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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대표] <간행> 보덕문집(寶德文集) 13
* 풍고전_楓皐傳 <中> 풍고전_楓皐傳 <中> 김달순은 조순과는 같은 항렬이면서, 같은 안동김씨 가문이었다. 하지만 김조순과는 먼 친척뻘이니 남인 건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이였다. 한데 가끔 문중에 일이 있으면 아버지가 그곳에 줄곧 출타할 적마다 조순이 아버지를 따라서 그곳 모임에 참석하기는 했었으나, 인사치레 정도는 할 뿐. 다른 일로 만날 일은 없는 터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다고 했다. 금상이 세자빈을 손수 간택하고자 했으나 왕의 갑작스런 병세는 겉잡을 새가 없었다. 더구나 사도세자를 아버지라 칭하여 무덤을 조성한 것이 괘씸한데 세자빈을 간택하려고 들다니 게다가 자신이 상왕이 되어 화성에 머문다고 하니 달리 말로 표현할까. 그러던 차에 왕이 병든 몸을 이끌고 직접 빈궁을 간택한다는 데에 대해 정순대비가 이를 말리기도 해보았으나 막무가내로 왕은 직접 간택령을 내려 빈궁을 선발해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빈궁 간택에 김조순의 딸도 같이 있었다. 왕은 전날에 꿈의 징조가 좋았다고 하며 김조순의 딸을 보더니 용모가 수려하고 품행이 바르다는 이유로 초간택(初揀擇)할 때 능히 통과되었다. 이 소식을 듣던 조순은 오히려 성은에 몸 둘 수 없어 왕이 사는 대궐을 향해 앞마당으로 나아가 절을 하여 흐느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만큼 왕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그 신임을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 달순은 벽파의 무리로 들어섰다. 이를 환영한 이는 다름 아닌 김관주였다. 더구나 세자의 나이가 열하나이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데 정작 세자의 어미인 수빈(綏嬪)이 나서서 간택을 내리지 않기를 바랐으나 왕은 이를 묵살하여 강행되었다. 간택령이 내리지자 기다렸단 듯이 반가의 규수들이 초간택에 통과된 이들을 불러내려고 궐에서는 속속 재간택을 서둘렀다. 이에 끽소리 못하고 후보로 당첨된 집안에서는 서두르는 기색들이었고, 이에 못지않은 건 김조순네 집도 마찬가지였다. 조순의 부인 심씨는 딸이 갓 시집을 갈 나이가 되었으니만큼 남편에게 누를 끼치지 않게 차근차근 준비를 해대었다. “나리께서 엄히 내리신 당부다. 서둘러라.” 몸종의 호통에 아랫것들은 서두른다. 재간택이 가다오면 올수록 심씨의 가슴은 울렁거리다 못해 망설이기까지 하였다. 만일 간택에 한 번 참여하게 되면 그 직후에 다른 혼처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칫하다 혼기를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조순은 아랫것들을 단속하라고 이른 뒤에 딸을 만나보는 것으로 일단 수습을 해본다. 재간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금상은 옥체가 성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빨리 며느리를 얻고 싶은 마음에 직접 빈궁 후보자를 하나 둘 만나보기 시작했다. 그때 정순대비가 아녀자의 일이라며 한사코 이를 말려보기도 하였으나 왕이 막무가내라서 직접 참예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빈궁을 뽑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려는 심정과는 다르게 금상의 병세는 더욱 악화가 되어갔다. 그는 어김없이 정무를 보고자 정전에 납시다가 결국 쓰러져 병상에 눕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순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칫하다가 제 딸이 빈궁에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나서 왕은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왕이 병석에 몸져누운 채 신료들을 대하기는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어떤 날에는 심환지를 탓하고, 또 어떤 날은 내 탓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정신이 온전치 못한 탓이었다. 그런 그가 대신들을 불러서 무엇을 얘기할까. 시파나 벽파 두 세력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내가 몸이 아파서 정신이 온전하지가 못합니다. 내가 얼마 살지 못할 듯한데.” 왕의 이 말에 신료들은 그것이 무슨 소리냐 물어보는 것이다. “경들의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왕을 알현하는 이들 중 조순에게 유독 시선을 맞추었다. 기필코 조순의 딸을 빈궁으로 간택하리라. 결심을 가졌다. 신료들이 문안을 마친 뒤 왕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둘러 대비에게로 가자고 하였다. 하여 내시와 상궁들의 부축을 받아 대비에게 찾아갔다. 수정전에 다다른 왕은 대비에게 문안을 드리고 할 얘기 못할 얘기를 털어놓았고 그 뒤에, “마마, 나는 정했습니다.” 하는 소리에 대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게 어인 말씀입니까.” 왕에게 되풀이하니, “빈궁을 김조순의 여식으로 정했다 그 말이외다.” 귀찮단 듯 대비에게 양미간을 찌푸리는 것이다. 그러자 대비는 마지못해, “주상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허나 절차는 있으니 서두르지는 맙시다.” 받아주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재간택을 가졌고, 왕이 자리에 나아가지 못할 것을 고려해 왕실의 어른 격인 대비가 직접 조순의 딸을 빈궁으로 취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비마마!” 내관의 우짖는 소리에 대비는 낌새를 눈치 챘다. “무슨 일이냐.”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내관에게 물어보았다. “상감마마께오서, 상감마마께오서” “그래 무슨 일이 있느냐.” 더듬거리는 내관의 대답에 대비는 서둘러 재촉하였다. “어허!” “상감마마께오서 위중하시다 하옵니다!” 그러자 대비는, ‘상감이 내 업보를 더 얹으시려나보구려.’ 하며 서둘러 상감의 침전으로 나아갔다. 김조순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왕의 문안을 드리고자 침전에 찾아가 위로를 해드리는 자리에서 왕은 갑작스럽게 쓰러지기 시작했다. “수정전”이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쓰러진 왕의 갑작스런 상황에 전하를 부르며 위급함을 알렸다. 