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19일 (화) 22:43  [해시(亥時):이경(二更)]
문서분류 동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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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동백서원 초대 원장 서긍 행장
자헌대부 병조판서치사봉조하 명예삼급팔괘장 근정이급보국장 서긍 행장
資憲大夫 兵曹判書致仕奉朝賀 名譽三級八卦章 勤政二級輔國章 徐肯 行狀


공(公)의 휘(諱)는 긍(肯), 초명(初名)은 양갑(羊甲), 호(號)는 석선(石仙)이며, 공은 개국594년(을축:1985)에 출생하였고, 개국611년(임오:2002) 2월에 본조(本朝)에 입조(入朝)하여, 경기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공은 4월에 의정부의 천거를 받아 승의부위 의흥위사맹이 되어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동년(同年) 7월에 공은 평안찰방으로 부임하여 도민을 유치하고 도내 교육기관을 활성화하는 등 척박한 평안도 지역의 부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8월에 지역별 특색화 제도가 시행되어 평안도가 문화, 예술 지역으로 선정되었으므로 공은 경성공(景成公)이 평안검률 시절 운영하였던 평양문화원(平壤文化院)을 다시 개설하여 평안도를 문화지역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0월에 공은 평안찰방의 임기를 마치고 행형조좌랑으로 부임하였고, 12월에는 행사간원헌납을 역임했다. 공은 이듬해인 개국612년(계미:2003) 2월에 학업(學業)에 매진하게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공은 종사(宗社)를 걱정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여 국난(國難)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소신을 피력하였다. 4월에 장종(章宗)께서 심신(心神)의 미약(微弱)으로 다시 정무를 멀리하시자 정국이 마비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공이 학업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도 상소(上疏)를 올려 임금께 정무를 돌보기를 간곡히 청하니, 장종께서 비답하시기를, "내외(內外)로 많은 말이 있었지만, 전헌납 서양갑과 같은 인재는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상소한 뜻은 잘 알겠으니, 근심을 거두고 물러가 기다리라. 과인이 지금 할 수 있는 비답은 그것뿐이다."라고 하셨다.

동년 11월에 공은 갑산부사로 부임하면서 관직에 복귀했다. 공은 평안찰방으로 활약했던 경험을 살려 척박한 함경도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중에서도 공이 가장 주력한 것은 토관직(土官職) 제도의 활성화였다. 공은 함경도 백성 이순지(李純之), 신재호(申渽湖), 민지훈(閔地訓) 3인을 차례로 토관으로 천거하여 토관직 제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공은 민립 서당인 쌍수서당(雙修書堂)을 새로 건립하여 관립 서당인 천손서당(天孫書堂)과 함께 도내 교육을 책임지게 하였다. 이듬해인 개국613년(계미:2004) 2월에 공은 행사헌부집의로 부임하면서 경관직(京官職)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5월에 행형조정랑, 6월에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 대구부사가 되었다.

동년 8월에 공은 행병조정랑이 되어 무관의 인사와 무과(武科) 시험을 관장하게 되었다. 12월에 공은 그간 조정(朝廷)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절충장군으로 가자(加資)되고 병조참의에 임명되는 성은(聖恩)을 입었다. 통상적인 관례(慣例)에 따르면 당상 가자는 국왕이 삼사(三司)와 전조(銓曹)의 공론을 수렴한 후 가부를 결정하는 절차를 따라야 했지만, 공의 당상 가자는 그러한 절차 없이 금상(今上)께서 특별히 권도(權道)로써 명(命)하신 것이었다. 공은 이러한 성상(聖上)의 기대에 부응하여 이듬해인 개국614년(을유:2005) 2월에 실록청(實錄廳)의 복설을 이끌었고 실록청총재관이 되어 장종대왕실록 21권부터 26권까지 총 6권의 실록 편찬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년 8월에 유사지변(有司之變)으로 철조(輟朝)가 단행되었고, 공은 야인(野人)으로 지내면서 하루빨리 조정이 정상화되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했다.

이듬해인 개국615(병술:2006)년 10월에 조정 기능이 재개되자 공은 누구보다 앞장서 조정에 복귀하였고 다시 병조참의가 되어 서전(西銓)을 이끌었다. 공은 장기간 철조로 인해 피폐해진 조정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전심으로 노력하였다. 공은 오위(五緯) 각위(各衛)의 당하관 군직(軍職)을 문무관 대기 발령직으로 개편하는 데 일조(一助)하고, 창국 이래 최초로 군졸 모집을 개시하여 군졸 제도 활성화의 기반을 닦았다. 개국616년(정해:2007) 1월에 공은 가선대부로 가자되고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때 공은 장기간의 과로가 원인이 되어 심신(心身)에 병환(病患)이 생기게 되었고, 동월 25일에 외직인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요양하면서 봉직(奉職)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임기 만료를 20여 일 앞두고 공의 집안에 우환(憂患)이 생기자 정무를 돌보지 못하고 도내 행정을 방기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공은 사헌부의 탄핵(彈劾)을 받게 되었음에도 금상께서는 공의 사정을 전해 들으시고, "가정 형편이 호전되어 다시 조정 관직에 나오게 될 날을 기다리겠다."라고 하시면서 면직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그치셨다.

