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20일 (수) 17:21  [유시(酉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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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6책
창사(昌史) 제26권  目錄

갑신년(2004) 4월 기사본말(甲申年 四月 紀事本末)


◎ 시호도감 폐청


○ 4월 7일에 시호도감의 업무 부진과 관련하여 전교하기를,
"도감 제조 하빈군 이휘(李輝)를 면직하고, 근무일수 20일을 감(減)한다. 도감 도청 이동진(李東珍)을 면직하고, 근무일수 15일을 감한다. 도감 낭청 조광윤(趙匡胤)을 면직하고, 근무일수 10일을 감한다. 시호도감을 폐청(閉廳)하고, 관계 사무를 예조로 이관(移管)한다." 하였다. 《시호도감의궤》


◎ 제17차 소과, 생원시 정도전(鄭道傳) 등 5인 입격

○ 제17차 소과는 3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 당하 경관 및 외관에 대한 인사 단행

○ 11일에 전교하였다.
"명일(12일), 전황해찰방 박영효(朴英孝)를 형조별제로, 전경기검률 신대치(辛大治)를 홍문관부수찬지제교로, 전형조명률 이의방(李義方)을 훈련원주부로 삼는다. 아울러, 행사옹원주부 김지수(金志洙)를 행함경찰방으로, 형조율학훈도 김영일(金榮一)을 행황해검률로, 승문원정자 성혼(成渾)을 행경기검률로 삼는다." ■#


◎ 제14차 대과, 문과 성혼(成渾), 장운익(張雲翼), 무과 박신신(朴新信) 등 6인 급제

○ 제14차 대과는 4월 중순에 시행되었다.



갑신년(2004) 5월 기사본말(甲申年 五月 紀事本末)


◎ 주요 경관직에 대한 인사 단행


○ 10일에 전교하였다.
"병조판서 하빈군 이휘(李輝)를 의정부좌참찬으로 삼으니, 작금에 해이해진 조정의 기강을 속히 확립하라. 또한, 그간 삼사(三司)에 위임하였던 상벌권(賞罰權)을 의정부로 환원한다. 과인이 신임하는 행사헌부집의 서양갑(徐羊甲)을 행형조정랑으로 삼으니, 조속한 시일 내에 형조를 수습하라. 과인이 기대하는 바를 헤아려 이루어 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은전(恩典)이 따를 것이다. 호조참판 해원군 최영(崔瑩)의 참판 직과 선공감제조 직을 거두고, 호조 군자감제조로 삼는다. 아울러, 통정대부 정재안(鄭宰安)을 공조 상의원부제조로 삼는다. 행형조좌랑 한종훈(韓宗勳)을 행평안도사로 체직하고, 무공랑 조광윤(趙匡胤)을 승정원주서로 삼는다.
끝으로 분명히 전교한다. 과인이 거듭 기회를 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실망하게 한다면 공신은 위훈(僞勳)을 삭제할 것이고, 여타 관리는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영원히 불서용(不敍用)할 것이니 분명히 알라."

○ 27일에 전교하였다.
"이조참판 덕수군 이완(李浣)을 행사간원대사간으로 삼는다. 군자감제조 해원군 최영(崔瑩)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삼는다. 상의원제조 정재안(鄭宰安)을 이조참의로 삼는다. 공석이 된 호조와 공조는 의정부에서 대행한다.
행교서관별제 조병옥(趙炳玉)을 종5품 봉훈랑으로 올려, 행예조좌랑으로 삼는다. 행형조별제 박영효(朴英孝)를 정6품 승의랑으로 올려, 형조좌랑으로 삼는다."


◎ 이승연 위안부 주제 화보 촬영 사건 처벌

○ 2월 15일에 승문원정자 성혼이 민국의 연예인 이승연 씨가 위안부를 주제로 한 화보를 촬영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논죄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윤허하였다. ■#

○ 이승연 등에 대한 논죄와 판결은 3개월 후인 5월 17일에 마무리되었다. 판결에 따라 연예인 이승연과 더불어 ㈜네띠앙 엔터테인먼트와 ㈜시스월의 관련자들을 형옥에 처하였다.
하옥일 방면일 죄인 죄목 주관관청
613.05.17 613.06.17 이승언 영화 배우. 강제 동원되었던 종군위안부 영상 촬영 형조
613.05.17 613.08.17 김성햔, 박지유 (주)너띠앙 엔트 임원. 종군위안부 영상 촬영 형조
613.05.17 613.07.17 김언수 (주)시스윌 대표이사. 종군위안부 영상 촬영 형조

● 갑신년(2004) 2월에 연예인 이승연 씨가 위안부를 주제로 한 화보를 촬영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되었다. 동년 5월에 본조에서는 연예인 이승연 씨와 화보 촬영 관련 기획자들을 논죄하고 처벌을 내렸다.


◎ 제18차 소과, 생원시 박우석(朴祐碩) 등 4인 입격

○ 제18차 소과는 5월 중순에 시행되었다.


