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제두
작성일 개국626(2017)년 9월 20일 (수) 16:45  [신시(申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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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서각> 창사(昌史) 간행본 제3책
창사(昌史) 제11권  目錄

신사년(2001) 11월 기사본말(辛巳年 十一月 紀事本末)


◎ 충청도 청주목에 공군 항공 의료원 및 외국인 의료 공제회 칭송비 건립

○ 강원도 유생 김서울(金庶蔚)의 청원에 의하여 11월 3일에 공군 항공 의료원 및 외국인의료 공제회 칭송비가 건립되었다.

■ 노인, 재활원 등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실시한 공군 항공의료원과 불법체류 외국인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의 의료 혜택을 제공한 외국인의료공제회의 선행(善行)을 칭송함. 《공군 항공 의료원 및 외국인의료 공제회 칭송비》


◎ 유향소(留鄕所) 설치 논의

○ 9월 18일에 한성참군 윤희승(尹熙勝)이 차자하여 팔도에 유향소(留鄕所)를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논의를 통해 관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라고 명하셨다. 11월 초 2일에는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 부수찬 이상 관원으로 하여금 지제교(知製敎)를 예겸(例兼)하게 하시는 한편, 동월 20일에 논의를 마친 삼사에서 유향소의 설치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아뢰었으나, 이조에서는 유향소를 시범적으로 설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다시 왕께서 옥당(玉堂)에 자문하셨는데, 수찬 유치의(柳治義) 등이 다시 옥당의 의견을 취합하여 유향소 설치를 반대하니 왕께서 비답을 내리시기를, "유향소는 그 설치를 무기한 보류하도록 한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홍문관이 제 모습을 갖춘 듯하다."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유향소(留鄕所)는 각 고을 수령(守令)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이자 일종의 지방 자치를 위해 조직된 민간 기관이다. 품계를 보유한 채 향리에 거주하는 유향품관(留鄕品官)과 지역에 거주하는 양반(兩班)인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유향소 구성의 주축이 되었으며, 임원으로 좌수(座首),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사조백과사전》

● 본래 9월 18일에 한성참군 윤희승이 유향소 설치를 건의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임금이 49일 만에 편전에 들어 유향소 설치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본조의 여건상 향청(鄕廳)을 제대로 구현해내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무기한 보류되었다.


◎ 토관직세법(土官職細法) 제정

○ 11월 3일에 '토관직절목(土官職節目)'이 제정 반포되었는데, 이는 동년 6월에 평안감영에서 장계한 내용을 채택하신 것이다. 토관을 선발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개국612년(계미:2003) 9월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양역(兩域)에서 혜택을 받는 백성이 나오게 되었다. 《장종대왕문서》

○ 토관직(土官職)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향토(鄕土), 즉 지방 향리(鄕吏)들에게 준 관직이다. 관찰사나 절도사의 추천에 의해 임명하며, 토관(土官)에서 경관직(京官職)으로 진출할 때에는 1품(品) 낮춘다.
본조에서도 창국 초기부터 토관 제도를 두었고, 개국610(2001)년 11월에 '토관직세법(土官職細法:토관직절목)'을 마련하여 정식으로 법제화하였다. 《사조백과사전》


◎ 실록청(實錄廳) 개청

○ 11월 초 10일에 실록청(實錄廳)을 개청하여 예조좌랑 최영을 초대 총재관(摠裁官)으로 삼으시고 글 잘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사초(史草)를 기록하고 실록을 찬수(撰修)토록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실록청(實錄廳)은 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실록찬수청(實錄纂修廳)의 약칭이다.
본조 실록의 경우 제8권 실록부터 실록청에서 찬수하였으며, 사신(史臣)의 평가인 사평(史評)도 이때부터 수록되었다. 사평은 '사신은 말한다[史臣曰]'로 시작된다. 《사조백과사전》


◎ 경상도 청송도호부에 격오지근무교사칭송비(隔奧地勤務敎師稱頌碑) 건립

○ 예조에서 교사 유진선(兪鎭善)의 정문 설치를 청하자 비답하기를,
"명일 24일에 이전초등학교가 있는 경상도 청송도호부에 칭송비를 설치하되, 그 대상은 유진선 교사 1인이 아닌, 전국 팔도의 모든 격오지 농촌 근무 교사로 한다. 칭송비의 격은 서기봉, 조창배 등의 경우에 준(準)할 것이며, 유진선 교사의 이름은 대표 명의로 세우도록 한다. 정문을 세우지 않고 칭송비를 세우는 것은, 본래 정문(旌門)이란 충신, 효자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내려지는 것이므로 칭송비가 더 합당한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 모든 농어촌 격오지 초중고 장기 근속 교육자의 선행을 칭송함. 대표 교사는 경상북도 청송군 이전초등교 교사 유진선(兪鎭善/37). 《격오지근무교사칭송비》


◎ 문체교서(文體敎書) 반포

○ 23일에 교서를 내리셨으니, 이른바 문체교서(文體敎書)이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보고 느끼신 바가 있으시어 통신체(通信體)가 범람하고 있던 당시의 문풍을 올바른 문체로 바로잡고자 하셨다. 교서에서 이르시기를, "과거 답안 가운데 만일 한 글자라도 통신체를 띄는 것이 있다면 비록 그 글 전체가 주옥(珠玉) 같을지라도 물리쳐 하점(下點)으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발표하여 통신체가 극복되지 않는 한 급제나 입격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 또 공문서에 통신체를 사용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파직시켜 개선될 때까지 추호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하시면서, 교서에서 명시하신 바를 각 교육기관의 훈장, 유생들에게도 우선 적용하셨으니, 한글날 국경일 승격과 더불어 한글 사랑에 대한 왕의 애착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장종대왕문서》

○ 통신체(通信體)는 PC 통신이나 인터넷상에서 주로 사용되는 특이한 문체(文體)를 말한다. 모뎀으로 접속한 PC 통신 시절에 사용 요금을 줄이기 위해 문장을 줄여 쓰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기호나 특수문자로 대체하는 이모티콘(Emoticon), 글자를 과도하게 바꿔 쓰는 외계어(外界語) 등으로 확장, 변형되었다. 《사조백과사전》


◎ 제7차 별시, 문과 안향(安珦), 무과 김용현(金龍賢) 등 11인 급제

○ 11월 10일부터 동월 17일까지 실시되었던 제7차 별시(別試) 과거에서 총 11인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수석 급제자는 문과 갑과를 차지한 강원도 진사 안향(安珦)이었으며, 이외에 문과에서 유성민(劉聖敏) 조조(趙造), 부지훈(夫智勳) 등 6인이, 무과에서 김용현(金龍賢) 등 4인의 급제자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이조와 예조, 병조 등지에 임명되어 초임 근무에 들어갔다. 《관보 제22호》


