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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대표] <간행> 보덕문집(寶德文集) 12
* 풍고전_楓皐傳 <上> 풍고전_楓皐傳 <上> 김조순(金祖淳)이 몸져눕기 며칠 전. 왕은 어의를 불러다 병환을 바로 잡도록 명하였다. 그때 조순이 사위의 이러한 정성이 깊은데도 불구하고 거절하였다. 『인명(人命)이 재천(在天)이거늘.』 이러한 말을 남겨놓은 것은 사경을 헤매다시피 하는 둘째아들 김원근(金元根) 때문이었다. 본래 원근은 조순에게는 무엇보다 근심거리를 안겨주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부모의 염려와는 다르게 무엇보다 정직했고, 첫째 김유근(金逾根)과 셋째 김좌근(金左根)과는 매우 달랐다. 첫째 유근은 이미 평안도 감찰사로 부임할 때 서제부(庶弟婦)와 애첩(愛妾)을 대동하여 부임지에 이르는 마당에, 덕천군의 아전이라는 자로부터 서제부를 여의었으니 주위에서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기에 김조순의 말년에도 불운이 드리워진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 이후로 김조순의 인품에 흠집이 크게 났고, 셋째 좌근 역시 큰형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부왕을 잃은 금상이 친히 친형제처럼 대하고자 했으니, 이렇듯 김조순의 세도는 날이 갈수록 기울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로 두 아들이 아비의 임종을 지키니, 『원근아.』 난데없이 병자는 둘째아들을 불러본다. 자신의 대를 이은 원근이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로 시달리더니 아비가 앓을 적에 몸져눕고 말았다. 『작은형님, 몸져누웠나이다.』 김조순이 허허 웃는다. 『병을 달고 살아서야. 그러느니 차라리 불구자(不具者)로 살다 죽는다면 속이 편하고 좋았을 것을. 어이하나.』 조순은 원근으로 하여금 대신 유언을 전하려는 듯 유근에게 응시한다. 『유근아.』 하자, 『네.』 하면서, 유근은 아비의 속삭임을 듣기 위해 귀를 대본다. 조순은 속삭이듯, 『네가 가서 아비의 마지막 청을 전해다오.』 하던 끝에 「손자에게 집안의 기틀을 다지도록 말해줄 것」을 당부토록 했다. 무슨 말인지 대강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씨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원근이 뿐이라는 것을 맏이 유근은 잘 알고 있었다. 이튿날 조순은 향년 예순 여섯을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 아버지의 부고(訃告)를 들은 원근은 병든 몸임에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부짖었다. 곁에 아비를 부축하던 아들 병지(炳地)도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비보에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님 가시는 길을 마중하지 못한 불초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상여를 메는 상두꾼들의 호령에 따라 몸이 불편한 원근 부자와 그 뒤를 따르는 유근 내외와 좌근 내외는 모두 곡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묘는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에 있다. 그렇게 김조순을 땅에 묻은 지 두 달이 되어 원근도 생을 마쳤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우를 여읜 유근을 아우에게 만큼은 진한 우애를 되돌아보듯 시 한 수를 지었다. 하늘 끝까지 바야흐로 슬픔을 안았고 몸 절반을 베어낸 슬픔은 또 어찌하랴. 불행히도 집안 운세가 막혀버리니 골상을 징험한 길이 온전히 없어라 깊은 슬픔은 마치 하루와 같으며 커다란 이별은 이미 삼년이어라. 꿈결에서도 오히려 못만 나지만 유명은 달리해도 어찌 내버려두랴. 이후 유근은 자연스레 권력의 중심부에 우뚝 서게 되었다. 아버지의 덕택으로 다져진 반석 위에 왕권과 동급인 권좌에 앉은 그는 매부요, 왕인 순조의 승하와 더불어 손자뻘이 되는 왕손―효명세자의 아들―이 즉위함으로써 섭정을 도맡아 했다. 그 모후인 세자빈 조씨는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왕대비에 앉았고, 여동생인 선왕의 왕비 명경왕비는 대왕대비에 앉았다. 대왕대비 김씨는 며느리 조씨가 앉았으므로 그녀에게 신정왕후에 봉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죽은 아들을 세자에게 더 높이어 익종으로 추숭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자식 잃은 어미의 정성이었다. 이제 불과 나이가 여덟인 금상은 할머니의 섭정에 의해 정치수업을 받게 되었다. 훗날에 헌종이라 칭하는 이 어린 왕의 깊이를 아기 어려운 의중을 두고 안동김씨들―일가―은 알아내지 못하였다. 김조순이 그토록 싫어했던 붕당이 사라지고, 홍국영도 넘보지 못한 세도가의 모습으로 김씨 일가는 우뚝섰다. 어찌하여 그 붕당이 생겨난 것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조순의 집안은 원래 대대손손 명문가로서의 지위를 지키던 바가 있었다. 병자호란 때 스스로 화마에 몸을 던진 김상용도 있었고, 또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삼형제의 명필은 조선 팔도를 통틀어서는 가보로 여길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했었다. 그러나 이 집안도 그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김창집이 경종 말년에 연잉군을 필두로 한 역모사건에 모의, 또는 가담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아 죽은 것이었다. 이에 김씨 일가는 잠시나마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본래 서인 계열이었던 노론에 속하였으므로 김창집의 후손인 조순으로서는 집안의 가풍을 불가피하게 따라야만 했다. 한편 소론을 대표로 했던 경종이 하세하자, 동생인 연잉군이 서인의, 아니 노론의 지지를 한몸에 받은 채 왕위에 올랐다. 이이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에 보답한다는 듯이 그의 신원을 풀어주었다. 김창집이 죽은 뒤 몰락의 위기에 대비하여 그 부인이 자신의 어린 사내하인을 불러다 자신의 손자를 대신하여 죽게 하니, 이 사연을 접한 영조가 그 집안을 다시 일으키게 하기 위해 김창집을 신원해주도록 명하여 집안이 기울어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한미하게 살 수밖에 없는 집안 사정만큼은 막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김창집의 증손자인 이중(履中)이 서흥부사로 부임을 가게 되면서 집안은 점차 윤택해져 갔다. 그의 부인은 신사적(申思迪)의 딸이니, 그녀 역시 부친이 지방관으로 부임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지아비를 따라 서흥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중은 슬하에 자식들을 많이 두었다. 맏이로 아들인 조순을 두었고, 차남 복순과 둘이나 되는 딸을 두었다. 특히 맏이인 조순에게 애착이 갔다. 그러한 까닭으로 조순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시피 했다. 