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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칠삭둥이 제2편
[2] 그 뒤 한기 내외는 삼 년 뒤에 명회의 아우인 명진(明)을 낳았다. 하지만 산고에 시달린 탓인지 돌연 이씨가 요절하였다. 그나마 유모를 잘 둔 덕으로 그럭저럭 두 형제는 탈 없이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명회가 네 살이 되던 해에 조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큰아이가 자라면서부터 호걸로 자라날 것이라고 장담했더니만 보통 나이보다 늦은 열 살이 되어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켜보면 훈장님의 회초리에 맞아 종아리에 피멍이 가시지 않기는 부지기수고, 동네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기 일쑤. 보다 못한 조모가 나서서 야단치기도 하고 꾸중하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헛살았구나 하며 속앓이를 하다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어르신을 여의고 난 아버지는 마음 같아서는 다른 집에 양자를 보낼까 궁리하기도 했다지만 저렇게 어리석은 아이를 어느 집구석에서 받아나 줄까. 근심은 더해만 갔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다가 가뜩이나 잔병치레가 잦은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두 형제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이에 보다 못한 문중에서 직접 나서보고자 했다. 그러던 차에 작은할아버지가 오갈 곳 없는 두 형제를 손수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자연히 작은할아버지 한상덕(韓尙德)의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러던 게 장장 스무 살이 된 명회는 조부의 재산을 상속받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 바로 입신양명(立身揚名)! 남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입신양명의 기회를 잘도 누린다. 조상들의 음덕(蔭德)을 입지 않고도 스스로의 실력으로 시부(詩賦)에 능하다느니, 셈을 잘한다느니, 무술에 능하다느니 하며 조정으로 속속들이 출사를 한다지만 자신은 아무런 재주도 능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제 실력을 뽐낼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있었다. 바로 민대생(閔大生). 한량배로 나앉은 명회의 처지가 딱하고 측은함이 든 작은할아버지는 서울 장안에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문하생(門下生)이 되게 하고자 했다. 그래서 찾은 끝에 만난 이가 바로 민대생이었다. 나이는 상덕과 비슷한 연배. 해서 마음이 줄곧 통했다. 그래서 글 선생으로 앉혀 명회가 입신양명할 기회를 보아야겠다며 명회를 그 문하생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작은 조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민대생은 꿍꿍이를 드러냈다. 결국 말만 글선생이지 실상은 이 한씨 집안의 재산에 눈이 뒤집혀 자청했던 것이다. ‘허허허허…… 개국공신(開國功臣) 집안이겠다, 재산도 꽤나 넉넉하겠다. 글선생이 뭐가 대순가.’ 돈에 눈이 뒤집힌 채 글선생이 된 자신은 자신대로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에 오른 몸. 문하생인 명회와 같은 처지였다. 그도 애로사항은 있기는 했다. 바로 부인 허씨(許氏)가 그 원인이다. 허씨는 나름 명문가의 규수로서 한 치의 흠도 없을 정도의 법도를 지닌 그녀였지만, 시댁이 알고 보니 겉만 명문가일 뿐. 헛똑똑이에다 빈털터리나 진배없는 것에 실망하여 걸핏하면 징징대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기를 한 해도 아니고 십 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이십 년이 다 되어서까지도 고질병(痼疾病)이 되었다. 해서 민대생과 마주 대하기만 하면 짜증을 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 고질병을 고칠 궁리를 하던 차에 글선생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으니 민대생으로서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허씨의 병적인 잔소리에서 벗어날 구실이 생기고 난 그는 그저 득의양양할 뿐이었다. “아이구, 영감. 그거 참 잘 되었구랴.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은 면하게 생겼구랴.” 전후 사정을 모른 채 허씨는 돈의 위력에만 집착할 뿐이었다. 눈 앞에 돈이 급한 것이다. 그 깊은 내막은 여기까지 밝히기로 하고 명회를 문하생으로 둔 민대생의 행보에 있었다. 민의 글공부시키는 기척이 없음을 알고 상덕이 분하여 민대생을 자신의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대생을 불러들이고서 하는 말이 “어째서 우리 명회에게 글공부를 하지 못하는 게요.” 따지듯 하는 말에 대생은 그저 허허허 하고 웃을 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속되게 말하자면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같고, 좋게 말하자면 낙천가(樂天家)의 기질을 지닌 것 같기도 하다. 대생이 대뜸 한다는 말이 “이 선비에게 글공부할 필요는 없사옵니다.” 이 말을 듣고 상덕이 놀란다. “아니 왜요?” “저 선비는 이미 사서(四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경(五經)까지는 깨우친 거 같소.” 대관절(大關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상덕은 그저 벙벙하게 있더니 대생에게 설득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남의 집 자식들은 하나같이 벼슬에 나가 부모의 슬하에서 벗어나 제 살길을 찾아가지 않소.” “허허허허, 그 고약한 신참례만 면하기만 하면 다행 아니오. 실은 내 자식놈이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 출사해 있기는 있었소만 그놈의 신참례 때문에 예사 힘들어하지 않더랬어요. 그래서 밤이 되기만 하면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기 일쑤였지요. 그걸 겪을 바에야 차라리 과거를 보지 않고 대대손손(代代孫孫) 먹고 살 만한 재산을 지키는 게 순리지요.” 여기서 신참례란 조정에 갓 출사하여 임명된 새내기 관리들에게 행해지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이때 선배 관리들은 새 관리들에게 술을 억지로 먹인다든가, 또는 성적으로 농짓거리를 하고 심지어는 똥물을 떠다 세례를 퍼붓는 등 호되게 대하기가 부지기수였다. 때로는 이로 인해 조정에 갓 출사하자마자 세상을 떠나는 일까지도 일어나니 대생이 이를 겪고 경험한 처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자 상덕의 입은 자물쇠처럼 굳게 닫혔다. 손자뻘인 명회가 장손답지 않게 몸이 허약한 까닭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냥 세월을 유수(流水)같이 보내는 것이, 한 선비한테는 이로울 것이오. 다만,” 벙어리처럼 듣고만 있던 작은할아버지는 대생의 말에 멈칫한다. “한 선비는 천부(天賦)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방금 말한 것처럼 사서오경을 통달할 정도의 혜안이 있음을 단번에 알았소. 나도 한때 글공부에 미친 적이 있는데 바로 한 선비의 나이쯤이었으니 일러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낙천가 대생의 말에 그저 상덕은 어안이 벙벙해 있을 따름이었다. “한 선비를 보아하니, 때마침 막내 딸자식이 생각납니다만. 어떻습니까. 제 과년(瓜年)한 막내 여식을 손주며느리로 맞으시는 것이.” 이때 상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러면.” “굳이 급할 나위가 없잖습니까. 댁(宅)에서 정 용처(用處)가 궁하시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느니 차라리 저의 집에서 기거하며 지내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대생은 명회의 면면을 한눈에 들여다보듯 관찰하였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었다. 처음 한씨 집안의 재산에 탐이 났던 자신의 모습에서 선비로서의 고귀한 성품을 팔아넘길 뻔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명회의 깊은 혜안만이라도 취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중히 한씨네 재산을 마다하고 혈혈단신이나 진배없는 명회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허씨가 땡전 한 푼도 가져오지 않고, 명회를 문하생으로 데려오는 것을 보고 낙담하는 게 아닌가. “아이구 데이구. 그예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이려고 이러시우?” 명회 앞에서 무안을 주는 부인의 앙탈에 대생은 공연히 잔기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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