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12월 8일 (금) 23:38  [자시(子時):삼경(三更)]
문서분류 동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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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보관> 자운서당 강의 자료
<611.12.12> - http://www.1392.org/bbs?sajor02:4661

공빈 김씨를 추숭하여 종묘에 모시는 문제는 조정 공론을 결집한 후에 도모할 일이다. 비록 혜종경렬대왕(惠宗景烈大王:광해군) 시대에 왕후로 추존된 예가 있다고는 하나, 반정 이후 되돌려졌으니 복위건과 같이 다시 엄중한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들이 임금이라 하여 모두 종묘 정전이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진 것은 아니니, 이는 인물이 살아있을 때의 왕실 관계를 무겁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한다면, 한 시대에 선조 임금의 계비(繼妃:새 왕비)가 둘 있게 된 격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도 역시 훗날 조정의 여럭을 살펴 시행하도록 한다.


<622.03.05> - http://www.1392.org/bbs?sajor02:8615

혜종경렬대왕에 의해 공성왕후로 추존되었던 공빈(恭嬪) 김씨(金氏)를 다시 추존하는 문제는 혜종을 추복(追復)한 직후인 개국611년 12월에 당시 장종께서 전교하신 바가 있고, 이후 상소에 대하여도 그 전교를 언급하시는 것으로 훗날을 기약하셨다. 그때로부터 현재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으나, 여러 사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조정의 형편이 그 논의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의민황태자의 묘호를 올리는 문제도 간단치 않다.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내지 못한 신하에게 시호를 내리기 위해서 증직이 선행되는 것처럼, 묘호를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추존이 있거나 추존과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의민황태자는 생전에 친왕(親王)이셨으므로 유교적 질서를 감안하면 국왕과 동렬이거나 옛날의 제후왕보다 상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의민황태자를 추존하려면 황제의 격으로 해야 할 것이기에 사안의 중대함이 매우 무겁다. 백세(百世)를 위한 공론(公論)이라 말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논의와 의견 결집이 필요한 사안이므로, 역시 훗날에 논의 가능한 시점이 오기를 기대한다.


<623.02.03> - http://www.1392.org/bbs?sajor02:8832

혜종대왕의 자손을 다시 세자, 왕자군 등으로 환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겠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왕의 복위 당시에 아울러 시행되지 못하였다. 당시 그러한 것들을 모두 살펴 집행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지금 조정의 사정도 그리 여유롭지 않으므로, 상소한 사안은 추후 기회가 되었을 때 논의를 거쳐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겠다.


<619.08.11> - http://www.1392.org/bbs?sajor02:7786

신은 대왕의 묘호(廟號)에 '혜(惠)' 라는 한글자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부당하게 여깁니다. 시법(諡法)에," 백성을 사랑하여 베풀기 좋아한 것을 혜라 한다(愛民好與曰惠)"하였으나 또한 이르기를 "공자(孔子)는 자산(子産)을 은혜로운 사람이라 했으나 맹자(孟子)는 다시 그가 은혜로우나 정치하는 요체를 모른다 나무랐다. 그렇다면 혜(惠)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맺어주지만 예(禮)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라 하였습니다. 아울러 주나라 혜왕(惠王)은 대부 변백(邊伯)에게 쫓겨났다가 정군(鄭君) 등의 도움으로 겨우 대위(大位)를 회복하였고, 양혜왕(梁惠王)은 이익만을 탐하다가 문후(文侯)때의 강성함을 잃었으며, 진나라 혜제(惠帝)는 굶주린 백성에게 고기를 먹으라 하였고, 원혜종(元惠宗)은 선조의 대업을 잃고 초원으로 도망하였으며 명나라 혜제(惠帝)는 제후를 도모하려다가 끝내는 불 속에서 타 버린 몸조차 보존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혜종(惠宗) 또한 아랫사람에게 시해(弑害)되었다는 의혹이 있으니 신은 이 글자에 반드시 숨겨진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혜종대왕의 묘호를 정할 당시에 혜(惠) 자에 그러한 시주(諡註)가 있는지 자세히 살폈는지 알 수 없지만, 반정(反正)의 명분을 제공하였던 혜종 시기의 여러 사건을 생각해 보면 예(禮)에서 미흡하였던 점이 시호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열성조의 묘호나 시호를 정함에 허물을 덮고 좋은 부분만 취하는 것이 당연하나, 묘호와 관련된 결과만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상소한 뜻은 알았으나, 묘호 개정에 관한 논의는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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