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86
대전 7
절목 12
사목 1
등록 3
지침 16
방목 6
편람 17
기록 9
역사 0
문집 6
예비 0
폐기 8

서고
안내 - 사판 - 약사 - 약전 - 시법 - 서각 - 문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개국617(2008)년 8월 28일 (목) 00:50  [자시(子時):삼경(三更)]
문서분류 기록
설명 장종대왕 행장 시책문 지문
구분 보존
저작 시호도감
ㆍ추천: 0  ㆍ열람: 6078      
장종대왕문서(章宗大王文書)







장종대왕 행장
章宗大王 行狀

왕(王)의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자산(子珊), 호(號)는 소명(昭明)이다. 호는《시경(詩經)》대아(大雅)편 기취(旣醉)의 '군자는 만년토록 밝은 빛을 더하리라[君子萬年 介爾昭明]'에서 취하신 것이다. 개국553년(갑신:1945) 음력 5월 초10일에 탄강(誕降)하셨으니, 우리 사왕(嗣王) 전하의 동모형(同母兄)이시다.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왕업(王業)을 이루신 지 519년째 되던 융희4년(경술:1910)에 이르러 흉악한 왜적(倭敵)들이 그간의 은혜를 저버리고 국통(國統)을 침해하니, 아름다운 조선(朝鮮)의 기업(基業)이 끊어지는 비극(悲劇)을 맞이하였고,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져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후 국난(國難)이 해소되어 민국정부(民國政府)가 수립되었지만, 조선의 국운(國運)이 끊어진 지 어언 90여 년이라. 여전히 천하는 어지러운 가운데 우리 왕께서 불현듯 나서시어 다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반석(磐石) 위에 올려놓으실 것을 결심하셨는데, 이때가 개국609년(경진:2000) 8월 15일이었다. 왕께서 친히 종묘에 나아가 열성조(列聖朝)께 고유(告諭)하시기를, "나라의 기강과 법령을 바로 세우고, 예(禮)에 따라 일을 처결하여 한 치도 그릇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몸소 근검절약(勤儉節約)하고, 상벌(賞罰)은 공평하게 시행할 것이며, 언로(言路)를 자유롭게 열어 언제나 백성의 소리를 듣겠습니다. 이를 종묘에 고하오니, 조종(祖宗)의 영령께서는 노력하는 바가 성취되어 나라가 흥성(興盛)할 수 있도록 복(福)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셨다. 왕께서 조선의 재건(再建)을 선포하시니, 백성 가운데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왕께서는 종사(宗社)를 공경히 받드신 후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연호(年號)로 정하시어 우리의 독자적인 연호 표기법을 확보하셨다.

나라를 이끌어감에는 반드시 인재(人才)가 필요하니, 왕께서는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종묘에 고유하신 직후 대과(大科)를 시행하여 유학(幼學) 박혁거세(朴赫居世) 등 6인을 등용(登用)하셨다. 동월 19일에 승정원에 관보(官報) 발행을 전교(傳敎)하시고, 23일에 공문서 양식[公文書式]을 제정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셨다. 이어 관직 진출 등에서의 성차별(性別差)을 완전히 철폐하시고 출생지, 학력에 대한 차등 또한 아울러 폐지하셨다. 또 유학(儒學)을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되, 서학(西學)을 널리 수용할 뜻을 천명(闡明)하셨다.

동월 26일에 면학(勉學)을 장려(奬勵)하는 교서를 내리셨는데, 이는 대과 시행 후에 왕께서 널리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일이 우선 시급한 일임을 알고 계셨던 때문이었다. 교서에서 말씀하시기를, "배움에 시기를 놓치지 않고 힘쓰는 선비들의 기상은 나라의 기틀이다. 고을마다 서당(書堂)을 설치하고 도서를 간행하여 면학의 기풍을 조성토록 하라." 하셨다. 동월 28일에 주부 박혁거세가 차자(箚子)하여 한성부에 서당이 개설되었음을 아뢰면서, 아직 서당에 이름이 없다는 사실과 과거 조정에서 서원(書院)에 편액(扁額)을 하사한 전례(前例)를 들어 그 고사(古事)에 따라 사액(賜額)을 청하니, 이에 한성부의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키신 후 '바위도 맑게 하는 것처럼 선비의 기상을 다지라.'라는 뜻에서 '청암서원(淸巖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편액을 내리셨다. 서원의 사주(祀主)를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1905)으로 정하셨으니, 이는 충절을 높이 기리자는 의미라고 하교(下敎)하셨다.

동월 29일, 사록 서태후(徐太后)가 차자하여 국초(國初)의《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국법(國法)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비답(批答)하시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또한 반포된 지 수백 년이 흘러 도중에 첨부되고 수정된 곳을 헤아릴 수 없으니, 그 해석이 제각각이라 자세하게 알고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시속(時俗)에 맞는 새로운 법을 만들고자 하니, 각 관청에서는 이를 추진토록 하라." 하셨다.

9월 초3일에 호조로 하여금 호패(號牌)를 발급하도록 명하시어, 동년 10월부터는 호적신고 후 호패를 가진 백성만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정하셨는데, 이로써 오늘날까지 무릇 본조의 백성이라면 모두 호패를 가지고 있어 신원(身元)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다. 호패에 관한 규정에 미숙하여 간혹 실수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제도를 간결하게 하여 뭇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동월 초4일에 윤음(綸音)을 내려 추석제(秋夕祭)를 명하시고 추석 기간에 조정 업무를 중지하셨으니, 이후 매년 설날과 추석 기간에 조정 업무를 잠시 중단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동월 초6일에 차대(次對)에서 전교하여 '한성부(漢城府)'를 '한성부(韓城府)'로, '한강(漢江)'을 '한강(韓江)'으로 개칭(改稱)하셨으니, 한성부를 도읍지로 정한 지 약 600년만의 변화였다. 민국에서 서울의 중국어(中國語) 표기를 '한청[漢城]'에서 '서우얼[首爾]'로 확정한 것이 개국614년(을유:2005) 정월이므로, 이보다 4년 3개월 앞선 선명(先明)의 조치였다. 동월 12일에 유학 허균(許筠)이 상소(上疏)하여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장릉(莊陵)과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사릉(思陵) 합장(合葬)을 청하자 조정 논의를 거친 후, 다음 달 초7일에 장릉을 이장(移葬)하여 사릉에 합장한 후 사릉을 장릉으로 개칭할 것을 명하셨다. 전교에 즈음하여 '어제장릉표석음기(御製莊陵表石陰記)'를 내리셨다.

동월 16일에 유학 최영(崔瑩)이 광해군(光海君)의 복위(復位)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왕께서 만백성을 상대로 의견을 모으라고 명하셨다. 다음날 조회(朝會)에서 제신(諸臣)에게 이르시기를, "광해군 복위 여부와 관련된 문제는 찬반(贊反) 다수결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명분(名分)의 있고 없음에 따라 결론을 낼 것이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글을 올려 논의를 진행하기 바란다." 하시고, "매우 신중한 사안이므로, 지금 과인의 뜻을 밝히지 않을뿐더러 논의 기간을 명확히 설정하지도 않겠다. 과인은 많은 신하와 백성이 참여할 것을 바란다. 그리하여야 공의(公議)가 수렴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셨다. 이로부터 장장 2년에 걸쳐 조정과 민간에서 상소와 차자 60여 건, 빈청(賓廳) 논의 110여 건 등의 의견 수렴과 논의를 거듭한 끝에 조야(朝野)의 공론을 하나로 결집하여, 마침내 개국611년(임오:2002) 11월 15일 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있던 광해군을 당당한 왕으로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혜종(惠宗)', 시호(諡號)를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이라 하고 정비(正妃) 유씨(柳氏)를 '혜장왕후(惠章王后)'로 함께 높였다. 동년 12월 초2일에 왕께서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친히 납시어 혜종대왕의 신위(神位)를 공손히 봉안(奉安)하셨다.

광해군 복위에 대한 논의를 명하신 날에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분명히 밝히시고 아울러 기방(妓房) 출입 금지를 명하는 전교를 내리셨는데, 이러한 전교가 팔도에 분명하게 공포되지 못하고 국가의 사법(司法) 제도가 미흡한 상태에서 기방 출입을 자랑한 백성이 있게 되자 동년 12월에 담당 관리의 실수를 지적하고 죄인의 형벌 집행을 1개월간 미루는 선처를 베풀어 그 피해를 최소화하셨다. 동월 28일에는 형조에서 민국의 야구 국가대표단이 도박한 것을 논죄(論罪)한 후 계사(啓辭)를 올리자 이를 재가(裁可)하여 하옥형(下獄刑)에 처하셨으니, 이들이 창국(昌國) 이후에 처음으로 형정(刑政)을 받게 된 죄인들이었다. 이후 형조, 한성부, 사헌부, 감영 등에서 왕의 치세 기간에 논죄하여 처분한 것이 60여 건으로, 연평균 약 20건의 유죄(有罪) 판결이 진행되었다.

10월 초3일에 오도암행어사(五道暗行御史) 박희웅(朴熙雄)이 복명(復命)하였다. 전월 28일에 창국 이후 처음으로 차송(差送)하신 암행어사로서, 어사에 의해 충청검률 황담사(黃澹沙)가 봉고파직(封庫罷職)되었다. 이후에도 17원(員)을 어사로 파견하시어 팔도 지방관을 규찰케 하는 것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셨다. 동월 4일에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하는 전교를 내리셨는데, 이는 전월 29일자 급제(及第) 묘청(妙淸)의 상소에 따라 예조의 의견을 물어 결단하신 것이다. 또 이날 한성부 경내에 별도로 상설 과거시장(科擧試場)을 마련하셨다. 예조와 병조 청사에서 과거를 시행하여 응시 유생(儒生)과 시관(試官)들에게 불편이 작지 않았기 때문에 조치하신 것이다. 동월 6일에 서태후를 정형(正刑)에 처하셨다. 서태후는 창국 초년부터 어전(御前) 문란, 어명(御命) 불이행, 무고(誣告) 등을 일삼아 수차례 징계를 받았으나, 반성의 기미가 없어 치죄(治罪)를 청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왕께서는 사악함과 부정함을 경계하고 멀리하시어 서태후를 과감히 버리셨다. 동월 19일에 윤음을 내리셔서 민국 정부의 일을 사례(事例)로 들어 온정주의(溫情主義)와 정실주의(情實主義)를 경계하셨다. 이는 왕께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고 특별히 애쓰신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동월 21일에 예조좌랑 허준(許浚)이 성균관(成均館) 설치에 대해 논의한 결과를 아뢰자, 왕께서 크게 관심을 보이시고 세세한 부분까지 친히 언급하신 후 이를 윤허(允許)하시니, 이듬해 정월 초3일 성균관이 복설되었다. 동년 8월에 '교육기관개설절목(敎育機關開設節目)'과 '성균관설치절목(成均館設置節目)'을 반포하여 시행하시니, 마침내 관학(官學)이 부흥하여 학풍의 진작과 면학의 장려를 통해 인재를 키워 나라의 큰 재산으로 삼고자 하신 어의(御意)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창국 초년부터 국모(國母) 책봉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기 때문에 31일에 가례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여 예조좌랑 이이(李珥)를 수장으로 삼았다. 12월에 5인의 처자(處子)가 초간택(初揀擇)에 단자(單子)를 제출하여 1인이 재간택(再揀擇)을 거쳤으나 그 처자가 의사를 철회하자 이듬해 3월 22일에 의정부와 홍문관의 합계(合啓)에 따라 도감을 폐하셨다.

11월 초1일에 문무백관(文武百官)에게 전교하시어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셨다. 이에 한성참군 김도민(金道民)의 천거로 익월 초5일에 본부병방(本府兵房) 노사신(盧思愼)이 등용되었으니, 음관(蔭官) 출사(出仕)의 시작이 되었다. 또 의정부의 계본에 따라 '승품체직절목(陞品遞職節目)'과 '인사평정절목(人事評定節目)'을 제정하여 동월 초8일에 반포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문무관 인사 행정의 기틀이 마련되어 체계적인 직제(職制) 운영이 가능해졌다. 동월 초2일에는 이조와 병조에 "인재가 없으면 뽑지 않을 것이니, 시관들은 세심하고도 단호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전교하시어 동월 16일에 급제방(及第榜)이 나온 제3차 별시(別試)부터는 시제(試題)와 채점 점수를 엄격하게 하셨다. 이전 과거와 난이도에서 현격한 차별을 보인 것은 이러한 전교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전교가 금석(金石)처럼 이어져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 시행의 규범이 되었다. 20일에 시관 직책을 수행하지 않은 관원을 파직하였는데, 이 역시 하나의 전례로 굳어졌다. 창국에 이바지한 신하들을 포상하여 공신(功臣)으로 책봉하자는 여론도 창국 초년부터 있었다. 이에 삼사(三司)의 논의를 거쳐 동월 초5일에 공신도감(功臣都監)를 설치한 후, 사록 최영을 도감 정사(正使)로 삼으셨다. 개국611년 6월에 녹훈도감(錄勳都監)으로 개칭되는 등의 변화를 거치면서 공신 책봉에 관한 의견 수렴과 훈공(勳功) 평가, 녹훈(錄勳) 논의를 계속하였다.