◎ 개정(改定) 창국대전 반포

○ 지난 11월 26일자로 중앙 법전인 '창국대전(昌國大典)'이 개정(改正) 반포되었다. 9월 13일과 15일에 각각 개정안 승정원을 통해 예고된 후, 각 관청의 검토와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의 심의를 거쳐 개정안이 최종 확정된 대전(大典) 여섯 편이 11월 24일자 양사 보고에 대한 어명에 따라 '수사 및 논죄 세법'과 함께 중외(中外:조정과 민간)에 널리 반포되게 된 것이다. 전문(箋文:어전에 아뢸 때 올린 글)은 행홍문관수찬지제교 겸실록청기주관 유치의(柳治義)가 지어 바쳤으며, 개정된 내용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관보 제22호》

○ 창국대전(昌國大典)은 (사이버) 조선왕조의 최상위 법전(法典)이다. 각 법전별로 초안 마련 작업이 진행되어 개국610(2001)년 2월 22일에 제정(制定) 대전(大典)이 반포(頒布)되었으며, 동년 11월 26일에 개정(改定) 대전이 재차 반포되었다. 개국616(2007)년 2월 22일에 제2차 개정본이 반포되었다. 《사조백과사전》


◎ 수사논죄세법(搜査論罪細法) 제정

○ 11월에 '수사논죄절목(搜査論罪節目)'을 제정하여 시행하셨으니, 이는 형옥을 신중히 하려는 왕의 지극한 뜻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 《장종대왕문서》



신사년(2001) 12월 기사본말(辛巳年 十二月 紀事本末)


◎ 경기도 유생 변영태의 청제위등극소(請帝位登極疏)

○ 창국 초부터 왕을 폐하(陛下)라 부르며 칭제(稱帝)를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2월 22일에 유학 변영태(邊榮泰)가 제위(帝位)에 등극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왕께서 장문으로 비답을 내리셨는데, "왕을 높여 황제로 하고 왕비를 높여 황후로 하고 세자(世子)를 높여 태자(太子)로 하고 왕실을 높여 제실(帝室)로 하며, 전하를 고쳐 폐하로 하고 교지(敎旨)를 고쳐 칙명(勅命)으로 하는 것, 그리고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민심(民心)을 얻어 바른 정치를 펴는 것이다." 하시고, "사대(事大)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왕으로 칭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 과인은 구오지위(九五之位:帝位)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라고 하시어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칭제를 하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셨으니, 만백성이 그 뜻을 거룩하게 받들었다. 《장종대왕문서》


◎ 제5차 소과, 진사시 이진헌(李眞憲), 훈련원시 정호용(鄭鎬溶) 등 24인 입격

○ 소과(小科) 과거가 4개월만에 실시되어 총 24인의 입격자를 냈다. 3개 과거에 40인이 응시하여 24인이 입격해 전체적으로 6할(60%)의 입격률을 보였다. 세부적으로 보면 생원시 5인이 응시해 3인이 입격, 진사시에 22인이 응시해 14인이 입격, 원시에 13인이 응시해 7인이 입격하였으며, 생원시 수석 입격자는 통사랑 조조(趙造), 진사시 수석 입격자는 한성부 유생 이진헌(李眞憲), 원시 수석 입격자는 무공랑 정호용(鄭鎬溶)이었다. 《관보 제23호》


◎ 충청도 공주목에 이훈규(李勳珪) 선행 칭송비 건립

○ 12월 27일, 예조의 청원을 받아들여 이훈규 선행 칭송비를 건립하였다.

■ 개국605(1996)년 11월부터 어려운 생활 형편에서도 고아 남매를 부양해 온 공주경찰서 신관파출소 경장 이훈규(32), 정미경(30) 부부의 선행(善行)을 칭송함. 《이훈규 선행 칭송비》


창사(昌史) 제12권  

임오년(2002) 1월 기사본말(壬午年 一月 紀事本末)


◎ 삼사(三司) 인사 단행

○ 7일에 상(上)께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한 인사 등에 대해 전교(傳敎)하시기를,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한 인사를 단행한다. 행사헌부지평 강다소가 헌부(憲府:사헌부)에 부임한 지 4개월이 되었고 또 본인이 극구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므로 체직(遞職:교체)할 것을 허락한다. 금일 자로 행홍문관수찬지제교 유치의를 조산대부 행사헌부지평으로 삼고 사간원정언 이방원을 사헌부감찰로 임명한다. 이방원을 체직함은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 내의 이동이니 별반 문제가 없을 것이다.
조산대부 이완을 행사간원헌납으로 임명한다. 이방원의 체직으로 공석이 된 사간원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조산대부 이완은 실제 양사에서 직무를 수행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므로 중대한 소임을 맡기는 것이니, 맡은 바 직을 수행하라.
통훈대부 양지원을 홍문관직제학지제교로 삼는다. 이는 이조의 계목(啓目:약식 보고)를 헤아려 명하는 것이다. 역시 유치의의 체직으로 참상 관리가 없게 된 홍문관을 보완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각 관청에 직무지침 편찬 지시

○ 15일에 하교하기를,
“품계를 얻어 관직에 나선 관리들이 조정 업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낙향하는 것이 만성적인 관리 부족을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다. 계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초입사자들의 업무 적응을 유도하기 위한 제도와 편의가 전무한 실정이니, 과인은 이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낀다. 각급 관청의 수장과 관원들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당 업무와 관련한 사항이나 일의 처리 절차 등을 하나의 문서로 정리하여 '직무지침서'를 편찬하도록 하라. 비록 그 내용이 간결하다 하더라도 후임관들에게 큰 보탬이 될 것이며, 내용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간다면 장차 크게 도움 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직무지침을 편찬하는 사업에 대하여는 과인이 포상을 실시할 것이니, 관청별로 직무지침을 마련하여 서고에 넣어 보관하는 대로 지침 마련에 참여하여 수고한 관리들의 면면을 살펴 계본으로 아뢰도록 하라. 해당 관청의 관리가 아니더라도 그 업무에 경험이 있는 자라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읍내 서당을 가동하는 것은 과인이 전교를 내린다고 하여 당장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사헌부지평 유치의(柳治義)의 부고(訃告)

