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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암투(暗鬪) 제02화
상기 허씨와 소비는 자신들을 대신하여 새 왕비를 맞이한 이후에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이 망연자실하고 있던 차 웅비가 새 왕비에게 찾아가 안동군을 양자로 삼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그렇다면 임금에게 가서 윤허를 받아두고서라야 승낙할 수 있겠소.” 신중을 기하였다. 이것이 소문나자 중덕황태후가 웅비의 처사에 매우 불쾌하게 여겨 후궁이 폐위를 주청하니 태후가 간청하길, “비록 왕실의 대통을 이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직 태자로 책봉된 바도 없는데 후궁의 몸으로 공연한 일을 벌이니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보위를 찬탈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차라리 웅비를 서인(庶人)으로 만드세요.” 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대주화가 상소하니, “한때나마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황태후께서 체통도 내버리시고 일개 후궁을 모함하심은 어인 연유이십니까? 황태후께서 정사에 개입하심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조정은 한동안 시끄럽게 되었다. 영의정 이하 의정부 대신들이 모두 대주화의 뜻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자 영돈령부사 조성이 반박하였다. “무릇 국모(國母)란 자리가 무겁고 막중(莫重)한 자리인데 황태후전에서 나서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게다가 오랫동안 왕비의 자리가 굳건해지지 않았기에 명부(命婦)의 기강 또한 해이해져 있으니, 황태후전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옳소이다.” 조성의 말을 따라 영돈령부사 이하 돈령부 대신들이 모두 이에 따랐다. 이들은 각각 의정부와 돈령부에서 파당을 이루니, 의정파(議政派)와 돈령파(敦寧派)가 그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죽은 대선의의 아들들이 숙부의 신변에 큰 위협이 따를까 보아 싸움을 끊도록 하고자 나름 중재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조카들이 충청도 시흥도로 이사하여 은거하니 이후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세거하였다 한다. 그 뒤 중덕황태후는 지방관인 윤기진으로부터 서찰을 은밀히 받았다. 황태후에게 돈령부의 수장인 조성과 손을 잡도록 하니, 황태후가 이를 관철했다. 조성은 보수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 웅비는 의정부의 수장인 대주화와 손을 잡으며 왕비로의 복위를 꿈꾸었다. 사정이 이리되자 왕비는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었다. 왕비 자신은 비록 중덕황태후의 선택에 의해 왕비로 앉게 되었지만, 자신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마마.” 야심한 시각에 잡념에 사로잡힌 왕비의 처소에서 기척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잡념에서 막 깨어난 왕비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밖에서 궁녀가 “영의정 대감께서 듭시옵니다.” 영의정이 들어있다는 말에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중덕황태후가 ‘만에 하나 내 눈밖에 거슬린다면 중궁의 자리는 온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체통을 차리십시오.’ 일종의 경고를 날렸기 때문이다. 영의정을 들인 뒤 궁녀에게 찻상을 내오게 했다. 밤기운이 차갑기 때문이다. “마마, 다름 아니라 신이 간곡하게 청하는 바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왕비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물으니 영의정이 웃으면서 찻잔을 마시고는 “마마, 부디 공주마마를 낳으시옵소서.” 하였다. 왕비가 “그게 무슨 소리요.” 하자 영의정이 부복(俯伏)하며 아뢴다. “중덕황태후가 제 목숨을 노리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하루 속히 후사를 보시되, 공주마마를 생산하시옵소서. 그리하옵시면 신의 목숨도 보전될 것이오니 만약 그리된다면 마마께 결초보은(結草報恩)을 다하겠나이다.” 왕비가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지만, 의정부의 수장이 이리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보면,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내외로 우환이 닥치더라도 자신의 책임을 덤덤하게 져왔기에 오늘날까지 나라가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뿐인가. 고태수 일가가 왕통을 계승하여 오늘날까지 번성하였다. 태평성대였다. 그런데 이렇게 의정부의 수장이 비굴하게 자신에게 찾아와 살려달라고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영의정의 간청을 어렵게 받아내고 난 지 이튿날에 중덕황태후가 어떻게 알았는지 영의정을 파면시키다 못해 사사(賜死)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장차에 와서 자신의 자리가 온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비, 나는 왕비가 그리 나오실 줄 미처 몰랐습니다.” 중덕황태후가 눈치챘기 때문이다. 왕비는 말이 없었다. 왕비의 낯빛이 불안했다. “마마, 마마.” 황태후전에 있는 궁녀가 다급히 부르는데, “무슨 일이냐?” 하고 황태후가 물으니 궁녀가, “소비 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하자 황태후가 “오, 그래?” 하며 미소한다. 화색이 완연했다. “왕비, 내 이번에는 봐주겠지만 이 이상은 안 되오.” 왕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쉰다. 영의정이 한 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윤기진을 영의정으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대주화의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를 앉히려고 한 것이다. 유약(柔弱)한 인물을 대신해서. 하여 황태후가 전면에서 윤기진을 영의정으로 세우고자 했으나, 의정부의 내부에 반발이 심했다. 왕이 이에 심사숙고한 끝에 “윤기진을 영중추부사에 명한다.” 는 교지를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황태후는 중추부의 힘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때가 십이월의 일이다. 죽은 대주화의 자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대홍우가 작은아들 대화창(大和昌)을 양자로 삼게 했다. 왕이 이를 받아들여 선교랑에 명했다. 뒤이어 의정부의 새 수장을 삼는 대신, 좌우의정이 정무를 맡게 했는데, 이때 의정파의 수장이 우의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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