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神父_03 - 보덕 작
감옥에서의 모진 옥고를 이기고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고향에는 자신의 후임으로 일본인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예전의 신부님을 그리워하던 신도들의 표정은 모두들 굳은 표정들이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온갖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직 신앙심 하나로 버티어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던 신도들의 신앙심은 이 일본인 신부로 인해 공든 탑이 무너진 양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 신도의 말에 의하면 일본인 신부는 걸핏하면 자신들을 불러다 일본을 위해 충성을 바칠 수 있도록 평신도들의 활동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지원병들을 모집하는 데에 동원하도록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지들을 이용하여 이를 지키지 않는 신도들에게는 모두 성당에서의 활동을 일절 금한다는 식으로 내세우는 어이가 없는 일을 자행했다고 했다. 이를 듣고 안드레아는 이후 제 집에 칩거하며 술과 벗이 되어버렸다. 이제 하느님도 예수도 다 필요 없다. 찬미한다고? 흥! 어림 턱도 없다. 찬미? 얼어 죽을 찬미 좋아한다.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였다. 무심히 바라보시기만 하는 하느님 당신을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꽃봉우리 같은 옥분이. 분이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분이의 집에 들어갔다. “분아―” 분이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누구세요?” 웬 나이 먹은 아낙네가 이를 보고는 놀라워했다. “아 아니!”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양으로 분이의 어머니는 그를 제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아낙네는 미심쩍은 듯 이마를 짚어보더니, “이게 무슨 일이람. 열이 펄펄 끓네!” 분이 어머니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분이를 불러들였다. “이애, 분아! 신부님 방에 계시는데 열이 펄펄 끓는단다.” 어머니의 다급한 모습에 분이는 서둘러 신부가 있는 방으로 옮겼다. “아이고, 신부님!” 울며불며 신부님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기도를 올리고, 또 올리고 하였다. 깊어가는 밤에 일어난 소동으로 분이네 집은 한동안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분이는 아파하는 사제 안드레아의 병수발을 극진히 해주었다. 자신이 차려 준 아침상을 군소리 하나도 내지 않은 채 남김없이 먹어 치워주곤 했던 그가 마침 자신의 코앞에서 아픈 몸으로 쉬고 있음을 볼 때 눈물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안드레아가 감옥살이만을 하지 않길 바라고 바랐는데 안드레아가 감옥살이를 할 줄 누가 알았을까.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요?’ 눈물로 밤을 지새워 그의 손을 꼭 잡은 분이의 손등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다음날에도 안드레아는 깨어나지 못했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옥분 어머니가 직접 읍내로 가 양의에게 왕진토록 하여 자신의 집에 들여보냈는데 약으로 쓸 수 있는 뾰족한 묘안이 없다며 자리를 떴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옥분 어머니는 제풀에 지쳐 친정집으로 간다며 옥분에게 집을 잘 보아 달라 당부한 뒤 얼른 사립문을 통해 바깥에 가버리고 말았다. 신부라는 고귀한 자리를 차지한 안드레아의 갑작스런 행동에 옥분은 깊은 의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분아.” 안드레아는 눈을 뜨지 못했으나 입으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옥분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분이는 안드레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너랑 나랑 둘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는 분이와의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눈을 서서히 뜨기 시작한 안드레아는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네가 내 마누라였으면.” 소원이 없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이 말을 듣던 옥분은 무슨 말인가를 잘 몰랐다. 횡설수설하던 그의 모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옥분의 극진한 간호 덕이었을까. 안드레아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고향을 떠날 바에야 분이와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염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라는 직분(職分)을 지닌 그로서는 차마 해서는 안 될 선(線)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원칙을 고수하면서 위선의 탈을 쓴 주위의 사제들을 보기 싫어한 탓이었다. 미사를 드릴 때 걸핏하면 내 탓이오 자책을 해놓으면서 자신의 일신을 보존하기 위해 늑대의 탈을 쓴 왜인들에게 협조를 하다니. 예수의 배반한 제자인 유다처럼 되어버린 그들을 대하기가 매우 거북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사람을 보내 전해 드리도록 하였다.
어머님. 소자 어머님의 뜻에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님의 소원이었던 사제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터로 저는 그 길을 버리고자 합니다. 이곳에서 분이랑 천년만년 천생연분으로 살아가고자 하오니 이를 보시어 허(許) 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그러나 이를 본 어머니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하여 분이의 집으로 들어가, “분이 네 이년! 당장 나오너라!”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쳐댔다. 공연히 남의 집에서 웬 소리를 치는지 영문도 모르는 새에 분이 어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사모님. 어찌된 일인지.” 그러자 안드레아의 어머니가 그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이년이 내 아들놈 인생을 망쳐 놔!”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다요, 이 머리는 내놓으시고.” 하며 분이어미는 간신히 내려놓았다. “분이는 어딨소!” 하느님 아래에 같은 형제자매끼리 무슨 창피인지 분이어미는 기분이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없이 대뜸 분이를 찾아대는 안드레아의 어머니를 보고 차마 이실직고하기는 어려웠다. “분이를 찾지만 마시고 어찌된 연윤지 말씀해주세요.” “그럼 그리 하지요.” 분이어미의 물음에 응하기라도 하듯 안드레아 어머니는 제 손에 쥐었던 아들이 쓴 편지를 직접 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아들이 갑자기 이런 반응을 하기에.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소. 성직자인 내 아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니 그 연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해서 왔소. 혹시나 분이 그 아이가 우리 아들에게 혹하게 한 건 아닌가 싶어서 놀란 가슴으로 찾아온 것이오.” 간신히 진정하여 말하는 안드레아의 어머니. 그를 바라보는 분이어미는 영문도 모르게 머리채를 잡힌 것도 서러운데 다른 집 아들의 행방을 찾다니. 난감해도 너무나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이를 눈치 챘는지 어쨌는지 그는 읍내로 간 지 오래되었다. “우리 분이는 모르는 일입니다. 싸게 가시오.” 전라도 말씨의 분이엄마의 불호령에 안드레아 어머니가 움찔했다. “하이고, 남의 집 아들을 여기서 왜 찾소. 서울서 김 서방 찾기가 그렇게 어렵소. 우리는 댁의 아들을 어떻게 해코지 한 바가 전혀 웂소. 어쨌든 정 못 믿거들랑 싸게 가서 주재소나 가서 말해보시구려.” 아들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분이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안드레아 엄마도 별다른 묘책(妙策)이 없었다. | 
정병욱
[문학회지] 제0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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