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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36편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연심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웃어른을 의식해 잠자코 있을 따름이다. 사실 여희가 홍차를 즐기기만 할 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지난해 정호가 마신 홍차도 마지못해 마시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댁 식구들과도 서먹서먹해지고 온 집안은 적막강산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고관 출신의 딸로서 며느리를 맞이했는데, 생활풍습이며 그 사람의 성격이 최우공 영감 내외로서는 부담감과 같이 다가왔다. 그랬는데 난데없이 정호가 홀로 부산으로 떠나버리니, 완충지대(緩衝地帶) 격이었던 아들을 의지하던 최씨 어른으로서는 희망의 끈을 놓친 셈으로 낙심해하는 거다. 이후에 여희와 시부모의 관계는 더욱 냉각기에 접어드니 이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서방이랍시고 대해 주기만 하면 뭘 해. 뻑하면 자기 용무 급한 게 있답시고 나가기만 하니.’ 정호의 갑작스런 태도에 단순히 정호 개인의 성격으로 여겼던 여희였지만, 연심이와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부터 가뜩이나 시가 어른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던 자그마한 희망의 끈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단념하였다. 정호가 부산으로 자취를 감춘 지 보름이 되어서야 여희가 시댁을 떠나 친정에 들어갔다. 이를 보던 여희의 부친은 노발대발(怒發大發)하며 정호의 처사에 불만을 보였고, 모친은 모친대로 차라리 잘 되었다며 맞장구친다. 이걸 지켜 본 윤 영감은 도끼눈으로 치켜뜨며, “지아비한테 일부종사는 못할지언정, 그예 뭣 하러 뛰쳐나와!” 하며 소리치더니 와락 딸에게 다가가서는 뺨을 후려치고 심지어는 매운 손짝 맛으로다 딸의 온 몸을 때리며 갖은 손찌검을 한다. 이때 어머니가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고, 여희는 울음을 터뜨리며 매 맞기만 했다. “영감, 날 차라리 죽이시구려!” 얻어맞는 딸의 성정이 안타깝고 딱한 나머지 온 몸으로 윤 영감의 완력(腕力)을 막았던 어머니도 덩달아 통곡했다. 이윽고 윤 영감은 씩씩거리며 사랑으로 물러가고 모녀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자신들의 신세가 매우 처량함을 몸소 느끼는 것이다. 모녀의 통곡소리를 사랑에서 듣고 있던 윤 영감은 곡소리에 진절머리를 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희의 친정이 북촌(北村)으로 유명한 가회동에 있다 보니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 것은 당연했다. 예나 지금이나 고관들이 살고 있는 동네이니만큼 한번 소문이―흉흉한 소문이 퍼지면 하루아침에 동네 민심이 싸늘하다는 것을 알기에 속이 터지는 것이다. 그렇게 여희가 떠난 뒤 정호의 동생 민우가 형에게 소식을 전해야겠는데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랬는데 다음날에 정호에게 편지가 왔고 그 내용에 의하면 서울에서의 재산을 정리한다는 것이다. 별안간 집 나간 며느리 소식을 알릴 새도 없이 날아온 소식에 가족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데 양할아버지가 위독해지기 시작했다. 정호가 이미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호가 도착하자 단념하듯 양할아버지는 참회의 눈빛으로 그를 보고 난 뒤 임종했다. 평소에 그가 연심을 못마땅하게 여긴 건 절가(絶家)된 집안의 여식이라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정호가 한사코 사랑한다는 것을 안 뒤 관계를―정호와 연심의 관계를 알고부터는 침묵으로 일관하다 암묵적(暗的)인 인정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호가 삼일장을 치른 뒤 신당동 병원을 처분하고 홀연히 부산에 내려갔다. ―은실이 내외가 행방을 감춘 뒤 매청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멀리 앞날을 헤아리고서 맞선을 했어야만 했는데.’ 