◑ 유치의(柳治義) 1985년생(男) 609.12.06-611.01.17
문신(文臣). 자 우복(于復), 호 수양(垂楊), 시호 경헌(敬憲), 본관 영광(靈光), 본적 함경도(咸鏡道), 초명(初名) 자광(子光). 개국609년 12월에 제4차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동월 고변된 대동계(大同契) 사건에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받았으므로, 무죄로 판명된 이듬해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관직에 임명되어 형조율학훈도, 행함경도검률, 형조명률, 홍문관수찬, 실록청기주관 등을 역임하였다. 소과 3시에 입격하고 대과에도 두 번 급제하여 승품이 빨랐으나, 출사 초년(初年)과 익년(翌年) 5월에 각각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관되어 관운(官運)이 평탄치 못했다. 항상 백성이 평안하지 못한 것과 관폐(官弊)를 걱정하였으며, 각처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글을 교환하였다. 대부(大夫)가 되어 지평으로 있던 중 불분명한 이유로 자진(自盡)하니, 많은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품계는 정4품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이르렀다. 증창국이등공신(贈昌國二等功臣) 영광군(靈光君)에 봉(封)해지고 정2품 자헌대부 형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갑산(甲山)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인물약전》

○ 개국611년(임오:2002) 정월 17일에 前지평 유치의(柳治義)의 부고(訃告)가 조정에 전해졌다. 대부(大夫) 반열에 있던 전직 관원의 창국 이래 첫 사망이었으므로 특별히 품계를 한 자급 올려 봉정대부(奉正大夫)로 하고 예조 참상관을 보내 조문(弔問)하게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17일에 행사간원헌납 이완이 행사헌부지평 유치의의 부고에 대해 차자를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창국(昌國) 이래 처음으로 대부의 반열에 있던 관리가 졸(卒)하게 되었다. 예조에서는 참상 관리를 상가(喪家)로 보내 조문(弔問)의 예를 갖추도록 하라. 이조에서는 전일 날짜로 전행사헌부지평 유치의의 자급(資級:품계)을 1계 올린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제6차 대과, 문과 조조(趙造), 무과 이휘(李輝) 등 21인 급제

○ 개국611년 들어 처음 실시된 과거인 '제6차 정기 대과(大科)' 과거에서 모두 21인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문과에서 조조(趙造) 등 14인이, 무과에서 이휘(李輝) 등 7인이 급제하였는데 전체 응시자가 24인이었기 때문에 평균 급제율이 거의 90% 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이미 품계가 있는 관리들이기 때문에 이번 과거를 통해 처음 관직에 진출한 유생과 한량이 5인에 불과해, '대과 과거가 유품자의 승품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다시 제기되었다. 문과에서 부정 응시자 1인이 적발되었으며, 문무과 전체 최우수 급제자는 평점 7.25를 받은 문과 을과의 조조였다. 《관보 제24호》


◎ 홍문관 독립성 보장

○ 27일에는 같은 문제에 대해 홍문관과 예조에 개별 논의를 명한 사안에 대하여는 홍문관 관원들이 예조 본청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시어 홍문관의 독립성을 보장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근무일수 가감산(加減算)과 인사평정기준일 산정의 분리 운영 실시


○ 신사년(2001) 12월 23일에  황해도사 이완(李浣)의 차자에 비답하기를,
"근무일수를 가산한다는 것은 평정 기간이 단축됨을 의미하는 것이지, 반드시 품계를 더하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제도하에서는 임기가 정해진 지방관의 경우에 행황해도사 이완이 아뢴 바와 같은 불리함이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근무일수 가산과 감산을 상벌점과 같이 별도 현황으로 유지하여 30일이 찰 때마다 품계를 높이거나 낮추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관하여는 홍문관과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도록 하겠으니, 각사는 마땅한 의견을 정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 근무일수 가산과 감산을 상벌점과 같이 별도 현황에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이조에서는 찬성하였으나, 병조와 홍문관에서는 반대하였다.

○ 21일에 전교하였다.
"이조에서는 문관들에 대한 근무일수 상벌점제를 금일 이후로 근무일수 가감산을 받은 관리들부터 적용 시행할 것이다. 금일 이전에 가감산을 받은 관리들에 대하여는 현행대로 적용하여 근무일수를 모두 소진시킨다. 병조에서는 병조에서 계본한 바와 같이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서 현직 외관(外官) 관리에 대해 별도의 근무일수 가감산 현황을 관리하여 추후 경관(京官)이 되었을 때 적용하도록 한다.
이제 문관과 무관에게 '근무일수'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같지 않게 되었다. 문무관의 수가 다르니 처한 지경이 같지 않고 또 인사 관리가 서로 유별(有別)하므로 시행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양자의 시행 과정을 보아 이해 득실을 살핀 연후에 세법을 개정해 이조와 병조의 근무일수 가감산에 관한 제도를 하나로 통일하는 명문화를 하도록 하겠으니, 우선은 어명(御命)에 의지하여 상기 전교를 시행하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포폄(褒貶)은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관원의 근무 평정을 의미한다. 또는 옳고 그름이나 착하고 악함에 대한 평가를 말한다. 어떤 행위에 대해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을 밝혀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으로,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역사 정신이기도 하다. 본조에서는 포폄에 해당하는 근무 평가를 '인사 평정(評定)'이라고 한다. 《사조백과사전》

● 경진년(2000) 11월 8일 제정된 인사평정세법의 인사 평정에 대한 세부 사항

제3항
"평정 결과 승품을 하게 되면 인사평정기준일이 승품된 날짜를 기준으로 늦어지게 된다. 그 이외에는 변동이 없다. 즉, 정8품 통사랑으로 2월 10일이 인사평정기준일인 관리가 18일 자 결과 공고를 통해 종7품으로 승품을 하게 되었다면 다음 인사평정기준일은 3월 18일로 늦어진다. 이월되거나 주의를 받았다면 3월 10일이 그대로 인사평정기준일이 된다."

제4항
"근무일수가 더해지면(+) '승품 및 체직 세법'상의 승품일수에서 그 기간만큼을 빼고, 근무일수가 감해지면(-) 그 기간만큼을 더한다. 예를 들어, 정8품인 관리가 어명에 의해 근무일수 15일을 추가 받았다면, '승품 및 체직 세법'상의 승품일수는 15일이 된다."


● 계미년(2003) 01월 17일 개정된 인사평정절목 인사 평정에 대한 세부 사항

제2항
"인사평정기준일 이후부터 결과 공고가 나오는 기간에 관직이 변경된 경우에도 중단하지 않고 원래의 평정 공고대로 평정을 실시한다. 이는 인사 평정 기간(실시 공고 후부터 결과 공고까지의 실제로 인사 평정이 이루어지는 기간)이 인사평정기준일('승품체직절목'상의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할 때, 원칙상 인사 평정을 받아야 하는 날짜)보다 늦기 때문이다."

제3항
"근무일수가 더해지거나(+) 감해지는(-) 등의 근무일수 가감 포상은 인사평정기준일 산정과 관계가 없다. 별도 현황을 유지하여 '승품체직절목'상의 근무일수와 비교하여 해당 일수가 차면 승품시킨다."