밖에서나 안에서는 모두들 왕의 병환이 위중함을 알았는지, 내관과 궁인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대전 내관은 안절부절 못하는 하급 내관들에게 꾸짖어가며 왕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소식을 듣고 왕의 생모인 혜빈이 세자를 대동하여 울부짖으며 왕의 쾌차를 빌었으나 야속하게도 왕은 운명을 달리했다. 더구나 빈궁 간택이 마무리를 지을 즈음에 승하하였으니 그 슬픔을 말로 형언하기 어려우리라. 이를 지켜본 조순은 죽은 왕이 비로소 썩은 동아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내게 방패 되어줄 이가 없다는 걸 비로소 깨우쳤다. 하루라도 빨리 왕이 생존하였더라면 제 딸이 빈궁에 앉아 부원군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아―하늘의 무심함을 깨우친 그는 구름이 간간히 낀 하늘을 야속하게 바라보았다. 선왕은 훙서하여 세자 자리에 앉은 수빈 박씨의 자식이 왕위에 올라가게 되었다. 상을 마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에 오른 금상을 대신하여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만족하지 않은 모양인지 서서히 벽파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심환지보다 김관주와 김달순이 한패거리가 되어 벽파 집안의 규수로 왕후를 삼아야한다는 주청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자 대왕대비는 그건 있을 수 없다며 이를 묵살하기도 하였으나, 두 사람은 고집을 꺾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복순이 형인 조순에게 찾아와 좌우지간에 결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순은 이를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는 모양으로 아우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의 유훈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또 왕이 정당한 절차로 세자빈을 손수 간택하였기 때문에 왕비로 낙점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해석을 하는 세력들 간의 갈등이 심화될 것을 우려한 조순은 당분간 칩거를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상황은 예송(禮訟)문제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제 뱃속으로 낳지는 못했지만 부군이 이미 본 자식들에 대한 제사도 그러하거니와 며느리에 대한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그 예가 거의 보기 힘드니 제 방식으로의 논거를 들먹거리며 수많은 피를 보아왔다. 조순의 조상들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김조순 자신쯤이야.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관직을 내려놓은 것이다. “형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자칫하다 우리 자리가 저들의 손아귀에 넘어가면 우리는 졸지에 멸문지화를 당합니다.” 복순의 이 말에 조순은 “새삼스럽게 남의 집안일에 걱정을 해주다니. 고맙구먼. 헌데 아우님. 우리 부모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어 천애(天涯)가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왈가왈부해본들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태평한 체 하며 아우의 말을 묵살하는 것이다. 아우가 지방관으로 내려가 있는 지금에 와서 부딪혀봐야 긁어 부스럼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는 아우의 모습에서 더욱 환멸을 느꼈다. “그러다 형님.” 하는 아우의 말에, “네 이놈― 아버님의 유언을 듣지 못했느냐!” 조순이 대성일갈(大聲一喝)로 아우를 꾸짖었다. ‘만일 네가, 혹은 네 자식들이 집안을 바로 잡지 않으면 간신히 지탱하던 뿌리마저도 뽑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야. 네 자식들에게도 그런 전차의 일을 따르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게야.’ 아버님의 유언을 무심하게 대한 아우의 한심스러움에 두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다. 아우가 돌아갔다. 조순은 밤이 깊도록 깊이 잠들지 못했다. 왕의 의중을 모른다고 할 수 없었으나 너무나 갑작스럽게 왕이 죽음과 동시에 서서히 벽파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기반을 깎아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선왕이 직접 설치하도록 한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한 것도 모자라 당파를 초월하여 직접 등용한 남인 계열의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여 이를 구실로 애꿎은 서학 신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배교(背敎)하도록 하거나 이를 부정한다 치면 목을 베어 효수하는 등의 잔인한 방법을 자행해댄 것이다. 그동안 왕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던 정약용(丁若鏞) 같은 경우, 제 형제들이 모두 천주학쟁이인 탓에 박해를 피해보지도 못하여 전라도로 귀양을 갔다. 이에 불씨를 더욱 부추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바로 황사영(黃嗣永)이란 자가 백서(帛書)를 써서 연경으로 보내도록 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박해는 더욱 가속화가 되어갔다.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귀천(貴賤)의 구분 없이 남녀랄 것도 없이 무조건 천주학을 신봉한 이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찾아내어 흉악하게 법을 집행하였다. 대개는 배교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늉만 해대는 등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게 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김조순은 물론 서학을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학이 있어서 우리 조선의 문물이 풍성하지 않았던가. 