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당
명륜당(明倫堂) : 성균관 문과 강학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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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예훈
작성일 개국626(2017)년 5월 14일 (일) 19:58  [술시(戌時):초경(初更)]
문서분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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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생] <제출> 문과 제3강 과제 제출
1. 논어 위령공편에서 공자는 말합니다.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 군자는 자기에게서 잘못된 원인을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잘못된 원인을 찾는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군자라 불릴만한 사람들은 조그만 일에도 책임을 통감하며 자책하곤 하였습니다.

또한 선조수정실록 제8권, 선조7년 1월 1일의 기사 ‘우부승지 이이의 시폐와 재변에 관한 만언소’를 보면 이이가 선조에게 경고의 말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이제 전하의 명철하고 성스러우신 자질로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지위에 계시고 또 그러한 때를 만났는데도 기강이 이와 같고 민생이 또 이와 같으니 …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 경성(景星)이 날로 나타나고 … 전하께서는 더욱 … 삼가고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재변이 거듭 나타나 무사히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이는 곧 하늘이 전하를 극도로 인애(仁愛)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시의를 모르고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 치적은 끝내 요원할 것이니, 민생을 어떻게 보전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어떻게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

이 만언소를 받아든 선조는 답하였습니다. “…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겠다.” 하며 대신들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과연 이때의 선조는 책임지는 군주라고 할 수 있으며 인의가 있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는 현대에도 치세기와 난세기에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군주이기 때문입니다.

치세기의 선조는 명군이자 성군은 아니더라도 능군(能君;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에서 따온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릴 만큼이나 사회모순 해결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당대의 모든 사회적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해결된 사회적 모순은 한 건도 없었고, 그럭저럭 회복된 모습만을 보인 것이 전부였습니다. 특히나, 세자로서 제왕학 등의 제왕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한계가 보였던 것입니다.

다만 난세기(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선조는 조선사상, 어쩌면 한반도 역사중 최악의 제왕으로 꼽힐지 모릅니다. 그리고 전반 25년의 치세에 대한 호평도 후반기의 악평이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전반기 25년의 선조가 그래도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면 후반기 25년의 선조는 책임을 절대로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모두 조정의 문관, 분조를 이끄는 아들 광해군, 앞서서 싸우는 장수들에게만 있었지 자신의 책임은 일말도 없이 자신의 잘못은 모두 하늘이 돕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는 작태를 스스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유능한 장수들에 대한 성급한 판단 :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파직 및 압송과 고문,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을 절멸에 빠지게 한 것, 임난 최초의 승리자 신각을 장계 하나만 믿고 처형한 것.
2. 끝없는 의심 : 기반없이 등극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조정통합보다 상호견제를 꾀한 것, 충무공 이순신을 의심하여 역도로 몰아 파직 및 압송과 고문을 가한 것.
3. 실패한 제가(齊家) : 임난시 피난길에 오른 왕자군들의 행보, 본인 스스로 여색을 심히 탐한 것, 후궁들의 횡포가 심한 것을 바로잡지 못한 것, 신성군과 정원군을 호성공신에 책봉한 것.
4. 백성을 버림 : 도성을 버리고 몽진한 것, 몽진하더라도 한강 이북 방어를 최선으로 하면 되겠지만 그런 움직임이나 명령이 없었기에 조선 국토의 태반이 왜군에게 넘어간 것,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망명하고자 한 것.
5. 책임을 전가함 : 하늘을 탓하며 자신은 오직 어려운 시기를 만난 것일 뿐이라고 매번 말한 점, 분조를 세워 군사조치는 모두 광해군에게 맡겨버린 것, 파직된 이순신을 조정의 탓으로 몰아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은 것, 조정이 무능하기 때문.
6. 공은 오직 본인과 명나라의 덕 : 제목이 곧 내용인 만큼 공은 상국이자 대국인 명나라 장수와 명나라의 황제, 그리고 명나라를 움직이게 한 본인에게 있다고 한 것.

이상 6개의 이유 외에도 그가 무참한 평을 들을 이유는 많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이유를 꼽자면 책임을 전가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찾을 책임은 없고 오직 조정의 책임, 장수들의 책임, 하늘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군주인 자신이 책임질 것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과연 군주에게 책임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과 조정의 오판으로 패배했다면 다시금 전략을 세워 승전을 노리면 될 일이지 그 책임을 오롯이 조정의 책임으로 전가할 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장수에 대한 의심이 일어난다 하여도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롯이 그 의심가는 심증만으로 아군 장수를 믿지 않고 왜적을 믿어 칠천량의 패전을 만들어 냈으니 과연 국난을 심화시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본디 군주는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이는 군주 뿐 아니라 모든 리더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직 대통령 또한 자신은 나라를 잘살게 하려고 하였을 뿐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무당과 자신을 따르던 공무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대통령의 명령이었다며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 시대에 내 탓이오.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과연 개개인에게 주어진 책임을 스스로의 책임이라 하며, 스스로 지고자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대에도 이와 같았으니 군왕이 스스로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데 그 어떤 사대부들이, 장수들이 패전에 대해서 또한 도망에 대해서 자신의 책임이라 통감하겠습니까. 극히 드물기에 임난이 장기화 되었으며, 수많은 백성이 죽어 살육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조가 최악의 군주라는 평을 받게 된데 한 몫 한 것은 상기된 것과 같이 책임의 전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책임의 전가라는 모습을 리더들이 본받지 말고 책임을 온당히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2. 호성공신은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호종했던 공신들로서 1등 2명, 2등 31명, 3등 53명으로 총 86명이며, 선무공신은 임난 당시 전장에서 전투하거나 후방을 지원한 공신으로 1등 3명, 2등 5명, 3등 10명으로 총 18명이다. 확실히 해야 할 것은 호성공신에 저 86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시, 의관, 마의, 별좌 사알까지 하여 총 34인이 더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호성공신의 확장판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위성공신(광해군의 항왜활동을 보좌하는데 참여한 한 공신) 80여명에 대해서도 호성공신과 비슷하게 친다면 보필한 자들만 200여명에 달하게 된다. 물론 이항복, 윤두수 등 많은 사람들이 위성과 호성에 각각 중복되긴 하지만, 실제로 나가 싸운 선무공신에 고작 18명에 책봉하고 나머지는 선무원종공신에 책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호성공신 정공신(친공신)만 120명에 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자신과 함께하였다는 유대감일 것이다. 다른 사대부, 양반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신을 버리고 먼저 도주하였거나, 자신이 도성을 버리고 몽진한다고 욕을 먹을 때에 물론 만류는 하였으나 일단 결정이 났으므로 함께 욕을 먹고 또한 고생하며 함께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지도, 자신을 무작정 욕하지도 않았으니 고마움에 책봉한 것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선무공신이 적은 이유는 반역의 씨앗이라고 여기며 의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이몽학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의병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킨 것이 큰 이유가 될 수 있는데 이후 선조는 정치적으로 자신감을 크게 잃고 생존한 장수들에게 높은 등급의 공신첩을 내리면 이몽학과 같이 난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당장 임난 당시에 이순신을 향한 열등감과 질투, 의심이 한데 모여 폭발한 결과를 보라. 이순신을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특히나 북관대첩의 공을 세운 정문부, 상주대첩의 정기룡,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세운 공은 크지만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것 또한 이를 의심하며 높이 두기 싫은 선조의 의심과 열등감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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