● 임오년(2002) 1월부터 근무일수 가감산과 인사평정기준일 산정의 분리 운영을 시범적으로 문관에게만 적용하여 실시하였다. 동년 5월에 무관에게도 문관과 같은 근무일수 상벌점 제도를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계미년(2003) 1월에 인사평정절목을 개정하면서 법제화되었다.

● 창국 초기의 인사 평정제도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一. 관리마다 인사평정기준일이 다르고 매달 주 단위로 4~5회의 인사 평정을 실시하여야 했다. 그리고 근무일수 가감산의 포상을 반영해서 인사평정기준일이 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으므로 전조(銓曹)의 인사 행정이 매우 복잡하고 번거로웠다.

一. 규정에 따르면 관리를 체직하거나 승품시킬 때 인사평정기준일이 체직일이나 승품일을 기준으로 다시 산정되는 방식이었으므로 인사권자는 인사 변동이나 승품 사령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인사 행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소홀히 처리하다가는 인사상 손해가 발생한 관리들의 항의를 받아야 했다.

一. 근무일수 가산의 포상을 받는다는 것은 인사평정기준일이 앞당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반드시 승품에 해당하는 평정 결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어떤 관리는 근무일수 15일의 포상을 받은 뒤 보름간 근무하여 인사 평정을 받고 이월의 평점을 받아 승품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근무일수 가감산의 상벌을 인사평정기준일 산정과 분리하여 운영한 것은 전조의 인사행정 업무를 획기적으로 간소화시켰으며, 이후에 매월 2회 평정과 상점제로 운영되는 현재의 인사 평정제도로 발전하였다.



창사(昌史) 제13권  

임오년(2002) 2월 기사본말(壬午年 二月 紀事本末)


◎ 임오년(壬午年) 연두교서 반포 ■#

○ 12일에 임오년(壬午年) 연두교서를 내리셨다. 왕께서는 지난날에 행하셨던 정사에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이 있는지를 돌이켜 보고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늘 반성하셨다. 언제나 백성을 생각하며 정사에 임하셨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셨다. 모든 연두교서가 늘 그러했지만, 특히 임오년 교서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감회를 말씀하신 후 심중(心中)을 드러내는 것으로 교서 내용을 대신하셨다. "수많은 전교와 비답이 있었으나, 과인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하시면서 조정 관리들의 기강 해이를 지적하셨다. 네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첫째가 어명을 내릴 때의 신중함과 그 이행 여부, 둘째가 인재를 등용하여 쓸 때의 기준과 시련, 셋째가 선비들의 경박한 기풍과 진퇴에서의 폐단, 마지막이 시책을 펴는 데 있어서의 상고(尙古)와 같은 원칙 적용 등이었다. 특히 교서 중에서 정조선황제의 행적을 언급하신 것이 문체교서와 더불어 정조 시대에 대한 왕의 관심을 알 수 있게 하며, "오늘날 선비들의 기풍(氣風)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옛날 선비들보다 공적인 의리에 관한 결심은 크게 미약하면서 사적인 분개에는 조금도 참지 못하는 것이 대체로 오늘날 선비 된 자들의 행실이다. 논의나 논쟁 가운데 행여 남으로부터 사소한 지적이라도 받는 날이면 당장에 다시는 씻지 못할 치욕을 당한 것으로 느껴 그릇된 마음을 품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정녕 개탄스러운 일이고 무엇이겠는가." 하신 내용은 당시 세태에 대한 준열한 지적이었다. 《장종대왕문서》


◎ 사헌부 내 신문고(申聞鼓) 운영 ■#

○ 2월 10일에 사헌부에서 자체적으로 신문고 제도를 시행하여, 백성으로부터 직접 '진정, 고발' 등의 민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 임오지변(壬午之變)

○ 임금이 12일에 연두교서를 내린 이후 익월 25일 의정부서사제 시행에 관한 전교를 내릴 때까지 42일간 편전에 나오지 않았다.

● 신사지변(辛巳之變)에 이은 장기간 철조 사태가 또다시 발생했다. 임금의 두문불출(杜門不出)로 인해 발생한 조정의 마비가 두 번째였으므로 만조백관 중에서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오년(2002) 3월 기사본말(壬午年 三月 紀事本末)


◎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시행 ■#

○ 25일에 전교하였다.
"과인이 그간 올려진 계본과 계목, 장계, 상소를 세밀하게 살피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과인이 국정을 처결하는 것과 관련하여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 확고하게 장담하여 공포하기 어려우니, 사간원의 간언에 따라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시행하는 것으로 전교를 그치는 바이다. 차차 각 관청 사이의 권한이나 업무 범위 등을 조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우선 시행하여 그 대략의 체계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하나같이 마음을 가다듬어 지난날에 하던 것처럼 나라를 이어나갈 계책에 힘쓸 것이다." 하였다.

● 임오지변(壬午之變) 이후 이 전교에 따라 국정이 의정부서사제로 전환되었다. 두 차례 철조로 인한 조정 마비 사태에도 수많은 충신들이 남아 조정을 지켰기에 종사(宗社)를 보존할 수 있었다.


◎ 전호조정랑 노사신(盧思愼)의 부고

◑ 노사신(盧思愼) 1973년생(男) 609.11.16-611.03.24
문신(文臣). 호 벽암(碧巖), 독거(獨居), 시호 혜정(惠靖), 본관 교하(交河), 본적 함경도(咸鏡道). 개국609년 12월에 천거로 호조산학훈도의 직을 제수 받아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이조, 호조, 예조 등의 관직에 주로 있었는데, 특히 호조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개국610년 2월 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행충청도검률, 행한성부참군 등을 거쳐 성균관, 형조, 이조 등에서 근무하였다. 문중 모임 오상세가(五常世家)의 가주(家主)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본래부터 품성이 곧고 진실하여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공무(公務) 받들기를 조심스럽게 하여 관청 일을 집안 일처럼 하였기 때문에 내외(內外)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다. 호조정랑에서 물러나 함경도 사저(私邸)에 내려가 사냥을 즐기던 도중 호환(虎患)으로 생을 달리하였다. 품계는 정5품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창국이등공신(昌國二等功臣) 교하군(交河君)으로 추봉되고 정2품 자헌대부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인물약전》

○ 25일에 사헌부감찰 조조가 전호조정랑 노사신의 부고에 대한 차자를 올렸다. 《승정원일기》



임오년(2002) 4월 기사본말(壬午年 四月 紀事本末)