연암(燕巖)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형원(柳馨遠), 박제가 등이 직접 나서서 실학(實學)이라는 학문을 내세워 우리나라의 부강을 모색하지 않았던가. 이를 바라볼 적에 그는 서학이 결코 사교(邪敎)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유년(辛酉年)에 박해가 일어나던 어느 날. 김조순에게 찾아온 손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벗 김려였다. 김려도 이 박해에 걸려들어 그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다. 김려는 제 친구가 부원군(府院君)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어 하루라도 빨리 제 목숨을 구해보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누추한 차림으로 그를 찾아온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그리고 제 식구들을 살려달라고 하소를 해댔다. 그러나 친구의 마음을 알면서도 차마 행하지 못하는 이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서는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남기고 친구를 보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 일이 탄로가 나는 날에는 멸문지화 당하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친구는 멀리 유배를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다른 손이 찾아왔다.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은 조순에게 이런 이야기를 남기고 쓸쓸히 사라지고 말았다. “풍고, 그대가 부원군의 자리에 올랐으나 짐이 무거웁다는 걸 잘 알고 있소. 부디 신중히 생각하여 나라를 구하시구려. 단지 서학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배교를 강요하다니. 우리 선왕께서 아시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참(斬)할 일이오만, 그대가 나라를 잘 운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기에 이리 찾아온 게요. 나는 그걸 믿고 이리 찾아왔소.” 풍고가 왜 그렇게 물러나느냐며 붙잡자 연암은 웃으며 나는 그대가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마음이 깊고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부탁하러 온 것이라며 자신은 은거(隱居)하여 글을 쓸 작정이라고 이야기를 해댔다. 그러자 조순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를 보지 못한 연암은 어두운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갈 뿐이었다. 신유년 박해의 소용돌이가 사라진 지 1년이 되어갈 즈음 대왕대비로부터 왕비를 간택한다는 명이 떨어졌다. 이때 대소신료들은 제 딸을 간택시키려고 나서는 데에 신경을 곤두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조순은 결코 낙담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형식상의 전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색에 어울리지 않게 대왕대비로부터 조정에 복귀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순은 이에 상응하지 않고 오직 정직하게 벼슬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나, 제 딸이 왕비의 후보로 낙점된 까닭이 있었으므로 조순은 조정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연암이 예언한 대로 부원군 자리에 앉았다. 새 왕후는 금상보다는 두 살 위다. 누이 뻘이 되는 이와 왕이 혼인한 셈이다. 딸이 비로소 왕비가 되었다는 이 기쁜 소식을 누구보다 고대하던 조순의 부인 심씨는 감격에 겨워 마마라고 부르며 절을 올렸다. 그러자 딸은 어머니의 절을 한사코 거부하였으나, 마지못해 받아냈다. 어미와 정든 집을 떠나 그는 구중궁궐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왕비는 느끼고 있었다. 궁궐의 새 안주인이 된 왕비는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문후(問候)를 여쭙고, 선왕의 왕비인 왕대비전(王大妃殿)에도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선왕의 생모인 혜경궁에게는 문안을 드릴 수 없었다. 아우인 홍낙임(洪樂任)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수그러지시는 대로 인사를 여쭙겠다며 왕비는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였다. 아버지의 훈수가 있었다. 마음가짐을 처음과 같이 하라고 당부하신 뒤에 네가 왕후가 되면 엄격한 왕실의 법도를 무시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아버님 당부 깊이 간직하겠나이다.’ 구중궁궐에 갇힐 서러움과 함께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왕비는 침전에서 흐느꼈다. 조순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금상과 가례를 치렀다. 온 만조백관이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치어 왕실의 새 식구를 맞이했다.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나서야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대왕대비는 금상이 장성함을 들어 수렴을 거둔다는 전교를 내린 다음 뒷방에서 일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상의 조건이었다. 이 낌새를 알아챈 건 얼마 전에 세상을 뜬 연암 박지원의 상중에서 들은 소문에서 비롯되었다. “대왕대비가 겉으론 수렴을 거둔다고 하고는 뒤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일세.” 그러자 조순의 옆에 앉은 사람이 나그네의 허풍스런 소문을 가지고, “흥, 풍고 대감의 막역지우를 역모로 몰아서 죽여 놓고 모른 척하긴가. 왼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이 모르게 한다고 제가 그예 하고 싶었겠지.” 막역지우를 거론하며 조순의 아픈 속내를 찔러댔다. 