동월에 함경도 백성 허모(許某)가 함경검률 이하응(李河應)에게 행정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는 벽서(壁書) 사건이 발생하여 동월 초6일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였다. 형조로 하여금 논죄케 하였는데, 사형 죄인[死罪人] 서태후의 외종(外從) 허모가 일방적으로 사칭 내용을 유포한 사건으로 정상(情狀)이 드러났다. 이어서 함경도에서 정여립(鄭汝立)이라는 자가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하여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이어졌다. 정여립은 함경도 벽서 사건의 허모와 동일인이었는데, 인척(姻戚)인 서태후가 사형 처분을 받은 것에 불복(不服)하여, 주위 사람들을 선동해 결사를 조직한 후 조정에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러나 12월 17일에 강원도 유학 유강일(柳剛一)의 고변으로 추포되어 국청(鞫廳)에서 국문(鞠問)을 받던 도중, 죄상이 낱낱이 드러나자 개국610년(신사:2001) 정월 초8일에 옥사(獄舍)에서 자결하였다. 역모 고변서와 정여립의 공술서(供述書)에 노사신(盧思愼), 유자광(柳子光), 이하응 등의 이름이 있었으나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왕께서 형률(刑律) 적용하기를 추상같이 하셨기에 다시는 정여립 같은 자들이 모역(謀逆)을 도모하지 못했다.

동월 15일에는 교육기관에서의 학문 교수(敎授)에 대해 자세히 전교하시어 훈장(訓長)의 일방적인 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시고 교육 내용 또한 충실하게 준비하라고 거듭 당부하셨다. 말씀하시기를, "만백성이 바쁘게 지내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곧 본조를 성세로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한시라도 경계를 늦춘다면 퇴보하는 것은 과인이나 백성이나 모두 같다." 하시면서 문교(文敎)의 기강을 세우고자 하셨다. 또 12월 초1일에 윤음을 내려, "근래에 민국(民國)의 학풍이 예전과 같지 않아 서책의 내용만을 외워 요행히 출세(出世)하려는 것이 풍속이라 하니, 그들 가운데 혹 옛 성현(聖賢)의 글을 부지런히 읽고 장대한 뜻을 세워 자신의 생각을 말하여 논하는 자가 있으면 도리어 부모와 선생들이 안타까워하고, 친우(親友)들이 비웃는 것이 일반(一般)이라 한다. 이는 학문을 권장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좋은 제도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8월에 내린 면학 교서에 이어 왕의 교육에 관한 간절한 마음과 평소 품으신 생각을 가늠할 수 있다.

11월에 사헌부의 조정 관청 전반에 대한 대감찰(大監察)이 처음 시행되어 그 결과가 동월 17일에 어전에 보고되었다. 이 감찰로 말미암아 오래도록 활동하지 않은 유품자(有品者)를 삭직(削職)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성실히 근무하는 관원들과 그렇지 않은 관원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있지 않더라도 향리에서 활동하는 산관(散官)들은 그대로 명예를 보전하게 하였으니, "관직에 진출하는 것만이 어찌 본조에서의 활동에 유일한 길이겠는가."라고 하신 왕의 뜻이 이날의 전교로 발현되었다. 동월 18일에 명종(明宗) 시대의 인물 조식(曺植:1501-1572)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는 상소가 있었는데, 비답하시기를, "문묘에 종향(從享)하는 일은 매우 신중한 사안이라 예로부터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예법에 따랐다. 광해조(光海朝)에 조식의 문묘 종향에 대한 유생들의 상소가 여럿 있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은 그 사안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하시며 사안의 중대함을 놓치지 않으셨다. 여러 인물에 대한 문묘 배향, 신원(伸寃), 복관(復官), 복권(復權), 복위, 추존(追尊)을 청하는 상소가 이후에도 자주 있었으나 조정 공론에 의하지 않고는 그 청을 가납하지 않으신 것은 이처럼 사체(事體)를 고려할 때 당대(當代)의 처분을 쉽게 고칠 수 없기 때문이셨다.

12월 초3일에 사헌부의 차자에 대해 전교하시기를, "예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이 가운데 춘추(春秋)에 길이 전할 명군(明君)이 되려 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천하가 안정되어 태평성세(太平聖歲)를 이룬 경우가 지극히 적으니, 이는 어떤 이유에서이겠는가. 군주가 신하들의 직간(直諫)을 듣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 하시고, 11일에 거듭 전교하여 "과인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면 그와 관련하여 논의에 참여한 관리들의 반응이 있어야 할 것인데, 지적을 계속하여도 묵묵부답하며 전교를 듣고는 물러가니 과인은 어찌해야 하겠는가. 어전(御前)은 군신 간의 논의를 위한 장(場)인데, 지금은 단지 윤허만을 위한 재가(裁可) 공간으로 변질하였으니, 참으로 한심할 뿐이다. 상하간의 뜻이 통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관리들 자신의 생각들에 소신이 없어서인가."라고 하시며, 군신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시고 조정 공의를 거쳐 국사를 재결(裁決)하는 어려움과 조정에 간언(諫言)하는 신하가 적은 것을 내내 아쉬워하셨다.

동월 5일에 홍천현감 이순신(李舜臣)이 무관 임용 관청 확대를 청하자 공론에 부쳐 16일에 의정부 당하관과 의금부로 무관 임명 범위를 확대하셨다. 그리하여 무관들이 원하던 바가 일부나마 해소되게 되었으며, 이듬해 8월 24일에 조정 여론을 다시 수렴하여 승정원 당하관과 사간원으로, 금상 전하 치세인 개국613년(갑신:2004) 6월 17일에 호조, 공조로 무관의 진출 범위가 추가 확대되었다. 동월 6일에 사정전(思政殿)에서 전교하시기를 "민본(民本)은 정치의 근본인데, 정치를 민본에 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정치를 행하는 자가 백성 위해 군림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백성을 위주로 정사를 펼친다는 '민본정치(民本政治)'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시며, 퇴궐이나 퇴청 후에 사사롭게 작성하는 문서에 직함(職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일반 백성의 활동에 혹여 방해될까 하는 마음에서 내리신 전교로서, 이날의 조치는 후에 관복(官服) 규찰로도 이어져 퇴청 후에 관원들이 공복(公服)을 벗고 평복(平服)을 입도록 하는 규정으로 계승되었다.

화폐제(貨幣制) 도입에 대한 상소와 청원이 계속되자 12일에 의정부와 호조 주관으로 조야의 공론을 수렴하도록 하셨다. 논의 결과에 따라 당시에는 화폐 제도가 도입되지는 않았으나, 개국613년에 재산(財産) 제도가 마련되는 단서가 되었다. 동월 18일에 전교를 내리시어, 사헌부의 소임이 백관(百官)을 규찰하는 것이므로 그 직임의 막중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본래 작은 허물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헌부(憲府)의 직책이다." 하셨으니, 이날 전교로 파직 등의 이력이 있는 자는 양사(兩司) 관원이 될 수 없는 규례가 마련되었다. 훗날 "양사의 관리는 품성이 강직하고 청렴하며 한 치의 허물도 없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신 뜻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월 30일에는 "인재를 천거한다는 것은 반드시 왕좌지재(王佐之材)를 거두어 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시며, "한 가지 재주라도 출중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천거하여 조정을 위해 재능을 발휘토록 하는 것이 옳다."라는 내용의 전교를 내리시어 내외에 인재 천거를 독려하셨다.

개국610(신사:2001)년 정월 초2일에 성균유생 황의선(黃義善)이 교육 제도에 대해 상소하고 유학 유병호(兪炳豪)가 읍내서당(邑內書堂) 개설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리자 왕께서 예조로 하여금 성균관, 서원, 학당 등의 학제(學制) 개편을 논의하게 하셨다. 그에 따라 동년 6월 15일에 읍내서당이 출범하여 훈장 백우현(白宇鉉)의 강의를 필두로 백성의 활동 증진에 이바지하는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날 호조의 계청과 재가에 의해 혼사(婚事) 장려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져 이해에 혼인하는 배필(配匹)들이 팔도에 적지 않았다.

대과와 별도로 소과(小科)를 시행하자는 의견이 줄곧 제기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정 논의에 따라 소과 시행 과목, 응시 자격, 주무 관청, 시행 절차 등에 대한 규정을 마련되었는데, 매년 1월, 4월, 7월, 10월에 대과를 시행하고 대과가 열리지 않는 달에는 소과를 시행하는 제도가 정월 15일에 잠정 결정되었으며, 2월 16일에 생원시, 진사시에 대비하여 훈련원시(訓練院試)를 두고 입격자(入格者) 호칭을 '장재(將才)'로 하는 전교가 내려졌다. 2월 26일부터 3월 초3일까지 제1차 소과가 처음으로 설행(設行)되어 진사 안정복(安鼎福) 등 18인을 입격시켰다.

정월 20일에 봉사 노사신(盧思愼)이 차자하여 호패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백성에 대한 관청의 처벌에 대해 말하자, 왕께서 전교하여 지방관에게 관속(官屬)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않은 책임을 묻고 관속 임용에 신중할 것을 말씀하셨다. 또 호적신고 후 15일이 지나지 않은 백성은 큰 사건에 저촉되지 않는 한 처벌하지 않는 유예 기간을 두셨다. 읍내서당 개설을 윤허하신 것과 더불어 일반 백성의 활동 장려를 염두에 두신 뜻에서 나온 전교라고 할 수 있다.

동월 24일에 연두교서를 내리셨다. 어제신사연두교서(御製辛巳年頭敎書)에서 이르시기를, "나라의 명예를 드높이거나 부모에게 효행(孝行)이 지극한 것은 조정에서 권장하여야 할 덕목이다. 각도 지방관들은 담당 고을에서 그러한 자격을 갖춘 자가 있다면 조정에 아뢰어 그 아름다운 덕행(德行)이 만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고, 인재 양성, 법령 준수, 백성 사이의 화합, 어진 정치의 달성 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이 교서에 따라 동년 3월에 의사자(義死者) 이수현(李秀賢)의 정문(旌門)을 동래현(東萊縣)에 세우는 등, 의롭고 올바른 일을 행한 이들의 의기(義氣)를 널리 기리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행한 선행(善行)들은 모든 백성이 두루 본받고 장려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정(正)을 드높이시고 사(邪)를 멀리 배척하시는 멸사입정(滅邪立正)의 뜻이 한결같으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작은 일이 있어도 그것을 명분과 기회로 사직(辭職)하는 관원들이 적지 않았다. 한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지난 세기 초에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하자 절사(節死)하는 신하들이 잇따라 나오니,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께서 이를 두고 '살아서 나를 돕는 것이 충(忠)이다'라고 하셨는데, 이제야 그 한탄하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어찌하여 사직하고 낙향하는 것이 일반(一般)이 되었는가." 하시면서 관리들의 진퇴(進退)에 관해 언급하셨다. 감찰 김도민이 사직차(辭職箚)를 올린 후 재가 없이 낙향하였다가 다시 상경하자 품계를 1등 강등하고 불서용(不敍用)에 처하는 징계를 단행하시면서, "선비가 뜻한 바의 소신에 따라 몸과 마음을 움직여 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도리이겠으나, 어찌 그것이 도를 넘어서까지 용납되기까지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하셨다. 10여 일 후에 처분을 회수하셨으나 동년 7월 14일에 조정 관원들에게 내리신 윤음과 더불어 당대의 상황과 고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라고 하겠다. 윤음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바를 살펴 물러날 때를 알았다 하더라도 부득불 그것을 몸으로 결행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일신(一身)의 안위만을 위하여 물러나려고 결정하였을 때가 그러하며, 주위의 비난이나 불신을 우선 피하기 위해 물러나려고 결정하였을 때가 그러하며, 막중한 소임과 상하(上下)의 기대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때가 그러하다." 하신 것이 왕의 심중을 말해준다.

