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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사무엘 제04화
엘리의 죽음을 예견하신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말씀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 미련하고도 아둔한 게 사람의 마음이건만, 웬일인지 사무엘의 머릿속에는 주님의 말씀이 귓가를 생생히 울려오는 것이다. 무언지 모르게 가슴 한복판에는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덮칠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부제의 신분이면서도 동시에 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겸허히 받아 들여왔지만 이렇듯 생생한 느낌은 그를 더욱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고 있었다. 엘리의 예배당에 막 도착하자마자 여인의 절규(絶叫)하는 비명이 들려오니, 사무엘이 급하게 성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무엘이 성전에 막 들어서자마자 여인이 사무엘의 해진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울부짖는다. “엘리 사제님이 불과 한 시간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갑작스러운 엘리의 죽음이 여인에게 큰 충격이었던가 보다. “스승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침착한 어조로 사무엘이 묻자 여인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여인은 이곳 성전 근처에서 비단을 파는 상인의 부인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장정들을 불러놓고 사제님의 집 앞마당에 눕혔어요.” 여인의 말을 듣고 사무엘은 곧장 예배당을 나와 엘리의 거처에 당도했다. 엘리의 집 앞으로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갑작스럽게 죽은 엘리의 주변을 옹위(擁衛)하였다. “아유, 이게 웬일이래. 하느님을 정성스레 빌더니만 갑자기 숨이 막혀서 세상을 떠나다니. 청천(靑天) 하늘에 날벼락이 웬 말이람.” “쯧쯧쯧. 세상에나 마상(相)에나 자식 복도 없이 외롭게 살다가 죽었으니, 하느님을 어떻게 찾아뵐꼬.”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뚫고 사무엘은 마당 바닥에 놓인 엘리의 시신 앞으로 다가가 본다. 엘리는 사제복을 입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쥔 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리. 자식이 하느님과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잇속에 얽매인 채 대를 이어 사제로서의 길을 마다하였던 처지였던지라 마지막 가는 길은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은 부릅뜬 스승의 양쪽 눈을 손으로 스르르 감겨주고는 기도하였다. ‘하느님 아버지, 이 불쌍하고 가엾은 양이 하느님을 가까이 뵙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스승의 가슴을 움켜쥔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무엘의 손에 쥔 채 시신의 오른팔이 생사람처럼 자연스레 내려지는 게 아닌가. 이 광경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이 비로소 사무엘에게 신통력(神通力)이 있음을 알았다. 그에 보태 불행하게도 부인도, 자식도 없이 외로운 최후를 마친 엘리를 동정하는 눈치도 보였다. 엘리. 그는 대대로 사제로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본래 조상인 모세 때부터 사제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사제를 천직(天職)으로 여기며 우직(愚直)하게 묵묵히 걸어온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사무엘의 행위는 자연히 하느님의 조화가 일어났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주위에서는 모세 이후에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나오는데 사무엘은 정신을 수습한 듯 뒤돌아서서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와서 시신을 담을 관(棺) 하나 준비할 수 있습니까.” 그제야 네 명의 건장한 장정들이 관 하나를 묵묵히 들고 와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무엘의 앞에 갖다 두었다. 곧이어서 네 장정이 엘리의 시신을 거뜬하게 들고는 사무엘의 안내에 따라 관 안에다 넣었다. 그러고 나서 어린 성전 시동(侍童) 몇을 불러서 향을 피웠다.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사무엘이 이끌어주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사무엘은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엘리는 제자인 사무엘의 손에 의해 성전 뒷산에 공손히 안장되었다. 스승의 장례를 무사히 마친 사무엘은 순간 공허함을 느꼈다. ‘베들레헴으로 갈까. 예루살렘으로 갈까. 헤브론으로 갈까. 아니면 브에르세바로 갈까.’ 사무엘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내가 진실로 올곧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기에 제가 하느님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그는 일종의 목마름을 느끼고 있었다. 갈망이라면 갈망이랄 수도 있고, 욕망이라면 욕망일 수도 있다고 치자. 아니 목마름이라면 목마름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고립된 채 모래 바다에 허우적거리다가 깊은 심연(深淵)으로 꺼져버리는 무기력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넋을 잃은 듯 자신의 터전으로부터 나와 어느 때 어느 날짜, 어느 장소를 지정하지 않은 머나먼 방랑의 길을 스스로 택하게 되었다. 그는 무작정 맨몸으로 부딪히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사무엘은 해질녘이 되어 어느 외진 마을 어귀에 당도했다. 민가가 열 채도 되지 않는 한적한 시골 마을인데 황무지(荒蕪地)를 개간한 듯하다. 이곳에 이른 사무엘은 ‘브에르세바.’ 라는 목적지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브에르세바.” 나직이 입으로 중얼거린다. “브에르세바.” 사무엘은 그렇게 황야 한가운데에 서서 지는 노을을 보게 되었다. 장렬히 붉게 타오르다 시들어진 햇살이다. 그는 비로소 하느님의 길에 접어든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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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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