막역지우는 바로 김려였다. 정순대비의 꾐에 얽혀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 참담한 순간을 조순은 잊을 수 없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칼을 댈 수도 없었다. ‘설마 대왕대비가 그럴라고.’ 그러나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대왕대비가 수렴을 거둔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건 일부 벽파가 조순의 딸에게 간택한 것을 빌미로 삼아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대왕대비가 다시 정치에 나서자 이시수가 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대비께서 손수 거두신다 하신 것을 잊으시었나이까. 이는 전례로 보아서도 없는 일이나이다. 하어니 속히 물러나시옵소서.” 이를 기회로 삼아 시파는 김조순을 수장으로 삼아 새로이 기회를 다지어 벽파의 탄핵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상은 이를 승낙하여 김관주를 위시로 한 벽파의 무리들을 숙청하였다. 그 틈에 김달순도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피의 숙청의 시작이 될 즈음 이시수가 날린 직격탄으로 불과 두 달 뒤에 대왕대비가 세상을 떠났다. 벽파의 구심점(求心點)이 사라진 셈이다. 하루아침에 충신이 된(?) 조순은 이시수와 손잡고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 첫 발판으로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곧 가순궁(嘉順宮)에게 문후를 드리니 가순궁이 기뻐하며, “내 부원군이 오기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였습니다.” 하며 제 아비인 박준원과 연결시켜 주었다. 이로써 김조순의 독단적인 정권이 열렸다. 그리고 신유년의 박해를 정리하여 내치(內治)에 더욱 힘을 쓰니 조순의 살아생전 동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하지 않았다. 문중에서 조순의 득세에 반기는 기색이었고, 특히 장동에 자리한 조순의 집으로 찾아가 벼슬을 청탁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여 일부 문중 사람들은 제 친척이 음지로다 조정에 나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를 달가워하는 이가 적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바로 다름 아닌 가순궁 박씨였다. “아버님, 저러다 김씨가 조정을 장악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상이 위험합니다.” 딸의 염려에 박준원은, “김조순과 내 밀약을 맺고 오리다.” 하며 가순궁의 심신을 안심시켰다. 가순궁의 우려는 적중했다. 김조순이 제 문중 사람들에게 벼슬에 나서기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에 일부 대신들은 반발하기에 이르렀다. 저들에게 무슨 공로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상감에게 다가가 벼슬을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아니 부원군, 대체 어인 일이오?" 상감이 부복해 있는 조순에게 다가가 이를 물어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부원군!" 상감의 옥음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않던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보였다.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순이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신 김조순, 조정에 나서지 않겠나이다. 신료들이 들고 일어나니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부디 이를 보시어 신의 사직상소를 받아주시옵소서." 그러나 장인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임금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은 몸과 마음이 아파 달리 정치를 할 수 없사옵니다. 부디 청을 거두지 마옵소서." 상감의 눈앞에서 장인이 우짖는 모습을 보는 데 눈물이 주르륵 내리기 시작한다. 진실한 사람이로구나. 장인이 진실한 사람이로구나. 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여 상감은 하는 수 없이 장인의 청을 받아들였다. 선왕의 후궁인 가순궁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김조순은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했지만 같이 왕실의 외척이 되느니만큼 나름대로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는 어느 덧 마흔을 넘어가고 있었으니 세상의 이치를 모를 까닭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입신양명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바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 때문에 사위인 상감에게 사직을 올린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도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조순은 밤중에 집에 돌아와서도 그것에 골몰한 나머지 아침 해가 떠오른 줄도 모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각 끝에 조순은 아랫것을 시켜 수빈의 생부 박준원의 집에 찾아가서 자기가 직접 찾아가겠노라고 전하라 했다. 조순은 무엇보다 자신의 힘에 보태줄 이가 필요함을 인식하지 못하였음을 깨달았다. 금상은 정사를 다스릴 만하다고 하나 아직 물정을 모르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선다면 자칫 누군가에 의해서 표적이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여 임금에게 사직상소를 올린 것이다. 어차피 사직상소는 가납이 될 것이니 벼슬에 안 나가도 된다. 박준원과 담판을 하여 자신의 집안을 유지시켜야만 한다. 눈앞의 일이 캄캄하니 부딪혀볼 수밖에. 아침상을 본 모양인지 부인이 다가가 기척을 했는지 물어본다. "대감, 진지는 잡수셨는지요?" 부부인의 기척에 놀란 조순은 얼른 "밥 생각이 통 없네그려." 에둘러 말했다. "아침상을 물릴까요?" 부인이 물어보자, "그러시든지." 