정월 22일부터 28일까지 제5차 별시와 개국610년 전반기 중시(重試)를 병행하였는데, 과거 부정이 크게 일어나 나라 안팎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2월 초5일에 왕께서 홀연히 개탄하시고 해당 관원과 연루자들을 엄벌할 것을 명하시며 전교하시기를, "과거에 급제하여 품계를 받거나 품계가 올라 조정 관직에서 일할 자들이 그 시작에서부터 속임수를 쓰게 된다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앞날을 기약할 수가 없다." 하시고, "시관은 물론이고 예조와 병조의 관리들은 과거가 이미 끝났다고 하더라도 시권(試券)을 부지런히 살펴 부정한 사실을 밝혀내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경계하셨다. 그럼에도 일문(一門)의 친분 있는 자들이 서로 상소하여 구원하고 두둔하기에 바빴으며, 그 탓에 부정 응시자에 대한 논죄가 지체되고 형량이 느슨해질 기미가 보였다. 전교하시기를, "시험에서 간사한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벽촌(僻村)의 어린아이들도 모두 아는 사실인데, 그것이 법조문에 없다고 하여 논죄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애초에 적발되지 않았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간사한 행위가 만천하에 알려졌는데도 이를 논죄하고 징계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모두 법령을 희롱하게 될 것이며, 부정을 하여 적발된 자와 운 좋게 적발되지 않은 자 모두가 스스로 방자해질 것이니, 징계하는 바가 없으면 곧 나라의 기강이 함께 무너지게 될 것이다. 과거 부정은 분명한 죄(罪)이니, 그 죗값을 치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신 후, "사적(私的)으로 인연을 맺은 자들이 그들을 잘 인도하지 못한 것을 두고 이번의 과거 부정이 초래된 원인의 하나라 하나, 인연이 있는 자들이 함께 나서서 죄를 사하거나 가볍게 해 줄 것을 청원하는 것 또한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폐단(弊端)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시며 엄벌을 촉구하셨으니, 이것은 무릇 사악함과 부정함을 경계하고 선한 것을 가까이 여기시는 왕의 결연한 의지와 뛰어난 결단력을 보여주시는 것이셨다. 왕의 이러한 의지는 뭇 선비들은 물론 만백성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2월 18일에 홍문관박사 유병호(兪炳豪)가 차자한 내용 가운데 거짓 사례를 들어 변론한 내용이 있었으므로 파직을 명하시면서 이르시기를, "임금을 속이는 것은 신하된 자로 더할 수 없는 큰 죄인데, 이것을 두고 벌을 주지 않는다면 장차 군신간의 의리(義理)와 믿음[信]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시어 그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내외로 신칙(申飭)하셨다.

동월 22일에 법전 《창국대전(昌國大典)》을 반포하셨다. 이 대전(大典)의 완성은 본조의 체계가 확실히 잡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전을 천하에 반포하시며 내리신 전교에 "육전(六典)이 완결되었으므로 이제 조정과 민간에 널리 반포한다. 과인이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내리니, 삼가 조정의 모든 신료들은 마음가짐을 바로 하여, 지켜 행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시고, 친히 지어 내리신 어제서(御製序)에서도, "서(書)에 이르기를, '형벌(形罰)은 형벌이 없기를 기(期)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형법(刑法)으로 형법을 그치게 한다.'하였으니, 이것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논죄하라는 뜻이다. 형전(刑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법령을 정해 시행하는 바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과인이 듣기를 '선(善)한 것을 선하게 여길 뿐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선을 안다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악(惡)한 것을 미워만 할 뿐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악한 것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법령을 어긴 죄를 알고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지 못할 때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이른 말이다. 대저(大抵) 육전(六典)을 적용함이 이와 같아야 한다." 하셨으니, 법과 질서를 엄정하게 바로 세워 정치에 반영함으로써 나라와 백성에 대해 지극한 정사를 다하고자 하셨다. 공정한 논죄를 위해 동년 11월에 '수사논죄절목(搜査論罪節目)'을 제정하여 시행하셨으니, 이는 형옥을 신중히 하려는 왕의 지극한 뜻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 또한 예전(禮典)의 문서양식[文書式] 조문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그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내용이더라도 물리치고 받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하셨다. 이것으로 조정에서 통용되는 공문서에 확고한 체계가 잡혔다.

3월에 공주목(公州牧)에 소방공덕비(消防功德碑) 세울 것을 전교하셨고, 5월에는 파주목(坡州牧)에 삼광중고교(三光中高校) 칭송비를 세웠으며, 6월에는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에 전국무명용사추모비(傳國無名勇士追慕碑)를 설립하는 등 팔도 각지에 선행 칭송과 추모 사업이 이어졌다. 4월 초1일부터는 과거 시관직을 3회 역임하면 품계를 한 자급(資級) 올리도록 하셨고, 4월 22일에 지방관 임기를 6주에서 2개월로 환원하였다. 5월 초8일에 급제자 출사를 권장하는 윤음을, 6월 13일에 논의 활성화에 관한 교서를 내리셨으며, 생원시와 진사시, 원시에 모두 입격하여 그 평점이 중중(中中)을 넘으면 특별히 가계(加階)하는 혜택을 아울러 전교하셨다. 7월 14일에 조정 관원들에게 내리는 윤음에서 말씀하시기를, "수차례 전교와 윤음을 하였음에도 천거 제도의 혜택을 받는 자가 매우 적은데, 이는 관리들이 지나치게 높은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려 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진실로 약간의 재능이라도 가진 인재가 전국 팔도(八道)에 전무(全無)하기 때문인가. 혹은 제도가 지나치게 번잡한 때문인가." 하시면서 천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셨다.

이에 앞서 4월 초7일에 조정 현실과 관련하여 '덕이 없음[不德]'을 자책(自責)하는 윤음을 내리셨다. 조정 현실에 크게 상심(傷心)하시어 10여 일 동안 왕께서 정무를 돌보지 않으셨는데, 조정에서 이에 대해 간언하는 소리가 없고, 어명을 내린 것에 대해서 분명한 조치가 없어 전교가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재가 없이 관원들끼리 협의하여 멋대로 어명을 고쳐 시행하는 상황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답답하게 여기신 끝에 나온 윤음이다. 이날 윤음으로 조정에서 논란이 있게 되자 자숙(自肅)을 말씀하는 비답을 내리기도 하셨고, 8월 초9일에는 철조(輟朝)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라는 망극한 유지(有旨)를 삼사에 내리시기까지 하셨다. 이 유지는 만조백관의 청원에 따라 동월 24일 전교로 수습되었다.

9월 18일에 한성참군 윤희승(尹熙勝)이 차자하여 팔도에 유향소(留鄕所)를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논의를 통해 관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라고 명하셨다. 11월 초2일에는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 부수찬 이상 관원으로 하여금 지제교(知製敎)를 예겸(例兼)하게 하시는 한편, 예문관에서 찬술한 일본(日本)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항서(抗書)를 재가하여 예조로 하여금 국서(國書)로 일본 대사관에 통첩하게 하셨다. 동월 20일에 논의를 마친 삼사에서 유향소의 설치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아뢰었으나, 이조에서는 유향소를 시범적으로 설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다시 왕께서 옥당(玉堂)에 자문하셨는데, 수찬 유치의(柳治義) 등이 다시 옥당의 의견을 취합하여 유향소 설치를 반대하니 왕께서 비답을 내리시기를, "유향소는 그 설치를 무기한 보류하도록 한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홍문관이 제 모습을 갖춘 듯하다." 하셨다.

11월 초10일에 실록청(實錄廳)을 개청하여 예조좌랑 최영을 초대 총재관(摠裁官)으로 삼으시고 글 잘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사초(史草)를 기록하고 실록을 찬수(撰修)토록 하셨다. 또 실록을 찬수하는 일의 어려움을 아시고 편찬에 관계한 관원들에게 품계 승진의 혜택을 내리셨으며, 개국611년(임오:2002) 2월의 제12권 실록 완결부터는 실록 사업에 참여한 관원에게 한 권마다 근무 일수 10일을 가산하도록 특별히 명하셨다. 사관들을 치하하고 독려하여 실록을 편찬해, 그 기록된 역사를 거울로 삼아 후대에 교훈과 경계로 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관으로서 직무에 태만한 관원들에 대한 징계는 평소보다 엄중히 하여 기강을 바로 잡고자 하셨다. 영명하신 왕의 결단에 조야의 모든 선비 가운데 감복해 마지않는 자가 없었으며, 왕의 치세에 모두 20권의 실록이 찬술되어 제1책으로 간행되었다. 동일에 '토관직절목(土官職節目)'이 제정 반포되었는데, 이는 동년 6월에 평안감영에서 장계한 내용을 채택하신 것이다. 토관을 선발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개국612년(계미:2003) 9월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양역(兩域)에서 혜택을 받는 백성이 나오게 되었다.

동월 23일에 교서를 내리셨으니, 이른바 문체교서(文體敎書)이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보고 느끼신 바가 있으시어 통신체(通信體)가 범람하고 있던 당시의 문풍을 올바른 문체로 바로잡고자 하셨다. 교서에서 이르시기를, "과거 답안 가운데 만일 한 글자라도 통신체를 띄는 것이 있다면 비록 그 글 전체가 주옥(珠玉) 같을지라도 물리쳐 하점(下點)으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발표하여 통신체가 극복되지 않는 한 급제나 입격을 시키지 말이야 한다. 또 공문서에 통신체를 사용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파직시켜 개선될 때까지 추호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하시면서, 교서에서 명시하신 바를 각 교육기관의 훈장, 유생들에게도 우선 적용시키셨으니, 한글날 국경일 승격과 더불어 한글 사랑에 대한 왕의 애착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었다.

동월 26일에 개정(改定) 대전(大典)을 반포하시어 법령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셨으며, 12월에 천거어사(薦擧御史) 이방원(李芳遠)과 강다소(姜多笑)를 차송하여 유학 방운(方雲), 김연(金緣), 이백(李伯) 등을 등용하셨다. 경기도 석실서당(石實書堂)에서 남의 자료를 무단 도용하여 강의 자료로 활용한 사례가 적발되었으므로 이를 징계하시고 교육기관 종사자에 대한 신임(信任)과 불신임(不信任)을 즉각 시행하게 하셨다.

창국 초부터 왕을 폐하(陛下)라 부르며 칭제(稱帝)를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2월 22일에 유학 변영태(邊榮泰)가 제위(帝位)에 등극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왕께서 장문으로 비답을 내리셨는데, "왕을 높여 황제로 하고 왕비를 높여 황후로 하고 세자(世子)를 높여 태자(太子)로 하고 왕실을 높여 제실(帝室)로 하며, 전하를 고쳐 폐하로 하고 교지(敎旨)를 고쳐 칙명(勅命)으로 하는 것, 그리고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민심(民心)을 얻어 바른 정치를 펴는 것이다." 하시고, "사대(事大)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왕으로 칭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 과인은 구오지위(九五之位:帝位)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라고 하시어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칭제를 하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셨으니, 만백성이 그 뜻을 거룩하게 받들었다.

개국611년(임오:2002) 정월 17일에 前지평 유치의(柳治義)의 부고(訃告)가 조정에 전해졌다. 대부(大夫) 반열에 있던 전직 관원의 창국 이래 첫 사망이었으므로 특별히 품계를 한 자급 올려 봉정대부(奉正大夫)로 하고 예조 참상관을 보내 조문(弔問)하게 하셨다. 동월 18일에 관청별로 업무 절차를 요약 정리하여 직무지침을 편찬할 것을 지시하셨으며, 동월 21일에는 근무 일수 가감산제(加減算制)를 시행하셨다. 인사 행정에 상벌점(賞罰點) 성격을 가미하여 평정에 따른 승진 불이익을 없애신 것이다. 가감산제를 도입하기 전에도 근무 일수를 더하거나 빼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이때의 근무 일수는 평정에 필요한 근속 기간이었기 때문에 이조와 병조의 평정 행정이 매우 복잡해졌다. 따라서 근무 일수를 평정에서 따로 분리하여 제도를 간결하게 운용하고자 하셨다. 동월 27일에는 같은 문제에 대해 홍문관과 예조에 개별 논의를 명한 사안에 대하여는 홍문관 관원들이 예조 본청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시어 홍문관의 독립성을 보장하셨다.

