용호, 우찬성에 안임, 좌참찬에 현사, 우참찬에 조고형, 의정부사인에 권선, 의정부검상에 민번주, 의정부사록에 유구신을 명하였다.

5월에 자애궁주의 신주를 자애궁에 모시도록 명했다.

6월에 흥덕궁주가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하였다.

7월에 정흥이 나머지 재산을 모두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이를 두고 큰 홍복(弘福)이라 하며 기뻐하였다.

8월에 환해대군의 병환이 깊어져 왕이 직접 문안을 드렸으나, 그 이튿날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크게 상심하여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하였다.

9월에 백비를 호분위장(虎賁衛將)에 명하였다. 10월, 왕의 명에 따라 치른 과거에서 장원에 서가교의 아들 서상안(徐尙)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왕이 이에 중직대부(中直大夫)에 봉하였다.

11월, 백비를 중훈대부(中訓大夫)에 명했다. 후임 호분위장으로 백비의 동생 백의송이 임명되었다.

12월에 왕이 이조판서에 백공을 명하고, 호조판서에 백덕을 명했다.

원가 11년 정월에 이만원을 이조참판에 명했다. 오랫동안 충무위장으로 몸을 담갔기에 왕이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까닭이다.

이월에 상침 정씨를 상궁(尙宮)에 명하고, 상의 궁씨를 상침에 명했다. 내인 이씨(李氏)를 상의에 명했다.

삼월에 오세안에게 경기도 수원의 땅 오십 결을 하사하였다. 이는 과천현감이 나라의 명에 따라 직접 관리하고 있던 땅이었다.

사월에 신성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신성대군은 곧 임금의 아버지이니 친부를 잃은 왕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어머니인 삼전군부인을 불러 아버지의 명복을 빌도록 부탁했다.

오월에 장주공주가 민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이 전례에 따라 그 자손으로 하여금 벼슬에 나아가도록 권해보았으나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뒤이어 윤형대군을 태자로 옹립했다.

유월에 이도도사를 혁파하였다. 칠월에 향부가 내관 직에서 면직하고, 향부의 아들 향염(香鹽)을 내관으로 삼았다. 이후 향염의 뒤를 이어 내관으로 일하도록 명했다.

팔월에 갑작스럽게 왕의 병환이 생겼다. 이에 태황태후가 직접 어의를 시켜다 왕에게 진맥을 해보고 해보았으나 병명을 알 수 없었다.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이 이를 염려하여 주야(晝夜)로 문안을 드리고 탕약(湯藥)을 대령하기도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팔월 이십이일에 왕이 창인궁 태안전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근래에 들어 거동이 불편한 까닭에 태자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여 자주 신하들과 접견하기도 했다. 왕이 훙서하자 태자가 보위에 올랐다. 의정부와 의논하여 대행왕(大行王)의 시호는 흥종(興宗)이라 하였으나 그 이상의 별호는 올리지 않았다. 선왕이 평소 검소(儉素)함을 숭상(崇尙)했기 때문이다.

즉위년 구월 왕이 배달왕으로부터 ‘탕평왕(蕩平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십일월 국상(國喪) 중에 방을대군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명복을 빌며 보종대왕의 산릉 근처에 장지를 정해 묻게 했다. 십이월에 상대등이라는 관제를 없앴다. 제길의 딸을 내인으로 삼았다. 연호를 ‘보덕(普德)’이라고 정했다. 이후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새로이 연호를 정하도록 하는 관례가 생겨났다.

보덕 1년 정월에 양화군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태황태후 장씨의 간청에 따라 구학군의 사저에 행차하여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2월에 영의정 이하 대신들에게 명하여 신법(新法)을 만들게 하였다. 선왕의 훙서 후에 60일을 치르도록 하는 안을 명시하게 했다.

3월에 왕이 제길의 딸인 내인 제씨(諸氏)를 상의에 봉하였다. 태황태후가 이에 부당함을 알리자 왕이 노하여 근신하도록 명하였다.

4월에 배달국왕이 태정대신을 수반으로 하는 태정관(太政館)을 세웠다. 이에 왕이 이미 폐지된 상대등의 업무를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게 일임하였다.

5월에 배달국왕이 조선상을 혁파할 것을 공포하고 태정대신을 국가의 수상으로 삼았다.

6월에 주나라 소왕이 훙서했다. 태자가 목왕(穆王)으로 즉위하였다.

7월에 신법에 영의정을 국가의 수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명시하도록 했다.

8월에 상의 제씨가 왕의 승은을 입어 아들을 낳았다. 왕이 이름을 정하지 않았으나, ‘분(盆)’이라 이름 지었다.

9월 선왕의 왕비 봉씨를 황태후에 명하였다. 그러나 태황태후가 엄연한 생모였으므로 직접 섭정을 담당했다. 왕비로 옥선의 딸을 맞이하게 하여 나주왕후(螺舟王后)라 봉하였다. 왕후 옥씨가 나이가 많은 데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태황태후의 명에 따라 왕자 분을 양자로 삼았다.

10월 해강군의 딸 인명옹주를 민가에 시집보냈다.

11월 환연군이 역모를 꾀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왕이 환연군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태황태후가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보름 뒤에 환연군을 반역자(叛逆者)로 몰아다 사사(賜死)하였다. 환연군은 공교롭게도 태황태후의 고모인 양화군부인의 자손이었으니 태황태후의 근심은 날로 늘어가기만 했다.

