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 추억의 사랑방에서 제04화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뉴타운 개발의 소식은 이런 할아버지의 의중을 무시한 채 처리되었다.

이를 상기하고 볼 때 할아버지에게 이 집에서 굳이 살아야하는 일말의 사연은 있었을 법했다. 그 사연을 할아버지 당신께서 직접 말씀해주시겠다며 이야기를 하셨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서였을 거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신 게 비록 직접 세상에 나오시지 않으셨다고 하셨지만 상세히 일러준 데에는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실 구씨 집안의 종손으로 대대로 이 집에서 사셨다. 실상은 서소문 밖이었는데 사실 이 집이 생기기 전부터 민가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했다. 당시 우리 집안은 지방에 있으면서 경제적 여력이 없었음에도 양반가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민가로의 이사를 하신 적이 있다고 했다.

더욱이 대대로 명문가의 후손이 있는 만큼 그 자부심도 대단해서 조상님들 대대로 당상으로, 또는 정승 자리에 오른 분도 계실 정도로 성세를 누렸던 집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 지방에 살고 계시던 현조 할아버지께서 몸소 재산들을 정리하시고 무조건 사대문 안에 들어가지 못할망정 그 문밖에라도 살아야겠다고 하시고는 식구들 몰래 한양으로 가셨다한다.

그런데 한양에 다다르니 예상대로 사대문 안에 집을 두지는 못할 것 같은 나머지 사대문 밖, 그러니까 오늘날 서소문 밖에 집 하나를 장만해야했는데 식솔들이 많기로 소문이 난 구씨 집안에 집 하나를 장만하는 거라고는 민가 밖에 없었고 거기에다 설사 기와집이 두세 채가 있다고 해도 손수 내놓을 리가 없으니 현조님의 눈으로서는 민가집이 탐탁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현조께서는 때마침 민가 한 채를 내놓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할아버지가 그 민가의 한 채를 사셨다. 그리고는 이 민가를 헐어내어 비록 자그마하게나마 기와집을 짓도록 목수를 여럿 불러서 이 집을 짓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시어 서둘러서 재산을 정리하셨는데 재산을 실질적으로 관리해오셨다고 했다. 그러던 것이 서울로 이사하게 되면서 한시라도 바삐 집안의 재산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셨다.

부모 양친을 이미 여읜 마당에 형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 덧없는 인지상정이라는 것으로 여기시던 현조님은 집사와 몸종 둘씩을 곁에 두고 나머지 몸종들에게 모두 돈을 몇 푼 주시고서 풀어주시고 일가를 거느리어 이 집에 사시게 된 거라고 했다. 그때부터 오늘날의 사랑방의 시초가 바로 현조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조님 또한 여느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정승에 버금가는 자리에 앉으신 일이 있으시므로 '구 영감'이라는 존칭을 쓰는 것이 관례로 생각되었으나 서울에 다다를 즈음에는 이 존칭을 쓰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시 정국이 어수선하니만큼 현조님의 조정 진출은 낙타에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성격이 깐깐하시고 또, 고지식한 면도 있으셔서 의식(衣食)에만 쓰기만 하시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실(其實)은 이보다 더욱 열악했다. 바로 하나뿐인 외아들이 문제였다. 이 외아들은 본래부터가 잔병치레가 많고, 또 자식을 생산하지 않아 늘 근심거리로 남아 그분의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더욱이 현조님의 나이가 육순이신데, 이미 아들이 마누라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기지를 않으니 조상님께 욕을 보일까봐 염려되셨다고 한다. 그래서 걸핏하면 현조 할머니에게 화풀이를 하시곤 해댔다는 것이다.

"네 이놈, 이 아비의 명에 따라 마누라 하나만을 두었거늘 왜 가까이 하지 못하느냐. 한시라도 바삐 아들을 낳아야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아들 내외에게 당부하기도 하였으나 할아버지의 뜻대로 되지를 않자, 현조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시달림에 당하지 않으려고 아랫것에게 명하여 용하다는 무당이나 도사한테 불러들여, 하루빨리 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를 낳아달라고 무던히 비셨다한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누누이 당부하셨다.

"이야, 송학(松鶴)아. 네가 대를 잇도록 해야지만 이 집안이 버틸 수 있는 거란다. 부디 부탁 하자꾸나. 하루라도 빨리 떡두꺼비 같은 손주 하나를 낳아주어야지 조상님들께 뵐 명분이 생기잖느냐."

하시면서 눈물로 하소연을 하셨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를 드린 끝에 할아버지의 뜻대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보셨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현조님께서 손주를 보시고 난 지 사년 뒤에 그토록 귀하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시던 아들을 잃으셨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강직하시다 못해 고지식한 탓으로 오직 집안의 명예에만 얽매이시고 하다못해 아들에게 집안의 대들보로서 가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주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이 지경에 이르는 원인이었다고 할아버지께서는 몸소 말씀해주셨다. 물론 그분의 외아들은 세상물정도 모른데다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분이셨다고 했다.

이윽고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시던 현조 할아버지는 설상가상으로 나라가 망하고야 만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밥을 한 수 뜨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며 방에서 바깥출입을 않으시고, 오직 날이면 날마다 사랑방에서는 통곡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