2월 12일에 임오년(壬午年) 연두교서를 내리셨다. 왕께서는 지난날에 행하셨던 정사에 잘 된 것과 잘못된 것이 있는지를 돌이켜 보고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늘 반성하셨다. 언제나 백성을 생각하며 정사에 임하셨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셨다. 모든 연두교서가 늘 그러 했지만, 특히 임오년 교서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감회를 말씀하신 후 심중(心中)을 드러내는 것으로 교서 내용을 대신하셨다. "수많은 전교와 비답이 있었으나, 과인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하시면서 조정 관리들의 기강 해이를 지적하셨다. 네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첫째가 어명을 내릴 때의 신중함과 그 이행 여부, 둘째가 인재를 등용하여 쓸 때의 기준과 시련, 셋째가 선비들의 경박한 기풍과 진퇴에서의 폐단, 마지막이 시책을 펴는 데 있어서의 상고(尙古)와 같은 원칙 적용 등이었다. 특히 교서 중에서 정조선황제의 행적을 언급하신 것이 문체교서와 더불어 정조 시대에 대한 왕의 관심을 알 수 있게 하며, "오늘날 선비들의 기풍(氣風)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옛날 선비들보다 공적인 의리에 관한 결심은 크게 미약하면서 사적인 분개에는 조금도 참지 못하는 것이 대체로 오늘날 선비 된 자들의 행실이다. 논의나 논쟁 가운데 행여 남으로부터 사소한 지적이라도 받는 날이면 당장에 다시는 씻지 못할 치욕을 당한 것으로 느껴 그릇된 마음을 품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정녕 개탄스러운 일이고 무엇이겠는가." 하신 내용은 당시 세태에 대한 준열한 지적이었다. 교서를 접한 자라면 위로는 조정 관원에서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위하신 이래 늘 한결같이 노심초사하며,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정사를 펼칠 것인가를 고민하시던 왕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3월 25일에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단행하셨다. 왕의 건강이 평소와 같지 않아 여러 날 정무를 보지 못하시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신하의 간청에 의해 이러한 전교가 있게 되었다. 4월 초3일에 추가로 전교하시어 이조와 병조의 인사, 평정, 병조의 군무, 홍문관과 성균관의 사무, 형조의 판결 일부를 제외하고는 의정부에서 각조(各曹)와의 협의를 거쳐 처결하게 하셨다. 상소문 처결을 의정부에서 관여하지 못하게 하여 언로를 보장하셨으며, 관원이 없는 호조, 공조 업무를 의정부에서 감당하게 하셨다. 동월 16일에는 군주가 만7일 이상 유고(有故)할 경우에 의정부의 인사 및 상벌 권한에 대해서 규정하셨다. 서사제는 이듬해 11월 18일에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다시 개편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4월 26일에는 관리의 과거 응시 제한에 대하여 전교하시기를, "앞으로 시행되는 대과는 과거 응시 시작일을 기준으로 최근 2개월 이상 관직에 계속 근속했던 관리에 한해서만 응시할 것을 허락한다. 또 관직 교체 중간에 무관(無官)으로 있던 간격이 7일 이하일 경우에도 합계하여 2개월 이상이면 응시를 허락하도록 하겠다. 중시 과거 또한 이에 준하여 시행할 것이다. 참하관은 현재 제도와 같이 관직 여부와는 상관없이 대과 및 중시에 응시할 수 있다." 하셨다. 관직에서 업무를 보지도 않는 관리가 과거만을 통하여 승품(陞品)하는 길을 막도록 하신 조처였다.

5월 초5일에 삼사에서 합계하여 성균관 관원의 예조 본청 업무 참여를 금하도록 청하자, "금일 이후로 성균관 관원들은 성균관 본래의 직책에만 전력을 다하도록 한다. 성균관 문관 관원들은 현재 무관 관원들과 마찬가지로 상급 관청인 예조의 여러 사무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없다." 하셨다. 동월 7일에는 경외관(京外官) 관리들에게 윤음을 내리셨다. "사령장을 받아 관직에 임명된 후에 일신(一身)의 사정이나 직책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관직에서 쉽게 물러나려는 풍토가 일반인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마치 몰려오는 적을 감당할 수 없어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장수의 처지와 같으니, 이들에게서 장차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또다시 어떤 관직을 맡길 수 있겠는가." 하시며 당시의 조정 현실과 관리들의 올바른 처신, 외관직의 솔선(率先), 위민(爲民), 지방관의 사령 등에 관해 말씀하셨다.

아조(我朝)는 예로부터 피휘(避諱)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왕의 휘 모(某)는 자주 쓰이는 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휘와 관련하여 특별한 논란이 없었다. 그런데 6월 30일에 봉교 최사강(崔士康)이 전반기 중시에 무과에 병과 급제한 前사맹 서양갑(徐羊甲)의 시권(試券)이 휘를 범하였다고 아뢰었다. 왕께서 "예조에서는 시권에서 언급된 단어의 본래 용도와 단어 '튼튼하다'의 작은말인 '탄탄하다'의 한자어(漢字語) 여부 등을 살펴 계본으로 아뢸 것이다." 하셨다. 결국, 문맥상 지적된 부분은 순우리말로서 휘를 범하지 않았다고 결론이 났으나, 어전에 관련 계본을 올린 관원들이 휘를 범하는 등의 실책을 범하게 되었고, 나라의 여러 유생이 상소를 올려 피휘의 전통을 버릴 것인지, 취할 것인지에 대하여 격렬히 논쟁하였다. 왕께서 7월 초8일에 피휘 논쟁에 대하여 전교하셨는데, "조정 공론을 물어 시비(是非)를 정한다면 한때나마 조정이 크게 분열될 소지가 있으므로, 대체로 이와 같은 민감한 사안은 군주가 직접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수밖에 없다." 하시고, "나라와 사회를 유지하는 방책 가운데 예(禮)에 근거한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때문에라도 예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휘를 범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지켜 고수해야 할 양속(良俗)이라고 할 수 있다. 예조에서는 과인의 휘와 관련한 바를 중외에 널리 알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하셨다. 더불어 격렬한 논쟁에 관여한 유생들에 대해서도 벌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치하하시며, "근래에 들어 이와 같은 논쟁을 겪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습을 또다시 기대하기 위함이다. 논의에 관계한 유성민(劉聖敏), 강자아(姜子牙), 최사강, 서양갑의 근무 일수를 15일 가산하고, 정재안(鄭宰安)의 근무 일수를 5일 가산한다. 유생 이동진(李東珍)에게는 특지(特旨)를 내려 홍문관 또는 예문관의 관직을 제수하고자 하니, 이조와 예조에서는 마땅한 품계와 관직을 정해 아뢸 것이다." 하셨다. 왕께서 유생들의 논쟁을 반가워하신 것은 당시 조정에 활력이 없고 경직되어 있었던 탓으로, 격렬하게 논쟁에 나선 젊은 선비들의 의욕을 높이 사신 것이다. 논쟁에 관여했던 최사강 등 6인은 훗날에 조정의 큰 버팀목이 되었으니 왕께서 인재를 등용함이 이와 같았다.

왕께서는 나라와 종사에 충성한 우국지사(憂國之士)들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으셨으니, 6월에 도이(島夷)의 참혹한 횡포에 맞서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의거(義擧)를 일으킨 의사(義士) 윤봉길(尹奉吉:1908-1932)을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추증(追贈)하시고 더불어 시호를 충의(忠毅)라 하였다. 이는 시호법(諡號法)에 어지러움을 맞아 나라를 잊지 아니함[臨亂不忘國]을 충(忠)이라 하고 용감하게 행동하여 적을 무찌른 것[致果殺敵]을 의(毅)라 하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또 개국612년 9월에는 꿋꿋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다하여 순절(殉節)한 유현(儒賢) 최익현(崔益鉉:1833-1906)에게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충경(忠敬)이라 하셨다. 시호법에서 자기 몸이 위태로움에도 임금을 받들었음[危身奉上]을 충(忠)이라 하고 의(義)를 지켜 굽히지 아니함[守義不屈]을 경(敬)이라 하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이처럼 충절(忠節)을 높이 추존(追尊)하는 것은 그들의 충의와 절개를 위안(慰安)하여 길이 현창(顯彰)하는 것이니, 모두가 불의(不義)를 멀리하고 정의(正義)를 가깝게 하여 대의(大義)를 보다 바르게 하고자 하셨던, 왕의 지극하고 결의에 찬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개국611년 7월 초1일에 윤음을 내리셨다. 이날 윤음은 삼사가 조정 관원을 규찰하거나 징계하지 않는 조정 풍토를 지적하신 것으로, 윤음에서 "어떤 일이 타인의 잘못을 밝혀 탄핵해야 하는 것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그로 말미암은 원성이 자신에게 돌아갈까를 염려해 입을 다물고 있다."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다. 동월 12일에 전교하시면서 "예로부터 대부의 반열에 이른 자는 조정에서 달리 대우하는 예가 있어, 가벼운 사안인 경우는 함부로 형리(刑吏)로 하여금 추국(推鞫)하지 않고 먼저 불러다 진술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지위가 대부에 이르렀으므로 형장을 갖춰 추문(推問)하지 않아도 진실을 말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시며, 4품 이상의 지위에 오른 신하들을 예우하는 것에 관하여 언급하셨다. 前이조정랑 이완(李浣)이 통정대부로서 왕이 허락하지 않은 조정 관원에 대한 사직서를 마음대로 수리한 것과 관련하여 추고(推考)를 받았기 때문에 이날의 전교가 있었다.

동월 16일에는 개국514년(을사:1905)에 신하된 자로 감히 임금을 능멸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백성과 종사를 저 간악한 도이들과 함께 도적질에 앞장선 이완용(李完用:1858-1926), 박제순(朴齊純:1858-1916), 이근택(李根澤:1865-1919), 이지용(李址鎔:1870-1928), 권중현(權重顯:1854-1934) 등 다섯 역신(逆臣)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셨다. 개국610년 12월에 유학 김병학(金炳學)이 올린 상소에 따라 논죄를 거쳐 집행하신 것으로, 그들의 죄상을 따져 황주(荒紂) 황민(荒愍), 황여(荒戾), 황양(荒煬), 황원(荒愿)의 악시(惡諡)를 각각 내리는 동시에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셨다. 또 봉교 최사강이 짓고 정랑 조조(趙造)가 개수한 '을사오적신죄책비문(乙巳五賦臣罪責碑文)'을 비(碑)에 새겨 한성부에 세우셨다. 저들의 간악한 흉계에 대한 역사의 정당한 심판이었으므로 온 백성이 통쾌히 여겼다.

8월 11일에 前정언 박혁거세가 상소하여 조정의 각종 문서가 관리들만 열람할 수 있는 비문(秘文)으로 되어 있음을 지적하자, 왕께서 하교하시기를, "의정부에서는 각 관청에 거듭 신칙하여, 긴요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서를 공개로 전환하도록 하라." 하셨다. 조정에 중요하지 않은 문서들조차 비문으로 작성하는 풍토가 있었으므로 왕께서 특별히 어명을 내리시어 조정 업무의 투명도를 높이고자 하신 것이다.

동월 15일에 창국 2주년을 기념하여 종묘에 거둥하여 고묘(告廟)하신 후, 교서를 내리시기를, "본조 개국 이래로 덕치(德治)가 행해지지 않은 적이 드물었는데 과인의 치세(治世)에 이르러 그러한 말이 더는 회자(膾炙)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조종조(祖宗朝)에 죄송스러운 일임은 물론이고 조정의 역대 대신(大臣)과 명신(名臣)들에게도 매우 미안한 일이다." 하시며 자책하시고, "창국 2주년에 이르러, 다시금 종묘에 고하는 의식을 통해 지난날 맹세를 새롭게 하여 이후 정사에 임하고자 하니, 조정 제신과 팔도 백성은 과인을 도와 나라가 더욱 흥성(興盛)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기 바란다." 하시면서, 당하관 가운데 평정으로 품계가 승진한 경력이 있는 신하에게 한 자급을 다하시고 하옥 1개월 이하의 형량이 남은 죄인을 조기 방면(放免)하셨다. "완전한 사면(赦免)이나 복권을 명(命)하는 것은 아니니, 이는 민국에서의 일을 거울로 삼아 무분별한 사면 및 복권이 불러오는 폐해가 있음을 크게 걱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시어 형정을 느슨하게 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하셨다.

또 창국을 기념하여 제9차 별시를 특설(特設)하고 이날부터 지역별 특색화 제도를 시행하셨다. 특색화 제도는 당시 침체해 있던 전국을 활성화하기 위해 나온 방편 가운데 하나로서, 조정에서의 논의을 거쳐 한성부는 자유 교류 지역, 경기도는 체육, 충청도는 교육과 외국어, 경상도는 정치와 경제, 전라도는 역사, 황해도는 전산(電算)과 오락, 강원도는 군사와 안보, 평안도는 문화와 예술, 함경도는 과학과 기술로 각 지역별 중심 주제를 확정 시행하였다. 이 특색화 제도는 이듬해 12월 15일에 공식 폐지되기까지 1년 4개월간 유지되었다.

동월 23일에 지방관의 공문 게시 문제에 대하여 전교하시기를, "지역의 공문 게시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여 특색화 주제를 흐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지금 팔도를 보면 공문과 무단으로 전제한 문서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번잡한 상황을 개선해야 할 필요를 느껴 팔도에 전교하는 것이다. 추후로는 과거 시행과 같이 중대한 류(類)의 공문을 제외한 모든 공문서는 지역 관아(官衙)에만 게시하고 해당 지역에 바로 게시하지 않으며, 게시하더라도 여러 날의 공문을 모아 단 하나의 문서로 정리한 후 주1회 정도 주기로 내걸어 알리도록 한다." 하셨다. 공문은 관청과 관청 사이에 주고받는 문서인데, 지방관들이 불필요하게 복사하여 지역 여기저기에 게시하고 있었으므로, 불필요한 행정력 누수를 막고자 하신 뜻이셨다.