◎ 어명 이행을 지연한 관리에 대한 징계 처분

○ 5월 10일에 임금이 예조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명예포상제도절목 개정안을 검토하고 보완할 점을 계(啓)하도록 하였다. ■#

○ 5월 11일에 임금이 이조에 비망기를 내려 승품체직절목 개정을 마무리할 것을 하명하였다. ■#

○ 5월 11일에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여, 한성부 수장 또는 8도 지방관 중에서 성균관 교수에 겸직할 지방관 3인을 탐문하여 계하도록 하였다. ■#

○ 상기 어명에 대한 이행이 지연되자 28일에 임금이 진노하며 전교하였다.
"근자에 조정의 기강이 심각히 해이해져 관리들을 책망하고 징계(懲戒)하는 횟수가 늘어나니, 과인의 부덕(不德)함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금일, 과인이 행하는 징계가 마지막이길 마음속으로 깊이 바라며, 금번 징계로 인한 청죄소(請罪疏)나 사직소는 일절 금(禁:금지)한다. 전이조참판 덕수군 이완(李浣)의 근무일수를 15일 감(減:감산)한다. 예조참판 이동진(李東珍)의 근무일수를 15일 감한다. 승정원주서 조광윤(趙匡胤)의 근무일수를 10일 감한다." ■#


창사(昌史) 제27권  

갑신년(2004) 6월 기사본말(甲申年 六月 紀事本末)


◎ 명예포상제도절목(名譽褒賞制度節目) 개정


○ 명예 포상 제도는 지역별 활성화, 교육 장려, 모임 활동 등에 탁월한 공로가 있는 백성과 관직, 직무 수행 등에 공로가 있는 관리를 해당 관청에서 추천, 심의 후에 국왕의 재가를 받아 포상하는 제도이다. 《명예포상절목》

○ 4월 16일에 예조에서 명예포상제도절목 개정안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개정(改定)을 잠시 보류한다. 과인이 추후에 별도로 전교하겠다." 하였다. ■#

○ 임금이 예조에서 올린 명예포상제도절목 개정안을 토대로 일부를 보완하여 초안을 작성하였다. 5월 10일에 임금이 예조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면서 명예포상제도절목 초안에 대하여 검토한 후 보완할 점을 계하도록 하였다. ■#

○ 5월 31일에 예조에서 명예포상제도절목 개정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임금이 서경(署經)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였다. ■#


◎ 규장각(奎章閣) 복설, 성균관 강의 재개

○ 진사 이덕무(李德武) 등이 연명 상소를 올려 규장각 복설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각(內閣:규장각)의 복설은 고려할만한 사안이다. 일단, 예조와 삼사(三司)의 의견을 들어 보겠다." 하였다. ■#

○ 4월 19일 예조참의 이동진(李東珍)의 계본을 올리면서 규장각 복설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예조의 의견을 알겠다. 삼사(三司)의 의견을 듣고, 깊이 상량한 후 별도로 전교하겠다." 하였다. ■#

○ 6월 22일에 전교하였다.
"규장각(奎章閣)과 성균관(成均館)을 복설하고 관련 인사를 단행한다. 의정부 좌참찬 하빈군 이휘(李輝)를 규장각제학 겸군자감제조로 체직한다. 예조참판 이동진(李東珍)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겸선공감제조로 체직한다. 대구도호부사 서양갑(徐羊甲)을 겸성균관사성으로 삼는다. 행이조좌랑 박상진(朴商鎭)을 성균관직강으로 체직한다. 규장각 운영과 관련한 과인의 의지는 별도로 전하겠다."

○ 그간 조정 사정으로 일시 폐지 또는 중지되었던 규장각(奎章閣)과 성균관(成均館) 관청이 금상 전하의 관련 전교를 통해 복설 및 개장되었다. 규장각제학 이휘(李輝)를 수장으로 복설된 규장각에서는 초임 관리들에 대한 기본 교육을 맡게 될 것으로 알려졌으며, 제8기 강의 이래 명맥이 잠시 중단되었던 성균관도 동지사 이동진(李東珍), 사성 서양갑(徐羊甲), 직강 박상진(朴商鎭) 등 유능한 관리들이 참여하여 새롭게 태어나 참신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 성균관에서는 강의 재개를 위해 전하의 윤허 및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심사)을 거쳐 '성균관설치절목'을 일부 개정하였으며, 이 개정된 법령에 의거하여 7월 3일부터 동월 11일까지 제9기 유생 모집 공고문을 내걸었다. 성균관에서는 유생 모집이 완료되면 제9기 성균관을 개강하여 인재 양성을 위한 문과 및 무과 강의를 개시할 예정이다. 규장각에서도 초임 관리에 대한 세밀한 교육을 예정하고 있어, 처음 관직이 나아가는 백성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관보 제37호》


◎ 제2차 무관 임용 관청 확대

○ 6월 17일에 호조와 공조의 무관 허통을 윤허하였다. ■#

○ 문무관 관직 임명 범위 완화에 대한 전교에 따라 의정부에서 5월 31일부터 6월 14일까지 15일 동안 문무관 규제 완화에 대한 의견 수렴을 빈청 제3실에서 의정부 주관으로 실시하였다. 그 결과 반대보다 찬성의 의견이 더 많았으나, 이조와 병조는 문무관 허통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견해 또한 적지 않았다.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 의정부에 계본에 대한 전하의 비답에 따라 호조와 공조에 한해 무관 임명 확대하는 것으로 문무관 허통과 관련된 논의가 최종 매듭되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무관들도 호조와 공조에 임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향후 관직 관련 규제가 더 완화된다면 보다 많은 직책에 문관과 무관이 서로 오가며 임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보 제37호》


◎ 갑신 용퇴 파동(甲申勇退波動)

○ 5월 31일에 형조정랑 서양갑(徐羊甲)이 외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

○ 6월 2일에 형조정랑 서양갑이 경관직은 뜻에 맞지 않는다며 사직을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