‘내 힘써서 황상을 세웠건만. 반란은 왜 일어났는고.’

12월 태황태후가 황제를 불러다 어의로 하여금 진맥을 맡게 하니 그 역시 아이를 가지지 못한 병에 걸렸다고 했다. 이에 놀란 태황태후가 노발대발하며 다시 재진(再診)하게 했으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이날 밤. 영의정 오세안이 태황태후를 알현하며 아뢰었다.

“태황태후마마, 신은 근래 근심을 감출 수 없는 게 있사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울울창창한 왕족들이 있는 까닭이 아닙니까. 게다가 역대 제왕들께서는 왕족에게 조정의 요직들을 두루 앉히지 않았겠습니까. 해서 왕족들이 오히려 보위를 찬탈하려는 역심을 품을 것이 불을 보듯 환하지 않겠습니까.”

“이보시오, 영상.”

“네, 마마.”

“나는 두렵습니다. 황상이 아이를 낳지 않으면.”

“왕자 아기씨를 얻지 않았나이까? 더 이상 심려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황상의 아이를 낳았다고는 하나, 왕자의 병이 워낙 잦은지라.”

왕의 아이를 낳은 상의가 못마땅한 것이다. 신분도 천한 까닭이기도 하지만, 한때 역모를 당한 집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여 태황태후는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병이 잦은 왕자를 대신해 양화군부인의 자손들 가운데서 왕통(王統)을 이을 것을 결심했다.

보덕 2년 정월, 천위사의 손녀이자, 천목한의 딸을 왕후로 맞이했다. 태황태후의 명에 따라 그녀에게 정선왕후(貞善王后)라 봉하였다. 천목한을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였다. 천목한에게 이조참의에 명하였다. 이는 태황태후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섭정을 맡은 태황태후의 권세에 의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월, 나주왕후가 태황태후에게 간청하여 상의 제씨를 인비(仁妃)에 봉하였다. 태황태후는 나이가 들대로 든 까닭에 왕의 뜻에 거스를 수 없었다. 삼월, 왕의 친정을 간청하는 좌의정이 사의를 표하자 태황태후가 노하여 말하길,

“내가 필(必)히 황상을 폐하여, 다른 왕족으로 하여금 새 왕을 옹립해야겠어요!”

근래에 들어 태황태후는 공공연히 인비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 이는 궁씨에 대한 미움에 버금간다고 사람들이 수군댔다.

“한때나마 태황태후의 자리에 올라앉은 명문의 가문이나, 이렇듯 왕궁의 수발을 들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내팽개치고 오직 왕의 승은을 입어야만 한다는 욕심이 지나쳐 못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왕후의 몸에서 아이를 낳지 않고, 천출(賤出)에게서 아이를 낳으니 이 얼마나 큰 수치입니까.”

그 부친이 되는 제길이 나서며 태황태후전 앞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를 드리고 있었다. 주위 대신들이 나서서 이를 말렸으나 태황태후의 노여움이 풀어질 때까지 물러설 수 없다고 맞섰다. 이 소식을 들은 인비가 나서서 아버지의 뜻을 꺾어보려 했으나 한사코 거부하였다. 이에 태황태후는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이윽고 석고대죄를 거두라고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이 대노하여 태황태후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국석군과 해강군을 대역죄로 다스려 죽이도록 명했다. 이에 대신들이 해균옹주와 영호옹주를 죽이라는 명을 청하였으나, 두 옹주를 죽이지 않았다. 그 자손인 연흥군은 생존에 위협을 느껴 일가 가솔들을 거느린 채 배달국, 곧 조선 땅에 달아나고 인명옹주는 이 소식을 듣고 비관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진(自盡)했다. 이에 왕이 직접 낙하군부인(연흥군부인)의 아버지 되는 동방소를 불러다가 은밀히 배달국왕에게 밀서(密書)를 보내어 연흥군의 신변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으니 염려를 놓으라고 안심시켰다.

사월, 태황태후를 전각 밖에 나가지 않도록 유폐(幽閉)하도록 명하였다. 인비의 소생인 분을 송정대군(松亭大君)에 봉하였다.

오월, 왕족들에 대한 숙청(肅淸)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졌다. 유월, 자신의 왕손들로 하여금 조정에 출사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칠월에 옥신을 이조정랑에 명했다. 길돈을 종사랑(從仕)에, 현태를 선교랑(宣敎)에, 궁숭을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신공신을 승훈랑(承訓), 남궁현후를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하였다.

팔월에 문봉을 이조좌랑에 명하고, 이어 의흥위의 인사를 명했다. 의흥위장에 임영우, 의흥위상호군에 임경리, 의흥위대호군에 대야대왕의 부친 천가군, 의흥위호군에 궁손, 의흥위부호군에 강덕상, 의흥위사직에 강창훈, 의흥위부사직에 궁방, 의흥위사과에 궁희종, 의흥위부장(義興衛部將)에 궁열, 의흥위부사과(義興衛副司果)에 궁길만, 의흥위사정(義興衛司正)에 태우군, 의흥위부사정(義興衛副司正)에 인중군을 명했다.

구월에 치른 과거에서 백두봉의 두 아들이 급제했다. 백두봉의 장남 백서(白瑞)를 의흥위사맹(義興衛司猛)에, 백두봉의 차남 백의(白義)를 의흥위부사맹(義興衛副司猛)에 명했다.