당시 의정부에서 창국 2주년에 즈음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고자 '효공정강혜정렬제(孝恭靖剛惠定烈齊)'로 글자를 정한 후, 조정 관원들의 연명을 받아 창국 기념일에 옥책문(玉冊文)과 함께 계본을 올렸다. 예조에서는 따로 창국경하(昌國慶賀)와 왕의 만년성수(萬年聖壽)를 기원하는 시문(詩文)을 올렸다. 비답하시기를, "과인이 무슨 염치가 있어 존호 여덟 자(字)를 받겠는가. 옛날의 임금들은 스스로 공덕(功德)이 적지 않아 존호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과인은 어제 교서한 바와 같이 실덕(失德)이 도를 지나쳤으니 감히 생전에 신하들로부터 존호를 받을 수 없다. 과인의 생각이 이처럼 단호하니, 거듭 존호를 올리지 말 것이다." 하시면서 받지 않으셨고, 동년 9월 10일에 예조에서 다시 청하자 "천하에 큰 덕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존호를 올려 그 덕을 칭송해야 하겠지만, 어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허송세월하는 과인에게까지 존호를 올린다고 하는 것인가. 진실로 자격이 없어 그런 것이지, 세 번 사양하는 허례(虛禮)를 갖추고자 이러한 비답을 내리는 것이 아님에 유념하라. 앞으로 이 일을 다시 거론하는 자가 있다면 응당 마땅한 처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셨으니, 왕께서 스스로 삼가고 겸허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9월 초3일에 한성부 중부(中部)에 재산사회환원자칭송비(財産社會還元者稱頌碑)를 설치할 것을 명하시어 어려운 이웃에게 재산을 기부하거나 사회에 환원시킨 모든 백성에게 사례하셨다. 10월 11일에는 의정부에 유지를 내리시어 "특별히 공로가 있는 백성에 대하여 조정 차원의 명예 칭호 수여와 지역별 공로자 선정 등을 시행하고자 하니, 의정부에서는 적절한 제도를 마련하여 계하도록 하라." 명하셨다. 이에 따라 '명예백성제도절목(名譽百姓制度節目)'이 마련되어 이듬해 2월 11일에 반포되었다. 열심히 노력한 백성을 포상하는 지침의 실마리를 마련하신 것이다. 동월 26일에는 성균관에 전교하시어, "성균관에서는 청금록(靑衿錄)에서 제명해야 할 자들의 명단을 살펴 관계된 이름을 정리하도록 하라. 유생 명부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명예인데, 명색이 성균관 유생이라 성명이 등록되어 있을 뿐 그에 걸 맞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 선비들이 적지 않다."고 하셨다.

11월 15일에 혜종경렬대왕의 복위를 종묘에 고(告)하셨다. 이미 6월 13일부터 20일까지 광해군의 묘역을 왕릉(王陵)의 격식에 맞춰 보수하는 공사를 완료하였으며, 7월 12일에 "왕으로 추숭(追崇)하고 종묘에 신위를 모신다."고 하시어, 복위하는 것으로 대계(大計)가 정해졌으므로, 전교에 따라 예조에서 행장을 찬술하여 동월 22일에 계하였다. 정랑 조조가 짓고 사록 강자아(姜子牙)가 보완한 행장을 재가하시면서, 다시 공론에 따라 대행대왕과 대행왕후의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하셨으며, 9월 16일에 왕후의 시호를 '혜장(惠章)', 10월 초7일에 왕의 시호를 '경렬성평민무헌문(景烈成平愍武獻文)', 동월 25일에 왕의 묘호를 '혜종(惠宗)', 능호를 '열릉(烈陵)'로 결정하셨다. 복위에 과정에 대한 내용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시책문(諡冊文)을 갖춰, 이날 15일에 혜종대왕의 복위를 정식으로 종묘에 고한 후, 12월 초2일에 영녕전 동협의 제12실에 신위를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하셨다. 그 전교에서 이르시기를, "대왕의 치세(治世)가 있은 지 4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종묘사직과 위민(爲民)의 중대함을 아시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셨던, 실리 외교와 대동법(大同法) 시행 등과 같은 대왕의 공덕(功德)과 대의(大意)가 아직도 면면(綿綿)히 흐르고 있으니, 11월 15일에 군(君)에서 임금[王]으로 복위된 혜종경렬대왕의 신위를 오늘 영녕전에 봉안(奉安)함에, 큰 감회(感懷)가 마음 안에서부터 다시 일어나는 듯하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셨다.

11월 30일에는 의정부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재능을 보인 관원을 탁용(擢用)하고자 하신 뜻을 보이셨다. 창국 이래 처음으로 내린 비망기에서 발탁 등용을 말씀하신 것이니, 7품이나 8품에서 참상 6품으로 초천(超遷)하는 제도가 동년 12월에 처음 시행되었다. 12월 12일에 전교하시어 재직 중에 사망한 관원을 삭직(削職)하고 강등하는 규례를 세우셨다. 맡은 소임을 갑자기 유기하여 조정 업무에 지장이 초래되는 일이 적지 않다는 홍문관의 지적 계본에 따른 것이다. 전교하시면서,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적절히 조치하겠다고 하시어 억울한 사례가 없도록 배려하셨다.

동월 23일에는 형조로 하여금 지침 형태로 양형(量刑) 기준을 마련하게 하시어 논죄 판결에 관한 부분을 정비하셨다. 개국612년 8월 26일에 형조의 차자에 대해 "조정에서 형률(刑律)을 집행할 때에는 오래도록 일관됨이 있어야지, 형정(刑政)을 담당한 관리가 누구냐에 따라 유죄 여부나 판결 취지, 형벌 경중이 크게 달라져서는 곤란하다." 하신 것도 그 일환이었다.

개국611년 4월에 이조에서 품계 사령을 잘못하여 1계(階)를 올려야 할 사령장이 2계 초자(超資)로 발급되었던 사실이 개국612년(계미:2003) 정월에 밝혀졌다. 인사 과실은 중차대한 문제였으므로 이에 당시 정랑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관원을 면직(免職)하고 가계 사령의 당사자를 파직하였다. 이 전교가 있자 의정부, 이조, 예조 등에서 차자하고 상소하여 면직과 파직 처분의 회수를 주청하였다. 왕께서 전교하시어, 조정에서 포상하는 것 가운데 품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시고 사건을 확실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명시하셨다. "단지 근무 일수 얼마를 감산하여 상쇄하는 것으로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는 일이 이러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이렇게 처단하는 것입니까.'라고 한다면, 과인이나 제신 모두가 달리 변통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시며, 훗날 이어질 폐단을 막고자 하신 의중을 분명히 드러내셨고, "원리원칙과 공명정대한 처분과 집행을 소리 높여 말하다가도, 문득 자신과 직접 관계되거나 자신과 가까운 일과 연관되게 되면, 관대하게 처분하라고 하거나 유약하게 처리할 것을 주청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하시면서 당시 신하들의 처신을 경계하셨다.

개국612년 2월 초1일에 계미년(癸未年) 연두교서를 내리셨다. 문무백관에게 이르시기를,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인재를 쓰느냐 하는 것에 달렸다." 하시고, "인재는 다른 시대의 인재를 빌려 올 수 없으니, 당대의 사람 가운데 등용하여 쓸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모든 부분에 출중하고 재행을 함께 겸비한 인재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재주나 특기라도 있는 자라면 불러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시며 인재 등용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하셨다. 또 사법 제도를 정비하여 형벌 집행에 형평을 기할 것과 지역별 특색화 제도에 내실화를 기할 것을 주요 국정 지표로 제시하셨다. 교육을 진흥시키고 선행을 장려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도 누차 언급하셨으니, 이는 왕께서 팔도의 활성화를 위하여 몸소 정책을 수립하고 진행하셨음에도 조정 여건 미숙하여 진도가 미진하므로 거듭 신하들을 독려하신 것이다. 동월 12일에 전교를 내려 소과 입격자 등용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셨다. 동년 3월에 제11차 소과 입격자 생원 이찬형(李燦炯), 진사 한백겸(韓百謙)이 등용되어 권지(權知)로 임명되었으니, 인재가 부족한 조정 여건을 타개하고자 하셨던 이날의 전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왕의 노심초사는 옥체(玉體)에 병환을 가져왔고, 그 때문에 동년 4월 13일부터 10여 일 동안 어쩔 수 없이 정무(政務)를 폐하시게 되었다. 의정부 등에서 간언(諫言)을 올리자 이에 성답(聖答)하여 이르시기를, "과인은 보통 사람의 자질조차 타고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노력하는바 또한 범인(凡人)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하시며, "이와 같은 사람이 군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찌 백성의 행복이겠으며, 종묘사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겠는가." 하시고, "몸과 정신이 예전과 같지 않다. 이제 과인의 거처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니, 멀지 않아 천명(天命)에 따라 의(義)로써 결단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하셨다. 왕의 심신에 병환이 깊어져 이러한 비답이 있게 되었으니, 당상(堂上)과 당하(堂下)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신료들이 군주를 보필함에 부족했던 바를 느끼며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왕의 병환이 깊어지기 시작하신 것이 대개 이때부터였다.

동월 14일에 전한 정재안이 차자하여 당상관의 가자 문제에 대하여 아뢰었는데, 왕께서 비답을 내리시기를, "당상 가자(加資)는 공적과 과실을 살펴 집행해야지, 정3품 당하에 이른 지 오래되었다고 그 기간을 살펴 무리하게 올려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충의공 윤봉길 같은 이가 불과 정2품 좌참찬으로 추증되는 것에 그쳤으니, 오늘날 신하들이 수고하는 것이 예전에 일제 치하에서 노력하던 일과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생각해 본다면 정2품 이상에 명하기가 실로 쉽지 않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추증이나 증직도 본조에서 행하는 것이고, 가자나 책봉도 본조에서 행하는 것이므로 그 무게 정도가 같기 때문이다." 하셨다. 왕께서는 이후에도 충경공의 증직을 전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충의공과 같은 인물이 자헌대부 좌참찬으로 추증되었고, 이제 또 충경공 같은 인사가 정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게 되었으니, 의리와 염치에 있어 앞으로 조정에서 정2품을 넘어 품계와 관직이 제수될 신하가 없겠다." 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정2품 관직으로 추증하는데 그친 조정에서 그 이상의 품계를 받는 신하가 나온다면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조정에 고위 관원이 부족하여 당상관의 문무반(文武班) 제한을 폐지하여 문관이 무관직에,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허락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자, 왕께서 5월 21일에 전교하시기를, "제도나 규례를 철폐하는 것만이 혜안이고 성덕이 아니다." 하시고 "문과(文科) 출신자에게 병조를 맡기는 것이나 무과(武科) 출신자에게 홍문관, 이조 등을 관할하게 하는 것은 과인의 뜻과 거리가 멀다. 일에는 지켜 고수할 것이 있고, 분별하여 개선할 것이 있는데, 이 사안은 전자(前者)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여긴다." 하시면서 문반과 무반 구분을 완화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왕께서는 옥체가 미령하신 가운데서도, 정무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창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던 공신도감, 녹훈도감 등의 논의 내역을 결론하여 공신을 책봉하신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조정에서 특별히 공신의 이름을 정해 명부(名簿)에 기록하도록 하여 역사에 영원히 남기는 것은, 이미 이룩한 공로를 평가하여 그에 상응하는 치하를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 있는 뜻은, 후세 사람들에게 충의(忠義)의 기풍을 권장하여 그와 같은 공로를 세울 신하들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단순히 당대의 공적과 공로를 살펴 포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시며 공신 책봉의 대의를 밝히시고, "공신의 등급을 정할 때에 평정이나 수치를 도입할 수는 없다. 공훈은 추천된 대상자가 노력한 바에 대한 평가 및 그 대상자들 사이에서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교량(較量)되는 것이어야지, 시험을 치르듯 일관(一官)의 평가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한 번 정해진 수치는 바꿀 수 없을 것이나, 서술하는 식의 평가는 논의 과정에서 가감되어 변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잘못된 녹훈을 막기에도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고 전교하시어 녹훈에 관한 기준과 절차를 제시하셨으며, "무릇, 공신 책봉은 신중해야 한다. 공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후하게 녹훈하는 것을 두고는 '하해(河海)와 같은 은전(恩典)'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를 넘어 공이 크게 미흡한 자에게까지 녹훈이 미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공적(功績)이 크게 부족하거나 그릇된 마음을 가진 자가 녹훈을 받는 것을 지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즉, 죄를 논하는 일뿐만 아니라 상주고 벌주는 일 모두에 확고한 기준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시고, "신하들의 공적과 공로를 치하하고 포상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칭찬하고 칭송하는 말이 참되고서야 공신으로 책봉되는 신하들이 진실로 영광되고 그것을 바라보는 백성이 진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다. 조정의 기강이 매우 중요하니, 어찌 관대하게 등급을 올려 정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공신의 훈호(勳號)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시며 녹훈 과정의 신중함을 거듭 당부하셨다. 또 "모든 백성이 과인의 신하인데, 그들에게 관직이 없다고 하여 어찌 공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게 하겠는가." 하시면서 조정 관원 외에 일반 백성도 공신으로 책봉될 길을 열어두셨다.