○ 2일, 3일에 좌참찬 이휘(李輝)와 대사간 이완(李浣)이 각각 차자(箚子)를 올려 경관직이 뜻에 맞지 않는다며 사직을 청한 서양갑의 행신(行身)을 비판하며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 불서용(不敍用) 등의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니 임금이 이후에 적절한 조처를 내리겠다고 하였다. ■# ■#

○ 5일에 진사 이덕무(李德武)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전행형조정랑 서양갑(徐羊甲)은 본래부터 외관(外官) 수령에 뜻을 두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니 경관(京官)과는 맞지 않는 인물입니다. 동헌(東軒)에서 머물며 백성들과 근친하기를 원하여 전하께 주청을 올렸으나 그것이 가납되지 않았으므로 현재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사직소를 올린 것인데, 이를 두고 논죄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 불서용(不敍用) 등이 언급되는 이유를 소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조정 대신(大臣)의 거취는 실로 어려운 것인데, 좌참찬 이휘(李輝), 대사간 이완(李浣) 등은 이미 그 체모(體貌)를 잃었습니다. 자리만 채우고 있는 다른 신하들의 근무 태만은 그대로 둔 채 이번 일에만 극렬하게 관계하였으니 공평무사한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 대신이 체모를 잃었다는 이덕무의 상소가 올라오자 대사간 이완과 좌참찬 이휘가 연이어 사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에 분란이 잇따르고, 사망하거나 사직하는 관리가 끊이질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능력과 자질이 크게 부족한 과인이 감히 용상(龍床)에 올랐기에 이러한 사태가 초래되는 듯하다. 종사(宗社:종묘와 사직)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른 시일 내에 과인이 용퇴(勇退:물러남)를 결단하겠다. 좌참찬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은 소속 관청에서 과인의 영(令)을 대기하라." 하였다. ■# ■#

○ 좌참찬 이휘, 예조참판 이동진(李東珍), 이조참의 정재안(鄭宰安), 이조좌랑 박상진(朴商鎭), 예조좌랑 조병옥(趙炳玉), 형조좌랑 박영효(朴英孝), 한성부참군 김현유(金賢柳), 전라검률 장운익(張雲翼), 통선랑 최사강(崔士康) 등이 용퇴 어의를 거두기를 간곡히 청하니, 8일에 전교를 내리기를,
"신민(臣民:관리와 백성)이 상호 격려하고 협력하여 불철주야(不撤晝夜)로 노력을 기울여도 나라의 흥복(興復:부흥)이 힘든 현실인데, 사소한 문제로 국력(國力)을 소진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가산(佳山:최사강)까지 급히 상경하여 청하니, 과인의 용퇴 전교를 거두도록 하겠다. 금번 사태와 관련하여 어전에 올라 온 사직소를 모두 반려하며, 폐일언(蔽一言)하고 전교한다.
이달 12일에 대사간 덕수군 이완(李浣)을 행홍문관부제학으로 체직하고 선무랑 성혼(成渾)을 수사간원정언으로 삼으니, 덕수군은 체직 전에 사간원 업무를 교육하라. 어모장군 서양갑(徐羊甲)을 건공장군으로 내리고,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겸 대구병마첨절제사(大邱兵馬僉節制使)로 삼는다. 진사 이덕무(李德武)의 논죄를 윤허하지 않는다. 다만, 상소문 출납을 일시 금(禁:금지)한다. 승정원주서 조광윤(趙匡胤)을 파직하고, 불서용(不敍用:재임용을 금지함)에 처한다. 무공랑 장운익(張雲翼)을 승정원주서로 삼으니, 전우승지 이동진(李東珍)은 승정원 업무를 교육하라." 하였다. ■#


창사(昌史) 제28권  

갑신년(2004) 7월 기사본말(甲申年 七月 紀事本末)


◎ 제19차 소과, 생원시 천어(天魚) 등 9인 입격


○ 제19차 소과는 6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 시호도감 복설 및 인사 개편

○ 22일에 동지성균관사 이동진(李東珍)이 시호도감 복설을 청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상량한 후에 별도로 전교하겠다." 하였다. ■#

○ 25일에 전교하기를, "이달 27일에 시호도감(諡號都監)을 복설하고, 조정의 인사(人事)를 단행한다." 하였다. ■#

○ 금상 전하께서 오는 27일에 동지성균관사 이동진의 건의에 따라, 폐지 후 예조로 업무가 이관되었던, 시호도감(諡號都監)을 복설하기로 하고 그 수장인 제조에 해원군 최영(崔瑩)을 임명하는 등 시호도감 복설을 전후로 한 조정 인사를 단행하시었다. 복설될 시호도감에서는 대행대왕(大行大王) 전하의 시호와 관련된 일체 업무를 총괄하여 맡을 예정이다. 동시에 단행되는 인사에서 규장각제학 하빈군 이휘(李輝)를 겸수성금화사제조로, 홍문관부제학 덕수군 이완(李浣)을 평시서제조로 임명할 예정이다. 또 예조정랑에 현 행예조좌랑 조병옥(趙炳玉)을 승진 임명하고, 행예조좌랑에 행형조좌랑 박영효(朴英孝)를, 후임 형조좌랑에 승정원주서 장운익(張雲翼)을, 홍문관수찬에 사간원정언 성혼(成渾)를 각각 임명할 계획으로 있다. 이외에도 전병조정랑 신성룡(申星龍)을 행사간원사간으로, 분순부위 손오공(孫梧空)을 수승정원주서로, 봉직랑 박정신(朴貞信)을 한성부판관으로, 행교서관정자 김준호(金峻鎬)를 경기도검률로, 동정자 박우석(朴佑碩)를 전라도검률로 임명 혹은 교체할 예정이다. 《관보 제38호》