◎ 홍문관부교리 조동선(趙東瑄)의 부고

◑ 조동선(趙東瑄) 1983년생(女) 609.10.15-611.04.08
문관(文官). 호 효명(曉鳴), 본관 임천(林川), 본적 황해도(黃海道). 개국609년 11월의 제3차 별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역원봉사를 초직으로 겸경기도검률, 예조좌랑,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사역원에 있을 때 영문사(英文司) 설치를 주도하여 산파(産婆) 역할을 맡았으며, 예조에 근무하던 중 4차례에 걸쳐 과거 시관(試官)을 맡아 그 능력을 직접 입증하였다. 가례도감에서 홀로 재간택에 이르렀으나, 개국610년 3월 초1일에 간택 중지를 극구 청원하여 결국 관리로 남았다. 맡은 바 일을 처리하는데 매우 치밀하여 학자(學者)의 기품이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류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홍문관부교리지제교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후 지병(持病)으로 사망하였다. 평정만으로 품계가 정5품 통선랑(通善郞)에 이르렀으며, 사후 창국원종일등공신으로 추봉되고 정5품 통덕랑 예조정랑이 추증되었다. 《인물약전》

○ 9일에 수예조정랑 윤희승(尹熙勝)이 홍문관부교리 조동선의 부고에 대하여 차자를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종4품 대부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참상관을 보내 조문(弔問)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인을 지척에서 보필한 관리이고 예조에서 특별히 계청하였으므로 인정으로 보아 거절할 수 없다. 예조에서는 참하관 1인을 보내 예를 갖추도록 하라. 사망 후 품계를 올려준 사례가 대부의 반열에 올라 급서(急逝)한 전사헌부지평 유치의 1인에 불과하고, 전홍문관부교리 조동선은 지난 2일에 사직하여 물러났으므로 재직중에 병사(病死)한 것이 아닌 관계로, 자급을 더할 것을 명하기가 실로 어렵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한성부서윤 강다소(姜多笑)의 부고

◑ 강다소(姜多笑) 1985년생(男) 610.01.10-611.04.16
무신(武臣). 자(字) 백약(伯約), 호(號) 자양(孜良), 시호 장익(莊翼), 본관(本貫) 경주(慶州), 본적(本籍) 평안도(平安道), 초명(初名) 유(維). 개국610년 2월에 제5차 별시 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며, 이후 병조, 형조, 평안감영, 사헌부, 실록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관(試官)과 실록청 관직 수행으로 승진이 빨라 개국611년 정월 초7일에 종4품 장군(將軍)의 반열에 올랐다. 성품이 호탕하면서도 맡은 바 임무에 적극적이었으므로 관원들 가운데 믿고 따르는 자가 적지 않았다. 또 애향심이 남달라 본적지 발전에 크게 노력하여 이를 두고 칭송하는 소리가 있었다. 한성부서윤에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양덕현(陽德縣) 사저(私邸)에서 병사(病死)하였다. 품계는 정4품 소위장군(昭威將軍)에 이르렀다[至]. 사후 창국삼등공신(昌國三等功臣) 경원군(慶原君)에 추봉(追封)되고 정2품 자헌대부 한성부판윤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집안(輯安:集安)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인물약전》

○ 17일에 의정부사인 이휘가 한성부서윤 강다소의 사망에 대하여 차자를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전사헌부지평 유치의의 경우에 준하여 조문하고 자급을 올려줄 것이다. 조문하는 관리는 무관 정5품 이하 참상으로 한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의정부서사제 시행 1개월, 정국 안정

○ 개국611년 3월 25일에 금상 전하의 전교에 따라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시행에 들어갔다. 이호예병형공의 육조(六曹)가 의정부의 조정과 통제하에 업무를 보게 되는 의정부서사제의 시행 1개월째를 맞이해 조정 정국이 점차 안정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의정부 수장에는 경상검률, 병조정랑 등을 역임한 의정부사인 이휘(李輝)가 임명되었으며, 사인을 보좌하는 의정부 관원으로 전예조좌랑 최영(崔瑩)과 전사헌부감찰 조조(趙造)가 각각 검상 관직에 임명되었다. 지난 16일에는 추가 조치로 의정부에 유사시 정3품 당하관 이하, 종4품 대부나 장군 이상에 대한 관직사령권과 월1회의 근무일수 10일 이하에 대한 가감산 상벌권이 주어졌다. 현재 삼사와 육조 관청의 수장 현황은, 사헌부는 감찰 백형대(白亨大), 홍문관은 정자 조성국(趙成國), 이조는 정랑 이완(李浣), 호조는 산사 부지훈(夫智勳), 예조는 정랑 윤희승(尹熙勝), 병조는 정랑 신용호(辛庸浩), 형조는 정랑 이방원(李芳遠)이며, 사간원과 공조는 가동되고 있지 않다. 《관보 제25호》

○ 16일에 전교하였다.
"금일 이후로 과인이 또다시 장기간 편전에 들어 정무를 볼 수 없게 될 경우에 한해 의정부에서 정3품 당하 이하 종4품 대부나 장군 이상 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권한을 준다. 이조에서 아뢴 부재기간 10일은 지나치게 늦은 듯하므로, 만 7일 이상 과인이 정사를 돌볼 수 없을 경우에 의정부 수장(首長)의 직권으로 인사를 사령하도록 한다. 행정은 우선 교첩으로 명(命)하고, 교지는 추후 승정원에서 내주도록 한다. 아울러 근무일수 가감 10일 이하의 상벌권을 월1회 의정부에서 처결해 시행할 권한을 준다. 행정은 먼저 명령한 후, 어전에 간단히 계목을 올려 보고하는 것으로 그친다. 믿고 위임하는 것이니, 잡음이 없도록 공정하게 행사할 것이다." 하였다.

● 만 7일 이상 임금이 정사를 돌볼 수 없을 경우에 의정부로 하여금 인사권과 근무일수 가감 10일 이하의 상벌권을 부여한 것은 국왕의 부재(不在)로 인한 국정 파탄을 예방하려는 조처였다.