상감의 외조부 일로 있던 밥맛이 떨어지고 말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을까. 아랫것이 박준원의 집에 다녀온 모양인지 기척을 내었다. "대감 마님." 하인의 기척에 조순은 서둘러 들라하라 일렀다. "그래, 금위대장께는 일렀느냐." "네." 그런데 하인이, "하오나, 뵙지 않겠다고 하시는지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순은 서둘러서, "금위대장 댁으로 갈 것이다. 서둘러 가자." 하며 옷을 차려 입었다. 그리하여 조순은 금위대장 박준원의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잖아도 해는 중천에 떴다. 아마도 머지 않아 조정에 나아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박준원네 집 앞에 이른 조순을 의식하여 하인이, "이리 오나라" 하며 소리치었다. 안에서 뉘 댁이냐 물어보자 "장동 부원군 대감이시다." 하인이 대답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조순은 안으로 들어서며 박준원네 하인에게 "대감께서는 안에 계시느냐?" 하며 물어보자, "네, 사랑채에 드시고 계십니다요." 박의 하인이 대답했다. 이윽고 하인이 기척을 내어 상전에게 아뢰었다. "대감 마님, 영안부원군께서 듭시옵니다." 부원군이 납신다는 소리에 박준원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부녀가 얘기한 것을 엿들었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조순을 볼 면목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행여 들키기라도 하면 필히 역적으로 몰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랬는데 호랑이가 집안에 쳐들어온 꼴이라니. 조상들에게 뵐 면목이 서지 않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 집안이 몰락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얼떨떨한 채 준원은 급히 부원군을 들어오시라고 이르고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 기왕에 벌어진 일. 내 목숨을 버리는 수밖에.' 이렇게 벼르고 있는 틈에 조순은 박준원의 방에 들어섰다. 조순은 말없이 절을 했다. "아니, 갑자기 절을 하시다니." "불초한 소생이 부원군의 자리에 있다고 제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하여 이리 절을 올리는 겁니다." 난데없는 조순의 해명에 준원의 입은 꾸욱 다물어진다. "그게 어인 말이오?" "쇤네가 쓸데없이 욕심만 채워 공연히 가순궁 마마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가순궁 마마는 더구나 상감의 생모이시니 그 어인 말로 형언하리까." "……" "하오니 쇤네의 청이나 들어주십시오." 박준원은 갑작스런 부원군의 청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청을?" "대감의 집안에서 좋은 인재가 있는 이가 있다면 저희 집으로 불러들이시지요." 조순의 의중을 모르는 준원으로서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난감한 지경이었다. 부원군의 갑작스런 행차에 수빈의 친정은 분주하였다. 박준원의 부인이 주안상을 내오라고 성화를 내니 하인들이 일제히 분주하게 움직인다. 김조순이 자신에게 찾아온 연유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직접 말을 꺼내기가 거북한 탓에 조순의 입에서 무언가 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 바람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집안에 눈을 씻고 보아도 인재를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하니 댁의 자제나 조카들 중에 능력이 출중한 자들이 있다 하면 바로 조정에 출사를 시키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조순의 입에서 제 집안에 사람을 구한다는 말에 준원은 아찔하였다. 물론 외척의 집안이나 다름이 없고, 더욱이 딸이 왕후로 봉해졌다면 대비가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순이 선뜻 나서주니 귀가 솔깃한 건 당연한 처사였다. 제 밥그릇을 차지하려고 드는 파렴치한 김씨 집안에서 눈칫밥을 먹을 바에야 차라리 직접 손을 잡고 봐야 한다. 생각 끝에 그는 이에 응낙하였다. "대감께서 그리 나와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니." "하하하, 별말씀을." 조순이 오히려 호탕한 웃음을 지어 준원의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도록 해주었다. 임금의 생모와 모의한 것을 눈치챘음에도 조순이 자신의 일가를 묵묵히 포용하려는 모양을 보이자 준원은 비로소 그가 마음이 넓다는 것을 깨우쳤다. 선입견이란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고집이 세고 제 집안에 이익만을 쟁취하려는 외형과는 다르게 인내를 가지고 자신들의 치부를 덮어주는 성인에 가까운(?) 모양을 보이는 사돈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박준원에게 보인 김조순의 태도는 장차 자신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고자 하는 노력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것이 육십 년이 넘는 세도정치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김조순의 이런 배려 속에서 박준원과 그 아들들은 금상의 외척 중 하나임과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비변사의 당상으로서 조정의 대사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력의 핵심으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물밑으로 작업을 벌이는 동안 왕비는 금상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왕은 정작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은 날이 더욱 많았다. 십대 후반의 임금은 성욕에 눈을 뜰 법하련만 아직도 어머니의―그것도 선왕의 왕비가 아닌 생모의―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선왕의 승은을 입어 가순궁이란 칭호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대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이는 고조부인 숙종이 후궁은 중궁으로 둘 수 없다는 금기사항에 의해서 왕실의 어른은 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니 가순궁이 사사건건 어린 금상을 간섭하려 드는 것이다. 