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김현유
작성일 개국615(2006)년 11월 19일 (일) 15:34  [신시(申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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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潭] 동탁이라는 사람

동탁에 관해서라면 예전 삼국동지회에서 제가 쓴 글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삼국지연의가 '촉한정통론'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 속에는 한족의 '문화우월주의'의 사상도 담겨 있습니다. 촉한정통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인물의 대표자가 조조라면 문화우월주의로 인해 피해를 본 대표자가 바로 동탁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알려지지 않은 동탁의 진면모에 대해 서술해 보려고 합니다.

동탁(董卓) 농서(농西) 임조(臨조) 사람으로 자는 중영(仲潁) 이라고 합니다. 하동(河東)태수로 재직 당시 황건적 토벌의 임무를 명받았으나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자 궁중의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쳐 전장군(前將軍) 서량자사(西凉刺使) 오향후(鰲鄕候)로 승진했습니다.
서량 지방은 전통적으로 강족의 침략이 많아 골치를 앓던 지역인데 동탁이 서량자사로 있을 당시에는 강족의 침략이 없었고 백성들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서량에서 동탁은 꽤 선정(善政)을 베푼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동탁은 이유와 가후 등 대부분의 측근들을 얻었습니다.
그 당시 낙양에서는 한소제(漢少帝)의 어머니 하태후(河太后)의 오빠 대장군 하진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하진은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하여 천하의 영웅들에게 격문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습니다. 여기에 응한 제후들의 대표가 동탁과 형주자사(荊州刺使) 정원입니다. 동탁은 소제를 보고 큰 실망을 하고 똑똑한 진류왕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생각을 했고 정원은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이 분쟁 중에 통탁은 여포를 얻고 정원을 제거한 후 진류왕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분이 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이십니다.
실권을 잡은 동탁은 승상(丞相)이 되어 모든 정국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조조는 황제의 칙령을 사칭하여 제후들에게 반동탁의 격문을 돌렸고 원소, 공손찬, 원술, 유대, 공주, 한복 등이 이에 참여합니다. 처음 반동탁연합은 화웅을 죽이고 사수관을 점령하며 승리를 하지만 동탁의 장안천도 단행, 연합 내부의 암투로 인해 와해되고 동탁은 위기를 넘깁니다.
장안으로 천도한 동탁은 여포와의 불화로 인해 정권을 유지하지 못한채 왕윤 등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위에서는 동탁에 대한 간단한 서술을 하였고 본격적으로 동탁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보겠습니다.
첫째로 장안 근교에 쌓았다는 미오성에 대한 의문입니다.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동탁은 장안 근교에 장안성과 같은 높이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미오궁을 지어 30년동안 먹을 양식과 금은보화, 16~18세 사이의 처녀 수천명을 옮겨놓았다고 하는데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일입니다. 냉정히 생각해볼때 장안성 규모의 성을 쌓는 것은 최소한 5년 이상이 걸리는 대역사입니다. 그런데 집권기간이 불과 1~2년에 불과한 동탁이 그런 대규모의 성을 쌓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둘째로 동탁이 장안천도 과정에서 황제들의 묘를 도굴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조조도 했던 일 중에 하나입니다. 조조와 동탁 모두 법가사상에 가까운 사람들로 아마도 이런 행동은 '재화는 땅 속에 묻어놓을 때보다 세상을 위해 쓰여질 때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라는 법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로 동탁은 대단한 효자였습니다. 동탁이 살해될 당시 그의 노모는 90세가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당시에 90세까지 산다는 것은 자식의 큰 보살핌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헌제의 양위의향을 전해받은 그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곳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면 잔인한 폭군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동탁의 모습이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로 동탁이 집권한 시절에 천하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동탁은 원소와 공손찬의 기주쟁탈전을 중재하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지방제후들의 세력을 눌러 백성들은 오랜만에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또 천하가 안정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민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량에서 동탁이 보여줬듯이 말입니다.
다섯째로 조정원로들에 대한 동탁의 태도입니다. 연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윤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정중하고 예를 갖춰 대하고 있습니다. 초선을 이용한 이간계는 물론 허구적인 사실이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왕윤은 이런 동탁의 호의를 이용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동탁이 헌제의 양위를 받고자 황궁으로 나타난 길에 나타난 불길한 징조들입니다. 마차의 바퀴가 부러지고 안개가 끼고 노인들이 길을 막는 등의 징조들은 모두 동탁의 죽음을 막고자한 민심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유는 이런 징조들에 불안해 하지만 동탁에게 간하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일곱째로 그가 중용한 인재들입니다. 만약 그가 폭군이었다면 그에게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들을 등용하지 뛰어난 사람들을 중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가 인재들을 중용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은 그의 합리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중용한 대표적인 인물로 최고 수준의 책사 이유, 당대 최고의 용장이며 기병대장인 여포,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한 문장가 채옹, 최고의 군사전략가 가후, 충성스러운 용장 이각, 곽사, 번조, 장제 등입니다.
여덟째로 과연 동탁이 황제가 되고자 했는가하는 의문입니다. 분명 헌제의 양위를 받아들이려고 한 그였지만 실제로 황제자리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가 황제가 되고자 했다면 우둔한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옹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홉째로 동탁 사후의 정국입니다. 동탁이 죽자마자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황건적의 잔당들이 다시 일어나고 메뚜기가 창궐하며 제후들은 다시 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는 동탁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동탁의 죽음 이후 이각, 곽사, 번조, 장제 등이 다시 10만의 군사를 모아 동탁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고 그에 복수전을 선언합니다. 결국 가후의 도움을 얻어 여포를 몰아내고 왕윤을 제거하고 다시 장안을 장악하게 됩니다. 무려 10만의 군사가 동탁에 대한 재충성을 확인하고 복수전을 펼쳤다는 것은 동탁이 상당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동탁에 대해 왜곡되어 있던 사실들을 써보았습니다. 이제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동탁은 왜 그렇게 왜곡당하며 악평을 받았는가 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한족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주의 사상 때문입니다. 한족들은 자신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한족 이외에 민족들은 오랑캐로 묘사하며 깔보고 있습니다. 물론 동탁은 한족이 말하는 오랑캐 출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오랑캐와 가까운 서량의 농서지방에서 태어나 강족들과 어울리며 지냈습니다. 결국 완전한 오랑캐는 아니지만 반은 오랑캐인 셈이지요.