◎ 참상관의 대과 응시 규제

○ 4월 26일에는 관리의 과거 응시 제한에 대하여 전교하시기를, "앞으로 시행되는 대과는 과거 응시 시작일을 기준으로 최근 2개월 이상 관직에 계속 근속했던 관리에 한해서만 응시할 것을 허락한다. 또 관직 교체 중간에 무관(無官)으로 있던 간격이 7일 이하일 경우에도 합계하여 2개월 이상이면 응시를 허락하도록 하겠다. 중시 과거 또한 이에 준하여 시행할 것이다. 참하관은 현재 제도와 같이 관직 여부와는 상관없이 대과 및 중시에 응시할 수 있다." 하셨다. 관직에서 업무를 보지도 않는 관리가 과거만을 통하여 승품(陞品)하는 길을 막도록 하신 조처였다. 《장종대왕문서》

● 참상관의 대과 응시 규제는 1월에 근무일수 가감산 제도를 개편할 때 시행 여부를 하교하였으나, 임오지변 사태 때문에 미루어져 4월 26일에 이르러서야 시행되었다. 이로써 참상관이 대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2개월 이상 근속하여야 하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창사(昌史) 제14권  

임오년(2002) 5월 기사본말(壬午年 五月 紀事本末)


◎ 성균관 독립성 보장

○ 5월 초 5일에 삼사에서 합계하여 성균관 관원의 예조 본청 업무 참여를 금하도록 청하자, "금일 이후로 성균관 관원들은 성균관 본래의 직책에만 전력을 다하도록 한다. 성균관 문관 관원들은 현재 무관 관원들과 마찬가지로 상급 관청인 예조의 여러 사무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없다."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제8차 별시, 문과 문수정(文秀禎), 무과 신성룡(申星龍) 등 12인 급제
◎ 충청도 유생 정언신(鄭彦信), 제8차 별시 문과 부정 응시


○ 4월 24일부터 동월 30일까지 실시되었던 제8차 별시 과거에서는 문과에서 문수정(文秀禎) 등 7인, 무과에서 신성룡(申星龍) 등 5인의 급제자가 나왔다. 《관보 제26호》

○ 충청도 유생 정언신이 문과에 부정 응시하여 하옥 20일 및 과거 응시 3회 제한의 처분을 받았다.


◎ 강원도 간성군에 표진모(表鎭模) 효행 칭송비 건립

○ 5월 29일에 행예조정랑 조조가 강원도 효자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조정에서 장려할 만하다. 작년 12월의 이훈규, 정미경 부부 선행비에 준해 강원도 모처에 효행비를 설치하도록 하라. 효행비 설치 장소는 예조에서 확정 시행한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개국565(1956)년에 전쟁 미망인 어순덕(魚順德/102) 씨를 어머니로 섬긴 이후 46년간 정성을 다해 모신 표진모(表鎭模/72)의 효행(孝行)을 칭송함. 《표진모 효행 칭송비》


임오년(2002) 6월 기사본말(壬午年 五月 紀事本末)


◎ 전성균관사성 박심문(朴審問)의 부고

○ 6월 1일에 전성균관사성 박심문(朴審問)의 부고가 전해졌다.

◑ 박심문(朴審問) 1974년생(男) 609.09.15-611.06.01 문신(文臣). 호 청재(靑齋), 본관 밀양(密陽), 본적 함경도(咸鏡道), 초명(初名) 희웅(熙雄). 개국609년 9월에 제2차 문과 대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명된 후 사헌부, 예조, 성균관, 공신 및 가례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감찰로 재직하던 중에 함경도 벽서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행함경도검률 이하응(李河應)을 무고(誣告)한 혐의가 있어 파직되고 울진현령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여러 차례 성과가 있었다. 품성이 강개하여 생각한 바를 추진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으므로 관리들에게 일면 귀감이 되었다. 개국611년 6월 초에 나라가 도탄에 빠진 것을 한탄하며 자진(自盡)하는 것으로 생을 마쳤으며, 품계는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사후 창국원종이등공신으로 추봉되고 정3품 통정대부 예조참의가 추증되었다. 《인물약전》


◎ 제6차 소과, 진사시 박정신(朴貞信) 등 12인 입격

○ 개국611년 5월 20일부터 동월 26일까지 실시되었던 제6차 소과(小科) 과거에 총 12인의 입격자가 나왔다. 소과 장원은 진사시에 응시한 전라도 생원 박정신(朴貞信)이며, 이외에 생원시에서 한성부 유생 이초(李草)를 비롯한 3인, 진사시에서 박정신을 비롯한 7인, 병조 주관으로 실시된 훈련원시에서는 현직 관리인 강조(姜照)를 비롯한 2인의 입격자가 배출되었다. 전체 응시자는 17인으로 입격률이 7할에 달해 제5차 소과 때의 6할에 비해 1할가량 상승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관보 제26호》


◎ 공신도감을 녹훈도감(錄勳都監)으로 개칭

○ 5월 20일에 의정부사인 이휘(李輝)가 공신도감의 재운영에 대하여 계본하기를,
"공신도감은 아조(我朝)가 개국한 해인 개국609년 11월 6일 설치되어 논의를 시작한 이후로 작년 5월 7일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고 중단되었나이다. 이에 의정부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하였으니, 아조의 재개창(再開昌)에 큰 공헌을 한 관리들과 아조의 안정화에 큰 공헌을 한 관리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종묘(宗廟)에 아뢰고, 그들의 공을 높여 후세의 귀감(龜鑑)이 되게 하여야 할 것으로 사료되나이다."
하였으며, 공신도감 관원으로는 정사에 이휘 본인, 부사에 최영, 조조(趙造)를 천거(薦擧)하였다. 이에 대해 상께서 전교하시어, 공신도감의 직임을 녹훈교서(錄勳敎書)와 공신녹권(功臣錄券)을 찬하고, 공신 칭호(勳號)를 정하며, 정공신 이상 공신들의 초상을 그리고, 또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고, 공신회맹(會盟)을 주관하며, 공신으로 책봉된 자들의 가계(家系)를 밝혀 추증과 봉군(封君)을 매듭짓는 것으로 하며, 이외에 공신 명호와 포상, 원종공신의 책봉과 등급분류 여부, 원종공신의 초수 품계, 공신 책봉에 관한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의궤(儀軌)를 편찬하는 것 등으로 규정하시며, 아울러 공신도감을 녹훈도감(錄勳都監)으로 개칭하는 것에 대해 도감의 의견을 물으셨다. 《녹훈도감의궤》

○ 11일에 공신도감을 녹훈도감으로 개칭하였다.