물론 조순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은 실력이 출중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역적의 집안이라는 낙인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직 반가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겸손을 잃지 않았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조순, 아니 낙순(洛淳)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부르심이 떨어졌다. 『아들아.』 웃으면서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조순은 잊지 못한다. 『이제 네가 어엿한 성년이 되었으니 혼례를 치러야겠구나.』 그러면서 하는 아버지의 말, 『내가 점찍어둔 규수가 있는데, 그 정랑을 지낸 적이 있다는 심 대감의 여식이다.』 순간 조순의 가슴에는 이상한 느낌이 감돌았다.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아버지의 사명을 어찌 거슬러야 하겠는가. 『그렇지만, 저는.』 하며 거스를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자신이 더욱 힘들 따름이었다. 조순에게는 꿈도 많고 하고픈 일이 더욱 많았다. 이제 갓 방년에 접어든 이팔청춘인데 세상의 이치인들 모르고 살겠는가.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거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혼례를 치른다면 내 이 푸르른 꿈들은 한낱 물거품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기에는 힘에 벅찰 뿐만이 아니라, 또 다시 집안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는 아찔한 상태로 이어질 수 있으니 좀 더 자중해야 한다는 것을 유념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 풍진 세상에서 가족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 큰 일을 해내다가도 고비가 생기게 마련인데, 내 처와 자식들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내 이 푸른 꿈을 꺾어야 하겠는가.」 조순의 고뇌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깊어져간다. 『왜 그러느냐. 싫은 거냐?』 겉은 온화하나 말투는 못마땅한 것 같이 묻는 아버지의 모습에 조순은 마지못해, 『아닙니다. 아버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도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참한 규수라는 구나. 그 규수는 학식도 깊고 하니 덕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낙순아. 이 세상에 험한 길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너를 장가보내주는 거란다. 장가를 가서 자식을 보아야지만이 이 집안을 바로 잡고 살리는데 이롭지 않겠느냐. 내 아들 낙순아, 부디 이 못난 아비의 한을 풀어주려무나.』 갑작스럽게 아버지로부터 조순이 절을 받는 꼴을 보고야 말았다. 아비의 비굴한 모습―자식에게 무릎을 꿇는 모양―을 보이는 아버지를 받아들이기에 버겁고 두렵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모든 것이 후회가 든 조순으로서는 혼약이 필요로 하다는 것쯤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조순의 난처한 모양은 아버지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이루어줄 수 있다는 자그마한 기쁨을 주었다. 그렇게 여차저차한 절차를 다 마친 뒤 마침내 심씨 집안과 혼약을 맺었다. 장인 감이 된 심 정랑은 아버지의 청에 쾌히 승낙하여 사위인 조순을 맞이했다. 그때 마침 그 옆에 자신의 신부가 될 규수가 눈앞에 보이자 아바지의 말마따나 참하고 얌전한 규수였다. 『어서오게, 김 서방.』 심 정랑의 말에 조순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옆에 있는 규수는 수줍음을 타는 듯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허허허, 농일세, 농이야.』 사위감이 무안해할까 심 정랑이 호탕하게 웃어댔다. 어여쁘고 참한 규수가 서방될 사람에게 정중히 대하였다. 심정랑이 안내해준 곳은 사랑채였다. 사랑채에서 다과상과 함께 엿을 날라오자 조순이 깜짝 놀라며, 『이건 무엇인지요.』 혹은, 『이걸 어디소 놓으셨나요?』 하면서라도 물어봐야 하는데 그는 할 말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고 난처했다. 『내 자네 아버님께 사위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엿이라고 하더구먼.』 하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알다시피 군수 생활만을 하다보니 살림이 윤택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엿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고, 삼시 세끼 챙겨먹을 형편도 아니었는데 어릴 적부터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자연스레 먹은 엿이 이제는 그의 기호품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엿을 우리 딸이 만들었다네. 마음씨로보나 몸가짐으로 보나 비단결처럼 곱기도 하지만, 먹을 것을 만드는 데에도 아주 솜씨가 있다네. 일품이지.』 심 정랑은 딸의 칭찬을 이 정도로 하고 갑작스레 궁궐에서 전갈이 왔다는 이유를 들어 나간 사이에 조순은 은밀하게 규수를 불렀다. 『낭자, 내 할얘기가 있소.』 그러자 규수, 아니 낭자가 순순히 응했다. 『말씀하십시오.』 조순이 헛기침하며, 『정녕 그 엿을 낭자가 만들었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네, 그러믄요.』 하며 눈길을 떨어뜨리며 수줍어한다. 『참으로 맛있구려.』 시선을 낭자에서 벗어나며 조순은, 『덕분에 잘 먹었소.』 하며 되려 쑥쓰러워한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내 품에 시집을 오게 되면 부탁을 하겠소.』 낭자가 끄덕였다. 『만일 벼슬을 하게 될지라도 일년이 될 지 십 년이 될지 모르오.』 조순은 망설인다. 『그런데도 그대는 내 부인이 될 수 있으시겠소.』 하고 지아비가 묻자 『네.』 하며 낭자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조순이 정말이냐고 물어보았으나 낭자는 항시 같은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러자 조순은 다시금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만일 내가 대역죄로 몰려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말이오? 훗날 지아비로 섬길 이에게 이런 끔찍한 말을 들은 낭자는 짐짓 망설이더니 이내 끄덕인다. 자신의 신부가 될 이 여자를 아버지가 고른 것이 온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혈기가 왕성한 지아비를 어떻게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일관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부인으로 얻은 이상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더구나 조순에게는 풍족하진 않지만 집안의 살림은 그럭저럭 먹고 입고 잘 수 있는 기본적인 것만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기에 큰맘을 먹고 낭자를 맞이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윽고 두 달 뒤에 조순은 심 정랑의 여식과 혼약을 올렸다. 