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당
명륜당(明倫堂) : 성균관 문과 강학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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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봉한
작성일 개국626(2017)년 5월 8일 (월) 00:35  [자시(子時):삼경(三更)]
문서분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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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임] 제23기 문과 3강 - 전쟁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선조.
안녕하십니까. 문과 교임 홍봉한입니다.

1. 적장자가 아닌 왕위 계승
    가. 의외의 후계 : 선조는 중종대왕의 서자인 덕흥군의 3남으로 원래대로하면 왕위 계승 순위권 밖의 인물이었습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선대왕인 명종의 순회세자가 죽음으로써 생기게 됩니다. 순회세자가 요절함으로 후사는 중종의 손자들 중에 선택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종에게는 세명의 왕후와 세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단경왕후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장경왕후의 아들은 앞선 인종, 후사는 없었으며, 문정왕후의 소생이 바로 명종, 그리고 순회세자가 죽은 상황입니다. 경빈 박씨의 복성군은 사사되었고, 희빈 홍씨는 2남이 있었으나 봉성군은 사사되었고, 1남은 을사사화 관련하여 사저로 쫓겨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창빈 안씨에게 영양군과 덕흥군이 있었는데, 명종 내외는 덕흥군의 아들들을 주목하였습니다.
    나. 하성군을 후계로 삼는다 : 어느날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을 대궐로 불어옵니다. 명종이 익선관을 내려 써보라하자 첫째와 둘째는 아무 생각 없이 써봤으나 셋째인 하성군만이 임금이 쓰는 것을 어찌 신하가 쓰냐며 거절합니다. 또 임금과 아비 중 누가 중하냐는 질문와 충과 효는 다르지 않다고 답함으로써 명종 내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줍니다. 이후 명종이 위독할 때 하성군을 불러 간호케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사에 대해 정확한 비답이 없던 상황. 명종은 다시 위독해져 일어서기는 커녕 말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대신들은 후사에 대한 답을 들어야했고, 중궁이 명종을 대신하여 덕흥군의 3남 하성군으로 후사를 정하였습니다. 이렇게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적자가 아닌 서손이 왕위를 잇게 됩니다.

2. 새로운 조선, 사림의 집권
    가. 사림의 집권 : 16세에 보위에 오른 선조, 역시 대비가 섭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비 인순왕후 심씨는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었습니다. 그래봐야 왕의 나이 17세, 어린 왕이었기에 척신 혹은 권신정치가 행해지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러나 외척이나 권신에 의한 국정농단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명종 말, 선조가 즉위하는 때에는 훈구대신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신진 사림이 새 시대의 주역으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중종이래 은거하였던 서경덕, 조식, 성수침, 이항 등, 그리고 퇴계 이황에게서 배운 신진 사림들이 명종 말년에 대거 조정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초기 신진 사림 사대부들의 정신은 하나로 모아져 있었습니다. 주자학을 기본으로 삼고 조광조 이래 학통을 이어받으며 절의를 숭상하는 정신으로 말입니다.
    나. 동서의 분당 : 동인이네 서인이네 하는 붕당정치의 시작은 선조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의정 이준경이 죽기 전 "붕당의 사론이 없어야합니다."며 유언을 남겼고 이는 붕당의 결성은 곧 반역 예비 음모로 다루어지던 게 관례였기 때문에 사림은 그의 유언을 불쾌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준경이 죽고 난 2년 뒤 이조정랑(정5품), 이조좌랑(정6품)의 자리를 두고 사림 간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이 두 자리는 품계는 비록 낮지만 문관추춴권, 삼사 관원 임명 동의권, 후임 추천권 등 인사권을 행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두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심각하게 대립하였으며 이 둘을 중심으로 붕당이 형성됩니다.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기에 서인,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기에 동인으로 칭하였습니다.

