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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37편
경빈이 교원으로 임용되고 나서 이삼 년을 국민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 이석형 영감의 성화도 한몫을 했고 오빠인 원조가 동조한 것에서 비롯된 사안이었다. 경빈이 시집을 가게 된 빌미가 생긴 건 자그마치 여섯 달 전의 일이다. 경빈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아버지가 공 참봉을 자신의 집에 불러들인 것이 시초였다. 이들은 모두 경빈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시집장가를 보내기로 굳은 다짐을 한 게 빌미가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들은 경빈은 아버지와 원조에게 직접 따지기 시작했다. “오빠, 왜 저한테 시집을 가라마라 하는 거예요. 내게도 결정권(決定權)이란 게 있다구요.” 그러자 이석형 영감은 “경빈아, 네가 사회생활을 할 만큼 했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니. 보통 여자들보다 더 앞서게 살아왔잖아.” 외곬으로 딸을 달래는 것이다. “저도 알지만 할 일이 태산(泰山)같이 많다구요. 그런 제게 왜 뜬금없이 시집을 가라고 하시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경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경빈의 신랑은 공교롭게도 공 참봉 네 아들 공보국이었다. 원조와 나이가 동년배라고 하나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여 월반(越班)하기도 하다가 원조와 같이 학업을 이어가는 처지였다. 이들의 혼담이 전해진 건 순전히 공 영감과 이석형 영감 사이에 오고간 밀담(密談) 때문이다. “흐음. 공 참봉 네 아들보다는 차라리 시성이 쪽이 더 나을 거 같은데. 비록 연하라고 할지라도 집안이 넉넉하고 풍족하니. 경빈이한테 적격이 아닐까 싶다만.” 이석형 영감도 김시성네 집에 대한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산에서부터 두텁게 쌓인 정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공 참봉과 사돈을 맺는 것이 훨씬 순리일 거라고 생각을 굳힌 거다. 경빈은 혼사 문제로 자신의 이름이 어른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걸 극도로 거부했다. 여자로서 사회생활 경험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시댁에 가면 시댁의 비위에 맞추어 살아야 하고 자신은 한없이 낮춰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현실이 다가올 때 아찔함을 느끼는 것이다. ‘아버지가 왜 저리도 성화실꼬. 내가 어련히 짝을 찾아 가면 모를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에 빗대기라도 하듯 원조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혈육이랍시고 믿은 것이 오히려 썩은 동아줄과 같음을 느끼는 경빈이다. 원조는 서울에 하숙집을 기거하며 돈을 모아 자신의 거처를 다잡은 뒤로 자신감이 생기고, 누구보다 더 활기찬 삶을 살고자, 영위하고자 노력하였다. 게다가 전쟁이 낳은 후유증으로 인해―물론 누구나 그렇다지만―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양어깨에 무거운 짐처럼 짓누르는 것을 느낄 때 일종의 의무감이랄까. 그 의무감으로 경빈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빈은 그런 오빠의 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도가 지나친 점이 없지 않아 가까이 하기에 매우 서먹함을 느낀다. 그날 밤. 경빈은 불도 밝히지 않고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저녁도 안 먹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 임씨가 직접 경빈에게 찾아와서는 “저녁 안 먹을 거냐?” 대뜸 묻는다. 경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보다 못해 임씨가 직접 전구를 켜서 보니 경빈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놀란 나머지 임씨가 “다 큰 처녀가 왜 울어?” 하며 딸의 갑작스런 모습에 놀란다. “어머니. 나 어떡하면 좋아요.” “왜?” “아버지도 그렇고, 오빠가 내 의중도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시집을 가라고 닦달을 하니.” 울먹이는 경빈을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임씨가 경빈의 등을 토닥거리며 “나는 시집을 올 때 너처럼 자유연애니 뭐니 해보지도 못했다만 이날 이때껏 나는 순종(順從)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나는 너처럼 아는 것이 많다고 했다면 경빈이 너처럼 살았을 텐데. 내가 하도 무식하다보니 중매쟁이를 통해서 네 아버지를 만났다.” “그걸 내가 모르우?” “그러면?” “내게 전후사정을 헤아리고 알려준다면 모르겠지만 나 모르는 사이에 마치 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제 설움에 못 이겨 소리가 커지고 하니 임씨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애, 경빈아. 아버지가 들으실라.” “들으시라죠!” 명색이 초등학교 교사라는 경빈의 행태가 왠지 수줍은 소녀의 모습임을 발견할 때 임씨의 마음은 말이 어른이지 아직도 내 품에 있어야겠구먼. 함을 느낄 때 좋기도 하면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다. “아휴―” 못 말리는 딸의 어리광에 어머니의 만면엔 웃음꽃이 핀다. 기어이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이틀 뒤에 경빈은 만났다. 서울 명동에 자그마한 다방에서였다. 예전에 오빠가 공 참봉 네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본 까닭에 안면이 있는 구석도 없지는 않았지만 단 둘이서 만나는 건 어떻게 보면 처음인 것이다. 비단 경빈만 그런 게 아니고 상대편이나 진배없는 공보국도 얕은 기침소리를 내며 주먹 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뿐.