◎ 제15차 대과, 문과 성혼(成渾), 무과 서양갑(徐羊甲) 등 9인 급제

○ 7월 19일부터 동월 25일 자정까지 7일간 시행되었던 개국613년도 제3분기 대과(大科) 과거가 총 9인의 급제자를 배출하며 동월 29일 자로 종료되었다. 문무과를 통틀어 최우수 급제자는 평점 7.75를 받아 갑과 급제를 한 성혼(成渾)이었으며, 이어 문과 을과의 김준호(金峻鎬), 무과 을과의 서양갑(徐羊甲) 등이 높은 평점을 받아 급제하였다. 문과에서는 성혼을 비롯해 6인이, 무과에서 서양갑을 포함해 2인이 급제하였으나, 이중 초입사(初入仕:관직 진출)자는 진사(進士) 김종서(金宗書), 생원(生員) 천어(天魚) 2인에 불과하였다. 지난 7월에 금상 전하의 명을 받들어, 천거어사 장운익(張雲翊)이 대과 응시 자격을 갖춘 유생이나 한량들이 이미 대부분 권지로 출사(出仕)시킨 상태라서 금번 대과가 전현직 관리들이 주로 응시하는 과거로 변질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관보 제39호》



갑신년(2004) 8월 기사본말(甲申年 八月 紀事本末)


◎ 관속 제도 개편

○ 관속(官屬) 임명에 관한 제도가 8월 5일 자로 개편되었다. 지방관의 관속 임명 방침 중 '호적신고 후, 15일이 지난 백성'을 정식 관속으로 임명한다는 조항이 창국대전 이전(吏典)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등의 내용으로 대구도호부사 서양갑(徐羊甲)이 제도 개편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이후 어전에서 각급 관리들이 참여한 관련 논의가 이어졌다. 논의 결과 금상 전하께서 관속 제도 개편 전교를 내리시어, 관속 제도가 개편을 보게 되었다. 《관보 제39호》

○ 5일에 관속 제도 개편에 대하여 전교하였다.
"이달 초 9일부터 호적신고(戶籍申告)를 완료한 백성은 입조 기간에 상관없이 누구나 관속(官屬)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하되, 처음 1개월간은 임시 관속으로 임명하고 이후 근무 성과에 따라서 정식 관속으로 임명하거나 해임토록 한다. 다만, 참하관(參下官)이 관속에 지원하거나 임시 관속이 대과 급제. 천거 등으로 품계(品階)를 획득한 경우에는 바로 정식 관속에 임명토록 한다. 임시 관속은 이조를 통하지 않고 지방관의 재량으로 자유롭게 임면(任免:임명과 면직)하되, 임시 관속의 직명은 가이방(假吏房). 가예방(假禮房). 가공방(假工房) 등으로 칭한다. 평안(平安)과 함경(咸鏡)도 이에 준해 시행하되, 정식 관속으로 임명하기 전에 토관직(土官職)에 임명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 아울러, 평안과 함경에 근무하는 임시 관속(무품)이 대과 급제. 천거 등으로 양반(兩班:동반과 서반)의 품계를 획득한 경우에는 정식 관속으로 임명하여 계속 근무토록 조처한다. 덧붙여, 평안과 함경에 양반의 참하관이 관속으로 근무하는 것을 허가한다." ■#

● 이날 전교로 임시 관속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4개월 뒤인 11월에 폐지되었다.


◎ 전라도 광주목에 5.18민주화운동희생자위령비(五一八民主化運動犧牲者慰靈碑) 건립

○ 7월 30일에 전라검률 박우석이 5.18민주화운동희생자의 위령비 건립을 예조에 청원하였다. ■#

○ 8월 10일에 예조정랑 조병옥(趙炳玉)이 5.18민주화운동희생자의 위령비 건립에 대하여 게본(啓本)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감영 차원에서 광주목(光州牧)에 해당 위령비를 세우도록 한다." 하였다. ■#

■ 개국589년 5월 18일에 민국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과정에서의 희생자 영혼을 위로하는 5.18민주화운동희생자위령비. 《5.18민주화운동희생자위령비》


◎ 녹봉재산제도절목(祿俸財産制度節目) 제정

○ 호조 소속 관청인 평시서 주관하에 7월 25일 자 전교에 의해 녹봉재산절목이 시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녹봉재산제도절목은 그 초안이 서고에 등재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개선 작업을 거쳐 호조 이하 각 관청이 연계하여 녹봉 지급과 재산 활용 등에 관한 제도의 시행 방안을 논의 및 시행할 것을 금상 전하께서 명하셨다. 이에 호조에서는 각 관청의 수장들과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관보 제39호》

○ 14일에 녹봉제산제도절목 시행과 관련하여 전교를 내렸다.
"15일부터 내리는 상벌(賞罰)은 그 사안과 대상에 따라 근무일수 가감산에 의한 상벌과 녹봉재산제도를 활용한 상벌을 병행하도록 하겠다. 녹봉재산제도를 활용한 형벌과 징계의 수단으로 가산(家産:사유재산)에 불이익을 가하는 벌금(罰金), 적몰(籍沒), 몰수(沒收), 감봉(減俸) 등을 시행한다. 이는 어명 또는 국법에 따라 호조에서 집행한다." ■#