시월에 의흥위사용(義興衛司勇)에 궁호를, 의흥위부사용(義興衛副司勇)에 편구대군의 차남인 국윤군을 명했다.

보덕 3년 정월, 오세안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애석하게 여겨 영의정의 후임을 주현우에게 명하고, 좌의정에 궁오마, 우의정에 길용호, 좌찬성에 안임, 우찬성에 현사, 좌참찬에 조고형, 우참찬에 권선, 의정부사인에 민번주, 의정부검상에 유구신, 의정부사록에 궁안을 명했다. 뒤이어 돈령부의 인사를 명했다. 영돈령부사에 궁숭, 판돈령부사에 궁만희, 지돈령부사에 신약, 동지돈령부사에 임고양, 돈령부도정에 고만술, 돈령부정에 최민, 돈령부부정에 대현, 돈령부첨정에 편선, 돈령부판관에 호선, 돈령부주부에 봉학인, 돈령부직장에 초도연, 돈령부봉사에 전언대군, 돈령부참봉에 허정대군을 명했다.

이월에 영돈령부사에 궁만희를 명하고, 궁숭을 개성부유수에 명했다. 판돈령부사에 신약, 지돈령부사에 임고양, 동지돈령부사에 고만술, 돈령부도정에 최민, 돈령부정에 대현, 돈령부부정에 편선, 돈령부첨정에 호선, 돈령부판관에 봉학인, 돈령부주부에 초도연, 돈령부직장에 전언대군, 돈령부봉사에 허정대군, 돈령부참봉에 방수호를 명했다.

삼월에 상침 궁씨를 상궁에 명한 뒤, 황태후전을 담당하게 하고, 상궁 정씨에게 태황태후전을 담당하도록 명하였다. 향부가 자신의 딸을 내인에 명하도록 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향씨를 내인에 명했다.

오월에 내인 향씨(香氏)를 주변치(奏變徵)에 명했다. 일각에서는 왕이 직접 궁인들을 시켜다 태황태후전을 감시함과 동시에 이들을 다스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얘기가 오고 갔으나 왕이 이를 귀띔으로 들었다.

유월에 왕이 성우지의 딸을 현비(賢妃)에 봉하고, 그 아버지인 성우지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명하였다.

칠월에 손철은의 딸을 숙비(淑妃)에 봉하고, 그 아버지인 손철은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명하였다.

팔월에 태황태후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태황태후의 유해를 서산대왕의 왕릉 옆에 묻었다. 별도로 시호를 더 올리지 않았다.

구월에 치른 과거에서 손철은의 아들 손인(孫仁)과 성우지의 아들 성질(成質), 정흥의 장남 정범(鄭範)이 입격하였다. 이들을 모두 통선랑(通善郞)에 봉하였다.

십이월에 왕이 송찬수의 간청으로 송진을 아들로 입적했다. 찬수가 말하길,

“송진은 사실 소인이 민가에서 아이를 낳은 아들이었는데, 오랫동안 부자간에 왕래가 없었으므로 관계가 소홀(疏忽)한 까닭이니 입적을 허(許)할 것을 청하나이다.”

왕은 송찬수의 청을 받아들였다.

보덕 4년 정월에 영의정이 왕에게서 자손을 얻지 못한 것을 거짓으로 고한 의원(醫員)을 참수(斬首)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마침 강원도 어느 변두리에 잠적(潛跡)해 있었는데 어느 주민이 발견하여 강원감영에 이를 고하여 알리니 강원도관찰사가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아뢴 뒤 왕명에 따라 창인궁 정문 앞에서 참수했다. 그 머리를 의금부 앞에 내걸었다.

이월에 현태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명했다. 삼월에 치른 과거에서 현태의 아들 현청(玄淸)이 급제하였다. 왕은 이에 충좌위상호군(忠佐衛上護軍)에 명하였다.

윤사월에 안임의 딸인 서덕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이를 근심하여 그 아버지 되는 안임을 불러다 위로를 하였다. 그러자 안임이 말하길,

“이미 출가한 딸입니다만, 죽은 것에 대해 무슨 근심이 있으며 걱정이 있겠나이까.”

하고 겸양(謙讓)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왕이 안임을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에 명했다.

오월에 천목한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명하고, 뒤이어 박구를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에 명하였다.

유월에 왕명에 의해 사헌부(司憲府)가 세워졌다. 대사헌을 그 수장으로 삼을 것을 명했다. 인완대군은 병을 이유로 사임하여 문필을 대사헌으로 명하였다. 뒤이어 평릉도역승에 제갈을을 명하였다.

칠월에 치른 과거에서 옥선의 아들이자 나주왕후의 동생인 옥구선(玉久善)이 급제하였다. 이에 왕이 그를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에 명하였다.

구월에 중중정을 맡은 이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중중정에 중훈대부 백비를 임명했다. 중중정대신을 해임시킨 뒤 강찬을 그 자리에 맡기고, 중중정판서를 해임시켜 그 자리에 문길구를 앉혔다. 중중정판사 역시 해임시킨 뒤 그 자리에 궁소차를 앉혔다.