혼약을 올린 지 어언 넉 달이 지나서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혼약을 하고 나서부터 점차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치러진 혼사인 만큼 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점차 커져갈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걸핏하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는데 그와 죽마고우로 지내고 있던 김려도 이에 한몫을 하였다. 자네도 나도 다 갈 데 없는 사람이구려. 차려진 술판에 낙순과 이야길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허허허허. 웬 신세한탄인가. 이팔청춘이 지났는데 나라에서 불러들이지 못하니. 에잇! 개나 소나 양반이구나! 낙순은 웃음을 머금으며 술잔을 기울일 뿐. 혼란스러운 세상을 바로잡아보지 못하고 날개를 잃은 새처럼 되어버린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술판에 기생들이 대동하게 되자, 분위기는 한층 더 절정에 이르렀다. 순간 낙순의 곁에 기생이 나타났으나 여느 친구들과는 다르게 그를 외면하였다. 기생의 아양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줄곧 술만 마실 따름이었다.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녀자를 두었는데 기생의 아양에 홀려서야 되겠누.｣ 그렇게 주연이 파해지고 낙순은 밤이 깊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독수공방(獨守空房) 기다리는 부인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 발을 조심조심 내딛었다. 그런데 자신의 방에 불이 꺼져 있지 않았다. 불을 환히 밝혀두고 기다리는 부인의 그림자가 창밖에 내비치자 비로소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태연한 척 헛기침을 해댄다. 그러자 안에서 놀란 듯 부인이 벌떡 일어나 서방을 맞이할 준비를 한 다음 서둘러 서방을 맞이하러 밖으로 나선다. 그때 낙순은 부인의 성품을 비로소 깨달았다. 갓 신혼인데 왜 늦게 오셨느냐 한마디도 않고 꿋꿋하게 서방의 빈자리를 지킨 것이다. 이를 지켜본 낙순은 순간 기생들과 자리를 한 것이 못내 미안스럽기까지 했다. 부인, 이리 야심한 밤에 몰래 들어왔으니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소. 그러나 부인은, 아니옵니다. 어찌 한낱 여인네가 서방님을 밤늦게 왔다고 박대(薄待)하겠나이까. 하며 일소했다. 낙순은 좋은 아녀자를 염두에 둔 부모님의 심정을 비로소 깨달았다. 역적의 집안의 자식이나 다름이 없는 자신을 묵묵히 지키고자 하는 부인의 마음씨도 마음씨였지만 무엇보다도 종가의 며느리로서의 체면을 차려서라도 남편을 극진히 모셔야 한다는 가풍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낙순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엄격했지만 역적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수치를 겪어야 했던 악몽만큼은 떨쳐버리고 싶어서였을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을 하였다. 선조 때 문신이었던 송강 정철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강원도에 지방관으로 부임해 갔다고 하는 시인 관동별곡을 지어 필력을 휘둘렀지만, 술이 없이는 시를 읊어대지 못하는 성미 탓에 공연히 술고래라는 욕설을 퍼부어대기도 했다. 거기다가 본래 성미가 고지식하다 못해 포악한 탓에 상대방을 있는 꼬투리 없는 꼬투리를 잡아 역적을 만들어내는 파렴치한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다만 낙순이 만큼은 자신의 집안에 대소사를 가지고 남을 공격하기는 싫었으리라. 아니 부끄러웠으리라. 하여 그는 지음이나 다름이 없는 담정 김려라는 친구를 만나 세상이 이렇거니 저렇거니 하며 주고 받다가 이내 심심하다시피 하면 시를 지어 주고 받고는 했다. 내 성은 김 그대 성은 황 묻노니 황이란 금의 빛 아닌가 황과 김은 떨어질 이유 없지 성이 같다고 해도 손해볼 게 무어 있소 그대는 소동파를 백세의 선비로 알고 스승으로 삼아 문장만 높인 것 아니라네 나도 또한 평생토록 깊이 사모했으니 두 마음 서로 같다해도 틀린 말이 아니리라. 이를 듣던 담정이, "허허허, 자네 아주 나를 기어이 놀려먹어 대려고 작정했구먼." 할 때면 낙순은, "우리 피차간에 황금이 되어 영원토록 영화를 누린다면 더 없이 기쁘지 아니한가." 하며 농을 주는 것이다. 이렇듯 낙순과 담정은 그렇게 산천을 유람하며 방황의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떠도기를 며칠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의 분위기가 심상치는 않다. 부인은 연신 훌쩍거리고, 사랑채 안에서는 호통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체 사대부의 자제란 놈이 허구한 날 방랑객이 되어 떠돌아다닌단 말요?" 그러자 부인이, "낙순이가 무슨 괴로운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온 것 뿐인데 왜 그리 호들갑을 하시우?" 대꾸를 할라 칠 제, "시끄럽소! 임자는 낙순이를 편들어보려는 게요? 아님 나를 들들 볶아서 이 집안을 망하게 하려는 수작인고?" 사랑채 밖에서 흐느끼며 지아비를 기다리는 부인을 본 순간 그는 못내 미안함이 앞서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때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나머지 아버지가 문을 벌컥 열어 젖히어 밖을 나오려고 하였다. "아버님, 소자 낙순이 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이놈!" 하며 버선발로 내려오더니 이내 낙순의 어깻죽지를 막대기를 들어 내리쳤다. "그래. 이 집안이 역적질을 하는 집안이라서 한량배 노릇을 하고 왔는고?" 나이는 열다섯. 아직 한창 창창한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던지고 싶은 심정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가장이 집안을 비우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심정으로 유람을 하였건만 오직 집안의 가풍만을 따지려는 아버지의 불호령은 오히려 반항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런 낙순이의 일탈에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이중은 가라앉지 못한 화를 애써 누르는 모양이었다. "아버님. 송구하옵니다." 생전에 김이중은 오직 지방관으로만 돌아다님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는 데에 주력해, 조상들이 저지른 제 집안의 업보를 씻은 사람이었다. 오직 목민에 힘씀으로써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을 용서받고자 한 일련의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마음을 모르고 한심하게 나돌아 다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괘씸도 했고, 또 제 명성에 흠집을 내려고 해도 아주 작정을 하였다는 생각에 치를 떨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렇게 표현을 할 뿐. 