○ 본조(本朝)가 지난 15일에 역사적인 창국 4주년을 맞이하였다. 창국 4주년을 맞아 어전과 각급 감영에서 금상 전하께 조하(朝賀)를 드렸으며, 기념일에 즈음하여 녹봉재산제도가 반포되었다. 금상 전하께서 녹봉재산제도에 대한 최종 전교를 내리시어 창국 기념일에 절목을 반포 및 시행할 것을 명하셨으며, 이에 따라 8월 15일부터 녹봉재산제도가 시행되었다. 한편, 창국 4주년 기념과 녹봉재산제도 시행으로 금상 전하께서는 창국공신(昌國公臣)과 현직 관리, 호적신고를 유효히 완료된 백성(유품자 포함) 등에 대한 기념 포상과 관련한 전교를 내리셨다. 본조 중흥을 위한 녹봉재산제도 도입에 따라, 본조의 활성화 여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관보 제40호》


◎ 경기도 양주목에 의사자(義死者) 신성근 정문 설치(旌門)

○ 7월 6일에 전훈련원봉사 손오공(孫悟空)이 의사자 신성근의 추모비 건립을 예조에 청원하였다. ■#

○ 7월 14일에 예조좌랑 조병옥이 추모비 건립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지난해 11월, 홍문관 부교리 최사강(崔士康)이 올린 '의사자칭송계본(義死者稱頌啓本)'에 선왕께서 전교하신 바가 있으시니, 의인(義人)은 개별적으로 칭송하거나 포상하는 것이 좋겠다. 선례(先例)에 따라 경기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한다." 하였다. ■#

○ 8월 21일에 예조정랑 조병옥이 계목(啓目)을 올려, 장소를 정하지 아니하여 의사자 신성근의 정문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예조정랑 조병옥이 민국의 행정구역에 따라 경기도 구리시(양주목)에 정문을 세우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설치 장소는 아뢴 대로 한다." 하였다. ■#

■ 개국613년 6월 25일, 경기도 남양주시 팔당호에서 여인 배 모 씨(20)를 구하고 의사(義死)한 애견훈련학교 원생. 당시 나이 18세. 《신성근 정문》


◎ 국왕(國王), , 황해도 태백산성 인근 행차

○ 23일에 임금이 황해도 태백산성 인근에 거둥하여 민의(民意)를 들었다. ■#

○ 금상 전하께서 지난 23일에 황해도 태백산성 인근으로 거둥(擧動)하시어, 규장각제학 하빈군(河濱君) 이휘(李輝)의 저택에 머무셨다. 23일 오전에 하빈군 이휘가 행차 준비를 마치고 주상전하께 출발을 고하여 경기도 장단, 파주, 개성부를 거쳐 하빈군의 저택이 있는 황해도 연안도호부에 행차하셨다. 금상 전하께서는 이휘의 사저에 도착하신 후, 환궁하는 날인 25일까지 백성들의 민의(民意)를 듣고자 하시었다. 24일에는 당초 계획된 사냥 일정을 취소하시고, 인근 바닷가로 거둥하시어 정국 구상을 하셨다. 금번 행차 시 황해도 감영에 도내 활성화를 위한 행사에 사용하라며 100냥을 하사하는 성은을 내리셨다. 《관보 제41호》


◎ 주요 무관직 인사 단행

○ 25일에 조정의 주요 무관직 인사가 단행되었다. 행병조정랑 이현(李炫)이 곡산군수 겸곡산병마동첨절제사로, 행성균관사성 서양갑(徐羊甲)이 행병조정랑으로, 행강원도판관 조운(曺雲)이 성균관직강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신임 병조정랑 서양갑은 품계가 정3품 어모장군으로, 개국611년 4월에 의흥위사맹을 시작으로 형조, 양사(兩事), 성균관, 외관직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친 바 있다. 현재 당하관 품계이기 때문에 정랑직 수행 여부가 당상관 가자(加資)에 주요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관보 제41호》


창사(昌史) 제29권  

갑신년(2004) 9월 기사본말(甲申年 九月 紀事本末)


◎ 창국공신 개정 논란, 이덕무의 변(李德武之變)

○ 8월 29일에 진사 이덕무(李德武)를 소두(疏頭)로 하고, 행이조좌랑 김지수(金志洙), 봉직랑 평안도감부 서민교(徐民敎), 황해도호방 전병록(田炳祿), 한량 노태환(盧泰煥)이 연명한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의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대행대왕께서 이룩하신 공업(功業)이 적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배려가 다소 지나친 부분 또한 없지 않았으니, 그 일례가 바로 작년 7월의 대대적인 공신(功臣) 책봉입니다. 창국(昌國)의 공로를 치하하고 포상하는 일을 반드시 공신(功臣)이라 이름 해야 했을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소신(小臣) 등의 짧은 소견으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조(我朝) 역사에 28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견(異見)이 분분했지만, 지금과 같이 납득하지 못할 지경인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등으로 책봉된 2인, 2등으로 책봉된 4인, 3등으로 책봉된 5인 등의 정공신(正功臣)이 문제가 됩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전례를 생각해 보면 이는 지나치게 폭넓고 과분한 책봉입니다.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라는 사후 포상이 크게 이루어지니 어찌 작은 일이라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충정공(忠敬公)과 충의공(忠毅公)을 추증(追贈)할 때에도 관작(官爵)이 겨우 정2품 정경(正卿)에 그쳤는데, 창국의 공로를 얼마나 크게 평가하기에 그런 포상을 부과하겠습니까. 품계가 종2품 아경(亞卿)에 이른 공신은 다시 군(君)으로 봉하는데 과연 인심이 얼마나 순응하겠습니까.
공신을 책봉할 때 반드시 1등과 2등이 있을 필요가 없음은 경종조(景宗朝)의 부사공신(扶社功臣) 책봉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당시 공신으로 책봉하기에 미흡한 공훈이었고 결국 나중에 훈호(勳號)가 삭제되었다고는 하나, 일단 책봉하고 그 등위를 3등으로 정한 일과 추후 여하(如何)에 따라 공신 칭호를 회수한 등의 일은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또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이 중심이 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청했던 일도 본받을 만한 선례입니다." ■#

