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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역사소설
작성자 정병욱
작성일 2021/11/07 (일) 17:00  [유시(酉時)]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qpddnr901230
ㆍ추천: 0  ㆍ열람: 54      
[선안] 시대(時代)_04 (제12편)
안덕 1년, 숭덕 1년 정월에 옥선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이에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하고, 영의정으로 초정술을 임명했다. 좌의정에 초금, 우의정에 초보, 좌찬성에 제길, 우찬성에 향부, 좌참찬에 향일, 우참찬에 향국을 명했다. 이판(吏判) 호판(戶判) 예판(禮判)을 공석으로 남겼으며 공판(工判) 병판(兵判) 형판(刑判)은 연임하게 했다.
2월에 관덕군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관덕군부인으로 하여금 위로하게 하고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명했다.
3월에 왕후로부터 공주가 태어났다. 왕이 이에 이름을 웅진(雄鎭)이라 했다.
4월에 배달국왕과 다시 국교를 맺었다. 그 의미로 사오지가 왕에게 성명왕(聖明王)이라 봉하였다.
5월에 선왕의 후궁인 길씨를 태원궁주(泰元宮主)에 봉하였다.
6월에 왕이 직접 명하여 죽은 관덕군의 부인인 궁씨를 대궐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고 덕비(德妃)로 봉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황태후가 노발대발했으나 왕은 이를 굽히지 않고 강행했다.
7월에 덕비를 덕융왕후에 봉하였다.
8월에 덕융왕후의 존호를 희사(熙事)라 했다.
9월, 배달국왕의 변심이 있은 까닭이었을까. 배달국왕이 친정(親征)하여 도성에까지 쳐들어오자 오위도총부와 삼군이 직접 진압하고자 했지만, 대궐이 불에 탔다. 이 과정에서 박재궁에 기거하던 왕과 안원왕후가 배달국의 군사에 의해 시살(弑殺)되고, 태후와 덕융왕후, 그리고 계림공주 모두 광흥사에 피난(避難)을 하였다. 이로써 박재궁은 화재로서 소실되어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10월, 배달국왕의 침략을 피해 왕실과 조정이 광흥사를 별궁으로 삼아 기거했다. 그 인근에 소덕황태후의 존호를 따 소덕사라는 사찰을 새로 지었다.
11월, 왕의 시호를 밀종성명숭덕대왕(密宗聖明崇德大王)이라 했다. 이후 조정 대신들이 황태후를 태황태후에, 덕융왕후를 희사황태후에 봉하였다. 이에 배달국왕이 직접 본국을 통치하고자 했으며 고씨 성보다는 궁씨 성을 가진 이들 가운데 궁다(宮多)라는 이를 불러내어 왕으로 옹립했다. 궁다는 본래 성품이 교활하기 한량없는 사람으로서 궁왕의 성품을 빼다 박았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었다. 궁다는 궁영만의 손자로서 아버지는 궁영만의 음덕에 의해 벼슬에 출사하지 않을 정도로 풍족한 살림을 살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평민 출신으로 알려졌다.
궁다는 추씨와 강씨, 윤씨, 엄씨, 남궁씨, 길씨, 궁씨 등 일곱 부인을 두었으며, 그 자손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궁다의 나이가 백열 살이 되었을 즈음 얼떨결에 배달국왕으로부터 보위를 이어받았다. 이는 배달국왕이 태황태후와 황태후를 협박하여 강탈한 것이었다. 하여 궁다와 그 일가를 봉원궁에 기거하게 했다.
이곳에 기거한 지 두 달 뒤에 궁다가 세상을 떠나자 배달국왕이 시호를 연원공(燕院公)이라 했다. 궁다의 장남인 궁준덕(宮俊德)이 물려받았다. 이에 배달국왕이 안유공(安裕公)이라 봉하였다. 그리고 옛 수도인 신시를 식읍(食邑)으로 주어 이곳의 군왕(郡王)으로 삼으니 그 전횡이 만만치 않았다.
궁준덕이 옥좌에 오른 지 이틀 뒤 하인을 시켜 배달국왕 몰래 광흥사에 보내어 태황태후에게 도성의 이남으로 피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태황태후가 결단을 내려 광흥사 건너에 있는 장흥사로 야밤중에 왕실 가족들과 조정 대신들을 대동하여 은밀하게 피란했다. 다음날 왕실 가족들이 조정 대신들을 대동하고 몰래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배달국왕이 궁준덕을 참형(斬刑)에 처하게 하여 폐위시키고 연원공의 차남인 궁강시(宮江施)를 양득공(兩得公)으로 삼아 후사를 잇게 했다. 그리고 연원공의 첫째 부인인 추씨를 죽였다.
안유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장흥사에 피신한 태황태후는 불가피하게 왕위를 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고태수의 아우 고태박의 후손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태황태후는 선왕의 죽음이 황태후에게 있음을 의심하였던 과오를 뉘우치고 황태후로서의 예를 갖추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장흥사를 궁으로 승격해 장흥궁(長興宮)이라 이름 지었다. 이로써 한강 이남의 지역을 선사국의 영토로 삼았다.
새로 옹립된 왕은 익공(翊公)이라 봉하여졌으며 연호를 원덕(元德)이라고 했다.
두 달 뒤에 왕이 원덕 원년이라 했다. 이틀 뒤에 배달국왕으로부터 군신(君臣)으로의 관계를 확립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에 왕이 배달국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후에 배달국왕의 치하에 있게 되었다.
익공이 즉위한 지 20년이 되어 태황태후가 하세하였다. 왕이 장례를 후히 치르게 했다.
원덕 21년 정월에 선왕의 딸인 계림공주를 자오지의 태자비로 보냈다.