대비 김씨는 이를 지켜보다 못해, "자네는 왜 유세를 부리시는가." 하며 금상을 핍박하려고 드는 가순궁의 모습이 딱히 좋아보이지 않은 듯 나무랐다. 그런데 가순궁은 가순궁 대로 아버지의 눈총을 받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해명을 하는 것이었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를 부릴 법했던 정순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실질적으로 왕실의 어른이 된 왕대비 김씨. 그러나 말만 왕실의 어른이었지 힘이 없었다. 시어머니 되는 혜경궁도 마찬가지로 힘이 없었다. 집안이 몰락한 것도 그렇겠지만, 정순대비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에도 그는 조용히 칩거했다. 그러나 혜경궁은 단지 숨죽이며 살지는 않았다. 기세가 등등한 김관주 일파가 득세를 할 때만 해도 숨을 죽였었는데 걸림돌이 걷어지고 나니 신이 날 정도는 아니지만 눈엣가시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야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혜경궁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듯 하나 하나 글을 쓰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금상은 중전의 관계보다 친할머니인 혜경궁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시작하였다. "주상, 선왕이 외증조부를 살려둔 까닭을 아십니까." 혜경궁이 자신에게 금상이 찾아올 적이면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주상은 경청을 해주었다.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드리는 것이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라는 걸 잘 알기에 효심을 다하여 할머니를 모시었다. 그런 금상을 중전은 모를 리 없었건만 웬지 구중궁궐 생활이 답답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무조건 순종을 해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구중궁궐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전이건만 그것이 화병이 되어 오히려 중전의 몸을 망가뜨릴 줄은 미처 몰랐다. 중전의 곪아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순은 마누라에게 무언가를 만들어오라고 일렀다. 나이는 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어 지천명에 다다랐다. 그렇건만 그는, "당신 나이가 몇이신지 아시오? 그러다 이가 다 망가지겠습니다." 부인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순히 가져오라고 성화를 내었다. 하여 아랫것에게 시전에 나가서라도 구해오라고 하였다. 그것은 엿이었다. 조순은 어려서 반가에서 자랐음에도, 한미하게 살아온 탓에 시정잡배의 자식들과 어울려 다니며 엿을 즐겨 먹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반가의 자식과는 어울리지 않게 엿을 줄곧 즐겨했던 것이다. 끈적끈적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일품인 엿을 애호하는 것은 장가를 들면서도 여전했으니 시집을 오자 마자 부부인은 손수 엿을 직접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것도 지아비가 정권을 잡아놓기 전이었으니 이를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세도가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부인은 "시전에 은밀히 가서 엿을 한 보따리 챙겨오시게." 하며 아랫것을 시켜서 엿을 사오게 하였다. 이 유별난 식성 때문에 간이 콩알만 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마누라의 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덕진 엿을 즐겨했다. 오죽했으면 그 애호를 소재로 한 시를 썼을까. 어릴 때부터 단 것 좋아해 늙어서도 잊지 못하니 가장 좋아하는 건 겨울날 엿 먹기 찹쌀과 참깨가 안팎으로 섞였네 침 흘리며 생각을 낭비할 새 없이 손가락으로 먼저 콩가루를 뒤져보면 한 조각 두 조각 둥글고 모난 것이 입에 들어가면 봄바람에 눈이 녹는 듯 간혹 턱에 걸려 안 들어갈까 초조하지 연약한 어금니에 붙은들 어떠리 옆 사람 군침 흘리고 쳐다보지만 단 것 좋아하는 내 모습 볼 테면 보거라. 조순은 이런 행보를 보임으로써 주위의 고정된 시선을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이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렸음을 보여주어 금상이 친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안을 보존하는 데에 주력했다. 하여 그는 자신의 맏아들 유근으로 하여금 먼 친척의 집으로 양자를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 심씨는, "대감, 어찌하시려고 장남을 양자로 보내신단 말씀이오?" 울분을 감출 길 없어 대감에게 하소를 하였다. "양자로 보내다니. 나는 단지 좋은 인재로 쓰려고 보내는 것 뿐이오." "그 어인 말씀이시오?" "나는 이미 조정에 물러난 몸이니 유근으로 하여금 집안의 기틀을 닦아놓고자 먼저 한미한 친척의 집에 들어가 양자로 보내려는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소이다." "그러면?" 분간을 할 수 없는 무식한 아녀자인 부인이 묻자, "그 집에 양자로 들어가 그 집의 뿌리부터 바로 하고자 한 것이외다. 그리하면은 우리 집에 득이 될 수 있기에 유근을 보내는 것이오." 조순이 냉정히 대답했다. 뜻을 모르는 지아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심씨가 아니었다. 서방이 물러가기 무섭게 오후가 되어 여종을 거느린 채 어디론가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가 다다른 곳은 좌의정 이시수의 집이었다. 정순대비 일파를 숙청한 이였다. "대감, 이를 어이하면 좋소이까?" 이시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낸다는 사실 탓이었기 때문인지 머리를 산발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내야 하는 서러움을 이길 길 없었던 심씨는 공연히 지아비의 벗인 그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지아비를 설득해달라는 뜻이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 서방님이 유근이를 양자로 보낸다 합니다." "뉘집에 양자를 보낸답니까?" "공판 집에 보낸다 합니다." 