● 이날 진사 이덕무(李德武) 등은 경종 때 일등 공신과 이등 공신 없이 삼등 공신만 책봉하였던 부사공신(扶社功臣)의 예와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의 주도로 이뤄진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본받을 만한 선례라고 주장하며 창국공신(昌國功臣)의 녹훈이 과하니 다시 세밀하게 심사하여 등급을 조정하거나 아예 공신에서 배제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창국일등공신 역시 여느 일등 공신과 동일한 반열이라 할 수 있으니, 엄중하게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장래에 한말(韓末)의 충의지사(忠義志士)나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獨立鬪士)를 가려 독립공신(獨立功臣) 혹은 광복공신(光復功臣)의 일등 공신을 책봉하는 사업을 진행한다고 가정할 때, 상대적으로 공이 미약한 창국일등공신이 그들과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지(論旨)였다.

○ 이덕무 등의 상소는 정국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규장각제학 이휘(李輝)와 평시서제조 이완(李浣)은 이미 지난 6월 초의 용퇴 파동(勇退波動) 때 이덕무로부터 대신(大臣)으로서의 체모(體貌)를 잃었다고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 두 대신은 이덕무의 상소가 올라온 직후,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그동안 받은 모든 작위(爵位)를 반납하겠다는 뜻을 나타냈고 ■# ■#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낙향을 하였다. ■#

○ 이덕무 등의 상소가 올라온 다음 날인 8월 30일에 임금이 창국공신 개정 논란과 관련하여 전교를 내렸다.
"이 시각부터 창국공신 개정과 관련한 상소, 차자, 사직소 등을 일절 금(禁:금지)한다. 생존 공신(功臣:정공신과 원종공신)과 연명 상소자 5인은 별도의 전교가 있을 때까지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처소(處所)에서 대기하라. 다만, 국정 중단을 방지하고자 이조참판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아울러, 호조 수장의 직무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대행한다. 승정원에서는 금일부터 익월 초 5일까지 빈청 2실에서 창국공신 개정에 대한 찬반 의견을 수렴하여 증감 없이 계(啓)하라.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는 호적신고를 완료한 모든 백성으로 하되, 공신과 연명 상소를 올린 자들은 제외하도록 한다. 아울러, 문장이 미흡한 백성도 대거 참여할 수 있도록 '댓글 참여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되, 신분을 명확히 밝히게 하라."

○ 8월 30일에 "창국공신 개정과 관련한 상소, 차자, 사직소 등을 일절 금한다"라는 전교가 있었음에도 한성부에서 형조율학훈도 이충(李忠)이 이덕무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에 연명할 사람을 모집하였다. 형조좌랑 장운익(張雲翼), 경기검률 김준호(金峻鎬) 군기시부봉사 이원(李援), 봉상시부봉사 권율(權律) 등이 동참할 뜻을 나타내었다. ■#

○ 8월 30일에 진사 이덕무가 한성부 저자에서 김준호, 권율 등과 격렬한 언쟁(言爭)을 벌였다. ■#

○ 승정원주서 손오공(孫悟空)이 이충, 김준호, 이원, 권율 등이 어명을 거역하였으니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으나, 특별히 처분(處分)하지 않는다." 하였다. ■#

○ 봉상시부봉사 권율, 형조율학훈도 이충, 군기시부봉사 이원 등이 각각 전조(銓曹)에 사직서를 올렸다. ■# ■# ■#

○ 병조정랑 서양갑(徐羊甲)이 계목(啓目)을 올려, 참하관들의 잇따른 사직서 제출 사태에 우려를 나타내니, 비답하기를,
"창국공신(昌國功臣) 개정 논란과 관련하여 앞서 전교한 바가 있는데,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 성급히 목숨을 버리거나 사직하는 자가 늘어나니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금일, 과인이 용단을 내려 혼란을 수습할 것이니 이 시각부터 창국공신 개정과 관련한 일체의 논의를 중단하라." 하였다. ■#

○ 9월 1일에 창국공신 개정 논란에 대하여 전교를 내렸다.
"과인은 창국공신(昌國功臣) 개정과 관련하여 치세(治世)에 오점이 남더라도 명분(名分)보다는 실리(實利)와 의리(義理)를 택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이에, 일련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사정에 어두운 하급 관리와 백성들을 선동하여 국가에 지극히 헌신한 공신들의 체모(體貌)를 훼손하고, 초유의 국정(國政) 혼란을 초래한 진사 이덕무(李德武)를 함경도에 유배한다. 개정소(改定疏)에 연명한 이조좌랑 김지수(金志洙)와 평안감부 서민교(徐民敎)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참여한 것으로 판단하겠다. 이에, 죄(罪)를 묻지 않을 것이니 현직에 복귀하여 맡은 바 임무를 다하라. 공신들에게 내려진 금령(禁令)을 거두고, 하빈군(河濱君), 덕수군(德水君),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등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 ■#