연심의 이혼 사실과 준창의 죽음은 적잖은 충격을 남겼다. 은실이 운영하는 가게는 자연히 매청이에게 넘어갔고, 새로운 주인을 찾는데 모색하고 있었다. 자신의 뇌리에 스쳐간 사람이 바로 가옥선이었다. 자신도 가게를 꾸리는 터지만 두 개를 꾸리는 데는 적잖게 한계를 보는 것이다. 듣자하니 화욱이도 이제 학교를 다닌다고 하고 동생이 언니 몫을 한다고 하니 적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생각을 굳히고 마담인 계화(桂花)와 영산홍에게 당부한다. “얘들아, 가게 잠시 맡아다오.” 은실이 평소에 부리던 두 마담인 계화와 영산홍은 “어디 출타하십니까?” 물어본다. 기생 출신이 아니랄까봐 눈을 흘기고서 “니들이 알 건 아니다.” 대답해놓고 매청은 나선다. 목적지는 옥선의 집이었다. 매청의 행차에 반색을 표한 건 희진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실까? 매청이 언니 아니슈?” 대낮에 찾아온 손님을 갑자기 맞이한 희진이 어쩔 줄 모른다. “언니는?” “근처 장터에 잠시 볼일이 있어 갔어요.” 매청은 온 집안을 둘러본다. 마당엔 빨랫줄이 걸려 있어 빨래가 널려있고, 강아지 한 마리가 아장아장 걸어 다닌다. 그 한 구석에는 장독대가, 다른 곳엔 수돗가가 있었다. 이곳 수돗가에 물을 얻으러 다른 집들이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들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름 살림집치고는 살만한 형편인 것이다. “잠깐 안으로 들어가세요.” 희진이 안내하며 안방에 들게 했다. “뭐 드시겠어요? 언니가 금방 오실지도 모르지만.” “커피 주려무나.” 안방은 거의 응접실(應接室)과 같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고품스럽다. 희진은 대답하고 나서 정성스럽게 차를 가져왔다. 커피다. 찻잔을 들어 마시던 매청이 “커피가 맛있구나. 근데 설탕을 넣었니?” 음미하며 묻는다. “네.” “근데 너무 달다.” 그러자 희진이 웃으며 “다방 일을 안하고 보니.” 그럴싸하게 대답해본다. 그때다. “희진아, 안에 누가 들었니?” 언니의 기척에 서두르는 희진이다. “네, 매청 언니가 와 있어요!” 마당에 다다른 희진의 대답을 듣던 옥선의 눈빛에선 쳰昰눈빛이 풍겼다. 안방에 이른 옥선은 매청에게 “웬일이냐?” 하고 쌀쌀맞게 대한다. “아이고, 언니. 오랜만에 만난 사인데 왜 이리 쌀쌀 맞수?” 그건 연심이 때문이었다. 옥선이 자매는 연심에게 간간이 소식을 들은 까닭이다. 부산으로 내려간 것도 알고 있었다. “무슨 일로 왔니?” 일관된 표정으로 묻는 옥선의 태도는 매청으로 하여금 좌불안석으로 이끄는 것이다. “언니, 혹시 연심이 일 땜에 그러시우?” 대답 대신 옥선은 눈을 흘긴다. “내겐 희진이 못지않은 친동기간이다. 그런 연심이를 꼬여서 하찮은 집구석에 보내서야 어디 쓰겠어?” 매청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솟는다. “언니, 그건 잘못했소.”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매청이 본론으로 넘어간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은실이 언니가 아들을 잃고 섭섭해서 몸져누웠다고 그러오. 그래서 다방을 맡지 못하는데 언니가 그 가게를 맡았으면 좋겠어서,” “그 가게는 뭣하러?” 힐난하듯 쌀쌀하게 대하는 옥선은 남편의 죽음 이후에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지기 시작했고, 다방을 때려친 지 오래된 것 까지 겹쳤다. 가뜩이나 동생 같은 연심을 대했던 의리도 모른 체 하는 매청의 처사가 언짢았다. “그 집구석 행방이 감감무소식이라지?” 매청이 놀라며 어찌 아느냐 물을 때 “종로 장안에 소문났다.” 옥선은 은실이 남편 장 서방이 근래에까지 종로에서 이름을 날린 장사꾼으로 거듭났다. 한때 미군에서 잡화상으로 장사하던 수완(手腕)이 종로바닥에서 통한 건 개천에서 용이 난 격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 연심의 소식도 소식이지만 그 사돈댁도 알 수밖에. “종로 바닥에 있는 가게 다 말아먹고 야반도주했다며?” 등줄기에 식은땀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이마에도 송글송글 식은땀이 나는 것을 매청은 느낀다. 이미 엎질러진 물, 이판사판이다. 그는 냅다 “그렇답디다. 장 서방이 가게 팔아버리고 마누라 병구완한답시고.” “잘 났군, 잘났어. 눈꼴사납게.” 비아냥대던 옥선은 “더는 다방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고서 한숨을 내쉰다. “왜요?” 