실상 아버지는 자상하였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어 금슬이 좋을 뿐만 아니라 첩을 불러들이지 않았으니, 가히 청백리가 부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낙순이 글재주가 뛰어나기도 해 동네 사람들에게 내 자식이 쓴 글이 명필이라며 소문을 낼 정도로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한했다. 때문에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에 오늘날 낙순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낙순이 한 순간 일탈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버지는 낙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조선 사회 아래에서 그 젊은 혈기를 억누르기는커녕 주체하지 못해 시정잡배와 같은 생활을 벌이니 아버지는 차마 조상들께 뵐 명목이 없다면서 탄식을 하고는 했다. 그러잖아도 아들이 패관잡기에 빠져들어 행여 자신의 집안에 해가 될까 조마조마했던 건 사실이었다. 더구나 선왕인 영조 임금 이후에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직접 문체반정을 주도하여 패관에 빠져 있는 신료들의 정신적 해이를 바로 잡겠다고 나선 마당에 낙순이 집안을 일으킬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집안을 구렁텅이로 내몰아 망치려고 할 때에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혼을 내었을까. 그 마음을 깨우칠 만도 했다. 그러나 그의 무한한 욕망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휩싸고 도는 듯 했다. '그렇다. 내가 살 길은 이것뿐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창작에 열을 올렸다. 그는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무엇인가에 집중하여 글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필력은 분기충천해 있는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고, 이를 알 리 없는 부인은 이를 지켜보다가 지쳐서 행여 남편이 몸져누우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하여 몸종에게 가 안부를 물을라치면 시끄럽다고 호통하기를 여러 번 이었다. 집안을 다시 일으킬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잡배들과 어울려 집안을 등쳐먹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그는 기로에 서 있었다. 그는 글을 쓰기에 앞서 문득 문체반정의 여파에 당당히 맞서는 이를 떠올렸다. 연암 박지원. 그는 제 친척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서장관으로 간 일이 있었다. 청나라는 더욱이 조선보다는 더욱 거대한 국가가 아니던가. 그곳에는 진귀한 서적들은 물론이고 문명의 이기를 부각시키기라도 하듯 서양식 문물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로 명나라가 멸망시킨 청나라가 서양의 문물을 도입한 덕분에 옹정제와 강희제, 그리고 건륭제에 이르러 선진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중국의 독특한 문체에 눈을 돌렸다. 박지원은 이렇게 해서 자신도 조선에 새로운 문체로서 글을 써보리라는 굳은 다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장관의 신분으로, 여러 권의 책들을 사다가 조선에 들여왔고 이후에 열하일기라는 저서를 통해 새로운 문체에 도전을 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허생전과 같은 명작들인 것이다. 이러한 영향 탓인지 조선의 사대부들, 곧 실학을 받아들이는 이들 사이에서 청나라는 동경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점차로 늘어났다. 낙순의 친구인 김려 역시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낙순도 친구를 따라서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바로 패관잡기라는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래서 덕분에 낙순은 한 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바로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소설이었다. 세월이 흘러 낙순은 마침내 아버지의 바람대로 조정에 출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때는 1785년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는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시교 직을 맡아보게 되었는데 그는 한밤중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 어김없이 패관에 대한 서적들이었다. "이야,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네 그려." "그런가? 하하하하. 나는 이 필체를 볼 적마다 나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유희로라도 쓸 수 있을까 하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드네 그려." 규장각의 동료들과 이를 읽고 또 읽기를 주저치 않기를 수십 일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큰 위기가 닥쳐왔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간 틈을 타 혼자서 책을 탐독하고 있었을 때였다. 게다가 과중한 업무 탓에 이를 잠시 멈추어 쉬고 있을 즈음에 그는 금단이 일어난 듯 패관서적을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이상황과 함께 당송백가의 소설이며 평산냉연이라는 책들을 읽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이윽고 상감의 거동에 내관이 상감마마가 듭신다는 소리에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하.” 황망히 맞이하는 상감이니만큼 이들의 촉감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책들을 감추려고 들었다. 하지만, “멈추어라.” 하는 왕의 말이 재빨리 떨어지자 두 사람은 그대로 얼음장처럼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서책은 무엇인고.” 하는 물음에 상황이 무릎을 꿇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이옵니다.” 거짓을 아뢰자 임금이 웃으며 그 유치한 책을 왜 가지고 있느냐고 하문(下問)하였다. 이들의 입은 자물쇠처럼 굳어져갔다. “하하하하. 자네들의 눈초리만 보아도 우둔한지 아닌지가 보이는데 어찌한다.” 이때, “신들을 죽여주시옵소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낸 낙순이 엎드려 이실직고를 하였다. 임금은 그 책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이에 낙순이 그 책을 내놓자 임금의 눈빛은 매우 엄중해졌다. “평산냉연이라.” 