공판이란 조순과는 먼 친척 쯤 되는 김용순이었다. 김용순은 항상 조순의 동생인 복순과 어울려 다녀 조순도 익히 알고 있었다. 특히 조순이 실권을 잡을 적에 조정에 있는 관리들 가운데 일가 출신인 사람이 드물었는데 용순이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러잖아도 진작 시수는 조순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제 살과 같은 자식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제 가문에 또 다른 피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미연의 방지를 하는 선에서 다른 친척집으로 양자를 보내고자 함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너무 겸손한 것이 흠이었으나 영돈녕부사에 앉아 있는 것으로서 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조순은 그 이외의 관직을 제수될 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를 아내인 심씨가 왜 몰랐을까.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수는 침착하게 달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부부인. 부부인의 체통이 여간 좋아보이지 않소이다. 허니 쇤네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를 알려주시온다면 내 부원군 대감에게 말씀해드리겠소이다." 제 설움에 북받친 부부인은 끄덕인 채 시수에 의해 사랑에 인도된다. "제 아들이 제 집에 있게 하는 것이옵니다. 그것이 유일한 소원입니다." 제 집에 있게 해달라는 것이 부부인의 소원이라는 말에 시수는 끄덕이며 알았다며 부부인이 심신을 달랠 수 있도록 달래고 보내었다. 다음날. 마침 시동생인 복순이 죽었다는 소식에 조순은 한달음에 아우의 빈소를 찾아갔다. 아우의 죽음을 부정하였다. 아우는 제 형이 세도를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자칫하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사에 관심을 두지 말고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복순의 이런 우려로 조순은 비로소 탁하고 더러운 권력으로 향하는 마음의 찌든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형의 이런 마음가짐을 믿지 못하고 지방관으로만 방랑하듯 지내다가 마음에 병을 얻어 몸이 쇠약해진 틈을 타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진 풍파를 형님은 잘 견디셔야 할 텐데.' 이렇듯 국구의 자리에 오른 형을 죽어서도 우려한 복순은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조순은 동생의 가는 마지막 길을 끝까지 지켰다. 부부인 심씨도 그 곁에 있었다. 그리고 삼우제를 마친 지 일주일이 될 즈음. 웬일인지 반가의 부인네 하나가 조순의 집을 찾아왔다. "이리 오너라." 부인네가 외치는 소리에 하인이 서둘러 뉘신지 물어본다. 그러자, "김 판서네 집에서 왔네." 김 판서란 조순의 육촌인 김용순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바로 그 김용순의 부인이 온 것이다. 옳다구나 하며 하인은 문을 열어주었다. 그 즉시로 부인은 별채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조순의 부인 심씨가 몸져누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병문안을 드리는 것이다. 별채에 드러누운 심씨는 곤한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형님, 나 왔수." 한 두 번 보는 사이가 아닌 듯 용순의 부인은 새삼 친근하게 대한다. "자네가 어찌 왔나?" "형님이 편찮으시다기에 이렇게 찾아왔습죠." "……" 자포자기를 한 듯 힘없이 심씨는 손님을 맞이하였다. "형님. 제 집안에 양자를 들이는 게 싫으시우?" "……" 아무 말이 없다. 부인은 그저 망연자실하였다. "아유, 형님. 형님 말마따나 우리가 양자를 들이는 거 뭐가 좋겠소? 나도 싫수, 싫어요. 그러는데 이 댁 서방님이 그러시겠다는 거 무슨 수로 막는단 말요?" "……" "역적으로 몰리게 되면 중국에서는 구족을 더 해서라도 죽이기도 한다는데 만일 형님 집안에 역모가 생기면." "이런 고얀 것을 보았나!" 입이 방정인 용순의 부인은 부부인의 고함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왜 그러시우?" 부부인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실성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 "그래서 멸문지화(滅門之禍)되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하며 김 판서네 부인을 떠보았다. "그렇긴 합지요만." 대답을 듣고서 이내 마음을 평정한 심씨는, "내 자식이 역모로 몰려 몰락할까 걱정이 되었느냐?" 거듭 물어보았다. "그러합니다요." "그 걱정이라면 자네 집안을 잘 단속하게. 나는 이 집에 단속을 잘 할 테니." "……" "아시겠나? 자네가 그 무식한 입으로 나대지 않고 집안을 바르게 한다면 우리 집의 화는 면할 걸세. 그건 자네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하시게." 이를 듣던 김 판서의 부인은 서둘러 별채를 나와야만 했다. 아연질색한 채로 말이다. 그녀가 다른 마음을 먹게된 것은 남편이 이야기한 덕분이었다. 수많은 동지를 정국의 혼란에서 잃어버린 그는 오직 자신의 식구―더 나아가 가문의 명운―에 의지하여서라도 이 난국을 넘겨야만 했다. 그래서 명목상 맏이인 유근을 양자로 내놓았다. 그런데 이를 알 리 없는 부인은 시수에게 대성통곡하고 산발한 머리채로 애원하는 부인의 비통함을 알고 돈녕부의 정무를 뒤로하고 부인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부인에게. "내 부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소. 허나 정국이 어수선하니 우리 집은 멸문을 당하게 되었지 않소? 부인의 마음은―간곡한 청은― 알겠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오. 그러나 명심해야할 것은 양자를 보낸 곳이 우리 문중이고 또 그러하므로 설사 그 쪽에 입적한다더라도 이곳에 평생 장동에서 살게 되는 것 뿐이오. 그러니까, 한 번 낳은 자식이 어찌 다른 집으로 갔다고 해서 다른 자식이라고 할 수 있겠소? 염려는 붙들어 놓으시오. 