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서양갑
작성일 개국618(2009)년 7월 27일 (월) 14:39  [미시(未時)]
문서분류 동백서원
ㆍ추천: 0  ㆍ열람: 168      
[원장] 경헌공 유치의 행장
수충승지광운창국공신 행봉정대부사헌부지평 증자헌대부형조판서영광군 유치의 행장
守忠承志廣運昌國功臣 行奉正大夫司憲府持平 贈資憲大夫刑曹判書靈光君 柳治義 行狀

공(公)의 휘(諱)는 치의(治義)요, 호(號)는 수양(垂楊)이니, 영광(靈光) 사람이다. 공의 초명(初名)은 자광(子光)으로, 개국589년(을축:1985)에 출생하여, 개국609(2000)년 12월 6일에 본조에 입조(入朝)하였다. 공은 처음에 경상도에 본적을 두었으나, 공과 어려서부터 교유하였던 벗인 정여립(鄭汝立)과 이하응(李河應)의 청을 듣고 입조한지 3일 뒤에 함경도로 이주하였다. 마침 이때에 제4차 별시(別試) 과거가 있어 공이 응시하엿는데 공은 문과에서 병과(丙科) 제2인으로 급제하여 종사랑(從仕郞)에 봉작되었다. 마침 그의 벗인 정여립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함경도에 괴문서(怪文書)가 나도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괴문서가 모임 대동계(大同契)의 회장 정여립이 쓴 것으로 밝혀지면서, 대동계의 일원이었던 공도 이 사건에 연루되게 되었다. 정여립은 함경도의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조정의 대권(大權)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강원도 백성 유강일(柳剛一)의 고변으로 정황이 밝혀지면서 국청(鞫廳)이 열리게 되었다. 평소 공은 정여립과 매우 두터운 친분을 과시했었으므로 이 사건에 깊게 연루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은 괴문서 사건과는 관련이 없었고 증좌도 없었는데, 여러 정황이 불리해지자 정여립이 국청이 진행되는 동안 자결(自決)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공은 역모에 연루된 혐의를 벗게 되었다. 하지만 공은 벗을 잃고 국청이 진행된 2개월동안 운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으므로 이 일로 큰 상심을 얻게 되었다.

공은 함경도의 아전(衙前)으로 지내며 경험을 쌓다가 국청이 종료되어 혐의를 벗게된 개국610(2001)년 2월에 형조율학훈도로 부임하니, 공의 첫 관직이었다. 동년 3월에 공은 행함경도검률을 겸하였고, 동년 7월에 형조명률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처음으로 경관직의 수장(首長)을 맡게되었다. 공이 율학훈도로 부임할 당시 형조의 수장은 명률 김병호(金炳昊)였는데 그 역시 초임(初任)이었으므로 형조는 초임관 2명에게 아무런 대책없이 맡겨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병호는 유능한 관원이었으므로 밀린 형조의 여러 업무를 능숙히 처리하였고, 공은 김 명률을 보필하면서 형조의 업무를 익혀나갔다. 이로써 창국 초기에 자리를 잡지 못했던 형조가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공이 형조의 수장이 되고 참하관(參下官) 몇 명이 충원되면서, 공은 활발히 업무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수개월간 형조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은 수사논죄절목의 양형(量刑) 기준을 정하였고, 형조기사(刑曹記事)를 작성하여 그가 형조에 부임한 기간동안의 세세한 업무까지 기록을 남겼다.

동년 9월 공은 홍문관수찬으로 체직하고, 11월에 실록청낭청을 겸하면서 4권 분량의 실록을 찬하는데 참여하였다. 11월 6일에 공은 초명인 자광을 버리고 치의로 개명하였으며, 개국611(2002)년 01월 07일에 공은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어 청요직을 두루 거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 열렸던 허균의 복권에 대한 빈청 논의에서 병조정랑 이휘(李輝)와 격렬한 언쟁을 벌인 이후로 순간의 분기(憤氣)를 조절하지 못하고 동월 17일에 갑작스럽게 자결을 하여 조야의 안타까움을 사니, 함경도의 모처에 마련된 공의 빈소에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공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애초에 순조롭지 못한 관운(官運)을 타고났다. 하지만 소과 3시에 입격하고 대과에 두루 급제하여 승진이 빨랐으며, 유능한 상관으로부터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스스로 훌륭한 수장으로 거듭났으니, 삼사(三司)와 실록청을 거치며 주어진 업무를 능히 처리해내며 상하의 신임을 얻었다. 공은 일찍이 아전으로 시작하여 함경의 검률를 지냈고, 지역의 강학(講學)을 주도하려 하였으므로 이북 지역에서의 명망이 높았다. 또한 공은 형률(刑律)을 다스리고 처리하는데 큰 재능을 보여 여러 민사사건을 공정히 처리하였으므로 형관(刑官)으로서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후 공은 그간에 세운 공을 인정 받아 개국612(2003)년 7월에 수충승지광운창국공신(守忠承志廣運昌國功臣)으로 책봉되니, 공의 가문과 함경 지역의 큰 광영(光榮)이 되었다.

나는 공과 동년배(同年輩)요 가까운 벗이라, 곁에서 지켜본 공의 덕행을 기록하니 삼가 이것으로 기록을 남겨 공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주(註)] 개국612(2003)년 10월 9일에 '경헌(敬憲)'으로 추시(追諡)된 증자헌대부형조판서 행봉정대부사헌부지평 영광군 유치의 선생의 행장이다. 시호법(諡號法)에, 훌륭하게 법을 집행함[令善典法]을 '경(敬)'이라 하고, 널리 남에게 들어 능한 것이 많음[博聞多能]을 '헌(憲)'이라 하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개국618(2009)년 7월 27일에 가정대부 서양갑(徐羊甲)이 공의 행장을 찬하였다.
http://www.1392.org/bbs?wonwu:16 게시물 링크 (클릭) 게시물 주소 복사하기
답글 : 제한 (접속하십시오) 서찰(메일) 수정/삭제 : 제한 (접속하십시오)     윗글 밑글 목록 쓰기
  | 비공개 설정 사조 백과사전 맞춤법 문법 검사기 0
2000
저장(입력)
번호 분류  문서 제목  이름 작성일 열람
42 동백 [원장] 동백서원 사우 수양사 배향록 서양갑 617/11/27-00:35 279
41 동백 [원장] 배향인 행장록 서양갑 618/01/03-21:57 254
40 동백 [황해감영] <차첩> 동백서원 부원장 차정 [1] 박지운 617/12/24-00:32 238
39 동백 [원이] 배향인 설 차례 [5] 손오공 620/02/03-02:10 232
38 동백 [원장] 동백서원 사우 수양사 배향록 <618.08.16> 서양갑 618/08/16-11:18 225
37 동백 [강원감영] <공문> 동백서원 장익공 위패 출향 관련 [1] 이익수 618/08/10-09:27 218
36 동백 [원장] 배향인 자력 서양갑 619/02/10-13:23 209
35 동백 [원장] 배향인 창국공신교서 서양갑 618/07/17-17:34 192
34 동백 [원장] 배향인 인물략전 서양갑 618/07/17-17:23 183
33 동백 [백성] <분향> 삼가 분향합니다. 손오공 617/12/07-16:20 182
32 동백 [원장] 경헌공 추모시 - 代詩 서양갑 617/12/21-14:01 177
31 동백 [원장] 경헌공 유치의 행장 서양갑 618/07/27-14:39 168
목록다음쓰기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