패관잡기를 없애어 소위 문체반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왕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한때 부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지 못하여 번번이 호된 질책과 꾸지람을 듣고, 잡서에 빠져들어 세자의 몸으로 폐위되어 뒤주에 갇힌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생각하여 기교가 만연한 문체를 바로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개 규장각(奎章閣)의 관원이, 그것도 왕이 하사한 녹봉을 먹는다는 자들이 보잘 것이 없는, 아비의 목숨을 빼앗긴 패관잡기를 읽다니.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왕은 이렇게 묻는다. “이 책의 내용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볼 뿐. 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낙순은 한 번 들킨 이상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이 책은 공자님의 덕이 높다 칭송한 책이옵니다.” 하고 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알았다.” 하고 그 책을 든 채 자리를 비켜냈다. 다음날 조정에 회의가 열렸다. 임금이 납신 채 어제의 일을 들어 문체반정에 대한 정면도전이라 선포하였다. 하여 낙순과 상황을 불러내어 이를 나무라니 신하들은 아무도 이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평산냉연이 왕의 수중에 놓여진 이상 죽음이나 유배는 불가피한 상황이리라 신료들은 당연시하고 있었다. “김낙순은 들어라.” 왕의 옥음(玉音)이 내려졌다. “네, 전하.” 낙순의 대답을 듣고 왕이, “김낙순과 이상황은 오늘 이후에 패관잡기를 읽은 경위와 그에 대한 반성문을 쓰도록 해라.” 명을 내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일제히 의아해했다. 왕이 갑작스럽게 유배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놀란 것이다. 낙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성은이 망극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왕의 갑작스런 명에 낙순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자신이 유희삼아 낙으로 삼아 살아온 그의 필체를 왕에 대한 복종으로 인해 한순간 깎여야만 하는 수모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만회하면 좋겠는가. 만일 이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조상의 업보를 다시 짊어지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자칫하다간 자신은 물론 제 어버이와 처자식에게 치명타(致命打)를 남기기에 안성맞춤이리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낙순의 고민은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미로 속에 빠져들고 만다. ‘아, 하늘이시여, 제게 이런 시험에 드시다니요.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망정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뜻이다. 낙순은 하는 수없이 왕이 옥음을 내리신 이상 자신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낙순은 사흘 밤낮을 왕에게 반성문을 쓰는 걸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조정의 업무가 많은 날에는 조정업무에만 집중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왕에게 올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왕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쓰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해 들은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게 된 건 당연지사였다. 그렇게 반성문을 완성하여 왕에게 바쳤는데 뜻밖의 이야길 듣게 되었다. “그대의 필력이 공명(功名)을 떨치게 되었으이.” 왕이 기쁜 옥음으로 낙순에게 죄를 사면해주었다. 왕의 옥음을 받든 낙순은 십년감수한 심정으로 기쁜 눈물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이후 왕은 낙순에게 ‘조순’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그를 신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연신 지방관으로 부임을 해대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하였다. 상중이라 조정에 나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도 어느덧 세 아이의 자녀가 되어 있었다.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났고 그의 나이도 어느덧 이십 대 후반이 되어갔다. 그는 초계문신(抄啟文臣)에 들지 못했지만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다. 사은사로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비보(悲報)를 접했다.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조순에게 유언을 하였다. “낙순아. 네가 이렇게 집안에 위기를 몰아넣더니 궁여지책(窮餘之策)이나 다름없이 네 필력으로 우리 집안을 살려내었구나. 이 아비가 조상님들께 뵐 면목이 바로 섰느니라.” 아버지는 임종이 차차 가까워지자 천장을 멍하니 바라만보고 있었다. 그러자 낙순이, 아니 조순이 손을 부여잡고 오열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이 집안을 팔아먹을까, 행여나 왕의 눈에 거슬린 짓을 저질러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려는 게 아닌지 노심초사를 해대었다. 더욱이 자신은 각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할 적마다 매양 선정을 베풀어 공덕비(功德碑)를 세울 정도로 인망(人望)이 두텁던 탓에 예기치 않은 일을 저지를까보아 불안했던 것이다. 이를 생각하여 노심초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막바지에 와서야 평안이 유지되니 그 여한이 오죽이나 있었으랴. 이제 더는 여한도 더도 없다. 침을 삼키며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키던 이중은, “낙순아. 이 집안은 이제 더 이상 풍비박산이 나서는 아니 될 게야. 만일 네가, 혹은 네 자식들이 집안을 바로 잡지 않으면 간신히 지탱하던 뿌리마저도 뽑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야. 네 자식들에게도 그런 전차(前次)의 일을 따르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게야.” 이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상중(喪中)을 맞이한지라 왕으로부터 휴직상소를 올린 뒤 아버지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 걸출한 사람들이 빈소에 모여들었다. 친구인 김려(金鑢)와 이시수(李時秀)도 자리를 같이 했다. 