2월에 영의정 초정술이 죽자, 영의정을 공석으로 하여 좌의정을 수반으로 삼았다.
3월에 궁강시가 자신의 여동생들을 왕비로 보내주었다.
이후 20년이 더 지속 되어 원덕 40년 정월에 자오지왕이 하세했다. 자오지왕의 하세와 더불어 익공도 하세했다. 재위는 40년이다. 황태후는 시호를 익종(翊宗)으로 삼았다. 자오지왕의 태자 치액특이 왕위에 올라 새 배달국왕으로 옹립되며 한강 이북 지역을 양득공이 다스리게 하고 물러갔다.
황태후가 같은 궁씨의 피붙이로서 양득공에게 화친을 요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익공의 어린 왕자를 옹립하고자 했으나 갑작스레 병사했다. 이에 황태후는 잠시나마 왕실의 피붙이인 고구진의 장남인 고선(高宣)을 왕위에 옹립하였다.
새로이 왕이 옹립되자 좌의정 초금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황태후의 섭정이 따르는 것이 순리였으나 그 부친이 되는 고구진으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했다. 고구진이 이를 마다했으나 황태후의 간청에 따라 받아들였다.
고구진은 영의정으로 초보를 삼고, 좌의정에 제길, 우의정에 향부, 좌찬성에 향일, 우찬성에 향국, 좌참찬에 향호, 우참찬에 천위사, 의정부사록에 길지, 의정부사인에 길송, 의정부검상에 호포를 명했다. 그리고 섭정 고구진이 연호를 원당(元堂)이라고 하였다.
원당 원년 12월, 제연수(諸衍秀)를 충무위장(忠武衛將)에 명하였다. 그리고 황태후의 뜻을 들은 양득공 강시가 이를 받아들였다.
원당 1년 정월, 배달국왕으로부터 그동안 사용한 연호를 폐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월, 주왕(周王) 효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왕위에 올라 이왕(夷王)이 되었다.
3월, 치액특이 갑작스레 병사하여 태자 축다리가 배달국왕이 되었다.
4월, 황태후의 간청으로 고구진이 궁강시를 영중추부사에 명하였다. 이후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5월, 선왕의 왕비인 송월(松月)이 죽었다. 왕후로 봉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황태후가 감덕(感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6월, 영의정 초보가 세상을 떠났다. 왕이 섭정의 뜻을 받아들여 제길을 영의정에 명하고, 좌의정에 향부, 우의정에 향일, 좌찬성에 향국, 우찬성에 향호, 좌참찬에 길지, 우참찬에 길송, 의정부사록에 호포, 의정부검상에 임경리, 의정부사인에 문봉을 명했다.
7월, 선왕을 보필했던 내관들이 파당(派黨)을 만들어 내당(內堂)이라고 하였다.
8월, 궁강시가 병환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황태후를 불러들여 청하기를,
“배달국에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선사국에 함부로 간섭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한강 이북 전역을 선사국에 바치오니, 황태후께서는 너그러이 받아주소서.”하였다. 그 뒤에 바로 세상을 떠났다.
궁강시의 유언에 따라 황태후는 한강 이북 전역, 곧 한양부와 경기도 북부, 강원도 전역을 선사국 땅으로 회복하였다. 이후 황태후가 배달국 치우천황의 전례에 따라 궁강시의 아우인 궁언삼(宮言三)을 양덕공(陽德公)에 봉하였다. 황태후는 서해도, 서북도, 영길도 삼도(三道)를 다스리도록 허락했다. 배달국과 완충(緩衝)할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였다.
원당 2년 정월에 양덕공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배달국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있다며 소식을 알려왔다. 배달국왕 축다리가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겨갔다고 했다는 소식도 이때에 전해졌다.
2월, 선왕의 왕비인 의민(義敏)이 세상을 떠났다. 황태후의 뜻을 받들어 시호를 안도왕후(安道王后)라 하였다. 이후 역대 왕들의 위패(位牌)를 재정비하여, 봉원궁 부근에 태묘(太廟)를 새로이 두었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다.
원당 3년 정월에 축다리가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태자 혁다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 계승 문제로 시시비비가 오고 가는 것은 여전했다. 한때 본국이 정벌한 바 있는 연의 청구 땅을 수도로 옮긴 것에 불만을 품고 형제간의 다툼이 잦았다. 이에 아우인 거불단이 국왕을 죽여 스스로 옥좌에 올랐다.
4월에 배달국왕 거불단이 청구 땅에 있는 것을 기회로 양덕공이 서해도를 선사국에 바치고 자신은 압록강 건너 신시와 요동까지 쳐들어갔다.
5월, 정일대군이 세상을 떠났다. 섭정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장례를 후히 지내게 했다. 이후의 치세가 태평성대다.
7월, 옥구선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옥구선의 자손들은 모두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8월, 보령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왕족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도록 명했다.
9월, 양덕공이 신시를 거점으로 삼았다.
10월, 양덕공이 신시에서 벗어나 아사달을 정벌했다.
11월, 양덕공이 아사달을 거쳐 송화강 일대를 정벌하여 장악했다.
12월, 양덕공이 신시에서 출정하여, 지금의 요동을 정벌했다. 요동을 정벌한 뒤 섭정과 황태후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원당 4년 정월에 양덕공이 스스로 본국의 연호를 받아 쓸 것을 간청하니 황태후와 섭정 모두 이를 받아들였다.
2월에 왕이 황태후의 존호를 덕희(德禧)로 올렸다. 후세 사람들이 궁덕희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데서 비롯된다.
3월에 옥구선의 자손 중 한 명이 주나라로 달아났다. 그 외손이 훗날 공자(孔子)라는 이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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