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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대한제국을 꿈구며
혼자 여행에 나선 정상훈씨는 이튿날 오전 우리와 헤어졌다. 그와 헤어지는 길로 우린 런던 거리를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낯선 모습, 낯선 사람들로 가득찬 도시의 풍경들이었지만 우리들은 금방 그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복잡한 런던의 지하철 노선도 별로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린 몇 시간 사이에 런던에 적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런던이란 도시는 이미 영국의 중심지라는 한계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수많은 영화를 통해, 책과 사진을 통해 런던은 영국의 런던이 아니었다. 이미 그 도시의 모든 이미지들은 우리의 성장 과정 속에 가랑비처럼 젖어들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발딛은 런던은 그 수많은 이미지 속으로 우리 자신이 직접 투영됐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여행은 무엇이었던가. 요란한 버킹검을 지나 제임스 공원 (St. Jame's Park)의 고풍스런 벤치에 앉아 나는 그런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러다가 호수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와 청둥오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에선가 우렁차고 절도있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기마병들이 시위를 하듯 버킹검 쪽으로 행진했고 곧이어 군악대가 오와 열을 맞춰 지나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들고 나선 카메라의 셔터를 열심히 눌러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들고 있는 카메라가 협조를 안 하니 더욱 더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오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카메라 수리점을 찾겠노라 다짐하며 열심히 캠코더를 돌리고 있는 K선배의 곁으로 다가갔다. "웃기는 일이여." "뭐가요?" "조상 잘 둔 덕택에 이렇게 먹고 사니 말여. 모두 철저히 관광상품화시켰잖여." 카메라의 줌 렌즈를 계속 밀고 당기면서 그는 비난인지 푸념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을 늘어놓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색창연한 궁전과 호수, 그림같은 근위병과 왕실 제도, 귀청을 울리는 팡파레...... 모든 것들이 대영제국의 찬란했던 과거를 보여주는가 하면 또 그 자체가 상품화되어 끝없이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즐겁게(혹은 부럽게) 만들고 있었다. 서울의 경복궁을 생각해 본다. 또 그 뒷편의 청와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서울이란 도시를 생각해 본다. 몇 해 전 정도(定都)600년을 맞았다는 서울은 과연 600년이란 역사의 궤적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도일까? 600년이 아니라 일산이나 분당처럼 6년쯤 된, 설익은 모습으로 과거를 깡그리 잊으려 노력하는 게 오늘 서울이란 도시는 아닐까. 그런 뜻에서 우리의 공화정치를 아울러 생각해본다. 영국을 비롯해 스페인, 일본, 말레이시아 등 아직도 여러 국가에 남아있는 왕실과 국왕을 우리나라에서도 부활시키면 어떨까. 실질적인 국가의 수반은 지금과 같이 대통령 또는 수상이 맡고 국왕은 한 나라의 상징적 존재로 추대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따른 왕가의 법도와 여러 가지 의례는 조선 시대의 그것을 기준으로 하되 다른 나라의 제도도 참고해 시대 감각에 맞춘다. 국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등 왕가는 물론 의전, 경호 담당의 비서진과 측근들은 각자의 신분에 맞는 복색을 갖춘다. 물론 국왕이 사는 곳은 경복궁으로 하며 임기는 종신제로 정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제 왕가의 복원에 따른 문제점을 따져보았다. 당장 그런 제도를 대다수 국민들이 찬성할 것인지 의문이다. 그러나 일단 긍정적인 결론을 전제하고 이번엔 어떤 인물을 어떤 방법으로 국왕에 추대할 것인지가 고민이다. 여지껏 단 한 명이라도 직무를 명예롭게 수행한 대통령을 갖지 못한 나라의 국민으로선 더욱 더 난감한 문제다. 그러나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라도 왕가의 복원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일 듯 싶다. 국왕이 될 인물은 우선 그 인물됨이 공평무사함은 물론 국민들이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덕이 있어야겠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한 국민의 심성과 도덕, 전통을 상징하고 대변하는 인품이어야 한다. 대외적으론 한국인의 오랜 역사와 문물을 과시하고 감히 그 전통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권위도 갖춰야 마땅하다. 그리고 버킹검에서처럼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의장대나 근위대원들이 경복궁 주위를 시위하고 장엄한 근무 교대식을 하는 것이다. 한국을 알리는 홍보물이나 엽서에는 경복궁 정문을 지키는 근위대원들의 늠름한 모습이나 왕비의 아름답고 자애로운 모습을 싣는다. 다소 형식적이긴 하겠지만 우리의 경제와 문화, 지금의 국가 경쟁력이 결코 '날 것'이 아니라는 걸 대내외적으로 보여주고 국민들 사이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으로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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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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