자식들이 워낙 어린 탓인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장난질을 쳐대는 바람에 빈객들을 맞이하는데 무진 애를 써대는 것이다. “이놈들! 어느 안전이라고 날 뛰는 게냐!” 보다 못한 동생인 복순(復淳)이 으름장을 놓자 어린 애들이 모두들 삐죽거리며 울려고 하였다. 그러자 막내인 듯한 딸애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자 일제히 두 아들도 울음을 토해냈다. 아우님 왜 그러시나 하며 나무랄 법하건만 조순은 이를 지켜보기만 하고는 기특한 것들 하며 흐뭇해하였다. ‘아버님을 위해서 울부짖는 손주들을 보십시오. 이 손주들이 아버님의 염려에 따라 순수하게 따를 것이오니 편히 눈을 감으시옵소서.’ 아버님의 신주(神主)를 바라보고 끝내 오열하였다. 맏이 김유근(金逌根)이 오열하는 아버지를 본 나머지 눈물을 거두고 묵묵히 그 곁으로 다가갔다. 나이는 열 살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조순이 덥석 아들을 껴안았다. ‘유근아. 네가 이제 집안의 기둥이니라. 이 집안을 잘 다져야만 한다.’ 당부도 아끼지 않았다. 임금의 나이는 어느덧 사십을 겨우 넘었다. 왕의 나이가 많은 만큼 세자를 책봉하라는 신료들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왕은 끝끝내 철회하기를 수십 번이었다. 의빈(宜嬪) 성씨 사이에 세자를 두었으나 돌림병으로 인해 참척을 당하여 실의에 빠지던 터에 세자를 두어야만 한다는 주청이 연이어 이어지자 마지못해 박준원(朴準源)의 여식을 후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헛구역질이 치밀어 오르자 왕이 어의로 하여금 이를 진맥해보게 했는데 아이가 생겼다는 말에 왕은 기뻐하였다. 그러자 박씨는 아이가 딸이면 어찌하나 하는 불안에 명산대찰(名山大刹)에 찾아가 불공을 드리도록 어미에게 닦달을 해대었다. 이를 말하던 임금이 웃음을 금치 하였다. 이에 신료들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로부터 1년이 다 되어서 박씨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원자 아기씨였다. “허허허허. 그 어미를 닮아선지 세자가 점점 더 든든하게 느껴집니다그려.” 웃으며 왕은 갓 열 살이 넘은 세자를 바라보았다. 세자를 낳은 박씨를 수빈(綏嬪)에 책봉하였는데 어미가 사치를 멀리하여 왕의 신임이 더욱 돈독해진 탓에 박준원 일가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덕분에 현빈(賢嬪)을 두었다고 좋아라고 했던 임금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정순왕후(貞純王后)도 한시름을 놓았다며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비 자리에 있는 정순왕후가 웃으며 세자의 장성함을 기특해했다. “세자가 장성하였으니 이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김관주(金觀柱)가 “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하며 반감을 표하자 심환지(沈煥之)가, “대비께서 그리 말씀을 하시니 무어라 답할 길이 없나이다.” 하여 동정을 포했다. “그토록 소원해하시던 아버님 산소에 다녀오시고 주상께서는 한결 마음이 편하였던 모양입니다.” 대비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냈다. “헌데 어쩌겠습니까. 이미 영조대왕(英祖大王)의 분부를 거스르셨고, 즉위 때부터 당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느니 하며 만천하에 드러내셨으니 어찌할 수 없겠습니다.” “지난날 김귀주(金龜柱)가 사사되었을 때 어찌되었습니까.” 김관주가 허튼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만하세요!” 귀청이 떨어지게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하기는 정조의 생모인 혜빈(惠嬪)의 집안과 앙숙이었던 탓에 자신의 집안이 사도세자를 죽인 장본인들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던 까닭이 더욱 컸던 것이다. 더구나 왕의 승은을 입은 문소용(文昭容)이라는 여자가 무식한 입으로 세자의 잘잘못을 나무라서 뒤주에 죽이는 과정에서 이를 묵인하였던 것은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대가 정도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관주가 이야기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미 우리 집은 몰락할 만큼 몰락했어요. 주상에게 욕을 보일 만큼 보였어요. 그런데 지난날을 되새기는 경우는 어디 있습니까. 세자를 두고 자신이 상왕이 되면 아버지가 묻히신 화성(華城)에 간다며 노래를 한다지요.” 그러자 심환지가 풉! 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아하하하.” 이를 보던 관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거 참 난처합니다그려.” 대비의 얼굴에 비웃음이 지나갔다. “나는 주상을 믿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그러니까 십여 년 전일는지. 상감이 내게 와서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이다. 그래서 그 이야길 듣고 보니 김상로(金尙魯)와 문씨(文氏) 아녀자(兒女子)가 공모를 했다고 떠넘기더이다. 해서 할아버지의 유훈(遺訓)에 따라 위패는 물론이고, 벼슬자리도 뺏기어 내쳐졌는데 그걸 두고 후회한다고 내게 하소를 하더이다. 해서 나는 주상께서 뜻대로 행하시니 이 할미가 무엇으로 막으리까. 그건 인력으로 막을 길이 없으니 이 사람은 묵묵히 주상의 편이 되어드리리다. 하고 고하였더니 안심을 하더이다.” 관주는 상감의 외조부인 홍봉한(洪鳳漢)에 대한 원한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 탓에 홍봉한이 하루빨리 상감과의 관계를 끊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기기 시작했던 게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더구나 홍봉한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엊그제 대비의 성화에 못 이겨 직접 문병을 다녀오기도 했던 터였다. 그에 대한 분풀이를 하려고 한 나머지 오늘과 같은 일을 치른 것이다. 대비의 말씀이 다 하자 심환지는 씨익 웃으며, “마마. 상감마마께오서 머지않아 빈궁(嬪宮)을 간택하겠다고 서두르시더이다.” “그래요?” 웃으며, “웬 성미가 그리 급하신지.” 대비는 비로소 오만상을 찌푸리는 것이다. 심환지. 그는 한때 김조순과 더불어 사은사로 갔던 일이 있었다. 자신은 정사(正使)로 있고 김조순은 자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갔던 것이다. 연경(燕京)으로 가는 길이 험하다고 들은 탓에 초반에는 불안했었지만 연경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다. 가끔가다 짐 속에 든 음식들을 풀어내어 아침저녁으로 길거리에서 끼니를 때우는 게 다반사였지만 조순은 밥보다는 무엇인가를 차지해야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임금으로부터 패관소설(稗官小說)을 가지고 임금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조순은 그곳에서 무엇인지를 알아채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환지 자신은 연경에 가기만 하면 황제에게 칙명(勅命)을 받드는 거에만 신경을 썼다. 