이듬해인 개국617년(무자:2008)년 7월에 공은 다시 심신을 추스르고 훈렴도감중군이 되어 조정에 복귀하였다. 공은 조정에 복귀하자마자 4년 만에 복설된 성균관의 무과 강의를 맡아 성균관 재건에 힘썼으며, 8월부터는 시호도감제조를 겸직하면서 개국613년 1월에 승하하신 이래로 묘호(廟號)와 시호(諡號) 등이 마련되지 않아 대행대왕(大行大王)으로 남아계셨던 장종대왕에 대한 제반 사업을 마무리하는 대업(大業)을 이끌었다. 당시 장종대왕 행장(章宗大王 行狀)은 초본(草本)만이 겨우 완성된 상태였는데, 공이 시호도감 제조로 부임한 지 20여 일 만인 8월 하순에 정본(正本)을 완성하여 재가를 받으니 마침내 선왕의 행적을 정리하여 묘호, 시호, 능호 등을 정하는 후속 사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공은 열(熱)과 성(誠)을 다하여 후속 사업에 매진하였고, 9월에 대행대왕의 묘호를 장종(章宗), 존호를 공경광렬(恭敬廣烈), 시호를 경성정효(景聖定孝), 능호를 희릉(熙陵)으로 정하는 과정에서 모든 일을 총괄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0월에 혜종대왕(惠宗大王)의 존호를 체천흥운준덕홍공융봉현보무정중희(體天興運俊德弘功隆奉顯保懋定重熙)로, 혜장왕후(惠章王后)의 휘호(徽號)를 소온사헌(昭溫思獻)으로 결정하고, 11월에 공정공(恭定公)을 장종대왕의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정하는 사업까지 완수한 것은 모두 공의 업적이었다. 시호도감의 업무를 맡는 과정에서 공은 체직하여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는데, 막중한 업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공은 다시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제42차 훈련원시의 시제를 정하는 과정에서 공은 성상과 뜻이 맞지 않자 회의감에 빠지게 되었고 승정원에 그동안 받았던 모든 직첩(職牒)을 반납하고 낙향하려 하였다. 공의 이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성상께서는 시호도감에서의 공적을 참작하여 공을 행호분위호군으로 삼고 추가로 죄를 묻지 않았다. 12월에 공은 경기도관찰사로 복직하고, 이듬해인 개국618년(기축:2009) 2월에 수어사가 되어 본조 최초로 대장(大將)의 벼슬로 등단(登壇)하는 영예(榮譽)를 입었다.

동월 14일에 금상께서 종묘(宗廟)에 친림(親臨)하시어 혜종대왕의 존호, 혜장왕후의 휘호, 장종대왕의 묘호, 시호, 존호, 배향공신 등을 고묘(告廟)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공은 독책관을 수행하였다. 의식을 마친 뒤 공은 다시 시호도감제조로 복귀하여 의궤 찬수를 마무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상께서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에서 보조공신(補祚功臣)에 관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라고 명하시어 공이 이행하였다. 시호도감이 의궤청으로 전환한 뒤, 공은 의궤청제조가 되었고, 3월에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를 부록으로 하는 시호도감의궤(諡號都監儀軌)를 완성하여 간행하였다.

이후로 공은 사헌부대사헌, 행의정부사인, 병조참판, 수어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나 이때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이전과 같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개국620년(신묘:2011) 4월에 공은 치사(致仕)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금상 전하께 마지막으로 간언하기를, 모든 관민(官民)을 위한 정치를 펴시고 지속해서 그들로부터 즐거움을 끌어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상께서 중신(重臣)의 치사를 아쉽게 여기시며 공을 자헌대부로 가자하시고 병조판서 겸지훈련원사를 제수하셨다. 다음 달인 5월에 공은 마침내 치사하여 특별히 봉조하에 제수되었다.

봉조하가 된 이후 공은 낙향하여 잠적하였다가, 6년 뒤인 개국626년(정유:2017)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때 조정은 비상한 상황을 맞아 비변사(備邊司)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금상께서 상소, 차자(箚子) 등을 일절 받지 않으시고 정기 과거(科擧)의 시행을 무기한 보류하셨기 때문에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임금께 미치지 못하며, 선비들이 뜻을 펴고자 하여도 출사(出仕)할 기회가 없으니, 민심이 흉흉하여 매우 위태롭고 혼란한 형국(形局)이었다. 이에 공은 함경도 천손서당 역사 강의 등을 통해 민심을 다독이는 한편, 입궐하여 전하를 뵙고 충언을 올리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아 안팎의 기대가 높았다. 이후로도 세 차례 진언(盡言)을 올렸으나 그 결실을 보기 전에 돌연히 죽음을 맞이하니, 여염(閭閻)이 슬퍼하는 이들로 가득하였으며, 상께서는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호조 당상을 보내시어 조문하도록 하셨다. 떠나기 전에 개인사 등을 정리한 문집을 남겼는데, 석선기술(石仙記述) 7권이다.

공은 약 10년간 조정에 봉직하면서 매사에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임하였기에, 일찍이 평안도와 함경도의 수령을 역임할 때 척박했던 이북 지역을 부흥시키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공은 장기간 병조의 수장을 맡아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했고, 조정의 핵심 제반 사업이었던 시호도감의 업무를 완수하였으니, 그 공로는 창국공신(昌國功臣)과 비교하여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행장은 본래 친족(親族)이 기록해야 마땅하나 공은 조정에 오래 봉직하였음에도 일문(一門)을 두지 못하였기에, 옛날 귀곡선생(鬼谷先生)의 문하(門下)에서 공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하였던 내가 부족한 필력(筆力)으로나마 공의 일생을 기록하여 만대에 전하고자 한다.


* 개국626(2007)년 9월 12일에 경기도이방 정제두(鄭齊斗)가 공의 행장(行狀)을 찬하였으며, 통정대부 이조참의 한명회(韓明檜)가 증수(增修)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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