조정의 공론을 널리 경청한 끝에 개국612년 2월 13일에 정공신(正功臣) 11인의 명단을 확정하고 동년 5월 22일에 원종공신(原從功臣) 15인을 결정하셨다. 6월 24일에 공신 훈호(勳號)를 '수충승지광운준책창국공신(守忠承志廣運俊策昌國功臣)'으로 정한 후, 이등공신과 삼등공신은 여기에서 각 두 글자를 감(減)하였다. 그리고 7월 28일에 우참찬 이휘(李輝), 前참의 이완(李浣), 참판 조조(趙造), 前참의 최영(崔瑩), 故지평 유치의(柳治義), 故정랑 노사신(盧思愼), 前직제학 양지원(梁志元), 前서윤 이방원(李芳遠), 故정랑 신용호(辛庸浩), 故서윤 강다소(姜多笑), 故전적 허준(許浚) 등을 정공신으로, 前직강 김병호(金炳昊), 故정랑 조성민(曺成旼), 故기주관 박수현(朴秀泫), 故부교리 조동선(趙東瑄), 前정랑 이동진(李東珍), 行정랑 정재안(鄭宰安), 前감찰 이백(李伯), 故정랑 강자아(姜子牙), 故사성 박심문(朴審問), 故좌랑 백우현(白宇鉉), 故별제 김도민(金道民), 故명률 안향(安珦), 급제 김서울(金庶蔚), 박혁거세(朴赫居世), 안정복(安鼎福) 등을 원종공신으로 책봉하셨다. 이날의 공신 책록(冊錄)은 만백성의 경사와 다름없었다. 책봉 별교서(別敎書)에 이르시기를, "조종조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된 것은 그동안 맡은 바 위치에서 직임을 다한 신하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평온한 치세(治世)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과인이 3년 전에 종묘에 나아가 맹세한 바를 일부나마 지킬 수 있는 된 것을 누구의 공이라 하겠는가." 하시고, "공을 가려 녹훈함에 정공신과 원종공신의 구분이 있고, 또 그에 따른 등급과 특전(特典)에 서로 차등이 있으나, 과인이 조정 신하들의 국궁진력(鞠躬盡力)한 노고를 잊지 않는 마음에는 따로 경중(輕重)을 두고 있지 않으니, 이를 잘 알도록 하라." 하셨으니, 공신 책봉에 임하시는 왕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고굉지신(股肱之臣)에 대한 배려와 그 결실이 맺어진 것인지라 여러 공신의 이름이 청사(靑史)에 남게 되었으니, 나라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공신들에게 개별 교서와 녹권(錄券)을 반급하시고 익월 18일에는 공신 회맹(會盟)을 거행하였으며, 한성부에 창국공신책봉기념비(昌國功臣冊封記念碑)를 세우셨다.

5월 8일에 형조참의 이완이 민국의 탈옥수에 대해 논죄한 내용을 계사하였는데, 재가 없이 판결을 내린 후에 계사를 올린 것이었다. 왕께서 하교하시기를, "계사라는 것이 이미 판결한 것을 단순히 위에 보고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재가가 있은 후에 정식으로 판결을 내리고 형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이지, 해당 관청에서 판결한 후에 보고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계사라 이름하여 재차 윤허를 구하는가. 형조에서 하는 일이 조정에서 하는 일인데, 조정에서 한 번 판결한 것을 되돌리는 사례가 자주 있어서는 극히 곤란하다." 하셨다.

7월 27일에 이조참판 조조가 민원 및 행정처리 기한에 대하여 계본을 올리자 비답하시기를, "책임자가 전결(專決)하거나 곧바로 다른 관청에 이첩하는 일은 5일을 기한으로 하고, 관청에서 논의를 거쳐 이첩하거나 시행하는 일은 10일을 기한으로 한다. 양사의 서경(署經)을 거친다든가, 이름을 고친다든가 하는 사무는 대체로 5일을 기한으로 그 전까지 이문(移文)하고 계(啓)하면 될 것이다. 이 경우, 회신 공문이 있거나 전교가 있은 후에 다시 5일간의 기한을 둔다." 하셨다. 각 관청에서 민원과 행정을 처결하는 업무가 지나치게 지체되지 않도록 내리신 전교이셨다.

10월 초6일에 전교하여 초9일에 증형판(贈刑判) 유치의를 경헌(敬憲), 증호판 노사신를 혜정(惠靖), 증병판 신용호를 경성(景成), 증판윤 강다소를 장익(莊翼), 증예판 허준을 정헌(定獻)으로 증시(贈諡)하셨으니, 이는 창국공신으로서 정2품으로 증직된 신하들이기 때문이다.

왕께서는 옥체가 더욱 미령하게 되셨으므로 치세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아시고 후일을 준비하시기 시작하셨다. 11월 12일부터 조정의 공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한 후, 동월 18일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여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 육조(六曹) 각 관청에서 소관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육조직계제로 환원하셨다. 이는 왕께서 정사를 손수 챙기실 것을 내외에 천명하신 결단이요, 서사제도 직계제도 아닌 당시의 정치제도에 대한 개혁의 한 부분이었다.

동월 23일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한양군(漢陽君) 조조가 졸(卒)하자 2일간 철조하시어 중신(重臣)을 예우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이보다 앞서 10월 27일에 前서윤 이방원이 명을 달리하였는데, 공신이기 때문에 이조에서 증직과 증시를 계청하였다. 왕께서 11월 12일에 전교하시기를, "시호를 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행장(行狀)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시고 동월 17일에 "사망자의 행장은 일가(一家), 동문(同門), 문인(門人) 등이 지어 예조에 제출토록 한다. 생전 행실에 덕(德)이 있다면 다소 시일이 지체될 수는 있겠으나 끝내 행장을 찬술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호 논의는 행장이 있은 이후에 비로소 진행한다." 하셨으므로, 망자(亡者)의 행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볍게 시호를 논의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에 예조참판 이동진이 한양군의 행장을 찬술하자, 곧 시호 논의를 허락하시어 개국613년 정월 초3일에 시호를 확정하였다. 이때 이조참의 정재안이 계본을 올려 시호를 삼망(三望)하면서 수망(首望)으로 문헌(文獻)을 올리자 비답하시기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추증이나 추시(追諡)를 제외하고는 문(文)이나 무(武), 충(忠), 정(正) 등의 시호를 받을 인물은 없다." 하시고, "진실로 '박학호문(博學好文)의 문(文)'이라 한다면, 지식이 산(山)과 같고 학문이 정밀하면서도 또한 광대해야 할 것인데, 실제 한양군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본조에서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다고 말하는 것과 조종조 이래 시호를 정할 때 어떤 인물의 문장과 학문이 그렇다고 하는 것에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무(武), 충(忠), 정(正) 등의 글자 또한 같다." 하시면서 한양군의 시호를 공정(恭定)으로 결정하셨다.

드디어 왕께서 개국612년 11월 25일에 그동안 잠저(潛邸)에 거(居)하시던 왕제(王弟) 모(某)를 왕세제(王世第)로 삼으셨다. 책봉 교서를 내려 조정 문무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평소 덕이 없고 품성과 행실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체력과 정신 또한 예전과 같지 않아 더욱 쇠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조정의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마땅히 후사를 세워 종사를 굳건하게 해야 할 때이다. 만일 불행한 사태가 가까이에서 촉발된다면 무엇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 "종묘사직이 단절되느냐, 이어지느냐가 하는 문제가 곧 세제 책봉이 성사되느냐 하는 여부와 직결되어 있으니, 세제는 물론이고 만조백관(滿朝百官) 모두가 만류하는 글을 올려 세제 책봉이 조금도 늦어지게 하지 말라." 하시며, 동궁(東宮) 책봉을 신속하게 단행하시고 그 조치를 번복하실 의사가 없음을 분명하게 하셨다. 대통(大通)을 명확히 함으로써 후세에 영원토록 종사를 보존하고자 내리신, 왕의 나라를 위한 결단이셨다.

동월 29일에 왕세제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고문체(古文體)나 고사(故事), 한자어의 지나친 사용은 상하 간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할 뿐이니, 과인이 행한 전례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글과 말을 절제할 것으로 믿는다." 하시며, 백성이 이해하기 쉬운 문체와 문장으로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엄을 갖출 것을 말씀하셨다.

12월 초8일에 왕세제가 문후를 드리자 초10일에 전교를 내리시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할 뜻을 밝히셨다. 이에 세제가 편전(便殿) 앞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하고 조정 신하들이 힘껏 만류하여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이에 대해 엄히 전교하시기를, "임금이 여러 사유로 정무를 더는 담당할 수 없게 되면 세자(世子)로 하여금 청정(聽政)을 하도록 하는 것이 국조 이래 전례였다. 오늘 이 전교는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과인의 깊은 뜻을 잘 알고 문무백관이 서로 협력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시고, "만약 전교를 따를 수 없다면, 마땅히 전위(傳位)하는 교서를 내리도록 하겠다. 과인의 의지가 이처럼 굳건하니, 세제는 청정을 명을 받들어 그대로 시행할 것이다." 하시며, 16일부터 즉시 청정을 시행하게 하셨다.

왕께서는 계속된 병환에서도 종사를 생각하시어 정무를 돌보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셨으니, 12월 초4일에 창국공신의 선대에 대한 보조공신(補祚功臣) 추봉(追封)을 점검하시고, 초7일에 세제시강원과 세제익위사 인선(人選)을 살펴 재가하셨다. 18일에는 4품 이상 관원의 평정 기간을 1개월에서 2개월로 연장할 뜻을 전교로 밝히신 후, "정5품 이하 참상관은 본인 스스로 능력을 입증한 자(者)라야 한다. 특히 품계가 5품인 관원들은, 홍문관원을 제외하고는 지방 수령직을 반드시 역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조나 예조, 병조, 형조와 같은 주요 관청의 수장 직임을 2개월 이상 무리 없이 수행한 후에라야 비로소 4품에 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시고, "종4품 이상은 솔선수범으로 다져진 자라야 한다. 대부나 장군의 직위는 오래 근속한다고 하여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문관은 대부가 됨으로써 사대부(士大夫)의 한 축(軸)이 되고, 무관은 장군이 됨으로써 역시 나라를 지탱하는 근간의 한 축이 된다." 하시어 조정 관직의 무거움을 신하들에게 유시하셨다. 또 "당상관 이상은 자품(資稟)과 학덕(學德)을 함께 겸비한 자라야 한다. 능력 본위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게 되면,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조정 관리들이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결과가 아니다. 의례에 밝고 문장이 충순하며 안팎의 행실이 일치되어야 조정 관리는 물론이고 팔도 백성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시어 관직이 높을수록 정예를 선발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개국611년 4월 16일의 전교에서, "당상관은 그 신분이 매우 높고 또 조정에서 대우하는 바가 당하와 같지 않으므로, 매번 승품 때마다 반드시 조정 공론이 어떠한지를 묻는 과정을 거친 후에 그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하신 것과 개국612년 정월 15일에서 "조정에 공로가 없는 자는 대부나 장군의 품계에 이르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공적과 인망이 현저하지 않은 자는 당상의 반열에 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하신 전교하신 것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듬해 개국613년(갑신:2004) 정월 초 2일에 4품관 이상 대부의 평정 기간을 2개월로 확정하시고 과거 급제자에 대한 혜택 적용, 인사 행정상의 문제점 등을 아울러 지적하여 해결하신 것도 정무를 계속하신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정월 초6일에 왕의 병이 위급해지자 마침내 유교(遺敎)를 내려 세제에게 국사를 당부하시기에 이르렀다. 전교하시기를,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므로 유교를 내려 장차 일에 대비하고자 한다." 하시면서 옥체가 경각(頃刻)에 달렸음을 말씀하시고, "과인이 비록 덕(德)이 없고 공업(功業) 또한 없지만, 재위에 있으면서 지켜 고수하고자 한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두교서를 비롯해 그간 내린 교서와 전교를 살펴 헤아린다면 과인이 뜻한 바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며 세제에게 간곡한 말씀으로 당부하셨다. 나라를 나라답게 하려는 뜻이 간절하셨음을 말씀하시고 조정 관원에 대한 인사에서 주의할 점을 말씀하셨으며, "좋은 일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매우 아름다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잘못된 일을 문책하고 징계하는 것 역시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상벌이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을 전교하셨다. 또 임금의 명령이 공정하고 한결같아야 한다는 점과 매사 성실하게 정무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으니, 이날의 유교를 받든 대소신료 가운데 종사를 생각하시는 왕의 성심과 왕의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유교 말미에서는 국장(國葬)을 간소하게 치를 것을 상세하게 전교하시어 혹여 국장 탓에 국사에 지장이 생기고 백성에게 불편함이 초래될까 걱정하셨다. "시호는 4자를 넘지 말도록 하라. 이는 과인 스스로가 종묘사직에 죄가 크다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묘호는 반드시 종(宗)으로 할 것이다. 감히 조(祖)를 받을 수 없다." 하신 것이 왕의 마지막 말씀이셨다.

