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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시대(時代)_04 (제4편)
5월, 선왕의 후궁들을 궁주로 봉하였다. 공비에게 덕양궁주(德陽宮主)로 봉하고, 경비에게 인양궁주(仁陽宮主)라 봉하였다. 6월, 선왕의 후궁인 인비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이 장사를 후히 치르도록 명하였다. 7월, 영의정 남송국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 이만원으로 하여금 영의정을 맡도록 명했으나 좌의정인 정흥을 후임으로 삼게 하고, 자신은 의정부사인을 맡도록 허락해 달라 청하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8월, 정흥을 영의정 겸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명하였다. 9월, 좌의정 겸 보국숭록대부에 박구를, 우의정 겸 숭록대부에 구덕수를, 좌찬성 겸 숭정대부에 방수호를, 우찬성 겸 정헌대부에 황승을, 좌참찬 겸 자헌대부에 백비를, 우참찬 겸 가정대부에 조보를, 가선대부에 현태를 맡겼다, 의정부검상 겸 통정대부에 옥구를 명하고, 의정부사록 겸 통훈대부에 성우지를 명했다. 9월 보름이 되자 경기도 화성 평야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곡물 오십만 여 가마를 화성 감영에서 왕궁에 헌납하였다. 10월, 소인군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장례를 후히 치르도록 명했다. 소인군의 장례가 치러진 지 보름 뒤에는 북방으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에 의하면 한 달 동안을 쌀알만큼의 우박(愚樸)이 떨어지더니 이틀 전부터 갑자기 날씨가 몹시 추워져 동사(凍死)하는 자들이 잇달아 시신을 수습하기 매우 어렵단 것이다. 왕이 이를 관리하는 조사관을 파견하고자 하여 황보진을 보냈다. 황보진이 이를 알아보니 영길도의 상황이 예사 심각한 상황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왕에게 보고하길, “영길도 전역의 인구가 삼십오 만이요, 호구(戶口)가 칠십만 호인데 각 집마다 두세 명 꼴로 동사할 뿐만 아니라 일전에 내린 우박으로 인해 땔감을 때울 나무조차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영길도 감영의 관리들에게 닦달하여 확인해보니 단 한 차례도 식목(植木)하지 못한 지라 그리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산세(山勢)가 험준(險峻)할 뿐만 아니라 나무를 심구거나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여 매일 굶기기를 일삼는다 하옵니다.” 이를 보고 왕이 대노하여 영길도의 관리들을 모두 파직하도록 하여 근방에 유배를 보내고, 황보진에게 겸임으로 영길도관찰사(永吉道觀察使)에 명하여 영길도 감영에 부임하도록 했다. 도사에 길지, 검률에 초정술, 심약에 황진태를 명했다. 12월, 배달국의 거야발왕의 사절로, 영의정을 수반으로 하여 의정부 각 대신들로 하여금 보내도록 명했다. 배달국의 왕경에 다다르니 배달국왕이 영길도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어 곡식 이백만 가마와 땔감으로 쓸 나무 백만 그루를 베어다 추운 겨울을 나도록 할 것을 명했으며 여우 가죽 오백만 필(疋)을 보냈다.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영길도의 이재민(罹災民)들을 위문하고 배달국왕이 하사하신 물품들을 두루 나누어주었다. 이윽고 왕궁에 돌아온 사절단이 왕을 알현하여 보고하자 왕은 배달국왕의 황은에 몸 둘 바를 모른다는 친서를 작성해 파발로 띄워 보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배달국왕에게서 답서(答書)가 왔는데 그 답서에 의해 왕을 덕호왕(德護王)이라 봉하였다. 이는 ‘응화왕’을 하사한 전례와 같다. 건안 4년 정월, 영의정 정흥이 세상을 떠나자, 후임 박구를 영의정 겸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명하고, 구덕수를 좌의정 겸 보국숭록대부에, 방수호를 우의정 겸 숭록대부에, 황승을 좌찬성 겸 숭정대부에, 백비를 우찬성 겸 정헌대부에, 조보를 좌참찬 겸 자헌대부에, 의정부사인에 있던 이만원을 우참찬 겸 가정대부에 명하였으며 옥구와 성우지에게 연임토록 명했다. 이월 초하루. 한때 왕실과 사돈을 맺은 바 있는 옥사홍이 초야에 묻혀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방관으로 전전하던 그의 행방이 묘연하여 모두들 죽은 사람처럼 지내는 줄로 아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옥사홍은 도성에 돌아올 때마다 같은 옥씨의 집안의 웃어른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당질(堂姪)들이 조정에 출사하므로 말미암아 간간이 물품들을 받아먹으며 살아왔다. 의정부검상으로 있는 옥구가 바로 그 당질이었다. 그리고 전 영의정 옥선도 그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이 옥사홍에게 찾아간 것은 다시 조정에 출사하도록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허허허허, 이 늙은이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려고 조카님들께서 애를 쓰시는가. 