3. 조선조 최대의 옥사, 기축옥사
   가. 서인의 실각 : 선조는 붕당정치를 달갑지 않게 여기지만은 않았습니다. 제대로 된 제왕 학문도 배우지 못했고 그렇다할 기반세력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신하들이 모두 한편으로 왕을 통제하려 했다면 왕권은 크게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어있었으므로 선조는 이를 활용하기로 합니다. 선조는 율곡 이이를 적극 기용하는데, 대사헌, 대사간, 이조판서, 우찬성, 병조판서 등에 제수되고, 율곡이 하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율곡이 죽은 뒤 동인은 이이와 박순, 성혼, 정철을 심의겸의 당으로 몰아 공격하였고 결국 심의겸은 파직되었으며 서인은 실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조17년 1월 이이가 죽을때만 해도 서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선조는 선조18년 9월에는 동인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나. 정여립 역모사건 : 선조22년인 1589년, 황해감사 한준을 필두로 한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내용은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였다는 것이었으며, 선조는 정여립과 연관이 있는 이기, 이광수 등을 잡아다 국문하여 처형하고, 역모의 주동자로 알려진 정여립은 진안 죽도로 도피했고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자결하였습니다. 정여립이 죽음으로써 일은 한편 정여립이 자결을 했는지, 자결을 한 것으로 위장을 했는지, 정말 역모의 모의가 있었는지 등 무수한 의문을 남기게 됩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쥐게 되는데, 당초 추국책임자였던 우의정 정언신이 정여립과 친족이라는 이유로 체직되어 하옥되고 서인의 정철이 우의정에 제수되고 추국을 책임지게 합니다. 서인은 동인에게 죄명을 갖다붙이면서 옥사를 확대합니다.
   다. 옥사의 확대 : 정철 등 서인이 집권하면서 옥사의 칼 끝은 조정, 동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우의정 정언신, 김우웅 등은 유배 되었고, 이발, 이길, 이급 등이 잡혀와 국문을 받다 고문 끝에 죽었습니다. 이발의 가문은 9대조부터 끊임없이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선조는 이발의 어미와 자식, 조카도 모두 잡아들이라했고 노모 윤씨와 10살의 어린 아들이 고문을 받다 죽었습니다. 정여립으로 인한 이 옥사를, 기축년에 벌어졌다고 하여 기축옥사라고 합니다. 기축옥사는 2년을 가까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죽은이도 1,000여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죽은 조정 대신은 이발, 이길, 백유양, 최영경 등 10여 명이었으며 유배된 이는 정언신, 김우옹, 홍종록 등 3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같은 과장이 섞인 이유는 고문을 받다 죽은 이가 여럿 나왔을 정도로 조사의 과정이 가혹하였으며, 승려나 무사 등 정여립과 관계된 많은 이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라. 서인의 실각과 동인의 분열 : 옥사를 통해 동인의 피를 본 서인은 조정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선조24년인 1591년 동인은 정철을 탄핵했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정철을 파직하였습니다. 이때 정철 등 서인은 선조에게 큰 미움을 샀다고 하는데 바로 왕위계승에 대한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입니다.  정철이 왕의 미움을 사 실각하자 동인은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분열하게 됩니다. 이산해 등 북인은 강경파였으며, 류성룡 등 남인은 온건파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 선조는 한때는 서인에게, 한때는 동인에게 권력을 쥐어 주면서 어느 한 붕당이 지나친 권력을 갖게 하는 것을 견제하였는데, 이는 왕권 강황에 도움이 되었으며 또 선조의 정치력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방계 출신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정통성 콤플렉스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하들의 분열은 선조에게 기회가 되었고 이를 잘 활용하였습니다. 

4. 나는 전쟁의 책임이 없다. 임진왜란
   가. 통신사 파견 : 1591년 조선조정은 일본의 정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 통신사를 꾸려 상황을 확인하러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복귀해서 전하는 말이 달랐으니,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 것", 김성일은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내놓게 됩니다. 그럼에도 전쟁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순신, 송상현 등 능력있는 자들은 변방에 배치하였고 전국의 성을 보수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민심이 이반된다는 이유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나. 임진왜란 발발 : 1592년 4월 일본의 15만 대군이 대한해협을 건너와 7년 간 전쟁을 지속하니 이른바 임진왜란이 발발하게됩니다. 개전초 부산진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 도순변사 신립 등이 침략하는 왜군을 맞이하여 싸웠으나 전사하였고 선조와 조정은 파천을 떠나게 됩니다. 
개성에 도착한 선조는 전쟁의 책임을 물어 이산해와 류성룡을 파직합니다.
  
다. 나는 요동으로 가겠다. :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파천하였다는 이유로 오늘날까지 많은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1년이 지나서야 지킬 수 있게 되었고, 선조는 유래없는 분조를 단행합니다. 파천하기 전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으며, 이는 둘 장 하나에게 유고가 생겼을 시 뒤를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정을 둘로 나눈다 하여 분조라 칭했고 선조가 이끄는 대조는 의주로 피난했고,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가 전쟁을 지휘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유례 없는 분조를 단행하게 된 선조의 속내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명나라로의 망명 의도였습니다. "내가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옛날 안남국은 멸망하여 중국에 입조하니, 명조에서 병사를 동원해 안남을 회복시켰다. 나 역시 그리할 것이다."(선조25.6.17기사)"며 말입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강한 반대와 명나라에서 거부 의사를 표하였으므로 실제 망명은 하지 못했습니다.