◎ 경기도 양주목(陽州牧) 소재 광해군 묘역(墓域)의 왕릉(王陵) 승격 공사 개시
◎ 광해군 묘역 왕릉 승격 공사 완료


○ 열릉(烈陵)은 본조에서 추숭(追崇) 복위한 혜종대왕(惠宗大王), 즉 광해군(光海君)의 능호(陵號)이다. 《사조백과사전》

○ 개국611년 임오(壬午) 6월 초 1일에, 지난 2년간의 조야(朝野) 공론(公論)을 수렴하여 광해군(光海君)에 대한 복위 절차를 마련하라는 전교가 있었고, 동월 12일에 묘(墓)를 능(陵)으로 격상하는 하교가 예조(禮曹)에 내려졌다. 이에 경기감영(京畿監營)에서 공역(工役)을 주관하여 6월 20일에 능(陵)으로 승격하였다. 《혜종대왕문서》


◎ 당상관으로 3인 가자

○ 조정 역사상 90여 년 만에 당상 품계를 가진 관리 3인이 탄생하였다. 지난 6월 15일에 이조참의 최영(崔瑩)과 전행이조정랑 이완(李浣)이 통훈대부에서 당상 품계인 통정대부로 가자(加資:승진)되었으며, 중시 과거 작후인 6월 30일에는 행의정부사인 이휘(李輝)가 어모장군에서 역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으로 가자되었다. 한편, 7월 8일에는 통정대부 최영이 최초로 당상 관직인 이조참의에 제수되어 이조에 부임하였다. 관직자 현황은 4품 이상이 8인, 5품 이하 6품 이상이 16인, 7품 이하가 19인이다. 《관보 제27호》


◎ 윤봉길(尹奉吉),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추증(追贈), 충의(忠毅) 추시(追諡)

○ 왕께서는 나라와 종사에 충성한 우국지사(憂國之士)들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으셨으니, 6월에 도이(島夷)의 참혹한 횡포에 맞서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의거(義擧)를 일으킨 의사(義士) 윤봉길(尹奉吉:1908-1932)을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추증(追贈)하시고 더불어 시호를 충의(忠毅)라 하였다. 이는 시호법(諡號法)에 어지러움을 맞아 나라를 잊지 아니함[臨亂不忘國]을 충(忠)이라 하고 용감하게 행동하여 적을 무찌른 것[致果殺敵]을 의(毅)라 하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장종대왕문서》

○ 10일에 행예조정랑 겸녹훈도감부사 조조가 윤봉길 선생 추증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의사 윤봉길에게 자헌대부 좌참찬과 그에 다른 예겸을 추증하도록 한다. 정2품 자헌대부로 추증을 하게 되면, 마땅히 추시(追諡)하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니, 추증하고 추시하는 일자는 추후 시호 의정(議定)에 관한 계본을 보아 전교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23일에 사헌부지평 이방원이 윤봉길 의사 추시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아뢴대로 한다. 명일 24일에 의사 윤봉길에 대한 추증과 추시를 시행할 것이니, 예조에서는 이를 팔도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제2차 중시, 문과 강자아(姜子牙), 무과 이휘(李輝) 등 12인 급제
◎ 제7차 소과, 생원시 유성민(劉聖敏) 등 12인 입격

○ 개국611년도 전반기 중시(重試)와 제7차 소과(小科)가 실시되어 모두 24인의 급제자 및 입격자가 배출되었다. 6월 18일부터 23일까지 실시되었던 중시 과거에서는 문과 을과 급제자 강자아(姜子牙), 무과 갑과 급제자 이휘(李輝) 등 12인이 급제자가 나왔으며, 이어 25일부터 30일까지 실시되었던 소과 과거에서는 수석입격자 생원시 유성민(劉聖敏) 등 12인의 입격자가 나왔다. 《관보 제27호》


창사(昌史) 제15권  目錄

임오년(2002) 7월 기사본말(壬午年 七月 紀事本末)


◎ 공신 녹훈 업무 차질, 군신 갈등 재점화


○ 6월 8일에 의정부사인 이휘가 계하여 공신도감을 녹훈도감으로 개칭하는 것에 대해 이견(異見)이 없음을 아뢰었고, 더불어 녹훈도감의 관원을 전일에 계한 바대로 확정하기를 주청드리었다. 상께서 비답하시길,
"6월 11일 자로 공신도감을 녹훈도감으로 개칭한다. 공신 명단을 확정하고 각각의 훈공을 살펴 등급을 정하는 것은 어전에서 논의 후에 해야 할 것이니, 도감에서는 우선 포괄적인 공신 대상자 명단만을 정해 계본하도록 한다." 하시었다. 《녹훈도감의궤》 ■#

○ 6월 15일에 녹훈도감 정사 이휘가 녹훈대상자의 명단을 아뢰니 통정대부 이완을 비롯한 37인이었다. 이에 대해 상께서 비답하시길,
"아뢴 명단에 박혁거세(朴赫居世) 이름 넉 자가 누락되었으니, 함께 대상에 올려 논의해야 한다. 이외에도 누락된 자의 명단이 있을 것이다. 도감에서는 우선 이들 대상자의 간략한 경력을 정리해 계할 것이다. 본격 논의는 그 이후에 실시하기로 한다." 하시었다. 《녹훈도감의궤》 ■#

○ 6월 23일에 녹훈도감 정사 이휘가 전일 상께서 내리신 비답에 따라 녹훈대상자들의 약력을 간추려 다시금 계하였는데 그 내용이 심히 소략(素略)하였다. 이에 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본 경력 기록만으로는 인물들의 자취를 상세히 알 수 없으므로 보완할 필요를 느낀다. 의정부에서는 각종 법령이나 제도를 제정 또는 시행하는데 크게 기여한 공이 있는 자를 살펴 명단과 업적을 보고할 것이며, 삼사에서는 본조 내에서 직접 충효(忠孝)의 절의(節義)의 행동을 보인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및 어명파직자, 봉고파직자(封庫罷職者)의 명단을, 이조와 병조에서는 관직 사령과 평정, 자력(資歷) 체계를 세우고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한 자의 명단을, 예조에서는 각도 교육기관에서 크게 노력한 자와 공덕비, 정문(旌門) 등을 세우는 일에 크게 노고가 있는 자의 명단을, 형조에서는 악한 일을 행한 자를 처벌하는 업무에 크게 노력한 자와 이미 하옥된 경력이 있는 자의 명단을, 호조와 지방 관아에서는 팔도 각지를 흥성하게 하는데 일조한 백성들의 명단을 살펴 계할 것이다. 도감에서는 상기 전교에서 누락된 부분과 그간 처리된 조정 주요 사안과 결부해 특별히 업적이 있는 자의 명단을 두루 살펴 보고하도록 한다.
아뢸 때는 명단과 함께 실제 업적이나 행적, 과실 등을 살펴 기록하되, 사소한 공로나 행적은 모두 제외하도록 한다. 지나치게 세밀하거나 간략하지 않게 하는 것에도 주의한다. 더하여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은, 도감에서 아뢴 38인의 명단에 국한되지 않고 기록을 추적하며, 행동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행동한 내용의 수준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 계본은 30일까지 올리는 것으로 한다. 추가로 시일이 필요하다면 계목을 올려 윤허를 받을 것이다. 논공 개시는 그 이후에 전교를 내려 명령하도록 하겠다." 하시었다. 《녹훈도감의궤》 ■#