십일월에 창인궁 내에 왕이 손수 양종대왕의 정비(正妃)인 인선황태후의 성품을 본받고자 손수 생전의 호칭 중 하나인 ‘죽서’ 를 택하여 대각(臺閣) 하나를 세워 이름을 ‘죽서루(竹書樓)’라 하였다. 이곳은 승국(勝國)의 문적원과 주자감의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한다. 왕명으로 죽서루가 세워지자 도승지 이하의 젊은 관리들이 말하길,

“죽서루가 주자감의 기능을 담당하기에는 매우 버겁습니다. 그러니 별도의 대각을 세워 그 기능을 담당하게 하심이 어떨지요?”

왕이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 말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죽서루 남쪽에 큰 공터가 남아 있음을 알고 그곳에다 별도의 전각을 세웠다. 왕은 이곳의 이름을 성소각(誠昭閣)이라 지었다. 이는 온 나라의 인망(人望)을 두텁게 받은 청백리(淸白吏) 고태수의 시호를 본받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시였다. 이어 좌찬성이 예조의 기능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함을 들며 왕에게 예조의 인사를 하루 속히 단행하라고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왕이 죽서루를 문적원의 기능을 담당하게 하고, 성소각은 주자감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명하였다. 죽서루의 수장을 내관 성혼에게, 성소각의 수장으로 역시 내관인 임승민을 명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중요한 관청에 내관을 인사로 삼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로 세운 관청이었기 때문이다.

십이월에 죽서루를 죽서원(竹書院)으로 승격했다. 이어 죽서원의 관제를 승국의 전례에 따라 정하라고 명하였다. 수장을 원장으로 하고, 그 아래로 원감, 원감사, 원감경, 원감호를 정하였다. 그러나 영의정이 전조의 전례에 굳이 따를 필요가 없음을 피력하자 왕이 영의정으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하여 답을 올리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보름 뒤에 영의정이 직접 왕에게 조회(朝會)를 열어줄 것을 청하여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다음날 영의정 이하의 모든 대신들이 빠짐없이 나타났다. 왕은 삼의정(三議政)과 육조판서(六曹判書), 그리고 그 이하의 관청 수장들을 조회에 불러들여 의논하고자 했다. 이들의 의견을 수렴한 왕이 흔쾌히 대신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여 새로운 죽서원의 관제를 명했다. “새로운 관청인 죽서원의 수장을 감(監)으로 하고 그 이하의 관제는 차례대로 소감(少監), 술작랑(述作郞), 저작랑(著作郞), 저작좌랑(著作佐)으로 한다.”

일제히 신하들이

“황은(皇恩)이 망극하옵니다.”

황명(皇命)을 받아들였다. 황명에 따라 죽서원감에 황슬군, 죽서원소감에 위정군, 죽서원술작랑에 소인군, 죽서원저작랑에 태우군, 죽서원저작좌랑에 금학대군을 명하였다. 모두 왕족을 인사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소장(少壯) 인사들이 반발하였다. 왕은 그 소장 인사들을 불러들여 다회(茶會)를 가졌다. 왕은 소장파들에게 말하길,

“아무리 왕족들이라고 해도 어떤 이들은 짐의 왕통에 도전할 것이고, 또 곧은 성품으로 짐을 직언해주고 야단을 쳐주기도 하고 제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오. 나는 그것을 믿고 있기에 짐을 위해 잘 보필할 수 있는 왕족들을 간추려 명한 것이니 괘념(掛念)할 필요가 없소. 설령 내 보위(寶位)가 위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소. 어진 임금을 세우기만 하면 그만이 아니오. 열성조(列聖朝)들이 남기신 왕손들이 번성한데 더 아쉬울 것이 무어 있겠소. 일전에 덕혜태황태후 마마의 성정(性情)으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소. 나는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더는 왕족들의 피를 흘리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오.”

덤덤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소장파 신하들은 왕의 뜻을 받아들여 더는 왈가왈부(曰可曰否)하지 않았다.

보덕 4년 정월 예조의 기능이 상실함을 보던 왕이 새로이 관청을 설치했는데 이를 봉상시(奉常寺)라 하였다. 뒤이어 봉상시의 인사를 명했다. 봉상시도제조(奉常寺都提調)에 궁운, 봉상시제조(奉常寺提調)에 궁오마, 봉상시정(奉常寺正)에 궁길,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에 배국을 명했다. 이어 상서원을 이조의 속아문(屬衙門)으로 둘 것을 명하여 상서원의 직제를 민간의 백성들에게 맡기되, 의정부에서 백성들 가운데 우수한 인재들을 간추려 뽑아 일하도록 명하였다.

이월에 한동안 태기(胎氣)가 없었던 정선왕후의 몸에서 황자(皇子)를 낳았다. 이에 왕이 기뻐하며 그에게 서산군(瑞山君)에 봉하였다. 뒤이어 노주앙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명하였다.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옥구, 전라도검률(全羅道檢律)에 남궁의, 전라도심약(全羅道審藥)으로 임영우를 맡겼다. 뒤이어 나머지 봉상시의 인사를 단행했다. 의흥위상호군에 있는 임경리에게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종사랑 길돈에게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선교랑 현태에게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를, 봉정대부 궁숭에게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승훈랑 신공신에게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를, 가선대부 남궁현후에게 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를, 중직대부 서상안에게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를 명했다. 삼월에 의흥위의 인사를 명했다. 의흥위장에 천가군을 명하고, 뒤이어 의흥위상호군에 궁손, 의흥위대호군에 강덕상, 의흥위호군에 강창훈, 의흥위부호군에 궁방, 의흥위사직에 궁희종, 의흥위부사직에 궁열, 의흥위사과에 궁길만, 의흥위부장에 인중군, 의흥위부사과에 백서, 의흥위사정에 백의, 의흥위부사정에 궁호, 의흥위사맹에 국윤군을 명하였다.