○ 9월 1일에 홍문관정자 김종서(金宗書)가 이조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 그리고 진사 이덕무를 유배에 처한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부족하면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낙향하면 혁기(奕棋:바둑)를 배워보도록 하라." 하였다. ■#

○ 진사 박수량(朴守良)이 이덕무의 다섯 가지 죄목을 아뢰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조정(朝廷)의 형편을 고려하여 양편(兩便)을 모두 거두고자 이덕무(李德武)를 일시 격리하고, 명분(名分)도 잠시 돌려 둔 것인데 이제는 소용이 없을 듯하다. 너희가 원하는 것을 곧 이루겠으나, 성급하였기에 이후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덧붙여, 과인은 이덕무나 김종서(金宗書)를 공신들만큼이나 진심으로 아꼈다." ■#

○ 9월 3일에 규장각제학 이휘, 이조참판 정재안(鄭宰安), 시호도감제조 최영(崔瑩), 평시서제조 이완, 동지성균관사 이동진(李東珍)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모든 사직을 윤허하고 별도로 전교하였다.
"형조는 즉시 이덕무(李德武)를 방면하라. 사직한 공신(功臣)들의 간곡한 계청을 가납하여, 이달 12일까지 다른 공신들의 특별한 반대가 없다면 창국공신(昌國功臣)의 위훈(僞勳)과 군호(君號)를 삭제토록 할 것이니 예조에서는 생존 공신들에게 통보하라." ■# ■# ■# ■# ■#

○ 9월 4일에 공신 개정 논란과 관련한 사태 수습에 관하여 윤음(綸音)을 내렸다.
"창국공신(昌國功臣) 개정에 관한 진사 이덕무(李德武) 등의 연명소(聯名疏)를 접하고, 이후로 발생할 작지 않은 파장을 우려하여 상소를 물리고 싶었으나, 그리하지 못한 것은 본국(本國:본조)의 정체성 때문이다. 본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의 위치를 조금씩 낮추어 과거와 공존(共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형님이신 대행대왕께서 과거에 존호(尊號)를 급구 사양하시고, 2품 당상의 1품 가자(加資)를 제어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여긴다. 비록, 창국공신 책봉 당시에 인정상 훈급(勳級)을 차마 조정하지 못하시어 작금의 사태가 초래되었으나, 언젠간 과인이 해결해야 할 유업(遺業)인 것이다.
작일에 공신들의 사직소를 처결하며 심기(心氣)가 심히 불편해진 과인이 삭훈을 천명하고, 당분간 정사(政事)를 방치할까 하였으나, 과인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신민(臣民)과 과인을 믿고 종사(宗社)를 맡겨주신 형님을 생각하여 다시금 혼란을 수습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이에, 온 신민에게 당부하노니 시간이 다소 지체되더라도 순리(順理)대로 창국공신 개정 건을 마무리 짓고, 국가 혼란을 수습하여 종사를 반석 위에 세울 것이니 과인을 믿고 따르라." ■#

○ 조야(朝野)가 창국공신(昌國功臣) 개정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8월 29일에 진사 이덕무(李德武) 등 5인이 연명한 창국공신 개정에 관한 상소로 인해, 금상 전하 즉위 후 처음으로 큰 논란이 일었다. 상소가 올라가자 조정과 민간의 관리와 백성들이 많은 상소와 논의를 통해 이덕무 등 5인의 죄를 지탄하였으며, 창국공신인 규장각제학 하빈군 이휘(李輝), 평시서제조 덕수군 이완(李浣)이 혐의를 피하고자 사직소를 올렸다. 이에 금상 전하께서는 8월 30일에 창국공신과 상소 연명자 5인에 대한 금령(禁令)을 내리시고 승정원 주관으로 빈청 제2실에서 창국공신 개정 문제에 관한 논의를 시행할 것을 전교하셨다. 그러나 논의가 열리고 있는 도중에 이덕무와 동지성균관사 이동진(李東珍) 등이 어의(御意)를 거스르고 관련 재차 상소와 사직소를 올리자, 금상께서는 빈청에서의 관련 논의를 중지시키신 후, 당면 문제에 관한 전교를 내리시어 이덕무를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유배하고 공신들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수습되지 않고 진사 박수량(朴秀良) 등의 상소가 이어지자, 현직에 있는 창국공신들 가운데 상의원부제조 양지원(梁志元)을 제외한 5인이 사직소를 올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상황이 반전, 금상께서 9월 3일을 기해 공신들의 사직소를 모두 윤허하시고, 주청에 따라 이덕무를 방면하셨다. 이어 4일에는 창국공신 개정 문제와 관련된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논란을 직접 수습하실 뜻을 비치셨다. 《관보 제42호》

● 이 사건으로 인해 가장 심적으로 고초를 겪은 사람은 바로 임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길 사평(史評)은 이것뿐이다.