왕께서는 일전에 역사적 인물에 대한 추증이나 추시를 제외하고는 문(文), 무(武), 충(忠), 정(正) 등의 시호를 받지 못하게 하셨는데 왕의 묘호, 시호, 능호, 존호를 정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하게 하셨다. 또 유교에서 시호는 4자를 넘지 말도록 당부하시면서 조정 관원들로 하여금 역사 앞에 겸손함을 잊지 말도록 하셨다. 친히 그 일을 실천하고자 하신 것이니, 왕께서 종사를 돌보는데 솔선수범하심이 이와 같았다.

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危重)하여 경각에 이르자 하빈군(河濱君) 이휘를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삼아 뒷일을 부탁하셨다. 이어 당일 자정에 경복궁(景福宮)의 대전(大殿) 강녕전(康寧殿)에서 승하(昇遐)하시니, 향년(享年) 60세, 재위(在位) 3년 4개월이었다. 초10일에 혼전(魂殿)을 숭경전(崇敬殿)이라 하고, 11일에 경기도 고양군(高揚郡)에 능(陵)을 조성하여 안장하였으며, 동년 3월 초1일에 종묘 정전(正殿) 제20실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왕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신 분으로 덕기(德器)가 이미 성숙하셨고, 엄중(嚴重)하면서도 관후(寬厚)한 성품이 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유소(幼少) 시절부터 고금의 일을 박람(博覽)하시어 보령(寶齡)이 어리심에도 학문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고, 정숙(精熟)한 글은 문예(文藝)를 이루어 내리시는 전교가 절로 문장이 되었다.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시고, 의(義)로서 밖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그대로 지키셨으니, 종사가 어그러지는 바가 없었고 백성이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

태조께서 창업(創業)의 큰길을 연 뒤로 종사가 수백 년을 이어오다가, 간악한 도이와 사욕을 취하는 권간(權奸)의 무리가 일어났으므로 임금을 능멸하고 백성을 괴롭힘이 극에 달하여 천도(天道)가 어그러지게 되었다. 간악한 무리가 참람(僭濫)하여 천명을 거스르고 오백 년 종사의 성업(聖業)을 일시 침탈(侵奪)하였으니 인륜(人倫)이 갈 바를 잃고 사습(士習)은 날로 침식되며 일월(日月)이 빛을 잃고 성신(星辰)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왕께서 큰 뜻을 이어 열성조의 보살핌과 천도(天道)의 힘을 얻어 종통(宗統)을 이으시니 종사가 다시 반석 위에 서고 재조(再造)의 큰 공(功)을 이루셨다. 그 성총(聖聰)은 장헌대왕(莊憲大王)과 같고, 공덕(功德)은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같은데 안타깝게도 붕어(崩御)하시니, 이 애통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주(註)] 행장은 왕(王)께서 승하하신 지 1년 후인 개국614년(을유:2005) 정월 초3일에 시호도감(諡號都監) 주관으로 찬술을 시작하여 개국617년(무자:2008) 8월 26일에 완결한 후. 이튿날 27일에 전하의 재가를 받았다. 선왕의 묘호(廟號)는 장종(章宗), 능호(陵號)는 희릉(熙陵)이다. 시호법(諡號法)에 법도를 정하여 크게 밝히는 것[法度大明]을 '장(章)', 덕을 공경하여 빛을 발하는 것[敬德光輝]을 '희(熙)'라 하였으므로 묘호와 능호를 그리 정한 것이다. 행장은 개국614년 정월에 당시 조봉대부 행사헌부지평 겸시호도감낭청 장운익(張雲翼), 통덕랑 예조정랑 겸시호도감낭청 성혼(成渾) 등이 초본(草本)을 짓고, 개국617년 8월에 가선대부 훈련도감중군 겸시호도감제조 서양갑(徐羊甲)이 내용을 크게 고쳐 정본(正本)을 완성하였으며, 가선대부 이조참판 원임규장각직제학 남원군 양지원(梁志元), 중훈대부 행성균관사예 겸시호도감낭청 천어(天漁) 등이 교정에 참여하였다.



장종대왕 시책문
章宗大王 諡冊文

고애제(孤哀弟) 사왕(嗣王) 신(臣) 모(某)는 삼가 머리 숙여 두 번 절하고 아뢰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천지사해(天地四海)의 크고 깊으신 공로(功勞)와 덕망(德望)을 헤아려 볼 때 그 크고 넓은 공덕을 어찌 차마 다 이루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탁월하신 공로와 덕망을 모두 헤아리기에는 부족하나, 아름다운 칭호로서 공경(恭敬)과 경의(敬意)의 뜻을 받들어 지극히 모시는 것은 무릇 고금(古今)의 공론(公論)이자 이치요, 신 등의 사사로운 뜻이 담긴 것은 더더욱 아니오니, 이에 지극히 공경하고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칭호를 받들어 올리어 그 찬연하신 공덕을 기려 후대에 널리 전하고자 합니다. 삼가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황형대왕(皇兄大王)께옵서는 영명(英明)하시고 예성(叡聖)하신 재능으로 큰 공로와 덕망을 이루셨으니 이는 백왕(百王)가운데 으뜸이셨습니다. 엄중(嚴重) 관후(寬厚)하시어 백성을 널리 아끼고 사랑하셨으며, 뛰어난 학식(學識)과 겸손하시고 자애로우신 성품(性品)과 뛰어난 결단력(決斷力)은 본시 하늘로부터 타고나신 것이니 천성이 대개 그러하셨습니다. 우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왕업을 여시고, 열성조께서 그 왕업의 기틀을 다지시니 종사(宗社)가 수백 년을 이어오다가, 519년만에 저 흉악한 도이(島夷)와 사욕을 취하려는 권간(權奸)의 무리가 일어나 불행하게도 기업(基業)이 일시로 끊어졌습니다. 대왕께서 대의를 바로 세워 종사를 다시 일으키시고, 그간 애달프던 백성의 마음을 지극한 선정(善政)으로 이끌어 바로잡아 주시니 그 공업(功業)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정사(政事)에 임하시는 때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여 공정(公正)하고 올바르도록 생각하시지 않은 때가 없으셨고, 학문의 진흥과 학풍의 진작을 위하여 태학(太學)을 다시 세워 나라의 동량이 되는 인재들을 대거 양성하여 문풍(文風)의 기치를 크게 높이셨습니다. 또 성조(聖祖)를 받들어 공경하는 일은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인재를 고루 쓰고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정확히 쓰셨으며, 형옥(刑獄)은 신중히 하여 행여 남형(濫刑)으로 백성이 억울해하지 않을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셨습니다. 긴 시간 동안 악습(惡習)으로 남았던 양성(兩性)과 적서(嫡庶)의 차별 및 노비제도 등의 잘못되고 그릇된 관행을 없애시니 백성이 존경하고 신망(信望)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이래로 일직이 모든 법치(法治)의 근간이 되었던 대전(大典)을 새로이 고치시어 창국대전(昌國大典)이라 이름하여 반포하시매, 나라의 모든 제도와 기틀이 바로 잡혔고, 대의(大義)를 존숭(尊崇)하여 높이 받드니 잘못되고 억울한 것들이 바로 잡아 고쳐졌습니다. 혜종대왕(惠宗大王)을 복위(復位)하시고, 외로이 잠드신 단종대왕과 정순왕후를 한데 모신 것은 지극하고 넓은 대의의 뜻과 부합한다 하겠습니다. 또 사악한 것은 멀리하고 정의로운 것들은 찾아 현창(顯彰)하셨으니, 나라를 능멸한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과 정여립(鄭汝立), 서태후(徐太后) 등 국기(國基)를 어지럽힌 자들을 책망(責望)하여 죄를 다스리셨습니다. 또한, 불의에 맞서다가 서거(逝去)한 이들을 크게 현창(顯彰)하신 것은 불의를 멀리하고 정의를 가까이하시고자 이는 역대 어느 인군(仁君)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바른 문화를 지키는 데에도 힘을 기울이셨으니,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하도록 하신 깊은 뜻이 왜곡된 이른바 통신체의 범람을 개탄하시어 그 사용을 금하시니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께서 패관소품(稗官小品)체의 금지를 명하신 문체반정(文體反正) 전교와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또한, 한글날의 의미가 민국에서 점점 퇴색됨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다시 두도록 하시어 세종께서 남기신 큰 뜻을 이어 계승하셨습니다. 지극히 받들어 효(孝)의 본분으로 삼으시던 여러 선대왕(先大王)들에 대하여 대왕께서는 스스로 겸손하고 또 겸손히 여기시어 뭇 신하들이 올리는 존호(尊號)나 공덕의 찬양에 대해 일절 사양으로 일관하셨으니, 조정 대소신료 이하 모든 백성은 이와 같은 대왕의 겸손하심에 절로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끊어진 왕업(王業)을 일으키시어 널리 백성을 평안케 하시고, 더불어 오래도록 온 나라 만민의 어버이로 계시면서 밝고 태평한 세상을 누릴 줄 알았거늘 보위(寶位)에 오르신지 3년 여 만에 훙서(薨逝)하실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아, 슬프옵니다. 영명하시고 관후(寬厚)하셨던 대왕의 용안은 이제 더는 뵙지 못하게 되었고, 또 자애롭고 온화하셨던 그 옥음(玉音)마저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애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극정성으로 크고 높은 덕망을 베푸셨던 대왕께 삼가 이런 말씀을 올리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높고 깊은 정만은 차마 감출 수 없어 감히 좋은 날을 택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높이 받들어 올리옵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높이 존시(尊諡)를 올리나니, '경성정효(景聖定孝)'라 하옵고, 묘호(廟號)를 '장종(章宗)'이라 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옵서는 굽어 살피시어 신 등의 작은 정성을 헤아려 주시고, 멀리서는 우리 백성과 자손 만민을 보호하시어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빛을 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말씀을 올리옵니다.

[주(註)] 장종대왕(章宗大王)의 시호(諡號)를 '경성정효(景聖定孝)'라 하였는데, 시호법(諡號法)에 의를 널리 행하고 강직하게 행동하는 것[布義行剛]을 '경(景)', 착한 것을 드날리고 간소함을 펴는 것[揚善賦簡]을 '성(聖)',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옛 것을 본받는 것[安民法古]을 '정(定)',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일을 성사하는 것[繼志成事]을 '효(孝)'라 하였으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시책문은 개국614년(을유:2005) 정월에 당시 조봉대부 행사헌부지평 겸시호도감낭청 장운익(張雲翼)이 짓고 개국617년(무자:2008) 10월에 중직대부 행사헌부장령 겸시호도감낭청 천어(天漁)가 고쳐 썼다.