사월에 치른 과거에서 세 사람이 급제하였다. 왕이 이들을 접견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온시후의 손자인 온인의 네 아들이었던 것이다. 온인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라에 녹(祿)을 먹는 것만으로도 족함을 왕에게 전하니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크게 칭찬하였다. 온인의 장남 온동(溫東)을 의흥위부사맹, 온인의 차남 온서(溫西)를 의흥위사용, 온인의 삼남(三男) 온남(溫南)을 의흥위부사용, 온인의 막내아들 온북(溫北)을 삼도도사에 명했다. 이 중 삼도도사의 후임 자리는 장씨 일가가 처형당한 이후에 들어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이를 우려한 왕이 온북을 그 자리에 앉혔으니 이는 장씨에 대한 죄업을 씻기 위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오월 보름날에 경기도 양주 땅에서 사냥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왕이 사냥을 나온 건 전조(前朝)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본래 이곳 양주는 농토가 될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대다수가 거의 울창한 숲이 이루어져 있어 농사를 짓기가 쉽지 않았다. 하여 양주목사가 애로사항을 왕에게 전하니 이를 안타깝게 여겨 사냥대회를 연 것이다. 이번 사냥대회에는 왕을 비롯해 영의정 이하의 조정 대신들, 그리고 양주목사가 동행하였다. 오전부터 시작된 사냥은 참으로 다양한 동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멧돼지를 비롯해 오늘날 공룡(恐龍)이라고 일컫는 것과, 호랑이, 늑대, 표범 등의 맹수들이 잡혔다. 백성들은 왕의 황은에 힘입어 우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후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양주목사는 왕의 황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며 말하길,

“이곳 양주 땅은 본래 기름지고 비옥하기는 하나, 오늘 보신 바와 같이 거의 울창한 숲들로 이루어져 있어 백성들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이곳이 궁태조의 땅이 아니라 토호(土豪)의 땅인지라 대다수가 무지한 백성들입니다. 그러하니 황은을 받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양주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직접 개간(開墾)하도록 하여 근심걱정이 없도록 살펴주시길 바라나이다.”

하였다. 왕이 양주목사의 뜻에 감격하여 그동안 사냥했던 터를 모두 호분위의 군사들로 하여금 불살라 버리도록 명하였다. 사냥터를 황무지(荒蕪地)로 만들고 불을 살라 오늘날의 화전(火田)과 같다. 이후 불사른 터에 양주의 백성들은 물론, 의흥위, 용양위 등 오위의 군사들과 함께 협심을 다하여 논밭을 일구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되어서야 양주 고을에 새로운 논밭이 생겨났다. 이 논밭을 왕이 직접 찾아가보니 백성들이 황은에 감읍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이에 왕이 양주의 백성들이 직접 개간할 수 있도록 양주 백성들 각자에게 땅의 소유권을 주었다. 이 황은에 못마땅할 법하건만 양주목사가 황은에 감사를 표했다.

유월에 창인궁 정전 뜰에서 치른 과거에서 영의정 주현우의 아들 주만식(朱萬植)이 급제하였다. 왕이 그에게 현록대부(顯祿大夫)에 봉하였다.

칠월에 영의정 주현우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부고에 왕은 물론 그 아들이 되는 주만식도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좌의정이 직접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를 것을 청하니 왕이 이내 평정심을 가지고 주현우의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하였다. 평소 주현우가 잔병을 자주 앓아 사임하기를 여러 차례 청한 바가 있었다.

팔월에 영의정에 궁오마를 명하였다. 좌의정에 길용호, 우의정에 안임, 좌찬성에 현사, 우찬성에 조고형, 좌참찬에 권선, 우참찬에 민번주, 의정부사인에 유구신, 의정부검상에 궁안, 의정부사록에 백공이 임명되었다. 이 중 백공의 임명을 두고 일부 신하들이 파격이라고 입을 모았으나 오랫동안 조정에 봉직(奉職)한 바가 있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구월에 정선왕후의 몸에서 공주 아기씨가 태어나니 왕이 선산공주(善山公主)라 지었다. 황태후 이하의 왕실에서는 매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십일월, 성소각의 인사를 단행하되 전조의 예에 따라 국학박사(國學博士)를 임명하도록 명하였으나 미비한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의 먹고 사는 길이 막막하였기 때문이다.

십이월에 열린 조회에서 영의정이 직접 아뢰길,

“이곳 도성인 한성부에서는 백성들의 문맹(文盲)이 날로 늘어나 큰 우환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그리하기에 신은 매우 염려스럽사옵니다.”

“그러면 영의정께서는 어떤 방안을 고려하고 있소?”