(참고 : 위의 내용은 김영사의 삼국지해제(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공저)를 참고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입니다만 그동안 삼국지를 꾸준히 공부해오면서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탁 사후 양주병 10만이 동탁에 대해 진심으로 충성을 재다짐했느냐?" 입니다. 결론은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양주병 10만을 이끌던 장수들은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 이었습니다. 이들은 동탁이 살해당했을 때 먼저 표를 올려 자신들을 사면해준다면 조정에 충성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왕윤이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 이었습니다. 동탁의 복수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으나 실상 그것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과연 왕윤이 처음 동탁이 자신들을 용서하였듯이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이 동탁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까요?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왕윤이 그때 동탁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동탁의 사람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였다면 후한이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요? 정예 10만과 뛰어난 장수들을 흡수한 조정을 다른 제후들이 그렇게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전란이 좀 더 빨리 정리될 수도 있었던 것을 한 사람의 독단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국 615년 11월 19일
향담(鄕潭) 김현유(金賢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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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광렬
615('06)-11-19 17:01
삼국지해제라면 나도 읽은 일이 있으나 다 읽지는 못하였네.
꽤나 두꺼운 책인데 다 읽은 것인가?
   
[2] 김철용
615('06)-11-19 17:07
향담, 충서 두사람에 비해 내가 아는 것은 미미한 것 같구만.
내가 많이 배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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