나는 보다시피 백발이 성성하고 몸이 약해. 늙어서 이빨도 빠지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너무 용쓸 필요가 없네.” 옥사홍 자신의 말대로 백발이 성성하고 위의 이빨이 빠진 상태다. 그런 자신을 당질들이 조정에 출사하라 권유하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을 지새워가며 당질들이 간신히 설득하고 나서야 뜻을 알아차렸다. 그러잖아도 조정에서는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당쟁도 일어났고, 외환(外患)도 겪었다. 그 때문에 일부 대신들이 현실의 안정만을 도모하며 배달국의 눈치만을 보았던 거다. 주로 배달국 중심의 외교노선을 취하고 있는 조정의 행태가 조카들로 하여금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거다. ‘그러나 내 자신의 몸을 더욱 낮추어야 한다. 내가 옥씨 가문에서 웃어른으로 대접받고 있는 이상 집안에 화(禍)가 일어나지 않도록 몸조심을 해야만 한다. 만약 금상(今上)께서 나를 출사케 하신다면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 조카들이 돌아간 뒤 사홍은 자신을 더욱 낮추기로 마음을 굳혔다. 삼월에 임금의 명으로 사홍에게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벼슬은 영돈령부사. 그러나 이를 마다했다. 사월에 다시 사홍으로 하여금 영돈령부사에 제수한다는 어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역시 마다했다. 오월에 사홍에게 재차(再次) 영돈령부사에 제수한다는 어명이 내려졌음에도 이를 마다했다. 이때 보다 못한 당질들이 나섰다. “당숙님, 대체 어명을 마다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사홍이 말하기를 “나라에 하해(河海)와 같은 보살핌을 받아온 몸으로서 어찌 나랏일에 나선단 말인가. 연거푸 내게 벼슬을 주신다더라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하며 임금에게 겸손을 보였다. 당질이 나서도 소용이 없음을 안 임금은 어명을 손수 거두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옥사홍은 가솔(家率)들을 거느리고 경기도 양주의 산골짜기로 새로이 터전을 잡았다. 양주에 자그마한 정자를 하나 지어 이곳을 흥의정(興義亭)이라 이름했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뜻을 지녔다. 금상의 하해와 같은 사랑 천년만년 술잔에 술이 넘치듯 흐르는데 그에 보답할 겨를도 없이 내 몸은 약해져만 가네. 아, 깊이를 모를 임금의 은총을 무엇으로 보답하리오. 정자를 짓고 난 옥사홍은 그곳에 앉아 자신의 삶을 정리하듯 시 한 수를 지었다. 이후 흥의정에 칩거하였다. 이후 왕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이러저러 칠월이 되니 왕이 직접 서해도로 행차하게 되었다. 그 길에 옥사홍이 살고 있다는 경기도 양주 땅에 다다라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옥사홍의 집을 수소문해서 간신히 찾아갔다. 그 곁에 옥구와 옥선이 있었다. 거처의 문앞에 이르러 “당숙님!” 하고 옥구가 부르니 조카가 온 걸 듣고 기뻐한 나머지 사홍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근데 웬일인가. 조카의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를 보고 놀란 사홍은 멈칫하였다. 이를 보다 못해 옥구가 “저, 임금님께서 당숙님을 찾아뵙고자 이리 온 겁니다.” 임금에게 곁눈질하며 이실직고하는 것이다. 사홍은 마음 같아서는 멀리 더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미 앞에 군사들이 늘어서 있는 터에 쉽사리 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왕이 옥사홍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경은 어찌하여 벼슬을 마다하는가.” 왕의 물음에 옥사홍은 무릎을 꿇었다. “신은 집안의 우환을 두려워 출사할 의향이 없사옵고, 임금님의 끊임없는 보은(報恩)에 어이 갚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옵니다.” 대답하는 늙은 신하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왕이 그 자리에서 영돈령부사에 제수하는 명을 재차 내렸다. 할 수 없이 사홍은 영돈령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고 보름이 지나고 옥사홍이 세상을 떠나니 왕이 그에게 영의정에 추증(追贈)하였다. 이는 전례에 없던 일이다. 왕은 장사를 후하게 치르게 한 뒤, 그 후임으로 전임 영의정인 옥선에게 맡겼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구월에, 도성 근방에 있던 연종대왕의 능을 경기도 양주 흥의정 부근에 이장한 뒤 현릉(玄陵)이라 이름 하였다. 이는 역대 임금들의 무덤 가운데 처음으로 능호(陵號)를 하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시월에 왕후의 몸에서 왕자가 태어났다. 이에 왕이 이름을 조해(朝海)라 했다. 아침바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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