“소인의 생각으로는 한성부에 학당(學堂)을 세워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왕은 끄덕였다. 이에 신명난 듯 영의정이 말을 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국학박사를 둔 전왕조의 풍습을 혁파하시고 이곳 학당에 교수(敎授)를 두시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왕은 영의정의 말을 받아들이고 한성부 중부(中部)에 나라에서 운영하는 최초의 학당이 들어섰다.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은 까닭에 우매(愚昧)한 백성들의 글 읽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렸다. 교재로는 왕실의 왕업을 적은 실록이 전부였다. 뒤이어 왕이 경기도관찰사로 하여금 백성들의 살림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관찰사가 보고함을 듣고 백성들의 살림이 형편없음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그에 따르면 돌과 돌을 맞부딪혀 도구를 만들고 그 위에 농사지은 쌀이나 곡식을 빻아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새로운 도구를 만들 필요성을 매우 절실하게 느꼈다. 하여 선사국 조정은 자신보다 더 앞선 문물을 가진 주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신으로 돈령부의 인사들을 파견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선진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여 올 것을 명하였다.

보덕 5년 정월, 지난달에 주나라에서 사신으로 다녀온 이들에 의해 주나라의 농기구(農器具)들을 손수 들였다. 주로 벼를 농사하는데 필요한 농기구들이니 모두 오백이십만 개였다. 이월, 정선왕후의 몸에서 공주 아기씨가 태어났다. 왕이 보령공주(寶鈴公主)라 지었다.

삼월, 인덕궁주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하였다. 상궁 정씨로 하여금 상제(喪祭)를 지내게 했다.

오월에 치른 과거에서 백비의 아들 백송술(白松術)과 최민의 아들 최병도(崔炳道)가 급제하였다. 왕이 이들에게 각각 선조성 좌상시(左常侍)과 선조성 우상시(右常侍)에 임명했다. 선조성(宣詔省)은 전조의 관제로서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공교롭게도 선조성은 승정원과 중첩된 일을 담당하는 곳이었으나 왕이 이를 중재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유월에 영의정 궁오마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후임 영의정으로 길용호를 명했다. 좌의정에 안임, 우의정에 현사, 좌찬성에 조고형, 우찬성에 권선, 좌참찬에 민번주, 우참찬에 유구신, 의정부사인에 궁안, 의정부검상에 백공, 의정부사록에 백덕을 명했다.

칠월에 지보궁주가 세상을 떠나니, 왕이 장례를 치르도록 명했다. 이후부터 태평성대를 이루어 나라가 번영을 누렸다.

보덕 6년에 박구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였으니, 왕은 그녀에게 남창왕후(南倉王后)라 하였다.

보덕 7년에 남궁의의 손녀이자 남궁현후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였으니, 왕은 그녀에게 남산왕후(南山王后)라 하였다.

보덕 8년에 나주왕후에게서 공주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름을 원양공주(元陽公主)라 하였다.

보덕 9년에 나주왕후에게서 공주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름을 영양공주(寧陽公主)라 하였다.

보덕 10년에 영의정 길용호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영의정에 안임을 명하고, 좌의정에 현사, 우의정에 조고형, 좌찬성에 권선, 우찬성에 민번주, 좌참찬에 유구신, 우참찬에 궁안, 의정부사인에 백공, 의정부검상에 백덕, 의정부사록에 신약을 명했다.

보덕 11년 나주왕후에게서 왕자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름을 명일대군(明壹大君)이라 하였다.

보덕 12년 나주왕후에게서 왕자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름을 선일대군(善壹大君)이라 하였다.

보덕 13년 나주왕후에게서 공주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름을 연일공주(淵壹公主)라 하였다.

보덕 14년 나주왕후에게서 공주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름을 방일공주(芳壹公主)라 하였다.

보덕 15년 정월에 영의정 안임이 세상을 떠나자, 현사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좌의정에 조고형, 우의정에 권선, 좌찬성에 민번주, 우찬성에 유구신, 좌참찬에 궁안, 우참찬에 백공, 의정부사인에 백덕, 의정부검상에 신약, 의정부사록에 궁영규를 명했다.

이월에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의 청에 따라 장남인 송정대군을 태자로 옹립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송정대군의 생모인 인비가 후궁의 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고, 정선왕후가 왕과의 사이에 자식들을 두었기 때문에 송정대군의 뒷일을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여 현비와 숙비, 그리고 남창왕후와 남산왕후를 불러들여 태자를 부탁했다. 네 후비(后妃) 중에 남산왕후가 덕이 깊었던 까닭에 동정(童貞)으로서 평생을 지키고자 약속하며 태자의 후견인으로 나설 것을 자청(自請)했다.

삼월에 후덕궁주 길씨(吉氏)가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장사를 후히 지내도록 명하였다.

사월에 돈령부 인사를 명했다. 신약이 의정부검상에 간 까닭에 지돈령부사의 후임으로 황슬군을 명하였다.

오월에 치른 과거에서 남송국의 장남 남희(南熙)가 급제하였다. 왕이 선조성우평장사(宣詔省右平章事)에 명했다.

유월에 옥창을 김포현령(金浦縣令)에 명했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보덕 16년 이월에 배달국왕의 상왕 거련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배달국왕 안부련이 전하자 영의정 이하의 대신들을 사신으로 파견해 조의를 표하도록 명했다.

삼월에 치른 과거에 남송국의 차남 남웅희(南雄熙)가 급제하였다. 왕이 중대성좌상(中臺省左相)에 명하였다.

오월에 역대 제왕들의 실록들의 찬수(撰修)를 마쳤다. 영의정 현사가 아뢰길

“열성조의 기록들을 두루 살펴본 바로 아뢰자면, 세월도 많이 흐르기도 흘렀거니와 기록들이 매우 부실(不實)하고 낡은 터라 신들이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우의정이 이를 증보(增補)함이 어떠하냐는 의견을 내놓았기에 이를 받아들여 증보하여 황상께 손수 바치나이다.”