피는 변하지 않소. 우리가 낳은 자식이니 버리지 않을 거요." 아내의 피끓는 모정을 조순이 모를리 없었다. 그리하여 옳게 유근을 양자로 삼아 김용순네 집으로 보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사 년이 지나고, 왕후가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었다. 중궁이 용종을 가졌다는 소식은 온 나라에 커다란 희망을 가졌다. "부디 어진 아기씨를 생산하시어 만세에 복이 깃들게 하소서." 저마다 부원군 집에 들어와 이처럼 아첨을 해대는 모양을 본 조순의 입가에 웃음이 보였다. 아첨하는 무리들이 물러가고 어두운 밤에 정한수를 떠서 비는 한 여자가 중궁의 회임을 감축하고자 지성으로 신령님께 비는 것이다. "감사하나이다. 아기씨를 얻으시니 소인의 마음이 놓입니다. 부디 왕자 아기씨를 낳으시어 나라의 대통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청하옵나이다. 굽어 살피옵소서." 지성으로 비는 아내의 모습을 조순은 몰래 지켜보았다. 아내가 이런 정성을 보이니 일말의 여운이 남았다. 장차 세자를 보게 될 중궁에게 무사태평하기를 비는 어미의 심정을 조순은 모른 체 하지 않았다. 다음날로 입궐하여 중궁을 찾아 뵈니, "아버님, 어인 일이시어요?" 하고 중궁이 물어본다. 이에 그는, "마마의 신변으로 인해 찾아뵈었나이다." 하였다. 중궁이 제 일신을 물어보고자 온 아버지를 보고 자신은 아버지의 안녕하신 덕택으로 상감의 승은을 입었다고 하였다. 금년에 약관이 든 임금을 어찌 사랑하였는지 부원군이 물어보니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주신 덕분에 왕실의 근심이 없어서 좋고, 또 나라 안팎에 피바람이 잦아들게 되어 마음 한켠이 편안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순은, "마마, 저는 첫째도 안정, 둘째도 안정, 셋째도 안정을 원하옵니다. 대행대왕대비가 어떤 분이셨습니까. 남인들을 축출하고, 애꿎은 서학쟁이들을 못살게 굴어 죽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선왕의 말씀대로 서학은 사학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여다볼진댄 우리 유학과 일맥이 같습니다. 부모의 효를 다하고, 또 하늘에 충성하고, 제 도리를 깨우쳐 분수를 지키는 것이 그것이옵니다." 중궁에게 이렇게 말하자 곁에 있는 상궁이 조순을 의심스럽게 흘겨보았다. "헌데 저는 차마 그 말을 올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첫째는 선왕과의 의리 때문이요, 둘째는 우리 가문의 멸문이 두려웠사옵고, 셋째는 선왕의 유교를 따라야 하는 막중한 책임 때문이었나이다." 중궁은 아비의 말을 하나씩 하나씩 경청해 나갔다. 이때 선왕의 유교는, 바로 정조가 세자로 하여금 보도토록 한 당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보도는 금상의 선정에 한몫을 거들어야 한다는 것과도 일치하다. 하여 그는 딸인 중궁에게 자신을 합리화시켜 설득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금상의 승은을 입어 용종을 잉태하였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만삭이 된 중궁이 아이를 낳게 되었다. 상궁과 나인은 물론, 내관과 의원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산모의 비명소리는 온 궐 안에 울려퍼지고 상감은 우왕좌왕해대며 산모의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 때마침 열린 산실청 안에는 부부인 심씨와 유근의 부인이 자리해 있었다. "마마, 힘을 내십쇼." 불안해하는 중궁으로 하여금 부부인이 출산의 힘을 주었다. "아―악." 중궁은 참을 수 없이 어려운 이 고통―말로 형언키 어려운 이 고통에 괴로워했다. "나 죽겠소." 딸의 외침에, "마마, 어미를 보세요. 죽다니요 마마." 부부인은 심호흡을 하는 시늉을 보이며 중궁을 안심시킨다. 이에 중궁은 어미를 따라서 후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젖먹던 힘을 다해 만출하자 상궁이, "아기씨 나옵니다. 조금만 힘을 내십쇼." 하자, 이에 그녀가 크게 비명을 지르자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감축드립니다. 마마, 원자 아기씨입니다." 원자 아기씨라는 말에 중궁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인도 감격에 겨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중궁에게 태어난 아기를 보더니, 부부인이 상감께 고하라고 일렀다. 이에 상감이 기쁨에 겨워 울먹이며, "장인의 덕으로 원자를 낳았구려. 중전, 감축하오." 하며 상감은 부부인으로부터 받아 아기를 안아본다. 이 아이는 훗날의 익종이 되는 효명세자다. 원자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맏이인 유근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 양모가 부부인이 있는 별채로 달려가, "형님, 유근이가 급제했소!" 기뻐하였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앉은 부부인이, "뉘 집 아들이겠나. 우리 부원군 대감의 자식이라네." 하며 마지못해 기뻐한 것이다. 무엇보다 상감의 처남인 유근이 행여나 경거망동할까보아 직접 조순이 그를 불러내었다. "유근아." "네, 아버님." "너는 이제 조정의 대들보다. 그러니 상감을 잘 보필하여 나라에 이롭게 해야 한다." 어사화를 쓴 유근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던 조순이었다. 조순이 급제한 아들을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조순은 제 자식을 잘 두었다고 생각했다. 제 조상의 원죄를 후손들이 스스로 거두었다. 그리 생각하니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다. 흐르는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부원군을 바라보던 부부인의 심정도 이와 같았다. "서방님." 대감이라기보다 서방님이라 불렀다. 부부인은 그저 예전처럼 살고픈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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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德 善安 奉堂
정병욱(鄭炳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 말씀) 
http://www.1392.org/bbs?moim09: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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