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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당 강의 공간
작성자 정병욱
작성일 개국630(2021)년 10월 13일 (수) 19:08  [술시(戌時):초경(初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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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제379강 : 시조(時調)
시조(時調)

* 명칭과 정의

시조라는 명칭은 그 실물보다 뒤에 와서 생긴 것입니다. 이병기의 견해에 따르면 이 명칭의 쓰임을 신광수(申光洙)의 『석북집』에 의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관서악부(關西樂府) 기(其) 15에 수록된 시조가 우리 문헌상 최초의 기록입니다.

初唱聞皆說太眞 至今如恨馬嵬塵
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여기 “처음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태진을 말하는바, 지금도 마외언덕에서 죽은 그녀의 죽음을 한탄하는 것 같다.”의 노래란

一笑百美生이 太眞의 麗質이라
明皇도 이럼으로 萬里行蜀 시도다.
至今에 馬嵬芳魂을 못 스러 노라.

이 사실에 당세의 가객 이세춘이 “장단을 베풀어 불렀던 것”을 ‘시조’라 일컬은 것이 그 시초라는 것입니다. 이후 시조라는 명칭이 문헌에 종종 나타나며 정조때 사람인 이학규의 <낙하생고> 고불고시집 ‘감사(感事)’ 24에도 “수련화월야 시조정처회”라 하여 시조란 명칭이 보이고, 다시 주를 달아, “시조란 또한 시절가(時節歌)라고도 일컫는 바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되어 있고 긴 소리로 이를 노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시조라는 명칭은 ‘시절가를 부르는 곡조(시절가조)’라는 말을 줄여 이루어진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조’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졌는가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저 단순히 ‘단가’, ‘노래’, ‘새 노래’, ‘한시와 구별되는 노래’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신문학 이후에도 시조나 시조시 이외에 다른 명칭들이 쓰인 바도 있습니다. 국풍(國風), 정형시, 삼행시, 삼장시, 민족시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명칭의 사용이나 제기는 시조가 지녀온 바 음악과 문학의 양면성에서 무엇보다도 “시조는 시여야 한다”는 문학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조는 고려 말엽부터 생겨나 조선조 초에 이르러 정제된 문학양식으로 그 명칭도 문학 양식의 명칭이라기보다 음악 곡조로 일컫고 있습니다. 민요와 향가, 여요와 악장 및 가사 등 우리 시가 문학이 모두 음악과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시조는 우리 겨레의 각계각층에 널리 애호를 받으면서 가장 오랜 생명력과 가장 풍성한 유산을 남겨준 문학양식으로 오늘날에도 창작되고 있고 앞으로 계속 생명력을 지녀 나갈 민족적인 시형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 양식의 발생

시조양식의 발생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일곱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 민요기원설(이병기)

이병기의 주장으로서 “시조의 원형은 본시 6구 3절식인 민요형에서 파생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 상으로서는 시조 시형이 반드시 앞섰다는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 한시기원설(안확 정래동)

안확과 정래동의 주장으로서 안확은 “시조는 한시의 단율 곧 절구의 조자(調子)를 본받아 성형된 것으로도 상상된다”고 했고, 정래동은 “시조가 한시를 번역하면서 발견된 시형이 아닌가 하는 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시조의 가락으로 절구를 읊고 시조의 시형에 맞춰 한시를 번역해 읽었다고 볼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 불가기원설(안확 정래동)

안확의 주자에 정래동도 동조한 주장으로서 안확이 “본래 가곡 24법은 명의 불가곡에 수입하여 세종 때부터 유행하였던 바다. 바로 시조도 불가의 조자로 된 것인바, 그 문장의 체단도 불의 3분설을 본받은 것이 아닌지 모른다.”고 하였고, 정래동도 시조의 “조자만은 중국불곡에서 나온 것이 사실인 것 같다.”고 안확의 학설을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 김태준이 부정한 바 있어 주목됩니다.

- 별곡기원설(김태준)

김태준(金台俊, 1905~1950)의 주장으로 한시 및 불가의 영향을 부정하고 “고려말엽의 별곡의 정형이 파괴되어 장가와 단가의 두 가지가 되어, 장가는 가사로, 단가는 시조로 분화되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한림별곡> 등의 기본 음수율이 34인데서, 그 한 음보를 이룬 3이나 4만을 생각한 추론에 불과합니다.

- 신가기원설(이희승)

이희승(李熙昇, 1896~1989)의 주장이며 우리나라 가요의 기원은 민요와 신가(神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조선의 원시종교였던 살만교(薩滿敎)의 신가중 ‘노랫가락’이라는 것이 현금까지 불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노랫가락’의 형태를 빌려 부르는 속요(민요)의 노랫가락이 있는데 속요의 노랫가락은 신가의 노랫가락에 연원된 것이요, 이것이 재전하여 시조를 산출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오히려 시조의 영향 아래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계를 나타냅니다.