이에 왕이 현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록들을 두루 읽어보더니

“참으로 현명한 선택을 하였구려.”

하며 좌의정을 칭찬하였다. 좌의정 조고형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하고, 경기도 과천현에 있는 토지 60결을 하사하였다. 뒤이어 의정부 이하의 관청으로 하여금 열성조들의 실록을 목판(木版)에 새기게 하여 일선 관청에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유월에 영의정 현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후임으로 조고형을 명하였고, 좌의정에 권선, 우의정에 민번주, 좌찬성에 유구신, 우찬성에 궁안, 좌참찬에 백공, 우참찬에 백덕, 의정부사인에 신약, 의정부검상에 궁영규, 의정부사록에 이각을 명했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보덕 17년 정월에 조고형이 병들어 죽으니 왕이 의정부의 인사를 단행했다. 영의정에 권선, 좌의정에 민번주, 우의정에 유구신, 좌찬성에 궁안, 우찬성에 백공, 좌참찬에 백덕, 우참찬에 신약, 의정부사인에 궁영규, 의정부검상에 이각, 의정부사록에 고만술을 명했다.

칠월에 월향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왕이 삼십일을 국상으로 치르도록 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철조(輟朝)하도록 명했다.

팔월에 도승지가 황태후의 장례를 치르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니, 왕이 상량(商量)하여 답해주겠다고 하였다. 구월에 왕이 황태후의 상을 황제의 상제(喪制)에 따라 60일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나 영의정이 극구 만류하였는데 영의정이 말하였다.

“황태후가 이미 하세하시어 30일을 마쳤는데 갑작스레 60일을 마치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사옵니다. 하오니 황태후의 상제를 30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왕이 영의정의 말에 따라 황태후의 국상을 30일로 정하였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보덕 18년 정월에 영의정 권선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의정부의 인사를 단행하였다. 영의정에 민번주, 좌의정에 유구신, 우의정에 궁안, 좌찬성에 백공, 우찬성에 백덕, 좌참찬에 신약, 우참찬에 궁영규, 의정부사인에 이각을 명하고, 고만술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명하고, 의정부검상에 임고양을 명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사록에 최민을 명했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삼월에 치른 과거에서 황보량의 삼남 황보국(皇甫國)이 급제하였다. 이에 왕이 중대성우상(中臺省右相)에 명했다.

보덕 19년 삼월에 영의정 민번주가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에 유구신을 명하고, 좌의정에 궁안, 우의정에 백공, 좌찬성에 백덕, 우찬성에 신약, 좌참찬에 궁영규, 우참찬에 이각을, 의정부사인에 임고양을 명했다. 의정부검상에 궁숭을 명하고, 최민을 왕부대신(王府大臣)에 명하였다. 왕부는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관청으로서 전조부터 존재한 관청이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왕실의 기강이 흔들린 까닭으로 유명무실하기 그지없었다. 의정부사록에 궁만희를 명하였다. 박구의 아들인 박일(朴日)을 내관으로 삼았다.

구월에 치른 과거에서 많은 인재들이 급제하였다. 서상안의 아들 서준(徐俊), 길돈의 차남 길송(吉松), 궁영만의 아들 궁일달(宮壹達), 남양도호부사 박구의 손자이자 내관 박일의 장남인 박조원(朴調元), 채린공주의 손자이자 궁희종의 아들인 궁양조(宮陽朝), 궁씨의 방계(傍系)인 궁방(宮芳), 조기의 세 아들 조인(趙仁), 조덕(趙德), 조성(趙成), 남송국의 나머지 아들들, 삼남 남기옥(南基鈺), 막내아들 남무화(南武火)가 이들이다. 이들에게 봉훈랑에 명하였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재위 20년 이월, 온서가 온씨 집안의 800결 땅 중 400결의 땅을 왕에게 바쳤다. 이는 법종대왕이 하사한 토지 중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토지는 차후에 다시 갚아 나갈 것을 약속했다.

삼월, 내관 향염을 시켜 경기도 양근군(楊根郡)에 있는 토지 50결을 사들이도록 명하여 왕실의 소유로 삼았다. 이에 신하들이 반발하였으나 왕은 신하들의 재산보다 작은 왕실의 재정을 헤아리라며 질타했다.

사월, 내관 성혼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성혼과 일가붙이 되는 성우지에게 상을 치르도록 명했다. 성혼은 평생을 나라에 대한 죄업을 씻는데 헌신했다.

오월, 영의정 유구신이 병으로 죽자, 궁안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좌의정에 백공, 우의정에 백덕, 좌찬성에 신약, 우찬성에 궁영규, 좌참찬에 이각, 우참찬에 임고양, 의정부사인에 궁숭, 의정부검상에 궁만희, 의정부사록에 고만술을 명했다. 왕은 구제(舊制)인 정이대장군을 혁파하였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재위 21년 정월에 궁안이 세상을 떠나자, 백공을 영의정에 삼았다. 이에 백공이 자신의 조상인 백을로부터 물려받은 900결의 땅 전부를 왕에게 바치고, 왕이 이에 감격하여 보안도 땅 50결을 하사했다. 좌의정에 백덕, 우의정에 신약, 좌찬성에 궁영규, 우찬성에 이각, 좌참찬에 임고양, 우참찬에 궁숭, 의정부사인에 궁만희, 의정부검상에 고만술, 의정부사록에 최민을 명했다. 왕이 왕부(王府)라는 관청과 함께 왕부대신의 직제(職制)를 혁파했다. 왕부의 직무를 모두 의정부에 일임할 것을 명했다. 유월에 충청도를 공청도(公淸道)로 고쳤다.

