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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34편
그러나 연심의 간절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별무신통(別無神通)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비보(悲報)를 아는 모양인지 비는 장대비로 내렸다. 외동딸의 곁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유언 한마디도 없이 조용히 세상을 하직한 아버지. 연심은 되뇌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때다. “연심아.” 흐느끼는 그 뒤에 칠숙네가 기척을 낸다. 뒤돌아보는 연심의 시야에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손님 오셨다.”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칠숙이네는 자리를 황급히 뜨고 그 뒤에 뜻밖에 정호가 서 있었다. 빈소도 그렇지만, 연심이 기거한 곳도 칠숙이네 집이었기 때문에 알뜰히 천애고아 같은 연심을 보듬어주는 것이다. 마당 구석에서는 칠숙이 아버지가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아시고.” 연심의 말에는 싸늘함이 전해진다. “연심이.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아니?” 비닐우산에 의지하며 비를 피해보는 정호였지만 그는 물에 젖은 생쥐처럼 흰 와이셔츠와 양복바지, 하다못해 구두까지 모두 젖어 있었다. 땀냄새가 퀴퀴하고 초라하게 자신을 찾아온 정호에 대해 야속함마저 들었다. “여기는 뭣하러 오셨죠?” 싸늘히 대하는 연심을 지켜보는 정호다. “연심이한테 고백하려고 왔어.” 고백이라는 말에 연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러나 애써 태연하려는 본성이 연심의 마음을 곧추세운다. “사랑한다고 하신다면 돌아가 주세요.” 정호는 허탈해하며 안타깝게 연심을 바라본다. “저는 보다시피 부모도, 자식도, 그 아무것도 없는 고아예요. 남편한테 모진 구박, 설움 받고 보금자리 뛰쳐나간 제 심정을 어떻게 헤아려서 전할지 앞이 캄캄해요. 돌아가 주세요. 제발!” 우산도 없이 뛰쳐나가는 연심의 뒷모습. 정호로서는 착잡했다. 소복 차림의 연심은 굵은 빗줄기를 뚫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에 뱉지 못한 채 쌓아둔 말이 울분의 둑과 함께 터져 나왔다. 빗줄기를 함빡 맞으며 뒤로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는 연심의 걸음은 차츰 무거워진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러더니 연심은 그만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한 시간이던가, 두 시간이던가. 연심은 혼미했던 정신을 간신히 수습했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칠숙이네 집 천장이었다. 덩그러니 주황빛 전구가 온 방의 어둠을 떨치며 희망의 빛을 내뿜었다. “연심아.” 정신이 든 연심의 곁에서 칠숙이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신이 드나.” 경상도 말씨의 칠숙이의 물음에 연심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고, 이*의 가시나야. 남자 손님이 너 실신하는 거 보고 곧장 업어다 이리로 데리고 왔다. 얼음장 같이 차고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조렸는지 모른다. 이 남자분이 혈압도 재고 체온 재고, 주사도 놓아주었다.” 칠숙이 안도의 숨을 쉬며 “의사 선상님이 아니었이믄 진즉에 객사(客死)당했다 카이.” 연심의 처지를 알지 못한 채 볼멘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 옆에 앉은 정호를 보고는 연심이 돌아눕는다. 덩달아 링거 주사줄이-정맥주사였다-연심의 편으로 팽팽하게 기울어졌다. 야속하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차에 치여 죽었더라면, 약을 먹고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더구나 정호가 있음으로 인해 치부를 드러낸 것만 같아 창피함을 느꼈기에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호의 얼굴은 서서히 험악해진다. 남녀가 서로 서늘한 태도로 간극(間隙)을 벌이는 사이 칠숙은 머쓱해하며 자리를 뜬다. 정호는 정호대로 연심은 연심이대로 오해만 더해갔다. “가주세요, 제발.” 사시나무 떨 듯 목소리는 나왔지만, 흐느끼는 연심의 목소리였다. “연심이.” 속삭이듯 정호는 화를 참으며, 억누르며 애써 다정스레 말하고 연심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때 “저 이혼했어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서 연심은 울분을 토했다. 갑작스런 반응에 정호는 의아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저는 오빠의 그 깊이 모를 사랑 때문에 졸지에 오해받고, 남편한테 구박받고 내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서 나를 못살게 굴었어요. 아버지는 그걸 바라보시면서도 내색 안하시고 하시더니 부산 근처에 잠시 가시다가, 거기에서 노숙하신 모양예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말예요. 때마침 그곳에서 칠숙이 남편이 용무를 마치고 오는 찰나에 아버지를 보고는 부산에 데려다 이곳에 지내도록 하셨지만 건강이 나빠지신 것 같아 병원에 같이 갔드랬어요. 그러면서 병원에서 간암(肝癌) 말기 진단이 내려졌고 시한부(時限附) 선고 받으신 채 목숨을 근근이 이어가시다가 그만.” 묵묵히 제 말을 하는 연심의 곁에서 정호는 할말을 잃는다. “근심으로 고생하시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서울에 다시 돌아가도 반기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들 내게 다른 사람과 바람난 여자라고 손가락질할 거고, 나는 부모 형제 없이요. 나 어떡하면 좋아요.” 흐느끼는 연심을 자신의 품에 안아보는 정호는 자신의 진심 어린 사랑이 오히려 독(毒)이 되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날 연심의 아버지 빈소에 찾는 사람들을 묵묵히 맞이하고 있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정호는 서울로 향했다. 연심의 아버지 삼일장(三日葬)을 엄수하여 치른 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의 거처를 어떻게 수소문했는지 모르지만 발신인은 은실이였고, 그 편지내용을 보기 위해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펼쳐든 연심은 깜짝 놀랐다. 장준창 씨 생명이 위독합니다. 보시는 대로 서울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으로 와주십시오. 뜻밖의 편지였다. 연심이의 눈동자는 흔들린다. 연심이 눈동자도 덩달아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린다. 연심이 마음도 덩달아 물결 한가운데에 출렁이는 나룻배 하나와 같음을 느낀다. 연심은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간간이 어둠을 뚫고 비치는 자그마한 불빛이 새나오는 창가를 바라본다. 아, 한숨소리를 얕게 뱉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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