매청이 놀라자 “남편 잃고 지기(知己) 잃은 몸인데 어떡하니?” “……” “다방을 희진이한테 맡길 수밖에.” “걔는 혼기가 다 차지 않았수?” “혼기가 대순가.” “……” “싹싹하고 솜씨 좋은 거. 아까운 재주 버릴 수는 없으니까.” “……” “희진이한테 잘한 것도 없고 하니 내내 마음 한 구석이 걸렸는데……” 만감이 교차된다. “하나는 되었고 인제는 희진이 거처만 마련하면 되네. 매청아.” 매청이 얼떨떨해한다. “네.” “나보다는 희진이가 났다. 내가 희진이 분가시키고서 가게 차려주려니 버거웠는데. 잘 됐군.” 혼잣말처럼 되던 옥선은 다방 인수의 뜻을 표하고 희진에게 일임시키게 하겠다며 다짐시켜 매청을 돌려보내고 희진에게 네가 다방 일을 꾸리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희진의 눈에선 놀라움이 잠시 비치더니 이내 눈물이 떨어졌다. 그제야 옥선은 홀가분함을 느낀다. 다음날 희진은 암시장(暗市場)에서 설탕(수입산 설탕이다)을 사고서 언니네에게 전했다. 때마침 설탕이 떨어져 있어 어제 매청에게 달디 단 커피를 대접한 것이다. 설탕 한 포대 사갖고 온 동생을 언니는 만면에 미소를 띤다. 이것이 희진의 마지막 선물이기 때문이다. 한 달 뒤 매청이로부터 다방을 매입한 옥선은 희진에게 그걸 넘겨주고 옥인동 자그마한 살림집을 사다 희진에게 분가시키고 그 빈방에 식모 하나를 구해다가 머물게 하였다. ―정호가 부산에 살림을 정착하고 있는 동안, 뜻하지 않게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의 주인은 서울 가회동에 있는 처가였다. 윤 영감의 이름 석자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편지봉투를 찢어 그 내용을 펼쳐보니 여희가 자살을 시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지금 정호가 집을 나간 뒤로 심신이 불안하고 상실감에 젖어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으나, 정호는 여희의 가식적인 성격에 환멸을 느낀 지 이미 오래인지라 그 상판을 보기 싫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보는 즉시로 답변을 보냈다. 이틀이 지나서야 서울로 편지가 도착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받아본 편지. 여희는 설렘을 가득 안고 편지를 펼쳐들었다. 그러나 여희의 눈에서는 동요의 빛이 인다. 그 편지의 내용엔 이혼을 통보한다는 내용과 함께 변호사를 대신 선임할 터이니 그리 알라는 것과 함께 재산의 반을 주겠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편지는 매듭지어졌다. 내용을 다 읽은 여희의 눈에선 배신과 함께 분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듯 하더니 울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울음을 듣고 윤 영감 내외는 말할 것 없고 하인들과 일꾼들까지 달려 나와 아씨를 달래느라고 쩔쩔맨다. 일주일 뒤 정호가 변호사를 선임하여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그렇게 여희와 정호의 부부관계는 속전속결(速戰速決)로 청산(淸算)되었다. 서방을 잡아먹는 꼴이 된 연심에 대한 일종의 의리가 발동한 것이다. 이 소식은 곧바로 최씨네 집안에 전해졌으나 최씨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을 순응한 것이라도 한 것처럼. 정호가 이혼을 했음을 알았던 연심은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아닌 오로지 사랑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여자들의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정호는 그런 연심이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알게 되어 끈질기게 구애를 하다가 결혼식을 서둘러 진행했다. 개교(開校)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등학교에서 옛 동네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었다. 칠숙이와 다른 또래 친구들의 은근한 시샘과 배웅을 한 몸에 받으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신혼집은 연심이 부산에 있으면서 살아온 셋집이었다. 그녀는 이제 서방 잡은 여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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