   라. 김덕령을 잡아들여라 : 선조 29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납니다. 충청도 홍산 등 다섯 개 읍을 점령하는 등 큰 반란이었는데 곧 진압이 되고 조정은 국문을 하는 과정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김덕령은 의병장으로 이미 신망이 두터운 자였는데, 조정에서도 충용장이라는 칭호를 내리며 격려한 바있습니다. 그는 '공이 없으므로 죽어 마땅한 몸입니다'이라며 끝까지 반역의 혐의를 부인하다가 형장을 맞다가 결국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죽음은 의병활동을 크게 위축시켰습니다.
  
마. 이순신도 잡아들이라 : 전라좌수사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는 이순신은 전쟁 준비에 소홀해 하지 않았으니, 개전 이후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등지에서 연일 승리하고 세계 4대 해전으로 손꼽히는 한산도대첩에서도 승리를 이끕니다. 이어 부산진을 공격하여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어지러운 시기에 영웅이 나는 법. 그러나 선조는 달갑지만은 않았습니다. 선조는 되려 경상우수사 원균을 추켜세우는데,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선조29.6.26)", "원균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다. 국사를 위하는 일에 매우 정성스럽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선조29.10.21)" 등의 기사가 이를 보여줍니다. 결정적으로 강화회담이 수포로 돌아가고 가등청정의 재침할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고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출정의 명령을 내렸으나 이를 다르지 않자 선조와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잡아들이게 됩니다. 이순신은 삭탈관직되고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바. 선위하겠다 : 선위파동은 종종 임금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썼던 카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국가비상사태 때 선위파동은 오히려 국난을 해결하는 데 조정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전란 기간 중 수 차례 선위를 선언하는데 이는 몽진하고 극도로 약화된 민심과 왕권을 되세우는 방편으로 활용하기 위한 선조의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사. 중국 덕분이다 :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 나라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勳名)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선조34.3.14) 선조가 임진왜란을 보는 관점은 선조34년인 1601년 3월 14일의 이 기사에 고스란히 젖어들어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공은 모두 중국과 자신을 호종했던 신하들에게 있으며 상대적으로 우리 군사와 의병들의 공에는 인색했습니다. 이는 공신 책봉에서도 보이는데,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선무공신은 고작 18명이 임명되었는데 임금을 호종했던 호성공신은 무려 86명에 임명되었습니다.
   아.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다. : 선조는 전란 기간 중에서도 명확한 판단을 내린 적이 많았습니다. 개전 초 신하들의 대책 없는 서울사수 주장을 묵살하였고, 윤두수 등이 독자적인 작전을 하자고 할 때도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며 만류하였으며, 일본이 재침을 결정하였을 때 일부 대신이 임진년에 세 갈래길로 쳐들어왔으니 세 갈래길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하자 선조는 호남을 칠 것이니 방비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하다가도 잘못되면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신들이 고집을 부렸다는 등의 핑계를 댈 뿐이었습니다.

참고자료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 인종·명종실록, 휴머니스트.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선조실록, 휴머니스트.
   박준호, 풀어쓴 징비록 류성룡의 재구성, 동아시아.

   양재숙,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가람기획.


과제
1. 선조가 후대에 비판을 많이 받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서술하시오.
2. 선무공신에 비해 호성공신에 많은 신하들의 비중을 차지한 이유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서술하시오.
(서술방식에 제한은 없으며, 단 100자 이상 서술할 것)

* 출석과 과제 제출은 5월 14일(일)까지 입니다. 출석은 강의에 수강 했다는 댓글을 남겨주시면 되고, 과제는 비밀글로(예외설정 : tnwlsdnpdlxj) 제출해주시면 됩니다. 기한을 지나서 과제 제출 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이 있습니다.

개국626년 5월 08일
성균관 문과 교임 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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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예훈
626('17)-05-08 00:37
문과 유생 이예훈, 문과 제3강 수강합니다.
   
[2] 고무열
626('17)-05-08 08:38
문과 유생 고무열, 문과 제 3강 수강합니다.
   
[3] 태연
626('17)-05-08 18:48
문과 청강생 태연, 문과 제 3강 수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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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유생] <제출> 문과 제3강 과제 제출   고무열   626('17)/05/14-23:47     154    
   [성균관/유생] <제출> 문과 제3강 과제 제출   이예훈   626('17)/05/14-19:58     196    
   [성균관/청강생] <제출> 문과 제3강 과제 제출   태연   626('17)/05/11-20:10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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