장종대왕 옥책문
章宗大王 玉冊文

사왕(嗣王) 신(臣) 모(某)는 삼가 머리를 조아려 재배(再拜)하며 삼가 책문(冊文)을 받들어 상언(上言)하고자 합니다. 덕(德)과 혜(惠)가 지극히 높으므로 어찌 받들어 추숭(推崇)하려 한들 이보다 더할 수 있겠으며 그 공(功)과 기(氣)가 지극히 크므로 이에 보답하려 한들 그 무엇으로 베풀 수 있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왕업(王業)을 이루신지 519년째 되던 경술년에 조선의 끊어진 국운(國運)을 다시 이으시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다시 반석(磐石) 위에 올려놓으시고, 또한 면학(勉學)을 장려하시어 널리 인재(人材)를 두루 구하고자 하셨습니다. 교육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평소에 품으신 그 성은(聖恩)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혜종대왕(惠宗大王)의 신위(神位)를 공손히 종묘에 봉안(奉安)하시는데 조야(朝野)의 공론(公論)을 살피셨으니 이보다 더한 위민(爲民)은 없을 것입니다. 아조(我朝)의 백성뿐만 아니라 민국(民國)의 백성 또한 두루 살피시어 마땅히 치제할 부분이라 생각하시면 그 아름다운 덕행(德行)이 만세(萬歲)에 전할 수 있도록 하셨으니 입정(立正)의 한결같으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창국대전(昌國大典)의 반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정사를 펼치고자 하는 성의(聖意)의 산실(産實)이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윤봉길(尹奉吉)과 최익현(崔益鉉)의 증직(贈職)과 추시(追諡)는 불의(不義)를 멀리하고 정의(正義)를 가깝게 하여 대의(大義)를 바르게 하고자 하는 지극하고 결의에 찬 성은(聖恩)의 완성(完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은 요(堯)임금과 같은 전하의 인정(仁政) 속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으며 그 일월(日月)은 더욱 바르고 밝게 빛나니 사정(邪正)의 길이 순(舜)임금 같은 전하의 슬기로움 안에서 자출(自出)함은 당연한 이치(理致)입니다. 이에 신(臣) 부끄러이 행장(行狀)을 찬하고 시호(諡號)와 묘호(廟號), 능호(陵號)를 올립니다. 그리고 존호(尊號)를 '공경광렬(恭敬廣烈)'로 올려 그 공적을 만세에 널리 전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영원히 아름다움을 밝혀주시고 이끌어 주시어 더욱더 신령스러운 복(福)이 아조(我朝) 곳곳에 전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삼가 책문을 올리나이다.

[주(註)] 장종대왕(章宗大王)의 존호(尊號)를 '공경광렬(恭敬廣烈)'이라 하였는데, 시호법(諡號法)에 스스로 낮춰 자기를 다스리는 것[卑以自牧]을 '공(恭)', 선한 것을 말하며 사특한 것을 막는 것[陳善閉邪]을 '경(敬)', 아름다운 교화가 널리 미치게 하는 것[法度皆理]을 '광(廣)', 덕을 지키고 선대의 업적을 높이는 것[繼志成事]을 '렬(烈)'이라 하였으므로 그리 정한 것이다. 옥책문은 개국617년(무자:2008) 10월에 통훈대부 행사헌부장령지제교 박범(朴範)이 지었다.



장종대왕 지문
章宗大王 誌文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천도(天道)란 본시 무상(無常)한 것이라 하늘의 운행이 일시 쇠퇴함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어둠이 드리우고 간악(奸惡)한 무리가 그 참람(僭濫)됨으로 천명(天命)을 거스르고 성업(聖業)을 찬탈(簒奪)하여 오백 년 종사(宗祀)의 대통(大統)이 단절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충성스런 신하의 선혈(鮮血)은 옥토(沃土)를 적시고 강직한 선비의 외로운 넋은 돌아갈 곳을 잃었으며 의지할 바를 잃은 백성의 원통함이 세상에 가득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조차 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예로부터 전(傳)하는 말에 '사람이 모이면 한때 하늘도 이길 수 있지만 일단 하늘이 결정을 내리면 사람을 깨뜨린다.' 하였으니, 을사년(乙巳年)의 사특(邪慝)한 오적(五賊)의 무리와 미개한 섬나라 오랑캐들이 천운(天運)의 쇠함에 편승(便乘)하여 한때 시운(時運)을 얻어 하늘을 거스르는 대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으나,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은 친함이 없이 오직 덕있는 자만 돕는다.' 하였으니, 무도(無道)한 무리들을 쇠망(衰亡)에 이르게 하고 후악(朽惡)한 오명을 만대에 전하여 후대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의 경계로 삼음이 또한 하늘이 정한 참된 이치라 할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 장종대왕(章宗大王)께서는 개국554년 을유년(乙酉年) 5월 10일에 나셨다. 왕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셨고 천자(天資)가 총명하고 기강(紀綱)이 단아(端雅)하셨다. 춘추(春秋) 유충(幼沖)함에도 글 읽기를 게을리 하시지 않아 고금의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하셨고 학문이 날로 진취(進取)하고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문예(文藝)를 이루시니 뭇 사류(士類)들이 경탄(敬憚)해 마지않았다. 왕은 덕기(德器)가 이미 성숙(成熟)하여 세상을 담을 만한 도량(度量)을 갖추셨고 삼가 도의(道義)를 숭상하여 선비를 예경(禮敬)으로 대하셨다. 풍도(風度)가 엄숙(嚴肅)하면서도 또한 관대(寬大)하시고 성품이 후덕(厚德)하여 널리 용납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일찍부터 내외(內外) 사류의 흠모(欽慕)함이 지극하셨다.

개국519년 경술년(庚戌年) 국세(國勢)가 날로 침식(浸蝕)되고 간신이 국정을 전횡(專橫)함에 하늘조차 우리 조선(朝鮮)을 단념하여 왜적(倭敵)에 의해 나라의 근본을 상실하였다. 개국554년 을유년(乙酉年) 하늘의 어진 보살핌과 충의지사(忠義志士)의 거룩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빛을 되찾아 국권(國權)을 회복하였으나 외세의 흉포(凶暴)함으로 시세(時世)가 하 수상(殊常)하여 왕통(王統)은 끊어진 채 종묘(宗廟)에는 잡초만이 무성하였다. 대저(大著) 천하는 중기(重器)이고 왕통은 대통(大統)이라 하였으니, 왕은 평소 제왕(帝王)의 자질을 갖추었고 시대를 구하는 것을 근심거리로 삼으시었기에 왕의 춘추 55세인 개국609년 8월 15일에 본조를 창국(昌國)하시고 천하를 통어(通御)하여 단절된 대통을 승습(承襲)하시었다.

왕이 대의를 받들어 본조를 창국 하신 연후에 종묘(宗廟)에 들어 열성조(列聖祖)께 본조의 재흥을 고하고 나라의 흥성(興盛)을 기원하시었으며 즉위교서를 반포하여 천하에 창국의 대의를 밝히시었다. 또한, 창국의 홍업(鴻業)을 이루신 이래로 널리 숨은 현사(賢士)를 구하여 이목(耳目)으로 삼으시고 법도(法度)와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시었다. 동년 9월 면학(勉學)을 장려(奬勵)하는 교서를 내리시어 "당찬 기개(氣槪)를 가진 문무관(文武官)이야말로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할 수 있다. 각 고을마다 서당을 설치하고 도서를 간행하여 면학의 기풍을 조성토록 하라. 과인은 이를 지켜볼 것이다." 하시었는데, 왕이 평소 학문을 숭상하고 서책을 가까이하시었고 또한 예로부터 현철(賢哲)한 군주는 반드시 현자(賢者)를 얻어 나라를 함께 한다 하였으니 면학을 장려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의 흥성을 도모하고자 내리신 옥음(玉音)이니 왕의 명민(明敏)하심이 대개 이와 같았다.

동년 10월 초 6일 단종공의대왕(端宗恭懿大王)의 장릉(莊陵)과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의 합장을 거행(擧行)하시고 사릉을 장릉으로 개칭(改稱)하신 후 친히 장릉표석음기(莊陵表石陰記)를 찬술(撰述)하시어 능(陵)에 봉안(奉安)하시었다. 무릇 효행(孝行)은 사람된 자가 근본으로 삼고 힘써 행해야 할 만세의 정리(正理)이니 단종대왕과 정순왕후가 세도(勢道)의 무리에 의하여 욕을 당하시어 내세에도 영령(英靈)이 함께 하시지 못한지 수백 년이 흘렀으니 이는 충효(忠孝)를 아는 선비들이 통분(痛憤)하게 여기는 바였다. 왕이 친히 합장을 거행하심으로 효의 미덕을 내외에 보이시어 관리와 만백성의 의표(儀表)가 되었으니 산림(山林)의 유일(遺逸)들이 앞을 다투어 왕의 덕을 칭송하였다.

개국610년 신사년(辛巳年) 국가의 근간인 창국대전(昌國大典)을 반포하였고 문무백관에게 여러 차례 교서를 내리시어 신자의 중임을 일깨우고 그 나태함을 경계하였다. 공신도감(功臣都鑑)을 개설하여 본조 창국에 기여한 여러 사직지신(社稷之臣)의 공을 가상히 여기었으며 윤봉길(尹奉吉), 최익현(崔益鉉) 등의 전조(前朝) 충절지사(忠節志士)에게 시호를 추시(追諡)하고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하였다. 우리 혜종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은 왜란 이후 기울어진 사직을 바로 세우고 국가의 환난(患難)을 구한 지대한 공이 있어 성군으로 추앙받아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권력만을 탐하는 무리와 주자(朱子)의 병통이 골수(骨髓)에까지 미친 썩은 선비들에 의해 대위(大位)을 상실한 지 어느덧 300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후세의 뜻있는 선비들이 항상 대왕의 이런 원통(寃痛)함을 한스럽게만 여기었는데 왕이 친히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억울하게 폐위되신 혜종대왕을 복위하시고 친히 시호와 묘호를 올려 대왕의 한을 씻었으니, 사사롭게는 효(孝)을 보이신 것이요, 크게는 태산같이 높은 의(義)를 세상에 천명하신 것이다. 하늘이 대왕을 낸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랴.

개국612년 계미년(癸未年) 11월에 친제(親弟)인 휘(諱)를 세제에 책봉하여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하셨고 익월 왕세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묘당(廟堂)에 명하였는데, 이는 갑작스레 정전(正殿)에서 나온 것으로 조정 중신들이 알지 못하는 바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 3년여의 시간 동안 과인이 국정을 돌보면서 많은 실책을 범하였는데, 그 허물이 작지 않았으므로 예삿일 이라고 하기 어렵다. 즉, 군주 된 자의 자질이 근본적으로 크게 부족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또 평소 덕이 없고 품성과 행실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체력과 정신 또한 예전과 같지 않아 더욱 쇠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조정의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마땅히 후사를 세워 종사를 굳건하게 해야 할 때이다. 만일 불행한 사태가 가까이에서 촉발된다면 무엇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시었다. 무릇 국가의 근본을 세우는 것은 종사의 안위를 보전하는 만전지책(萬全之策)이니, 왕이 이를 능히 예견(豫見)하여 이처럼 힘써 행한 것이다. 이 또한 속유(俗儒)들이 알지 못하는 바였다.

개국613년 갑신년 정월 초6일에 왕의 병이 중하여 한성판윤(韓城判尹) 하빈군(河濱君) 이휘(李輝)를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명하여 후사를 부탁하고 당일 자시(子時)에 훙서(薨逝)하시니, 왕의 보령(寶齡) 예순이요, 치세 4년이었다. 국상(國喪)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백성이 없었고, 왕의 덕을 칭송함이 극에 달하여 밤을 지새우는 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왕께서는 큰 덕으로 대업(大業)을 이루셨지만 하늘이 수(壽)를 늘려주지 않았으니, 천도(天道)란 진실로 무상(無常)한 것인가. 왕이 재위에 머무른 기간이 수년에 불과하여 비록 백성을 감화(感化)시키기에 부족함이 있었으나, 왕을 잃은 신민(臣民)의 슬픔이 이와 같을 진데 그 덕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의 재위 4년 동안에 삼가 성헌(成憲)과 법도(法度)를 근간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펴고 행실을 삼갔으며 조정 중신을 예우하여 치도(治道)를 밝히셨다. 인사를 행함에 오직 능력과 후덕(厚德)함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청백(淸白)을 포장(褒奬)하고 간신을 배척하여 조정에는 어진 선비가 가득하였다. 성현의 학문을 독실(篤實)히 믿고 직언(直言)을 물리치지 않아 청류(淸流)들이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치(治)를 오늘에 이르러 볼 수 있다 하였는데, 그 성취함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천명(天命)인가.

이해 정월 11일에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서오릉(西五陵) 경내 명릉(明陵) 오른편 언덕의 갑좌(甲坐) 경향(庚向)에 안장(安葬)하였다. 능호(陵號)는 희릉(熙陵), 혼전(魂殿)의 전호(殿號)는 숭경(崇敬), 시호(諡號)는 경성정효(景聖定孝), 존호(尊號)는 공경광렬(恭敬廣烈), 묘호(廟號)는 장종(章宗)이시며, 우리 사왕(嗣王) 전하는 대왕의 동모제(同母弟)이시다.

[주(註)] 지문(誌文)은 개국614년(을유:2005) 3월에 당시 조봉대부 전예조정랑 겸시호도감낭청 성혼(成渾)이 짓고 개국617년(무자:2008) 10월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시호도감제조 서양갑(徐羊甲)이 고쳐 썼다.
http://www.1392.org/bbs?sajorec:126 게시물 링크 (클릭) 게시물 주소 복사하기
    윗글 밑글 목록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