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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39편
제00. 진해댁 진해댁이 부군인 유석덕 영감을 상배한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 엊그제만 해도 거동이 자연스러웠던 탓에 건강에 문제가 없겠거니 했다. 그랬는데 다음날에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유언도 없고, 그렇다고 자식에게 남길 재산도 없었다. 석덕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유일한 혈육인 만국이만 있을 뿐이다. 만국이는 비록 배움이 짧고 학력도 국민학교에 간신히 졸업하였다지만, 일용직에 일하면서 세상의 지혜와 이치를 터득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랬기에 어머니는 더 배움을 얻지 못하게 한 것이 내내 죄처럼 느껴져 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도 그럴게 전쟁이 나면서 있는 재산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찾아온 부산이니만큼, 꿈에 부풀어 새로운 희망으로 여겼던 만큼 영감의 위안 속에 살았지만, 무능 속에 살며 내내 애태우고 속앓이 했어야 했던 진해댁이었다. ‘영감 없이 어떻게 살꼬.’ 그러니 앞이 캄캄했는데, 운명의 끈처럼 칠숙네가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얼마 전에 아들 칠구가 비누공장의 지배인으로 직장을 얻었다는 얘기를 꺼낸 것이다. 이에 진해댁의 마음은 동했고 들떠 있었지만, 새 발의 피나 진배가 없는 아들의 처지까지 생각해볼 때 더없는 좌절을 느끼는 것이다. 칠구가 중학교까지를 마친 학력이 그것이다. ‘요 핑계 저 핑계 대믄서 아아 인생을 배리놨는데, 와 저렇게 사리분밸도 없이 아린 가슴에 소금을 뿌리나.’ 입 가볍기로 소문난 칠숙네가 배알이 뒤틀리도록 샘이 나서 죽는 것을 간신히 참느라고 진해댁이 혼났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기본적 교양이 갖춰지지 않은 칠숙네의 몰인정(沒人情)에 있는 정도 정이지만 있던 입맛까지도 다 떨어지는 까닭에 마주치기도 싫은 것이다. 자격지심도 들고 이래저래 만사가 귀찮다. 그런 진해댁에게 가뭄에 단비가 쏟아지듯이 찾아왔다. 세복의 부친이 소개해준 것이다. 세복의 부친 송 의원이 정 서방의 덕분으로 먹고 사는 데에 풍족함을 느낀 것이다. 자식들이 매월 월급을 받았다면서 틈틈이 아버지 당신이 용돈으로 쓰시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돈 봉투를 보내곤 하는 것이다. 유석덕 영감의 비보를 듣고 찾아온 송 의원은 일단 조의금(弔意金)을 전달하고, 빈소를 지키는 만국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만국이를 보는 송 의원의 시선은 예사 시선이 아니었다. 일전에 한 초시가 석덕 영감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들은 까닭도 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하늘처럼 쳐다보는 진해댁의 딱한 사정을 헤아린 채 바라보는 것이었다. 눈치 없는 칠숙네가 빈소에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고 다른 동네 아낙들은 몸뻬에 누더기 옷들을 차려입은 채 분주히 전(煎)도 부치고 육개장도 끓이는 것이다. 송 의원도 한 초시와 함께 어김없이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다. “헤헤, 뭘 빤히 쳐다보시우?” 한 초시가 한마디를 한다. “응?” 시선을 거둔 송 의원이 한 초시를 응시한다. “혹시 혼처(婚處)감을 고르려고.” “예끼!” 짓궂은 농담 삼아 지껄인 한 초시의 말에 화들짝 놀란 척 했다. “그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그러이. 만국이를 보면 너무 딱해보여서.” 한 초시가 웃었다. 그러면서 상 위에 놓인 술병을 들고 권한다. “만국일 보니 늠름하기 그지없지만은. 어째 그러시우?” 순간 송 의원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영이를 시집보내고 난 뒤 한 초시는 마실 나오는 재미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나이가 들대로 들어서 자식의 복을 얻는 낙으로 사는데 그걸 못 누리고 죽은 걸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미어지니.” “아따, 별 걱정을 다 하시구먼. 만국이는 어디에다 내다 놓아도 살아남을 팔자인데 뭘 걱정이슈. 사실 난 저 애를 우리 영이 신랑감으로 점찍어놓았는데 하늘이 그걸 원하지 않으니 별 도리가 있겠소.” “……”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사실 직업이 변변하지 못해서 솔직히 좀 망설였지요,” 한 초시가 권하는 술을 묵묵히 받아 마시는 송 의원이다. 시선은 오직 만국이에게 쏠려 있었다. 상주로 있는 만국이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러잖아도 어저께 정 서방의 권유가 있었다. 정 서방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지인이 화물수송을 주업으로 하는 회사를 차렸는데 그곳에 서기를 하나 써보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 의원에게 한번 주선해 달라 부탁한 것이다. “내 생각해봄세.” 되 돌이켜서 생각해본 송 의원의 눈에 갑자기 만국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은 성실해보이고 생김새며 품행이며 고려해볼 때, 한 초시 말마따나 어디에 내놔도 살아남을 상이라는 걸 진작에 간파한 까닭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유 영감이 상을 치를 때 찾아가리라고 벼르고 있었다. 해서 한 초시를 대동하고 온 거다. 일종의 명분 쌓기라고나 할까. 진해댁이 자리 옆을 지나가자 송 의원이 불렀다. “여, 진해댁.” “야.” 부르는 기척에 진해댁은 뒤돌아보는 것이다. “무슨 일인지.” “만국이 글자는 깨우쳤소?” “네, 학교에 다녔으니까네 그쯤은 깨쳤지 않소?”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와 물어보시는지.” 자리를 굳히듯 진해댁이 송의원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만국이 일거리가 없지요.” 만국이 얘기에 진해댁은 말이 없다. 맞은편으로 한 초시는 지켜보며 담배를 꺼내 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왔소.” 그러면서 송 의원이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경청하는 진해댁은 순간 한 줄기의 빛을 바라보는 것 마냥 놀라는 것이다. “어찌 그걸 아시구.” “하하하하, 예사 한 두 사람을 보았겠소. 알다시피 이 사람 저 사람을 진맥해보고 그 마음속을 꿰뚫는 일을 주업으로 하다 보니 만국이 모습만 바라봐도 훤히 보이더이다.” 순간 세 사람은 껄껄 웃는다. “하하하하, 천기(天機)를 누설하셨구려.” 한 초시가 또 놀리듯 농지거리를 내놓는다. “한막동(韓莫童) 영감은 참 복도 많으시오.” 송 의원도 맞장구치듯 덩달아 한 초시의 이름을 들먹이며 맞장구치는 것이다. 유석덕 영감도 생전에 이들의 모습을 좋아했다. “그나저나 연심이가 잘 산다지요?” “네, 듣자하니 서울에서 시집을 간 모양인데, 시댁에서 소박을 맞고 온 모양이라데요.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부산에 내려왔는데 신랑이 이곳까지 쫓아와서 구걸하는 바람에 재혼을 했심더. 얼마 전에 아아를 낳았다 카대요.” “그래요?” 송 의원이 화들짝 놀란다. 양의사(洋醫師)를 남편으로 두게 된 연심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다. “딸을 낳았다 캅니다.” “다행이구먼.” “손녀를 보았더라면 얼매나 좋을꼬.” 회한에 젖어 한 초시가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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