창사(昌史) 제30권  目錄

갑신년(2004) 9월 기사본말(甲申年 九月 紀事本末)


◎ 이덕무의 변(李德武之變) 貳

◑ 이덕무(李德武) 1975년생(男) 612.01.04-613.09.06
진사(進士). 자 회숙(會叔), 호 운암(雲巖), 본관 전주(全州), 본적 충청도(忠淸道). 개국612년 5월에 제12차 소과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상소한 것을 시작으로 동년 8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규장각 복설이 가납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으나, 8월에 올린 창국공신개정연명소(昌國功臣改定聯名疏)로 훈신(勳臣)을 크게 침척(侵斥)하여 동월 30일에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유배되었다. 9월 초 3일에 해배(解配)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얻은 병환으로 초 6일에 사망하였다. 개국613년 8월에 성균관 문과(文科)를 졸업하였고, 그 시기를 전후로 몇 편의 신도비명(神道碑銘)과 묘갈(墓碣)을 찬(撰)하였다. 《인물약전》

○ 9월 6일에 진사 이덕무가 사망하였다. ■#

○ 이덕무가 사망한 지 2개월 후인 11월 초에 민간 신문인 천의신보(天意新報)에서 뇌산(雷山)이라는 필명(筆名)을 쓰는 기고자에 의해 진사 이덕무가 유사(有司)와 동일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 제20차 소과, 진사시 유민(柳珉) 등 10인 입격

○ 지난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제20차 소과(小科) 과거가 시행되어 총 10인의 입격자를 배출하였다. 이번 과거에는 10인이라는 비교적 많은 수의 입격자가 나왔으나, 언론사인 천의신보사(天意新報社)에서 지적할 정도로, 일부 시제가 적절치 못해 난이도 조절에는 실패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입격자 가운데 수석 입격은 진사시 제1인으로 입격한 전라도 유생 유민(柳珉)이었으며, 이외에 생원시에서 1인, 진사시에서 7인, 원시에서 1인의 입격자가 나왔다. 《관보 제42호》


◎ 제21차 소과, 훈련원시 이충(李忠) 등 5인 입격

○ 제21차 소과는 9월 중순에 시행되었다.


◎ 비변사(備邊司) 개청

○ 9월 5일에 임금이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전교하기를,
"주요 관청의 위기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하고, 국정 혼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를 개청하고자 한다. 이에, 대략의 내용을 초(草)하여 승정원에 내리니, 주서는 '경외관 현직 관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과를 아뢰도록 한다." 하였다. ■#

○ 9월 6일부터 9월 17일까지 빈청(賓廳)에서 두 차례에 걸쳐 비변사 개청에 대한 찬반 논의를 하였는데, 논의에 참여한 대부분의 관리들이 비변사 개청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17일에 승정원주서 손오공(孫悟空)이 빈청 논의 결과에 대하여 계본(啓本)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아뢴 바를 알겠다. 비변사(備邊司) 개청 문제는 적절한 시기에 다시 전교하겠다." 하였다. ■#

○ 10월 1일에 비변사 개청에 대하여 전교를 내렸다.
"조정 공의(公議:공론)에 따라 비변사(備邊司) 개청을 훗날로 미루고자 하였으나 근자에 과인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었고, 이후로도 한동안은 개선될 수 없기에 심사숙고한 끝에 비변사를 개청키로 결단을 내렸다. 가선대부 이동진(李東珍)을 규장각 제학 겸 비변사 유사당상으로 삼는다. 곡산군수 이현(李炫)을 겸비변사 구관당하로 삼는다. 행성균관 직강 박상진(朴商鎭)을 겸비변사 유사당하로 삼는다. 행성균관 직강 조운(曺雲)을 겸비변사 유사당하로 삼는다. 평시서령 한종훈(韓宗勳)을 겸비변사 유사당하로 삼는다." ■#

● 본래 비변사에 유사당상, 구관당상은 있었으나 유사당하, 구관당하는 없었다. 당상관이 많지 않은 본조의 형편을 살펴 당하관 대부에게도 조선 시대 유사당상, 구관당상에 준하는 직책을 부여한 것이었다.



갑신년(2004) 10월 기사본말(甲申年 十月 紀事本末)


◎ 시호도감 폐청


○ 10월 1일에 조정 인사와 함께 전교하기를,
"예조 정랑 조병옥(趙炳玉)의 시호도감 낭청직을 면직한다." 하여 도감이 다시 폐청되었다. 《시호도감의궤》


◎ 국선변호인(國選辯護人) 제도 시행 논의

○ 8월 27일에 형조에 비망기를 내리면서 전교하기를,
"본국에도 국선변호인(國選辯護人)을 두었으면 하는 것이 과인의 오랜 의지인데, 사헌부와 형조의 실직(實職)을 역임한 현직 관리(현직 형조관리는 제외)나 유품자에게 피의자를 변호할 수 있는 국선변호인의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해 주고, 형조에서 사건을 공고하면 개인 의사에 따라 형조로부터 사건을 수임(受任)하여 변호를 담당하게 하였으면 한다. 국선변호인의 처우는 금전 또는 근무일수 포상 등으로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형조에서 구체적인 절차나 방법 등을 제도로 마련하여 아뢰되, 필요하다면 빈청을 열어 조야(朝野)의 공론을 수렴하라." 하였다. ■#

○ 국선변호인 제도에 대해 형조 내부와 빈청 논의를 거친 후, 10월 14일에 형조좌랑 장운익이 그 결과를 보고하니 비답하기를,
"시간을 두고, 초안(草案)을 충분히 검토한 후에 별도로 전교를 내리겠다." 하였다. ■#

● 국선변호인 제도는 정해년(2007) 8월에 개정된 수사논죄절목에 반영되었다.


◎ 제16차 대과, 문과 박우석(朴祐碩), 무과 조운(曺雲) 등 6인 급제

○ 제16차 대과는 10월 하순에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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