- 고려속요기원설(정병욱)

정병욱(鄭炳昱, 1922~1982)의 주장으로 “시조 형태는 고려시가의 별곡체가 붕괴되면서 형성”되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는 김태준의 별곡기원설과는 다릅니다. 그는 <만전춘>의 제2연과 제5연을 들며, “우리 리듬의 템포, 또 호흡의 완급, 수사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시조가 지니고 있는 풍격에 접근하여 가는 자취를 파악할 수 있으며, 3장으로 분장되어 하나의 시연을 이루는 형태적인 성격이 시조 형테의 모체됨에 있어 조금도 어색함이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 향가기원설(김사엽 이탁 김준영 서원섭 이태극)

김사엽은 양주동(梁柱東, 1903~1977)의 해독 향가를 분석해 행과 구의 정형을 들어보이고, 고려 중기 이후에 오면서 “향가의 행의 구수가 반으로 단축됨에 따라 현금의 단가(시조) 형식이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야(阿耶)’‘아사야(阿奢也)’ 등 ‘아으’에 해당되는 향가 낙구를 시조 종장의 첫 구로, <시용향악보> 소재의 <횡살문>을 고려 중기에 정제된 시조 시형의 노래(단가형의 가요)의 최고 기록물로 보았습니다.

이상 살펴본 7가지 설에서 우리는 시조 양식의 형성에 관하여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 양식의 특징

시조의 하위 양식으로 평시조와 엇시조, 그리고 사설시조를 듭니다. 평시조는 단시조, 또는 단형시조(短形時調)로 일컫습니다. 특히 사설시조의 시행보다는 중시조 혹은 중형시조로도 부르기도 합니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에서는 평시조형에서 역시 종장 3자구를 제외하고는 두 구절 이상이 길어진 시조를 일컫습니다. 사설이 긴 시조라 하여 장시조 혹은 장형시조로 일컫습니다.

시조의 대표적 작자로 우탁(禹倬)과 원천석(元天錫), 정몽주(鄭夢周)를 예로 듭니다.

* 표현의 특징

우선 언어를 구어(口語)와 문어(文語), 속어(俗語)와 아어(雅語)로 나누어 생각할 때, 평시조는 문어와 아어를, 사설시조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구어와 속어를 썼습니다.

다음으로 순연한 우리말과 글로의 표현, 한문에 토 다는 식의 표현, 이 두 가지로 시조의 표현을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 영탄적 표현방법의 사용이 잦고, 서경적(敍景的)인 외부 서술로 시작해 작자의 내부적인 사정으로 귀결짓는 방법을 즐겨 쓰는 것도 시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설시조는 요설적이면서도 비시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일찍이 평시조와 비교해 볼 때 조선조 후기의 왕성한 산문정신과 실학사상의 영향 아래 평시조의 정제된 시형을 깨뜨리고 이루어진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 역사적 전개

신문학 이전의 시조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5세기 시조 = 시조의 연원과 발생
16세기 시조 = 시조의 성장
17세기의 시조 = 시조의 발전
봉건왕조의 말기시조 = 시조의 쇠퇴

위와 같이 앞의 경우, 세기별의 구분으로, 뒤의 경우는 생명체로서의 구분으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변동상을 참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려말기의 시조문학 (광종 24~공양왕 4 : 973~1392)
제1기의 시조문학 (태조 1~성종 25 : 1392~1494)
제2기의 시조문학 (연산 1~선조 41 : 1495~1608)
제3기의 시조문학 (광해 1~숙종 46 : 1609~1720)
제4기의 시조문학 (경종 1~고종 31 : 1721~1894)
부흥기의 시조문학 (고종 32~순종 4 : 1895~1910)

시조의 성장기는 조선왕조의 기틀이 공고히 다져지고 비교적 태평한 시절이 계속되어 성종의 치세에 이르는 약 100년간의 시대에 해당됩니다. 그 동안에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반포되어 시조가 문자화됨으로써 제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때 활약한 사람으로 이지란, 변계량, 맹사성, 황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왕방연, 남이, 김종서, 성종, 소춘풍(笑春風) 등이 이 시기의 작가로 들 수 있습니다.

시조의 발전기는 연산군 때부터 숙종 때에 이르는 16~17세기입니다. 왜란과 호란을 치러야 했던 시기이고 했지만, 한편으로 성리학과 문운(文運)이 크게 떨쳐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시조의 쌍벽을 이루는 정철과 윤선도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시조의 창이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그들에게 창작의욕을 북돋워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시조의 쇠퇴기는 경종부터 한말에 이르는 약 두 세기에 걸친 동안입니다. 18세기 선각자들에 의해 실사구시의 학풍과 평민들에 의한 산문문학이 대두되면서 시조는 창을 위주로 내닫게 됩니다. 따라서 창의 교본을 위한 가집들이 편찬되고 그 가집들을 놓고 창만이 유행하여 창작의욕이 떨어진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조의 창작적인 부흥은 최남선과 이광수, 그리고 정인보와 이병기, 이은상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참고자료

국문학편찬위원회, <국문학신강>, 새문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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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지용
630('21)-10-14 21:18
문서작성자 정병욱님이 채택하신 글입니다
현대시도 노래와 결합한 가곡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그때에 시조가 노래가락이 붙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조는 서구에서 도입된 현대시를 제외하면 한국 고유의 시가 양식의 완성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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