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시간이 한 시간이 넘었을까.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보국이 수줍은 여자마냥 물어보는 게 아닌가. “저는 어김없이 학교 일을 했죠.” 보국은 블랙커피가 든 식어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뒤 “어른들이 하도 장가를 들어야 한다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성화를 내시니 어쩔 도리가 없다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집안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르지 않는 사이가 아니기에 이들의 관계는 다른 화젯거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임씨부인의 말마따나 중매쟁이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없다는데 있다. “저도 그래요.” 경빈도 덩달아 식어가는 찻잔을 들어 블랙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을 마신다. 이 자리는 다름 아닌 원조가 주선한 자리였으니만큼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가족의 신뢰를 위해서라도 나설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경빈은 간신히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많은 생각을 하는 궁리더니 보국에게 물어보는 게 아닌가. “오빠는 졸업하고서 어떤 직업을 가지실 건가요?” 순간 보국이 놀라는 게 아닌가. “아.” 하다가 주먹 쥔 손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며 헛기침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빠져 장래에는 문학가 아니면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것을 되새기는 것이다. 부산에 있을 때는 구경거리가 없었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걸 떠올릴 때 보국의 입에선 엷은 미소가 띤다. 그러나 막상 그 환희에 찬 생각에서 벗어나 현실에 봉착(逢着)하게 되니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이다. 경빈이 어릴 때, 마냥 귀여워하는 동네에 사는 이웃집 동생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경빈은 무엇보다 보국이 자신의 시각에 의할 것 같으면, 의식이 투철하다고 할까, 현실적인 감각이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자신의 눈앞에서 어느덧 어엿한 숙녀로 나타난 것이다. “글쎄. 나는 아직 자리 잡을 데를 찾지 못하는데.”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현실감각이 둔한 보국이로서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난감한 처지다. 아버지의 성황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고자 노력했다. 심지어는 대학 다닐 때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상과(商科)를 전공하고 이제 막 졸업반에 있지만, 졸업 후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볼까 궁리해볼 새도 없이 살아왔던 것을 느낄 때, 때 아닌 절망감을 느낀다. 보국이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不透明)한 사실을,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알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낀다. 그러나 경빈은 그런 보국이의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하듯이 빙긋이 웃더니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겠어요. 아직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지 않으셨다는 뜻을요.” 보국이의 의중을 알겠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섣부르게 얘기하기는 힘들어요. 우리 차차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봐요.” 오히려 경빈이 쪽에서 밀고 당기는 것이다. 마치 가질 만큼 다 가졌다는 식으로. “응, 그래.” 보국은 서둘러 다방을 나섰고, 경빈은 일부러 명동 거리를 하염없이 거니는 것이다. 그때다. “경빈이 아니니?” 어떤 여자가 경빈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물어본다. 돌아보니 “아니?” 연심이었다. 연심은 이때 서울에 살림을 정리하고자 잠시 올라왔던 거다. 반가움에 두 여자는 경빈이 갔던 그 다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홍차를 주문해서 마셨다. 연심은 그동안 자신이 겪어온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고, 정호와 재혼을 할 뜻을 밝히자 경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잘 되었다고 하였다. “서방 잡은 여자라고 하다니.” 경빈이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그럼 신접(新接)살림은.” “부산에서 터를 잡았어.” “부산 어디?” “초량동에.” “초량동……” 경빈은 한참 어려웠던 시절의 부산을 그리는 것이다. 유석덕 영감과 진해댁, 칠숙네, 오 서방, 방 영감, 춘천댁, 엄 훈장이니 신 훈장이니……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광숙이 내외의 이야기도 꺼내가며 이들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따끈한 홍차를 마셨다. 이들은 기약 없는 헤어짐을 하였다. 경빈은 떠나는 연심을 지켜보며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이제 그녀는 서방 잡은 여자가 아니다. 경빈도 그랬으리라. 멀어진 연심의 모습을 뒤로한 채 그녀는 어둑어둑해진 명동 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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