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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강원/보덕] <서연> 국왕의 하루
이제 저하께옵서 옥좌(玉座)에 오르신 것이나 진배 없으니 경연(經筵)이라 함이 마땅할 것이나, 신이 세제시강원의 수장으로서 그동안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며 시강원 보덕으로서 마지막 임무를 행함이기에 이처럼 서연이라 하였사옵나이다. 신이 전하께 올리는 진언(進言)은 다름이 아니오라 열성조께옵서 하루 동안에 행하신 일정을 간략하게나마 전해드리오며 부디 전하께옵서도 열성조의 위업을 이어받아 성군(聖君)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오니 부디 내치지 마옵시고 받아주시옵기를 감히 청하나이다. 국왕의 하루일정 국왕의 자리는 참으로 바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왕이 처리하는 군국기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는 의미에서 만기(萬機)라고도 하였습니다. 국왕의 하루 일과는 아침, 낮, 저녁, 밤의 네 단계로 구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국왕의 사시(四時)라 하였습니다. 아침에는 신료들로부터 정치를 듣고, 낮에는 왕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만나며 저녁에는 조정의 법령을 검토하고 밤에는 자신의 몸을 닦았습니다. 마치 일년의 사계절처럼 국왕의 하루하루는 이 네단계의 업무로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국왕의 아침 일정 국왕의 기상시간은 늦어도 해가 뜨기 이전이라야 하며, 하루일과는 기본적으로 웃어른에 대한 문안인사로 시작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대비와 왕대비 등 웃어른에게 인사를 올려야 됩니다. 바빠서 직접 인사를 할 수 없을 때에는 대신 내시를 보내기도 합니다. 해가 뜰 무렵인 평명(平明)에는 학문토론 겸 정치토론을 위해 경연에 참석합니다. 경연이 끝나면 아침식사를 하고 조회를 시작하는데, 국왕의 공식집무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조회에는 백관이 모두 참석하는 정식조회와 매일매일 시행하는 약식조회가 있습니다. 정식조회는 조참(朝參)이라 하며, 매월 5일, 11일, 21일, 25일 네차례에 걸쳐 대궐의 정전에서 백관들이 국왕을 알현하는 의식입니다. 약식조회는 상참(常參)이라 하고 대신, 중신, 중요 아문의 당상관, 경연관, 승지, 사관 등이 국왕을 알현하는 매일매일의 의식입니다. 아침조회인 상참이 끝나면 이어서 승지를 비롯하여 공무가 있는 신료들로부터 업무를 보고받습니다. 이는 아침에 업무를 보고한다고 해서 조계(朝啓)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반드시 사관이 동석합니다. 국왕에게 보고하는 업무를 사관이 직접 듣고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업무보고를 받고 나면 이어서 윤대관(輪對官)들을 만나야 합니다. 윤대관이란 상참이나 조계에 참석하지 못하는 각각의 행정부서에서 순번에 따라 1명씩 국왕에게 파견한 관료들입니다. 국왕의 낮 일정 아침조회부터 시작해서 윤대관들까지 만나고 나면 벌써 정오가 가까워집니다. 정오가 되기 전에 간단히 점심을 하고, 정오가 되면 바로 주강에 참여해서 학문을 익혀야 합니다. 주강 이후에는 지방관으로 발령받고 떠나는 신료나 지방에서 중앙으로 승진해오는 관료들을 만나야 합니다. 특히 팔도의 관찰사나 중요지역의 수령들은 국왕이 친히 만나 업무를 당부하고 그 지역의 민원을 들어줍니다. 이렇게 몇 명의 신료들을 만나고 나면 벌써 해질 때가 가까워집니다.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는 국왕 자신이 반드시 챙겨야 할 업무가 있습니다. 바로 야간에 대궐의 호위를 맡을 군사들 및 장교들과 숙직관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호를 정해주는 일입니다. 이는 국왕 의 안전 및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왕의 저녁 일정 국왕은 해지기 전에 다시 저녁 공부인 석강에 참석해야 합니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저녁 후에도 낮 동안의 업무가 밀려 있으면 야간집무를 봅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대비와 왕대비 등에게 문안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제야 겨우 공식적인 하루의 일과가 끝난 것입니다. 국왕의 밤 일정 업무가 산적해 있기 때문에 국왕께서 자기 자신만의 호젓한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용히 명상에 잠기거나 보고 싶은 책이라도 뒤적이려면 한밤중에나 가능합니다.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국왕께서 한밤중에 조용히 독서하거나 상소문을 읽는 것을 을람(乙覽)이라 했습니다. 이는 밤 9시에서 11시 사이인 을야(乙夜)에 책을 열람한다는 의미인데, 밤 늦도록 열심히 하라는 훈계성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시간이 되어야 틈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국왕의 업무일정은 이렇게 빠듯합니다. 이외에도 국왕이 참석해야 하는 무수한 공식행사나 국가제례 등이 있으며, 대소신료들과 전국의 양반 그리고 일반 농민이나 노비들이 올리는 상소문과 탄원서도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업무를 챙기자면 사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마련입니다. 국왕께서 챙겨야 하는 업무는 만기라 불리듯이 산처럼 많습니다. 그러므로 국왕께 병이라도 생기거나 또는 국왕께서 업무에 싫증을 내고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 결재해야 할 문서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적체되는 문서 하나하나가 국왕에게는 지겨운 업무일 수도 있지만, 이 문서가 결재되기를 목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나라의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국왕께서는 잠시도 한눈을 팔 여유가 없습니다. 병들어서도 안됩니다. 훌륭한 국왕이 되시려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업무능력과 육체적 건강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왕의 자리가 쉽고 편안한 것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도리어 때로는 옥체(玉體)를 해칠 만큼 업무가 과다할 수도 있을 것이요, 만백성과 문무백관을 두루 살피자면 여간만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옵나이다. 하오나 이는 하늘이 전하께 내리신 과업이니 부디 성덕(聖德)을 베푸시어 성군이 되시옵소서. 개국613년 1월 12일 세제시강원 보덕 겸 예조 참의 신 이동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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