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 추억의 사랑방에서 제07화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네 살이 되었는데,

"호야 나오려무나."

하는 어미의 말에 줄곧 대답하던 아이가 갑자기 말을 못하는 것을 알고 때마침 일이 없어서 한가한 나머지 집에 있던 운이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이가 있다는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사랑방 문을 여는 순간 운이의 눈에서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운이의 아들이 검은 잉크를 바닥에 난장판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고 어안이 벙벙했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의 도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할아버지가 쓰시던 붓을 가져다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가하면 심지어는 아버지를 보고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이 검은 잉크 범벅이 되는 와중에 잉크를 제 입에 갖다 대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부모가 오는 데도 안중 없이 헤―하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웃을 뿐. 그토록 공들여서 낳은 자식이 천치가 될 줄 누군들 알았을까.

집주인인 운이로서는 아들의 불행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제 할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하여서 생긴 일이라는 것을 이제 와서 감지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뒤로 운이란 사내는 이를 업보로 삼으면서도 공들여서 낳은 아들이 백치라는 불치병을 얻으니 얼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나. 아이가 병을 얻은 나머지 근심을 하던 찰나 네 증조할아버지가 제 아버지와 같은 항렬인 탓에 그 사람이 이 집을 내놓고서 집을 부탁하고 간 게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식솔들을 여기에 둔 채 세 식구가 시골로 낙향한 게지. 그것도 애를 직접 돌볼 양으로 말이지."

하며 입을 다시고 계셨다. 다른 친척은 다름 아닌 구 영감의 동복형네 손자였다. 그러니까 그 손자의 후손이 지금의 우리 할아버지시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접해들으면서 집안은 그야말로 우환이 가득한 집안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그러잖아도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이 원래 지방에 살고 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어떤 이에게 사기를 당하여 재산을 날리고 있었다했다. 그랬기에 운이에게 먼 친척이 되는 이가 운이에게 재산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서 금덩이 두세 개 가져다가 사정이 여차저차 해서 재산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으니 하루빨리 편안히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는 통에 집을 넘겨받았다고 했다. 우리 집안으로서는 보물로 여길만한 명분이 주어진 거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가 이 할아버지의 집을 물려받아주었으면 좋을 듯 싶어서 이렇게 아버지 몰래 부른 거란다."

일련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갑작스럽게 연락하신 할아버지의 의중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지만 할아버지. 이 집안은 흉가처럼 보기가 좋지 않고, 또 미관상으로도 부식이 심한 상태인데 어떻게 이 집을 물려받을 수 있단 말씀입니까. 더욱이 대학에 다니고 있는 신분이고 또."

알아들으셨단 듯이, 할아버지는,

"네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이 집안에 가득했던 그 업보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단다. 네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오늘날 손수 교회에서 성도 한 분을 불러들여서 집안의 잡귀들을 쫓아버리셨다고 하였지. 그러고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시고 나서부터는 집안에 우환이라고는 없었지."

하며 내게 안심하라는 식으로 대답해주셨다. 그런데 왜 굳이 그토록 우환이 가득한 집을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 하고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려보았었다. 그랬더니,

"우환은 우환인 것이고, 집은 집인 거야. 집이 무슨 죄가 있겠나. 죄가 있다면 이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난 나 밖에 없는 것을."

하시며 할아버지는 사랑방을 나서신 채 마루에 앉으셨다. 비는 계속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습한 기운은 좀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찜찜한 날씨이건만 그날따라 왠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윤식아."

하며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 할아버지가 죽거든 꼭 이 집을 물려받아야 한다. 내 네 아범한테 말해보마."

"하지만 이 집은 곧바로 없어질 수 있잖아요."

그러자 내가 곧 뉴타운 개발로 없어질 한옥을 굳이 살 이유가 있을까 싶다고 말씀드리자,

"요즘 뉴타운 개발을 한다는 데가 취소되는 경우도 빈번한데 설마한들 귀한 보물 같은 이 집을 그 누가 헐어내랴."

하시고는 할아버지께선 호탕하게 웃으셨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는 곧 사랑방 주인들의 역사이기도 했고, 사랑방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그리고 그토록 할아버지가 이 집에 애착을 가지시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일련의 사연들이 한몫을 한 것이리라고 짐작하는 순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