해서 조순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도 했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빈궁 이야기를 접해 듣고 보니 환지의 뇌리에 김조순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순간 그는 움칫하였다. ‘만일 상감이 김조순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게 된다면.’ 변수를 발견한 심환지의 등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일이나 모레쯤에 혜경궁의 회갑을 맞이해서 연회를 치른다고 합니다.” 대비의 말에 두 사람은 알고 있단 듯 말이 없었다. “그것도 행궁(行宮)에서 잠시 머문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아버지에 대한 효가 중합니까, 할아버지에 대한 효가 중요합니까. 아버지를 언급하지 말라고 한 영조대왕의 유교를 거슬리면서까지 그리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추숭(追崇)하지 못할망정 그 무덤에까지 가지 않는 것이 법도가 아니오리까. 화성에 간다 함은 할아버지에 대한 불효임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으름장을 놓은 채 김관주는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 나간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심환지의 다정한 말투에 대비는 한시름 내려놓는다. “저렇게 고약해서야.” 한숨 쉬며 대비는 관주의 태도에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헌데 김조순의 여식이 나이가 몇이랍니까.” 왕의 의중에 있는 김조순의 딸을 두고 심환지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금년에 갓 열 살이라고 합니다.” 끄덕이는 대비는, “상감의 소원이나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하며 식어가는 찻잔을 든다. 조순의 딸이 물망(物望)에 오를 적마다 관주의 의심은 끝을 보지 않고 꼬리를 이어갔다. 조순의 딸이 명가의 규수라서 그렇다느니 혹은 아버지가 딸을 엄하게 키운 탓이라느니 하며 딸의 성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저마다들 내려놓는 것이 못마땅한 관주였다. ‘상감의 신임을 입는다고? 흥! 상감의 신임만이 대수가 아니야. 뉘 덕에 보위에 앉았는지 명심해야 할게야.’ 상감이 이윽고 수원에 있는 화성에 어머니인 혜경궁과 중전, 그리고 왕실 일가를 이끌고 찾아갔다. 배다리를 건너 시흥(始興)에 걸쳐 안양(安養)에까지 지나쳤다. 이 길을 조순도 함께 동행 하였다. 여기에 관주가 참석하지 않은 건 물론이다. “주상. 이 어미가 아버지한테 많이 짐을 짊어지게 했습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어미 홍씨(洪氏)가 상감에게 흐느끼듯 말했다. “어마마마.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런 어미의 말에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상이 이렇게 놀라시니 많이 난처하실 테지요. 네, 이 어미가 아버님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시아버님의 변덕스러운 성품에 궁궐에서의 삶이 결코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해서 그리 말씀 드린 거예요. 아버님은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셨습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허나 그 변덕스런 아버지의 슬하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겠습니까. 하하하하.” 아버지는 상감인 할아버지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두려움을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벽에 가까운 성품인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눈밖에 나가지 않을까 하며 조심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오히려 아버지가 희생자가 될 줄이야. 물론 양제(良娣)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 양제를 이유 없이 죽이고, 심지어는 공연히 아버지의 하수인이라는 이유로 내관을 칼로 베어 죽이기까지 했으니 그 패륜(悖倫)이 오죽했으리. 이를 고변(告變)한 것이 상감의 어미 홍씨였다. “그리하여 할아버님께 고변하였습니다. 그 고통을 덜어주기라도 하였으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헌데 아버님을 뒤주에 갇히게 하였어요. 내가 죄인입니다. 내 탓이에요. 내가 내 손으로 죽인 지아비를 보러 이 먼길을 가다니. 내가 천벌을 단단히 받은 셈이지요. 허허허허.” 그 곁에 지키는 상감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겨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혜경궁과 상감은 수원에 도착하였다. 수원에 도착한 상감은 먼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연일 조정에 아버지를 추숭해야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럴 적마다 상감은 아버지의 신원을 빌미로 추숭할 수 없음을 들어 돌리기를 수십 번이었다. 임금이 아버지의 산소에 다다를 제 아버지의 무덤에 자라는 풀을 부여잡으며 오열하였다. “아버니임―” 그 얼마나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던가. 흐느끼는 상감의 울음소리에 신료들은 “전하―”하며 읍곡(泣哭)을 함께 하였다. 일부에서는 자신들이 불충을 행하였음을 자각하는가 하면 상감의 효심이 그리 지극할 줄 모른다며 흐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울부짖음을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칠 줄 몰랐다. ‘이 아들의 장성함을 보시옵소서. 할아버지의 변덕에도 그저 받아들여가며 왕통을 이은 장성한 아들을 보옵소서. 당신과 나의 업보(業報)가 아들에게서 풀려났으니 편히 눈을 감으옵소서. 소첩도 당신께 갈 날이 머지않으니 내가 황천길에 나아가 당신 앞에 나타나거든 나를 꾸짖어주시구려. 그리하여 당신의 한을 풀 수 있다면 내 몸인들 아깝겠나이까.’ 흐느끼는 아들의 뒤를 토닥거리는 혜경궁의 모습에서 신료들은 끊임없이 강줄기처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도 이에 감명을 받았는지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마침내는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를 맞은 두 모자는 비로소 아버지가 아들의 슬픔을 알고 있단 듯 눈물을 흘리심을 깨우치고 눈물을 그치고자 하였다. 임금 이산(李祘)이 능행(陵幸)을 마치어 궁궐로 돌아온 지 한 달 뒤에 조순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두들 장동(壯洞)에 자리한 조순의 집에 모여 나왔다. 조순의 마누라 심씨(沈氏)가 만삭이 가까워진 탓이었다. “아이고, 이보시오 이참(吏參) 대감. 이렇게 장성한 아드님들을 두셨으니 이제 딸만 더 낳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늘색 도포(道袍)를 차려입은 한 선비가 조순에게 아부를 하듯 대하자, “허허허허. 말씀만으로도 고맙소이다.” 하며 당주(當主)가 웃어보였다. 