구월에 왕이 창인궁을 벗어나 다른 대궐로 이어하고자 했으나 일제히 반대했다. 왕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십일월, 서준에게 내성사신에, 길송에게 내성경에, 궁일달을 내성감경 겸 소경사대사(內省監卿兼昭慶寺大舍)에, 박조원을 내성대사(內省大舍)에, 최병도를 내성사지(內省舍知)에 명했다.

십이월에 궁양조를 소경사신(小京仕臣)에, 궁방을 집사부중시(執事部中侍)에, 조인을 집사부전대등(執事部典大等)에, 조성을 집사부대사(執事部大舍)에, 남희를 집사부사지(執事部舍知)에, 남송국을 집사부사(執事部使)에 명했다. 남웅희와 남기옥을 각각 보국사성전(寶國寺成典) 금하신과 광흥사성전(廣興寺成典) 금하대등에 명하였다. 뒤이어 성소각을 국학(國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린 뒤, 각 감영의 관리들의 자제들 가운데 총명하고 어진 사람들을 열 사람을 모아, 이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국학박사로 채형을 명했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

보덕 22년 정월, 강원도 이북을 영길도(永吉道)라 부르게 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이월, 주만식을 선조성좌평장사(宣詔省左平章事)에 명했다. 이후에 왕이 주만식에게 경기도 김포(金浦) 땅 500결을 하사했다.

삼월에 백공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의정부의 인사를 명했다. 영의정에 백덕, 좌의정에 신약, 우의정에 궁영규, 좌찬성에 이각, 우찬성에 임고양, 좌참찬에 궁숭, 우참찬에 궁만희, 의정부사인에 임고양과 고만술, 의정부검상에 최민, 의정부사록에 대현을 명했다.

유월에 왕은 후덕궁으로 이어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좌의정 백덕이 후덕궁이 낡았으므로 중건(重建)을 하지 않는 이상 이어할 수 없음을 밝혔다.

칠월에 경기도 이북의 땅을 서해도(西海道)라 부르게 했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보덕 23년 정월, 영의정 백덕이 하세하자, 후임을 신약으로 명하고, 좌의정에 궁영규, 우의정에 이각, 좌찬성에 임고양, 우찬성에 호선을 명하고, 궁숭을 태정장군에 명했다. 좌참찬에 궁만희, 우참찬에 임고양을 명하고, 고만술을 유임(留任)하게 하고, 의정부사인에 최민을 명하였다. 의정부검상에 대현을, 의정부사록에 옥구를 명하였다.

오월에 치른 과거에서 옥구의 세 아들, 옥수(玉水), 옥철시(玉喆市), 옥철서(玉喆緖)가 급제하였다. 왕은 세 사람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봉하였다.

유월에 옥구를 의정부검상에 명하고, 옥창을 의정부사록에 명했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

보덕 24년 정월에 신약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에 궁영규를 명하고 좌의정에 이각, 우의정에 임고양, 좌찬성에 호선을 명하였다. 궁만희를 경상도관찰사에 명하고, 우찬성에 임고양을 명하였다. 좌참찬에 고만술을 명하고, 우참찬에 최민을 명하였다. 의정부사인에 대현과 옥구를 명하고, 의정부검상에 강찬을 명하고, 의정부사록에 문길구와 황보진을 명했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

보덕 25년 정월에 궁영규가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에 이각을 명하고, 좌의정에 임고양, 우의정에 호선, 좌찬성에 고만술, 우찬성에 최민, 좌참찬에 대현, 우참찬에 옥구를 명하고, 강찬을 유임하도록 명했다. 의정부사인에 문길구와 황보진에게 명하고, 의정부검상에 남궁의를, 의정부사인에 성우지를 명했다. 이월에 현가부인이 하세했다. 왕이 양종대왕의 후궁을 지낸 이니만큼 선조성으로 하여금, 왕족의 예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했다.

구월에 천가군이 세상을 떠났다. 천가군은 대야대왕의 아버지니 그에게 천가원군(天嘉元君)이라 봉하여 대행왕과 같이 했다.

십일월에 천가군의 미망인(未亡人)인 성산군부인이 장흥사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고자 청하자 그리하라고 명했다.

보덕 26년 정월에 성산군부인이 하세했다. 뒤이어 영의정 이각이 하세하자, 의정부의 인사가 단행되었다. 임고양을 영의정에 명하고, 좌의정에 최민, 우의정에 대현, 좌찬성에 편선, 우찬성에 호선, 좌참찬에 봉학인, 우참찬에 초도연, 의정부사인에 전언대군, 의정부검상에 허정대군, 의정부사록에 황슬군을 명했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

왕은 오랫동안 내홍(內訌)을 겪지 않은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태자도 세웠겠다, 왕실도 안정되었겠다. 그

무엇으로 아쉬움이 남을까. 그것으로 위안을 삼은 왕이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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