○ 6월 30일에 사헌부지평 이방원이 녹훈에 관하여 아뢰니 비답하기를,.
"오는 7일까지 보고 기한을 연장한다. 기한 내에 명단을 보고하지 않거나 기간 연장을 윤허 받기 위한 계목을 올리지 않은 의정부, 이조, 병조, 형조, 호조, 각급 지방 관청, 녹훈도감 수장들의 근무일수를 각 15일 감산한다. 이들 관청도 기한을 7일까지 연장하니, 그리 알라." 하였다. ■#

○ 개국611년 7월 초 1일에 윤음을 내리셨다. 이날 윤음은 삼사가 조정 관원을 규찰하거나 징계하지 않는 조정 풍토를 지적하신 것으로, 윤음에서 "어떤 일이 타인의 잘못을 밝혀 탄핵해야 하는 것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그로 말미암은 원성이 자신에게 돌아갈까를 염려해 입을 다물고 있다."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다. 《장종대왕문서》 ■#

○ 7월 2일에 행의정부사인 겸녹훈도감정사 이휘가 금번 윤음을 받잡고 차자를 올리니, 전하께서 답하시기를, “지난 24일에 하교하기로, 각종 공로자를 살펴 직접 계본으로 올리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상급 관청의 지시를 받을 것이 무엇이며, 보고 기한 유예를 그 관청으로부터 받을 것이 무엇인가. 당초 명령한 바가 분명한데, 각급 관청의 수장들이 어명에 저촉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번 일의 일차적인 책임은 위로부터의 명에 안일하게 대처하여 이행을 소홀히 한 각급 관청의 수장에게 있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명을 지체한 것을 두고 사소한 문제라 하겠는가. 작은 공로에 대한 치하는 반드시 시행해야 할 일이고, 작은 허물이나 잘못에 대한 처분은 반드시 덮어두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간 어명과 관련하여 파직된 관원의 숫자도 적지 않았고 어느 한 백성은 어명에 대응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하옥되기까지 하였다. 지나치게 세세한 것에까지 책임을 분명히 묻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나, 일단 사안이 어명에 관계된 것이므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이 탄핵과 논박만을 능사로 삼아 그러한 윤음을 하였던 것이겠는가. 다만 오늘날 조정에 징계할 것을 주청하는 기풍이 전혀 없음을 한탄하여 이른 것이다. 지난 2년간, 때로 삼사가 탄핵과 논박을 활발하게 한 적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모든 관리가 두려움에 떨며 손에서 일을 놓지는 않았다. 적절한 단속은 업무 독려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누차 말한 바와 같이 사안이 어명에 관계된 것이고, 거듭된 재발을 방지하고자 하는 고심에서 내린 처분이니, 근무일수를 15일 감한 처분이 그리 과중하다고 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

● 임금이 조정 풍토를 못마땅히 여기고 공신 대상자 명단을 정하는 일이 느슨하게 진행되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도감(都監)의 일은 실로 막중하여 신하들에게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이후에도 도감의 관리들이 임금의 꾸짖음을 듣는 일이 수차례 있었다.


◎ 피휘 논쟁

○ 6월 30일에 봉교 최사강(崔士康)이 전반기 중시에 무과에 병과 급제한 前사맹 서양갑(徐羊甲)의 시권(試券)이 휘를 범하였다고 아뢰었다. 왕께서 "예조에서는 시권에서 언급된 단어의 본래 용도와 단어 '튼튼하다'의 작은말인 '탄탄하다'의 한자어(漢字語) 여부 등을 살펴 계본으로 아뢸 것이다."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 결국, 문맥상 지적된 부분은 순우리말로서 휘를 범하지 않았다고 결론이 났으나, 어전에 관련 계본을 올린 관원들이 휘를 범하는 등의 실책을 범하게 되었고, 나라의 여러 유생이 상소를 올려 피휘의 전통을 버릴 것인지, 취할 것인지에 대하여 격렬히 논쟁하였다. 왕께서 7월 초8일에 피휘 논쟁에 대하여 전교하셨는데, "조정 공론을 물어 시비(是非)를 정한다면 한때나마 조정이 크게 분열될 소지가 있으므로, 대체로 이와 같은 민감한 사안은 군주가 직접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수밖에 없다." 하시고, "나라와 사회를 유지하는 방책 가운데 예(禮)에 근거한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때문에라도 예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휘를 범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지켜 고수해야 할 양속(良俗)이라고 할 수 있다. 예조에서는 과인의 휘와 관련한 바를 중외에 널리 알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하셨다. 더불어 격렬한 논쟁에 관여한 유생들에 대해서도 벌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치하하시며, "근래에 들어 이와 같은 논쟁을 겪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습을 또다시 기대하기 위함이다. 논의에 관계한 유성민(劉聖敏), 강자아(姜子牙), 최사강, 서양갑의 근무 일수를 15일 가산하고, 정재안(鄭宰安)의 근무 일수를 5일 가산한다. 유생 이동진(李東珍)에게는 특지(特旨)를 내려 홍문관 또는 예문관의 관직을 제수하
고자 하니, 이조와 예조에서는 마땅한 품계와 관직을 정해 아뢸 것이다." 하셨다. 《장종대왕문서》 ■#


◎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 한성부에 죄책비(罪責碑) 건립

○ 16일에는 개국514년(을사:1905)에 신하된 자로 감히 임금을 능멸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백성과 종사를 저 간악한 도이들과 함께 도적질에 앞장선 이완용(李完用:1858-1926), 박제순(朴齊純:1858-1916), 이근택(李根澤:1865-1919), 이지용(李址鎔:1870-1928), 권중현(權重顯:1854-1934) 등 다섯 역신(逆臣)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셨다. 개국610년 12월에 유학 김병학(金炳學)이 올린 상소에 따라 논죄를 거쳐 집행하신 것으로, 그들의 죄상을 따져 황주(荒紂) 황민(荒愍), 황여(荒戾), 황양(荒煬), 황원(荒愿)의 악시(惡諡)를 각각 내리는 동시에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셨다. 또 봉교 최사강이 짓고 정랑 조조(趙造)가 개수한 '을사오적신죄책비문(乙巳五賦臣罪責碑文)'을 비(碑)에 새겨 한성부에 세우셨다. 저들의 간악한 흉계에 대한 역사의 정당한 심판이었으므로 온 백성이 통쾌히 여겼다. 《장종대왕문서》

○ 16일에 을사오적신의 악시(惡諡)를 정하였다. 이완용은 시호를 황주(荒紂), 이근택은 시호를 황여(荒戾), 이지용은 시호를 황양(荒煬), 박제순은 시호를 황민(荒愍), 권중현은 시호를 황원(荒愿)이라 하였다.


◎ 제7차 대과, 문과 이동진(李東珍), 무과 신성룡(申星龍) 등 9인 급제

○ 7월 중순에 제7차 대과(大科)가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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