그러자 조순의 지인들이 하나같이 아들을 낳기보다 딸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 그 와중에 일부에서는 건각(健脚)을 둘이나 두었으니 만사를 제쳐두고 쉬셔도 된다며 농조(弄調)로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조순이 잠든 틈에 꿈에 나타난 머리가 산발한 사람이, “이애, 낙순아. 네가 아들을 둘만 낳은 것 갖고 족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알 수 없는 말로 조순에게 조언하는 게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여 물어보니, “네 아들 중 한 애가 장차 병약하여 죽을 것이니 아들을 하나 더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네 집이 오래 영화(榮華)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자 조순이 놀라며 당신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밝히지 않고 내가 도사(道士)니라 하며 껄껄 웃어대는 것이 아닌가. 얼굴을 제 조상을 닮은 듯도 하건만. 그리고는 도사라는 자가 제 품에 든 종잇장을 꺼내어 보이자 조순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러자, “자네가 안에 있는 글을 보면 내가 한 말을 익히 알아들을 것일세.” 하니 조순이 종잇장에 들어 있는 것을 얼른 펼쳐보았다. ‘좌(左)’ 왼쪽 좌 자였다. 그러자, “자네 자식들 돌림자가 근(根)이니 그 자를 앞에 쓰면 능히 자네 집안이 살아날 것이야. 허나 그만큼 인과응보(因果應報)도 따르니 자네의 그 자식도 훗날에는 흥하게 할 수도 있고, 망하게도 할 수가 있으니 잘 다독거려야 할 것이야.” 하며 도사가 당부를 남긴 뒤 물러났다. 그러자 조순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좌’ 자가 무엇인가 하고 조순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주위의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집안을 몰살당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고, 또 집안의 기둥이 될 만한 재목이니 그리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해왔었다. 그때였을까. 한밤중에 깰 새도 없이 조순은 순돌 어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리, 아씨께서, 아씨께서!”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조순이 마누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곳에서는 배를 푸는 일이 한창 진행되었다. 그는 마누라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으아악―악을 쓰며 산모는 아이가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미의 속사정을 몰라주는 복중 태아의 야속함이 그의 가슴을 애태우고 있었다. 산모의 진통은 오래갔고 덩달아 산모도 지쳐갔다. 밤새동안 아이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피차간에 지쳐갔고 날이 샌 듯 닭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만 했다. 꼬꼬댁이요― 닭의 울음소리가 아닌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좋으련만. 조순은 애를 태워야만 했다. 그러다가 육조(六曹) 관청에 등청(登廳)해야 할 즈음이 되어서야 수하 관원이 찾아와서는, “나리, 지금 등청하실 시간인데 어인 일로 오시지 않으시는지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에 놀란 조순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네. 그러잖아도 우리 마님이 지금 몸을 풀고 있으니 오늘 등청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전하시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박제가가 김려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를 전해들은 조순이 얼른 사랑채로 나아가 아랫것에게 손들을 사랑채로 오도록 당부하였다. “어이구, 제수씨가 아이를 보시기가 여간 힘드신 게 아니겠구먼.” 김려가 지음인 친구의 마누라가 아이를 낳기 위해 몸을 푸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이야기에 한마디 해댔다. 애가 타기는 조순에 못지않은 일이었다. “끼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별채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렁찬 울음소리에 세 사람은 사랑에서 나와 별채로 달려 나가 보았다. 그러자 순돌 어미라는 여종이, “아이고, 도련님이세요. 아드님이세요!” 하며 기쁨에 넘치자 조순은 비로소 아기를 품에 안아보았다. 여느 아기와는 다르게 눈은 초롱초롱하였다. 아비가 웃어보이자 아기도 덩달아 웃어 보인다. 꿈속에 나타난 도사의 말대로 그는 집안의 버팀목이 되라는 뜻으로 좌근(左根)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후에 조순은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때마다 조순에게 부인은 푸념조로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일곱이나 낳았는데 유독 좌근이 만큼 힘들게 낳은 적이 없었어요.” 이조참의에 오른 김조순은 왕의 성총(聖寵)을 한 몸에 받아 조정에 나아가는 즉시 주요 관직에 승승장구를 하였다. 그 덕에 자식들은 곱게 자라났다. 서력으로 1800년. 정조 임금은 수빈 박씨에게서 낳은 세자가 열 살이 되었음을 알리어 세자빈을 간택하고자 대비의 허락을 받아 직접 삼간택(三揀擇)에 나섰다. 임금은 앞서 조순을 불러내어 말하길, “내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김조순의 여식을 뽑으라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소이까. 해서 나는 그대의 여식을 빈궁으로 간택할까 하던 참이오. 내 말을 잘 알아들으시겠소? 더구나 집은 한빈(寒貧)하지 않으나 권력욕에 집착하지 않으니 그대의 품행이 하늘에 닿았던 모양이오. 그대의 여식이 빈궁이 될 수 있도록 내 도와드리리다.” 임금이 은밀히 조순을 불러들인 것을 두고 문중(門中)에서는 한없이 기뻐하여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어야할 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하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큼은 신나 하지 않았다. “흥, 임금의 승은이 하해와 같다고 해도 내 귀에는 소귀에 경 읽기나 들리는 것 같소.” 바로 이조판서(吏曹判書) 김달순(金達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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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德 善安 奉堂
정병욱(鄭炳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 말씀) 
http://www.1392.org/bbs?moim09: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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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